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강호무정 제9장 두 번째 복수(復讐) - 검궁인





제9장 두 번째 복수(復讐)



12월 12일.

혼례식을 하루 앞 둔 날이었다.

당가보의 경비는 더욱 삼엄해지고 있었다. 이번 혼례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상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근래 들어 무림맹을 표적으로 무자비한 살상을 일삼고 있는 백색마인(百色魔人) 때문이었다.

백색마인은 무림맹의 수십 개 지부를 피로 평정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무림맹은 초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번 당가의 혼인식에 많은 하객들이 몰려 올 것이라는 예상은 벌써부터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색마인이 이곳에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 또한 없는 것이다.

신성하고 경사스러운 혼인일에 행여나 참변이 일어나지 않을까 저어하여 경비를 크게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당수문은 강호사공자의 일원이었고, 강호사공자는 무림맹의 소장파 핵심세력이었으므로 더욱 만전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별각(別閣).

당수문은 방 안을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도무지 안정되지 않고 있었다. 혼례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혼례라고 해야 이미 여옥환과는 육체를 나눈 사이였으므로 그다지 설렐 것까지는 없었다. 또한 그는 명문 출신이라는 잇점과 영준한 외모 때문에 강호상에서 이미 많은 여인들과 교제를 갖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여자라면 단순한 성욕의 대상일 뿐이었다. 다만 그가 여옥환과 혼인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그녀가 화산파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가와 화산의 결합은 앞날을 위한 큰 투자인 것이다.

지금 그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이유는 바로 백색마인 때문이었다. 그는 얼마 전 무림맹에서 날아든 전서구를 읽었다.

그것은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백유성이 보낸 것이었다. 전서구에는 여러 가지 소식이 적혀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상관중의 실종 건이었다. 백유성은 그 건을 전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 혼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백유성이 보낸 전서구에서 특히 마음에 걸리는 사항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상관중의 실종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강호사공자 전체와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상관중이 공연히 실종될 리가 없다. 어쩌면 백형의 말이 맞는 지도 모른다. 누군가 우리 사공자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상관중의 죽음은 이제 시작일지도.......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어쩌면.......'

여기까지 생각한 당수문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이곳은 용담호혈이나 다름없는 곳, 아무리 강한 자라 해도 감히 본가에 와서까지 사공자의 일원일 날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당수문은 그렇게 단정짓고 있었다. 실상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설사 상관중을 죽인 흉수가 눈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그와 일대 일로 겨루어 이길 자신이 있었다.

더구나 이곳은 그의 본가인 사천 당가보가 아닌가.

어쨌든 혼례를 하루 앞둔 지금 그는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잠자리에 들 시간이 넘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억지로 잠을 청해 보아야 기분만 더욱 찜찜해질 뿐이다. 그는 방 안을 서성거리다 책상으로 걸어갔다. 서책이라도 읽다 보면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가 막 책 한 권을 펼쳤을 때였다.

"공자님......."

문득 문밖에서 한 가닥 그윽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당수문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크게 울렁거렸다.

"산해(珊海)......?"

그러자 밖에서 약간 떨리는 음성이 들렸다.

"네......."

당수문의 눈빛이 빛났다.

"들어오시오. 산해."

그의 음성은 어떤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약간 망설이는 모습으로 들어서는 여인이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나이는 이십삼 세쯤 되어 보였으며 전체적으로 성숙한 미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의외로 소복(素服)을 입고 있지 않은가? 경사를 하루 앞둔 밤에 소복을 입은 여인이 신랑될 사람의 침소를 방문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수문은 소복을 입은 여인을 보는 순간 온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내일이면 그는 혼례식을 치루게 된다. 그러나 지금 그는 소복을 입은 여인 지산해(址珊海)를 본 순간 그만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낀 것이었다.

지산해.

그녀는 그가 형수(兄嫂)라고 불러야 할 여인이었다. 비록 직계는 아니라도 그의 육촌 형의 아내였기 때문이었다.

지산해는 육촌 형 당율빈(唐律彬)이 이 년 전 급병으로 죽은 이후 미망인이 된 여인이었다.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당가에 남아 당수문의 노모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런 미망인 지산해와 눈이 맞은 것은 반 년 전이었다.

