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강호무정 제1장 과거(過去)와 현재(現在) - 검궁인





비극의 서막





대명(大明) 홍무(洪武) 5년 5월 21일.

하루의 일과를 마친 태양이 황하(黃河)의 나루터 위로 어스름히 기울 무렵. 아름답게 타오르는 석양(夕陽)에 취한 듯 한 소년이 나루터에 앉아 있다.

소년의 나이는 일곱 살 가량 되어 보였는데 석양을 받은 얼굴은 붉게 채색되어 있었고 두 눈은 꿈꾸는 듯 몽롱해 보였다.

아는 사람은 소년의 자세와 눈빛 만을 보고도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다. 소년은 고기잡이 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소년의 집안 내력은 보잘 것이 없었다.

장강십팔채(長江十八寨) 중 비교적 세력이 약한 진산채(進山寨)에 속한 하급 녹림가의 집안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포구에서 선부(船父)로 일하며 어머니는 수채(水寨)에서 주방일을 보고 있었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어부(漁夫)였다. 지금 소년은 어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석양은 핏빛으로 타오르다가 차츰 보랏빛으로 변하며 서녘으로 기울어가고, 석양에 물든 황하도 같은 색으로 점차 물들어가고 있었다.

문득 황하 저편으로 고기잡이배들이 나타났다.

"오셨어!"

소년은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배를 향해 냅다 두 손을 흔들었다.

과연 멀리 보이는 깃발은 장강십팔채의 표식을 달고 있었으며 그 배들 중 한 척에는 소년이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고기잡이 배는 모두 다섯 척이었다. 배는 금방 나루터에 도착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종종걸음으로 내리는 어부들 가운데 한 명의 백발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할아버지!"

소년은 크게 외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노인은 팔을 활짝 벌려 달려오는 소년을 마주 안았다.

"헤헤! 할아버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세요?"

"오냐, 오냐. 허허헛......!"

노인은 손자의 재롱이 몹시 귀여운 듯 연신 웃음을 흘리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소년은 노인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소년은 할아버지에게서 나는 비릿한 고기 비늘 냄새가 몹시 좋았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냄새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행복(幸福)의 냄새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소년을 업고 걸었다. 다른 어부들은 조손(組孫)의 그 같은 모습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부 생활은 늘 단조로운 것이고 이런 사소한 행복은 어쩌면 그들의 인생의 전부인지도 몰랐다.

어느덧 석양은 떨어지고 나룻터에는 어둠이 잦아들고 있었다.

진산채(進山寨).

장강십팔채 중 서열 16위에 해당하는 수채였다.

지금 진산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일단의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도열한 채 저녁 짓는 연기가 평화롭게 피어오르고 있는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백색무복(白色武服)을 걸쳤으며 가슴에는 승천하는 용(龍) 형상의 수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눈빛이 부리부리하고 양 쪽 태양혈이 불룩 솟아 있는 인물들이었다. 문득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모두 준비되었나?"

나직하게 깔리는 음성에는 진기가 충만하게 담겨 있었다.

"옛!"

일제히 대답하는 자들의 두 눈에는 열기, 흥분, 살기(殺氣)와 같은 기운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럼 쳐라!"

시작(始作)이었다.

이것이 훗날 무림사가(武林史家)들이 정사대전(正邪大戰), 또는 사십일백화대전(四十日白華大戰)이라고 기록한 정도연합맹(正道聯合盟)과 녹림무림(綠林武林)과의 전쟁이었다.

죽음(死)의 광란무(狂亂舞).......

승부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었다. 오래도록 준비해온 정도연합맹은 전력으로 보나 인원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월등히 앞섰던 것이다.

백화(白華)란 무림을 정화(淨化)하겠다는 백도인의 일방적인 선언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싸움은 불과 40일 동안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막(幕)이 내린 후의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무비한 것이었다.

충천하는 화광(化光)!

"허억...... 콜록......꼭 잡아라 강아(江兒)야......."

노인은 연신 기침을 하면서 불길 속을 달리고 있었다. 노인의 목을 꽈악 끌어안고 등 뒤에 업힌 소년은 겁에 질린 채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소년은 보았다.

아버지의 수급이 하늘로 치솟는 것을.......

어머니의 치마가 뜯겨 허연 허벅지가 보인 채 쫓기다가 헛간에 쓰러지고.......

그 위로 여러 명의 백색무복을 입은 사나이들이 번갈아 능욕을 한 뒤 죽이는 광경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으아아악!"

