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강호무정 제14장 백유성(白流星)의 의도(意圖) - 검궁인
제14장 백유성(白流星)의 의도(意圖)
①
홍무(洪武) 15년 4월 14일.
안가점(安家店).
화산에서 십 리쯤 떨어진 작은 시진이었다. 이곳에 네 명의 사나이가 하나둘 모여 들었다.
그들은 하루나 이틀 간격으로 안가점에 당도하였으며, 하나같이 안가점에서 유일한 객점인 십리향(十理香)이란 객점에 투숙했다.
십리향은 한적한 마을의 객점답게 손님이 드물었다. 이들 사인 외에는 고작해야 장사치 몇 명이 손님의 전부였다.
처음에는 사인이 각기 방에 들었으므로 객점 주인은 그들이 한 일행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네 사람은 한 방에 모여 있었다. 네 사람은 서로를 감회깊은 눈으로 마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냥꾼 차림의 사나이였다.
"다행이군.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어서......."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이들이 이토록 생명을 내건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을 꺼내자 삼인의 청년은 한결같이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천림! 이제와서 새삼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리를 진정한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인가?"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다면 네 놈을 친구로 여기지도 않았을 거야!"
"......."
사냥꾼 차림의 청년은 장천림이었다. 그는 머리를 긁었다.
"미안하다. 난 단지......."
"또 그 소리!"
석회림이 그의 어깨를 치며 정색을 했다.
"과거에 네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이제와서 간신히 그 빚을 탕감할 희망에 젖어 있는데 그따위 소리를 하다니 정말 형편없는 친구로군!"
"회림......."
장천림은 특히 석회림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석회림이 어떤 각오로 자신을 돕기 위해 나섰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아파오는 것이었다. 이때 장하영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우리는 무사히 이곳으로 합류했다. 그동안 각자가 겪은 일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 거야. 후후후....... 대단한 소용돌이를 건너왔지."
"......."
그 말에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사실 당가보에서 당수문을 죽인 후 그들은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 각자 길을 따로 잡았다. 그동안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어디 한 두 번이랴.
혈명단 이후로 그들은 또다시 백척간두의 위기 속에 처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도 지긋지긋한 위기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하영의 그 말 한 마디에 삼인은 모두 기분이 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우정과 의리로 뭉친 사나이들인 것이다.
설사 그보다 더한 고생을 한다해도 그들은 한 잔의 술로 모든 것을 껄껄 웃어넘길 그런 위인들이었다.
"자, 이제 모두 무사히 모였으니 세 번째 작전을 진행해야지."
장하영. 그는 매번 작전을 담당했다. 그것은 그의 전문분야였던 것이다.
장천림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화산의 천인검객 북리웅풍은 사실 강호사공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네. 이번 일은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이 될 걸세."
장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는 나름대로 그 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지. 그 결과 역시 사공자 가운데 그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 자가 근 사 년 가깝도록 폐관했다는 것이네."
장천림도 그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백가소를 납치한 사공자 모두 똑같은 위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천인검객이 폐관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궁금한 것은......."
장하영의 시선이 장천림에게로 향해졌다
"과연 그도 꼭 죽여야 할 인간이냐 하는 것이다. 천림. 이젠 우리에게 사공자와 원한을 맺게 된 원인을 이야기해 줄 수 없을까?"
"......!"
장천림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석회림과 조천백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동감이라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모두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장천림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군....... 영원히 말하지 않으려 했었는데......."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스런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 일은 한 명의 천진하고 아름다운 소녀로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당시 나이는 열여섯 살....... 이름은 백가소....... 즐겨 입는 옷은 붉은 장미가 수놓아진 백의였네. 그녀는 세상의 험난함을 모른 채 금문장이란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
장천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장하영을 비롯한 삼인은 침을 삼키며 장천림의 입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결국 장천림은 백가소의 죽음에 관한 일들을 모두 털어 놓았다.
백가소가 실종되었던 일.......
그녀를 찾아 헤매고 다녔던 일들.......
노예상인들을 찾아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일들과.......
천신만고 끝에 그녀를 찾기는 찾았으나 그녀가 마약에 중독되어 폐인이 되어 있었던 일하며.......
