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강호무정 제11장 참회객(懺悔客)이라 불러다오 - 검궁인
제11장 참회객(懺悔客)이라 불러다오
①
홍무(洪武) 15년 1월 19일.
휘이이이잉!
강상(江上)에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강물은 군데군데 결빙되어 있기도 했으나 그래도 얼음을 깨며 도강하는 선박이 있었다.
"............."
두 사람은 동행이 되었다. 서로가 마음 속으로 비슷한 사람이라 여기는 까닭인지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조천백과 백리진강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걷다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룻터가 가까워진 것이다.
강을 건너려면 배를 이용하는 편이 편리할 것이다. 뜻이 통한 것일까?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란히 나룻터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막 나룻터에 당도한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일곱 명의 무사들이 검을 휘두르며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이름과 출신을 밝혀라! 우리는 당가보의 무사들이다!"
사나운 안광을 번쩍이며 오래 전부터 도강하는 사람들을 심문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당수문이 살해된 이후 부근 수백 리 일대에 쫙 깔린 당가보의 무사들이었다.
"......."
백리진강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죽립 사이로 칼날보다 매서운 살광이 번뜩였다. 여차직하면 살수를 뻗을 자세였다.
그러나 조천백의 반응은 그보다 빨랐다.
"헤헤헤! 나리들. 저희들은 장삿꾼들로 이번에 가는 목적은......."
조천백은 강호 사정에 훤했기에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기고자 했다. 그러나 백리진강이 산통을 깼다.
그는 조천백이 은연중 옷자락을 잡아 당기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잔뜩 굳은 자세로 호전적인 눈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무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수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조천백은 몰라도 죽립을 쓴 백리진강 만은 도저히 상인으로 볼 수 없는 분위기를 노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후후......! 거짓말 마라! 어서 병기를 버리고...... 으아악!"
말을 하던 작자는 가슴에 손자국이 찍힘과 동시에 피를 뿌리며 강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나머지 육인의 무사들은 상황이 급박함을 느끼고 재빨리 검을 휘두르며 공격했다. 그러나 백리진강은 신형을 야차처럼 날렸다.
우우웅!
그의 손바닥이 한 차례 호선을 그리는 순간 손바닥 한가운데서 투명한 빛이 뻗었다. 그 투명함 속에는 언뜻 혈광이 뻗치고 있었다.
조천백은 보았다. 그는 백리진강의 장심 한가운데 혈옥의 반점이 맺힌 것을 보았다. 그는 놀라 내심 부르짖었다.
'저것은...... 전설의 소수혈옥공!'
그가 아찔하여 신형을 흔드는 가운데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으아아악!"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살아있는 자는 없었다. 칠인의 무사들이 모두 시신이 되어 강물에 처박힌 것이었다.
"......!"
조천백은 몸을 으스스 떨었다. 가슴이 마구 진동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 백리진강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죽립 사이로 푸릇푸릇한 살광을 흘린 채 서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나오고 있었다.
조천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이 상황을 본 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그는 재빨리 백리진강의 소매를 잡고 신형을 날렸다.
"가세!"
백리진강은 흠칫했으나 묻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관제묘(關帝廟).
다 낡아빠진 지붕 사이로 드문드문 별빛이 보이고 있었다.
사당 안에는 두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바로 조천백과 백리진강이었다.
조천백은 몇 번이나 뛰쳐나가려는 백리진강을 달래어 간신히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잘못하면 인근에 깔린 무림맹의 고수들에게 협공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는 이미 일대는 물론이려니와 전 중원에 삼엄한 경계망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아무리 백리진강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한 손으로 수 만의 손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
백리진강은 말없이 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천백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가 혹시 근간에 이름을 떨치는 백색마인(百色魔人)이 아닌가......?"
백리진강은 그를 바라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억양없는 음성으로 덧붙였다.
"나는 그런 이름을 가지려 한 적이 없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오."
순간 조천백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맙소사....... 설마 했더니......!"
"왜......? 두렵소?"
백리진강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조천백은 툴툴 웃으며 말했다.
"두렵냐고? 큭큭! 그건 날 모르는 소리야.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귀신이지 자네와 같은 산 사람이 아닐세. 그러나 약간 떨리는 것은 사실이야. 왜냐면 자네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네가 몰고 다니는 혈풍이 두려운 게야."
