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강호무정 제8장 백색마인(白色魔人) - 검궁인
제8장 백색마인(白色魔人)
①
홍무(洪武) 14년 11월 8일
태산(泰山) 성인봉(聖人峯).
이곳은 당금 무림을 관장하는 곳이다. 무림연합총맹(武林聯合總盟)이 있는 곳으로 구파일방을 위시하여 전 중원의 무림세가, 백도무림의 제파들이 공동으로 성지로 여기고 있는 곳이었다.
무림맹이 이곳 태산에 그 총본영을 둔 이유는 공정성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무림의 대파는 대부분 하남 일대에 모여 있으므로 중원에서 다소 떨어진 태산에 영지를 정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잠룡신도(潛龍神刀) 공손일도(公孫一到).
그는 무림맹 서열 육위의 인물이었다.
직위는 총순감(總巡監)으로 직책상 순찰당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에 들어온 보고를 받고 무척 화가 나 있었다.
그것은 낙양지부에서 올라온 것으로 낙양 일대에 순찰로 보냈던 상관중이 실종되었다는 보고였다.
실상 공손일도는 평소 상관중에게 불만이 많았다.
상관중은 명문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평소 오만했을 뿐더러 특히 강호사공자와 은연중 파벌을 형성하여 무림맹 내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강호사공자는 소장파에 속했으며 그에 비한다면 공손일도는 노장파에 속했다.
정사대전 이후 소장파의 득세는 피할 수 없는 현상으로 강세를 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류(時流)를 타는 것이 인정이라고 하지만 그는 노장파가 피땀흘려 세운 무림의 평화를 소장파들이 아무런 공도 없이 혜택 만을 누리려 하는 것에는 질색이었다.
사람이 미우면 모든 것이 비뚤어지게 생각되는 법이다.
그는 상관중의 실종이 별다른 일이 아니라 그가 어떤 재미를 보기 위해 마음대로 공무를 이탈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그러나 강호사공자 중의 또다른 일인인 무당 출신의 백유성(白流星)이 그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았다.
일명 백도제일검(白道第一劍)으로 불리울 만큼 백유성의 무학은 출중했다. 이제 그를 빼어난 후기지수로 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무당의 검법을 통달했을 뿐더러 성격도 침착하고 매사에 빈틈이 없었다.
그는 강호사공자 가운데 은연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찾아온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백유성은 반론을 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백유성은 완강하게 말했다. 공손일도는 화가 났다.
이 놈이 건방지게.......
그러나 백유성은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상관형의 성격을 모르고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평소 그의 성격으로 보아 절대로 알리지 않고 행적을 감출 인물이 아닙니다."
"......?"
"상관형은 성격이 까다로울 뿐더러 매사에 가리는 것이 많으므로 수발들 수하들조차 대동하지 않고 사라질 리가 만무입니다. 음식이나 옷, 심지어는 목욕물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찌 임의로 홀로 잠적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분명 사고가 생긴 것입니다. 철저히 조사를 해보야 합니다."
"......."
공손일도는 침묵했다. 그러나 그도 산전수전 다 겪은 무림의 원로였다. 그 역시 설명을 듣고 백유성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의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럼 자네가 나서서 이 일을 조사해 주겠나?"
백유성은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바라던 바입니다."
백유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그는 이번 사건이 어쩐지 불길한 예감으로 받아 들여졌다.
상관중은 그와 친했다. 강호사공자는 언제나 함께 붙어다녔으며 서로를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상관중이 실종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직감적으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별 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②
기련산(祈蓮山).
무림맹 기련분타의 타주인 방무력(方戊歷)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는 기련산 중에 괴인이 출몰한다는 소문을 듣고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수하들과 함께 왔다.
직책상 관할구역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수하 삼십 명과 함께 이곳에 왔다.
기련산은 방대했다. 그래서 수하들을 나누어 기련산을 조사하던 중이었다.
반나절쯤 지났을까? 그는 동쪽으로부터 향전(響箭)의 신호를 받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향전은 수하들이 웬만한 위기에 처하지 않는 이상에는 함부로 발사하지 못하도록 당부한 것이었다.
그는 경공술을 발휘하여 향전이 쏘아 올려진 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향전이 발사된 곳에 도착한 지금 그의 눈 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십여 명의 수하들이 땅바닥에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한 명의 장발괴인이 한 수하의 품을 뒤지고 있지 않은가?
"멈춰라! 넌...... 누구냐?"
그의 입에서는 절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섬칫한 예감이 든 것이었다.
그의 수하들은 기련분타 내의 최고 정예고수들이었다. 그 딴에는 이번에 예감이 좋지 않아 정예고수 만을 대동하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한 명도 아니고 열 명이 전부 시체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괴인의 무공이야 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내심 두려움이 치밀어 음성이 떨린 것이다.
괴인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꾀죄죄한 몰골에 머리카락이 온통 얼굴을 뒤덮고 있어 용모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괴인의 한 쌍의 눈을 보는 순간 방무력은 심장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괴인의 눈은 마치 비수를 보는 것 같았던 것이다.
"헉!"
방무력은 그 눈빛을 접한 순간 마치 칼날이 자신의 심장에 날아와 꽂히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이때였다.
괴인은 그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서, 서라. 나는 무림맹 사람이다. 그대는...... 정체를 밝혀라!"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아니 방무력은 순간적으로 괴인의 얼굴에 흰 선이 그어지는 것을 보았다. 괴인이 웃고 있는 것이다.
그는 괴인이 손을 쳐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그저 보이는 것이라고는 괴인의 손바닥이 얼음처림 투명하게 하얗다는 것과, 괴인의 손바닥 중앙에서 혈옥의 반점이 그를 향해 전광처럼 날아왔다는 것뿐이었다.
"으아아아악!"
그는 자신의 비명을 꿈결 속인 듯 들었다. 자신의 비명을 자신이 듣게 될 줄이야.......
아득히 멀어져가는 의식 저편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먼저 가거라....... 그리고 곧 뒤따라 갈 놈들에게 내 이름이나 가르쳐 주거라. 내 이름은 백리진강(百里眞强)......."
피.
피바람이 분다. 그 피바람은 기련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기련산으로부터 시작된 혈풍의 향방은 곧장 남하(南下)하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괴인이 일으킨 피바람이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면 그를 본 자는 전부 죽었기 때문이었다. 사신(死神)인가? 그는 죽음을 몰고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왜?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죽이는지 모른다.
아니, 죽인다기보다는 도살을 한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다만 기이한 것은 그가 꼭 무림맹의 인물들 만 골라서 죽인다는 사실이었다.
기련분타는 다만 첫 희생양일 뿐이었다.
이후 남하하면서 드는 불과 보름 사이에 무림맹 여덟 개 지단이 그의 손에 의해 혈해(血海)로 화하고 말았다.
- 크크ㅋㅋ! 무림맹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그는 이렇게 광소를 터뜨렸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었다. 무림맹은 하늘 아래 무림의 성역이었다. 누가 감히 무림맹 전체를 상대로 이런 광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정사대전 이래로 무림맹은 무림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흑도무림은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괴인은 공공연히 무림맹을 타파하면서 가공할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괴인의 무공은 실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무려 팔십구인의 고수들을 상대한 적도 있었다.
황하변의 십리평(十里坪)이란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무림맹 산하의 정예고수 팔십구인이 치밀한 계획 끝에 그를 포위하고 합격했다. 그러나 싸움의 결과는 그야말로 비참한 것이었다.
아비규환...... 생지옥...... 목불인견......!
결과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팔십구인의 고수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싸움의 결과를 알게 된 것도 싸움이 끝난 한참 이후였다. 어떤 형태의 싸움이 벌어졌는지는 아는 자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괴인이 검이나 도 따위의 병장기는 사용하지 않고 일종의 마공(魔功)을 사용했다는 것을 시신의 상태를 보고 짐작할 뿐이었다.
죽은 자들의 시신에는 선명한 장인(掌印)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장인은 기이하게도 흰색이었다.
백색장인(白色掌印)의 공포!
이후로 무림에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 백색마인(白色魔人)을 만나지 말라! 그를 만나느니 차라리 염라대왕을 만나는 것이 낫다.
그 노래 아닌 노래는 바로 정체불명의 인간도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름도, 내력도 알 수 없는 괴인. 그는 이제 백색마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 것이다.
중원천하는 혹한의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겨울의 추위보다 더욱 추운 것은 인간의 마음이었다. 특히 강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더욱 추운 겨울이었다.
더더욱 무림맹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올 겨울은 말할 수 없이 추웠다. 바로 백색마인 때문이었다.
③
홍무(洪武) 14년 12월 7일.
예년에 비해 일찍 찾아온 한파는 성도 장안(長安)을 온통 쓸쓸한 풍경으로 만들고 있었다.
한파가 닥치면 사람들은 움츠러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장안 시내는 갑자기 인파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장안 전체가 흥청거리는 것이었다.
장안 북쪽에는 한 채의 보(堡)가 있다.
- 당가보(唐家堡).
강호인치고 그 이름을 모른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당가보는 수백 년의 전통을 지닌 무가였다.
사천당가는 독자적으로 명문의 서열에 든 지 오래였으며 당금의 무림맹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바로 그 당가보로 향하는 길이 온통 메워지고 있다시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가보에 혼례식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혼례를 치르는 사람은 당가보의 차기 가주가 될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설명보다는 강호사공자(江湖四公子)의 일원이 혼례를 치른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했다.
천수관음(千手觀音) 당수문.
바로 그가 혼례를 치르게 된 것이다. 그의 혼인 상대자 또한 쟁쟁한 명문의 규수였다.
역시 무림맹의 일원인 화산파(華山派)의 여제자 비선옥봉(飛仙玉鳳) 여옥환(呂玉環)이 그의 신부감이었다.
양가의 가문이 쟁쟁한 터라 혼례식에 참여하려는 하객들이 많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더구나 강호에 적을 두고 있는 자라면 이번 기회에 무림고인들의 얼굴을 구경이라도 하기 위해 사천으로 오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이같이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리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당가보가 아무리 전통있는 명가라고는 하지만 이 많은 하객들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당가보에서는 장안 시내의 객점을 거의 전세내어 하객들을 이곳에 묵게 하는 조처를 취했다.
와글와글.......
가는 곳마다 화제는 이번 혼례였으며,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두 사람의 혼인이 천생연분이니, 미래 무림의 주역이 될 사람들의 가화니 하며 축배를 들었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가운데는 화산 여제자 비선옥봉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여옥환.
그녀는 명가의 여고수였다. 무공 또한 쟁쟁할 뿐더러 미모의 수려함이 강호삼미(江湖三美)에 속한다고 했다.
그녀와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당수문이 결합하게 되면 그들의 후세는 더욱 뛰어난 아이가 태어나리라는 말들을 나누며.......
등용객점(騰龍客店).
두 평 남짓한 방 안에는 사인이 마주 앉아 있다. 바로 장천림 일행이었다.
그들은 간신히 이 방을 빌었다. 시내의 객점은 거의가 초만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비좁은 방도 평소의 다섯 배나 되는 많은 은자를 주고서야 간신히 빌릴 수 있었다. 조천백이 입을 열었다.
"혼례를 올리는 곳치고는 지나치게 경계가 심해. 아무래도 다른 사정이 있는 것 같아. 요즘같은 태평성대에 사천당가쯤 되는 곳에서 이렇게 초긴장이라니......."
그렇다.
비록 외부적으로는 들뜬 분위기였으나 실제 당가보는 초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당가보의 식솔들은 물론 많은 고수들이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하객들은 대부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객점에 흩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석회림이 심각하게 반문했다.
"혹시 상관중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 아닐까?"
조천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쉽게 발견되지 않을 거야."
그 말에는 장하영도 동감이었다.
"내가 당시 잘 마무리 해놓았기 때문에 그럴 염려는 없다."
이때 장천림이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아보기는 했나?"
조천백은 싱긋 웃었다. 그는 소매 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탁자에 펼치고 보니 그것은 지도였다.
"간신히 지도를 그렸지. 하지만 곳곳에 매복이 심해서 자세하지는 못해."
석회림은 못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말을 장하영이 받았다.
"어쨌든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거사일은 삼일 안에 잡아야 한다."
장하영. 그는 전술과 병술의 전문가였다.
그는 옛 친구들과 합류한 후 적극적으로 강호사공자를 척살하는 일에 동조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을 척살하는 계획은 그가 맡아 수립하는 입장이 되었다.
장천림이 물었다.
"당수문에 대한 사항은?"
"여기 있다."
조천백이 또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
"......?"
"당수문의 특기인 천수신전(千手神箭)에 대한 것을 조사해 내지 못했어. 그것은 워낙 그의 극비절기인지라...... 무엇보다도 그의 천수신전에 당한 사람 중 살아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 더욱 난점이야. 그러니 그에게 당한 시신의 상태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지."
조천백의 말은 계속되었다.
"짐작컨데 천수신전은 어떤 자세, 어떤 각도에서도 발사할 수 있는 것으로 회선전(廻旋箭)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천수신전.
그것은 천수관음이라는 별호가 있게 한 당수문의 최고 성명절학이었다.
사실 당가의 무공은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당가가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무공보다는 그 가문 전래의 암기술에 있었다.
암기라면 석회림이 전문가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하건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신체 다섯 부위에 장착되어 있는 일종의 소전(小箭)일 것이라고 생각해. 즉 팔꿈치, 무릎에 각각 두 개씩, 나머지 하나는 입 속에 있을 거야."
"입 속?"
장천림을 위시하여 모두 놀랐다. 입 속에도 활을 장착할 수 있단 말인가?
석회림은 담담히 말했다.
"너희들은 잘 모를 거야. 하지만 암기란 항상 상상을 벗어난 곳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지. 더욱이 당가 정도 되면 그 정밀성은 가히 최고에 달할 거야."
"으음."
장하영은 신음을 발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장천림을 바라보았다.
"천림, 자신 있나?"
그의 질문은 장천림이 염려가 된다는 뜻이었다. 장천림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에게 접근하기만 하면 자신이 있네."
"접근이라......."
이때 다시 석회림이 말했다.
"또 하나 유의할 것은 그의 신전이 전문적으로 호신기공을 파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래서 맞으면 혈맥을 상할 뿐 아니라 독(毒)까지 발라져 있다고 생각해야 돼."
장천림은 싱긋 웃는다.
"그 정도는 두렵지 않네."
그는 불귀곡에서 많은 무공을 익혔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영약을 복용하여 웬만한 기독은 영향을 받지 않는 몸이었다.
장하영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촉박해. 만일 열흘 정도의 여유만 있어도......."
그 말에 장천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그럴 시간이 없어. 놈이 혼례를 올리기 전에 해치워야 해. 놈같은 철면피가 정상적인 혼인을 하게 할 수는 없다."
장천림의 어조는 굳어 있었다.
"......."
"놈에게 제대로 복수를 하자면 놈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을 모두 느끼게 해야 돼. 생각같아서는 놈의 정혼녀를......."