그녀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가 행했던 모든 일들........
그러나 결국 그녀가 네 장의 그림을 남기고 목을 매었다는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의 긴 이야기가 끝났다.
"......!"
삼인은 모두 멍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세상에 이렇게 기막힌 일이 있을 수 있다는데 경악하고 있었다. 장천림의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참동안 가슴 한 구석을 칼로 후벼낸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특히 백가소가 네 장의 그림을 남기고 목을 매었다는 말을 했을 때 그들은 주먹을 움켜쥐며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군......."
석회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참......."
조천백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장하영만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미심쩍은 일이 생각나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천림.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있는데......."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말해 보게."
"상관중이나 당수문, 백유성이라면 그런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그들은 위선의 탈을 쓰고 있는 자들이니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북리웅풍이 그들과 함께 일을 저질렀다는 건 어딘가 좀......."
그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이었다.
"내가 알기로 북리웅풍은 사공자 가운데 가장 수양이 깊은 인물이네. 그는 화산파의 속계이면서도 사문의 도계 인물들이 오히려 더 존경을 하고 있네. 평소 그의 언행이나 태도도 정인군자의 자세에서 한 치도 어긋난 적이 없었네.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명예에 먹칠할 그런 조잡하고 더러운 짓을 저질렀을까?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드네."
"......."
좌중의 인물들은 침묵했다. 석회림이나 조천백도 동감이었다. 그들은 북리웅풍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색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위인이었다. 북리웅풍에게 천인검객이라는 별호가 붙은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수양이 깊은 위인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장천림의 얼굴에는 분노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가소가 내게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그녀가 죽기 전에 남긴 그림에는 분명 그 작자의 얼굴도 들어 있었네!"
"......."
삼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죽어버린 소녀. 아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녀가 거짓을 남길 리는 만무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장천림은 차갑게 말했다.
"어쨌든 나는 가소의 죽음을 잊을 수가 없네. 따라서 강호사공자와는 한 하늘을 대할 수 없네!"
"......."
장내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②
화산파(華山派)는 무당과 더불어 중원 이대검파로 일컬어지는 명문이었으나 그 규모에 있어서는 무당보다 빈약한 감이 있었다.
그것은 화산의 문규가 엄하게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화산문도는 장문인의 윤허를 얻지 않고는 강호로 나갈 수 없었다. 따라서 강호상에서 화산의 영향력은 무당에 비해 위세를 떨칠 수가 없었다.
밤이다.
정양은 내심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소사숙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매일 공양을 해야 하다니.......'
그는 지금 소사숙, 그러니까 천인검객 북리웅풍이 면벽하고 있는 초옥으로 음식을 날라가고 있었다.
이 일은 불과 두어 달 전부터 시작되었으나 그에게는 귀찮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소사숙이 강호로 떠난 후, 무림맹으로부터 한 명의 손님이 찾아 왔었다. 그 자는 은밀히 화산의 장문인을 만나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듯 했다. 그 이후 그 자는 소사숙이 거처하는 초옥에 기거하게 되었다.
그 자가 소사숙의 초옥에 기거하게 된 날 정양은 장문인에게 불려가 이런 말을 들었다.
"...... 잘 들어라, 정양. 네 소사숙이 강호에 나갔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매일 소사숙이 초옥에 머무르는 것처럼 공양을 바치거라."
정양은 장문인이 무엇 때문에 그런 명을 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사실 정양의 머리로 알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일에는 무림맹의 소장파 핵심 인물인 백유성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림맹에서 온 인물은 바로 백유성이 특파한 인물이었다.
백유성은 북리웅풍이 강호로 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북리웅풍은 무림맹에 오지 않았다.
백유성은 마음 속으로 한 가지 의심나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상관중과 당수문을 죽인 흉수가 과연 강호사공자 모두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화산의 북리웅풍을 이용하자는 계책을 떠올린 것이었다.
마침 북리웅풍은 화산을 떠난 상태였다. 그는 수하를 보내 대신 북리웅풍으로 위장케 했다. 그것은 북리웅풍이 아직도 화산에 있는 것으로 위장함으로써 흉수가 화산에 찾아오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정양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소사숙의 거처까지 왔다.
