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강호무정 제6장 소수마경(素手魔經) - 검궁인





제6장 소수마경(素手魔經 )



홍무(洪武) 11년 정월(正月).

날짜의 의미를 잊은 지 오래다.

장천림은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 계산하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지옥십이관을 모두 넘었다.

과거 그는 지옥십이관 중에서 간신히 팔관까지는 통과했었다. 나머지 사관을 통과하는데 그는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겨야만 했다.

진저리 쳐지는 일이었다. 더욱이 교두(敎頭)도 없이 혼자서 지옥십이관을 넘는다는 것은 초인적인 의지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마음이 약해진다면 중도에서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뒤로 물러날 수 없도록 퇴로(退路)마저 기관을 봉쇄해 놓았다.

화관(火關)....... 빙관(氷關)....... 독관(毒關)....... 도관(刀關).......

그 관문들은 그의 몸에 무수한 상처를 만들었다. 그는 불에 온 몸을 데어 한 달 가량을 꼼짝도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빙관에서는 온 몸이 얼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무서운 것은 독관이었다.

독관에서 전신을 칠백여 종의 독극물에 담근 채 온 몸이 두 배나 되도록 부은 상태로 그 독이 체내에서 섞여 일으키는 고통을 참는 것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극기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독관마저도 통과하였다. 그로 인해 그는 백독불침의 몸이 되었다.

도관(刀關)은 아수라지옥이었다.

도관에 들면 사방으로부터 무수한 창과 검, 칼들이 날아든다. 그 날카로운 칼날은 그의 몸을 수없이 난도질한다. 결국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곤 했다.

만일 그의 뇌리에 백가소의 환영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벌써 포기했을 것이다.

어느새 세월은 물같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대충 불귀곡에 들어온 지 일 년 반이 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

이대로 출곡한다 해도 과연 강호사공자를 죽일 수 있을까?

그 점에서 그는 자신이 없었다. 과거의 감각과 민첩함은 찾았으나 과연 중원 정통문파의 일류 고수인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지옥십이관을 모두 통과한 이상 더이상 불귀곡에 머문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그는 불귀곡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출곡하기로 한 날 아침이었다.

그는 지옥십이관의 마지막 관문인 도관의 가로막힌 석벽 안쪽이 비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우연히 석벽을 두드리다가 발견한 사실이었다.

속이 비어있는 소리가 공명으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 안에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그는 철검으로 석벽을 후려쳤다. 과연 불꽃을 내면서도 울리는 소리는 허전한 것이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석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반나절이나 되었을까?

마침내 와르르! 석벽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또 다른 석부였다.

반듯하게 다듬어진 석부는 한 눈에 보아도 인공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석부를 둘러 보았다.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으나 무척이나 중요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섯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석실에는 여러 가지 문서(文書)들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 중 한 개의 방에는 영약(靈藥)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공을 증진시키는 영약들이었다.

나머지 세 개의 방에는 중원무림 각 대문파(各大門派)에 대한 상세한 내막을 적은 문서들이 서가에 정리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들을 척살할 때 참조하기 위해 작성한 것인 듯 했다.

놀라운 것은 마지막 방에 있었다.

비급(秘級). 서가의 책상에는 온통 무공비급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서가에는 대원제국 황가독문(皇家獨門)의 무공에서부터 중원제파의 각종 무공비급들이 꽂혀 있었다. 그것은 원이 중원무림을 격파하기 위해 수집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청룡단에 속한 자객들에게 익히게 할 목적이기도 했으며, 각 파의 무공들의 단점을 파악하기 위해 모아 놓은 것이기도 했다.

이것이다! 이것들을 익히자!

장천림은 하늘이 자신을 도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날부터 석실에 틀어박혀 새로운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약실(藥室)에 있는 영단비약들은 그의 무공증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영약들을 복용하면서 잠을 자는 것도 잊고 피나는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수염과 머리칼이 뒤엉켜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입고 있는 옷도 거의 걸레쪽이 되다시피 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나날이 새로운 무공을 익히는데 빠져들고 있었다.