장천림은 말 끝을 흐렸다. 그러나 방 안의 삼인은 더이상 듣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유독 장하영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문득 그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었다.
"천림.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장천림은 말이 없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저 허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소.......
두 번째야.
네 원수의 곁에 와 있다.
④
7월 10일.
혼례식은 삼일 후인 7월 13일에 치루어질 예정이었다.
신부(新婦)는 그 이전에 당가보에 갈 수 없었다. 본래 혼례는 신부의 집에서 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이번만은 특이한 경우에 속했다.
그것은 여옥환이 화산파 출신이라는데 사정이 있었다. 화산파는 도가(道家)의 수도장이었으므로 그곳에서 혼례를 올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혼례는 당가보에서 치르기로 합의된 것이었다.
여옥환은 혼례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당가보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혼례 당일이 되어야 당가보에 들어가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 그녀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장안에서 가장 큰 객점인 영원루(永遠樓)라는 곳이었다.
이 영원루는 화산파에서 온 하객들이 통째로 전세내어 쓰고 있었다.
하루하루 날짜가 흐를 수록 축제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물론 당사자인 여옥환이야말로 안절부절이었다. 가슴이 설레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매일매일 화장과 목욕을 하며 치장에 온 신경을 다 쏟고 있었다.
비록 강호의 여인이라고 하지만 이런 일에는 당연히 여자로 돌아가는 것이다. 혼야가 되기 전까지 신랑을 볼 수 없는 것이 중원의 풍습이었다.
그녀는 혼례 때까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되자 더욱 상대방인 당수문이 그리워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녀는 홀로 거울을 들여다 보며 당수문과 처음 만난 그날을 상기하면서 이따금 미소를 짓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였던가......?
당수문은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화산파의 천인검객을 만나기 위해 화산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이었다.
그때 그녀의 마음은 동문 사형인 북리웅풍에게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복리웅풍은 문을 닫아 걸고 이 년 전부터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그 일로 심리적인 타격을 심하게 받은 양 완전히 도사(道士)처럼 변해 버린 것이었다. 심지어는 그녀가 방문해도 만나주지 않았다.
당수문이 화산을 방문한 것도 그를 설득하여 무림맹으로 입맹하라는 권유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복리웅풍은 그를 만나는 것마저도 거절했다. 여옥환은 그 문제를 두고 당수문과 몇 차례 상의하다가 그만.......
'아아! 그날 밤 달은 무척 밝았어.......'
동경 속에 비친 여옥환의 얼굴에는 은은한 도화빛이 어리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곤 했다. 두 사람은 한창 청춘이었다. 중천에 뜬 그날 밤의 달빛이 그들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화산 후면의 폭포수 아래 바위가 있다. 그 바위 그늘에서 그들은 첫 입맞춤을 나누었을 뿐더러.......
그날 그만 넘어서는 아니되는 선(線)까지 넘고야 만 것이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결혼을 굳게 언약했다.
물론 그 둘의 혼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화산과 당가의 사돈 관계는 양파로 볼 때도 크게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사문의 존장들도 환영이었으며, 당가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왔다. 그래서 혼인은 급진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아가씨."
문득 밖에서 시비의 음성이 들렸다.
"응? 무슨 일이야?"
그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밖에 당공자께서 와 계셔요."
"당공자님이......!"
그녀는 펄쩍 뛸 듯이 일어났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혼례 당일까지는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곳까지 찾아 오다니......?
여옥환은 곧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후훗,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그녀는 얼른 거울을 보고 머리를 가다듬었다. 조금이라도 어여삐 보이려는 것이 여인의 심정인가.
그녀는 머리를 다 매만지고도 다시 거울을 몇 번이고 본 뒤 말했다.
"어서 모셔라."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황삼을 입은 청년이 들어섰다.
그는 바로 당가보의 차기 보주가 될 위인, 천수관음 당수문이었다.
"수문. 어떻게 여길......?"
짐짓 놀라워 하면서도 여옥환은 만면에 가득 웃음이었다. 그녀는 달려가 당수문의 목을 끌어 안았다. 당수문도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 안으며 말했다.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왔소."
"호호호호....... 이제 사흘 후면 당신의 아내가 될 터인데 그 사이를 못 참는단 말이에요?"
"후후! 그때는 그때고......."
당수문은 그녀의 엉덩이를 손으로 덥썩 움켜쥐었다.
"아이."
여옥환은 허리를 비틀었으나 싫지는 않은 듯 코먹은 소리를 내며 더욱 그에게 매달렸다.
그것은 이미 갈 데까지 가본 남녀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한편 문 밖. 그곳은 객점의 별원 후원이었다.
두 명의 청년이 서 있었다. 그들은 당가 특유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바로 당수문을 수행하고 온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 받으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시비 두 명이 각각 소반을 받쳐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나누더니 시비들에게 다가갔다.
"하하! 화산의 아가씨들은 전부가 아름답구려."
"후후! 아가씨들도 결국 곧 당가의 사람이 될 것이 아니오? 그 전에 우리 친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지 않소?"
시비들은 두 손으로 주안상을 받쳐들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도 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청춘은 통하는 데가 있는 법인지.......
시비들도 두 청년이 싫지 않았다. 당가라면 무림의 명문인데다가 청년들의 얼굴도 준수하였던 것이었다. 그녀들은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두 청년은 다가가더니 슬쩍 시비들의 뒤로 돌아가 손을 뻗어 엉덩이를 만졌다.
"어멋......."
"무슨 짓을......."
그러나 청년들은 대담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시비들이 손에 소반을 들고 있어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이용한 듯 서슴없이 손을 움직였다.
각자 시비들의 뒤쪽에 바짝 붙어 엉덩이를 더듬고, 한 손으로는 앞가슴을 주무르는 것이 아닌가?
"아, 아니......!"
"어머멋!"
시비들은 한창 물이 오를 나이였다. 그녀들은 가뜩이나 혼례다 뭐다 하여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준수한 청년들이 접근하자 애당초부터 거절할 마음이 없었다. 더욱이 그들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자 그만 마음이 풀려 버리고 말았다.
공범의식이랄까?
두 시비는 똑같은 처지를 당하자 은연중 그 현실을 즐기려는 마음이 들고 있었다. 더구나 시비들은 소반을 든 핑계로 청년들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도 변명이 되고 있었다.
마침내 두 시비는 청년들에 의해 으슥한 회랑 벽 쪽으로 밀려갔다.
"하하....... 우리끼리 재미를 보는 것도 좋지 않소?"
"후후! 어차피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사람들이 아니오?"
두 청년은 이렇게 지껄이면서 시비들을 회랑 구석으로 밀고 들어갔다. 마침 이곳은 객점에서도 가장 후미진 별원이었으므로 외인이 출입하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외부로 새어나갈 염려는 없었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 한은 말이다.
청년들은 기술은 훌륭(?)했다.
그들에게 있어 순진한 시비들을 녹이는 일이야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던 것이다. 회랑 구석으로 시비들을 몰아 붙인 그들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녀들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은 시비들의 옷을 풀어 헤치고 아직 한 번도 남에게 보인 적이 없는 처녀의 가슴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거기까지 가면 이미 쌀은 익어 밥이 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시비들은 그만 온 몸이 녹아 내리는 듯한 쾌감을 느끼며 청년들의 손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주안상을 들이는 일조차 까맣게 잊은 채.......
"수문......?"
여옥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수문이 옷을 벗는 것을 보며 그녀는 깜짝 놀란 것이다.
"얼마 후면 혼인인데......."
그러나 그녀는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수문이 옷자락을 내던진 후 곧장 그녀의 몸을 짓눌러 왔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심리란 묘한 것이다.
아무리 정숙한 척하여도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는 데야 어쩔 수 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겉으로는 나무라는 척 했으나 그가 몰래 당가를 빠져나와 이렇게 자신을 찾아준 것을 지극히 기뻐하고 있었다.
당수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로 침상에 쓰러진 여옥환의 옷을 벗겼다. 이윽고 그녀의 옷이 떨어져 나가고 백옥같은 나신이 드러났다.
알맞게 발달된 육체였다. 이미 남자를 겪은 여체였기에 여자로서의 성징은 뚜렷이 발달해 있었다. 두 개의 유방은 만지면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으며, 피부는 묻어날 듯이 부드러웠다.
게다가 기름진 아랫배에 은밀히 형성된 삼림은 짙게 우거져 있었다.
당수문은 왠지 서두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전희도 생략하고 막바로 입성했다.
"흑......."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바람에 여옥환은 활을 맞은 사슴인 양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동공이 크게 떠졌다.
그 눈에는 한 가닥 무서운 의혹이 맺혔다.
"당신은......?"
그러나 곧 이어진 당수문의 격렬한 율동에 그녀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녀의 육체가 침상에 반쯤 밖으로 걸쳐진 채 무섭게 흔들렸다.
그녀는 손을 쳐들어 당수문의 머리를 내려치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수문의 공략은 철저히 그녀의 육체를 뒤집어 엎어 버린 것이었다. 여옥환은 입을 딱 벌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했으나 그것은 입 밖에 나오지 못한 채 그만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아흑......."
당수문은 한 손으로는 유방을 쥐어짜듯 비틀고 있었으며, 한 손으로는 그녀의 긴 머리칼을 움켜쥐듯 잡고 있었다.
그의 허리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마치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 속도는 여옥환이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무섭도록 강한 쾌락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아악악......!"
여옥환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그녀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같은 느낌은 처음이었다. 처음 폭포수 아래에서 당수문과 정사를 벌일 때도 이런 충격은 없었다.
그때는 처녀였으므로 달콤한 느낌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마치 죽음같은 절망적인 쾌락이 온 몸을 휩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당수문의 무서운 힘에 의해 반쯤 침상 밖으로 삐어져 나갔던 상체가 쳐들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반월처럼 휘며 당수문의 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행여나 그가 움직임을 중지할까 두려운 듯 그녀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허리를 아래 위로 꺾으며 당수문의 움직임에 맞추어 전신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당수문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문득 그는 자세를 바꾸더니 그녀의 두 다리를 잡았다. 그는 다리를 잡아 벌린 후 그녀의 머리를 바닥에 닿게 했다. 그로 인해 여옥환은 거꾸로 된 기이한 자세가 되었다.
그런 상태로 당수문은 또 다시 입성했다.
"악!"
머리가 바닥에 밀려 부딪쳤으나 여옥환은 조금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고통보다는 악마적인 희열이 온 몸을 휘감는 바람에 그녀의 몸은 세찬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그러나 육체적인 욕망과 이성은 별개의 논리를 가지고 그녀를 어두운 타락과 함정의 구렁텅이를 향해 몰아 넣고 있었다. 한 순간 그녀의 눈은 크게 부릅떠졌다.
소반은 땅에 뒹굴어져 있다.
두 명의 시비는 머리칼이 온통 헝클어지고 치마는 물론 옷차림도 엉망이었다. 그녀들은 난생 처음으로 이같은 경우를 당했다.
회랑 구석에서 이루어진 급작스러운 정사는 시비들의 인생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한 것이다. 일이 끝난 후 그녀들은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명의 당가 청년들이 그녀들을 한 순간에 탕부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옷을 추스릴 때였다.
"부탁이 있소. 아가씨들."
"흐흐흑! 당신은 누구죠?"
여옥환은 오열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바탕 격렬한 정사가 끝난 후 아직도 전라의 모습이었다. 침상 위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그녀는 당수문을 보며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당수문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 그토록 불꽃을 내며 이글거리던 열기는 이미 싸늘히 식어 버리고 없었다. 그저 무심안(無心眼)일 뿐이었다. 하나의 물건을 보듯 그는 여옥환의 벗은 몸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여옥환은 그의 눈길을 받자 비스듬히 벌려진 다리를 약간 오므리며 입술을 떨었다.
"난 알아요...... 당신이 그가 아니라는 것을...... 흑! 그런데 왜?"
당수문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럼 알면서도 날 받아들인 이유는?"
여옥환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건...... 그건...... 아아!"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의 신비한 곳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뚜렷이 손자국이 남아 있는 유방이 노출되었다.
당수문은 차갑게 말했다.
"그 자와 나를 비교하면 어떻소?"
그 말에 여옥환의 몸이 굳어졌다. 너무나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아무리 여옥환의 얼굴이 두껍다고 해도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못되었다.
"당신...... 어쩌면 그런 질문을......!"
여옥환은 전신을 가늘게 떨며 원망스럽게 뇌까렸다. 당수문은 옷을 다 입은 후 돌아서며 말하고 있었다.
"오늘 일은 그대의 입으로 누구에게든 말하지 않을 것으로 믿소. 그것이 본인을 위하는 일일 테니까."
"......!"
그렇다. 여옥환은 그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에 이미 그가 당수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거부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도 마력적인 쾌감이 그녀의 이성을 초월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또한 그 누구에게 이런 사실을 털어 놓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스스로를 모욕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이때 당수문은 옷을 다 입고 미련없이 밖으로 걸어나갔다. 여옥환은 갑자기 그를 불렀다.
"자...... 잠깐! 이름 만이라도......."
당수문, 아니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돌아서지도 않은 채 물었다.
"무엇 때문에?"
여옥환은 입술을 악물었다. 너무도 수치스런 일이었으나 지금 그녀의 마음은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라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잖아!
마침내 그녀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말했다.
"당신을 다시 만날 수는...... 없을까요?"
사나이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 나왔다.
"훗! 가끔 외도라도 하겠다는 건가?"
일이 이쯤되면 뻔뻔해지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여옥환은 몸을 일으켰다. 사지를 움직이자 전신 곳곳에 아직도 노곤하게 남아있는 쾌락의 여운이 그녀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게 했다.
그녀는 침상 아래로 내려갔다. 여전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으나 몇 걸음 걷는 동안 둔부를 묘하게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녀는 뒤에서 사나이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이미 그녀는 변해 있었다.
"호호......! 당신은 나를 타락한 여인으로 만들었잖아요. 모든 게 당신 책임이에요. 흐응, 설마 날 이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요?"
여옥환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그녀는 사나이의 듬직한 등에 자신의 유방을 밀착시킨 채 뺨을 비벼댔다. 그러자 다시 전신이 뒤틀리는 듯한 쾌감이 되살아 났다.
'이런 느낌 처음이었어! 절대 이 사람을...... 놓지 않을 테야.'
한편 사나이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당수문. 들었느냐? 네가 혼인하려는 여인이 지금 한 말을? 네가 이 자리에서 듣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그는 서서히 돌아섰다. 그러자 여옥환이 그의 목을 휘어감으며 입술을 부딪쳐 왔다. 두 사람의 입술이 합쳐졌다. 여옥환은 사나이의 입술을 무섭게 핥으며 적극적으로 혀를 움직였다.
정녕 무서운 것이 여인의 변심(變心)이련가? 이제 화산의 명문 여제자 여옥환은 희대의 요녀로 화해버린 것이었다.