"......."
조천백. 그의 음성에는 왠지 애잔함이 배어 있었다. 그것을 백리진강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림맹과는 무슨 원한이 있길래 그토록 무차별 살상을 하는 건가?"
"......."
백리진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천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네. 하긴 내가 알아야 무슨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어쩌면 두 놈이 하나같이 같을까."
"......?"
백리진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천백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 인물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신과 같은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 점이 궁금했다. 왠지 마음을 강하게 잡아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의문의 눈으로 조천백을 바라보자 조천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닐세. 내가 아는 어떤 인물이 자네와 비슷해서 하는 말이야. 그 놈도 자네처럼 무서운 적을 두었으면서도 정작 그 이유를 밝히려 들지 않거든......."
백리진강은 눈길을 허공으로 돌렸다. 그는 내심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말이오.......
설마하니 나보다 더하겠소?
그는 문득 몸을 일으켰다. 조천백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어디로 가는가?"
백리진강은 담담히 말했다.
"나 때문에 당신까지 위험할 필요는 없소. 그 동안은 고마웠소. 그럼......."
막 나가려는 백리진강을 조천백이 가로 막았다. 그는 나직히 꾸짖었다.
"왜 이렇게 날뛰나? 지금 자네 혼자 밖으로 나가면 당장 지옥행이야!"
그 말에 백리진강은 코웃음을 쳤다.
"흥! 누가 지옥으로 갈 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오."
"쯧쯧....... 철이 없기는......!"
조천백은 억지로 그를 끌어다 앉혔다.
"무림맹을 얕보는 것은 좋지 않네. 아무리 자네의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목이 열 개가 아닌 이상 신중해야 하네."
기이한 일이었다. 백색마인이 누구인가?
그는 무림의 살인마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조천백에게 살인마로 행세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찌보면 다정한 사형제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천백은 엄숙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복수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네. 물론 자네의 실력이라면 누구와 싸워도 밀리지는 않겠지만 언제까지나 졸개들을 죽이다가 힘을 허비할 수없지 않은가? 한 번 물어봄세. 지금까지 진정한 원수들을 만나보기나 했는가?"
"......."
그 말에 백리진강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이제까지 숱한 무림맹의 졸개들 만을 죽였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아무리 죽여봐도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차라리 무림맹의 요인 하나를 죽이는 것만 같지 않은 것이다.
조천백은 그를 자리에 앉힌 후 차분한 어조로 설득했다.
"이보게. 움직이려면 효과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복수의 대상을 정했다면 차근차근 행동해야 하네.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부터 연구하세."
"......."
"나룻터에서 쓸데없이 살인을 하는 바람에 이 일대는 천라지망이 되어 있을 걸세.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간 뒤 다음 일을 생각해야 하네."
백리진강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네의 무공이나 능력은 나보다 뛰어난 지는 몰라도 강호의 경험에 있어서는 내가 자네의 조상뻘일세. 당분간은 나와 동행하면서 내 말을 듣는 것이 나을 걸세. 허허....... 지금부터 내가 자네의 형(兄)이 되는 걸세. 어떤가?"
"......."
백리진강은 역시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조천백에게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이제까지 혼자서만 해왔던 일들이 그를 만나자 비로소 체계가 잡혀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자, 이제부터는 철저히 나의 명을 따라야 하네. 그런 다음에는 자네 마음대로 하게. 어쨌든 나도 당분간은 자네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게 되었네."
백리진강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고맙소......."
한 마디였으나 그 말 속에는 깊은 감동이 들어 있다는 것을 조천백은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백리진강같은 인간의 심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②
"당대협의 살해범으로 보이는 자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백유성은 하마터면 찻잔을 떨굴 뻔 했다.
"어디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그가 있는 곳은 당가보였다. 강호제일검 백유성은 당수문의 살해범을 잡기 위해 임시로 이곳에 추적대의 본부를 설치한 것이다.
사실 그는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강호사공자 가운데 벌써 이인이 죽은 것이다.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당수문의 시신과 상관중의 암장됐던 시신을 관찰한 결과 마음 속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다만 그는 설마설마하고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떠오르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두려움은 더해만 가고 있었다. 그는 내심의 갈등에 휩싸여 그동안 괴로움을 겪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수없이 부인하고 또 부인했지만 마음 속으로 떠오르는 예감은 점점 더 현실감으로 닥쳐오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당수문과 상관중의 살해범을 잡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는 추적대를 구성했으며 전 심력(心力)을 쏟고 있었다. 당가보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벽에 당가보를 중심으로 한 지도를 걸어놓은 일이었다.