세월은 바람처럼 흐른다. 그리고 흐르는 세월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

인간도 변하고 산하(山河)도 변한다. 더욱이 목적을 가지고 한을 품은 인간의 마음은 더욱더 모질어지는 법인가 보다.

복수를 한다는 집념은 세월이 흐를 수록 쇠퇴해 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극명해지고 있었다. 장천림은 시간도 정지된 듯한 불귀곡의 석부에서 혼자의 몸으로 무공을 익히는데 몰입되어 있었다.

만일 그에게 복수의 일념이 없었다면 도저히 그 많은 시간들을 견디어낼 수 없었으리라.



홍무(洪武) 13년 10월.

인간에게는 빈부(貧富)와 계급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속옷 나부랭이와 식사 후에 마시는 한 잔의 차에 이르기까지 등급에 의하여 격이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에도 예외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계절이다. 땅을 가는 농부의 험한 손에 내리던 가을(秋)은 지금 이곳 황궁이 있는 금릉에도 똑같이 내리고 있다.

사나이.

비상하는 독수리 문양이 수놓아진 백색무복을 입고 황궁의 청석(靑石)이 반듯하게 깔려 있는 대도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어가는 품위있는 걸음걸이는 그가 곧 이 황궁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나이는 약관이 조금 넘어 보였을 뿐이나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잘 다듬어진 용모와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영준한 용모도 용모려니와 그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기상과 날카로운 면이 느껴지는 것이다.

규칙적인 걸음걸이로 걸어가던 사나이는 문득 걸음을 멈춘다.

그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고 있었다. 사나이의 시선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나이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육순이 넘어보이는 한 명의 환관 복장의 노인이 포박된 채 개처럼 의금부 관원들에게 끌려가고 있는 광경이 비친 것이다.

"으음.......? 등태감(登太監)이.......?"

이렇게 중얼거린 사나이는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쓸데없는 일이겠지."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간다.

그가 향하는 곳은 황궁에서는 약간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커다란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날따라 황궁 내의 공기가 다소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본래 황궁은 언제나 경비가 삼엄한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살벌한 기운이 퍼져 있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황궁이라면 그에게는 집안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따라서 그가 모르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사나이가 황궁 내에서 요직을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보통 요직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열 평 가량 되어 보이는 밀실이었다.

사방 벽에는 중원전도(中原全圖)가 벽지처럼 도배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살풍경한 분위기였다.

이 밀실이 바로 대명황실의 최고 첩보기관인 동창(東廠)의 본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불과 몇몇의 요인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금의 황제 홍무제(洪武帝)는 동창을 자신의 오른팔로 여기고 그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동창의 힘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들은 황가의 인물에서 고관대작에 이르기까지 마음대로 체포, 구금의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역모의 가담자나 그밖의 불순분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한다.

그러므로 금릉의 권문세가에서는 동창 알기를 귀신 보듯 하는 것이다.

검은 태사의에 앉아 있는 역시 검은 옷의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

그는 언뜻 서당 훈장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창의 최고권좌에 앉아 있는 영반이었다. 수백 명의 생살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대명부를 흔들고 있는 인물이었다.

대영반 장영걸(蔣英傑).

권문가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는 황제의 직속이며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하룻밤에 권문가를 온통 피비린내로 진동케 할 수도 있었다.

전 금군대도독(禁軍大都督)이었던 장무혁(蔣武赫) 대장군의 친 아우이자 대명제국을 일으킨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지금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언제나 그가 신뢰하고 있는 인물의 낮고 침착한 음성이 들리고 있었다.

"부영반 장하영(莊河英),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장영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린다.

"들어와라, 하영."

그의 말투는 인자하게 들렸다. 들어선 청년은 백색무복을 입고 있었다. 바로 방금 전 청석대로를 가로질러온 사나이였다.

장하영은 앞으로 다가와 한 쪽 무릎을 반쯤 꺾어 예를 표했다. 그리고 일어서더니 곧바로 부동의 자세를 취했다.

그를 바라보는 장영걸의 시선은 부드럽기만 했다.