사나이의 손이 여인의 둔부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여옥환은 콧소리를 내며 한 쪽 다리를 들어 사나이의 허리를 뱀처럼 휘어 감았다. 사나이의 손이 둔부를 강하게 움켜 잡자 그녀는 아! 하고 신음을 토하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사나이의 눈 아래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유방이 흔들렸다. 뒤로 젖혀진 여옥환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또다시 열풍을 기대하는 듯이 그녀의 눈이 가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사나이이의 손이 둔부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앞으로 미끌어 지더니 유방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유방이 사나이의 손 안에서 뭉개졌다. 그러자 여옥환은 마력적인 쾌감에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사나이의 손은 더욱 강하게 유방을 움켜쥐었다. 여인은 눈꼬리를 떨고 있었다. 그 순간 사나이의 손이 떨어지더니 손가락 하나가 빳빳이 뻗으며 유방 한가운데의 옥당혈(玉堂穴)을 찔렀다.
"악!"
여옥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어 그녀의 몸은 뼈가 없는 듯 스르르 아래로 무너졌다.
"......?"
여옥환은 바닥에 널브러지며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사나이의 매정한 음성이 떨어졌다.
"내 이름은 장천림이다."
강호무정 제9장 두 번째 복수(復讐) - 검궁인
제9장 두 번째 복수(復讐)
①
12월 12일.
혼례식을 하루 앞 둔 날이었다.
당가보의 경비는 더욱 삼엄해지고 있었다. 이번 혼례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상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근래 들어 무림맹을 표적으로 무자비한 살상을 일삼고 있는 백색마인(百色魔人) 때문이었다.
백색마인은 무림맹의 수십 개 지부를 피로 평정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무림맹은 초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번 당가의 혼인식에 많은 하객들이 몰려 올 것이라는 예상은 벌써부터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색마인이 이곳에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 또한 없는 것이다.
신성하고 경사스러운 혼인일에 행여나 참변이 일어나지 않을까 저어하여 경비를 크게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당수문은 강호사공자의 일원이었고, 강호사공자는 무림맹의 소장파 핵심세력이었으므로 더욱 만전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별각(別閣).
당수문은 방 안을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도무지 안정되지 않고 있었다. 혼례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혼례라고 해야 이미 여옥환과는 육체를 나눈 사이였으므로 그다지 설렐 것까지는 없었다. 또한 그는 명문 출신이라는 잇점과 영준한 외모 때문에 강호상에서 이미 많은 여인들과 교제를 갖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여자라면 단순한 성욕의 대상일 뿐이었다. 다만 그가 여옥환과 혼인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그녀가 화산파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가와 화산의 결합은 앞날을 위한 큰 투자인 것이다.
지금 그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이유는 바로 백색마인 때문이었다. 그는 얼마 전 무림맹에서 날아든 전서구를 읽었다.
그것은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백유성이 보낸 것이었다. 전서구에는 여러 가지 소식이 적혀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상관중의 실종 건이었다. 백유성은 그 건을 전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 혼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백유성이 보낸 전서구에서 특히 마음에 걸리는 사항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상관중의 실종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강호사공자 전체와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상관중이 공연히 실종될 리가 없다. 어쩌면 백형의 말이 맞는 지도 모른다. 누군가 우리 사공자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상관중의 죽음은 이제 시작일지도.......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어쩌면.......'
여기까지 생각한 당수문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이곳은 용담호혈이나 다름없는 곳, 아무리 강한 자라 해도 감히 본가에 와서까지 사공자의 일원일 날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당수문은 그렇게 단정짓고 있었다. 실상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설사 상관중을 죽인 흉수가 눈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그와 일대 일로 겨루어 이길 자신이 있었다.
더구나 이곳은 그의 본가인 사천 당가보가 아닌가.
어쨌든 혼례를 하루 앞둔 지금 그는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잠자리에 들 시간이 넘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억지로 잠을 청해 보아야 기분만 더욱 찜찜해질 뿐이다. 그는 방 안을 서성거리다 책상으로 걸어갔다. 서책이라도 읽다 보면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가 막 책 한 권을 펼쳤을 때였다.
"공자님......."
문득 문밖에서 한 가닥 그윽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당수문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크게 울렁거렸다.
"산해(珊海)......?"
그러자 밖에서 약간 떨리는 음성이 들렸다.
"네......."
당수문의 눈빛이 빛났다.
"들어오시오. 산해."
그의 음성은 어떤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약간 망설이는 모습으로 들어서는 여인이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나이는 이십삼 세쯤 되어 보였으며 전체적으로 성숙한 미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의외로 소복(素服)을 입고 있지 않은가? 경사를 하루 앞둔 밤에 소복을 입은 여인이 신랑될 사람의 침소를 방문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수문은 소복을 입은 여인을 보는 순간 온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내일이면 그는 혼례식을 치루게 된다. 그러나 지금 그는 소복을 입은 여인 지산해(址珊海)를 본 순간 그만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낀 것이었다.
지산해.
그녀는 그가 형수(兄嫂)라고 불러야 할 여인이었다. 비록 직계는 아니라도 그의 육촌 형의 아내였기 때문이었다.
지산해는 육촌 형 당율빈(唐律彬)이 이 년 전 급병으로 죽은 이후 미망인이 된 여인이었다.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당가에 남아 당수문의 노모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런 미망인 지산해와 눈이 맞은 것은 반 년 전이었다.
삼 년 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소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 중원의 법도였으며 당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우기 당가는 무림 명가였으므로 그 법도는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지산해는 아름다왔다. 스물세 살의 여인이라면 여자로써의 완숙미가 한창 절정에 달해 있을 나이 아닌가. 더구나 미망인이라는 신분이 더욱 미묘한 매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당수문이 그녀와 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 뜻밖의 일이었다.
당수문이 아무리 여색을 좋아한다고 해도 차마 집안의 여인, 그것도 육촌 형의 아내까지 건드릴 정도는 아니었다. 만일 그런 일이 발각이라도 난다면 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 가문에 먹칠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이 벌어진 것은 지난 해 어느 날이었다.
지산해는 망부(亡夫)의 기일(忌日)에 제(祭)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복을 입고 한밤중에 젯상을 차리고 있었다.
지산해의 망부는 본래 당가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표국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급병으로 죽은 후 지산해는 당가로 오게 되었다.
따라서 지산해는 당가에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녀가 기일의 제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당가에서는 형식적으로 제기를 마련해 주었을 뿐 그녀를 거드는 사람조차 없었다.
마침 당수문은 정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별당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 텅빈 빈소에서 흐느껴 울고 있는 지산해를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위로나 해줄 양으로 빈소로 들어갔다. 그는 서럽게 오열하고 있는 지산해의 어깨를 다독이다가 그만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는 메마른 삭풍과 함께 비가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왠지 을씨년스러운 밤이었으며 사위는 적막하기만 하여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는 밤이었다.
그 쓸쓸한 밤의 빈소에서 미망인 지산해는 그가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하자 그만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으로 안겨든 것이었다.
꽈다당! 하는 뇌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뇌전이 빈소 안을 잠깐 밝혔다. 빈소의 위패와 신위가 흔들렸다.
문득 당수문은 소복을 입은 채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지산해의 희디흰 목덜미에 시선이 가는 순간 그만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와락 그녀를 껴안고 말았다.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기이하게도 지산해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긴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위패와 신위가 내려다 보고 있는 빈소에서 껴안고 뒹굴고 말았다. 새하얀 소복이 금침인 양 마룻바닥에 펼쳐졌다. 소복 위에 고스란히 드러난 여체는 소복보다 더 희었으며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의 불륜(不倫)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억제할 수 없는 욕망 앞에서 인륜이나 규범은 힘없이 무너지고 오랫동안 남성을 접하지 못했던 지산해의 육체는 뜨겁게 타올랐다. 반면 금기를 범하는 당수문의 욕망은 한 번 문을 넘은 이상 걷잡을 수 없이 비등해 버렸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러 차례 만나 불륜을 지속했다. 그것은 벌써 일 년 가까이 된 일이었다.
당수문은 활짝 손을 벌렸다.
"어서 오시오. 산해."
"흐흑......."
산해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망설이던 끝에 용기를 내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내일이면 당수문은 여옥환과 혼인을 하게 된다.
이제까지는 당수문이 혼자의 몸이었기에 사람들의 눈을 피한 둘만의 시간을 간간이 나눌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런 절박한 기분이 그녀로 하여금 모험을 불사하고 이곳까지 오도록 만든 것이었다.
이십대 미망인의 육체는 난숙했다. 당수문의 품에 안긴 순간 이미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당수문은 그녀의 둔부를 안으며 중얼거렸다.
"잘 왔소. 그렇지 않아도...... 당신 생각이 났었소."
지산해의 한 쪽 다리가 그의 손에 의해 들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당수문의 목을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난...... 난...... 정말 나쁜 계집이에요."
"무슨 소리, 내게 있어서는...... 최고의 여자요. 흐흠......."
당수문은 그녀의 허리를 힘껏 조이며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가 벽 쪽으로 밀어붙인 지산해의 몸은 이미 해파리처럼 휘감기고 있었으며 힘이 가해질 때마다 더욱 부드럽고 끈기있게 그의 욕망을 흡착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껏 많은 여인들을 상대해 보았으나 지산해 만큼 그를 만족시키고 흥분시키는 여인은 없었다. 두 사람은 선 채로 서둘러 서로를 탐닉했다. 산해는 고개를 마구 도리질치면서 달뜬 신음을 발하고 있었다.
"아아 ......전 나쁜 계집이에요."
무서운 욕망이었다. 미망인으로서의 위치나 금기 따위는 이제 그녀의 뇌리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의 소복이 바닥으로 허물벗듯 흘러내려 뽀얀 나신을 절반 이상 노출시키고 있었다.
터질 듯 무르익은 육체였다. 수밀도 같은 유방에 당수문의 얼굴이 달라 붙었다. 그가 힘차게 그녀의 가슴을 애무할 때마다 그녀의 몸은 격렬하게 진동했다.
두 사람의 정사는 숨가쁘게 이어지고 있었다.
내일이면......
내일이면 끝이야.......
그런 생각이 더욱 절박한 의식을 주어 지산해의 몸을 뜨겁게 태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수문이 그녀를 밀어 붙일 때마다 풀어헤쳐진 머리칼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당수문의 입술과 손은 그녀의 몸을 할퀴듯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지산해는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발했다.
이를 아무리 악물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신음은 억제할 수 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아!"
한참 후에야 두 사람은 땀에 젖은 몸을 떨구었다. 지산해는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육체는 도화꽃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
당수문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은 여체였다. 생각 같아서는 영원히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그도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내일부터는 그녀를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른한 기분을 느끼며 침상에 걸터 앉았다.
지산해는 반라의 몸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서슴없이 당수문의 무릎에 앉았다. 당수문은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 입을 맞추었다.
"사랑했었오. 산해."
지산해는 온 몸을 떨면서 그의 품에 안겼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 것이다. 당수문의 그 말 한 마디로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정말 끝인가요?'
절박함이 여인으로 하여금 더욱 타오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당수문의 입술이 그녀의 젖가슴을 훑고 지났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뒤로 활처럼 젖혔다. 기나긴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뒤로 쏟아져 내렸다.
"싫어요, 그런 말......"
당수문의 입술은 젖가슴을 지나 뽀오얀 그녀의 기름진 아랫배로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다. 지산해는 도리질을 하며 다시 뇌까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오늘 만은......"
그때였다.
문득 지산해는 이마에 무엇인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의아하여 눈을 떴다.
"악!"
문득 그녀의 입에서 공포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부드럽고 뜨거웠던 육체가 한 순간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당수문은 느낄 수가 있었다.
"왜 그래?"
그는 입술을 아쉬운 듯 그녀의 아랫배에서 떼며 산해를 보았다.
지산해의 눈은 공포에 질린 채 크게 떠져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천장에 박혀 있었다.
"......?"
그녀의 시선을 따라 천장을 바라보던 당수문은 부르르 떨었다.
천장! 그곳이 갈라지고 있었다. 한 자루의 검날이 삐어져 나와 천장을 일직선으로 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객(刺客)!'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그는 무림의 절정고수였다. 뇌리에 판단이 서는 순간 그의 육체는 즉각 반응했다. 다만 무릎에 올라앉아 있는 지산해가 큰 방해물이었다.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위급한 순간이 목전에 있었다.
결국 그는 한 순간에 차가운 이성으로 돌아왔다. 본래 냉혹한 것이 그의 이성이 아니던가?
그의 손이 섬광처럼 작렬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산해의 풍요로운 둔부를 애무하고 있던 손이 벼락처럼 움직인 것이다.
펑! 하는 폭음과 함께 처절한 여인의 비명이 울렸다.
"아아악!"
지산해의 몸은 그에 의해 허공으로 던져진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정수리에 검이 박혔다. 그녀는 머리에 검이 꽂힌 채 방바닥으로 추락했다.
"죽일 놈!"
곧이어 당수문의 입에서는 차가운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자유로운 몸이 되자 천장을 손바닥을 뻗었다.
파파파파팟......!
놀라운 일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손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천장에는 수십 자루의 철환표(鐵幻慓)가 빽빽하게 박힌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그의 엄청난 판단착오였다. 자객은 천정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을 느낀 순간 당수문은 등골이 섬뜩해졌다. 그가 막 신형을 팽이처럼 돌리는 순간이었다. 무엇인가 광선이 번쩍하고 시야를 스쳐갔다.
"큭!"
위기를 직감하고 전력으로 신형을 반대 방향으로 틀었으나 그의 오른쪽 어깨가 깨끗이 절단되어 날아갔다. 선렬한 피보라가 어깨죽지로부터 분수처럼 뿜어져 올랐다.
"으으!"
그러나 당수문은 신음을 흘릴 뿐 자세를 가다듬으며 맞은 편 벽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는 벽에 걸린 원통형의 물체를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잡았다.
순간 흐릿한 인영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죽어랏!"
그는 원통 물체를 잡고 인영을 향해 뻗은 후 단추를 눌렀다.
철컥!
쏴아아아!
무수한 독암기가 빗발치듯 날아갔다. 거리는 지척이었고 암기는 섬광같은 속도로 쏘아 나갔다. 과연 인영은 그에게 날아오다가 무수히 암기를 맞고 떨어졌다.
"흐흐흐! 감히 당가의 암기를 당할 자가 어디......."
그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한 벌의 의삼이었다. 바로 그가 벗어놓은 황삼이었던 것이다.
그가 경악하는 순간 한 가닥 싸늘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기억하느냐? 그녀의 나이는 십육 세....... 이름은 백가소......."
번쩍!
섬광이 작렬했다. 그것은 비스듬히 그의 마지막 남은 어깨죽지로 떨어졌다.
"으아악!"
왼팔이 어깨죽지서부터 절단나 떨어졌다. 당수문은 온통 혈인(血人)이 되어 비틀거렸다. 이제 두 팔을 잃은 이상 저항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독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발을 들어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걷어찼다.
슈파악!