그의 수하들은 당가보 주변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매 시진마다 그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으며 시시각각 그의 지시가 하달되고 있었다.
백유성은 무강의 속가 출신으로 무공은 물론 지략에 있어서 타인의 추종을 불허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볼 때 그는 무공보다 지략으로 더욱 알려져 있었다.
그에게 새제갈(賽諸葛)이란 또 하나의 별호가 있다는 것이 그 사실을 은연중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가 나선 이상 무림맹에서는 조만간에 흉수가 잡힐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백유성은 무림맹의 여망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흉수를 잡아야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오직 그 자신 만이 알고 있었다.
만일 흉수가 그의 짐작대로이며 다른 자의 손에 잡히게 된다면....... 그는 물론 강호사공자의 영명은 완전히 땅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하는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보고했다.
"놈은 무협(巫峽) 부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심문하는 우리측 인원을 일곱 명이나 살해하고 서릉협 부근으로 달아났습니다. 현재 추적중입니다."
백유성의 준미한 눈썹이 꿈틀 일어섰다.
"알았다. 전 병력을 출동시켜라. 그리고 수시로 보고하라."
백유성은 수하가 물러간 뒤 벽으로 다가가 지도에 표시했다. 지도에는 무협과 서릉협을 연결했으며 그 주변 삼백 리 일대에 동그란 원을 그렸다.
그는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일에 자신의 앞날이 걸려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지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두려워한 자는 현 무림에서 북리웅풍 뿐이다. 그런데 그도 출동을 했다고 하는데...... 어째서 소식이 없을까?"
그는 식어빠진 찻잔을 들었다. 문득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후회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 그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을......."
그의 미간은 깊은 골로 패이고 있었다.
③
장하영은 이미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당수문을 죽인 직후 그들은 각자 헤어졌다. 당가보의 경비가 너무나 삼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작 서릉협까지밖에 오지 못했다.
"벌써 이레째다. 아직도 추적을 떨구지 못했으니......."
그는 잠시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만일 환영팔신이 곁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고전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황궁의 인물이니 이 일에 끌어들일 수는 없지."
그는 잠깐 후회했다.
"그때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곤경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을......."
쓸데없는 일이란 이레 전 산길에서 한 여인을 구한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추적한다는 명분으로 사방으로 퍼져있던 무림맹 산하의 몇몇 하급무사들은 곳곳에서 양민을 괴롭히고 있었다.
개중 몇 놈이 양가집의 아낙을 겁탈하려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뛰어들어 그들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흔적을 남기게 되어 그만 쫓김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비록 그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중얼거렸으나 협의를 생명처럼 여기던 그로서는 차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 해도 역시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행적이 노출되자 불행히도 추적은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더욱이 그는 조천백이나 석회림처럼 변장술이나 은둔술을 익힌 적이 없었다. 따라서 꼬리를 밟히게 되자 여간해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하영은 일부러 길을 우회하고 있었다.
장천림이나 석회림, 조천백 등을 보호하기 위해 무림맹의 추적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가 향하는 곳은 서릉협 쪽이었다. 사실 그 방향은 더욱 위험한 길이었다. 서릉협은 막다른 길이었다.
그러나 그가 믿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는 손을 품 속에 넣어 한 알의 단약을 만졌다.
그것은 독단(毒丹)으로 만일의 경우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즉시 삼킬 작정이었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동료들이 생로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도 가치있는 일이 아닌가?
그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저 놈이다!"
"쳐라!"
슈슈슉---!
돌연 숲 속으로부터 빗발치듯 암기가 쏟아져 나왔다. 장하영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무림맹의 고수들 십여 명이 매복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그의 앞길을 예상하고 포진한 것이었다.
'좋다! 오늘은 살계를 크게 열어볼까?'
장하영은 찬 바람을 한 모금 들이 마신 후 서슴없이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검이 춤을 추었다.
츠파아아아앗!
"으아아악!"