비명과 비명!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충천하는 불길 속으로 노인은 필사적으로 손자 하나를 구하기 위해 달아나고 있었다. 노인은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오직 손자를 살려야겠다는 일념 만으로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하며 달아나고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문득 노인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노인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그림자들은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노인은 두 자루의 검을 맞고 허공을 휘저으며 쓰러졌다. 그러나 쓰러지면서도 행여나 다칠세라 손자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나 쓰러진 노인의 등으로 다시 한 자루의 장창(長槍)이 사정없이 박혔다.

마치 노인이 안고 있던 손자까지 일부러 겨냥한 듯 백색무복의 무사는 장창을 땅에까지 박히도록 깊숙히 꽂았다.

노인은 불에 덴 듯한 고통을 느꼈으나 창이 파고든 순간 손자를 안은 채 필사적으로 몸을 구부렸다.

그는 창 끝이 소년의 얼굴을 온통 피로 물들이는 것을 보면서도 소년의 귀에 대고 필사적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강아...... 절대 움직이지 말아라...... 절대로...... 울지 말아라...... 넌 살아야 해...... 반드시...... 끄르륵!"

노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노인의 혀도 더이상 움직여지지 않았다. 노인의 손에 더이상 힘이 주어지지도 않았다.

노인은 눈을 부릅뜬 채 미처 감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할아버지......!'

소년의 얼굴은 할아버지의 등을 뚫고 나온 창에 길게 찢긴 채 온통 피투성이었다. 흘러내린 피가 소년의 눈과 입 속으로 흘러들어와 잠시 후에는 그만 숨이 막혀 기절을 하고 말았다.

긴 어둠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어둠이 가고 거짓말처럼 광명(光明)이 대지에 밀려들었을 때 소년은 할아버지의 시신 밑에서 간신히 기어 일어서고 있었다.

"......!"

소년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너무나도 공포스런 것이었다.

온통 시신과 불에 탄 잔해(殘骸)뿐,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살아있는 것은 단 하나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한결같이 시신 뿐이요, 폐허 만이 그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울지 않았다. 죽기 전에 한 할아버지의 말이 소년을 다시는 울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소년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리고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내심 피를 토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만 울테야......'

"으허어엉......! 할아버지이......!"

소년의 간장을 끊어내듯 애처러운 울음이 폐허가 된 진산채를 울렸다. 소년의 울음은 길게 이어졌고 영원히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소년의 이름은 백리진강(白里眞强)이었다.



대명(大明) 홍무(洪武) 8년 10월 4일 아침.

백제성(白帝城).

이곳은 사천(四川)의 명소였다. 이곳 백제성에서 세인의 존경을 받는 집안이 있었다. 일명 금문장(金文莊)이라 불리는 곳으로 장주(莊主) 백난천(白蘭天)은 유림(儒林)의 선비로 인품이 출중하고 명리에 담백하며 가난한 자를 돌보아 주기로 유명했다.

이 금문장이 때아닌 비보(悲報)로 온통 발칵 뒤집혀지고 있었다.

백난천의 금지옥엽이자 하나뿐인 외동딸 백가소(白茄韶)가 돌연 행방불명된 것이었다.

백가소는 아름답기로 사천일미(四川一美)이며, 학예(學藝)에 뛰어나고 심성 곱기로도 인근에 널리 알려져 명문가의 청혼이 줄을 잇는 소녀였다.

그런데 어제 오후 시녀 국향(菊香)을 대동하고 산책을 나간 뒤로 귀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로 인해 금문장은 발칵 뒤집혀 식솔 전원이 동원되어 수색을 나갔다.

결국 다음날 새벽 식솔들은 백가소의 몸종인 국향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국향은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그녀는 전라(全裸)로 능욕을 당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잔혹하게도 그녀의 유두가 도려내어져 있었고 심하게 유린당한 흔적이 나신의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국향의 나이 17세.

백가소보다 겨우 한 살이 많은 나이였다. 그로 인해 금문장은 경악과 충격에서 휩싸이고 말았다.

식솔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며 장주인 백난천은 경황이 없는 채 안색이 백지장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책이 없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백가소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국향이 시신으로 발견된 후 금문장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온통 어수선한 분위기에 잠겨있을 때였다.

한 명의 청년이 금문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타나자 금문장의 식솔들은 모두 반가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장주인 백난천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맨발로 뛰어나와 맞이하고 있었다.

백난천은 급히 그를 서재로 불러들였다.

"여보게! 마침 잘 왔네. 큰일이 났네."

