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강호무정 제2장 반란(叛亂) - 검궁인





제2장 반란(叛亂)



자욱한 연기와 사방을 울리는 함성소리!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713호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체들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문득 그의 등 뒤에서 살기가 다가왔다.

".......!"

빙글 돌아선 그의 눈에는 한 명의 금색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보였다. 중년인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금검(金劍)이 들려 있었다.

"칠백십삼 호....... 너마저......?"

중년인의 고통스런 음성에는 실망이 담겨 있었다.

"......."

713호의 눈빛은 더욱 암울해졌다. 금의중년인은 자신을 가르치던 교두 중의 한 명이었다. 하나같이 음악하고 잔인한 교두들 중에서도 비교적 그는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교두는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달려 들었다. 그의 금검은 패천마혼세(覇天魔魂勢)라는 초식이었다.

713호는 간신히 피했다. 그러나 교두는 또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밖으로 통하는 요로로 누가 죽던 양보를 해야할 위치였다.

이리 저리 다섯 차례나 몸을 피하던 713호는 문득 검세가 사나와지는 것을 느꼈다.

파츠웃!

"......!"

그의 왼쪽 어깨가 불에 덴 듯이 화끈해지며 피보라가 일어났다. 순간 713호는 반사적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틀며 수중의 철검을 그었다.

슈욱!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流星)과도 같다.......

언젠가 그는 이 검법을 배우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눈 앞의 교두가 가르쳐준 검법이었다.

유성잔월(流星殘月)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검초식이었다.

"크아악!"

713호의 검이 교두의 목을 날렸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제자에게, 그것도 그가 직접 전수한 유성잔월(流星殘月)이라는 검법 아래 고혼이 되었다.

"......."

713호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철검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과 자신의 왼쪽 어깨에서 뿜어지는 피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똑같은 피. 똑같은 색이었다.

그의 표정이 점차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지난 십여 년간 당해왔던 모든 고통과 수모들이 서서히 소용돌이치며 어떤 응어리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눈길을 돌려 함성이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동공 깊이 가라앉아 있던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마침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신형은 함성이 들리는 곳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차차차창......!

본부 앞 공지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난전(亂戰)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싸움은 거의 일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절곡 외곽을 경비하던 수백 명의 흑의인들에게 소년들이 몰리고 있으며, 이미 중과부적으로 당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수세에 몰린 소년들은 이제 수십 명밖에 남지 않았으며 그나마 태반이 중상을 입고 몸을 운신하기도 힘든 입장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밥 한 끼 지을 시간 쯤이면 반란이 평정될 것이다.

광장에 쌓여 있는 시체들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 그야말로 혈하를 이루고 있었다.

"크흐흐......! 어서 무기를 버려라! 너희들의 탈출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투항하는 자는 살고, 끝까지 반항한다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다."

흑의인들은 기세등등하게 소년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때였다.

휘...... 익!

문득 한 가닥 인영이 흑의인들 사이로 파고 들었다. 이어 검광이 눈부시게 일어나더니 상황이 돌변했다.

"크아악!"

여기저기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리며 흑의인들의 진용이 흐트러지는 것이 아닌가?

놀라운 일이었다. 713호가 뛰어든 순간 상황은 일시에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713호는 흑의인들의 진세 중앙으로 파고 들어 가차없는 살수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의 검법은 악랄하고 쾌속했다. 흑의인들은 미처 자세를 잡기도 전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정확!

신속!

713호의 검이 한 번씩 호선을 그릴 때마다 정확하게 한 명씩의 목이 날아갔다. 잠시 후 장내의 판도는 달라졌다.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쓰러지자 진세에 구멍이 뚫렸으며, 용기를 얻은 소년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니 그 상황에 소년들은 용기백배하여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한편 713호는 전세가 소년들에게 유리해지자 다시 다른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이름모를 산동(山洞).

어두침침한 산동 안으로 새벽 여명이 막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 여명에 동굴 안의 풍경이 어스름히 드러나고 있었다. 동굴 벽에 죽은 듯이 기대어 앉아 있는 네 명의 소년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713호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피로 목욕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아수라(阿修羅).