한 자루의 강전이 어디서 어떻게 쏘아졌는지 날아갔다. 그러나 상대방은 이미 예상한 듯 장소를 이동한 후였다. 불꽃이 튕기며 벽에 강전이 박혔다. 그것은 남빛이 도는 손가락 길이의 강전이었다.
"목에 손톱 만한 크기의 반점이 있는 아주 예쁜 소녀였지......."
예의 음성과 함께 다시 한 차례 섬광이 그의 눈 앞에서 아래쪽으로 작렬했다.
"크아악"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가 절단되었다. 독각(獨脚)으로는 신형의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당수문은 바닥에 뒹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쪽 다리뿐이었다.
"너희 강호사공자가 실컷 농락하다 버린 소녀는 그 이후...... 사창가에 팔려가 떠돌다가 폐인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살을 하고 말았지......."
"으아악!"
다시 섬광이 번뜩하는 순간 남은 다리마저 사정없이 잘려졌다.
비로소 당수문은 볼 수 있었다. 방 안에는 한 명의 사나이가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철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너, 넌...... 누구냐?"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그로서는 사나이를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사나이가 냉막하게 말했다.
"장천림.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모를 거다. 백가소의 복수를 하러 왔다면 알겠느냐?"
"헉! 그럼...... 네가 바로 상관중도......?"
"그렇다. 그는 첫 번째로 죽었다. 네가 두 번째다."
과연 사나이는 장천림이었다. 그는 화산파 인물의 고유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너희들에게는 한때의 장난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한 소녀의 인생이 망가졌다. 이제 그 대가를 돌려 줄 뿐이다."
그는 철검을 밀었다.
푹.......
섬뜩한 소리와 함께 당수문의 눈알이 부릅떠졌다. 그의 목에 구멍이 뚫려 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당수문의 화려한 일생도 마감되었다.
"......."
장천림은 검을 거두었다. 철검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자 그는 검신을 당수문의 몸에 닦았다. 당수문은 미처 옷을 입지 못했다. 그의 몸 위로 철검이 움직였다.
장천림의 철검이 축 늘어져 있는 당수문의 양물에 닿자 미련없이 그었다.
당수문.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은 것이었다.
이때였다. 밖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렸다.
"천림. 시간이 없다. 빨리 나가자."
그것은 조천백의 음성이었다.
"알았네."
장천림의 신형이 바람처럼 창문을 뚫고 날아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둘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화산파 인물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조천백과 장하영이었다. 두 사람은 장천림의 옷에 튕겨있는 핏방울을 보고 방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장하영이 긴박하게 말했다.
"비명이 들렸으니 곧 벌떼같이 몰려올 걸세. 석회림이 곧 시작할 테니 우리는 그 틈에 빠져 나가야 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콰콰콰...... 쾅! 펑...... 펑펑......!
문득 사방으로부터 폭음이 울리더니 당가보의 여기저기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하핫......! 드디어 시작이군! 저 화약은 앞으로 일향각 내내 터질거야! 나가세!"
장하영의 말에 삼인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날아갔다.
당가보가 사방에서 치솟는 불길을 잡고 간신히 사태를 수습하였을 때는 이미 장천림 일행은 당가보의 이십 리 밖을 달아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화산파의 전령(傳令) 복장을 하고 당가보에 침투했다.
화산파 인물의 옷과 화산파 고유 표식의 청강장검을 빌은 것은 바로 영원루에서 여옥환의 시비들을 녹여버린 조천백과 장하영의 솜씨였다.
그들은 시비들에게 그 물건들을 얻어내 변장을 한 후 급한 소식이 있다는 명분으로 삼엄한 당가의 경비를 뚫고 당수문의 별관까지 침투한 것이었다.
마침 당수문이 지산해와 불륜을 맺고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있어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로 인해 장천림은 생각보다 쉽게 당수문을 죽일 수 있게 된 것이다.
②
태산 성인봉.
무림총연맹에서는 연일 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흉흉한 무림정세로 인해 무림맹주의 긴급 소집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각 대문파에서는 원로들을 파견하여 총맹에 보냈다. 그들은 연일 대책을 숙의하느라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무우진인(無優眞人).
그는 대무당파(大武當派)의 삼십삼 대 장교진인이다. 또한 현 무림총맹의 맹주이기도 했다. 무림맹의 맹주는 삼 년을 주기로 각 파에서 돌아가며 맡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 권위는 상상 이상으로 일단 명령이 전달되면 각 파는 물론 천하무림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무우진인은 무림령을 발동하여 대책을 숙의했다.
무림은 혼란했다. 그것은 사천당가의 차기 가주였던 당수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어 실종되었다던 상관중이 암장된 시신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려되는 사태는 바로 백색마인에 대한 일이었다. 백색마인은 계속 무림맹의 분타를 무너뜨리며 무림맹의 권위에 명백한 도전을 해오고 있는 것이었다.
백색마인의 무자비한 살수(殺手)는 무림을 온통 공포에 떨게 하고 있었다. 무림총맹에서는 연일 회의를 계속한 끝에 결국 몇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첫째, 흉수는 무림제패의 음모를 꾸미는 자이거나 그 집단이며, 과거 무림맹에 원한을 가진 자일 것이다.
둘째, 현재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한 개 아니면 두 개의 집단이 무림맹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셋째, 흉수의 무공은 극강할 뿐더러 치밀한 두뇌를 지녔을 것이다.
그들이 내린 이 세 가지 결론은 은연중 당수문, 상관중을 살해한 흉수와 무림맹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백색마인이 별개의 조직일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매우 타당한 결론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두 부류의 행적이 전혀 연관성이 없을 뿐더러 시간이나 장소도 크게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무림맹은 그 두 흉수를 잡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한 조직은 소림의 후기지수인 오현상인(吾玄上人)을 필두로 한 것으로, 백색마인에 대한 추적과 척살이 주목적이었다.
오현상인.
그는 나이 불과 삼십 대의 나이였으나 무공은 이미 소림달마비예(少林達磨秘藝)를 통달하여 소림의 태양이라고 불리우는 인물이었다. 그의 배분 또한 높아 소림의 장문인과 동배였다.
한편 상관중, 당수문을 살해한 흉수를 잡기 위한 조직은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무당출신의 백유성이 우두머리가 되어 이끌게 되었다.
백유성 자신이 직접 나서겠노라고 자청하는 등 강한 집념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백유성은 사실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죽은 상관중이나 당수문은 무림맹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해가던 소장파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 두 명이 죽음으로써 소장파의 입김이 점차 흐려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흉수를 빨리 제거하지 못한다면 어렵게 장악한 무림맹에서의 세력기반이 무너질 우려가 있었다.
그는 맹주인 무우진인의 협력을 얻어 흉수를 잡기 위한 정예고수들을 선발했다. 그리고 이번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그의 각오는 사뭇 비장한 것이었다.
바야흐로 무림맹의 분위기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③
홍무(洪武) 15년 1월 1일.
원단(元旦)을 맞이한 중원 전체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뜬 가운데 하남평원을 혼자 걸어가고 있는 사나이가 있었다.
일신에는 갈색의 무복(武服).
머리에는 어깨까지 덮이는 죽립을 쓰고 있었다. 병기는 휴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죽음을 느끼게 하는 사이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설원(雪原)은 끝이 없었다.
가도가도 끝없는 설원에는 놀랍게도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고 있었다.
분명 사나이는 눈을 밟고 지나갔건만 흔적조차 남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미 전설의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지에 올라있단 말인가?
사나이. 그의 이름은 백리진강이었다.
그는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의 눈 앞 설원의 끝에서는 황혼이 밀려들고 있었다.
서녘을 곱게 물들이며 설원까지도 점차 주황색으로 곱게 채색해 가는 석양빛에 백리진강은 묘한 비련을 맛보고 있었다.
벌겋게 타는 황혼.......
연인(戀人)들이 본다면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말 듯한 색조였으나 그에게는 세상 천지가 온통 피를 뚝뚝 흘리며 젖어들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
문득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전신을 엄습하는 피로감과 고독감 때문이었다.
그는 그만 설원에 드러눕고 만다.
차디찬 눈을 깔고 누우니 혼란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정신이 도리어 상쾌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에 죽립 안의 눈꺼풀은 다시 천 근처럼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깊은 잠이라도 들었으면 싶었다.
처음부터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황궁에 입궁했다.
그가 태태감 등소의 양자로 들어간 것은 애당초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소태감이 되어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은 언젠가 한 사나이로부터 들은 말 때문이었다.
-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히려면 황궁으로 가게.
그는 그 말을 믿었다. 왠지 강한 신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나이의 분위기가 독특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지 않다 해도 당시 그에게는 그 말 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복수를 하기에는 그에게 너무나 모자란 점이 많았다. 중원무림 전체나 다름없는 무림맹을 향한 복수는 그의 능력으로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설사 중도에서 피를 뿌리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는 복수의 칼을 뽑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공을, 그것도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공을 익혀야만 했다. 그래서 택한 황궁이었다.
그는 황궁의 비밀무고에 가공할 무공이 있다고 믿으며 소태감이 된 후로 오직 황궁 비밀무고를 찾는데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무고 속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곳에서 빼내온 영약과 한 권의 마경으로 그는 무공을 완성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무공이면 쉽사리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석 달 여가 지난 지금 그는 수없는 살상을 했다.
그러나 수 없이 많은 문제점들이 현실로 부딪치고 있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모두 죽이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의 원수는 무림맹이었다. 그러나 무림맹에 속한 인물 모두를 죽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백리진강 그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장강십팔채.
진산채.
어부였던 할아버지와 잡부인 아버지....... 그리고 주방 일을 보던 어머니....... 그들 사이의 단란하고 평화로웠던 하루 하루의 일상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작스럽게 들어닥친 무림연합맹의 공격!
할아버지는 그를 안고 등에 창을 맞고 쓰러졌다. 그 싸움은 훗날 백화무림대전이란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무림사에 표기되었으나 어린 소년 백리진강에게는 생애의 처절한 순간일 뿐이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났을 때는 왼뺨에서 피가 쉴 사이 없이 흐르고 있었고 진산채는 불에 탄 잿더미 만이 남아 있었다.
백리진강은 홀로 강호를 주유하면서 세상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왔다. 그리고 이제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런데.......
"후후후....... 후후......."
백리진강의 입에서 지친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은 어느덧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중원은 너무나 넓어....... 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내가 죽이는 자들은 하급의 인물에 불과해....... 후후! 모두 죽이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백리진강은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외롭다는 느낌이 뼈저리게 밀려들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던 그는 흠칫했다.
저 멀리 모닥불로 보이는 불빛이 눈에 띄였던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 불빛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④
화산(華山).
중원무림의 오대무문의 하나인 화산파는 화산의 주봉(主峯)에 있다. 화산파는 도가(道家)의 문파로 도제(道弟)와 속제(俗弟)를 두고 있었다.
화산은 고래로 검도(劍道)에 치중하여 무당과 더불어 검법의 쌍벽을 이루는 문파였다.
한 명의 도복을 입은 동자(童子)가 합창 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도관에서 두 마장 가량 떨어져 있는 언덕 너머의 고목나무 아래 초라하게 지어져 있는 한 채의 초막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겉으로 보기에도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두 평 남짓이나 될까? 초막 안에는 한 명의 장발괴인이 벽을 보고 앉아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앉아 있었는지 그의 어깨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으며, 입고 있는 옷도 낡고 헤어져 있었다. 장발 사이로 언뜻 보이는 얼굴은 수염이 온통 덮여 있었으나 그다지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
그는 벽을 보고 있었다.
무심(無心).
허무(虛無).
그의 눈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심지어는 한 점의 생기마저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눈이 얼마나 크나큰 후회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 눈인지를 알 것이다.
그러나 장발괴인은 스스로 그 모든 인고를 감내하고 있었다.
"소사숙님. 정양(鄭陽)입니다."
동자는 문 앞에서 무릎을 끊었다. 그제서야 장발괴인의 무심한 눈이 흔들렸다.
"아직 수련이 끝나지 않았다 일러라."
그는 동자가 온 목적도 묻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는 자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그 말 만을 벌써 삼 년 가까이 하고 돌려 보냈던 것이다. 동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소사숙님. 장문인께서 신부(神符)를 내리셨습니다."
순간 장발괴인의 눈에 한 가닥 갈등이 어렸다. 그는 생각한다.
장문신부를 내리다니.......
그것은 화산의 제자라면 어떠한 경우라도 거역할 수 없는 것이거늘.......
내 아무리 모든 것을 버렸다고는 해도 아직 화산인인 이상에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다. 잠시 후에 가겠다."
동자는 돌아섰다. 돌아서며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화산파제이의 고수. 아니, 지금은 세상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가 화산 제일의 인물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실제 방 안의 인물은 화산의 검법정화를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타고난 자질과 집념으로 그가 보이는 성취는 그야말로 화산이 개파한 이래로 가장 무서운 경지를 쌓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강호사공자의 일원이었다.
무림맹에서도 강호사공자는 미래 무림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화산 제일의 기재이자 강호사공자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었던 소사숙이 아닌가?
그런데 삼 년여 전부터 소사숙은 갑자기 이 초옥에 틀어박혀 폐관에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동자는 왜 소사숙이 이런 고행을 선택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못내 아쉽기만 하였다. 화산의 명예를 빛내줄 인물이 이렇게 썩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한 것이다. 동자가 기껏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그가 비장의 검법을 연구할 지도 모른다는 상상뿐이었다.
장문인실.
화산의 이십삼대 장문인 유운자(儒雲子)는 방금 들어온 사제 천인검객 북리웅풍을 맞이했다.
사제이긴 했으나 그는 북리웅풍을 어떤 면에서는 늘상 어렵게 여기고 있었다. 북리웅풍은 그의 사부이자 전대 장문인이 속계로 입문시키면서 장차 화산을 빛낼 위인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 무공으로만 논한다면 유운자는 북리웅풍을 당할 수 없었다.
유운자는 이 사제를 무척 사랑했다. 그만큼 인격이 출중하다는 뜻도 되었다.
만일 그의 흉금이 이렇듯 넓지 않았다면 그가 화산의 법통을 이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제인 북리웅풍이 사문을 빛내 주었으면 하고 늘 바라고 있었다.
북리웅풍은 깨끗이 목욕을 하고 온 듯 정갈한 모습이었다. 다만 수염을 깎지 않아 얼굴이 온통 수염 투성이였다. 옷은 새로 갈아 입은 듯 검박한 마의였다.
"오서 오게. 사제."
말없이 자리에 앉는 북리웅풍을 보며 유운자는 가슴이 차는 것을 느꼈다.
'사제는 언제 보아도 믿음직스럽군.'
"어떤가? 사제가 얻고자 하는 깨달음은?"
정감있는 질문이었다. 북리웅풍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얻고자 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러니 얻고 말고가 없지요."
"......?"
유운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제까지 사제가 삼 년 가까이 면벽을 한 것이 나름대로 어떤 도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궁금한 것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제. 사실 이 사형은 오래 전부터 사제의 면벽에 관하여 궁금해 했네. 이제는 말해 줄 수 없겠나?"
