2018년 6월 28일 목요일
[무협] 강호무정 제21장 탈출(脫出) - 검궁인
제21장 탈출(脫出)
①
탈출은 쉽지 않았다. 일단 철주부가 있는 내향에서 최소한 백 리(百里)는 벗어나야 안심할 수 있었다. 더구나 더이상 시일을 끌 수 없었다.
마침내 장하영 일행은 출발했다.
비록 소림의 대환단을 복용시켰다고 하지만 장천림의 상세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약효가 퍼지기까지 적어도 수 일은 필요했다. 그것은 백유성에게 심장을 다친 여파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 명의 병자를 데리고 출발했다. 장천림 외에도 참회객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었다.
참회객은 스스로 입힌 상처가 너무도 깊었다. 그는 대환단을 자신이 복용하지 않았으므로 상세가 악화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장하영 일행은 할 수 없이 한 대의 마차를 빌렸다.
장천림은 만삭에 가까운 임부(妊婦)로 변장시켰다. 그것은 조천백의 기술이 아니면 불가능한 고도의 역용술이었다.
북리웅풍은 해소병이 걸린 팔순의 늙은이로 변장시켰다. 석회림은 마부가 되었으며 장하영은 농사꾼, 조천백은 그와 비슷하게 닮은 형제지간으로 역용했다.
그들은 전형적인 농부집안 사람들로 화전(火田)을 일구기 위해 타지로 떠나는 것으로 꾸몄다.
무림맹의 검문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불과 한 마장도 가지 못해 그들은 조사를 당해야 했으며, 가는 곳마다 감시의 눈길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은 여러 차례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장하영의 임기응변이 주효했다. 이들은 먹고 살기가 고달픈 화전민이었고, 화전을 새로이 일구기 위해 만삭이 된 임부 아내를 데리고 해소병에 걸린 노인과 함께 형제가 타지로 떠나는 것이다.
이런 외형은 사람들에게 동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처음 사흘 간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들은 결국 정체를 발각당하고 말았다.
내향에서 오십 리쯤 떨어진 곳에서 다시 검문을 당했다.
"임신 몇 개월인가?"
염소 수염의 중년인이 마차 안의 휘장을 들춰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장하영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해, 해산달이 가까워 옵니다요."
"그래?"
중년인은 눈을 번뜩이며 마차 안을 둘러 보았다. 안에는 일가족으로 보이는 네 명이 있었다.
임신부로 보이는 얼굴이 검은 여인이 하나, 팔순이 넘어 보이는 병든 늙은이 한 명, 그리고 얼굴이 닮은 형제 농삿꾼이 두 명이었다.
중년인은 임부를 바라 보았다. 임부는 눈을 꼭 감고 잠든 듯 했다. 문득 그는 음침하게 말했다.
"내가 맥을 짚을 줄 아니 아기가 건강한 지 살펴 주지."
장하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 자가 진짜 의원이라면 맥을 짚는 순간 가짜라는 것을 알아 챌 것이다.'
그러나 장하영은 침착했다. 그는 황송한 듯 말했다.
"고, 고맙습니다요. 그럼 부탁 드립니다요."
중년인은 마차 밖에서 손을 뻗어 임신부의 팔목을 잡았다. 한편 마부석에는 석회림이 앉아 있었다. 석회림은 주변을 둘러 보았다.
중년인은 네 명의 수하들을 대동하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한 번에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진다.'
이때였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마차 안으로 반쯤 몸을 들이 밀었던 중년인이 뒤로 물러났다. 그의 팔뚝이 댕겅 잘린 채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회림!'
장하영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석회림은 차갑게 말했다.
"알았네!"
슈욱! 슈슈슉!
장하영이 팔을 떨치자 수십 개의 철정(鐵釘)이 날아갔다. 그것은 하나같이 극독이 발라진 것으로 몸에 적중되면 일 각 안에 숨이 끊어지는 무서운 암기였다.
"으악!"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네 명의 무림맹 무사들은 미처 수비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철정을 맞고 거꾸러졌다.
"가자!"
히히히힝!
요란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내달렸다.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마차는 관도를 질주해 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정체는 노출되었고, 무림맹 산하의 무사들은 속속 연락을 받고 추적대를 결성했다.
