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무협] 강호무정 제18장 세 번째 복수(復讐) - 검궁인
제18장 세 번째 복수(復讐)
①
그는 운이 좋았다.
철주부 안으로 들어온 그는 곧바로 백유성이 사용하는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철주부는 본래 백유성의 본가(本家)로써 그가 무당의 속가로 입문한 뒤로 무림의 명문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무림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전형적인 문(文)의 가문이었다. 백유성의 부친은 은퇴한 고관(高官)이었던 것이다.
백유성은 무림의 일이 끝나면 언제나 철주부로 돌아와 쉬곤 했다. 이곳만은 무(武)의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무실에는 많은 도구들이 있었다. 그것은 백유성의 다양한 취미를 말해주고 있었다.
각종 악기(樂器)에서 바둑판, 화분, 서예 도구들이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
중년인은 집무실을 세심히 둘러보았다. 집기 하나 흐트러져 있는 것이 없었으며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다. 그것은 백유성의 완벽주의 정신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찻잔을 받쳐든 시녀와 한 명의 정숙하고 아름다운 젊은 부인이 나타났다.
부인은 그에게 정중히 절하며 말했다.
"천첩은 백가의 여인입니다. 대인께서는 총맹에서 오셨다고요......."
중년인은 약간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첫 눈에 여인이 무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여인의 동작이나 언행에서는 무림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차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렇소이다. 부인."
"그 분은 순찰 나가셨습니다. 연락을 취했으니 머지 않아 귀가 하실 테지요. 그간 차를 드시기 바랍니다."
여인은 그윽한 눈으로 중년인을 바라 보았다. 중년인은 여인의 눈빛을 받자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뇌리에 깊이 남아있는 한 소녀의 눈빛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백유성의 아내와 그녀의 눈빛이 닮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중년인은 바로 장천림이었다.
그는 변장을 하고 철주부에 잠입한 것이었다. 장하영이 계획한 정면돌파의 계획에 직접 나선 것이었다. 다행히 운이 좋았고 지금 그는 목표물인 백유성의 집무실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백유성의 아내를 통해서 그는 백가소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왠지 눈빛이 몹시 닮아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그는 내심 탄식했다.
백유성의 아내는 얌전히 마주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양가집 규수 출신이었다. 따라서 주인이 자리를 비운 동안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는 듯 했다.
장천림은 그녀가 따라주는 차를 마시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백유성은 정오쯤 돌아올 것이네. 그의 성격으로 볼 때 일 각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시간에 돌아올 것일세. 문제는 그동안 자네가 무림총맹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철주부의 사람들이 믿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걸세.
"부인."
"네......?"
조용히 얼굴을 내려뜨린 채 화분에 물을 주고 있던 여인은 고개를 들었다.
"총맹에서 귀가 따갑도록 백소협의 칭찬을 들었소. 그는 지혜로울 뿐 아니라 뛰어난 능력과 인품을 지닌 후기제일인이라는 것이오. 하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이다. 물어 봐도 될런지요?"
장천림의 말에 여인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우아한 얼굴에 한 가닥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분부만 하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천림은 여인을 주시하며 물었다.
"무림에서의 평판은 그렇다치고 가정에서의 그의 모습은 어떤 가요?"
"......!"
여인의 안색이 흔들렸다. 뜻밖의 질문이었던 것이다. 장천림은 짧은 순간 여인의 눈빛이 당황으로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아,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총맹에서는 백대협을 차기의 영웅으로 보고 여러 면에서 관심을 두고 있소이다. 그래서 그의 모든 것을 조사하려는 것이오."
장천림은 자신이 총맹에서 나왔다는 것을 강조했다. 여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건......."
여인은 귓볼까지 붉어진 채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다.
"허허허.......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가지고 있으니 그는 아마도 가정에서도 충실할 것이오. 그렇지 않소? 부인?"
"물론......."
여인은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보았다. 여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장천림은 가슴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백유성의 아내에게서 뼈저린 고독(孤獨)을 훔쳐 본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랬었군.......'