그의 검술은 혈명단에서 바탕이 되어 있는데다 황궁의 비전무학까지 익혀 절륜하기 그지 없었다. 단숨에 십인의 무사들을 해치운 후 다시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몇 마장 가기도 전에 사방으로부터 향전(響箭)이 쏘아지는 것을 느끼며 이미 출로가 막혔음을 느꼈다.
"빌어먹을...... 이곳이 끝인가?"
이젠 더이상 달아날 곳이 없었다. 장하영은 향전이 점차 가깝게 울리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완전히 포위되었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수많은 인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당가보의 인물들은 물론 백색무복을 입은 무림맹 고유의 복장을 한 무사들로 언뜻 보기에도 수백 명 이상이었다.
어느 쪽을 둘러보아도 물 샐 틈없는 포위망이 그물처럼 펼쳐져 있었다.
"빌어먹을......! 많이도 동원되었군!"
그는 수중의 검을 내려다 보았다. 이미 여러 차례의 전투로 인해 이가 빠지고 피가 얼룩져 있었다. 장하영은 쿡쿡 웃음을 흘렸다.
"쿡! 혈명단에서 탈출할 때를 빼고는 처음으로 네가 고생하는구나."
그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 보았다. 수백 명의 무림맹 산하 무사들이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차아아아앗!"
그는 신형을 떠올렸고, 곧이어 검과 몸이 하나가 된 채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천잔구검(天殘九劍)!"
"유성난월(流星亂月)!"
"팔방풍노(八方風努)!"
"지옥파천(地獄破天)!"
번쩍......! 쐐애애애액!
그의 손에서 가공할 검학들이 펼쳐졌다.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수급이 떠오르고 피보라가 일어났다. 장하영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검을 떨치고 있었다.
전신이 피로 젖는 것도, 상대에게서 뿜어져 나온 피보라에 얼굴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는 꿈결같이 몽롱한 기분을 느끼며 싸우고 또 싸웠다.
아니...... 베고...... 또 베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상대방의 인원은 더욱 많아질 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진기가 고갈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점점 검의 위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 각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장하영은 마음 속으로 비장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후! 나 장하영의 생도 여기서 마감을 하는가 보군.'
그런데 이때였다.
퍼엉!
돌연 폭음이 울림과 동시에 사방이 갑자기 자욱한 연막으로 덮이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시야가 자욱한 연막으로 가려져 버렸다.
그것은 장하영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는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으악!"
"아악! 기습이다!"
연막으로 사방의 시야가 차단된 가운데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장하영은 몹시 뜻밖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자신을 도울 원군이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원군이 올 리가 없었다. 어쨌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는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④
장하영은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을 들으며 옛날 생각에 젖었다. 그것은 혈명단에서 탈출할 때 들었던 함성과 비슷한 것이었다.
동굴 안이었다.
동굴의 입구를 커다란 바위로 막아 놓았으므로 여간해서는 밖에서는 안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
그는 동굴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연이은 전투로 손가락 하나 들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벽에는 화섭자가 희뿌연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 아래 맞은 편에는 자신을 구해준 복면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옷도 피에 젖어 있었다. 그 못지않게 복면인도 악전고투를 치룬 것이었다.
"후후후훗......."
장하영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있었다.
"......?"
복면 사이로 뚫린 정체불명인의 두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궁금한 듯 물었다.
"왜 웃는 것이오?"
그의 질문에 장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후훗!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면 믿겠소? 그런데 대체 당신은 누구요?"
복면인은 고개를 저었다. 기이하게도 그의 눈에는 한 가닥 고통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장하영은 더욱 의문을 느꼈다. 그는 복면인의 무공이 무척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정체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이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혈명단 이후 줄곧 황궁에서만 기거했다. 따라서 강호초출이나 다름없는 몸이었다.
그러므로 강호에서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그를 이유없이, 그것도 생명을 내걸며 도와줄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였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지금 그는 눈 앞에 있는 복면인이 아니었다면 무림맹 산하 고수들에 의해 천참만륙되어 뒹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 이상하군. 날 구한 이유라도 있어야 될 것이 아닌가?'
장하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튼 세상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이런 일도 있을 줄이야.......'
이때 침묵에 잠겨 있던 복면인이 물었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소?"
"물어 보시구료. 후후....... 어쨌든 당신은 이 장하영의 구명은인이니 내가 아는 것은 모두 대답하겠소."
복면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당신이 상관중과 당수문을 죽였소?"
