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강호무정 제4장 운명(運命)의 만남 - 검궁인







제4장 운명(運命)의 만남



치료에 들어간 지 백 일(百日)이 조금 넘었다.

백가소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백 일 전과는 천양지차였다. 더이상의 금단증상은 일어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미약을 달라고 하지 않았고, 식사도 비교적 규칙적으로 하는 편이었다.

장천림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백가소가 원하는 것이라면 설사 하늘의 달을 따다 달라고 하여도 해줄 참이었다.

희망이 생기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조금만 더 치료를 한다면........'

그는 본래 화류병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화류병을 치료하기 위해 성내는 물론 인근의 명의(名醫)란 명의는 다 찾았고, 약이란 약은 안 써본 것이 없는 그는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화류병도 거의 완쾌 상태였다.

뽑혔던 머리칼도 새로 자라나 칠흑같이 검고 탐스러운 미발(美髮)이 자라나고 있었다.

윤기를 잃고 거칠었던 피부도 은은히 윤기가 돌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피부는 부스럼 자리가 조금 남아 있을 뿐 말짱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이따금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곤 했다.

그런 모습은 장천림을 행복하게 했다. 다만 그녀는 벙어리라도 된 양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실어증(失語症)도 머지 않아 치유되리라고 믿었다.

대체로 그녀가 하는 일은 단조로왔다.

그녀는 하루 종일 침상에 쪼그리고 앉아 멍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소야. 바람이 좋아. 산책이나 갈까?"

이따금 장천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화원으로 나갔다.

마침 사월(四月)이라 낡은 정원의 화원에는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화향이 그윽하게 풍기는 화원은 비록 잘 다듬어지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아취가 있었다.

백가소는 억지로 장천림에게 끌려나와 화원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움직이지 않고 오직 화원의 꽃들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럴 때면 장천림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던가.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것이 끝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한 뒤로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장천림은 뛸 듯이 기뻤다.

본래 그림 그리는 것이 취미인 그녀였다. 금문장에서도 틈만 나면 그림을 그리곤 하지 않았던가?

이제 제 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장천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밤 장천림은 시내로 나가 화구상에서 가장 값비싼 화구(畵具) 일습을 구입해 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화구를 받은 백가소는 멍하니 바라만 볼 뿐 그림을 그릴 생각도 않는 것이 아닌가?

"소야. 네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 보렴."

그러나 백가소는 말없이 고개를 젓기만 하는 것이었다. 장천림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런 가운데 며칠이 지나갔다.

"까르르........"

"소야?"

장천림은 깜짝 놀랐다. 며칠 간이나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백가소가 화원을 산책하던 중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호호호........ 림 오빠. 이리와 보세요, 여기 이게 뭐죠?"

"뭔데?"

장천림은 눈물이 나도록 반가왔다. 그는 얼른 그녀에게 달려갔다. 백가소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것은 부드러운 흙을 기어다니고 있는 땅강아지였던 것이다.

"깔깔........ 이리와서 머리 좀 빗겨 주세요."

이제 그녀는 완전히 변했다. 백가소는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치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장천림은 그녀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녀 앞에서 춤이라도 출 생각이었다.

이제 백가소는 완전히 옛날로 돌아간 듯 했다.

장천림은 비로소 그녀를 데리고 금문장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실로 거짓말같은 일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참아 왔던가?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드디어 이제는 금문장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장천림은 장원을 나섰다. 그녀의 치유를 기념하기 위하여 축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하하.......! 잔을 들어라. 소아."

"........"

백가소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것은 모두가 장천림이 손수 장만한 것이었다.

그는 백가소를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사람을 사지 않고 혼자서 모든 음식을 장만한 것이었다.

남자가 요리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장천림의 요리 솜씨는 일류였다. 그동안 많은 실전(?)을 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마와요. 오빠........"

백가소의 눈에서 진주알같은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장천림은 껄껄 웃으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하하하! 이렇게 좋은 날 눈물은. 이것 좀 먹어 보아라. 네가 좋아하는 볶은 완두콩이다."

장천림은 완두콩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백가소는 눈물을 흘리며 완두콩을 삼켰다.

그녀의 눈에는 가슴이 터질 듯한 감격, 신뢰, 애정의 빛이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장천림은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그는 사가지고 온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실로 오랫만에 마음 놓고 마신 술이라서인지 다소 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자야지."

"림오빠........"

문득 백가소가 애절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왜 그러느냐?"

"날....... 더럽다고 생각하시나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소아?"

"난....... 그동안 너무나 타락해 있었어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전 더러운 계집이죠, 그렇지 않은가요?"