그렇다. 새벽까지 계속된 혈전은 지옥의 아수라들이 싸운 것이나 다름없는 악전이었다. 그 속에서 그들은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백여 명에 가까운 소년들이 다 죽고 이곳 산동에 웅크리고 죽은 듯이 늘어져 있는 소년들이 생존자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나마 713호의 눈부신 활약이 없었다면 그들도 모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절곡을 벗어나 이곳까지 달아났다는 것을 의미할 뿐, 저들의 추적은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체 대원 천하에서 그들이 숨어 있을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

죽음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런 가운데도 동굴 속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점점 안으로 비쳐들고 있었다. 문득 네 명의 소년들 중에서 몸집이 다소 뚱뚱한 소년이 입을 열었다.

"모두 죽었겠지......?"

소년의 오른쪽 어깨 부분에 76이라는 번호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은 소년들의 고유번호를 의미했다. 나머지 소년들도 같은 부분에 번호가 수놓아져 있었다.

76번이라면 현무단 소속이다.

1번부터 200번까지는 현무단, 201번부터 400번까지는 주작단, 401번부터 600번까지는 백호단, 601번부터 1000번까지는 청룡단 등, 도합 1000명의 소년들이 조직을 나누어 훈련을 받았다.

물론 조직에 따라 받는 훈련의 종류도 틀렸다.

현무단은 변장술과 잠입, 추적을 전문으로 하며 주작단은 독극물 및 폭약, 암기술을 전문으로 한다. 백호단은 전술 및 전략, 기관장치 등을, 청룡단은 암살 및 실질적인 살수훈련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되어있었다.

76번 현무단 소속의 소년이 한 말은 아무런 메아리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공허하게 끝났다. 소년들은 아무도 대꾸하지 않고 땅바닥 만을 내려다 볼 뿐이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무렵에 303번 소년이 툴툴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후후....... 잘 된 일이야. 이제 모두 진짜 편해질 테니까 말야."

303호는 아무도 대꾸하는 자가 없는 가운데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훈련 도중에 죽는 아이들을 부러워 한 적이 있었어. 그들에겐 더이상의 고통이 없을 테니까....... 후후...... 이제 나도 곧 그렇게 되겠지. 안 그래?"

소년들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잠시 후 76번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젠장! 나는 당장 죽어도 좋지만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어."

".......?"

그 말에 소년들은 일제히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궁금한 것이 있다니.......?

76은 문득 실성한 듯이 웃었다.

"내 이름이 뭔지 말이야........ 히히히........ 그것마저 안 된다면 하다 못해 우리가 무엇때문에 이런 지옥의 훈련을 받아야 했는지 말이야........ 히히........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죽기는 정말 억울하단 말이야."

그렇다.

그것은 소년 모두의 공통된 의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을 몰랐으며, 또는 왜 절곡에서 그런 지독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죽음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소년들은 동감하고 있었다. 76번의 심정은 모두의 심정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서 걷기 전부터 이곳에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따라서 소년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훈련의 연속뿐,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부분이 막 젖을 뗄 무렵부터 이곳에서 생활해왔으므로.

소년들이 76번의 말에 한결같이 공감한 채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있을 때 문득 한 쪽 구석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들은 원(元)에 대항하여 반원운동을 벌이는 열사(烈士)들을 척살하기 위해 훈련받는 살수 집단이야."

".......?"

소년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원은 너희들도 아다시피 몽고족들이 이 땅에 세운 제국이다. 그들의 학정은 한족을 말살시키고 있다. 따라서 한족을 부활시키려는 열사들은 반원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쳐 노력하고 있다. 비록 처음에는 조그맣게 시작된 혁명이었으나 시간이 흐를 수록 그 운동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침내 대원의 힘을 약화시키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원에서는 그들을 척살하기 위한 힘이 필요해진 것이다."

소년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야말로 처음 듣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더욱이 그 반원 조직은 은밀할 뿐더러 무림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 보통의 군사로는 제압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같은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훈련시켜 전문적으로 지사들을 척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혈랑대(血狼隊)........ 일명 혈명대(血命隊)라고도 불리우는 우리들이지."