'기특한 놈. 볼수록 커지는구나.'

장하영. 그는 석년에 병사한 금군대도독 장무혁의 독자(獨子)이자 바로 장영걸 본인의 조카이기도 하며, 또한 동창의 부영반이기도 하다.

장래가 촉망되는, 아니 전도가 양양한 청년이었다.

"그래 그동안 별고 없었느냐?"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이었다. 동창 소속의 사람이라면 꿈속에서라도 듣고 싶어하는 말소리지만 장하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순간 장영걸은 내심 쓸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엇다.

'ㅉ. 여전하군. 녀석, 모처럼 삼촌을 보면 미소라도 지을 것이지........'

그는 섭섭하다. 그러나 그것이 조카 장하영의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영걸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이곳은 동창밀실이고, 그가 조카를 부른 것은 공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대환관인 등소가 체포되었다."

".......!"

"예전에 등소는 자신의 양자인 등진강이라는 소년을 소태감으로 들여보낸 적이 있었다. 아마 너도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

장하영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웬만한 일에 안색이 변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소태감 등진강을 알고 있었다. 워낙 인상이 강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소년이 며칠 전 이유없이 행방을 감추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조사하던 중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

"소년이 행방을 감춤과 동시에 황궁의 비밀무고(秘密武庫)가 털렸다는 것이다."

".......!"

"그래서 등소가 그 책임을 지고 체포당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비밀무고에서 없어진 물건이 문제인 것이다."

".......?"

장하영은 이제까지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그러나 점차 그의 얼굴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천년하수오(千年荷首烏), 만년설삼(萬年雪蔘), 소림대환단(少林大還丹) 여섯 알, 구지자엽초(九枝紫葉草), 공청석유(孔淸石乳) 한 병........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종류의 영약류와 함께....... 아니다. 그런 것은 그다지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한 권의 중요한 문서(文書)가 없어진 사실이다. 그래서 너를 부른 것이다."

순간 장하영의 동공에서는 강한 의문이 떠올랐다.

'겨우 그런 일로 나를........'

아무리 중요한 물건이 없어졌다고 해도 그까짓 좀도적에 대한 일에 자신이 직접 나서야 되겠느냐는 강한 반발인 것이었다.

딴은 그렇다. 장하영은 동창이란 막강한 권력부의 부영반이다. 그런 그가 도적을 잡는 일에 직접 나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아무리 없어진 물건들이 중요하다고 해도 고작 약 나부랭이일진데........ 그 정도로 동창이 나선다는 것만 해도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자신을 장영걸이 친히 부르다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때 그의 마음을 읽은 듯이 장영걸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없어진 문서........ 아니다. 그것은 문서가 아니라 한 권의 무경(武經)이다. 그 무경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름을 들으면 너도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소수마경(素手魔經)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겠지?"

"소수마경!"

마침내 장하영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흘러 나왔다.

- 소수마경(素手魔經).

그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전설은 말한다.

.......소수혈옥광(素手血玉光)이 나타나면 천하가 피에 잠기게 되노라!

소수마경은 칠백 년 전 천축(天竺) 소뢰음사(少雷音寺)에서 파생한 악마의 무경이었다. 이 무공을 익히게 되면 손바닥이 투명한 흰색을 띄게 되며 공력의 정도에 따라 손바닥 한가운데(掌中) 혈옥색의 반점이 생긴다.

일단 이 무공에 적중하게 되면 생물은 결코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 만일 십이 성에 달하게 되면 심성(心性)이 변하여 악마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서운 마공이었다.

칠백 년 전 천축의 마승 파가랍(破伽拉)이 이 마공을 익혀 천축을 피로 혈세하고 중원으로 건너 왔을 때 중원은 도합 칠십오 개의 문파가 무너졌었다.

만일 당시 소림의 신승(神僧) 무한선사(無限禪師)가 소림의 백팔나한대진과 무당의 대칠성검진, 그리고 중원 무림의 일백팔인의 고수들이 연합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를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원에서 소수혈옥이라는 말은 곧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였다. 그로 인해 소수마경은 금단의 마경으로 불리워졌으며 어떤 인물을 막론하고 그 마경을 익히게 되면 전 무림의 공적으로 선포된다는 철칙이 생겼다.