백난천은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청년에게 얘기했다. 얘기를 듣는 청년의 얼굴은 점차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청년은 금문장의 젊은 집사(執事)였다.

그는 삼 일 전 장주의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이 청년은 금문장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해왔으며 차분하고 정확한 일처리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신임을 사고 있었다.

그는 약관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나이였으나 그가 하는 일은 언제나 실수가 없고 완벽했던 것이다. 따라서 백난천조차 그를 태산같이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얘기를 다 듣고난 청년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국향의 시신은 어디 있습니까?"

"별원에 안치해 놓았네."

"일단 시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 그러세."

청년은 별원으로 가 국향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관을 보았다. 그는 서슴없이 관뚜껑을 열어 젖혔다.

"......."

관 속에는 국향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발견 당시의 모습이 하도 처참하여 그녀의 몸에는 흰 천을 덮어놓고 있었다. 청년은 천을 걷어 제쳤다.

그러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 나타났다. 아무리 죽은 시신이라 하지만 한창 무렵의 처녀였으므로 백난천은 민망함을 금치 못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고 국향의 나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향의 육체 곳곳을 면밀히 조사하고 있었다.

"......."

그러는 동안 청년의 안색은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는 시신의 형태를 자세히 관찰한 후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 낸 듯했다.

먼저 흉수(凶手)는 한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셋, 또는 넷은 된다. 그것은 국향을 능욕한 자의 숫자였다. 또한 변태적이며 야비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그녀의 육체를 가지고 희롱했다는 것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손자국, 이빨 자국, 국향의 국부에 남아 있는 상흔들.......

그러나 청년 집사의 마음이 무거워진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내심 놀란 것은 바로 국향의 사인(死因) 때문이었다. 국향의 직접적인 사인은 능욕 때문이 아니라 어떤 무공(武功)으로 인한 내부적인 공상(功傷)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치밀하고 교활한 짓이었다.

그녀를 죽인 자는 무림인이되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고의로 강호상에서 가장 흔한 내력지기(內力之氣)를 이용하여 그녀의 장부를 파열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어느 파(派), 어느 자의 소행인지 짐작할 수도 없게 만든 것이었다.

"무슨...... 단서라도 발견했나?"

백난천은 청년이 오랫동안 말이 없자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잠시 생각 좀 해봐야겠습니다."

"제발...... 범인을 잡아 주게. 관부(官府)에서도 다녀가긴 했네만 아무래도 이 일은 자네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네."

과연 그렇다.

관부에서는 국향의 시신을 슬쩍 살펴보고 갔을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도 못했다.

청년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그 후 반나절을 그는 방 안에 틀어박혀 명상에 잠겨 있었다. 백난천은 청년이 다시 나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으나 저녁이 될 때까지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저녁 무렵,

청년은 비로소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방 안에서 나왔을 때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녹슨 철검(鐵劍)이 들려 있었다.

금문장의 식솔들은 그가 검을 갖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평소에 말이 없는 그였기에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청년 집사는 아무도 모르게 장원을 빠져 나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있었다.

국향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금문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야산이었다.

그곳에 당도한 청년은 면밀히 주위의 흔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밤새도록 반경을 넓혀가면서 흔적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별 무소득이었다.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

청년은 바위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어느덧 어둠이 가고 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그동안 청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새벽 여명이 사위를 비출 무렵 그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청년의 눈은 어떤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추적(追跡).

바야흐로 추적이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청년의 눈은 야수안(野獸眼)이 되어 있었고, 길바닥을 훑어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매서운 광채가 점차 강하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청년 집사, 그의 이름은 장천림(長天林)이었다.



제1장 과거(過去)와 현재(現在)



홍무(洪武) 8년 10월 7일. 오 시(午時).

사천(四川)의 중심에 위치한 백림(白林).

백림의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주루(酒樓)에 흑의를 입은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장천림(長天林).

이것이 그의 이름이었으나 그 이름을 아는 자는 하늘 아래 몇 되지 않았다.

장천림은 소면 한 그릇을 시켜 놓았으나 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

벌써 사흘째 그는 백난천의 금지옥엽 백가소를 찾아 헤맸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사실 그는 백가소를 찾는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한 심정이었다. 더구나 그는 수 년 만에 세상에 나온 것이었다.

그동안 장천림은 오직 금문장에만 틀어박혀 있다시피 했다. 그는 지난 과거는 기억 저편에 아득히 묻어두고 아주 단순한 삶에 파묻혀 있었다.

하기야 과거는 기억하기도 싫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므로.