그는 새삼 여인을 살펴 보았다. 그녀는 스물서넛 쯤 되어 보였다. 한창 부부의 금실이 좋아야할 나이였다.
그런데 어쩐지 여인은 쓸쓸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한란(寒蘭)과 같은 향기가 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장천림은 문득 분노를 느꼈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내를 두고도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다니.......'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에는 백가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진무구하기만 하던 소녀....... 그녀가 강호사공자에게 무참히 유린당하는 광경이 장천림의 뇌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팍......!
장천림은 자신도 모르게 찻잔에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찻잔은 손아귀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어머......!"
여인은 놀라 그를 바라 보았다.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장천림이었다.
"아, 이런 실수를 하다니....... 미안하오, 부인."
그는 황급히 사과했다. 찻물이 튀어 그의 옷이 흠뻑 젖고 말았다. 여인은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그의 옷을 닦아 주었다.
"괜찮소......."
장천림은 그녀의 손길을 막으려다가 그만 희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을 잡고 말았다.
"......!"
여인은 손을 잡히자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의 반응에 장천림은 더욱 당황했다. 당황한 나머지 그는 손을 놓아줄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찰나지간이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힌 것은.......
잠시 후 여인은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고개를 푹 떨구었다.
"미안하오......."
장천림은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 여인을 살며시 손을 빼더니 몸을 일으켰다.
"새옷을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괜찮소. 부인."
그러나 여인은 도망치듯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여인의 뒷모습이 애련하게 장천림의 가슴에 남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새옷을 가지고 온 시녀로부터 옷시중을 받고 있었다. 시녀는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종알거렸다.
"이 옷은 마님께서 나리를 위해 지은 옷인데 한 번도 나리께서 입지 않은 옷이랍니다. 그런데 이걸 갖다드리라니......."
시녀의 말에 장천림은 뜨끔하는 기분이었다. 왠지 가슴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왜......?
그녀는 나를 처음 보았을 뿐인데.......
장천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시녀에게 물었다.
"백소협과 부인의 사이가 어떠냐?"
시녀는 별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이었으나 곧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님께서 불쌍하셔요. 나리께서는 매일 밖으로만 돌아다니시느라 마님을 도통 돌보지 않으신답니다. 그래서 마님은 허구한 날 독수공방이시지 뭐예요. 어멋, 내가 무슨 쓸데없는 말을......."
시녀는 실책을 느낀 듯 급히 입을 막았다. 그리고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정오가 되려면 꽤 시간이 남아 있었다.
장천림은 철주부의 책임자를 불렀다. 그는 백유성의 직속으로 무림맹의 팔기단(八旗團)에 속한 향주급 위인이었다.
"그래 아직 아무런 성과도 없단 말인가? 쯧쯧......! 어째서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단 말이냐?"
그는 짐짓 짜증스런 표정으로 향주의 보고를 받았다. 향주는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쩔쩔 매고 있었다.
기실 이것은 자신이 총맹에서 온 특사로 보이기 위한 위장술일 따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향주란 자는 그저 윗사람이라면 쩔쩔매는 그런 작자였다.
"죄...... 죄송합니다. 대인. 그러나......."
장천림은 손을 휘휘 저었다.
"듣기 싫다. 그나 저나 백소협은 언제 오시는가?"
"예, 예. 잠시 후면......."
"그럼 이만 물러가게. 그가 돌아오면 즉시 이곳으로 오도록 이르고."
"아...... 알겠습니다."
향주란 작자는 살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 장천림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 땀을 훔치고 있었다.
실상 이곳 철주부는 동장철담이요, 와룡복호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철주부에는 기라성같은 무림맹의 고수들이 물샐 틈 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자신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식은 땀 나는 일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해도 일단 정체가 발각나기만 하면 빠져 나간다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그는 마음을 가다듬은 채 운기조식만 하면 되었다.
백유성, 그가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②
스스스---!
추풍(秋風)에 지는 낙엽이 가슴을 허전하게 한다. 땅에 떨어지는 낙엽이 허전한 느낌을 주는 것인지 아니면 잎을 잃고 헐벗고 서 있는 나목이 허전한 느낌을 주는 것인지는 몰라도 여름을 넘긴 계절은 사람들에게 쓸쓸한 감상을 불러 일으킨다.