그후 칠백 년이 흐르는 사이 소수마경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그 마경이 황궁무고에서 잠자고 있었을 줄이야.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마경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실로 전율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이 마경이 세상에 나간다면 머지 않아 천하는 피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이 일이 더 번지기 전에 마경을 회수하여야 한다."

장하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녕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그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느꼈다.

숙부 장영걸이 자신을 부른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그가 생각하기로도 소수마경이 강호에 나간다면 이후로 벌어질 일은 상상하기도 무서운 결과가 파생할 것이다.

"너에게 환영팔신(幻影八神)을 주겠다. 적절히 부릴 줄로 믿는다."

환영팔신.

그들은 본래 사도 출신의 고수들이다. 후에 황궁에 투신하였으나 그들의 능력은 가히 신비경이었다. 그들이라면 무슨 일을 도모하든 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장하영은 본래 혼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위인이었으나 이번만큼은 환영팔신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이번에는 그도 거절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 만의 방식을 고집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허허........ 너의 무운을 빈다. 즉시 떠나도록."

장하영은 절을 한 뒤 밀실을 물러났다.



준비는 간단했다.

장하영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뒤 간단한 여장을 꾸렸다. 그는 방 안을 둘러 보았다. 쓸쓸한 방 안이었다. 특히나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로 그의 집안은 쓸쓸하기만 했다.

그는 금릉의 권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전의 그의 과거가 자꾸만 떠오르고 있었다. 명예도 권력도 그에게는 뜬구름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그것은 그가 남다른 과거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그는 한 소년을 떠올린다.

등진강. 그런 이름을 가진 소년이었다. 예전에 한 두 번인가 그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얼굴이 예쁘장하고 피부가 흰 소년이었다. 그는 소태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왠지 남성을 거세한 환관이라는 느낌이 와 닿지 않았다.

특히나 왼쪽 뺨에 미세흔(微細痕)으로 그려져 있는 한 줄기의 상흔(傷痕)이 왠지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섬뜩하다고 느낀 것은 그 상흔 때문 만이 아니었다.

눈빛. 바로 등진강의 눈빛 때문이었다.

그는 등진강의 눈빛이 누군가를 닮아 있으며, 그 눈빛이 자신이 무척 싫어하는 눈빛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눈빛이 누구를 닮은 눈빛이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언젠가 우연히 동경(銅鏡)을 보고서야 그 눈빛이 자신의 눈빛을 닮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그는 등진강이 더욱 싫어졌다. 그런데 놈이 기어이 일을 낸 것이다.

대체 놈의 정체는 무엇인가.......?

애당초 소수마경을 탈취할 목적으로 등소의 양자가 된 것인가? 그렇다면 놈은 무섭도록 집념어린 놈일 것이다.

놈이 양자가 된 것은 벌서 몇 년 전이었다. 그렇다면 놈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많은 세월을 인내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 종류의 인간은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한 성품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장하영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회랑에 나서자 가을 하늘이 보였다. 그는 다시 허파를 최대한으로 늘리며 그 가을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는 요대의 단추를 눌렀다.

찰칵!

경쾌한 소리가 나며 요대는 한 자루의 검(劍)으로 바뀌었다.

신선한 검날(劍刃).

그것은 황제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어검(御劍)이었다. 그는 이 검에 이름을 붙였다.

- 무루(無淚).

눈물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 검을 사랑했다. 그는 검날을 손가락으로 퉁겼다.

찡........

심금을 울리는 맑은 울음소리가 나고 있었다.

철컥!

그는 다시 검을 요대로 집어넣으며 걸었다. 걷다보니 생각나는 얼굴들이 있었다.

잊혀진 과거 속에서도 언제나 뚜렷이 떠오르는 이름들과 함께 그들의 얼굴은 아직도 붓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기만 하다.

'석회림........ 조천백........ 그리고.......? 맞아. 장천림이랬지.'