삼 년 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소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 중원의 법도였으며 당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우기 당가는 무림 명가였으므로 그 법도는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지산해는 아름다왔다. 스물세 살의 여인이라면 여자로써의 완숙미가 한창 절정에 달해 있을 나이 아닌가. 더구나 미망인이라는 신분이 더욱 미묘한 매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당수문이 그녀와 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 뜻밖의 일이었다.

당수문이 아무리 여색을 좋아한다고 해도 차마 집안의 여인, 그것도 육촌 형의 아내까지 건드릴 정도는 아니었다. 만일 그런 일이 발각이라도 난다면 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 가문에 먹칠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이 벌어진 것은 지난 해 어느 날이었다.

지산해는 망부(亡夫)의 기일(忌日)에 제(祭)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복을 입고 한밤중에 젯상을 차리고 있었다.

지산해의 망부는 본래 당가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표국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급병으로 죽은 후 지산해는 당가로 오게 되었다.

따라서 지산해는 당가에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녀가 기일의 제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당가에서는 형식적으로 제기를 마련해 주었을 뿐 그녀를 거드는 사람조차 없었다.

마침 당수문은 정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별당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 텅빈 빈소에서 흐느껴 울고 있는 지산해를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위로나 해줄 양으로 빈소로 들어갔다. 그는 서럽게 오열하고 있는 지산해의 어깨를 다독이다가 그만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는 메마른 삭풍과 함께 비가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왠지 을씨년스러운 밤이었으며 사위는 적막하기만 하여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는 밤이었다.

그 쓸쓸한 밤의 빈소에서 미망인 지산해는 그가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하자 그만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으로 안겨든 것이었다.

꽈다당! 하는 뇌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뇌전이 빈소 안을 잠깐 밝혔다. 빈소의 위패와 신위가 흔들렸다.

문득 당수문은 소복을 입은 채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지산해의 희디흰 목덜미에 시선이 가는 순간 그만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와락 그녀를 껴안고 말았다.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기이하게도 지산해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긴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위패와 신위가 내려다 보고 있는 빈소에서 껴안고 뒹굴고 말았다. 새하얀 소복이 금침인 양 마룻바닥에 펼쳐졌다. 소복 위에 고스란히 드러난 여체는 소복보다 더 희었으며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의 불륜(不倫)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억제할 수 없는 욕망 앞에서 인륜이나 규범은 힘없이 무너지고 오랫동안 남성을 접하지 못했던 지산해의 육체는 뜨겁게 타올랐다. 반면 금기를 범하는 당수문의 욕망은 한 번 문을 넘은 이상 걷잡을 수 없이 비등해 버렸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러 차례 만나 불륜을 지속했다. 그것은 벌써 일 년 가까이 된 일이었다.

당수문은 활짝 손을 벌렸다.

"어서 오시오. 산해."

"흐흑......."

산해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망설이던 끝에 용기를 내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내일이면 당수문은 여옥환과 혼인을 하게 된다.

이제까지는 당수문이 혼자의 몸이었기에 사람들의 눈을 피한 둘만의 시간을 간간이 나눌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런 절박한 기분이 그녀로 하여금 모험을 불사하고 이곳까지 오도록 만든 것이었다.

이십대 미망인의 육체는 난숙했다. 당수문의 품에 안긴 순간 이미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당수문은 그녀의 둔부를 안으며 중얼거렸다.

"잘 왔소. 그렇지 않아도...... 당신 생각이 났었소."

지산해의 한 쪽 다리가 그의 손에 의해 들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당수문의 목을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난...... 난...... 정말 나쁜 계집이에요."

"무슨 소리, 내게 있어서는...... 최고의 여자요. 흐흠......."

당수문은 그녀의 허리를 힘껏 조이며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가 벽 쪽으로 밀어붙인 지산해의 몸은 이미 해파리처럼 휘감기고 있었으며 힘이 가해질 때마다 더욱 부드럽고 끈기있게 그의 욕망을 흡착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껏 많은 여인들을 상대해 보았으나 지산해 만큼 그를 만족시키고 흥분시키는 여인은 없었다. 두 사람은 선 채로 서둘러 서로를 탐닉했다. 산해는 고개를 마구 도리질치면서 달뜬 신음을 발하고 있었다.