"......."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백가소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입맛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그는 소면에는 젓가락도 대지 않은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뿌연 이슬이 어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창가에서 내려다보이는 가도에 어떤 행렬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그의 뿌연 시야에 들어왔다.

일단의 병사들이 죄인을 호송하는 듯 오라에 묶인 자들을 수레에 싣고 다가오고 있었다. 사오십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삼엄하게 경비하는 것으로 미루어 무척 중요한 죄인이거나 흉악범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덜컹덜컹.......

수레는 주루 앞을 멈추지 않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때 장천림의 옆자리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저게 뭐지?"

장천림은 그들이 아까부터 술잔을 기울이던 중년 상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것도 모르나? 이런....... 소식이 깡통이구먼?"

"아니...... 뭘?"

"저들이 누군지 아나? 빌어먹을, 아주 나쁜 놈들이라구. 저 놈들은 부녀자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먹는 악질 노예 사냥꾼들이라구. 이번에 관에서 벼르고 벼르다가 일당을 체포하여 압송해 가는 중이라네."

"노예 사냥꾼?"

약간은 멍청해 보이는 상인이 의아한 듯 반문한다.

"그런 직업도 있었나?"

"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저 놈들은 패를 이루어 예쁘게 생긴 아녀자라면 처녀건 부인이건 가리지 않고 납치해 실컷 농락한 후 팔아먹는 놈들일세. 쯧....... 저 놈들에게 희생된 부녀자들이 수백...... 아니 수천이 넘었네."

"허허....... 그런 작자들이 있다니."

"하지만 이번에 관에서 잡아 들였으니 곧 일망타진될 거야."

"에이! 저런 놈들은 그저 광장에서 오마분시(五馬分屍)를 시켜버려야 해!"

상인은 흥분한 듯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고 있었다.

"아암! 사지를 갈가리 찢어죽여야 하고 말고!"

한편 사라져가는 행렬을 바라보던 장천림의 눈이 일순 번쩍 빛나고 있었다. 불현듯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고 있었다.

탁!

그가 탁자에 내려놓은 것은 두어 푼 가량 되는 은자였다.

문득 바람소리가 난다고 했을 때, 두 상인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창 밖을 바라보며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흑의청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땅땅땅땅땅.....

신경을 온통 뒤집어 버리는 날카로운 철판(鐵板) 두드리는 소리다.

어느새 아침이다. 또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덜커덩!

밖으로부터 굳게 잠겼던 창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눈까풀 위로 뿌연 빛이 자극적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713호는 눈을 떴다.

석실이었다. 고작해야 이십여 평(坪)밖에 되지 않는 비좁은 석실 안에서 삽십여 명 정도의 아이들이 부시시 눈을 비비며 일어나고 있었다.

딱딱한 돌바닥에 침구와 침낭이 제대로 있을 리가 없었다. 적당히 자리잡고 쭈그려 누우면 그 자리가 곧 침대요, 침실인 셈이었다.

하루 종일을 시달리고 지쳐버린 심신은 불면증 따위의 사치를 불러 들일 리가 없었다. 등이 땅에 닿기만 해도 촌각(寸刻) 안에 깊이 잠들어 버리는 아이들이었다.

713호가 일어나 새벽 추위에 잔뜩 굳어있는 육체의 신경세포를 되살리기 위하여 관절을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뚜둑...... 뚝......!

손가락 마디와 허리, 무릎의 관절에서 둔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무심하게 들으며 작은 운동을 하는데 옆에서 한 아이의 절망적인 중얼거림이 들렸다.

"또 죽었군."

713호는 시선을 돌렸다.

한 쪽 구석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소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 시간에 여전히 누워있다는 것은 곧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하나 둘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있어 동료들의 죽음이란 이미 관심권 밖에 있었다. 워낙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었으므로.

713호도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일과(日課)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쯤이면 시체는 흔적도 없이 치워져 있으리라.

사방이 병풍같은 절벽으로 쌓여 있는 공지,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계곡 한가운데 있는 분지였다.

대략 천여 평 남짓한 공지에는 200여 명 가량의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년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소년들이 바라보는 정면에는 나무로 높이 축조된 단(檀)이 있었다.

단 위에는 거대한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 대원(大元)

금색 글씨로 그같은 글이 수놓아져 있었다. 단 위에는 팔인의 금색무복을 입은 중년교두(中年敎頭)들이 위풍당당한 자세로 우뚝 서 있었다.