초옥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문은 안으로 잠겨져 있었다. 정양은 다시 내심 투덜거렸다.
'이런 바보같은 일이 어디 있담? 가짜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매일 공양을 바치다니.......'
그러나 지엄한 장문인의 명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사숙. 저녁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의 말투는 자연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초옥 안에서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거기 두고 가거라."
항상 똑같은 말이었다. 정양은 음식을 담은 소반을 마루에 내려 놓고 물러났다. 그리고 종종걸음을 쳤다.
사실 그는 한 시가 아까왔다. 소사숙이 강호로 떠나면서 그의 애검을 선사한 것은 그를 크게 고무시켰다. 아니, 그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된 것이다.
그는 이후로 소사숙을 능가하는 천하제일의 검객이 되리라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 일과를 마친 후에도 열심히 검법을 연마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종종걸음을 치는 것도 검법 연마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초옥을 뒤로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때 어디에선가 낮은 음성이 들렸다.
"음. 이상한 일이군. 저 도동은 북리웅풍을 조금도 존경하지 않는것 같군."
어둠 속.
사인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장천림 일행이었다.
그들은 화산의 경비가 의외로 허술하여 함께 행동을 하게 된 것이었다.
방금 말을 한 것은 장하영이었다. 그의 관찰력은 범인을 초월했다. 그래서 도동 정양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장천림의 마음은 격동으로 온통 들끓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한 마장 밖에 보이는 초옥의 방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손 하나가 뻗어나와 식사를 방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북리웅풍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만일 장하영이 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게 뭐 중요한 일인가? 어쨌든 그 자가 저기 있는 것이 확실한 이상......."
장하영이 그의 입을 막았다.
"아니, 뭔가 수상해. 이미 강호에 소문이 파다한데 어째서 저 자의 주위에는 경비가 없단 말인가? 설마하니 죽음을 앉아서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매사에 치밀한 장하영다운 말이었다. 석회림이나 조천백도 동감이었다.
조천백이 말했다.
"어쩌면 함정이 있는 지도 몰라."
장천림은 차갑게 말했다.
"그런 것을 두려워했다면 나는 이 일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는 앞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잠깐!"
장하영이 그를 만류했으나 장천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초옥으로 걸어갔다. 그의 행동에 장하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우리는 각자 방향을 나누어 경계하세."
그의 말이 떨어지자 석회림과 조천백은 미리 약속한 듯 신형을 날렸다. 그들은 각각 초옥의 사방으로 나누어 매복했다.
한편, 장천림은 초옥 앞에 다달았다. 그의 마음 속은 이미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방문에 비치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이때 그림자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듯 움직임을 정지하고 있었다.
장천림은 방문을 노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북리웅풍. 왜 나서지 않는 거냐? 지옥사자가 너를 방문한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느냐?"
"......."
방 안의 그림자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장천림은 다소 흥분해 있었다.
그는 장하영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장하영은 북리웅풍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기분이 몹시 나빴다. 아울러 명문 출신인 북리웅풍에 대한 반감이 일고 있었다.
"후후! 복리웅풍, 설마 벌써 잊지는 않았겠지? 백가소란 어린 소녀에 대한 일을 말이다. 네가 진정한 사나이라면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장천림은 방문을 노려 보았다.
그러나 기이한 일이었다. 방 안의 그림자는 마치 목각인형이라도 되는 양 처음부터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장천림도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었다.
장하영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미 상관중과 당수문의 죽음으로 인해 강호사공자는 위기를 느끼고 있어야 옳다. 그렇다면 모종의 대비를 할 것이 아닌가?
장천림은 긴장을 느끼며 허리춤의 철검을 손으로 잡았다.
"......."
그의 눈에서 강렬한 광채가 솟는 순간,
번뜩!
그는 전광석화같은 신법으로 쏘아나갔다.
와장창!
방문이 부서지며 검과 몸이 하나가 된 그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편, 멀리서 장하영 등은 그가 방 안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여차하면 구원의 손길을 뻗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 아니......!"