"아아 ......전 나쁜 계집이에요."

무서운 욕망이었다. 미망인으로서의 위치나 금기 따위는 이제 그녀의 뇌리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의 소복이 바닥으로 허물벗듯 흘러내려 뽀얀 나신을 절반 이상 노출시키고 있었다.

터질 듯 무르익은 육체였다. 수밀도 같은 유방에 당수문의 얼굴이 달라 붙었다. 그가 힘차게 그녀의 가슴을 애무할 때마다 그녀의 몸은 격렬하게 진동했다.

두 사람의 정사는 숨가쁘게 이어지고 있었다.

내일이면......

내일이면 끝이야.......

그런 생각이 더욱 절박한 의식을 주어 지산해의 몸을 뜨겁게 태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수문이 그녀를 밀어 붙일 때마다 풀어헤쳐진 머리칼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당수문의 입술과 손은 그녀의 몸을 할퀴듯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지산해는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발했다.

이를 아무리 악물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신음은 억제할 수 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아!"

한참 후에야 두 사람은 땀에 젖은 몸을 떨구었다. 지산해는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육체는 도화꽃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

당수문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은 여체였다. 생각 같아서는 영원히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그도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내일부터는 그녀를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른한 기분을 느끼며 침상에 걸터 앉았다.

지산해는 반라의 몸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서슴없이 당수문의 무릎에 앉았다. 당수문은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 입을 맞추었다.

"사랑했었오. 산해."

지산해는 온 몸을 떨면서 그의 품에 안겼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 것이다. 당수문의 그 말 한 마디로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정말 끝인가요?'

절박함이 여인으로 하여금 더욱 타오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당수문의 입술이 그녀의 젖가슴을 훑고 지났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뒤로 활처럼 젖혔다. 기나긴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뒤로 쏟아져 내렸다.

"싫어요, 그런 말......"

당수문의 입술은 젖가슴을 지나 뽀오얀 그녀의 기름진 아랫배로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다. 지산해는 도리질을 하며 다시 뇌까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오늘 만은......"

그때였다.

문득 지산해는 이마에 무엇인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의아하여 눈을 떴다.

"악!"

문득 그녀의 입에서 공포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부드럽고 뜨거웠던 육체가 한 순간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당수문은 느낄 수가 있었다.

"왜 그래?"

그는 입술을 아쉬운 듯 그녀의 아랫배에서 떼며 산해를 보았다.

지산해의 눈은 공포에 질린 채 크게 떠져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천장에 박혀 있었다.

"......?"

그녀의 시선을 따라 천장을 바라보던 당수문은 부르르 떨었다.

천장! 그곳이 갈라지고 있었다. 한 자루의 검날이 삐어져 나와 천장을 일직선으로 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객(刺客)!'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그는 무림의 절정고수였다. 뇌리에 판단이 서는 순간 그의 육체는 즉각 반응했다. 다만 무릎에 올라앉아 있는 지산해가 큰 방해물이었다.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위급한 순간이 목전에 있었다.

결국 그는 한 순간에 차가운 이성으로 돌아왔다. 본래 냉혹한 것이 그의 이성이 아니던가?

그의 손이 섬광처럼 작렬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산해의 풍요로운 둔부를 애무하고 있던 손이 벼락처럼 움직인 것이다.

펑! 하는 폭음과 함께 처절한 여인의 비명이 울렸다.

"아아악!"

지산해의 몸은 그에 의해 허공으로 던져진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정수리에 검이 박혔다. 그녀는 머리에 검이 꽂힌 채 방바닥으로 추락했다.

"죽일 놈!"

곧이어 당수문의 입에서는 차가운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자유로운 몸이 되자 천장을 손바닥을 뻗었다.

파파파파팟......!

놀라운 일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손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천장에는 수십 자루의 철환표(鐵幻慓)가 빽빽하게 박힌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그의 엄청난 판단착오였다. 자객은 천정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을 느낀 순간 당수문은 등골이 섬뜩해졌다. 그가 막 신형을 팽이처럼 돌리는 순간이었다. 무엇인가 광선이 번쩍하고 시야를 스쳐갔다.

"큭!"