713호가 소속되어 있는 청룡단(靑龍檀) 스물일곱 명, 아니 이제는 스물여섯 명으로 줄어든 소년들도 대열의 가운데에 섰다.

둥........

어디선가 묵직한 징소리가 울렸다.

이어, 조회(朝會)가 시작되었다. 조회는 늘상 있어온 형식을 따랐다. 간단히 훈시가 있은 다음 대원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게 한다.

"대원제국 만세(大元帝國萬歲)!"

"황제폐하 천세(皇帝陛下千歲)!"

삼창의 발호가 있고서 조회는 끝났다. 조회는 불과 뜨거운 차 석 잔을 마실 시간에 끝난 것이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200여 명의 소년들은 구분이 되어 있었다.

선두에 깃발이 있고, 그 깃발에는 각각 다른 표식이 있었다.

- 청룡단(靑龍檀).

- 주작단(朱雀檀).

- 현무단(玄武檀).

- 백호단(白虎檀).

등이 그것이었다.

삐이이익!

팔인의 교두들이 동시에 호각을 불었다. 그러자 소년들은 각기 소속대로 분산되어 흩어졌다. 그들은 하루의 훈련을 시작하기 위해 대열을 나누는 것이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713호의 눈빛은 암울하기만 했다.

'오늘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것이 그의 중얼거림이었다.

때는 대원 말기(大元末期), 절강성(浙江省) 최남단의 절곡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홍무 8년 10월 8일 새벽.

백림(白林)에서 사십여 리 떨어진 숲길을 두 사람이 달리고 있었다.

"헉...... 하아...... 하......!"

정병(鄭兵).

그는 가슴까지 치밀어 오르는 벅찬 호흡을 가다듬지 못하고 괴로워 하고 있었다. 죽어라 뛰고는 있으나 그의 마음은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다시 잡힌다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숲길을 달리면서도 못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옆에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함께 달리고 있는 청년에 대해서였다.

정병은 이른바 노예 사냥꾼으로 불리는 조직의 소두목이었다.

오늘 새벽 그는 관청(官廳)의 뇌옥에 갇혀 있다가 한 청년으로부터 극적인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도주(逃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근 두 시진 이상을 쉬지 않고 달리면서도 그를 뇌옥에서 구해준 청년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왜?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중죄인인 자신을 구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만일 이 사실이 알려지면 청년은 무서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청년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규칙적인 보폭으로 뛰고 있을 뿐이었다.

"헉...... 허헉!"

마침내 정병은 더이상 뛸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마침내 그는 발을 멈추었다.

"자...... 잠깐만......."

그러자 청년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바로 금문장의 젊은 집사 장천림이었다.

정병은 거친 숨을 돌리며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들이 멈춘 곳은 숲 속으로 꽤나 들어와 있어 어지간해서는 남들의 눈에 띄기가 힘든 곳이었다. 그는 안심하고 장천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정병은 내심 흑!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의 시선이 마치 뱀처럼 차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때 장천림은 그의 숨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나이 십육 세. 이름 백가소(白茄韶). 붉은 장미가 수놓아진 백의를 입고 있으며 맑은 눈동자에 목덜미에는 손톱 반 만한 점(點)이 있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느냐?"

".......?"

너무나 뜻밖이었다. 정병은 미처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입을 벌린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나이 십육 세. 이름 백가소......."



챙챙챙......!

"반란(叛亂)이다! 쫓아라......!"

713호는 잠결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

한 방에 있던 다른 소년들도 이미 깨어 있었다. 그들의 눈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고, 가슴은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탈출이다.

소년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그런 말을 내뱉는 듯 했다. 이때였다.

쾅!

단단히 밖으로부터 잠겨 있던 창문이 박살났다. 동시에 화광이 방 안을 밝게 비쳤다. 소년들은 희망과 불안으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이때 벌떡 일어서서 외치는 소년이 있었다.

"백호, 주작, 현무단의 동료들이 드디어 일어섰다! 자! 우리들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언제까지나 노예로 벌레처럼 살아갈 것이냐? 동료들이여! 검을 들어라! 자유(自由)를 찾자!"

이렇게 외친 소년은 744호였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먼저 부서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자!"

"나가자! 싸우자!"

744호의 행동에 고무된 듯 몇 명의 소년들이 소리치며 뛰어 나갔다. 713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얼마 전부터 이런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각 단에 있던 소년들이 은밀히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것은 이곳을 탈출하자는 모의였다. 조회 때마다 연락이 오고가는 것을 713호는 몇 번인가 보았다. 그런데 드디어 오늘을 거사일(擧事日)로 잡은 모양이었다.