백유성은 정확한 시간에 철주부로 돌아오고 있었다. 평소의 그 답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시각이었다. 그는 이 일대의 경비망을 순찰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러나 여러 곳의 초소들을 빠짐없이 순찰했지만 오늘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 바람에 그의 자존심은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백도제일의 명문대파인 무당파에 입문한 지 어언 십칠 년.
그는 속가 제자이면서도 무당에서 비전지비로 내려오는 태극광혜검법(太極光慧劍法)을 전수받았다. 그것은 무당의 전통을 깨뜨린 일대 사건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자질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양의현천진기(兩意玄天眞氣)를 이어받기도 했다. 그것은 오직 장문인 직전(直傳)만이 허용되는 무공이었다.
그로 인해 그의 무공은 일찍이 발군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농락을 당한 것이다. 강호사공자를 노리는 흉수를 잡기는커녕 계속 놈들에게 보이지 않는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많은 시일이 흐르고 있었다. 해결해도 벌써 해결되었어야 했을 사건임에도 아직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변명해 보기도 했다.
'이건 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놈들이 워낙 교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이 닿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놈들을 잡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일 뿐이다. 후후...... 두고 보자! 지금은 끌려 다니는 듯 싶어도 최후의 승자는 결국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기 위안도 최근 무림에 나돌고 있는 소문 때문에 부질없는 것이 되고 있었다.
사건이 공전하는 바람에 무림의 일 각에서는 차츰 무성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 소문은 어쩌면 그의 전도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소문의 일차적 원인은 바로 상관중과 당수문의 시신의 형태 때문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시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모두 전라 상태로 양물(陽物)이 절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세인들에게 묘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왜 하필이면 발가 벗기운 채 그것도 양물을 거세했을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것처럼 누군가 혹시...? 하는 상상적인 말을 한 것이 삽시에 천하무림으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마침내 일부 무림인들은 강호사공자가 어떤 극랄한 일을 저질렀으며 그에 대한 응분의 복수를 당한 것이라는 결론까지 유추해 내고 있었다.
사실 강호사공자는 무림의 떠오르는 태양이었으나 그들이 크면 클수록 모함도 많은 편이었다. 이 사건은 그들을 시기하는 자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 바람에 백유성은 짜증이 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설사 잘못을 했다쳐도 이미 오래 전 일이다. 그 일로 인해 내 앞날이 먹구름에 가려질 수는 없다. 제길! 그깟 계집 하나가 뭐 대수라고 천하의 백유성이 전전긍긍해야 된단 말인가?'
그는 침을 퉤! 뱉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일은 아주 작은 유희에 불과했다. 그 유희에 의해 희생된 소녀는 어디서도 볼 수 있는 평범한 계집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줄이야.
'빌어먹을.'
그는 고개를 홰홰 돌리며 철주부의 거대한 대문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그가 계단 위로 오르자 양옆에 도열하고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그 중 우두머리 무사가 달려와 보고했다.
"손님이 와 계십니다. 얼마 전에 안으로 모셨습니다."
"손님?"
백유성은 흠칫했다.
"어떤 손님이냐?"
"총맹에서 나온 분이십니다. 그런데......"
무사는 말끝을 흐렸다. 백유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총맹? 누구냐고 묻지를 않느냐?"
"저어...... 그, 그게......"
무사는 안색이 굳어진 채 어물거렸다.
"누군지도 모른단 말이냐? 아니 신분도 모른 채 들여 보냈단 말이냐?"
백유성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흘러 나왔다. 무사는 그만 고개를 푹 떨군 채 더듬거렸다.
"그, 그것이...... 금어령을 보이길래 감히......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금어령을 가진 자라고?"
백유성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금어령이 얼마나 대단한 신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디에 있느냐!"
"저어...... 집무실로 모셨습니다."