순간 장하영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이 지겨운 생활을 얼마나 싫어했는가? 이번 기회에 그들을 만나 밤새워 술이나 마셔보자.'

장하영은 회랑이 끝나자 문득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팔신!"

순간 그림자가 이리저리 이동하는 듯 하더니 회랑 아래 팔인의 인물이 소리없이 떨어졌다. 그들은 똑같이 검은 옷을 입은 중년인들이었다.

장하영은 기분좋은 음성으로 명령했다.

"준비하라. 강호로 나간다."



홍무(洪武) 14년 5월 21일.

콰콰콰....... 꽝!

석부를 온통 진동하는 굉음이 울림과 동시에 돌가루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장천림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앞 석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는 다소 놀랐다.

그는 시험 삼아 천마쇄강인(天魔碎剛印)이라는 장법을 전개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께가 한 자가 넘는 두터운 석벽이 단번에 무너지며 구멍이 뚫린 것이 아닌가?

그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후흐흐....... 후하하하핫핫핫.......!"

그의 웃음소리에 석실이 무너질 듯 진동하며 자욱한 돌가루가 회오리쳤다. 장천림은 신형을 날렸다.

휘익!

그의 신형은 육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빛살처럼 날아갔다. 그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이제 나가자.

더이상 기다릴 수는 없지.

강호사공자.......!

개봉부(開封府).

와글와글........

시끌벅쩍........

대도에서는 흔히 수많은 인파를 보게 된다. 이곳 개봉부도 예외는 아니다. 개봉부는 하남의 성도이자 황하를 건너는 요지이므로 수륙양로의 중심지로 오래 전부터 많은 인파들이 들끓는 곳이다.

노상 연변에 위치한 주루는 이층이었다.

이층에서 내려다보면 저자의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잇점이 있었다.

"......."

주루의 이층 창가에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허리에는 한 자루의 철검(鐵劍), 입고 있는 옷은 낡은 흑의였다. 그의 얼굴은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무척이나 피로에 지치고 일면은 권태로와 보이기도 하는 얼굴이었다.

만일 그의 나이가 많지 않다는 점 만을 제외한다면 인생에 지친 중년의 나그네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눈썹 모양이나 우뚝 선 콧날, 한 일 자로 다문 입술은 준수함을 느끼게 했다.

그는 아까부터 맞은 편 다점(茶店)을 보고 있었다.

찻집은 어디를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저자에 있는 맞은 편의 찻집은 손님들이 붐비고 있었다. 뜻밖인 것은 찻집의 주인이 직접 차를 팔고 있다는 점이었다.

주인은 이십 대였으나 다소 뚱뚱한 몸매로 인해 좀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 역시 흰 얼굴에 준수한 편이었다.

그는 여유롭고 느긋한 모습이었으며 차를 끓이는 모습에서는 생활에 대한 만족과 흥미가 나타나 있었다. 흑의인은 아까부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몇 시진 째인가.

이윽고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찻집은 문을 닫고 있었다.

다점의 주인은 깨끗한 화복으로 갈아 입고 거리를 횡단하고 있었다. 그가 걸어가자 흑의사나이는 일어섰다. 그리고 주루를 내려와 멀찍이서 그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멀리서 보았을 때와는 달리 화복인은 키가 장신이었다. 그에게서는 왠지 강인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일개 다점의 주인이라고 보기에는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해가 뉘엿뉘엿해지고 시장도 파시를 맞은 탓인지 사람들이 드문드문 사라지고 있었다. 다점 주인은 골목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역시 흑의사나이도 그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다점 주인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흑의인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따라가고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다점 주인은 다시 걸었다. 그러다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다점 주인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선생, 혹시 나를........"

그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흑의인에게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겁을 먹은 표정은 아니었다.

이때 흑의사나이는 음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랫만이군 칠십육 호. 아니....... 천백, 조천백(朝天白)."

순간 다점 주인은 불에 덴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초라해 보이는 흑의 사나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참 후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묻고 있었다.

"당신........ 혹시........ 혹시........"

