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무협] 강호무정 제22장 마지막 결사(結社) - 검궁인
제22장 마지막 결사(結社)
①
한 인간(人間).
그에게 있어서의 삶이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는 산다는 것의 의미를 하나의 목적에 국한시키고 살아왔다.
그것은 바로...... 복수! 그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복수는 그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에게 또 다른 인생의 의미 하나가 추가되었다.
그에게 삶의 새로운 의미를 추가시켜 준 것은 한 여인이었다. 또한 그녀는 그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선물을 주었다.
임신(姙娠)이었다. 그 여인은 그의 아이를 임신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고 어리둥절한 심정이었으나 차츰 시간이 흐를 수록 그것은 그에게 생의 전부를 보상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가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려는 순간 여인이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이다.
여인이 납치되었다는 것은 그의 아이 또한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침내 그는 여인을 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니 그의 인생 전부를 되찾기로 결심했다.
설사 그 일로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 행위로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애정을 느꼈으며 생명의 탄생을 기대하게 했던 그녀를 구하는데 목숨을 바치는 것만이 가장 값진 일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여인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는 혼자 힘으로는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천하에서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은 없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어쩌면.......
그라면 날 도와줄 지도 모른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그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②
모든 것은 옛날로 돌아왔다.
조천백은 여전히 개봉부의 시끄러운 저자 거리에서 차(茶)를 팔기 시작했다. 그는 바쁜 와중에서도 농담을 하고 즐겁게 차를 팔았다.
그의 찻집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그가 덕담을 잘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직접 끓이는 차맛이 훌륭하기 때문이었다.
북적대는 사람들.......
조천백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꿈같은 일이기도 했다. 자신이 다시 개봉으로 돌아와 찻집을 경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되찾은 모든 것은 명확한 현실이었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지난 일은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후후.......
산다는 것은 아주 좋은 거야.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것은 더욱 말이야.......
조천백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잎을 다듬고 있었다. 그는 온갖 종류의 차에 대해서 통달하고 있었다. 차라는 것은 정성을 기울이는 것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그는 차 한 잔을 만드는 데도 온 정성을 다 기울였다. 그것은 손님에 대한 예의였으며 그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그러니 조천백이 경영하는 작은 찻집이 장사가 안 될 리가 없었다.
어떤 때는 작고 초라한 찻집에 공자대부(公子大夫)들이 들를 때도 있었다. 그들은 차를 마시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하곤 했다.
"자네 집 차맛은 정말 일품이네. 대체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가?"
그렇게 물으면 조천백은 항상 똑같은 대답을 한다.
"헤헤! 별 것 아닙니다요. 그저 차잎을 만질 때 기도하곤 합죠. 이 차를 마시는 분들의 만수무강을 말입니다요."
조천백. 그는 사람 좋기로 소문이 난 찻집 주인이었다.
오늘도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차를 끓이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의 찻집은 그다지 넓은 편이 아니었다. 저자거리 한복판에 있었으므로 목이 마른 사람들이 잠깐씩 와서 차를 마시고 금세 자리를 비우기 때문에 그다지 넓은 장소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쪽 창가에 죽립을 쓴 한 인물은 벌써 한 시진 이상이나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는 외지인이거니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공연히 자꾸만 그 쪽으로 신경이 쓰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힐끔힐끔 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변함없는 자세로 죽립인은 앉아 있었다.
'......?'
그는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무엇하는 작자길래......?'
그는 고개를 흔들며 쓴웃음을 흘렸다.
'에라, 신경쓸 것 없지 않은가? 나는 그저 차나 팔면 되는 것이고........'
그는 신경을 끊기로 했다. 이 날의 수입은 꽤 좋은 편이었다. 그는 저녁이 되자 온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끼며 수입을 계산하고 있었다.
"허허....... 오늘은 평소의 두 배는 벌었는 걸?"
그때였다.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하셨군요. 형님......."
어디선가 들어본 음성이었다.
"......?"
조천백은 고개를 들었다. 죽립인이었다. 그가 계산대 앞까지 와 있는 것이었다.
"귀하는 뉘신데......?"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죽립인이 죽립을 젖히는 순간 그는 그만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자...... 자네는......? 아니 어떻게 여길......!"
죽립인은 나이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이는 청년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피부가 창백한 일개 소년으로 보일 정도였다. 소년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왼뺨에는 가느다란 상흔이 미세하게 나 있었다.
백리진강(百里眞强)이었다.
그는 두 눈에 경련이 이는 듯한 주름을 잡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형님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조천백은 심금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동안 백리진강을 까맣게 잊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마치 자신의 어떤 한 부분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듯한 묘한 감회를 느꼈다.