장하영은 흠칫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소."
"이유는?"
복면인의 음성이 나직하게 떨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하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오."
"모른다니........?"
복면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장하영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훗! 왜냐면 내 친구의 일이기 때문이오. 나는 그 친구에게 빚진 것이 있어 그를 도왔을 뿐이오."
그 말에 복면인은 몸을 떨었다.
"친구? 그럼 그가 무엇 때문에 당수문과 상관중을 죽였는지도 모른단 말이오?"
장하영은 복면인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그건 나도 궁금한 점이오. 하지만 그는 얘기하지 않았소. 그가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길래 나 역시 묻지 않았소."
복면인의 눈빛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유도 모르면서 생명을 내건 도박에 뛰어 들었단 말이오?"
"하하하하핫!"
문득 장하영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가 갑자기 웃는 바람에 복면인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장하영은 웃음을 뚝 그치며 말했다.
"이해하지 못하겠소? 그는 나의 친구요."
간단한 말.
장하영의 그 말은 묘한 감동을 주었다. 복면인은 넋을 잃은 듯 잠시 말이 없다가 중얼거렸다.
"친구라......."
침묵.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복면인이었다.
"하긴 나에게도 친구가 있었지. 하지만 그들은......."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장하영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복면인에게 어떤 사연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내겐 구명지은을 베풀었소. 언젠가 은혜를 갚게 될 날이 오기를 바라겠소."
"당신의 친구는...... 진실하오?"
엉뚱한 질문이었다. 장하영은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곧 빙그레 웃었다.
"한 마디만 하겠소. 과거 그는 자신의 생명을 버려가면서 내 퇴로를 열어 주었소.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이 장하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오."
복면인은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면 그는...... 진정한 친구겠군."
"물론이오. 만일 그가 내 목을 원하다면 언제라도 목을 내놓을 용의가 있소."
"당신들은 행복하군."
복면인의 음성에는 회한이 묻어 있었다. 장하영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 자는 친구에게 배신이라도 당했단 말인가? 하긴 그렇다면 최소한 이 자보다 이 장하영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그는 복면인을 바라보다 부언했다.
"내 친구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소. 그러나 한 가지 짐작가는 것은 있었소. 그가 상관중과 당수문을 포함하여 강호사공자를 꼭 죽여야 할 이유는......"
"......!"
복면인은 충격을 받은 듯 진동했다. 그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물었다.
"그의 목표는 강호사공자 전원이오?"
"그렇소."
"왜? 무엇 때문이오?"
"그건...... 확실치는 않지만 한 여인 때문인 것 같았소."
"여인......!"
복면인의 눈이 커다란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혹시...... 그 여자란 백제성 부근에 살던 한 소녀를 말하는 것이 아니오.......?"
장하영은 의아했다. 그는 복면인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글쎄....... 거기까지는 모르겠소."
"......."
복면인은 눈을 감았다. 그의 가슴이 크게 기복을 그리는 것을 장하영은 볼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복면인은 품 속에서 한 장의 인피면구를 꺼내더니 내밀었다.
"이것을 얼굴에 쓰시오."
"......?"
복면인은 자신의 옷을 벗었다. 그는 겉옷 안에 또 한 벌의 옷을 받쳐입고 있었다.
"이 옷으로 갈아 입고 가시오. 그리고 만일 다시 쫓기게 된다면......"
복면인은 소매 속에서 영패 하나를 꺼냈다.
"이것을 보이시오. 그러면 위기를 몇 번은 넘길 수 있을 것이오."
"......?"
장하영은 더욱 의혹을 금치 못했다. 복면인이 준 영패를 본 순간 그는 더욱 놀랐다. 그것은 무림맹 내에서 중요한 신분을 가진 자 만이 소지할 수 있는 영패였던 것이다. 이런 것을 그가 어떻게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지 장하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쨌든 살고 볼 일이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고맙소. 친구.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겠소? 나 장하영은 빚을 지고는 살지 못하는 사람이오."
그러나 복면인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굳이 알고 싶다면...... 참회객(懺悔客)이라고 불러 주시오."
"참회객?"
장하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복면인, 즉 참회객은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장하영이 벗어놓은 옷을 걸쳤다.
"아니 뭐하는 것이오?"
장하영이 놀라 물었으나 참회객은 그를 향해 포권했다.