백유성의 눈살이 잔뜩 찌푸러졌다. 그는 무사를 지나쳐 대문으로 들어섰다. 그의 마음 속은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금어령을 지닌 인물이 왔다고? 그렇다면 이번 사건에 대해 추궁이라도 하러 왔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제기랄! 대체 어떤 자가 왔단 말인가?'
그는 곧바로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찜찜한 기분을 금치 못하면서.
③
......우리는 백유성이 정문으로 들어선 뒤 정확히 일 각 후 일을 시작할 것이다. 자네에게 주어진 시각은 반 각(半刻)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게. 만일 그가 집무실에 도착하기 전에 폭음이 울린다면 자네는 즉시 포기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탈출하게. 그것은 곧 이번 작전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네.
장천림은 화분(花盆)을 보고 있었다.
백유성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마음은 차츰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지금 그는 한 여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화분에 물을 주던 여인. 그로서는 처음 보는 현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일신에 유백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던 모습이 눈에 잡힐 듯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내가 무슨 생각을? 그녀는 백유성의 아내인데?'
장천림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화분의 꽃을 만지고 있었다. 여인이 화분에 물을 주는 모습은 그의 가슴에 이상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지금 그의 처지로 볼 때 그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만일 백유성의 아내가 무림계의 여인이었다면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는 무림과 관계없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백유성같은 후기지수이자 명문 출신의 부군을 지녔으면서도 쓸쓸함이 짙게 배어 있는 여인의 모습이 이상하게 그의 가슴을 친 것이었다.
'그런 현숙한 여인이 백유성의 아내라니......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구나.'
장천림은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한편, 집무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백유성은 초조한 심정이었다.
사실 무림총맹에서 누군가 파견되었다면 껄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번 사건을 장담하면서 맡은 그가 아닌가. 그런데 벌써 기일이 한참 지나도록 그는 해결하지 못했다.
그동안 흉수의 그림자조차 잡지 못한 것이다. 이제 총맹에서 보낸 자에게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 지 감이 서지 않았다.
'누가 왔을까? 혹시 무당의 장교진인 가운데서? 아니야. 무당에서는 이런 일로 사람을 보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총맹의 어느 당주(堂主)가?'
회랑으로 걸어가는 백유성의 가슴은 답답해지고 있었다. 몇 가지 변명거리를 마련하고 있었으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신통치 않은 것들이었다.
같은 시각, 철주부의 장원 문 앞으로 세 대의 마차(馬車)가 돌진해 오고 있었다. 마차는 하나같이 검은 색이었으며 창문에는 두터운 휘장이 처져 있었다.
네 마리의 마차가 이끄는 마차. 그런데 마부석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마부도 없이 마구 달려오는 사두마차 네 대!
두두두두......!
마차가 돌진해 오는 기세는 무섭기 그지 없었다. 장원을 지키던 무사들은 마차가 달려오는 기세에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마차 네 대가 결코 좋은 뜻을 품고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일제히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철주부의 대문은 높은 계단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차가 계단을 오르지 않고서는 대문을 돌파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계단 위에서 신형을 멈춘 채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앗!"
"아니 저럴 수가!"
무사들은 대경실색했다. 마차는 계단 위를 마치 평지인 양 미친 듯이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네 대의 사두마차는 달려오는 기세 그대로 계단 위를 요란한 굉음을 내며 거슬러 오르는 것이었다.
"막아라!"
"멈춰라!"
뒤늦게 비상이 걸렸다. 무사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가운데 사두마차는 마침내 계단을 다 올라왔다. 무사들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마차는 여전히 무서운 기세로 대문을 향해 돌진했다.
무사들이 말고삐를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무사들은 픽픽 쓰러졌다. 굳게 처져 있는 마차의 휘장 안에서 무수한 암기들이 쏘아져 나왔던 것이다.
백유성은 마침내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는 들어서는 순간 의아한 느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의 시선은 곧장 집무실 안의 한 중년인에게 꽂히고 있었다. 그를 본 순간 그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총맹의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집무실의 의자에 앉아 화분을 들여다 보고 있는 중년인은 난생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이때 중년인은 그를 발견하고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기이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
백유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중년인이 그를 향해 포권하자 그도 얼떨결에 마주 공수할 수밖에 없었다.