".......!"

아이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이제까지 그토록 무서운 훈련을 받아 오면서도 교두들은 아무도 그 목적에 대하여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구석에 앉아 있던 소년의 설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들의 훈련은 앞으로 이 년이면 끝나게 되어 있었지. 그때가 되면 우리는 원의 앞잡이가 되어 수많은 한족의 열사들을 죽이게 되었을 거야."

이때였다. 76호가 그의 말을 막으며 물었다.

"잠깐, 육백 호! 너는 어떻게 그토록 자세히 알 수 있었지?"

600호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흘렀다.

"나는 육백 호가 아니야. 내 이름은 장하영(長河英)이야."

"장....... 하....... 영?"

소년들은 놀라 마지 않았다. 600호의 이름이 장하영이라는 것에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의 이름이 장하영이라서가 아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이곳에 와 있었으므로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600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소년들의 시선은 일제히 장하영에게 쏠리고 있었다.

경이(驚異)!

아니 차라리 경악에 가까운 시선들이었다. 장하영은 늠름하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반원 세력의 중추(中樞) 역을 하고 계시는 하북방면 백련대(白蓮隊) 대장군 장무혁(長武赫)의 아들이다. 내 나이 여섯 살 때 목적을 가지고 이곳으로 침투했다."

".......!"

동굴 안에 있던 나머지 삼인의 소년들은 마치 쇠뭉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한참 후에야 76호가 불현듯 뭔가를 깨달은 듯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장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의 반란은 내가 주도해서 일어났다. 자그마치 십 년 동안에 걸쳐 면밀하게 계획한 끝에........"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돌연 76호가 소리를 지르며 장하영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두 눈은 잔뜩 부릅떠져 있었으며 얼굴에는 온통 증오가 어려 있었다.

"으와아아악!"

그는 괴성을 내지르며 장하영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그의 면상을 마구 갈기는 것이 아닌가? 그의 갑작스러운 발작에 다른 소년들은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두 명의 소년이 달려들어 간신히 그를 떼어냈다.

"놔! 놓으란 말이야! 저 놈 때문에 수많은 동료들이 무참하게 죽었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76호는 울부짖으며 몸부림을 쳤다. 동굴 안은 삽시에 그의 고함과 욕설로 뒤덮였으며 소년들은 그를 말리느라고 애를 썼다.

이때였다. 이제까지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었던 713호가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들 해. 오히려 잘 된 일이야. 언제까지나 그들의 개가 되는 훈련을 받으며 이유도 없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

".......!"

그의 말은 결정적이었다. 한데 엉겨붙어 뒹굴던 소년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

713호의 말은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소년들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더니 힘없이 동굴 벽에 기댄 채 다시 애초의 침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긴 침묵이었을까?

문득 303호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칠십육 호, 이름을 알고 싶다고 했지?"

".......?"

"후훗........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죽기 전에 이름이나 알고 싶어. 아니....... 하다못해 아무 이름이나 하나 갖고 싶어."

말을 잠시 중단한 303호는 고개를 돌려 장하영을 돌아보았다.

"이봐! 육백 호, 아니 장하영. 보아하니 네 놈은 우리보다 배운 것이 많은 것 같은데 우리들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겠나?"

장하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뜻밖의 제의였다. 303호는 장난스런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내 성(姓)은 석(石)이었던 것 같아.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 그리고 어렸을 적에 어떤 숲 속에서 살았던 것 같아. 어때? 내 이름을 하나 만들어 주는 것이?"

장하영은 씨익 웃었다. 그는 알맞은 체격이었으나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소년이었다. 어쩐지 나이보다 더 성숙한 느낌이 든다고 할까.

"좋아, 친구. 자네의 성은 석씨이고 이름은 돌아갈 회(廻), 수풀 림(林)이라고 하자. 그런즉 석회림(石廻林)이 네 이름이다."

순간 303호는 박수를 쳤다.

"그래 좋군! 고마워 장하영. 친구들! 지금부터 나는 석회림이다. 그렇게 불러줘!"

"나도 하나 지어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침 하늘이다. 가장 맑고 신선하거든!"