그것은 잊고 싶었던 어떤 부분이기도 했고, 또는 추억으로 나타나는 잔향같은 것이기도 했다.
"어..... 어떻게 된 건가? 죽었다고 하더니만......."
그렇다. 강호에 알려지기로는 백색마인이 이수에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가 이렇게 멀쩡하게 다시 나타날 줄이야.
"후후....... 죽은 것이나 다름 없지요."
"......?"
백리진강은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생각나는 사람이라곤 형님밖에 없었습니다."
"......!"
조천백은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백리진강이 무척 강한 소년이라고 알고 있었다. 때로는 그에게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백리진강은 너무나도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백리진강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세."
그는 백리진강을 찻집의 안채로 인도해 갔다.
③
사인(四人)이 모두 모인 것은 해가 넘어가고도 며칠이 지난 후였다.
원단(元旦)이 칠팔 일 흘렀으나 개봉부에는 아직도 명절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오랫만에 다시 한 자리에 모인 그들은 조천백의 말을 듣고 반응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건 안 돼! 난 반대야!"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장하영이었다. 그는 그동안 장천림과 함께 여기저기 바람을 쐬다가 조천백의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것이었다.
조천백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시종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단호히 거절한 것이었다.
"이유는......?"
조천백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장하영도 역시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사실 난 전부터 그 놈을 알고 있어. 놈은 자신을 아들처럼 사랑하던 양부를 배신한 놈이야. 아울러 그가 행한 일들을 들춰보면 도저히 인간성이라고 없는 놈이야. 그런데 우리가 그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냐? 누가 뭐라해도 난 반대다."
장하영의 어조는 차갑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천백이 말한 사람은 바로 백리진강이었으며 그는 백리진강을 도와 한 가지 일을 하자는 제안을 꺼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
장내의 중인들은 침묵에 빠졌다. 이때였다. 문이 열리며 백리진강이 들어왔다.
처음 그는 아주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방 안에서 장천림을 보는 순간 문득 안색이 기이하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
장천림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이럴 수가......! 저 아이가 바로 그 아이였단 말인가?'
장천림은 경악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
그는 길가에서 만두를 훔쳐 먹다가 잡혀 매맞는 아이를 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아이가 물었다. 어디로 가야 천하제일의 무공을 배울 수 있느냐고......!
그런데 그때의 그 아이가 바로 백색마인 백리진강이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운명이란 기구한 것이었다.
장천림은 문득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자네가...... 바로 그때 그 아이였을 줄은 몰랐군."
"......."
백리진강도 멍하니 장천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그도 장천림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눈에 그를 알아본 것이었다.
두 사람의 재회는 실로 팔 년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두 사람 다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때, 방 안의 사람들은 그들이 서로 아는 사이인 듯 하자 모두 눈길을 장천림에게 향했다. 은연 중에 장천림의 의견이 이번 일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석회림이 말했다.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나?"
"그렇네. 아주 오래 전 일이었지. 허허! 운명이란 정말 공교로운 것이군. 난 미처 생각도 못했어. 그 아이가 바로 이 친구였다니......."
장천림의 말에 석회림이 담담히 말했다.
"그럼 자네가 결정하게."
그 말에 장천림은 눈을 감았다. 짧은 동안에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지나갔다. 그는 이미 조천백으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백리진강이 그들에게 도움을 원하는 것은 한 여인을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일은 너무나도 위험부담이 큰 일이었다. 자칫하면 모두가 죽음의 구덩이로 끌려들어갈 수가 있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가소의 일로 그들 사인이 얼마나 무서운 위기를 겪었던가? 이제 간신히 되찾은 평화를 다시 깨뜨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작 백리진강이 바로 그때의 어린 소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망설이게 되었다.
"......."
중인들은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전권이 그에게 달려 있다는 듯이.
이윽고 장천림은 눈을 뜨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저 아이를 알고 있네. 물론 저 아이의 성격이 몹시 편협하고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지. 그러나 그 점 때문에 저 아이가 악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것은 다만 한(恨) 때문에 비롯된 일일 뿐이네."
한(恨). 중인들의 두 눈이 한결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장천림의 말이 계속 되었다.
"사실 우리들 모두 가슴에 한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일세. 저 아이...... 진강도 마찬가질세. 다만 어릴 적부터 깊은 한이 가슴에 쌓여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가 심하게 나타났던 것 뿐일세. 이것은 저 아이만의 책임이 아니라 이 시대 강호인 모두의 책임이네."
"......."
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굳어진 낯빛으로 장천림을 바라볼 뿐이었다.
장천림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따라서 나는 저 아이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네."
"......!"
모두의 안색이 저마다 변했다.