"귀하는 누구신지......"
백유성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물었다. 중년인은 지그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과연 강호사공자다운 풍모로군."
"......?"
"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중년인은 고의인 듯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그와 백유성의 거리는 이 장쯤 되었다. 중년인, 즉 장천림은 눈어림으로 거리를 계산하고 있었다.
'아직 멀다. 좀더 가까이 접근해야 한다.'
그는 백유성에게 다가갔다. 그가 걸어가자 백유성의 얼굴에 언뜻 경계심이 떠올랐다.
"난 총맹에서 귀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누구시오?"
"허허! 그럴 만도 하지. 백대협은 날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것이네. 왜냐면......"
"......?"
백유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장천림은 그와의 거리를 일 장으로 좁히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계산했다.
'아직 멀다. 조금만 더 줄이면 된다.'
"왜냐면 말이오......."
그는 일부러 말을 늦추면서 다가갔다. 그러나 이때 백유성이 움찔하는 반응을 보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상한 예감을 느낀 듯 했다.
"허허! 난 총맹에서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기 때문이네."
장천림은 다시 그에게 걸어갔다. 백유성은 안색이 변했다.
"그럼 총맹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글쎄 어쩌면 그건......"
장천림의 얼굴에 기묘한 빛이 떠올랐다.
'일 보(步)만 더......'
그는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동시에 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그가 손을 올리자 백유성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이걸 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 것이네."
장천림은 품 속에서 손을 빼냈다. 바로 그때였다.
꽈꽈꽈쾅---!
경천동지(驚天動地)의 굉음이 울렸다. 어찌나 큰 폭음인지 집무실은 물론 철주부 전체가 온통 뒤흔들렸다. 이 느닷없는 폭음에 백유성은 깜짝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니?"
폭음은 철주부의 대문 쪽에서 울린 것이었다. 백유성은 대경하여 몸을 반쯤 돌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장천림은 품 속에서 손을 뺐다. 그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은 한 자루의 둥근 환(環)이었다. 오리알 굵기의 금속으로 된 환이 그의 손에 쥐어진 순간 으스스한 음성이 그의 입술 사이를 뚫고 흘러 나왔다.
"난 바로 널 지옥으로 데려갈 안내인이지!"
"......!"
몸을 돌려 대문 쪽으로 향해 있던 백유성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후기제일인 다왔다. 전광석화처럼 그의 신형이 회전했다.
그순간 장천림의 손아귀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났다.
번쩍! 하는 섬광이 그의 손으로부터 뻗었다. 놀랍게도 환은 둥글게 말려져 있던 연검(軟劍)이었다. 연검은 뱀처럼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그러나 일단 공력을 주입하면 빳빳해지는 것이었다.
"헉!"
백유성은 다급한 신음을 발했다. 몸을 돌린 순간 섬광같은 검세가 뻗어온 것이었다. 그는 짧은 순간 수많은 대응방법을 생각했다. 그의 부릅떠진 눈에 회의지심이 떠올랐다.
상대방의 일 초는 필살지초(泌殺之招)였다. 처음부터 일정한 검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수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동귀어진의 검법이었다. 그것을 간파한 순간 백유성은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아뿔사!'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가 대처 방법을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옆구리가 화끈했다. 상대의 연검이 물고기 배를 가르는 회칼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박혀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위인은 아니었다. 일 검을 맞는 순간 두 눈에 가공할 살기가 뻗었다.
"태극현현(太極玄玄)......"
슈파앗!
손바닥 하나가 꽃잎처럼 떠올랐다. 신형을 반쯤 튼 자세로 그의 장력이 뻗고 있었다.
강호제일검이라는 별호는 백유성의 무공 가운데 검법이 가장 뛰어나다기에 붙여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장기인 검법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아니 검을 뽑을 겨를조차도 없었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검법 못지 않은 절학이 있었다.
그것은 태극잠형공(太極潛形功)이란 무당비전의 절학이었다.