그러나 북리웅풍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그의 입은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유운자는 사제의 입을 열게 할 자신이 없었다.
"무량수불....... 말하기 싫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네. 하지만 사제, 깨달음이란 인연이 닿아야 하는 법일세. 또 면벽을 통해 얻지 못한다면 무위자연에서 찾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일세. 허허....... 태상노군께서 무의 도를 얻은 것도 바로 자연세계에서 얻으신 것이네."
북리웅풍은 그저 씁씁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무량수불....... 대체 무슨 심사가 있길래......."
유운자는 사제가 몹시 안쓰러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원치 않는 것을 굳이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화제를 돌렸다.
"사실 자네를 부른 것은 세상이 시끄럽기 때문일세."
"......?"
유운자는 품 속에서 어제 저녁 날아온 전서(傳書)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얼마 전 종남의 상관중과 당가의 당수문 소협이 의문의 피살을 당했다네. 그들은 자네와 함께 강호사공자의 서열에 있는 인재들이니 자네가 더 잘 알 것일세."
"......!"
북리웅풍의 안색이 변했다. 유운자는 그의 안색을 살피며 계속 이야기했다.
"게다가 최근 전설의 마공 소수혈옥공(笑手血玉功)을 사용하는 자가 나타나 무림맹의 인물들을 무차별 도살하고 있다네. 그래서 무림맹에서는 맹주의 명이 떨어졌네. 물론 우리 화산에서도 고수들을 파견해 달라는 첩지가 왔네."
유운자는 북리웅풍의 눈빛이 처음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자네가 알다시피 우리쪽에서는 마땅히 파견할 만한 인물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자넬 청한 것일세."
북리웅풍의 입술이 움직였다.
"상관중과 당수문이 피살되었다고......?"
그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그렇네. 실로 애석한 일이지. 자네와 함께 명성을 날리던 기재들인데...... 더욱이 당수문 소협은 본파의 여옥환 사매와 혼인을 올리기 직전에 피살당했다네."
"......!"
북리웅풍은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그는 사매 여옥환이 오래전부터 그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는 여옥환을 맞아들일 자격이 상실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당수문에게 시집가게 된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수문이 피살당했다니.......
유운자는 사제의 반응이 큰 것을 보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사제. 말하기 민망하기는 하나 당수문 소협이 피살당한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네. 특히 그가 죽은 모습은 더욱 더 의혹스런 모습이었다네."
"어떻게...... 죽었습니까?"
처음으로 북리웅풍이 질문을 던졌다. 유운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당소협은 사지가 절단 당한 채 죽었네. 뿐만 아니라 국부가 절단되어 있었네. 혹시...... 짚이는 것이 없나?"
"......!"
북리웅풍은 말이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유운자는 그가 큰 충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묘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유운자는 눈살을 찌푸린 채 계속 이야기했다.
"그 일은 강호를 온통 뒤흔들고 있네. 당소협이 당한 형태로 보아 필시 원한이 있는 자의 소행일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네. 더구나 곤란한 점은...... 강호에서 나쁜 소문이 번지기 시작한 것일세.
"......."
"허허....... 글쎄 강호사공자가 여색을 탐닉하다 모종의 일을 벌렸으며 그때 당한 여인이 복수를 한다는 소문일세. 그래서 당소협의 국부가 응징의 의미로 잘렸다는 것일세. 이런 터무니없는 소문이 어디 있나?"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 사형의 생각으로는 자네가 직접 나서서 그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어떤가 하네."
"......."
"이번 기회에 강호출도를 하는 것이 어떤가?"
유운자의 음성에는 기대가 담겨져 있었다. 그러자 북리웅풍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실망의 빛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유운자에게 애써 가다듬은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준비하겠습니다."
북리웅풍은 그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
유운자는 깜짝 놀랐다. 그가 일어설 때는 거절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승낙을 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유운자는 몹시 기뻤다.
"허허허! 천인검객이 출도하게 되면 무림의 판도가 바뀔 거야. 암, 사제는 우리 화산 제일의 기재가 아닌가?"
유운자는 흐뭇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강호무정 제10장 만남 또 하나의 운명(運命) - 검궁인
제10장 만남...... 또 하나의 운명(運命)
①
모닥불을 지피던 사람은 조천백이었다.
그는 갑자기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죽립 갈의인을 보고 놀랐다.
"......!"
설마 눈밖에 없는 이런 허허벌판 한가운데서, 그것도 가족들끼리 다 모여 환담을 나누고 있을 원단의 밤에 사람이 불쑥 나타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조천백이 누구인가?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위인이었다.
그는 한 눈에 상대방, 즉 백리진강이 풍기는 기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곧 사람좋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그렇지 않아도 적적하던 차에 잘 오셨소. 밤 바람이 차니 어서 불가에 앉으시오."
"......."
그러나 백리진강은 선 채 묵묵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특히나 이런 설원 한복판에 불을 지피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죽립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의 눈빛은 섬뜩하리만치 차갑고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조천백 또한 인내가 대단한 위인이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조천백은 사천에서 장천림을 도와 당수문을 척살한 뒤 일행과 헤어졌다. 무림맹의 경계가 너무나 삼엄하여 각자 흩어져 경계망을 벗어나기로 하자는데 합의했던 것이다.
그들은 잠시 경비가 완화되기까지 기다렸다가 화산에서 합류하기로 약정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백리진강을 만나게 되었다.
조천백은 처음 백리진강을 대하는 순간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싸늘한 기운이 피어 오르는 것을 금치 못했다. 다만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 그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중이었다. 여차하면 선공(先功)을 하거나 달아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만큼 백리진강이 풍기는 살기는 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잠시 살기를 띄운 채 그를 쏘아보던 백리진강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
조천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척이나 살기가 짙은 놈이군. 나이는 어린 것 같은데.......'
그러나 그는 더이상 상관 않기로 했다. 지나치게 경계를 하는 것도,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것도 다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타다닥...... 탁!
모닥불 만이 기세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조천백은 갑자기 생각난 듯 품 속에서 건량 꾸러미를 꺼냈다. 그리고 불 위에 올려 굽기 시작했다.
이런 추운 설원의 한복판에서 고기를 굽는 냄새가 나면 아무리 의지가 굳은 사람이라도 허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백리진강은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상대에게 손을 내밀 생각은 죽어도 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러나 코 끝으로 전해지는 고기의 향기는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이 자를 죽이고 먹을까? 하지만 고기 한 점 때문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살인을 밥먹듯이 했다해도 고작 한 점의 고기 때문에 살인을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였다.
"허허허....... 자, 자네도 들게."
조천백은 고기덩어리를 집어 그에게 건넸다. 그는 이미 상대가 몹시 허기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허허허....... 그럼 할 수 없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혼자서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모닥불 사이로 가끔씩 비쳐 보이는 상대방의 죽립 속의 눈빛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 하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 천림, 회림, 하영....... 그들의 눈빛과 같다.'
그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천백도 한 가지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눈빛도 동류의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천백은 품 속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는 술병을 내밀며 말했다.
"독한 죽엽청이오. 한 잔 하면 몸이 풀릴 거요. 허허...... 이것도 사양하겠소?"
그의 음성에는 다분히 비아냥거림이 깃들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리진강의 눈빛이 사나와졌다. 그는 죽립 사이로 그를 노려보았다.
"헛헛! 이 속에 독이라도 들어 있을까봐 그러는 모양이...... 헉!"
조천백은 찬바람을 들이켰다. 어느새 술병이 손에서 떠나 있었다.
술병은 눈 깜깍할 사이에 손을 벗어나 상대방의 손으로 가 있었다. 백리진강은 허공섭물로 술병을 낚아챈 후 병째 입에 대고 단숨에 대여섯 모금을 마셨다.
입에서 병을 떼면서 그는 차갑게 말했다.
"설사 독을 넣었다 해도 겁낼 내가 아니오!"
조천백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느닷없이 대소를 터뜨였다.
"으하하하핫......!"
"......."
갑작스러운 대소에 백리진강은 의혹의 눈을 떴다. 조천백은 대소를 뚝 그치며 술병을 빼앗더니 역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손으로 입가를 쓱 문지르더니 호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보아하니 자네도 쫓기는 몸인 것 같군!"
순간 백리진강의 눈에 살기가 일어났다.
"아아......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네. 나 역시 같은 입장이니까."
"......."
백리진강은 그말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같은 입장.......
그럼 이 작자도 도망자란 말인가?
"그런데 어린 친구, 자네는 강호경험이 너무 미숙하군."
조천백은 술기가 오른 탓인지 말을 놓고 있었다.
"......."
백리진강은 왠지 그가 그다지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쫓기는 사람일수록 더욱 여유를 가져야 하는 법일세. 옷도 깨끗이 하고 동작도 자연스럽게 하여야 한다네. 그래야 주위의 시선을 덜 받거든."
그 말에 백리진강은 자신의 옷을 무심코 내려보았다. 그리고 흠칫했다.
군데군데 검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는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 그가 고개를 들자 코 앞에 불쑥 내밀어지는 것이 있었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고기덩어리였다.
"하하! 배가 고프면 눈빛이 사나워진다네. 이걸 먹고 마음을 느긋하게 하게."
백리진강은 손을 내밀어 고기를 받았다. 왠지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고기를 입에 베어 물었다. 한 점을 뜯어 먹자 얼었던 위장이 녹는 기분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기를 먹는 일에만 몰두했고 조천백 또한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묵묵히 모닥불만 살폈다.
말 없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 간에 친근감이 짙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휘이이이...... 휘이잉......!
설원을 스치는 바람은 점차 살벌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설원 한가운데 모닥불을 마주한 두 사람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시간이 흐를 수록 두 사람 사이의 냉랭했던 기운은 훈훈하게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②
도동(道童) 정양은 화산을 등지고 떠나가는 소사숙 북리웅풍의 모습을 보고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소사숙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언젠가는 그런 모습이 되리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북리웅풍의 모습은 그가 보기에 당당하고 멋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는 북리웅풍이 항상 애지중지하던 애검(愛劍)을 지니지 않은 것을 보고 급히 달려갔다.
잠시 후 그는 헐레벌떡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소사숙! 소사숙......!"
그가 가슴을 들먹이며 뒤쫓아 오자 북리웅풍은 의아했다. 그리고 곧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정양이 무엇 때문에 쫓아왔는지 알아 차렸기 때문이었다. 정양은 숨을 가다듬지도 못하며 두 손으로 한 자루의 고동색 보검을 받쳐 올렸다.
"이걸...... 하아! 가져가지 않았어요"
그러나 북리웅풍은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다. 정양."
"네? 사숙께서는 강호로 나서는 것이 아닌가요?"
"왜 아니겠느냐?"
"그럼...... 검을 가지고 가시지 않고 어찌......?"
정양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소사숙의 별호는 천인검객이다. 검객이 검을 가지지 않고 강호에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북리웅풍은 담담히 말했다.
"검이 있으나 없으나 검객은 마찬가지다. 손 안에 풀잎 하나만 있어도 검이요, 설사 아무것도 없어도 심검(心劍)이 있으면 된다."
"......?"
북리웅풍의 말을 정양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멍하니 사숙을 바라볼 뿐이었다.
북리웅풍은 문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검을 도로 내밀며 말했다.
"이걸 너에게 주마. 네가 가져라."
"넷?"
정양은 크게 놀랐다. 그러나 북리웅풍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이어 정양이 보는 앞에서 그는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
정양은 어리둥절한 채 손에 쥐어져 있는 검을 어루만졌다. 그의 가슴은 마구 뛰고 있었다.
그는 벌써부터 사숙의 애검을 얼마나 가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실 그 검이 보검이라서가 아니라 은연중에 검에 어려 있는 사숙의 체취 때문이었다.
정양의 눈동자가 갑자기 빛났다.
'아아! 사숙님께서 나에게 이 검을 하사하신 것은 장차...... 훌륭한 검사(劍士)가 되라는 뜻일 거야!'
정양의 작은 느낌으로 인해 훗날 화산에 일대의 검수가 탄생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검을 선사한 북리웅풍마저 짐작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북리웅풍은 애검을 미련없이 정양에게 넘긴 채 화산을 등지고 강호로 떠났다. 그가 무슨 뜻을 가지고 강호로 들어섰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오직 그 혼자 만의 가슴 속에 깊이 묻어진 비밀이었다.
③
홍무(洪武) 15년 1월 15일.
황성(皇城) 금릉.
동창 본부에서 심기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인물이 있었다.
당금 동창의 대영반이라는 막중한 권력을 지닌 장영걸이었다. 그는 지금 방 안을 오락가락하며 노화를 삭이느라 애쓰고 있었다.
실상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좀체로 화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하영에 대한 소식은 없는가?"
"예. 아직......."
그의 발 아래 부복하고 있는 자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닥쳐라! 이 밥버러지같은 놈들!"
"죄, 죄송합니다."
"그럼 소수혈옥공을 쓰는 그 꼬마놈의 일은......?"
"그, 그것도 아직......."
순간 장영걸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참을 수 없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차마 수하를 내리치지는 못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수하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는 한숨을 쉬었다.
"휴우....... 왜 이렇게 일이 꼬이나."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가서 금위대장 추성결(秋星潔)을 불러와라."
금위대장(錦衛隊長) 추성결.
그는 어릴 적부터 금의위(錦衣衛)의 무사로 키워진 인물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무장의 기질을 타고난 자로써 그야말로 선천적인 군인이었다. 그는 타협이 없고 강직할 뿐더러 상부의 명을 따를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은 위인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천자를 제외하고는 동창 대영반 장영걸을 가장 존경했다. 사실 장영걸은 그의 후견인이었다.
그가 삼십대에 불과한 나이에 벌써 금위대장이라는 높은 직책에 오른 것도 따지고 보면 장영걸의 배경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오늘밤 장영걸이 그에게 내린 명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속명과 같은 것이었다.
- 전 병력을 동원하여서라도 반드시 그 등진강이란 꼬마놈을 잡아라. 반드시 생포할 필요는 없다. 발견 즉시 척살해도 좋다.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 그리고 장하영을 만나게 되면 이렇게 전해라. 즉시 황궁으로 귀환하라고. 이것은 나의 친명이라고 전해라.
추성결은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머리가 나쁜 위인은 아니었다.
그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것은 결코 용맹 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매사에 빈틈이 없고 신중한 위인이었다.
그는 장영걸의 명을 받고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강호(江湖).
그는 강호세계를 잘 알고 있었다. 강호 무림계의 인물들은 관가의 인물들과는 그 부류가 틀렸다. 그들은 천자의 명령조차 우습게 여기는 자들이었다.
또한 강호에 나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강호인과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추성결은 강호에 하나의 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소림(少林)이었다.
그에게는 단 한 명의 인척이 있었다. 그는 전란(戰亂)으로 일가붙이를 모두 잃고 혈혈단신으로 살아 남았다가 소림사에 입문한 사촌 형이었다.