가는 곳마다 가로막는 자들이 구름처럼 늘어만 갔다. 이제 장하영 일행은 정면돌파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②
두두두두......!
마차는 전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잡아라!"
무림맹의 인물들은 벌떼처럼 달려 들었다. 석회림은 마차의 지붕 위로 올라가 뒤쫓는 인물들을 향해 자신이 특수하게 제조한 화탄을 던졌다.
콰쾅......! 펑! 펑!
"으아악!"
비명과 비명.......
혈전은 계속 이어졌다. 일행이 달아나는 길은 그야말로 혈로(血路)였다. 수많은 시체들이 마차의 뒤에 남겨졌다.
그러나 이런 식의 탈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은 사로잡히거나 저지당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들은 마차를 끌고 있었으며, 마차 안에는 장천림과 북리웅풍이 누워 있었다. 만일 개개인이 모두 문제가 없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으나 중상을 입은 두 명의 인물은 자구의 능력이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무림맹의 인물들이 던진 암기와 궁노에 의해 그만 두 마리의 말이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무림맹의 수십 명 고수들에게 포위될 수밖에 없었다.
삽시간에 수십 명의 고수들이 마차를 포위했다.
장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이곳이 우리의 무덤이 될 모양이군."
아닌 게 아니라 달아날 길이라곤 없었다. 수십 명의 군웅들은 무서운 살기를 띈 채 좁혀들고 있었다.
"까짓 것, 이쯤에서 산화한다 해도 아쉬울 것은 없네!"
조천백이 비장하게 말하며 지붕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조천백은 평소에는 둔중한 느낌을 주는 인상이었으나 지금만큼은 두 눈에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장하영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천백. 생각 나나? 혈명단에서 탈출할 때 말이야."
그 말에 조천백은 하하! 웃었다.
"하긴 그때에 비하면 오늘은 훨씬 부드러운 편이지. 날씨도 좋고 말이야."
조천백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청명한 하늘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멀리 새떼가 날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장하영은 군웅들이 거리를 좁혀오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각자 한 다섯 놈쯤만 동행하고 지옥으로 가면 큰 손해는 아니겠지?"
조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흘흘! 천림 몫까지 치면 몇 놈 더 데리고 가야지."
"그럴까?"
장하영은 단단히 손에 쥔 구환도(九環刀)를 움켜 쥐었다. 무림맹도에게 빼앗은 병기였다.
이때였다. 그들의 귓전에 한 가닥 기진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의 일은 나에게 맡기시오......."
"......!"
그 음성은 마차 안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마차 안. 이제까지 죽은 듯이 누워 있던 북리웅풍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마부석으로 힘겹게 빠져 나왔다.
그가 나서자 석회림, 장하영, 조천백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제 내가 나서야 할 때가 온 것 같소......."
북리웅풍의 눈에서는 이상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하영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북리웅풍에 대해 강한 의혹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아주 비장한 것이었다. 마지막 결심을 한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눈빛이었다. 장하영은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장하영의 질문은 엉뚱한 것이었다. 이 상황에 그런 질문을 하다니.
그러나 석회림이나 조천백도 그 사실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삼인의 눈은 일제히 북리웅풍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북리웅풍은 해소병이 걸린 늙은이로 변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안색이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비감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삼인을 바라보지 않고 품에서 금어령을 꺼냈다. 그것은 장천림이 철주부로 들어갈 때 사용했던 것이었다.
"......?"
삼인이 의아해 하는 가운데 그는 금어령을 움켜쥐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나의 정체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실 것이오."
"......."
삼인은 침을 삼켰다. 그들은 포위된 상태였으나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다른 아무 것도 중요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 금어령은 무림맹에서 오직 열여섯 개밖에 없는 신물이오. 이것은 각 파, 즉 십육 대 문파에 하나씩밖에 돌아가지 않은 것으로 이 금어령은 화산파(華山派)의 것이오."
"......!"
삼인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화산파라면......!"
장하영의 눈동자에는 경악이 어렸다. 그는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귀하는......?"
북리웅풍은 담담히 말했다.
"그렇소. 나는 천인검 북리웅풍이오."