위기를 직감하고 전력으로 신형을 반대 방향으로 틀었으나 그의 오른쪽 어깨가 깨끗이 절단되어 날아갔다. 선렬한 피보라가 어깨죽지로부터 분수처럼 뿜어져 올랐다.

"으으!"

그러나 당수문은 신음을 흘릴 뿐 자세를 가다듬으며 맞은 편 벽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는 벽에 걸린 원통형의 물체를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잡았다.

순간 흐릿한 인영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죽어랏!"

그는 원통 물체를 잡고 인영을 향해 뻗은 후 단추를 눌렀다.

철컥!

쏴아아아!

무수한 독암기가 빗발치듯 날아갔다. 거리는 지척이었고 암기는 섬광같은 속도로 쏘아 나갔다. 과연 인영은 그에게 날아오다가 무수히 암기를 맞고 떨어졌다.

"흐흐흐! 감히 당가의 암기를 당할 자가 어디......."

그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한 벌의 의삼이었다. 바로 그가 벗어놓은 황삼이었던 것이다.

그가 경악하는 순간 한 가닥 싸늘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기억하느냐? 그녀의 나이는 십육 세....... 이름은 백가소......."

번쩍!

섬광이 작렬했다. 그것은 비스듬히 그의 마지막 남은 어깨죽지로 떨어졌다.

"으아악!"

왼팔이 어깨죽지서부터 절단나 떨어졌다. 당수문은 온통 혈인(血人)이 되어 비틀거렸다. 이제 두 팔을 잃은 이상 저항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독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발을 들어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걷어찼다.

슈파악!

한 자루의 강전이 어디서 어떻게 쏘아졌는지 날아갔다. 그러나 상대방은 이미 예상한 듯 장소를 이동한 후였다. 불꽃이 튕기며 벽에 강전이 박혔다. 그것은 남빛이 도는 손가락 길이의 강전이었다.

"목에 손톱 만한 크기의 반점이 있는 아주 예쁜 소녀였지......."

예의 음성과 함께 다시 한 차례 섬광이 그의 눈 앞에서 아래쪽으로 작렬했다.

"크아악"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가 절단되었다. 독각(獨脚)으로는 신형의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당수문은 바닥에 뒹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쪽 다리뿐이었다.

"너희 강호사공자가 실컷 농락하다 버린 소녀는 그 이후...... 사창가에 팔려가 떠돌다가 폐인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살을 하고 말았지......."

"으아악!"

다시 섬광이 번뜩하는 순간 남은 다리마저 사정없이 잘려졌다.

비로소 당수문은 볼 수 있었다. 방 안에는 한 명의 사나이가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철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너, 넌...... 누구냐?"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그로서는 사나이를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사나이가 냉막하게 말했다.

"장천림.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모를 거다. 백가소의 복수를 하러 왔다면 알겠느냐?"

"헉! 그럼...... 네가 바로 상관중도......?"

"그렇다. 그는 첫 번째로 죽었다. 네가 두 번째다."

과연 사나이는 장천림이었다. 그는 화산파 인물의 고유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너희들에게는 한때의 장난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한 소녀의 인생이 망가졌다. 이제 그 대가를 돌려 줄 뿐이다."

그는 철검을 밀었다.

푹.......

섬뜩한 소리와 함께 당수문의 눈알이 부릅떠졌다. 그의 목에 구멍이 뚫려 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당수문의 화려한 일생도 마감되었다.

"......."

장천림은 검을 거두었다. 철검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자 그는 검신을 당수문의 몸에 닦았다. 당수문은 미처 옷을 입지 못했다. 그의 몸 위로 철검이 움직였다.

장천림의 철검이 축 늘어져 있는 당수문의 양물에 닿자 미련없이 그었다.

당수문.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은 것이었다.

이때였다. 밖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렸다.

"천림. 시간이 없다. 빨리 나가자."

그것은 조천백의 음성이었다.

"알았네."

장천림의 신형이 바람처럼 창문을 뚫고 날아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둘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화산파 인물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조천백과 장하영이었다. 두 사람은 장천림의 옷에 튕겨있는 핏방울을 보고 방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장하영이 긴박하게 말했다.