그는 갑자기 와락 다가서더니 흑의 사나이를 가까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연후 격동에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천림(天林)! 천림........ 맞지?"

그는 아득한 기억을 더듬어 무엇인가를 찾아냈는지 잔뜩 흥분한 음성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초라한 흑의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으아악! 살아 있었구만!"

덥썩!

거구의 사나이가 반가움과 희열에 젖어 굳세게 끌어안는 그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흑의사나이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잠자코 선 채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나다. 장천림!"

다점 주인 조천백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으하하하.......! 그래! 반드시 살아있을 줄 알았어. 왜.......? 이제야 나타났냐? 으하하하......!"

개봉부에서 가장 화려한 기루(妓樓).

천화루(天華樓)라면 웬만한 부호가 아니라면 감히 오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기루에서 기녀조차 부르지 않고 사나이 둘이서 연신 껄껄거리며 담소하고 있었다.

기녀를 부르지 않을 양이면 무엇 때문에 이런 비싼 기루에 왔는지 모르나........ 그들은 감회에 젖어 있었다.

다점의 주인 조천백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시켜놓은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는 그저 연신 장천림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죽은 귀신이 살아온 듯 온통 신기한 표정이었다.

"대체 자네........ 그동안 무엇을 했길래 이제야 나타났는가?"

"......."

"난 반드시 자네가 살아올 줄 알았어. 암, 자네가 누군데 쉽게 죽겠나?"

"......."

"그래 지금껏 무엇하고 지냈나? 엉! 허허........ 말 좀 하게."

장천림은 비로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부탁이 있어 왔네."

한 마디였다. 그러나 조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응? 무슨 부탁인가? 허허........ 내가 개봉부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나?"

장천림은 담담히 말했다.

"언젠가 자네가 개봉부에 가보고 싶다고 한 말을 떠올렸을 뿐이네."

"응. 응, 그랬었군. 하하........ 그래, 잘 왔어. 잘 왔다구!"

조천백은 눈물까지 질금질금 흘리며 기뻐한다. 그들이 어떤 사이인가?

불귀곡에서 생사를 함께 하던 혈명단의 옛 동지가 아닌가?

사실 조천백은 자신이 살아난 것이 바로 장천림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참, 부탁이 있다고 그랬지. 하하........ 무엇이든 말하게. 설사 하늘의 별이라도 따 달라면 따오겠네."

그렇다. 그는 새로운 삶의 은인인 장천림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장천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결코 그런 쉬운 부탁이 아닐세."

맙소사!

하늘의 별을 따는 것이 쉬운 부탁이란 말인가? 조천백은 비로소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며 정색을 했다.

그는 잠시 장천림을 노려보더니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이보게 천림, 나는 이미 자네에게 목숨을 빚졌네. 그리고 지금 남은 나의 삶은 이미 자네의 것이네. 그러니 무슨 부탁이든 부담없이 하게."

잠시 말없이 조천백을 바라보던 장천림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강호사공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장천림을 보고 조천백은 그만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맙소사! 강호사공자라니........ 왜........ 왜 하필 그 자들과 원한을 맺었나?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는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장천림의 눈을 한동안 응시하던 조천백은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굳이 그 이유를 알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상대는 강호사공자일세. 보통 문제가 아닐세. 실로 우리 두 사람의 힘으로는 벅찬 상대란 말이야."

장천림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렇네. 사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네를 찾은 걸세."

"......."

장천림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다시 놈들을 찾았을 때는 이미 놈들은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있었네.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곳으로........"

그의 짙은 검미가 잔뜩 찌푸러지고 있다.

그렇다. 그는 수 년간 혼자서 고독하게 불귀곡에서 무공수련을 쌓았다. 그 목적은 오직 강호사공자를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공을 완성했다고 자신하고 강호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그 세월 동안 강호사공자 역시 놀고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지난 날보다 더욱 강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 강호사공자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조천백을 찾은 것이다.

조천백은 입술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좋아. 상대가 누구든 간에 어쨌든 자네의 원수는 곧 나의 원수이니 반드시 복수를 해야겠지. 그런데 계획은 세워두었나?"