"......!"
충격이었다. 삼인은 너무나 놀라 입을 벌렸다. 그러나 북리웅풍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중에 전해 주시오. 그 소녀에게 미안할 뿐 아니라...... 장형에게는 죽을 죄를 지었다고......."
그는 삼인이 경악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보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는 본래 네 마리의 말이 모는 사두마차였으나 지금은 두 마리가 죽었으므로 쌍두마차였다. 북리웅풍은 죽은 말을 마차에서 분리해 냈다.
"내가 길을 뚫는 즉시 마차를 모시오. 최대한으로 추적을 막아 보겠소이다."
"......."
세 사람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북리웅풍이 설마 강호사공자 중의 한 명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북리웅풍은 마차에서 내리더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앞에는 백여 명에 가까운 무림맹 군웅들이 있었다.
그는 음성을 돋우더니 군웅들을 향해 외쳤다.
"소생은 북리웅풍이오! 여러분이 이 금어령을 안다면 길을 비켜 주시오!"
북리웅풍은 금빛 찬란한 물고기 모양의 신물을 번쩍 들어 올렸다.
마차를 둘러싼 군웅들은 웅성거렸다. 그들은 느닷없이 한 명의 늙은이가 나와 금빛 물고기 신물을 들어 올리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금어령은 무림맹 인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듯 했다. 이때 군웅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당신이 정말 북리대협이시오?"
북리웅풍은 담담히 말했다.
"그렇소. 아니라면 금어령을 어찌 가지고 있을 수 있겠소?"
그 말에 중인들은 모두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였다.
"거짓이오! 백유성 대협을 죽인 흉수도 금어령을 갖고 있었소! 저 자는 가짜요!"
그의 말이 끝나자 군웅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그렇소! 저 자는 가짜일 것이오!"
"시간 끌 것 없소! 공격합시다!"
군웅들은 일제히 그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핫......!"
문득 북리웅풍은 앙천광소를 터뜨리더니 신형을 날렸다. 그는 다짜고짜로 한 무사의 검을 빼앗더니 눈부신 검광을 날렸다.
"으아악......!"
단숨에 네 명의 무사들이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북리웅풍은 전광석화같은 신법으로 무리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그는 생명을 포기하고 있었다.
군웅들 속으로 뛰어든 그는 온 몸에 수십 자루의 칼이 닿는 것을 느끼며 검을 휘둘렀다.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그가 야차(夜叉)처럼 날뛰자 포위망의 한 쪽에 틈이 생겼다.
"가자!"
장하영이 박차를 가했다.
히히히히힝!
두 마리의 말이 앞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힘차게 앞으로 내달렸다. 그 바람에 마차는 덜컹! 하고 흔들렸다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앗! 달아난다!"
"막아라!"
군웅들이 앞을 막으려 했으나 석회림이 뿌린 우박같은 암기 세례를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마차는 마침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차에 탄 삼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뒤쪽에서 처절한 비명과 아우성을 들었다.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한 젊은 영웅이 숭고한 희생(犧牲)을 치르며 산화(散花)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③
홍무(洪武) 15년 11월.
개봉부 교외.
작은 야산을 끼고 두 채의 모옥이 있다. 모옥의 주변에는 약전(藥田)이 있었는데 약전에는 갖가지 약초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돌보는 사람이 없었던지 약초들은 제멋대로 자라거나 시들어 있었다.
모옥의 벽에는 약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이곳은 의원의 집인 듯 했다. 그런데 방 안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
삼인(三人).
그들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침중한 표정들이었다. 문득 누군가 입을 열었다.
"천림. 이제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입을 연 사람은 바로 조천백이었다. 그렇다. 이곳은 석회림의 집이었으며 방 안에 모여있는 사람은 장천림, 장하영, 조천백 등이었다.
조천백의 말에 장천림은 음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글쎄....... 당분간은 여기저기 떠돌면서 머리나 식힐까 하네만......."
그는 극적으로 내향을 빠져나온 후 서서히 체력을 회복했다. 그후 동료들에게 북리웅풍의 희생으로 탈출하게 된 경위를 들었다. 그 얘기를 듣고 그는 허탈감을 금치 못했다.