"비명이 들렸으니 곧 벌떼같이 몰려올 걸세. 석회림이 곧 시작할 테니 우리는 그 틈에 빠져 나가야 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콰콰콰...... 쾅! 펑...... 펑펑......!

문득 사방으로부터 폭음이 울리더니 당가보의 여기저기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하핫......! 드디어 시작이군! 저 화약은 앞으로 일향각 내내 터질거야! 나가세!"

장하영의 말에 삼인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날아갔다.

당가보가 사방에서 치솟는 불길을 잡고 간신히 사태를 수습하였을 때는 이미 장천림 일행은 당가보의 이십 리 밖을 달아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화산파의 전령(傳令) 복장을 하고 당가보에 침투했다.

화산파 인물의 옷과 화산파 고유 표식의 청강장검을 빌은 것은 바로 영원루에서 여옥환의 시비들을 녹여버린 조천백과 장하영의 솜씨였다.

그들은 시비들에게 그 물건들을 얻어내 변장을 한 후 급한 소식이 있다는 명분으로 삼엄한 당가의 경비를 뚫고 당수문의 별관까지 침투한 것이었다.

마침 당수문이 지산해와 불륜을 맺고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있어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로 인해 장천림은 생각보다 쉽게 당수문을 죽일 수 있게 된 것이다.



태산 성인봉.

무림총연맹에서는 연일 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흉흉한 무림정세로 인해 무림맹주의 긴급 소집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각 대문파에서는 원로들을 파견하여 총맹에 보냈다. 그들은 연일 대책을 숙의하느라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무우진인(無優眞人).

그는 대무당파(大武當派)의 삼십삼 대 장교진인이다. 또한 현 무림총맹의 맹주이기도 했다. 무림맹의 맹주는 삼 년을 주기로 각 파에서 돌아가며 맡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 권위는 상상 이상으로 일단 명령이 전달되면 각 파는 물론 천하무림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무우진인은 무림령을 발동하여 대책을 숙의했다.

무림은 혼란했다. 그것은 사천당가의 차기 가주였던 당수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어 실종되었다던 상관중이 암장된 시신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려되는 사태는 바로 백색마인에 대한 일이었다. 백색마인은 계속 무림맹의 분타를 무너뜨리며 무림맹의 권위에 명백한 도전을 해오고 있는 것이었다.

백색마인의 무자비한 살수(殺手)는 무림을 온통 공포에 떨게 하고 있었다. 무림총맹에서는 연일 회의를 계속한 끝에 결국 몇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첫째, 흉수는 무림제패의 음모를 꾸미는 자이거나 그 집단이며, 과거 무림맹에 원한을 가진 자일 것이다.

둘째, 현재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한 개 아니면 두 개의 집단이 무림맹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셋째, 흉수의 무공은 극강할 뿐더러 치밀한 두뇌를 지녔을 것이다.

그들이 내린 이 세 가지 결론은 은연중 당수문, 상관중을 살해한 흉수와 무림맹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백색마인이 별개의 조직일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매우 타당한 결론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두 부류의 행적이 전혀 연관성이 없을 뿐더러 시간이나 장소도 크게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무림맹은 그 두 흉수를 잡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한 조직은 소림의 후기지수인 오현상인(吾玄上人)을 필두로 한 것으로, 백색마인에 대한 추적과 척살이 주목적이었다.

오현상인.

그는 나이 불과 삼십 대의 나이였으나 무공은 이미 소림달마비예(少林達磨秘藝)를 통달하여 소림의 태양이라고 불리우는 인물이었다. 그의 배분 또한 높아 소림의 장문인과 동배였다.

한편 상관중, 당수문을 살해한 흉수를 잡기 위한 조직은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무당출신의 백유성이 우두머리가 되어 이끌게 되었다.

백유성 자신이 직접 나서겠노라고 자청하는 등 강한 집념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백유성은 사실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죽은 상관중이나 당수문은 무림맹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해가던 소장파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 두 명이 죽음으로써 소장파의 입김이 점차 흐려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흉수를 빨리 제거하지 못한다면 어렵게 장악한 무림맹에서의 세력기반이 무너질 우려가 있었다.

그는 맹주인 무우진인의 협력을 얻어 흉수를 잡기 위한 정예고수들을 선발했다. 그리고 이번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그의 각오는 사뭇 비장한 것이었다.