방 안으로부터 장천림의 당혹성이 울렸다. 장하영 등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
방 안에 뛰어든 사인은 어리둥절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방문에 비쳤던 그림자는 놀랍게도 하나의 짚으로 만든 인형(人形)일 뿐이었다. 인형이 불빛에 비쳐 사람의 형태로 보인 것이다.
사인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분명 방 안에서 사람의 음성을 들었고, 또한 식사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목도하지 않았던가?
사인은 한결같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때였다.
"이곳으로 달아났다!"
조천백이 놀라 부르짖었다. 그가 가리킨 곳을 본 삼인은 안색이 변했다.
한 쪽 벽면, 그곳에는 한 장의 족자가 걸려 있던 곳이었다. 조천백이 그곳을 들추자 벽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구멍은 밖을 향해 뚫려 있었다. 방 안에 있던 자는 바로 그 구멍으로 달아난 것이었다.
"......!"
사인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장하영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가 이런 일을 할 리가......"
장천림의 안색이 굳어졌다.
"무슨 뜻인가?"
"이곳에 있던 자는 북리웅풍이 아니야."
장하영이 단정적으로 말하자 그는 의혹의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어째서?"
"그는 아무리 위기에 처했다해도 결코 달아날 위인이 아니다. 더욱이 이렇게 미리 구멍을 파두고 있을 비겁한 위인은 더욱 아니다."
"......."
장천림은 이번에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도 장하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기는 중이었다.
문득 장천림은 신형을 날렸다. 그가 느닷없이 신형을 날리는 바람에 삼인은 흠칫했다.
그러나 곧 서로 눈짓을 주고 받으며 함께 장천림이 날아간 곳으로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③
장천림은 달빛 아래 검술을 연마하고 있는 한 명의 도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동은 바로 정양이었다.
정양은 검을 곧추 세운 채 서서히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으되 자세는 진중하고 신색이 엄숙하였다.
"야압!"
번쩍!
검광이 달무리를 베어내려는 듯 허공에 줄기줄기 은하의 물결을 이루며 검막을 형성했다.
그 광경을 보고 곁에 있던 장하영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저 아이의 검을 잘 보게. 저 검은 한백(寒白)이라고 하는 명검(名劍)이야. 비록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나 실은 화산의 삼대명검의 하나일세."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저 검이 바로 천인검객 북리웅풍의 애검이라는 사실이야."
"......!"
조천백, 석회림도 이미 근처에 와 있었다. 장하영의 낮은 음성이 이어졌다.
"저 검이 어떻게 저 동자의 손에 있는 지는 몰라도 저것만으로도 이미 이곳에 북리웅풍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
"......."
"가만. 저기 누가 오고 있다."
장하영의 말에 삼인은 숨을 죽였다. 과연 희디흰 도복자락을 날리며 한 명의 노도인이 나타났다.
그러나 정양은 그것도 모르고 한창 검법 연마에 몰두하고 있었다.
도인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입가에 이따금씩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윽고 정양이 땀방울을 훔치고 검법 하나를 다 마치자 도인은 헛기침을 했다.
"험! 정양아. 너의 검도가 많이 늘었구나."
정양은 깜짝 놀라다가 도인을 보고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
"자...... 장문인......! 언제 오셨나요?"
"허허허....... 방금 전에 왔다. 그래, 초옥에 공양은 하고 왔느냐?"
"헹....... 그 가짜 소사숙 말인가요?"
그 말에 도인, 즉 화산 장문인은 정색을 지었다.
"그런 말을 하면 못쓴다."
정양은 불만인 듯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대체 알 수가 없어요. 소사숙께선 화산을 떠나신 지 오래되었는데 무림맹에선 어쩌자고 소사숙의 흉내를 내게 하는 거죠?"
도인은 탄식했다.
"그것은 네 사숙과 함께 이름을 날리고 있는 무당의 백유성 소협의 부탁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알아볼 것이 있어 그런 연극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너는 다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흥......."
정양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자신의 소사숙 외에는 누구도 존경하지 않았다. 도인은 그에게 다가가더니 뭐라고 이야기했다.