장천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조천백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으음. 어쨌든 좋아. 일단 동료들을 모으세. 참, 자네 회림을 알고 있지?"

"삼백삼 호?"

그래 그의 이름이 석회림(石回林)이지. 마침 그 놈이 이곳에서 의원 노릇을 하고 있다네. 기껏 훈련을 받을 때 배운 독술을 가지고 의원 노릇을 하며 생사람을 잡고 있지."

"잘됐군........"

장천림은 중얼거렸다. 그의 뇌리에는 석회림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불귀곡에서 간신히 살아 남은 소년들은 불과 네 명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잊을 리가 없었다.

장천림. 그는 이제 강호사공자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그 동료들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안돼!"

장천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째서?"

조천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석회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느닷없이 장천림이 반대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장천림은 완강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게 이미 부양할 아내가 있다면 곤란해. 그건 두 사람 모두를 죽이는 결과일 뿐이야."

그는 말을 마치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어쨌든 안돼. 나 하나의 원한 때문에 행복한 가정을 파괴한다는 건 안 될 일이야. 만약 자네가 결혼을 했다면 나는 자네를 절대 찾지 않았을 거야."

"......."

"회림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세."

장천림의 단호한 말에 조천백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장천림이었다.

"자네 육백 호의 소식을 아나?"

그 말에 조천백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육백 호? 아, 장하영을 말하는군. 알고 있지. 그 놈은 아주 잘 되었어. 하하........ 놈은 동창의 부영반이란 높은 직위를 갖고 황궁에서 근무한다고 하더군. 허허........ 우리들 가운데 가장 잘된 셈이지."

"음. 그렇다면 그도 곤란하겠군."

장천림의 말에 조천백은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장천림이 비록 겉으로는 무정한 듯이 보이나 실은 무척이나 다감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리는 것이 많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새삼 장천림이란 사나이에 대한 매력이 더해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었다.

장천림은 담담히 말했다.

"자, 이런 말은 그만하고 우리 술이나 마시세."

"술. 그것 좋지. 하하하! 자, 오늘 내가 옛 친구를 만난 기념으로 사겠네. 핫핫.......! 사실 그동안 돈을 좀 모았거든."

그는 손뼉을 딱딱 쳤다. 그러자 즉각 집사가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나리."

"핫핫핫! 오늘은 아주 기분 좋은 날이야. 이봐, 이 집에서 가장 예쁜 계집과 최고급의 술을 가져와라."

"예예! 알겠습니다요."

집사는 싱글벙글하면서 돌아갔다. 잠시 후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많은 안주와 술이 들어왔다.

디디디...... 딩!

은은한 주악소리가 들리더니 일단의 미희(美姬)들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그녀들은 이 기루에서 가장 비싼 기녀들이었다.

기예를 다루는 기녀, 가무를 하는 기녀, 또는 수청을 드는 기녀까지 몽땅 동원된 것이다.

"하하하! 자, 우리 오늘밤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봄세."

"물론이지."

두 사람은 잔을 부딪히며 폭음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술에 원한이라도 진 사람들인 양.......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다.

어젯밤 늦도록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았다. 장천림은 갈증을 느끼며 손을 저었다. 어디 물이라도 없는가 해서였다.

뭉클........

그런데 손에 잡히는 것은 뜻밖에도 뭉클한 감각의 피부였다.

'.......!'

그는 흠칫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피부의 질감으로 보아 여자임이 분명했다.

여자라니? 그는 여자라고는 거의 접하지 않고 살아왔다. 단 한 번 여자를 안은 것은 바로 백가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이, 벌써 일어나시나요? 흐응. 좀더 자요."

애교있는 코먹은 음성이 귓전에 들린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있는 곳은 하나의 화려한 방 안이었다.

그런데 푹신한 침상 위에 자신은 이미 홀랑 벗고 있을 뿐더러 바로 옆에 역시 알몸의 여인이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어리둥절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젯밤 여러 명의 기녀들과 함께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시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는 피식 웃었다.

그랬었군.