바야흐로 무림맹의 분위기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홍무(洪武) 15년 1월 1일.

원단(元旦)을 맞이한 중원 전체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뜬 가운데 하남평원을 혼자 걸어가고 있는 사나이가 있었다.

일신에는 갈색의 무복(武服).

머리에는 어깨까지 덮이는 죽립을 쓰고 있었다. 병기는 휴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죽음을 느끼게 하는 사이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설원(雪原)은 끝이 없었다.

가도가도 끝없는 설원에는 놀랍게도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고 있었다.

분명 사나이는 눈을 밟고 지나갔건만 흔적조차 남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미 전설의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지에 올라있단 말인가?

사나이. 그의 이름은 백리진강이었다.

그는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의 눈 앞 설원의 끝에서는 황혼이 밀려들고 있었다.

서녘을 곱게 물들이며 설원까지도 점차 주황색으로 곱게 채색해 가는 석양빛에 백리진강은 묘한 비련을 맛보고 있었다.

벌겋게 타는 황혼.......

연인(戀人)들이 본다면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말 듯한 색조였으나 그에게는 세상 천지가 온통 피를 뚝뚝 흘리며 젖어들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

문득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전신을 엄습하는 피로감과 고독감 때문이었다.

그는 그만 설원에 드러눕고 만다.

차디찬 눈을 깔고 누우니 혼란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정신이 도리어 상쾌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에 죽립 안의 눈꺼풀은 다시 천 근처럼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깊은 잠이라도 들었으면 싶었다.

처음부터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황궁에 입궁했다.

그가 태태감 등소의 양자로 들어간 것은 애당초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소태감이 되어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은 언젠가 한 사나이로부터 들은 말 때문이었다.

-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히려면 황궁으로 가게.

그는 그 말을 믿었다. 왠지 강한 신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나이의 분위기가 독특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지 않다 해도 당시 그에게는 그 말 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복수를 하기에는 그에게 너무나 모자란 점이 많았다. 중원무림 전체나 다름없는 무림맹을 향한 복수는 그의 능력으로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설사 중도에서 피를 뿌리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는 복수의 칼을 뽑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공을, 그것도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공을 익혀야만 했다. 그래서 택한 황궁이었다.

그는 황궁의 비밀무고에 가공할 무공이 있다고 믿으며 소태감이 된 후로 오직 황궁 비밀무고를 찾는데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무고 속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곳에서 빼내온 영약과 한 권의 마경으로 그는 무공을 완성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무공이면 쉽사리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석 달 여가 지난 지금 그는 수없는 살상을 했다.

그러나 수 없이 많은 문제점들이 현실로 부딪치고 있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모두 죽이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의 원수는 무림맹이었다. 그러나 무림맹에 속한 인물 모두를 죽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백리진강 그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장강십팔채.

진산채.

어부였던 할아버지와 잡부인 아버지....... 그리고 주방 일을 보던 어머니....... 그들 사이의 단란하고 평화로웠던 하루 하루의 일상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작스럽게 들어닥친 무림연합맹의 공격!

할아버지는 그를 안고 등에 창을 맞고 쓰러졌다. 그 싸움은 훗날 백화무림대전이란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무림사에 표기되었으나 어린 소년 백리진강에게는 생애의 처절한 순간일 뿐이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났을 때는 왼뺨에서 피가 쉴 사이 없이 흐르고 있었고 진산채는 불에 탄 잿더미 만이 남아 있었다.

백리진강은 홀로 강호를 주유하면서 세상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왔다. 그리고 이제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런데.......

"후후후....... 후후......."

백리진강의 입에서 지친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은 어느덧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중원은 너무나 넓어....... 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내가 죽이는 자들은 하급의 인물에 불과해....... 후후! 모두 죽이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백리진강은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외롭다는 느낌이 뼈저리게 밀려들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던 그는 흠칫했다.

저 멀리 모닥불로 보이는 불빛이 눈에 띄였던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 불빛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화산(華山).

중원무림의 오대무문의 하나인 화산파는 화산의 주봉(主峯)에 있다. 화산파는 도가(道家)의 문파로 도제(道弟)와 속제(俗弟)를 두고 있었다.