정양은 눈을 빛내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말을 들으며 손을 잠시도 쉬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화산 장문인으로부터 어떤 검법의 요결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장천림 일행은 화산을 떠나고 있었다.
달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화산을 뒤로 하고 떠나는 그들의 가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들은 화산 장문인과 정양의 대화를 듣고 여러 가지 의혹에 젖어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로 미루어 볼 때 북리웅풍이 이미 오래전에 화산을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그가 무엇때문에 화산을 떠났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강호에 북리웅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또 한 가지 의문은 가짜 북리웅풍 행세를 한 자는 백유성이 보낸 자였는데 백유성이 무엇때문에 수하로 하여금 그런 연극을 하게 했느냐는 점이었다.
"......."
일행은 어쨌든 화산을 떠나기로 했다.
북리웅풍이 없는 이상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문득 장하영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렇군! 바로 그 때문이었어! 왜 그걸 바로 생각하지 못했을까?"
"......?"
나머지 삼인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장하영은 눈썹을 움직이며 설명했다.
"백유성이란 자는 도대체 상관중과 당수문을 죽인 우리들이 누구일까 궁금했을 거야. 그리고 우리의 목적이 강호사공자 모두를 겨냥한 것인지도 확실히 알고 싶었겠지. 그래서 그는 북리웅풍에게도 우리의 손이 뻗는가를 시험하기로 한 것이다. 만일 이곳에도 손이 뻗치면 목적이 강호사공자에게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고, 더불어 그 이유마저 알게 될 테지. 그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어!"
"......!"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아주 교활한 놈이야. 이번에 그의 수하가 달아났으니 그는 확실히 우리의 목적과 원한의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석회림이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의미가 있고 말고! 병법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한다고 했다. 그 자는 우리의 정체를 알고 싶어했어. 이제 대상을 알고 이유를 안 이상 그는 좀더 유리하게 대처할 자신을 얻을 것이다. 그로 미루어 그 자는 아주 교활하고 치밀한 자임에 틀림없다."
장하영의 말에 세 사람은 침묵했다.
장하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앞으로 부딪치게 될 백유성은 상대하기가 극히 어려운 난적일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들의 가슴은 이내 무거워졌다.
달빛은 숨이 막힐 정도로 밝았다. 그러나 달빛 아래를 걸어가고 있는 사인의 가슴은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했다.
④
홍무(洪武) 15년 4월 16일
쏴아아.......
물소리가 들린다. 귓전에 찰랑이는 물소리는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오랫동안 그의 귓전에 부딪치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 그는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도 힘에 겨웠으나 초인적인 의지력이 그로 하여금 물가를 향해 기어가도록 만들고 있었다.
장강(長江).
수만 년을 도도하게 흘러내린 장강의 물은 탁하다. 그 탁류가 그의 몸을 흠뻑 적셔 놓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꼬박 이틀 간을 물에 떠밀려 내려온 것이다. 그러고도 죽지 않았다면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전신은 온통 상처 투성이였다. 등에는 부러진 장검이 아직도 박혀 있었으며, 옆구리에는 기이한 모양의 날카로운 병기가 꽂혀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전신에 최소한 열여섯 군데 이상의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그 상처는 물에 불어 흉하게 벌어져 있기까지 했다.
게다가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 이제는 흘러내릴 피가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
"으음......."
신음을 흘리고 있는 소년, 그는 백리진강이었다.
그가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것은 과거 황궁의 비밀창고에서 훔쳐먹은 각종의 영약 덕분이었다. 만일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백리진강은 강가에 드러누운 채 눈을 떴다.
태양(太陽).......
하늘에는 태양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흐려진 망막에 비친 태양은 그저 뿌연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쨌든 태양이 떠 있어 춥지 않아 좋다. 그는 전신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혼미함 속으로 잠겨 들었다.
.......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밤중이었다. 밤이 되자 극심한 추위가 그를 괴롭혔다.
피를 많이 흘린 데다 체력이 극도로 떨어져 추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손가락조차도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미루어 그는 회복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눈을 뜨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암천에는 드문드문 별이 떠 있었다. 그는 생각한다.