76호의 말에 장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성은 조씨(朝氏)야. 그리고 이름은 천백(天白)으로 하지. 어떤가? 아침 조(朝)에 하늘 천(天), 흰 백(白). 아침의  맑은 하늘을 의미하지."

"이야아! 멋있군! 그래! 앞으로 내 이름은 조천백이다. 조천백........ 으하하하하!"

303호나 76호는 미칠 듯이 좋아하고 있었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들은 눈물까지 질금질금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웃음은 길게 가지 않았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게 되자 그들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어떤 한 사람만이 그들의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었다.

마침내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713호에게 향했다. 그는 이제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713호야 말로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살아서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 아닌가?

713호는 소년들 중에서 유일한 청룡단 소속이었다.

청룡단은 전문적인 자객으로 키워지는 조직이었으므로 그들 중에서 가장 무공이 강한 편이었다. 다만 그 한 가지 사실 만 가지고도 713호는 존경을 받을 만 했다.

그런데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무혼(武魂)과 투지, 죽음을 불사했던 놀라운 정신력은 어떠한 것이었던가?

그가 아니었더라면 아무도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들은 일제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713호도 이젠 이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713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다. 또한 좋아하는 것 따위도 없어."

그 한 마디뿐이었다. 그는 다시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소년들은 713호를 위해 머리를 짜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를 위해 좋은 이름을 지어주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들었던 것이다.

마침내 장하영이 좋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칠백십삼 호는 우리의 은인이다. 그러니 그에게 우리들의 이름 중 한 자씩을 선사하는 것이다."

".......?"

뜻밖의 제의였다. 소년들이 미처 뭐라 답하기도 전에 장하영은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나의 성인 장(長)자를 주겠다. 그리고 너는 천(天)자, 넌 림(林)자를 주는 것이 어떠냐? 장천림(長天林), 그 이름이 어떠냐?"

".......!"

그 순간 말없이 기대앉아 있던 713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도 비로소 감정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의 이름이 장천림이라고........?"

"하하하! 멋있다. 장천림! 그 이름이야말로 제일 멋지다."

"아암, 정말 훌륭한 이름이야."

소년들은 박수를 치며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했다. 바로 그때였다. 밖으로부터 인기척이 들려온 것은.

".......!"

소년들은 아연 긴장했다. 어느새 추적자들이 쫓아온 것이다. 이제까지의 화기애애했던 소년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고 두 눈은 긴장으로 인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잠깐!"

막 철검을 들고 뛰쳐 나가려던 소년들을 막은 것은 장천림이었다.

그는 의아해하는 세 소년, 즉 장하영, 석회림, 조천백에게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한꺼번에 밖으로 나가면 모두 죽는다. 내가 놈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할 테니 너희들은 그 사이에 흩어져서 달아나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천림........"

소년들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들은 강한 아이들이었다. 이제껏 그들은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장천림의 말에는 한결같이 눈시울이 젖고 있었다.

"하지만 넌......."

장하영의 말에 장천림은 담담히 말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 능력이 있는 자가 있느냐? 그건 오직 나밖에 할 놈이 없어."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철검을 안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야아아아!"

멀어져가는 장천림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

동굴 안의 소년들은 벽에 기대여 숨을 죽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장천림....... 과연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들은 한결같이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장하영이 주먹으로 눈을 문지르며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도 나가자.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이대로 개죽음을 하기에는 너무나 억울하지 않느냐? 어떻게든 살아서 복수를 해야 해! 우리들을 위해 놈들에게 달려간 장천림을 위해서도 말이야."

그 말에 소년들은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너의 말이 맞다........

우리는 살아야 해........



"놈은 지쳤다!"

휘익! 휙휙휙!

살기에 찬 호통과 함께 인영들이 어지럽게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들은 먹이를 쫓는 사냥개처럼 일제히 하나의 목표를 향해 사정권을 좁혀가고 있었다.

장천림은 막다른 길로 쫓기고 있었다. 그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해도 중과부적이었다. 그는 벌써 이삼십여 명을 해치웠으나 이제는 탈진상태였다.