화산은 고래로 검도(劍道)에 치중하여 무당과 더불어 검법의 쌍벽을 이루는 문파였다.

한 명의 도복을 입은 동자(童子)가 합창 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도관에서 두 마장 가량 떨어져 있는 언덕 너머의 고목나무 아래 초라하게 지어져 있는 한 채의 초막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겉으로 보기에도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두 평 남짓이나 될까? 초막 안에는 한 명의 장발괴인이 벽을 보고 앉아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앉아 있었는지 그의 어깨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으며, 입고 있는 옷도 낡고 헤어져 있었다. 장발 사이로 언뜻 보이는 얼굴은 수염이 온통 덮여 있었으나 그다지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

그는 벽을 보고 있었다.

무심(無心).

허무(虛無).

그의 눈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심지어는 한 점의 생기마저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눈이 얼마나 크나큰 후회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 눈인지를 알 것이다.

그러나 장발괴인은 스스로 그 모든 인고를 감내하고 있었다.

"소사숙님. 정양(鄭陽)입니다."

동자는 문 앞에서 무릎을 끊었다. 그제서야 장발괴인의 무심한 눈이 흔들렸다.

"아직 수련이 끝나지 않았다 일러라."

그는 동자가 온 목적도 묻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는 자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그 말 만을 벌써 삼 년 가까이 하고 돌려 보냈던 것이다. 동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소사숙님. 장문인께서 신부(神符)를 내리셨습니다."

순간 장발괴인의 눈에 한 가닥 갈등이 어렸다. 그는 생각한다.

장문신부를 내리다니.......

그것은 화산의 제자라면 어떠한 경우라도 거역할 수 없는 것이거늘.......

내 아무리 모든 것을 버렸다고는 해도 아직 화산인인 이상에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다. 잠시 후에 가겠다."

동자는 돌아섰다. 돌아서며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화산파제이의 고수. 아니, 지금은 세상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가 화산 제일의 인물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실제 방 안의 인물은 화산의 검법정화를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타고난 자질과 집념으로 그가 보이는 성취는 그야말로 화산이 개파한 이래로 가장 무서운 경지를 쌓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강호사공자의 일원이었다.

무림맹에서도 강호사공자는 미래 무림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화산 제일의 기재이자 강호사공자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었던 소사숙이 아닌가?

그런데 삼 년여 전부터 소사숙은 갑자기 이 초옥에 틀어박혀 폐관에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동자는 왜 소사숙이 이런 고행을 선택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못내 아쉽기만 하였다. 화산의 명예를 빛내줄 인물이 이렇게 썩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한 것이다. 동자가 기껏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그가 비장의 검법을 연구할 지도 모른다는 상상뿐이었다.

장문인실.

화산의 이십삼대 장문인 유운자(儒雲子)는 방금 들어온 사제 천인검객 북리웅풍을 맞이했다.

사제이긴 했으나 그는 북리웅풍을 어떤 면에서는 늘상 어렵게 여기고 있었다. 북리웅풍은 그의 사부이자 전대 장문인이 속계로 입문시키면서 장차 화산을 빛낼 위인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 무공으로만 논한다면 유운자는 북리웅풍을 당할 수 없었다.

유운자는 이 사제를 무척 사랑했다. 그만큼 인격이 출중하다는 뜻도 되었다.

만일 그의 흉금이 이렇듯 넓지 않았다면 그가 화산의 법통을 이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제인 북리웅풍이 사문을 빛내 주었으면 하고 늘 바라고 있었다.

북리웅풍은 깨끗이 목욕을 하고 온 듯 정갈한 모습이었다. 다만 수염을 깎지 않아 얼굴이 온통 수염 투성이였다. 옷은 새로 갈아 입은 듯 검박한 마의였다.

"오서 오게. 사제."

말없이 자리에 앉는 북리웅풍을 보며 유운자는 가슴이 차는 것을 느꼈다.

'사제는 언제 보아도 믿음직스럽군.'

"어떤가? 사제가 얻고자 하는 깨달음은?"

정감있는 질문이었다. 북리웅풍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얻고자 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러니 얻고 말고가 없지요."

"......?"