"그럼......."
그는 바위를 밀치고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
장하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참회객의 행동은 뻔한 것이었다. 그는 장하영의 옷을 입고 무림맹 고수들을 유인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생명을 내건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생면부지의 그를 위해 그런 모험을 하려는 참회객의 행동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왜?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하려고 하는지 그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때 그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고함과 비명이 들리는 것을 느꼈다.
장하영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휴우.......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군."
⑤
개봉(開封)을 빠져 나가는 관도(官道).
무사 복장의 인물들이 관도를 오가는 인물들을 일일이 조사하고 있었다.
한결같이 백색무복을 걸친 그들의 복장은 무림맹에 속한 무사들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십인 일조가 되어 날카로운 눈빛을 잠시도 쉬지 않고 행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중원 전역에 이같은 천라지망(天羅之網)이 펼쳐져 있었다. 관도상에는 거미줄같은 감시망이 펼쳐져 있어 무림인으로 보이는 자들은 너나없이 까다로운 조사를 받아야만 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무림은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강호사공자를 살해한 흉수와 백색마인을 척살하기 위한 무림령이 발동한 이후로 모든 것은 변했다.
강호도상에는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고 있었다. 혼자서 길을 가는 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개봉에서 뻗어나온 관도는 이 일대의 유일한 대도였다. 따라서 이곳에는 특히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었다.
문득 한 필의 말이 개봉부 쪽으로부터 달려오더니 멈추었다.
"아무 일도 없었느냐?"
마상의 인물은 사십대의 장한으로 무림맹 개봉지부의 지부장인 철혈객(鐵血客) 종리철(鍾里鐵)이란 자였다.
그는 마상에서 내리지 않은 채 경비하는 무사들에게 물었다.
"네! 별일 없습니다."
무사들은 바짝 긴장하여 대답했다.
"으음.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가 나타나면 놓쳐서는 안 된다."
"예! 염려 마십시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지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다만 조금 전 지나간 송장 한 구를 제외하고는......."
"응? 송장?"
종리철의 눈썹이 솟구쳤다. 그는 눈빛을 빛냈다. 그의 반응에 삼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무사는 급히 말했다.
"예, 염병에 걸려 죽은 시신이었습니다."
종리철은 눈을 번뜩이며 다그쳤다.
"확인해 봤느냐? 관을 열고 말이다."
무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관을 열 것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냥 수레에 거적으로 덮은 것이었으니까요. 거적을 들춰 보았는데 냄새가 어찌나 심하던지....... 전신에 고름투성이었습니다."
그 말에 종리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재차 물었다.
"흠! 운구하는 자는 조사해 보았나?"
종리철은 한 점의 이상이라도 발견하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묻고 있었다.
"네. 칠순도 훨씬 넘어 보이는 할망구였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이 장가도 못가고 죽었다면서 어찌나 구슬피 우는지......."
무사는 동정어린 표정을 지었다.
"음......."
종리철은 신음을 발했다. 그는 무사의 말에 조금도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으나 왠지 알 수 없는 느낌이 뒷머리를 짖누르는 기분이었다.
문득 그는 말채찍을 날리며 호통을 쳤다.
"알았다! 감시의 눈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두두두두---!
그는 이른 아침의 관도를 가로질러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렸다.
"......."
무사는 멍하니 그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리철이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그도 영 기분이 찜찜했던 것이다.
아침 바람이 제법 매섭게 분다.
관도는 텅 비어 있었다. 관도 위를 찌그러진 바퀴를 굴리며 천천히 움직이는 수레가 있었다. 수레 위에는 낡은 거적이 덮여져 있었다.
수레는 한 마리의 소가 끌고 있었는데 소를 모는 것은 칠순이 휠씬 넘어 보이는 노파였다. 눈자위가 짓무를 정도로 늙고 추한 노파로 허리도 잔뜩 구부러져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손도 갈고리처럼 굽고 주름이 져 있었다. 노파는 힘에 겨운 듯 이따금 기침을 하며 소를 몰았다.
기어이 노파는 견디지 못하겠는지 수레를 관도 한 옆으로 세우고 있었다.
"아이고! 이 불쌍한 놈아! 그렇게 가고 싶었던 장가도 못가고 죽다니...... 예끼! 이 괘씸한 놈, 이 불효막심한 놈같으니라구....... 늙은 에미보다 먼저 가는 놈이 어디 있느냐?"
