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강호무정 제10장 만남 또 하나의 운명(運命) - 검궁인
제10장 만남...... 또 하나의 운명(運命)
①
모닥불을 지피던 사람은 조천백이었다.
그는 갑자기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죽립 갈의인을 보고 놀랐다.
"......!"
설마 눈밖에 없는 이런 허허벌판 한가운데서, 그것도 가족들끼리 다 모여 환담을 나누고 있을 원단의 밤에 사람이 불쑥 나타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조천백이 누구인가?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위인이었다.
그는 한 눈에 상대방, 즉 백리진강이 풍기는 기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곧 사람좋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그렇지 않아도 적적하던 차에 잘 오셨소. 밤 바람이 차니 어서 불가에 앉으시오."
"......."
그러나 백리진강은 선 채 묵묵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특히나 이런 설원 한복판에 불을 지피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죽립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의 눈빛은 섬뜩하리만치 차갑고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조천백 또한 인내가 대단한 위인이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조천백은 사천에서 장천림을 도와 당수문을 척살한 뒤 일행과 헤어졌다. 무림맹의 경계가 너무나 삼엄하여 각자 흩어져 경계망을 벗어나기로 하자는데 합의했던 것이다.
그들은 잠시 경비가 완화되기까지 기다렸다가 화산에서 합류하기로 약정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백리진강을 만나게 되었다.
조천백은 처음 백리진강을 대하는 순간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싸늘한 기운이 피어 오르는 것을 금치 못했다. 다만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 그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중이었다. 여차하면 선공(先功)을 하거나 달아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만큼 백리진강이 풍기는 살기는 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잠시 살기를 띄운 채 그를 쏘아보던 백리진강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
조천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척이나 살기가 짙은 놈이군. 나이는 어린 것 같은데.......'
그러나 그는 더이상 상관 않기로 했다. 지나치게 경계를 하는 것도,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것도 다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타다닥...... 탁!
모닥불 만이 기세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조천백은 갑자기 생각난 듯 품 속에서 건량 꾸러미를 꺼냈다. 그리고 불 위에 올려 굽기 시작했다.
이런 추운 설원의 한복판에서 고기를 굽는 냄새가 나면 아무리 의지가 굳은 사람이라도 허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백리진강은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상대에게 손을 내밀 생각은 죽어도 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러나 코 끝으로 전해지는 고기의 향기는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이 자를 죽이고 먹을까? 하지만 고기 한 점 때문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살인을 밥먹듯이 했다해도 고작 한 점의 고기 때문에 살인을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였다.
"허허허....... 자, 자네도 들게."
조천백은 고기덩어리를 집어 그에게 건넸다. 그는 이미 상대가 몹시 허기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허허허....... 그럼 할 수 없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혼자서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모닥불 사이로 가끔씩 비쳐 보이는 상대방의 죽립 속의 눈빛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 하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 천림, 회림, 하영....... 그들의 눈빛과 같다.'
그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천백도 한 가지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눈빛도 동류의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천백은 품 속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는 술병을 내밀며 말했다.
"독한 죽엽청이오. 한 잔 하면 몸이 풀릴 거요. 허허...... 이것도 사양하겠소?"
그의 음성에는 다분히 비아냥거림이 깃들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리진강의 눈빛이 사나와졌다. 그는 죽립 사이로 그를 노려보았다.
"헛헛! 이 속에 독이라도 들어 있을까봐 그러는 모양이...... 헉!"
조천백은 찬바람을 들이켰다. 어느새 술병이 손에서 떠나 있었다.
술병은 눈 깜깍할 사이에 손을 벗어나 상대방의 손으로 가 있었다. 백리진강은 허공섭물로 술병을 낚아챈 후 병째 입에 대고 단숨에 대여섯 모금을 마셨다.
입에서 병을 떼면서 그는 차갑게 말했다.
"설사 독을 넣었다 해도 겁낼 내가 아니오!"