한편 장천림은 연검이 상대의 옆구리를 아무 저항없이 갈라버린 순간 공격이 성공했음을 알았다.
'됐다.'
손바닥을 통해 연검이 백유성의 옆구리를 꿰뚫고 갈빗대와 내장을 분리해 버리는 느낌이 전달되자 그의 뇌리에는 한 청순가련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소....... 세 번째 원수다. 이제 한 놈 남았다.'
그때였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그의 눈 앞에 하얀 손바닥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숨을 들이키지 못했다.
전광석화같은 순간에, 그러니까 백유성의 옆구리에 박힌 연검을 뽑지도 못한 그 순간에 그의 심장에 손바닥이 붙었다 떨어진 것이었다.
'역시 놈은......'
장천림은 탄식했다. 일순간 숨이 막혔다. 심장이 터질 듯 압박되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면서 그는 붕 떠올랐다.
꽝!
그는 뒤편 벽에 부딪쳤다. 놀라운 충격으로 벽이 부서지며 그의 몸은 벽을 뚫고 정원 쪽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는 화원 한가운데 떨어졌다. 그의 입과 코로는 붉은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전신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땅을 짚었다.
'일어나야 해.......'
그는 안간힘을 다하며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탈출이야. 자네가 정문으로 들어온 이상 반드시 정문으로 나가야 하네.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일 테니까.
그러나 장하영의 그런 신신당부도 지금 이 순간의 장천림에게는 아득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일어서기 위해 바닥을 짚었으나 어찌된 셈인지 손은 허공을 짚은 듯 허전했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과 바닥이 맞닿았다.
의지와 관계없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그는 코 끝으로 한 가닥 꽃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가 쓰러진 곳은 잘 가꾸어진 화원이었다.
화원의 꽃이 그의 몸에 눌려 쓰러져 있었다. 화사하게 핀 가을꽃이 바로 그의 코 앞에서 피어 있었다.
'향기가 좋군.......'
그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나마 꽃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백유성은 당대 제일의 후기제일고수였다. 장천림이 비록 혈명단에서 일급살수의 바탕을 닦고 다시 기연을 얻어 절학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백유성을 죽이기에 골몰한 나머지 필살검을 펼쳐낼 때 수비식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다.
무당의 태극잠형공은 도가의 상승기공이었다. 백유성이 최후의 힘을 짜내어 펼친 위력은 가공한 것이었다.
그것도 정확히 심장 부위에 적중되었다. 그의 손바닥이 닿은 순간 즉사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것은 장천림이 많은 영약을 복용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화원에 쓰러져 있었다.
콰콰콰......쾅! 펑! 펑!
정문 쪽에서 폭음이 연이어 울리고 있었다. 그 폭음은 각각 다른 곳에서 불규칙한 간격을 두고 울리고 있었다.
'일단 정문을 돌파하는데는 성공했구나.......'
장천림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석회림이 사방으로 폭약을 던지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그는 장하영과 석회림, 조천백이 자신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얼마나 초조해 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도무지 운신이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저 코 끝에 풍겨오는 꽃향기만을 맡을 수 있을 뿐이었다.
눈을 떠본다.
바로 얼굴 위에 국화(菊花) 한 송이가 늘어져 있었다. 화단에 처박힌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온통 가을의 향기를 뿜어내는 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는 향기를 깊숙히 들이마셔 보았다.
'흠....... 향기가 좋군.......'
국화향을 맡는 순간 그의 뇌리에 금문장에서의 즐거운 추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백가소가 꽃송이 하나는 머리에 꽂고 하나는 손에 쥔 채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소.......'
장천림은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귓전에 들려오고 있었다.
'일어나야 한다. 잡히면 끝이다.'
그는 간신히 몸을 반쯤 일으켰으나 곧 쓰러지고 말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문득 한 가닥 탄식이 귓전을 간지럽혔다.
"누군가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이었다. 장천림은 그 음성이 누구의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왠지 귀에 익숙한 음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식이 가물거리는 바람에 끝내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문득 향긋한 여인의 손이 그의 얼굴을 만지는 듯 했다.
그뿐이었다.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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