"그....... 그렇지 않다. 그건 너의 정신이 아니고......."

"후후........ 거짓말이에요. 그렇게 말을 하는 오빠도 속으로는 날 더럽다고 여기고 있죠? 그렇죠? 아무도 날....... 날 옛날의 백가소로 보아주지 않을 거예요."

"소아!"

장천림은 크게 부르짖었다.

"후후........ 그래요. 전 더러운 계집이에요. 화류병까지 옮았던 제가 감히 오빠와 맺어질 법이나 한 얘긴가요? 난 그때 죽어야 했을 계집이에요."

"소아!"

장천림은 와락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그는 세차게 그녀의 가냘픈 몸을 흔들며 격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내가 널 이전이나 다름없이 아름답고 순결한 소아로 본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증명할 수 있겠느냐? 응?"

백가소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더니 급기야 결심한 듯 입술을 열었다.

"그럼 날 안아줘요."

".......!"

장천림은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설마 이런 요구를 할 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사실 이제까지 백가소를 여자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 미래의 일이었다. 더욱이 은인인 백난천의 허락이 있고서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백가소의 갑작스런 요구에 그는 몸이 굳어지는 듯 했다.

"피이! 거봐요, 오빠는 속으로 날 더럽다고 여기고 계시는 거예요. 후후훗........ 난 실제 아주 추악한 계집이에요."

백가소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고 있었다.

"소아........"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장천림은 뜨거운 입술을 그녀의 꽃잎같은 입술에 갖다 대었다.

".......!"

백가소는 바르르 가는 몸을 떨고 있었다. 마치 화살을 맞은 작은 참새인 양 떨고 있었다.

장천림의 입술은 뜨거웠다. 그것은 술기운 탓만은 아니었다. 그는 백가소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영혼을 다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장천림과 같은 부류의 인간은 일반인의 경우와 확연히 틀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했다.

삶과 죽음. 그것은 일반인과 근본적으로 틀린 것으로 그에게 인식되어왔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백가소의 과거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백가소는 여전히 백가소였다.

아무리 심한 고초를 겪었다해도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백가소는 여전히 순결무구한 여인으로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더듬으며 전신이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그의 혀가 백가소의 고운 치열을 살며시 밀고 들어갔을때........

'......!'

의외로 그는 백가소의 혀가 굳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그뿐 아니라 백가소는 전신이 싸늘하게 얼어 있었다.

'가엾은 소아........'

장천림은 그녀의 마음을 환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거절을 할까봐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장천림은 입술을 옮겼다.

그의 입술은 백가소의 귓볼로 다가가 뜨겁고 은밀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의 애무는 직관적이면서 성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은 가능한 자제하면서 서서히 백가소의 육체와 영혼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아아........"

마침내 그는 백가소의 굳었던 몸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입술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동그란 턱을 지나 가녀린 목줄기로 끈질기게 애무해 나갔다.

"아아!"

백가소는 입술을 벌리며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장천림은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침실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그녀의 옷을 반쯤 벗겨내고 있었다. 박속같이 하아얀 젓무덤이 드러나자 그의 손은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침상에 반듯이 눕혀진 백가소는 행복에 찬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장천림은 그녀의 옷을 모두 벗긴 후 스스로도 옷을 벗고 침상에 올랐다. 이윽고 두 남녀의 몸은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쳐졌다.

뜨거운 밤이었다.

사월(四月)의 밤은 화단의 꽃뿌리까지도 달아오르게 할 만큼 뜨거웠다. 그것은 방 안의 남녀의 영과 육이 혼연일치가 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장천림은 장원을 나서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밝았다. 어젯밤 한 바탕의 춘풍(春風)으로 그는 기분이 몹시 상쾌했다. 하룻밤 사이에 백가소는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백가소는 이제 그의 아내가 된 것이다.

오늘 이후로 모든 과거는 망각 저편으로 물러가게 될 것이다. 마치 그 자신의 어둡고 암울했던 지난 날처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백가소는 그에게 작은 부탁을 하나 했었다.

"책을 좀 구해다 줘요, 책을 읽고 싶어요."

"하하........ 물론이다. 소아. 내 금방 다녀오마."

그는 그렇게 흔쾌히 말하고 막 장원을 나서는 길이었다. 장원 문 앞까지 배웅하며 손을 흔들어주는 백가소의 표정도 달콤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그녀는 저 멀리 장천림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편 장천림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돌아선 순간 그의 등을 바라보는 백가소의 눈동자에 깊은 체념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장천림은 모처럼 화창한 날씨에 기분이 좋아졌다.