조천백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느닷없이 대소를 터뜨였다.
"으하하하핫......!"
"......."
갑작스러운 대소에 백리진강은 의혹의 눈을 떴다. 조천백은 대소를 뚝 그치며 술병을 빼앗더니 역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손으로 입가를 쓱 문지르더니 호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보아하니 자네도 쫓기는 몸인 것 같군!"
순간 백리진강의 눈에 살기가 일어났다.
"아아......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네. 나 역시 같은 입장이니까."
"......."
백리진강은 그말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같은 입장.......
그럼 이 작자도 도망자란 말인가?
"그런데 어린 친구, 자네는 강호경험이 너무 미숙하군."
조천백은 술기가 오른 탓인지 말을 놓고 있었다.
"......."
백리진강은 왠지 그가 그다지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쫓기는 사람일수록 더욱 여유를 가져야 하는 법일세. 옷도 깨끗이 하고 동작도 자연스럽게 하여야 한다네. 그래야 주위의 시선을 덜 받거든."
그 말에 백리진강은 자신의 옷을 무심코 내려보았다. 그리고 흠칫했다.
군데군데 검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는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 그가 고개를 들자 코 앞에 불쑥 내밀어지는 것이 있었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고기덩어리였다.
"하하! 배가 고프면 눈빛이 사나워진다네. 이걸 먹고 마음을 느긋하게 하게."
백리진강은 손을 내밀어 고기를 받았다. 왠지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고기를 입에 베어 물었다. 한 점을 뜯어 먹자 얼었던 위장이 녹는 기분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기를 먹는 일에만 몰두했고 조천백 또한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묵묵히 모닥불만 살폈다.
말 없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 간에 친근감이 짙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휘이이이...... 휘이잉......!
설원을 스치는 바람은 점차 살벌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설원 한가운데 모닥불을 마주한 두 사람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시간이 흐를 수록 두 사람 사이의 냉랭했던 기운은 훈훈하게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②
도동(道童) 정양은 화산을 등지고 떠나가는 소사숙 북리웅풍의 모습을 보고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소사숙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언젠가는 그런 모습이 되리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북리웅풍의 모습은 그가 보기에 당당하고 멋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는 북리웅풍이 항상 애지중지하던 애검(愛劍)을 지니지 않은 것을 보고 급히 달려갔다.
잠시 후 그는 헐레벌떡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소사숙! 소사숙......!"
그가 가슴을 들먹이며 뒤쫓아 오자 북리웅풍은 의아했다. 그리고 곧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정양이 무엇 때문에 쫓아왔는지 알아 차렸기 때문이었다. 정양은 숨을 가다듬지도 못하며 두 손으로 한 자루의 고동색 보검을 받쳐 올렸다.
"이걸...... 하아! 가져가지 않았어요"
그러나 북리웅풍은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다. 정양."
"네? 사숙께서는 강호로 나서는 것이 아닌가요?"
"왜 아니겠느냐?"
"그럼...... 검을 가지고 가시지 않고 어찌......?"
정양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소사숙의 별호는 천인검객이다. 검객이 검을 가지지 않고 강호에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북리웅풍은 담담히 말했다.
"검이 있으나 없으나 검객은 마찬가지다. 손 안에 풀잎 하나만 있어도 검이요, 설사 아무것도 없어도 심검(心劍)이 있으면 된다."
"......?"
북리웅풍의 말을 정양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멍하니 사숙을 바라볼 뿐이었다.
북리웅풍은 문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검을 도로 내밀며 말했다.
"이걸 너에게 주마. 네가 가져라."
"넷?"
정양은 크게 놀랐다. 그러나 북리웅풍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이어 정양이 보는 앞에서 그는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
정양은 어리둥절한 채 손에 쥐어져 있는 검을 어루만졌다. 그의 가슴은 마구 뛰고 있었다.
그는 벌써부터 사숙의 애검을 얼마나 가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실 그 검이 보검이라서가 아니라 은연중에 검에 어려 있는 사숙의 체취 때문이었다.