방 안은 한동안 보이지 않는 바람이 한바탕 회오리를 일으키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조천백이었다.
"너희들이 어떤 생각을 하던 나는 진강을 돕겠다. 나는 사실 차 파는 일이 지겨워 미치겠거든."
그의 말은 거짓이었다. 중인들은 그가 얼마나 찻집 주인노릇하는 것을 즐거워 하고 있는 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백리진강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했을 뿐이다.
이때 석회림이 음울한 음성으로 나섰다.
"나도 찬성이다. 정영(鄭英)이 없는 개봉은 싫어졌어......."
이번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장하영에게 몰렸다. 장천림은 그에게 물었다.
"하영. 너는?"
장하영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자네의 병졸 노릇을 하기로 했잖아? 그러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의견일치.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 사인은 백가소의 복수를 위해 이미 한 번 목숨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너무나 많은 고생을 했으며 강호계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다행히 천우신조로 모든 일을 무사히 끝내고 이제는 조용히 살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또다시 강호로 뛰어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번의 일은 어쩌면 과거에 비해 더욱 어려운 일인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은 장천림이 말한 한(恨)이란 말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도 저마다 깊은 한(恨)이 있었기에 백리진강의 한을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백리진강. 그는 과거에는 백색마인이란 이름으로 천하를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나약한 한 소년에 불과했다.
그는 중상을 오래도록 치료하지 못해 내력(內力)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따라서 자력으로는 환사금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천백을 찾은 것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조천백이 자신을 도와주리라고는 자신할 수 없었다. 다만 일말의 희망을 품고 찾아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들 사인이 모두 그를 위해 나서겠다는 것이 아닌가?
"고...... 고마워요....... 형님들......."
백리진강은 마침내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백색마인이 아니었다. 다만 나약하고 감정이 풍부한 소년일 뿐이었다.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장천림이었다.
"이건 자네의 일일 뿐더러 우리 모두의 일이기도 하다. 진강. 우리 자세히 계획을 세워보자."
④
만겁마옥(萬劫魔獄).
아는가? 세인들이여! 만겁마옥이 있다는 것을?
다시는 세상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중죄(重罪)를 지은 자들.......
그들은 설사 참형(慘刑)을 당할 지언정 만겁마옥에 들어가는 것만은 두려워 한다는 사실을. 만겁마옥은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만겁마옥이 있는 지형의 험악함은 물론이려니와, 만겁마옥을 수비하는 자들의 악랄함은 치가 떨릴 정도였다.
만겁마옥에 투옥된 자들은 극악무도한 살인범들이거나 아니면 대역죄(大逆罪)를 범한 역도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만겁마옥은 관부(官府)의 뇌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강호의 대마두나 녹림의 대도적같은 흉인들도 투옥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곳에 투옥된 자들에게 위협을 주기 위한 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만겁마옥. 그곳은 문자 그대로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만겁마옥은 검문산(劍問山)의 한 절곡에 있었으며, 그곳을 수비하는 자들을 관군과 황궁에서 파견된 무사들이었다.
만겁마옥은 대명조가 건국됨과 동시에 생겨났다. 원(元)의 잔당들이나 원조에 붙어 한족을 능멸하던 자들, 또는 극악무도한 흉인들을 가둔 곳이었다.
명조에서는 이들에게 영겁의 고통을 주기 위해 온갖 극랄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그곳은 홍무제 주원장의 철혈정치(鐵血政治)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의 수인(囚人)들에게는 등급이 매겨져 있다.
특급(特級), 일급(一級), 이급(二級), 삼급(三級)이 그것이었다.
삼급 이하의 수인은 없었다.
비록 삼급이라고 해도 그들은 하루 종일 중노역에 시달려야 하며, 하루에 단 한 끼의 식사밖에 하지 못하며 하루 종일 수없는 매질과 고문을 당해야 했다.
삼급 수인이 그럴진대 하물며 이급이나 일급 수인들의 고통이야말로 부언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환사금을 구하기 위한 작전(作戰)은 장하영이 주관하게 되었다.
장하영은 다시 한 번 과거의 능력을 써먹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 일을 총괄하게 된 것은 본래 관부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만겁마옥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백리진강으로부터 만겁마옥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하니 그들이 감행해야 할 모험이 바로 만겁마옥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결정한 이상 그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만겁마옥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했다.
장천림도 이야기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석회림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백리진강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백리진강이 환사금을 구하려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죽일 놈들....... 연약한 여인을 그런 곳에 투옥시키다니......!"
석회림이 이를 갈며 말하자 장하영은 담담히 설명했다.
"아마도 그녀를 만겁마옥에 투옥시킨 것은 금위대장 추성결일 것이다. 그 자의 성격은 나도 잘 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지 않고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지."