북리웅풍이 스스로 죄책감을 보상한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어쨌든 강호사공자의 마지막 일인이었던 그가 죽은 이상 복수할 대상이 없어지고 말았다.
백가소를 죽음으로 이끈 자들은 이제 모두 저승으로 갔다.
장천림은 막막한 기분이었다. 초긴장 상태로 살아온 복수행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대상을 잃은 지금 전신에 맥이 빠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 백제성의 금문장으로 돌아가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왠지 이제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물론 그에게도 한 가지 미련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철주부에 있는 망아였다.
'망아.......'
그녀를 떠올리자 그는 가슴이 쓰라리면서도 한 가닥 달콤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언제고 그는 망아와 다시 만날 것이다. 다만 아직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동안 그는 유람이나 다닐까 하고 생각했다.
"......."
중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장천림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장천림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화제를 돌렸다. 그는 장하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할 셈인가......?"
장하영은 씨익 웃었다.
"훗훗! 나야말로 정말 마땅치가 않군. 황궁의 병졸 노릇도 이젠 신물이 났고....... 어떤가? 천림 자네가 귀찮아 하지만 않는다면 자네의 병졸 노릇을 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말하자면 장천림과 함께 있겠다는 뜻이다. 그 말에 모두들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이때였다. 문득 생각난 듯 조천백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 집의 주인인 회림은 어디 갔지?"
그렇다. 정작 주인인 석회림이 없었다. 그 말에 장천림의 표정이 우울하게 변했다. 그는 지금 석회림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석회림은 무덤 앞에 앉아 있었다.
이 무덤은 그의 아내의 무덤이었다. 본래 그의 아내는 매우 병약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장천림을 돕기 위해 아내를 집에 두고 떠났던 것이다.
그의 아내는 체질적으로 병약해서 항상 그가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가 떠나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병이 심화되어 죽고 만 것이었다.
"미안하오....... 정영(鄭英)."
정영은 그의 아내의 이름이었다. 석회림은 사나이다. 사나이기에 아내의 건강이 극도로 나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장천림을 따라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끝난 지금 그는 다시 돌아와 아내의 무덤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는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정영....... 나같이 무정한 사내를 만나서 당신이 명을 다하지 못했구려. 내...... 이제는 당신의 곁을 떠나지 않겠소. 영원히...... 당신을 지켜주겠소."
이때였다. 말없이 그의 옆에 와 앉는 인물이 있었다.
"천림......."
장천림이었다. 그는 석회림이 자신 때문에 아내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무덤을 향해 절을 했다. 석회림은 소매로 눈물을 쓱 훔친 다음 말했다.
"하하......! 천림. 이제는 후련하겠지? 모든 일이 끝났으니 말이야."
장천림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나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할 수만 있다면 무엇으로든 보상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보상을 받을 석회림 또한 아니지 않는가.
"회림......."
그는 그저 석회림의 손을 굳게 잡을 뿐이었다. 그러나 석회림은 언제 눈물을 흘렸더냐 싶게 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하하하하! 천림! 우리는 좋은 친구야! 그렇지 않은가?"
"......."
장천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혈명단에서 생사를 함께 해온 이들이기에 그들 사이에 더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던 것이다.
세월여류(歲月如流).
세월은 물처럼 흐른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었다.
설혹 파란만장한 일이 어떤 한 인간에게 얽혀 있다고 해도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은 망각이라는 늪으로 잠겨버리고 만다.
철주부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혈풍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세인들의 뇌리에서 점차 멀어져가고 있었다. 다만 강호사공자의 죽음만이 무림인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의혹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만일 그 이후로도 강호사공자를 죽인 흉수들이 무림에 횡행했다면 물론 무림은 더욱 시끄러웠을 테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호는 잠잠해졌다. 강호사공자가 죽은 후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림인들은 비록 흉수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대부분 다행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혈풍(血風)은 가라앉았다.
무림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가공했던 기억도 잊혀져 가고 사람들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눈이 내리고 있었다.
중원에 겨울이 온 것이다. 유난히도 많은 눈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인간의 온갖 추악함을 덮어 주려는 듯 흰 눈이 대지를 온통 뒤덮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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