정양의 눈동자가 갑자기 빛났다.
'아아! 사숙님께서 나에게 이 검을 하사하신 것은 장차...... 훌륭한 검사(劍士)가 되라는 뜻일 거야!'
정양의 작은 느낌으로 인해 훗날 화산에 일대의 검수가 탄생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검을 선사한 북리웅풍마저 짐작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북리웅풍은 애검을 미련없이 정양에게 넘긴 채 화산을 등지고 강호로 떠났다. 그가 무슨 뜻을 가지고 강호로 들어섰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오직 그 혼자 만의 가슴 속에 깊이 묻어진 비밀이었다.
③
홍무(洪武) 15년 1월 15일.
황성(皇城) 금릉.
동창 본부에서 심기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인물이 있었다.
당금 동창의 대영반이라는 막중한 권력을 지닌 장영걸이었다. 그는 지금 방 안을 오락가락하며 노화를 삭이느라 애쓰고 있었다.
실상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좀체로 화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하영에 대한 소식은 없는가?"
"예. 아직......."
그의 발 아래 부복하고 있는 자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닥쳐라! 이 밥버러지같은 놈들!"
"죄, 죄송합니다."
"그럼 소수혈옥공을 쓰는 그 꼬마놈의 일은......?"
"그, 그것도 아직......."
순간 장영걸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참을 수 없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차마 수하를 내리치지는 못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수하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는 한숨을 쉬었다.
"휴우....... 왜 이렇게 일이 꼬이나."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가서 금위대장 추성결(秋星潔)을 불러와라."
금위대장(錦衛隊長) 추성결.
그는 어릴 적부터 금의위(錦衣衛)의 무사로 키워진 인물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무장의 기질을 타고난 자로써 그야말로 선천적인 군인이었다. 그는 타협이 없고 강직할 뿐더러 상부의 명을 따를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은 위인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천자를 제외하고는 동창 대영반 장영걸을 가장 존경했다. 사실 장영걸은 그의 후견인이었다.
그가 삼십대에 불과한 나이에 벌써 금위대장이라는 높은 직책에 오른 것도 따지고 보면 장영걸의 배경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오늘밤 장영걸이 그에게 내린 명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속명과 같은 것이었다.
- 전 병력을 동원하여서라도 반드시 그 등진강이란 꼬마놈을 잡아라. 반드시 생포할 필요는 없다. 발견 즉시 척살해도 좋다.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 그리고 장하영을 만나게 되면 이렇게 전해라. 즉시 황궁으로 귀환하라고. 이것은 나의 친명이라고 전해라.
추성결은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머리가 나쁜 위인은 아니었다.
그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것은 결코 용맹 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매사에 빈틈이 없고 신중한 위인이었다.
그는 장영걸의 명을 받고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강호(江湖).
그는 강호세계를 잘 알고 있었다. 강호 무림계의 인물들은 관가의 인물들과는 그 부류가 틀렸다. 그들은 천자의 명령조차 우습게 여기는 자들이었다.
또한 강호에 나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강호인과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추성결은 강호에 하나의 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소림(少林)이었다.
그에게는 단 한 명의 인척이 있었다. 그는 전란(戰亂)으로 일가붙이를 모두 잃고 혈혈단신으로 살아 남았다가 소림사에 입문한 사촌 형이었다.
그 사촌 형은 소림사에 입문한 뒤 뛰어난 능력으로 소림의 제일고수가 되었다.
당금 소림의 후기제일인으로 불리우는 오현대사(吾玄大師)가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추성결은 금릉을 떠나기 전 미리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머지 않아 소림사로 전달될 것이다.
그는 행장을 꾸린 후 신임할 만한 측근 수하 단 두 명 만을 대동한 채 눈보라치는 황성을 떠났다.
과연 평생 황성에서만 뿌리를 내렸던 그가 강호에 나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른지....... 그것은 누구도 예측못할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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