유운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제까지 사제가 삼 년 가까이 면벽을 한 것이 나름대로 어떤 도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궁금한 것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제. 사실 이 사형은 오래 전부터 사제의 면벽에 관하여 궁금해 했네. 이제는 말해 줄 수 없겠나?"

그러나 북리웅풍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그의 입은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유운자는 사제의 입을 열게 할 자신이 없었다.

"무량수불....... 말하기 싫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네. 하지만 사제, 깨달음이란 인연이 닿아야 하는 법일세. 또 면벽을 통해 얻지 못한다면 무위자연에서 찾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일세. 허허....... 태상노군께서 무의 도를 얻은 것도 바로 자연세계에서 얻으신 것이네."

북리웅풍은 그저 씁씁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무량수불....... 대체 무슨 심사가 있길래......."

유운자는 사제가 몹시 안쓰러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원치 않는 것을 굳이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화제를 돌렸다.

"사실 자네를 부른 것은 세상이 시끄럽기 때문일세."

"......?"

유운자는 품 속에서 어제 저녁 날아온 전서(傳書)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얼마 전 종남의 상관중과 당가의 당수문 소협이 의문의 피살을 당했다네. 그들은 자네와 함께 강호사공자의 서열에 있는 인재들이니 자네가 더 잘 알 것일세."

"......!"

북리웅풍의 안색이 변했다. 유운자는 그의 안색을 살피며 계속 이야기했다.

"게다가 최근 전설의 마공 소수혈옥공(笑手血玉功)을 사용하는 자가 나타나 무림맹의 인물들을 무차별 도살하고 있다네. 그래서 무림맹에서는 맹주의 명이 떨어졌네. 물론 우리 화산에서도 고수들을 파견해 달라는 첩지가 왔네."

유운자는 북리웅풍의 눈빛이 처음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자네가 알다시피 우리쪽에서는 마땅히 파견할 만한 인물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자넬 청한 것일세."

북리웅풍의 입술이 움직였다.

"상관중과 당수문이 피살되었다고......?"

그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그렇네. 실로 애석한 일이지. 자네와 함께 명성을 날리던 기재들인데...... 더욱이 당수문 소협은 본파의 여옥환 사매와 혼인을 올리기 직전에 피살당했다네."

"......!"

북리웅풍은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그는 사매 여옥환이 오래전부터 그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는 여옥환을 맞아들일 자격이 상실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당수문에게 시집가게 된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수문이 피살당했다니.......

유운자는 사제의 반응이 큰 것을 보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사제. 말하기 민망하기는 하나 당수문 소협이 피살당한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네. 특히 그가 죽은 모습은 더욱 더 의혹스런 모습이었다네."

"어떻게...... 죽었습니까?"

처음으로 북리웅풍이 질문을 던졌다. 유운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당소협은 사지가 절단 당한 채 죽었네. 뿐만 아니라 국부가 절단되어 있었네. 혹시...... 짚이는 것이 없나?"

"......!"

북리웅풍은 말이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유운자는 그가 큰 충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묘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유운자는 눈살을 찌푸린 채 계속 이야기했다.

"그 일은 강호를 온통 뒤흔들고 있네. 당소협이 당한 형태로 보아 필시 원한이 있는 자의 소행일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네. 더구나 곤란한 점은...... 강호에서 나쁜 소문이 번지기 시작한 것일세.

"......."

"허허....... 글쎄 강호사공자가 여색을 탐닉하다 모종의 일을 벌렸으며 그때 당한 여인이 복수를 한다는 소문일세. 그래서 당소협의 국부가 응징의 의미로 잘렸다는 것일세. 이런 터무니없는 소문이 어디 있나?"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 사형의 생각으로는 자네가 직접 나서서 그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어떤가 하네."

"......."

"이번 기회에 강호출도를 하는 것이 어떤가?"

유운자의 음성에는 기대가 담겨져 있었다. 그러자 북리웅풍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실망의 빛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유운자에게 애써 가다듬은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준비하겠습니다."

북리웅풍은 그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

유운자는 깜짝 놀랐다. 그가 일어설 때는 거절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승낙을 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유운자는 몹시 기뻤다.

"허허허! 천인검객이 출도하게 되면 무림의 판도가 바뀔 거야. 암, 사제는 우리 화산 제일의 기재가 아닌가?"

유운자는 흐뭇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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