조천백 네가........

그는 몸을 일으켰다.

"아이........ 나리."

그의 목을 부드럽게 휘감는 손이 있었다. 장천림은 잠시 부르르 전율했다. 수 년 동안 여자라고는 구경도 하지 못했었다.

그도 남자였다. 더욱이 누구보다도 건장한 사나이다. 알몸으로 한 이불 속에 누워있는 여체를 접하고도 욕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깨끗한 척 할 것은 없지!'

그는 여인의 허리를 와락 안았다.

"어머머.......?"

기녀는 코먹은 소리를 내면서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 바람에 투실투실한 유방이 흔들렸다. 뿐만 아니라 희디흰 장딴지가 허공에서 한 바퀴 춤추듯 휘저어졌다. 그 위에 장천림의 육중한 몸이 짖눌러 갔다.

여인의 유방은 풍만했다.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을 정도였으며 탄력이 있었다. 게다가 여인의 피부는 눈처럼 희고 비단결처럼 부드러웠다.

이만하면 일개 기녀치고는 일급이었다. 그 정도 기녀를 하룻밤 사려면 다점 주인인 조천백이 적어도 한 달 이상을 벌어야 할만한 돈을 지불해야 했다.

더욱이 기술 또한 일품이었다. 장천림의 손길이 닿는 순간 여인의 몸은 펄펄 끓었다. 아니 손길이 스칠 때마다 툭툭 튀곤 했다. 그의 손이 유방을 움켜쥐자 허리가 들썩여 지는가 하면 둔부가 경련을 일으켰다.

"흐응!"

콧소리 또한 색정적이었다. 일반적으로 돈을 받고 몸을 파는 기녀들이란 형식적으로 정사에 응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녀는 삼급에 속했다. 실제로 일급 기녀들은 그녀들 스스로 정사에 도취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쾌락을 상대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장천림은 오랜만에 처음으로 쾌락의 궁극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남성이 여인의 비궁으로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것이 뇌리에서 잊혀졌다. 복수의 집념도, 앞날에 대한 걱정도.......

그는 성난 사자가 된 듯 미친 듯이 여체 위에서 용트림하고 있었다. 그가 거칠게 나오자 여인은 기성을 질렀다.

"아아........"

다섯 번째의 사정이 끝났을 때 여인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여인이 나른한 표정으로 떨어지자 장천림은 비로소 그녀를 놓아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장천림은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벌써 아침이었다. 아니 햇살이 벌써 한 뼘 이상 올라가 있었다. 그가 눈부신 듯 가늘게 눈을 좁히자 문득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천림. 잘 쉬었나? 기다리고 있었네."

반갑게 껄껄 웃으며 다가오는 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조천백이었다.

그의 뒤에는 또 한 명의 사나이가 따르고 있었다. 장천림은 처음에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날렵한 몸매에 황의를 입은 인물이었다. 그는 허리에 약상자를 끼고 있었는데 두 눈은 약간 갸르스름했다.

어딘가 어눌해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그것은 그가 보여 주는 겉모습에 불과했다. 그를 보는 순간 장천림은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넌........ 삼백삼 호!"

장천림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하하하! 천림, 정말 오랫만이다."

303호, 아니 석회림은 달려오더니 그의 가슴을 세게 끌어안고 있었다.

장천림도 마주 포옹한 채 한참 동안을 감회에 젖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으로 번뜩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포옹을 풀고 난 후 그는 사나운 눈초리로 조천백을 노려보았다.

"천백, 왜.......?"

조천백은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아. 우리는 생사를 같이 한 사이가 아닌가? 그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네."

"........"

장천림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애당초 석회림이 가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자신의 일에 끌어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천백이 석회림을 부른 것이다. 석회림은 그의 가슴을 쳤다.

"섭섭하네. 자네가 날 부르지 않는다면 친구를 모독하는 것일세."

"......."

장천림은 눈시울이 젖었다. 그는 친구가 이렇게 좋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닌 것이다. 비록 마음 한편으로는 꺼림직한 구석이 있었으나 역시 한편으로는 든든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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