별 하나에 한 인간의 운명이 달려 있다면.......
나의 별은 저 중 어느 별일까.
그는 아무리 찾아도 자신의 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득한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별을 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몇 번이나 울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자신이 정했던 별은 어김없이 유성(流星)이 되어 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래.......
애당초 나의 별은 없었던 거야.
훗훗....... 나같은 놈은 애당초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백리진강의 눈은 이슬에 젖었다. 그는 아직 인생을 안다고 할 수 없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고초를 겪었다.
세상은 그에게 있어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고, 인간이란 믿음이 아니고 증오의 대상이며, 미래는 희망이 아니고 파국(破局)일 뿐이었다.
백리진강은 인생을 다분히 염세적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철이 들 때부터 이미 인생의 목적을 복수라는 명제로 정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몽사몽간에 밤하늘의 별이 모두 와르르! 허물어져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허억......!"
그 순간 다시 정신을 잃어 버렸다.
여인의 운명은 기구한 것이었다.
그녀는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죽었고 아홉 살 때는 부친마저 타계했다. 다행한 것은 그나마 집안이 부유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별 고생은 하지 않았다.
그녀를 열한 살 때까지 키운 것은 외조모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외조모는 그녀를 끔찍히도 귀여워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외조모도 곧 돌아가시고 말았다. 고아가 된 그녀는 결국 어머니의 인척인 어떤 집안에 의탁되었다. 그녀의 유산이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접을 받고 자랄 수 있었다.
그런데 불행은 쉬지 않고 그녀를 따라왔다. 그녀의 나이 십삼 세가 되었을 때였다.
한밤중에 그녀의 침실로 들어온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그녀가 이모라고 부르는 여인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고.......
그 바람에 온 집안이 난리가 나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일이 있은 직후 그 집안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술에 취한 사나이가 이모를 구타하고 허구한 날 도박에 미쳐 집을 나가기 일쑤였다.
그나마 그가 집어 가지고 나가는 패물이나 은자는 결국 소녀의 유산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 열네 살이 되었을 때.......
마침내 가산은 완전히 기울어 빚더미에 앉고 말았다. 결국 그로인해 이모는 자살을 하고 말았다.
이모가 죽은 후 여전히 이모부는 그녀를 탐내고 있었다. 아니 노골적으로 소녀를 겁탈하려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어느 날 밤 도망을 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상은 넓었으나 그녀 한 몸이 의지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는 낙양 근교에서 한 불한당을 만나 그때까지 고이 간직해 왔던 순결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그 불한당에게 반 년쯤 잡혀 있다가 마침내 기루(妓樓)로 팔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기녀가 된 그녀는 무척 아름다왔다. 어머니를 닮은 선천적인 미모와 비단결같은 피부가 수많은 사내들을 끓게 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항상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기루에서도 그녀는 얼마 있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칼부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몰래 기루를 도망쳐 나오게 되었다.
하늘도 무심치 않았음인가?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던 그녀는 한 마음씨 착한 젊은 어부(漁夫)를 만나게 되었다. 어부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다.
그녀는 어부와 함께 하면서 비로소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어부의 평범한 아내가 되어 하루하루를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심이었을까? 그녀의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고기잡이를 나갔던 남편이 그만 풍랑에 휩쓸려 실종되어버린 것이었다.
여인의 나이 열여덟 살의 일이었다. 비록 한창의 나이였으나 그녀의 마음은 이미 황혼이었다. 너무나 많은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마음이 늙어 버린 것이다.
그녀의 이름 환사금(幻思琴)이었다.
그녀는 어부를 잃고는 더이상 살아갈 자신을 잃었다. 결국 그녀는 한밤중에 강가로 나왔다.
그래.......
죽자.
이 한 몸 죽고 나면 더이상 괴로운 일은 없을 게 아니냐.
그녀는 별빛이 곱게 부스러지는 밤중에 장강의 언덕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신발을 나란히 강가에 벗어두고 강물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강물에 반쯤 들어갔을 때 그녀는 무엇인가 둥둥 떠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나무토막이려니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죽어가고 있는 한 사내였다.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