실상 이 방에서도 744호는 몇 차례 선동적인 발언을 하였으며 그에 따라 소년들도 불만을 토로하고 그에게 동조하는 기운을 보이고 있었다.

드디어 일은 기어코 터진 것이다.

"......!"

713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석실 안에는 어느새 자신밖에 없었다. 모두가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남아 있을 아이는 없었다. 죽으면 죽었지 이왕이면 폭풍 속에 자신을 던져 버리고 싶은 것이 이곳의 아이들이었다.

713호는 조용히 일어섰다.

그는 한 쪽 벽에 덩그라니 세워져 있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철검(鐵劍)을 집어 들었다.

그는 침착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고 다른 아이들과 달리 흥분하지도 않았다.



"으아아아아!"

정병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어찌된 셈인지 목젖이 굳어 아무런 비명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무섭게 사지를 비틀어대고 있었다.

"모른다."

그 말이 자신의 입 밖에 나온 순간부터 시작된 고문이었다. 아혈조차 제압당한 채 받는 고문은 한도 끝도 없었다. 영겁의 지옥에 떨어진 양 고통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더욱 다양해지고 더욱 배증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도 괴로워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손으로 땅을 긁었다. 손톱이 빠지고 모래알이 손톱 속으로 들어가 박혔다. 뿐만 아니라 무릎이 온통 까지고 뼈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도 고문은 조금도 멈추어지지 않았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마침내 그는 애원했다.

"흐으...... 차라리...... 죽여 주시오!"

구슬픈 눈으로 장천림을 바라보며 빌고 또 빌었다. 벌써 수백 번도 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할 수 없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무엇이든 아는 대로 대답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그것을 묵살한 채 더욱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더 다양하고 극랄한 고문을 가할 뿐이었다.

정병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이렇게 극악스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고통이 사라지며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귓전으로 흘러 둘어왔다.

"내가 어릴 적에 수천 가지의 고문술(拷問術)을 배웠었지. 그때는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지금와서는 무척 요긴하게 쓰게 되었다."

"......."

"너무 고통스러워 말라.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이것은 내가 아는 고문 수법 중 초보적인 것에 불과하다."

"......!"

말을 할 수는 없었으나 정병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머리를 땅에 부딪쳐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육이 제멋대로 뒤틀리고, 심장을 천만 마리의 개미가 갉아 먹는 듯 하고, 오장육부가 비비 꼬인다.

어디 그뿐이랴?

눈알을 천 개의 침으로 찌르는 듯하고, 심줄이 뽑혀 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는 오줌과 똥을 내갈겼으며 체중이 순식간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야말로 얼마나 격심한 고통이었는지 알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시작이라니?

으흐흐...... 차라리 죽여...... 죽이라구......!

"자, 시간을 줄이기 위하여 한 번만 더 묻겠다. 그녀의 행방은?"

순간 아혈이 거짓말처럼 풀리며 정병은 입이 자유로와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비명을 지르듯이 입을 열었다.

"예! 예! 어디 있는 지 알 것 같습니다요! 알고 말고요...... 하지만......"

"하지만은 없다. 어디 있느냐?"

장천림의 음성은 비정하기만 했다.

"우...... 우리의 짓이 아니고...... 해...... 해룡파(海龍派)의 짓일 겁니다. 정말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소녀는......"

벌벌 떠는 정병을 차갑게 내려보면서 장천림은 물었다.

"해룡파?"

"으흐흐...... 예...... 저희 말고도 가끔씩 이 지역에 들어와 부녀자를 납치해 가는 놈들입니다. 요 며칠 전에도 그들이 이곳을 지나갔습니다. 아마 그때 어른께서 찾으시는 분을 납치했을지도......"

"확실한가?"

"화...... 화...... 확실합니다!"

"그들은 어디로 갔느냐?"

정병의 온 몸은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예예...... 그들은 주로 양자강 줄기를 따라 활동합니다. 사천과 호북의 접경지역인 무협(巫峽)에 산채가 있다고 들었는데......"

정병은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청년의 눈에서 파란 불빛이 흘러나오는 듯 했기 때문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나...... 나리...... 제발 목숨만......"

장천림은 몇 가지를 더 물었다.

그는 아주 냉혹했다. 마침내 그는 알고 싶은 것을 알아낸 뒤 떠나갔다.

그가 떠나버린 숲 속에는 심장을 철검으로 관통당한 정병의 시체 만이 눈을 부릅뜬 채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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