더욱이 그는 지금 달아나고 있는 길이 막다른 절벽으로 향해져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가는 데까지는 가야 했다. 자신 하나의 희생으로 세 명의 소년들이 살아날 수 있으면 그것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

너희들은 살아남아라.

보란 듯이 살아나 행복하게 사는 거다.

그것만이 나를 위한 길이요, 복수를 하는 길이다.......

장천림은 문득 물소리를 들었다.

쏴아아...... 우르릉...... 쿵쿵......!

급류(急流)였다.

급류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장천림은 막다른 절벽 끝에 몰리고 말았다.

"흐흐흐.......! 칠백십삼 호! 이제 네가 달아날 곳은 없다. 순순히 검을 버려라!"

흑의인 오십여 명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장천림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으핫핫핫.......!"

".......?"

흑의인들은 어리둥절했다.

그가 이 상황에서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쳤군!"

어떤 자가 그렇게 내뱉었다. 그는 수중의 강궁(强穹)에 독을 바른 살을 메긴 후 쏘았다.

"앗! 저 놈.......!"

"저......."

흑의인들이 경악성을 발하는 사이였다. 장천림은 느닷없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신형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그 아래는 천길의 낭떠러지였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돌출한 기암괴석들이 솟아 있어 떨어져 살아난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천림.

그는 그렇게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그가 살아날 희망은 전무했다. 적어도 흑의인들이 보기에는 그랬다.

흑의인들은 절벽 위에서 장천림의 몸뚱이가 하나의 바위에 떨어져 부딪친 후 퉁겨오르는 것을 보았고 이내 급류에 떨어져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급류의 물이 빨갛게 물드는 것은 그가 치유할 수 없는 중상을 입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사람의 운명이란 오직 하늘 만이 아는 법이다.

마침 절강성(浙江省)의 풍광수려한 절경을 유람하던 선비가 있었다. 그는 이민족 원(元)에게 짖밟힌 산하가 미워 몸을 숨기고 평생을 쌓은 학문조차 가슴 깊이 묻어버린 청렴한 학자였다.

그의 집은 사천의 백제성(百帝城)이었다.

그러나 집을 떠난 그는 지난 이 년여 간 여기저기를 떠돌며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마침 절강성의 한 계곡을 지날 때였다.

그는 급류에 떠내려 오는 한 구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그는 어렵게 그 시신을 건져냈다. 비록 시신일망정 물고기밥이 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최소한 매장이라도 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급류에서 건져낸 시신은 놀랍게도 아직 미약한 숨결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불과 십수 세에 불과한 어린 소년이라는 것이 선비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다.

마침 선비는 가산이 넉넉한 편이었다. 그는 그 길로 여행을 취소하고 마차를 세내어 백제성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떻게든 소년을 살려 보기로 한 것이었다.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할 소년의 명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선비의 이름은 백난천(白蘭天), 금문장(金文莊)의 장주였다.

소년은 금문장에서 마침내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그를 살리기 위해 백난천은 재산의 반을 써야 했다. 수많은 영약과 이름난 의원들을 동원하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소년이 살아난 것을 보고 그는 크게 기뻐했다. 마침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살아난 소년의 용모가 영준하고 믿음직스럽게 보여 자신의 양자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소년은 그 제의를 한사코 사양했다. 그리고 금문장의 하인으로 삼아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장천림, 바로 713호였다.

이후 그는 금문장에서 없어서는 아니될 존재가 되었다. 그는 집사(執事)를 맡아 금문장의 재산을 크게 늘렸을 뿐더러, 여러 가지 일들을 비상한 능력으로 처리해 나갔다.

장천림은 과묵한 성품으로 말이 없었다. 말보다는 언제나 행동을 앞세웠다. 또한 자신의 공을 자랑하는 법도 없었다.

그런 그를 백난천은 장차 자신의 금지옥엽인 백가소의 부군감으로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하나밖에 없는 딸 백가소도 그를 무척 따르는 편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금문장의 식솔들도 모두 그를 아끼고 존경했다.

다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년집사 장천림은 오만해지는 법도 없이 묵묵히 집사의 일을 충실하게 이행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백난천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금지옥엽 백가소가 납치되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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