책을 한 보따리 사고도 백가소에게 줄 것이 없나 하고 저자거라를 한 바퀴 돌고 있었다. 그러던 차 그의 눈길이 한 만두가게에 멎었다.

그곳에서 한 명의 거지소년이 만두가게 주인에게 매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이 빌어먹을 거지놈! 여기가 어디라고 도적질이냐! 이런 사지를 찢어 죽일 놈!"

퍽! 퍽퍽퍽!

만두가게 주인의 솥뚜껑 만한 주먹이 소년의 뺨과 면상을 사정없이 갈기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매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비명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놀랍게도 소년는 땅바닥을 뒹굴면서도 집요하게 훔친 만두조각을 우적거리며 입 속에 틀어넣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었다.

".......!"

그 광경을 본 장천림은 가슴이 진동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소년의 그런 행동은 오직 살아야 한다는 집념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소년의 그런 의지는 살아야 한다는 의지 이전에 무엇인가 꼭 해야만 할 일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장천림은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소년에게 어떤 한(恨)이 있길래.......

아니면 어떤 기가 막힌 사연이 있단 말인가. 장천림은 자신도 모르게 만두가게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마침 소년은 발길에 채여 그의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 왔다. 장천림은 소년의 옷을 잡아 일으켰다. 소년은 그에게 잡혀 일으켜지면서 고개를 번쩍 들고 있었다. 순간 장천림은 가슴이 써늘해지는 것을 금치 못했다.

소년의 눈! 그 눈이 그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넌? 너도 날 때릴 거야? 때릴 테면 때려봐!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성난 눈빛이었다. 추호의 겁먹은 표정이나 기죽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호전적인 눈이었다.

"......!"

장천림은 소년을 자세히 바라 보았다. 소년의 얼굴은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에 입고 있는 옷도 걸레조각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똑똑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만일 머리를 단정히 빗기고 목욕을 시킨다면 소년의 얼굴은 매우 맑고 영준할 것이라고.

다만 옥(玉)에 티랄까? 소년의 왼쪽 뺨에는 한 줄기의 상흔(傷痕)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더구나 그 상흔은 섬뜩하도록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검이나 창 따위에 스친 상처자국같이 보였다.

"빌어먹을 놈! 아까부터 얼쩡거리더니 내 그럴 줄 알았다구! 가만히 보고 있는데 만두를 덥썩 훔치다니!"

만두가게의 주인은 욕설을 해대며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또 다시 주먹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이것이면 되겠소?"

".......?"

장천림은 은자를 내밀었다. 만두가게 주인의 눈이 둥그레졌다.

소년이 만두 한 접시를 더러운 손으로 만졌기 때문에 한 접시의 만두가 몽땅 못쓰게 됐었다. 그런데 장천림이 내민 은자는 만두 한 접시가 아니라 한 솥을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무, 물론입죠. 헤헤!"

만두가게 주인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그는 얼른 은자를 낚아채듯 받고는 홱 돌아섰다.

"이 빌어먹을 꼬마놈! 오늘 은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네 다리가 성치 않았을 거다!"

만두가게 주인은 소년을 향해 침을 퇘! 뱉고는 얼른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행여나 장천림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장천림은 소년의 손을 잡고 걸었다. 소년은 만두 조각을 꿀꺽 삼키더니 말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걸었다.

얼마쯤 가자 장천림은 소년의 손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은자 한 덩이를 꺼내 소년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뭘 사먹거라."

그런데 소년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소년은 차갑게 그를 노려 보더니 야멸차게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난 거지가 아니오!"

장천림은 의아했다. 그러나 곧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거지라서 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돈으로 더이상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

그 말에 소년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소년은 약 십이삼 세 가량 되어 보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덥썩 은자를 받았다. 그러나 한 마디하기를 잊지 않는 것이었다.

"내 지금은 받지만 언젠가는 꼭 갚겠소, 왜냐하면 나는 이유없는 동정은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나도 네가 그러기를 바란다."

장천림은 돌아섰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같은 아이는 언제고 일어서기 마련이지. 잘 되기를 빈다. 꼬마야.'

이때였다.

"내 이름은 백리진강(白里眞强)이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소년이 등 뒤에서 묻는 말이었다. 장천림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백리진강이라? 좋은 이름이다. 내 이름은 장천림이다."

"장천림...... 장천림......."

소년은 몇 번이나 장천림이란 이름을 되뇌었다. 마치 그 이름을 영원히 잊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장천림은 다시 걸었다.

그런데 소년 백리진강이 다시 그를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면서 물었다.

"또 무슨 볼 일이 있느냐? 돈이 부족하냐?"

백리진강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당신이라면 알 것같아서........"