"그래서?"
석회림이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하자 장하영은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그가 진강을 잡지 못하고 놓친 것은 그의 명예에 먹칠을 한 셈이다. 따라서 그는 환사금을 인질로 삼고 있으면 언젠가는 진강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올 것이라는 점을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백리진강은 음울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내가 자신의 그물에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하영은 담담히 말했다.
"그만을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는 대명의 충실한 무장일 뿐이다."
자신의 지난 행적을 비추어 볼 때 추성결이 결코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때 장천림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하영. 계획은 섰는가?"
장하영은 히죽 웃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도합 삼 단계의 작전을 이미 완벽하게 세워 두었다."
"삼 단계?"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해졌다. 장하영이 세운 작전이라면 설사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든다 할지라도 그들 사인은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만겁마옥이 있는 검문산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만겁마옥의 지형도를 입수한 뒤 작전을 설명하겠다."
장천림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지금 떠나자."
모든 준비는 끝났다.
조천백은 두 번째로 휴업(休業) 쪽지를 찻집 문 앞에 걸었다.
그는 찻집의 문을 닫으며 잠깐 생각했다.
'과연 다시 돌아와 찻집을 열 수 있을까......?'
한편 석회림은 아내의 무덤에 찾아갔다. 그는 아내의 무덤 앞에 앉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당신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또 어기게 되었소....... 그러나 당신은 이런 나를 이해해 줄 것이오. 왜냐하면 우리 부부와 같은 이별을 겪은 자를 그대로 바라볼 수는 없기 때문이오. 그들이 행복하게 맺어지는 것을 당신도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도 쾌히 승낙을 한 것이오.......'
석회림은 아내의 무덤을 쓰다 듬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장천림과 장하영, 백리진강은 모옥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백리진강은 자신의 일로 인해 사인이 또다시 목숨을 건 모험을 하게 된 것을 못내 미안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을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었다.
문득 장하영이 입을 열었다.
"진강. 내가 왜 너의 일을 맡겠다고 승낙한 줄 아느냐? 애당초 나는 네 놈이 무척 싫었는데 말이야."
"......."
백리진강에게는 장하영이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그는 자신을 노골적으로 싫어하고 있었다.
"후후후....... 네 눈빛을 닮은 아이들이 있었지. 자그마치 천 명이나 되는 많은 아이들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오직 사인밖에 남아있지 않지. 왜냐고? 그들은 모두 죽었거든."
백리진강은 부르르 떨었다.
'천 명 중에 겨우 사인만이 남았다고?'
실로 가공할 일이었다.
이때 장천림이 담담히 말했다.
"하영. 지난 일을 굳이 꺼낼 것 없지 않은가?"
장하영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천림. 너도 나처럼 느낄 거야. 이 녀석을 처음 보았을 때 말이야. 너도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느냐? 녀석의 눈이 바로 우리들의 눈을 닮았다는 것을 말이야."
장천림은 술잔을 들어올렸다.
"나는 진작 알고 있었지."
"그래....... 바로 그 때문이야. 그래서 나도 응낙을 한 거라구. 제기랄......!"
장하영은 그 날 폭음을 했다. 그가 생전 이렇게 폭음을 한 경우는 없었다.
그는 치밀하고 차분한 위인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이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장천림은 술에 취한 그를 침상에 눕히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나선 백리진강은 말이 없는 그가 점점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문득 장천림이 입을 열었다.
"진강. 너는 그녀를 사랑하느냐?"
백리진강은 흠칫했다. 그의 얼굴에는 소년다운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그런 것 같아요."
"그런 것 같다고?"
"저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자꾸만 그녀를 떠올리게 되고......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장천림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그렇군.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지도 몰라. 나 역시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해 그런 느낌을 잘 알지 못하지."
"......."
백리진강은 왠지 그가 좋아졌다. 아주 친한 형제를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백리진강이나 장천림이나 따지고 보면 비슷한 인간형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행복한 과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생애를 사는 동안에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장천림은 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소 정신상태가 이상한 여인, 망아였다.
망아는 언젠가 그가 자신이 찾아와 줄 것을 기다리며 철주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장천림은 이번 일이 끝나면 그녀를 찾아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녀와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지에는 자신이 별로 없었다.
그녀의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백유성에 대한 기억들이 지워지지 않는 한 두 사람이 행복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지도 몰랐다.
"그녀를 구한 후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느닷없는 질문에 백리진강은 흠칫했다. 그는 아직까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문득 그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 올랐다.
"저는...... 그녀와 함께 아주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어요."
"그래.......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장천림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月). 반으로 갈라진 달이 무구하게 누리를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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