그 사촌 형은 소림사에 입문한 뒤 뛰어난 능력으로 소림의 제일고수가 되었다.
당금 소림의 후기제일인으로 불리우는 오현대사(吾玄大師)가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추성결은 금릉을 떠나기 전 미리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머지 않아 소림사로 전달될 것이다.
그는 행장을 꾸린 후 신임할 만한 측근 수하 단 두 명 만을 대동한 채 눈보라치는 황성을 떠났다.
과연 평생 황성에서만 뿌리를 내렸던 그가 강호에 나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른지....... 그것은 누구도 예측못할 일이리라.
강호무정 제11장 참회객(懺悔客)이라 불러다오 - 검궁인
제11장 참회객(懺悔客)이라 불러다오
①
홍무(洪武) 15년 1월 19일.
휘이이이잉!
강상(江上)에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강물은 군데군데 결빙되어 있기도 했으나 그래도 얼음을 깨며 도강하는 선박이 있었다.
"............."
두 사람은 동행이 되었다. 서로가 마음 속으로 비슷한 사람이라 여기는 까닭인지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조천백과 백리진강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걷다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룻터가 가까워진 것이다.
강을 건너려면 배를 이용하는 편이 편리할 것이다. 뜻이 통한 것일까?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란히 나룻터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막 나룻터에 당도한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일곱 명의 무사들이 검을 휘두르며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이름과 출신을 밝혀라! 우리는 당가보의 무사들이다!"
사나운 안광을 번쩍이며 오래 전부터 도강하는 사람들을 심문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당수문이 살해된 이후 부근 수백 리 일대에 쫙 깔린 당가보의 무사들이었다.
"......."
백리진강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죽립 사이로 칼날보다 매서운 살광이 번뜩였다. 여차직하면 살수를 뻗을 자세였다.
그러나 조천백의 반응은 그보다 빨랐다.
"헤헤헤! 나리들. 저희들은 장삿꾼들로 이번에 가는 목적은......."
조천백은 강호 사정에 훤했기에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기고자 했다. 그러나 백리진강이 산통을 깼다.
그는 조천백이 은연중 옷자락을 잡아 당기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잔뜩 굳은 자세로 호전적인 눈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무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수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조천백은 몰라도 죽립을 쓴 백리진강 만은 도저히 상인으로 볼 수 없는 분위기를 노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후후......! 거짓말 마라! 어서 병기를 버리고...... 으아악!"
말을 하던 작자는 가슴에 손자국이 찍힘과 동시에 피를 뿌리며 강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나머지 육인의 무사들은 상황이 급박함을 느끼고 재빨리 검을 휘두르며 공격했다. 그러나 백리진강은 신형을 야차처럼 날렸다.
우우웅!
그의 손바닥이 한 차례 호선을 그리는 순간 손바닥 한가운데서 투명한 빛이 뻗었다. 그 투명함 속에는 언뜻 혈광이 뻗치고 있었다.
조천백은 보았다. 그는 백리진강의 장심 한가운데 혈옥의 반점이 맺힌 것을 보았다. 그는 놀라 내심 부르짖었다.
'저것은...... 전설의 소수혈옥공!'
그가 아찔하여 신형을 흔드는 가운데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으아아악!"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살아있는 자는 없었다. 칠인의 무사들이 모두 시신이 되어 강물에 처박힌 것이었다.
"......!"
조천백은 몸을 으스스 떨었다. 가슴이 마구 진동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 백리진강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죽립 사이로 푸릇푸릇한 살광을 흘린 채 서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나오고 있었다.
조천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이 상황을 본 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그는 재빨리 백리진강의 소매를 잡고 신형을 날렸다.
"가세!"
백리진강은 흠칫했으나 묻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관제묘(關帝廟).
다 낡아빠진 지붕 사이로 드문드문 별빛이 보이고 있었다.
사당 안에는 두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바로 조천백과 백리진강이었다.
조천백은 몇 번이나 뛰쳐나가려는 백리진강을 달래어 간신히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잘못하면 인근에 깔린 무림맹의 고수들에게 협공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는 이미 일대는 물론이려니와 전 중원에 삼엄한 경계망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아무리 백리진강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한 손으로 수 만의 손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
백리진강은 말없이 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천백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가 혹시 근간에 이름을 떨치는 백색마인(百色魔人)이 아닌가......?"
백리진강은 그를 바라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억양없는 음성으로 덧붙였다.
"나는 그런 이름을 가지려 한 적이 없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오."
순간 조천백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맙소사....... 설마 했더니......!"
"왜......? 두렵소?"
백리진강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조천백은 툴툴 웃으며 말했다.
"두렵냐고? 큭큭! 그건 날 모르는 소리야.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귀신이지 자네와 같은 산 사람이 아닐세. 그러나 약간 떨리는 것은 사실이야. 왜냐면 자네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네가 몰고 다니는 혈풍이 두려운 게야."
"......."
조천백. 그의 음성에는 왠지 애잔함이 배어 있었다. 그것을 백리진강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림맹과는 무슨 원한이 있길래 그토록 무차별 살상을 하는 건가?"
"......."
백리진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천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네. 하긴 내가 알아야 무슨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어쩌면 두 놈이 하나같이 같을까."
"......?"
백리진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천백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 인물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신과 같은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 점이 궁금했다. 왠지 마음을 강하게 잡아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의문의 눈으로 조천백을 바라보자 조천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닐세. 내가 아는 어떤 인물이 자네와 비슷해서 하는 말이야. 그 놈도 자네처럼 무서운 적을 두었으면서도 정작 그 이유를 밝히려 들지 않거든......."
백리진강은 눈길을 허공으로 돌렸다. 그는 내심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말이오.......
설마하니 나보다 더하겠소?
그는 문득 몸을 일으켰다. 조천백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어디로 가는가?"
백리진강은 담담히 말했다.
"나 때문에 당신까지 위험할 필요는 없소. 그 동안은 고마웠소. 그럼......."
막 나가려는 백리진강을 조천백이 가로 막았다. 그는 나직히 꾸짖었다.
"왜 이렇게 날뛰나? 지금 자네 혼자 밖으로 나가면 당장 지옥행이야!"
그 말에 백리진강은 코웃음을 쳤다.
"흥! 누가 지옥으로 갈 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오."
"쯧쯧....... 철이 없기는......!"
조천백은 억지로 그를 끌어다 앉혔다.
"무림맹을 얕보는 것은 좋지 않네. 아무리 자네의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목이 열 개가 아닌 이상 신중해야 하네."
기이한 일이었다. 백색마인이 누구인가?
그는 무림의 살인마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조천백에게 살인마로 행세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찌보면 다정한 사형제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천백은 엄숙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복수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네. 물론 자네의 실력이라면 누구와 싸워도 밀리지는 않겠지만 언제까지나 졸개들을 죽이다가 힘을 허비할 수없지 않은가? 한 번 물어봄세. 지금까지 진정한 원수들을 만나보기나 했는가?"
"......."
그 말에 백리진강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이제까지 숱한 무림맹의 졸개들 만을 죽였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아무리 죽여봐도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차라리 무림맹의 요인 하나를 죽이는 것만 같지 않은 것이다.
조천백은 그를 자리에 앉힌 후 차분한 어조로 설득했다.
"이보게. 움직이려면 효과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복수의 대상을 정했다면 차근차근 행동해야 하네.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부터 연구하세."
"......."
"나룻터에서 쓸데없이 살인을 하는 바람에 이 일대는 천라지망이 되어 있을 걸세.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간 뒤 다음 일을 생각해야 하네."
백리진강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네의 무공이나 능력은 나보다 뛰어난 지는 몰라도 강호의 경험에 있어서는 내가 자네의 조상뻘일세. 당분간은 나와 동행하면서 내 말을 듣는 것이 나을 걸세. 허허....... 지금부터 내가 자네의 형(兄)이 되는 걸세. 어떤가?"
"......."
백리진강은 역시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조천백에게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이제까지 혼자서만 해왔던 일들이 그를 만나자 비로소 체계가 잡혀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자, 이제부터는 철저히 나의 명을 따라야 하네. 그런 다음에는 자네 마음대로 하게. 어쨌든 나도 당분간은 자네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게 되었네."
백리진강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고맙소......."
한 마디였으나 그 말 속에는 깊은 감동이 들어 있다는 것을 조천백은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백리진강같은 인간의 심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②
"당대협의 살해범으로 보이는 자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백유성은 하마터면 찻잔을 떨굴 뻔 했다.
"어디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그가 있는 곳은 당가보였다. 강호제일검 백유성은 당수문의 살해범을 잡기 위해 임시로 이곳에 추적대의 본부를 설치한 것이다.
사실 그는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강호사공자 가운데 벌써 이인이 죽은 것이다.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당수문의 시신과 상관중의 암장됐던 시신을 관찰한 결과 마음 속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다만 그는 설마설마하고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떠오르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두려움은 더해만 가고 있었다. 그는 내심의 갈등에 휩싸여 그동안 괴로움을 겪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수없이 부인하고 또 부인했지만 마음 속으로 떠오르는 예감은 점점 더 현실감으로 닥쳐오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당수문과 상관중의 살해범을 잡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는 추적대를 구성했으며 전 심력(心力)을 쏟고 있었다. 당가보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벽에 당가보를 중심으로 한 지도를 걸어놓은 일이었다.
그의 수하들은 당가보 주변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매 시진마다 그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으며 시시각각 그의 지시가 하달되고 있었다.
백유성은 무강의 속가 출신으로 무공은 물론 지략에 있어서 타인의 추종을 불허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볼 때 그는 무공보다 지략으로 더욱 알려져 있었다.
그에게 새제갈(賽諸葛)이란 또 하나의 별호가 있다는 것이 그 사실을 은연중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가 나선 이상 무림맹에서는 조만간에 흉수가 잡힐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백유성은 무림맹의 여망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흉수를 잡아야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오직 그 자신 만이 알고 있었다.
만일 흉수가 그의 짐작대로이며 다른 자의 손에 잡히게 된다면....... 그는 물론 강호사공자의 영명은 완전히 땅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하는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보고했다.
"놈은 무협(巫峽) 부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심문하는 우리측 인원을 일곱 명이나 살해하고 서릉협 부근으로 달아났습니다. 현재 추적중입니다."
백유성의 준미한 눈썹이 꿈틀 일어섰다.
"알았다. 전 병력을 출동시켜라. 그리고 수시로 보고하라."
백유성은 수하가 물러간 뒤 벽으로 다가가 지도에 표시했다. 지도에는 무협과 서릉협을 연결했으며 그 주변 삼백 리 일대에 동그란 원을 그렸다.
그는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일에 자신의 앞날이 걸려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지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두려워한 자는 현 무림에서 북리웅풍 뿐이다. 그런데 그도 출동을 했다고 하는데...... 어째서 소식이 없을까?"
그는 식어빠진 찻잔을 들었다. 문득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후회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 그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을......."
그의 미간은 깊은 골로 패이고 있었다.
③
장하영은 이미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당수문을 죽인 직후 그들은 각자 헤어졌다. 당가보의 경비가 너무나 삼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작 서릉협까지밖에 오지 못했다.
"벌써 이레째다. 아직도 추적을 떨구지 못했으니......."
그는 잠시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만일 환영팔신이 곁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고전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황궁의 인물이니 이 일에 끌어들일 수는 없지."
그는 잠깐 후회했다.
"그때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곤경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을......."
쓸데없는 일이란 이레 전 산길에서 한 여인을 구한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추적한다는 명분으로 사방으로 퍼져있던 무림맹 산하의 몇몇 하급무사들은 곳곳에서 양민을 괴롭히고 있었다.
개중 몇 놈이 양가집의 아낙을 겁탈하려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뛰어들어 그들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흔적을 남기게 되어 그만 쫓김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비록 그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중얼거렸으나 협의를 생명처럼 여기던 그로서는 차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 해도 역시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행적이 노출되자 불행히도 추적은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더욱이 그는 조천백이나 석회림처럼 변장술이나 은둔술을 익힌 적이 없었다. 따라서 꼬리를 밟히게 되자 여간해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하영은 일부러 길을 우회하고 있었다.
장천림이나 석회림, 조천백 등을 보호하기 위해 무림맹의 추적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가 향하는 곳은 서릉협 쪽이었다. 사실 그 방향은 더욱 위험한 길이었다. 서릉협은 막다른 길이었다.
그러나 그가 믿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는 손을 품 속에 넣어 한 알의 단약을 만졌다.
그것은 독단(毒丹)으로 만일의 경우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즉시 삼킬 작정이었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동료들이 생로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도 가치있는 일이 아닌가?
그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저 놈이다!"
"쳐라!"
슈슈슉---!
돌연 숲 속으로부터 빗발치듯 암기가 쏟아져 나왔다. 장하영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무림맹의 고수들 십여 명이 매복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그의 앞길을 예상하고 포진한 것이었다.
'좋다! 오늘은 살계를 크게 열어볼까?'
장하영은 찬 바람을 한 모금 들이 마신 후 서슴없이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검이 춤을 추었다.
츠파아아아앗!
"으아아악!"
그의 검술은 혈명단에서 바탕이 되어 있는데다 황궁의 비전무학까지 익혀 절륜하기 그지 없었다. 단숨에 십인의 무사들을 해치운 후 다시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몇 마장 가기도 전에 사방으로부터 향전(響箭)이 쏘아지는 것을 느끼며 이미 출로가 막혔음을 느꼈다.
"빌어먹을...... 이곳이 끝인가?"
이젠 더이상 달아날 곳이 없었다. 장하영은 향전이 점차 가깝게 울리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완전히 포위되었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수많은 인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당가보의 인물들은 물론 백색무복을 입은 무림맹 고유의 복장을 한 무사들로 언뜻 보기에도 수백 명 이상이었다.
어느 쪽을 둘러보아도 물 샐 틈없는 포위망이 그물처럼 펼쳐져 있었다.
"빌어먹을......! 많이도 동원되었군!"
그는 수중의 검을 내려다 보았다. 이미 여러 차례의 전투로 인해 이가 빠지고 피가 얼룩져 있었다. 장하영은 쿡쿡 웃음을 흘렸다.
"쿡! 혈명단에서 탈출할 때를 빼고는 처음으로 네가 고생하는구나."
그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 보았다. 수백 명의 무림맹 산하 무사들이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차아아아앗!"
그는 신형을 떠올렸고, 곧이어 검과 몸이 하나가 된 채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천잔구검(天殘九劍)!"
"유성난월(流星亂月)!"
"팔방풍노(八方風努)!"
"지옥파천(地獄破天)!"
번쩍......! 쐐애애애액!
그의 손에서 가공할 검학들이 펼쳐졌다.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수급이 떠오르고 피보라가 일어났다. 장하영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검을 떨치고 있었다.
전신이 피로 젖는 것도, 상대에게서 뿜어져 나온 피보라에 얼굴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는 꿈결같이 몽롱한 기분을 느끼며 싸우고 또 싸웠다.