"무엇을 말이냐?"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공(武功)을 익히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장천림은 안색이 변했다. 너무나 뜻밖의 질문이었다. 아니 왠지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소년의 눈이 타고 있었다. 그 눈은 야수(野獸)의 눈빛을 닮아 있었다.

장천림은 생각했다.

'아마도 이 놈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

백리진강, 그는 벌써 수백 번도 더 그런 질문을 했다. 특히 무사들을 만날 때마다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각오하고 때로는 호되게 매를 맞으면서까지도 수없이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제대로 된 대답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인상이 좋지 못할 뿐더러 두 눈에 야수와 같은 빛을 담고 있는 그에게 그 누가 대답을 제대로 해주겠는가.

장천림은 잠시 생각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공.......?'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잠시 동안 장천림의 뇌리에는 수많은 문파와 무공들이 떠올랐으나 좀체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를 생각이 떠올렸다.

"그렇다면 소림사로 가라. 소림사의 승려들은 아주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백리진강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는 것이 아닌가?

"안 돼요. 그곳은. 흐흐....... 그 중놈들은 턱없이 오만하고 되먹지 않은 놈들이에요. 그들에게 무공을 익히느니 차라리 개에게 익히겠어요."

".......!"

장천림은 다시 가슴이 섬뜩했다.

'소림사와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아니면....... 벌써 가보았다가 고초를 겪었던가?'

그는 다시 생각했다. 잠시 후 또 한 곳이 생각났다.

"확실히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 황궁(皇宮)에 비밀무고(秘密武庫)가 있고 그 무고의 무학을 익히면 천하제일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황궁에 간다고 다 무학을 익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황실의 근위병이나 된다면 몰라도........"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백리진강의 눈이 일순 번쩍 빛나는 듯 했다.

그는 갑자기 땅에 무릎을 꿇었다.

"고마웠소! 내 평생 당신을 은인으로 생각하겠소. 만일 내가 황궁의 무학을 익힐 수 있다면 그때는 언제고 당신을 위해 한 가지 일을 하겠소!"

백리진강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더니 쏜살같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

장천림은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몸을 떨었다. 그는 가슴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소년은 떠났으나 왠지 알 수 없는 여운이 남아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장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던 장천림은 화석처럼 굳어졌다.

'믿을 수 없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린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는 물건이 있었다. 아니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백가소.

그녀가 목을 맨 것이다. 장천림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그는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고개를 흔들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하기를 수십여 차례, 그는 눈을 부릅뜨고 백가소를 바라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백가소는 백가소였다. 그녀는 목을 매단 채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백가소는 자살한 것이었다.

"왜? 왜지......?"

장천림은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이때 그녀의 발치 아래 네 장의 그림(畵)이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멍하니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그림에는 각각 한 명씩의 인물화(人物畵)가 그려져 있었다. 인물화 속에는 하나같이 준수하고 영기발랄한 이십대 청년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 좋은 자양(滋養)의 음식물을 먹고 언제나 큰소리를 치면서 대로(大路)를 활보할 듯한 그런 류의 청년들이었다.

"이건....... 뭔가?"

장천림은 한참 후에야 중얼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집어들어 살피던 그는 그림 후면에 갈겨 쓴 듯한 백가소의 글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이들이 소아를 망친 흉수(凶手)들이에요. 소아는 처음 이들에게 납치되어 수모를 당한 뒤 버려졌어요. 림오빠.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소아의 원한을 갚아주세요. 소녀는 더럽혀진 몸으로는 더이상 살 수가 없답니다.

간단한 글이었다. 그러나 이 몇 줄의 글귀로 그녀가 자살한 이유는 충분히 설명되고 있었다. 백가소는 결국 한(恨)을 잊을 수가 없었다.

처음 화구를 달라고 했을 때부터 그녀에게는 죽음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원수들의 얼굴을 그려놓고 유부의 길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으흐흐...... 소아!"

비가 내린다.

처음에는 가랑비였다가 나중에는 점차 굵어지는 빗줄기 속에 무덤을 만들고 있는 자가 있었다.

생명이란 덧없는 것이다.

어젯밤만 해도 뜨겁게 타오르며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속삭이던 아름다운 여인이 지금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비에 젖은 황토 속에 묻혔다.

떨리는 손으로 흙을 메우는 장천림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한참 후에야 완성된 봉분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돌아가는 줄 알았었다. 이제는 옛날로 돌아가 금문장으로 나란히 돌아가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장천림은 품 속에서 네 장의 인물화를 꺼냈다.

그림 속의 네 인물은 누가 보더라도 귀공자로 보일 만한 기품과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 놈들이........

이 놈들이 소아를 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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