노파의 통성이 관도를 비감하게 울렸다. 그런데 이때 노파의 귓전에 가느다란 전음이 들리고 있었다.
(아니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되오?)
노파는 움찔하더니 입술 안으로 우물거렸다.
(아직 멀었다. 오늘 저녁은 넘겨야 안심할 수 있단 말이야.......)
노파의 음성은 외부로 흘러 나오지 않았다. 전음입밀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거적 안의 인물은 시신이 아니었단 말인가?
거적 안에서 다시 전음이 전해왔다.
(왜 하필이면 염병걸려 죽은 시체 노릇을 시킨단 말이오? 죽어도 곱게 죽은 시신으로 할 것이지.......)
잔뜩 불만스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노파는 주먹으로 거적 위를 때렸다.
(시끄러워! 나는 뭐 좋아서 하는 일인줄 아느냐? 자네야 수레에 누워 편안히 잠이나 자도 되지만 난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냄새나는 할망구 노릇을 하고 있다구.)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두두두두----!
문득 뒤 쪽에서 급촉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왔다. 노파는 흠칫하더니 갑자기 어허엉하고 통곡을 터뜨렸다.
"아이고오오! 이 나쁜 자식아! 늙은이를 두고 먼저 가다니...... 이 나쁜 놈아!"
노파는 두 손으로 거적 위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거적 안에서 비명이 들렸다.
"아얏! 아니, 미쳤소?"
비명은 전음이 아니었다. 그러자 노파는 급히 전음으로 주의를 주었다.
(쉬잇! 또 누가 온다구!)
그제서야 거적은 조용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히히히힝!
힘찬 말울음 소리가 울리더니 먼지가 일어났다. 그러나 노파는 듣지 못한 듯 여전히 통곡을 하고 있었다.
마상 위에는 한 명의 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종리철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미심쩍어 급히 이곳까지 추적해 온 것이었다. 그는 마상에 앉은 채 노파를 뚫어져라 노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변장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사는 안전이 제일이었다. 별안간 그는 말 옆구리에 꽂아두었던 장창(長槍)을 뽑아 들더니 휘익 휘둘렀다.
"아이쿠우우!"
노파는 불시의 기습을 받고 창대에 맞아 저만큼 나가 뒹굴었다. 어찌나 충격이 세었던지 노파는 눈알을 까뒤집으며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
종리철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눈빛이 사나워지는 듯 싶더니 기척도 없이 다시 창을 날렸다.
그는 철저한 위인이었다. 설혹 실수로 양민을 죽이는 한은 있어도 천추의 한을 남길 일은 하지 않는 위인이었다.
'흐흐! 만일 위장했다면 후회할 것이다.'
그는 거적을 향해 창을 내리 꽂았다. 설사 시신을 꿰뚫는 한이 있어도 결코 후회할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푹---!
섬뜩한 소리가 났다. 긴 장창이 거침없이 거적 위를 찌른 것이었다.
"......!"
종리철은 손 끝에 전해지는 둔탁한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 사람을 찌른 감촉이었다. 거적 위로 시커먼 핏물이 번져 올랐다.
그러나 거적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비명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마침내 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신경과민이었나?'
그는 창을 뽑았다. 창 끝에는 역한 냄새와 함께 피가 묻어나왔다. 그는 창날을 거적에 문질러 닦은 후 미련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두두두두---!
그는 쏜살같이 오던 길로 달아났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길가에 쓰러져 있던 노파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이고오! 어떤 놈이 늙은이를...... 아이구 허리야!"
노파는 다시 수레를 기어 올라가 소를 몰기 시작했다. 수레는 덜컹거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얼마쯤 갔을까?
문득 거적 안 쪽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만일 당신의 말대로 죽은 개 한 마리를 안고 있지 않았더라면 탄로날 뻔 했소. 후후! 당신은 정말 놀라운 사람이오."
"히히! 그래서 다 강호의 경험이 무섭다는 것이야. 그러니 앞으로는 이 형님의 말을 무시하지 말라구."
이 두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관도 위에는 메마른 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덜컹거리며 천천히 굴러가는 마차 외에는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노파와 그가 이끄는 마차는 차츰 개봉성을 뒤로 하고 멀어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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