아니...... 베고...... 또 베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상대방의 인원은 더욱 많아질 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진기가 고갈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점점 검의 위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 각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장하영은 마음 속으로 비장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후! 나 장하영의 생도 여기서 마감을 하는가 보군.'
그런데 이때였다.
퍼엉!
돌연 폭음이 울림과 동시에 사방이 갑자기 자욱한 연막으로 덮이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시야가 자욱한 연막으로 가려져 버렸다.
그것은 장하영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는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으악!"
"아악! 기습이다!"
연막으로 사방의 시야가 차단된 가운데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장하영은 몹시 뜻밖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자신을 도울 원군이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원군이 올 리가 없었다. 어쨌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는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④
장하영은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을 들으며 옛날 생각에 젖었다. 그것은 혈명단에서 탈출할 때 들었던 함성과 비슷한 것이었다.
동굴 안이었다.
동굴의 입구를 커다란 바위로 막아 놓았으므로 여간해서는 밖에서는 안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
그는 동굴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연이은 전투로 손가락 하나 들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벽에는 화섭자가 희뿌연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 아래 맞은 편에는 자신을 구해준 복면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옷도 피에 젖어 있었다. 그 못지않게 복면인도 악전고투를 치룬 것이었다.
"후후후훗......."
장하영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있었다.
"......?"
복면 사이로 뚫린 정체불명인의 두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궁금한 듯 물었다.
"왜 웃는 것이오?"
그의 질문에 장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후훗!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면 믿겠소? 그런데 대체 당신은 누구요?"
복면인은 고개를 저었다. 기이하게도 그의 눈에는 한 가닥 고통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장하영은 더욱 의문을 느꼈다. 그는 복면인의 무공이 무척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정체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이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혈명단 이후 줄곧 황궁에서만 기거했다. 따라서 강호초출이나 다름없는 몸이었다.
그러므로 강호에서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그를 이유없이, 그것도 생명을 내걸며 도와줄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였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지금 그는 눈 앞에 있는 복면인이 아니었다면 무림맹 산하 고수들에 의해 천참만륙되어 뒹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 이상하군. 날 구한 이유라도 있어야 될 것이 아닌가?'
장하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튼 세상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이런 일도 있을 줄이야.......'
이때 침묵에 잠겨 있던 복면인이 물었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소?"
"물어 보시구료. 후후....... 어쨌든 당신은 이 장하영의 구명은인이니 내가 아는 것은 모두 대답하겠소."
복면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당신이 상관중과 당수문을 죽였소?"
장하영은 흠칫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소."
"이유는?"
복면인의 음성이 나직하게 떨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하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오."
"모른다니........?"
복면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장하영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훗! 왜냐면 내 친구의 일이기 때문이오. 나는 그 친구에게 빚진 것이 있어 그를 도왔을 뿐이오."
그 말에 복면인은 몸을 떨었다.
"친구? 그럼 그가 무엇 때문에 당수문과 상관중을 죽였는지도 모른단 말이오?"
장하영은 복면인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그건 나도 궁금한 점이오. 하지만 그는 얘기하지 않았소. 그가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길래 나 역시 묻지 않았소."
복면인의 눈빛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유도 모르면서 생명을 내건 도박에 뛰어 들었단 말이오?"
"하하하하핫!"
문득 장하영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가 갑자기 웃는 바람에 복면인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장하영은 웃음을 뚝 그치며 말했다.
"이해하지 못하겠소? 그는 나의 친구요."
간단한 말.
장하영의 그 말은 묘한 감동을 주었다. 복면인은 넋을 잃은 듯 잠시 말이 없다가 중얼거렸다.
"친구라......."
침묵.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복면인이었다.
"하긴 나에게도 친구가 있었지. 하지만 그들은......."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장하영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복면인에게 어떤 사연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내겐 구명지은을 베풀었소. 언젠가 은혜를 갚게 될 날이 오기를 바라겠소."
"당신의 친구는...... 진실하오?"
엉뚱한 질문이었다. 장하영은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곧 빙그레 웃었다.
"한 마디만 하겠소. 과거 그는 자신의 생명을 버려가면서 내 퇴로를 열어 주었소.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이 장하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오."
복면인은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면 그는...... 진정한 친구겠군."
"물론이오. 만일 그가 내 목을 원하다면 언제라도 목을 내놓을 용의가 있소."
"당신들은 행복하군."
복면인의 음성에는 회한이 묻어 있었다. 장하영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 자는 친구에게 배신이라도 당했단 말인가? 하긴 그렇다면 최소한 이 자보다 이 장하영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그는 복면인을 바라보다 부언했다.
"내 친구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소. 그러나 한 가지 짐작가는 것은 있었소. 그가 상관중과 당수문을 포함하여 강호사공자를 꼭 죽여야 할 이유는......"
"......!"
복면인은 충격을 받은 듯 진동했다. 그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물었다.
"그의 목표는 강호사공자 전원이오?"
"그렇소."
"왜? 무엇 때문이오?"
"그건...... 확실치는 않지만 한 여인 때문인 것 같았소."
"여인......!"
복면인의 눈이 커다란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혹시...... 그 여자란 백제성 부근에 살던 한 소녀를 말하는 것이 아니오.......?"
장하영은 의아했다. 그는 복면인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글쎄....... 거기까지는 모르겠소."
"......."
복면인은 눈을 감았다. 그의 가슴이 크게 기복을 그리는 것을 장하영은 볼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복면인은 품 속에서 한 장의 인피면구를 꺼내더니 내밀었다.
"이것을 얼굴에 쓰시오."
"......?"
복면인은 자신의 옷을 벗었다. 그는 겉옷 안에 또 한 벌의 옷을 받쳐입고 있었다.
"이 옷으로 갈아 입고 가시오. 그리고 만일 다시 쫓기게 된다면......"
복면인은 소매 속에서 영패 하나를 꺼냈다.
"이것을 보이시오. 그러면 위기를 몇 번은 넘길 수 있을 것이오."
"......?"
장하영은 더욱 의혹을 금치 못했다. 복면인이 준 영패를 본 순간 그는 더욱 놀랐다. 그것은 무림맹 내에서 중요한 신분을 가진 자 만이 소지할 수 있는 영패였던 것이다. 이런 것을 그가 어떻게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지 장하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쨌든 살고 볼 일이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고맙소. 친구.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겠소? 나 장하영은 빚을 지고는 살지 못하는 사람이오."
그러나 복면인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굳이 알고 싶다면...... 참회객(懺悔客)이라고 불러 주시오."
"참회객?"
장하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복면인, 즉 참회객은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장하영이 벗어놓은 옷을 걸쳤다.
"아니 뭐하는 것이오?"
장하영이 놀라 물었으나 참회객은 그를 향해 포권했다.
"그럼......."
그는 바위를 밀치고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
장하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참회객의 행동은 뻔한 것이었다. 그는 장하영의 옷을 입고 무림맹 고수들을 유인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생명을 내건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생면부지의 그를 위해 그런 모험을 하려는 참회객의 행동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왜?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하려고 하는지 그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때 그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고함과 비명이 들리는 것을 느꼈다.
장하영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휴우.......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군."
⑤
개봉(開封)을 빠져 나가는 관도(官道).
무사 복장의 인물들이 관도를 오가는 인물들을 일일이 조사하고 있었다.
한결같이 백색무복을 걸친 그들의 복장은 무림맹에 속한 무사들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십인 일조가 되어 날카로운 눈빛을 잠시도 쉬지 않고 행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중원 전역에 이같은 천라지망(天羅之網)이 펼쳐져 있었다. 관도상에는 거미줄같은 감시망이 펼쳐져 있어 무림인으로 보이는 자들은 너나없이 까다로운 조사를 받아야만 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무림은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강호사공자를 살해한 흉수와 백색마인을 척살하기 위한 무림령이 발동한 이후로 모든 것은 변했다.
강호도상에는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고 있었다. 혼자서 길을 가는 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개봉에서 뻗어나온 관도는 이 일대의 유일한 대도였다. 따라서 이곳에는 특히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었다.
문득 한 필의 말이 개봉부 쪽으로부터 달려오더니 멈추었다.
"아무 일도 없었느냐?"
마상의 인물은 사십대의 장한으로 무림맹 개봉지부의 지부장인 철혈객(鐵血客) 종리철(鍾里鐵)이란 자였다.
그는 마상에서 내리지 않은 채 경비하는 무사들에게 물었다.
"네! 별일 없습니다."
무사들은 바짝 긴장하여 대답했다.
"으음.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가 나타나면 놓쳐서는 안 된다."
"예! 염려 마십시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지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다만 조금 전 지나간 송장 한 구를 제외하고는......."
"응? 송장?"
종리철의 눈썹이 솟구쳤다. 그는 눈빛을 빛냈다. 그의 반응에 삼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무사는 급히 말했다.
"예, 염병에 걸려 죽은 시신이었습니다."
종리철은 눈을 번뜩이며 다그쳤다.
"확인해 봤느냐? 관을 열고 말이다."
무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관을 열 것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냥 수레에 거적으로 덮은 것이었으니까요. 거적을 들춰 보았는데 냄새가 어찌나 심하던지....... 전신에 고름투성이었습니다."
그 말에 종리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재차 물었다.
"흠! 운구하는 자는 조사해 보았나?"
종리철은 한 점의 이상이라도 발견하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묻고 있었다.
"네. 칠순도 훨씬 넘어 보이는 할망구였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이 장가도 못가고 죽었다면서 어찌나 구슬피 우는지......."
무사는 동정어린 표정을 지었다.
"음......."
종리철은 신음을 발했다. 그는 무사의 말에 조금도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으나 왠지 알 수 없는 느낌이 뒷머리를 짖누르는 기분이었다.
문득 그는 말채찍을 날리며 호통을 쳤다.
"알았다! 감시의 눈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두두두두---!
그는 이른 아침의 관도를 가로질러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렸다.
"......."
무사는 멍하니 그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리철이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그도 영 기분이 찜찜했던 것이다.
아침 바람이 제법 매섭게 분다.
관도는 텅 비어 있었다. 관도 위를 찌그러진 바퀴를 굴리며 천천히 움직이는 수레가 있었다. 수레 위에는 낡은 거적이 덮여져 있었다.
수레는 한 마리의 소가 끌고 있었는데 소를 모는 것은 칠순이 휠씬 넘어 보이는 노파였다. 눈자위가 짓무를 정도로 늙고 추한 노파로 허리도 잔뜩 구부러져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손도 갈고리처럼 굽고 주름이 져 있었다. 노파는 힘에 겨운 듯 이따금 기침을 하며 소를 몰았다.
기어이 노파는 견디지 못하겠는지 수레를 관도 한 옆으로 세우고 있었다.
"아이고! 이 불쌍한 놈아! 그렇게 가고 싶었던 장가도 못가고 죽다니...... 예끼! 이 괘씸한 놈, 이 불효막심한 놈같으니라구....... 늙은 에미보다 먼저 가는 놈이 어디 있느냐?"
노파의 통성이 관도를 비감하게 울렸다. 그런데 이때 노파의 귓전에 가느다란 전음이 들리고 있었다.
(아니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되오?)
노파는 움찔하더니 입술 안으로 우물거렸다.
(아직 멀었다. 오늘 저녁은 넘겨야 안심할 수 있단 말이야.......)
노파의 음성은 외부로 흘러 나오지 않았다. 전음입밀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거적 안의 인물은 시신이 아니었단 말인가?
거적 안에서 다시 전음이 전해왔다.
(왜 하필이면 염병걸려 죽은 시체 노릇을 시킨단 말이오? 죽어도 곱게 죽은 시신으로 할 것이지.......)
잔뜩 불만스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노파는 주먹으로 거적 위를 때렸다.
(시끄러워! 나는 뭐 좋아서 하는 일인줄 아느냐? 자네야 수레에 누워 편안히 잠이나 자도 되지만 난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냄새나는 할망구 노릇을 하고 있다구.)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두두두두----!
문득 뒤 쪽에서 급촉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왔다. 노파는 흠칫하더니 갑자기 어허엉하고 통곡을 터뜨렸다.
"아이고오오! 이 나쁜 자식아! 늙은이를 두고 먼저 가다니...... 이 나쁜 놈아!"
노파는 두 손으로 거적 위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거적 안에서 비명이 들렸다.
"아얏! 아니, 미쳤소?"
비명은 전음이 아니었다. 그러자 노파는 급히 전음으로 주의를 주었다.
(쉬잇! 또 누가 온다구!)
그제서야 거적은 조용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히히히힝!
힘찬 말울음 소리가 울리더니 먼지가 일어났다. 그러나 노파는 듣지 못한 듯 여전히 통곡을 하고 있었다.
마상 위에는 한 명의 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종리철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미심쩍어 급히 이곳까지 추적해 온 것이었다. 그는 마상에 앉은 채 노파를 뚫어져라 노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변장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사는 안전이 제일이었다. 별안간 그는 말 옆구리에 꽂아두었던 장창(長槍)을 뽑아 들더니 휘익 휘둘렀다.
"아이쿠우우!"
노파는 불시의 기습을 받고 창대에 맞아 저만큼 나가 뒹굴었다. 어찌나 충격이 세었던지 노파는 눈알을 까뒤집으며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
종리철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눈빛이 사나워지는 듯 싶더니 기척도 없이 다시 창을 날렸다.
그는 철저한 위인이었다. 설혹 실수로 양민을 죽이는 한은 있어도 천추의 한을 남길 일은 하지 않는 위인이었다.
'흐흐! 만일 위장했다면 후회할 것이다.'
그는 거적을 향해 창을 내리 꽂았다. 설사 시신을 꿰뚫는 한이 있어도 결코 후회할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푹---!
섬뜩한 소리가 났다. 긴 장창이 거침없이 거적 위를 찌른 것이었다.
"......!"
종리철은 손 끝에 전해지는 둔탁한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 사람을 찌른 감촉이었다. 거적 위로 시커먼 핏물이 번져 올랐다.
그러나 거적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비명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마침내 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신경과민이었나?'
그는 창을 뽑았다. 창 끝에는 역한 냄새와 함께 피가 묻어나왔다. 그는 창날을 거적에 문질러 닦은 후 미련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두두두두---!
그는 쏜살같이 오던 길로 달아났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길가에 쓰러져 있던 노파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이고오! 어떤 놈이 늙은이를...... 아이구 허리야!"
노파는 다시 수레를 기어 올라가 소를 몰기 시작했다. 수레는 덜컹거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얼마쯤 갔을까?
문득 거적 안 쪽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만일 당신의 말대로 죽은 개 한 마리를 안고 있지 않았더라면 탄로날 뻔 했소. 후후! 당신은 정말 놀라운 사람이오."
"히히! 그래서 다 강호의 경험이 무섭다는 것이야. 그러니 앞으로는 이 형님의 말을 무시하지 말라구."
이 두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관도 위에는 메마른 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덜컹거리며 천천히 굴러가는 마차 외에는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노파와 그가 이끄는 마차는 차츰 개봉성을 뒤로 하고 멀어져가고 있었다.
강호무정 제12장 파소림초(破少林招) - 검궁인
제12장 파소림초(破少林招)
①
무림맹 개봉 지단은 한 채의 전장(錢莊)이었다.
외부적으로는 전장이었으나 기실은 무림맹의 지단이었다. 이곳에 삼인이 찾아왔다.
가운데 인물은 삼십대 인물로 자의를 입었으며 허리에는 금도(金刀)를 차고 있었다. 그는 눈빛이 부리부리하고 얼굴은 각이 져 있었으며 눈썹이 짙었다. 양 옆의 두 사람은 그와 비슷한 또래로 수행원인 듯 했다.
그들은 아침 일찍 개봉성에 입성해서 곧장 이곳 전장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삼인이 전장의 문으로 다가가자 누군가 앞을 가로 막았다.
"무슨 일이오?"
앞을 막은 자는 눈빛이 범상치 않은 무사 차림의 사나이였다.
그는 무림맹 산하의 무사로 백색마인을 잡기 위한 특수 조직에 속한 인물이었다.
"안에 소림의 오현대사(吾玄大師)께서 계시다는 말을 들었소만?"
자의인의 음성은 낮았으나 어딘가 위엄이 있었다. 무사는 흠칫하더니 반문했다.
"실례지만 귀하는 어떤 분이신지?"
자의인은 담담히 말했다.
"계시다면 전해 주시오. 추성결(秋星潔)이란 사람이 찾아왔다고 말이오."
"추성결......?"
처음 듣는 이름이었으나 어딘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형님. 오랜만이오."
"아미타불......!"
방 안에 대좌하고 있는 사람은 한 명의 젊은 중과 추성결이었다. 추성결은 방 안에 단정히 앉아 있는 노란 승복을 입은 중을 보는 순간 이미 눈시울이 젖고 있었다.
중은 바로 소림의 후기제일인이라는 오현대사였다.
그의 나이 삼십이 세. 그 나이에 후기제일인이란 소리를 듣는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현대사는 청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눈빛이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우. 정말 오랫만이군. 자네가 황궁의 금위대장이 되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어인 일인가?"
오현과 추성결은 사촌형제였다.
속가 때의 오현대사의 이름은 추성웅(秋星雄)이었다. 그들은 전란(戰亂)중에 원나라 병사들에 의해 가문이 멸화된 이후로 헤어졌었다.
그들 중 하나는 주원장이 이끄는 군대에 가담하여 대명제국 건국의 초석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추성결이었다.
각자 행적도 모른 채 헤어졌던 사촌형제,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깊은 감회에 잠겨 있었다.
추성결은 오현의 손을 덥썩 잡았다.
"형님! 이렇게 훌륭한 모습을 뵈오니 아우의 가슴이 터질 듯 합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오현은 비록 속세 사람은 아니었으나 역시 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맑은 눈에도 눈물이 넘치고 있었다.
이제 그는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무림맹의 막중한 사명을 받고 백색마인을 잡기 위한 특별조직의 영수가 되어 강호에 나온 것이었다. 그의 휘하에는 명령 하나면 움직이는 무림인이 수천이 넘었다.
그래도 혈육지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오현도 추성결의 손을 마주 잡은 채 지난 날의 감회에 젖어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추성결은 황궁에서 나온 이후 곧장 소림사로 찾아 갔다. 그러나 이미 오현은 무림을 어지럽히는 백색마인을 잡기 위한 특별 조직의 영수가 되어 떠난 뒤였다. 그리하여 수소문 끝에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오현에게 자신이 황궁의 특별 명령을 받고 나오게 된 경위를 이야기했다.
오현대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등진강이라고? 그 아이가 그토록 교활하다면 문제가 달라지겠는 걸."
그는 그동안 궁금했던 백색마인의 정체를 추성결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무도 몰랐던 비밀이었다.
그러나 등진강이 황궁에 환관으로 잠입하여 수년 간을 기다린 끝에 영약과 소수마경을 훔쳐 달아난 내막을 듣고는 가슴이 섬뜩함을 금치 못했다.
오현은 소림사를 떠날 당시 백색마인을 제거하는 일에 그다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비록 무림을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는 일대마인이라 해도 그 역시 소림의 제일고수였던 것이다.
마공(魔功)이 아무리 강하다해도 소림의 불문무학에는 전문적으로 마공을 격파하는 선공(禪功)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추성결의 말을 듣고 오현은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백색마인이 단순히 무공만 강하다면 얼마든지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황궁에서의 일을 듣고 보니 내심 두려운 마음까지 일게 되었다.
추성결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서 아우도 대영반의 특명을 받고 나온 것입니다. 놈을 죽이고 마경을 회수해야 하는 것이 이 아우의 임무입니다."
추성결은 검미를 치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아우는 황궁에만 있었기 때문에 강호정세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따라서 이번 일에 형님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아미타불. 잘 왔네. 나 역시 혼자의 힘보다는 아우의 힘이 필요할 것 같네. 우리 손을 잡고 함께 뛰어봄세."
"하하하하! 우리 형제가 손을 잡은 이상 놈은 결코 빠져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아미타불, 나도 그렇게 되길 빌겠네. 어쨌든 놈은 살생을 밥먹듯 하는 악마이니 시간을 끌면 끌수록 무림이 피폐해질 걸세."
②
개봉에서 낙양(洛陽)을 향해 뻗은 관도를 가로지르던 수레는 방향을 바꾸었다.
북(北)으로 돌린 것이다.
그러나 노파와 거적 속의 가짜 시신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빈 수레만이 덜그럭거리며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노파는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름아닌 조천백이었다. 시신으로 위장하고 있던 자는 백리진강이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고 있었다.
"정말 냄새 때문에 죽을 뻔 했소이다."
조천백은 껄껄 웃었다.
"그러나 한 가지 얻은 것이 있지 않은가?"
"얻은 것이라니?"
백리진강이 의아해 하자 조천백은 실망한 듯이 말했다.
"아니 그러고도 깨달은 것이 없단 말인가? 생각보다 자네는 아둔한 편이군."
그제서야 백리진강은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하긴 그렇소. 강호에서는 무공보다도 당신같은 늙은 너구리가 더욱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하하하하핫핫핫---!"
조천백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네. 역대 무림을 둘러보아도 무공의 일인자가 천하를 지배하지는 못했네. 무공보다는 지략이 우선이네."
"......."
그는 마음이 흐뭇해졌다. 이 며칠 간 그는 백리진강과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느꼈던 살벌함이 많이 둔화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백리진강의 마음은 여전히 북천의 빙동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그것은 백리진강의 마음 속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한(恨)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그 내력을 알 리 없었다.
백리진강에게는 어린 시절 진산채에서 일어났던 일이 너무도 강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동안 고마왔소."
백리진강이 안색을 바꾸며 말하자 조천백은 흠칫했다.
"떠날 생각인가?"
"길이 다르니 헤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하긴 그렇군.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으니 말이야."
조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화산(華山)으로 가 장천림 일행을 만나야 했다. 그는 잠시 백리진강을 바라보더니 손을 잡았다.
"그동안은 즐거웠네. 마치 오래 전에 헤어졌던 아우를 만난 기분이었지.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치든 현명하게 헤쳐나가기를 빌겠네."
"......."
백리진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연다면 자신조차도 어떤 말이 나올지 몰랐다.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돼.......
그는 내심 그렇게 말하며 냉정하게 돌아섰다.
"명심하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되도록이면 힘보다는 머리를 쓰게. 그것이 강호에서 살아가는 요령이니 말이야......."
등 뒤로 호의에 찬 조천백의 말이 들렸다. 백리진강은 그저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떠났다.
조천백.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헤어지는 지금 그는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런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③
홍무(洪武) 15년 2월 25일.
눈덮인 와호령(臥虎嶺)을 넘는 사나이가 있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산길이었다.
행색으로 보아 그는 사냥꾼 차림이었다. 이미 목적지가 정해진 듯 그는 일직선으로 남하(南下)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장천림이었다. 그는 당가보를 떠난 이후 곧바로 남하하지 않고 섬서(陝西) 쪽으로 우회했다가 다시 장강을 건너 남하했다.
그것은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함이기도 했으나 목적지가 화산(華山)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장강을 건넌 그는 방향을 바꾸어 화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는 무수한 검문을 받았다.
이미 중원 전역에는 무림맹의 인물들이 무수히 퍼져 있었다. 도중에 몇 번의 위기를 만났으나 그때마다 그는 무사히 넘겼다.
그럴 때마다 마음 속으로 장하영이나 석회림, 조천백이 염려되었다. 한편으로 그들도 무사할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들의 능력을 어느 정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
문득 지평선 저쪽에서 한 가닥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연기는 눈덮인 언덕 저편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였다.
연기를 보는 순간 허기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만 하루 반나절 동안 입에 음식물을 댄 적이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잠시 후 그는 연기가 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위험이 수시로 다가오고 있는 싯점에서 배가 고프다는 것은 체력 안배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묵묵히 걸었다.
지금 그는 사냥꾼의 복장을 하고 있으므로 여하한 일이 있어도 위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덕을 넘자 아담한 모옥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사냥꾼이 사는 모옥이었다. 모옥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으니 저곳에 가면 허기를 면할 수 있으리라.
모옥 둘레에는 눈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장천림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모옥으로 다가갔다.
"......!"
문득 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문 앞에 당도한 순간 직감적으로 잘못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모옥에는 예상외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인영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모옥으로부터 풍기는 무형의 기운 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인기척을 느낀 것이었다.
'잘못 왔다.'
그는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나도 늦어 있었다. 그가 주춤하는 순간 모옥의 문이 열린 것이었다.
모옥으로부터 걸어나온 사람은 뜻밖에도 삼십 대의 젊은 중이었다.
파랗게 깎은 청년 중의 머리 위에는 여섯 개의 계인(戒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소림(少林)?'
장천림의 뇌리에 직감적으로 떠오른 것은 이곳이 소림사가 있는 숭산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이때 중은 그를 바라보고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장천림의 반응은 빨랐다. 그는 합장을 하고 먼저 선수를 쳤다.
"아니 이런 산중에 스님께서 웬일로?"
어쩔 수없이 젊은 중은 함께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어인 일로 이곳에 오셨소?"
장천림은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으므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예. 저는 사냥을 하다가 워낙 눈이 많이 쌓여서...... 험, 또 배도 고프고 해서 들른 것입니다요."
그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중은 여전히 의심쩍은 눈으로 그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장천림의 복장은 사냥꾼으로부터 얻어입은 것이었으므로 복장만으로는 아무 것도 알아낼 길이 없었다.
이때였다. 모옥 안으로부터 한 가닥 늙은 음성이 들려왔다.
"정심(鄭深) 사질....... 그 분을 안으로 모시게."
청년 중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옆으로 비켜 장천림에게 길을 터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눈에는 미심쩍은 빛이 가득 남아 있었다.
장천림은 내친 걸음이라 어쩔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모옥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대로 모옥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천장에 매달려 있는 무쇠솥에서는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방 안의 인물들은 도합 일곱 명으로 하나같이 승복을 걸친 중들이었다. 그들 중 한가운데 앉아 있는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승이 일어서며 장천림을 맞이했다.
"아미타불. 어서 오시오, 시주. 노승은 소림의 각현(覺玄)이라고 합니다. 개봉부로 가던 중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는 중이지요."
"아....... 그렇습니까?"
장천림은 황급히 마주 절을 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시주께서는 웬일로 이런 산길을 지나시오?"
한편 장천림은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각현이라면...... 소림 사대금강(四大金剛) 중 복호금강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자는 소림의 장문인과 동배로써 좀체로 강호에 나서지 않는 자인데 어인 일로......?'
장천림은 절로 긴장감을 느꼈다.
그의 짐작은 맞았다. 그들은 백색마인을 잡기 위해 파견된 소림의 후기지수 오현대사를 지원하기 위해 뒤늦게 소림을 출발한 일행이었다. 각현대사는 소림십팔나한 중 여섯 명의 나한승을 대동하고 가는 길이었다.
장천림은 그야말로 호랑이굴 한가운데로 스스로 걸어 들어온 셈이었다. 그는 어이가 없었다.
'하필이며 호굴에 들어오다니.......'
그러나 그럴 수록 침착해야 했다. 장천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야 뭐...... 사냥으로 밥을 먹는 놈이니 그렇다 치고 스님들이야말로 어인 일로 이 험한 곳에 오셨습니까? 이곳은 호환(虎患)이 잦은 곳인데......?"
그의 어리석고 멍청해 보이는 태도에 각현대사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때였다.
"시주! 묻는 말에나 대답하시오!"
옆에 있던 사십대의 중이 소리를 질렀다.
그가 보기에 장천림이 어물쩡 넘어가려는 것이 눈에 거슬린 것이었다. 더욱이 각현대사야말로 소림의 원로가 아닌가?
장천림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무척 위축된 듯이 보였다. 이때 각현대사는 손을 저어 중년의 중을 만류했다. 이어 인자스러운 말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시주. 양해하시오. 사실 우리는 한 악귀나한을 쫓아 이곳을 지나는 길이오. 그래서 전부 신경이 날카로와졌소이다. 그러던중 시주 혼자서 이곳을 지나니 의심스러워 그러는 것이오. 그러니 시주께서는 바른 말을 해주어야 하오."
장천림은 그 말에 더욱 겁을 집어 먹은 표정을 지었다.
"예? 악귀나한이오? 어이쿠! 그럼 악마가 나타났단 말입니까?"
그는 벌벌 떠는 시늉을 했다. 중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연극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겁을 먹고 있는 건지 쉽사리 판단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장천림은 안색이 변하여 항의하듯 말했다.
"아니, 이것 보시오. 스님들! 그럼 내가 악귀라도 된단 말이오? 이런 억울할 데가......."
그는 씨근거리며 돌아섰다.
"이렇게 애매한 의심을 받느니 차라리 밖으로 나가겠소. 원, 허기라도 떼울려고 들어왔더니 별 의심을 다 받는군!"
정말이지 그는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공연히 소림의 승려들과 다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될 수는 없었다.
슉!
일순 파공성과 함께 그는 날카로운 경풍이 등쪽으로 쇄도해 오는 것을 느꼈다.
"억!"
그는 비명을 질렀다. 옆구리가 뜨끔하면서 동시에 손목의 완맥이 갈고리같은 손에 붙잡히고 만 것이었다.
그의 완맥을 움켜쥔 것은 바로 각현대사였다.
언제 신형을 날렸는지, 어떤 금나수를 사용했는지 모를 정도로 빠른 솜씨였다. 그러나 장천림은 일부러 대항하지 않았다.
일순 그는 완맥을 통해 뜨거운 기운이 무섭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이쿠! 뜨거......! 와앗!"
그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비명을 질렀다. 실상 각현대사의 무상금강력(無上金剛力)이 그의 혈맥을 조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천림은 일부러 내공을 운기하지 않고 받아 들였다.
"......."
각현대사는 아무 반응도 느끼지 못하자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놓아 주었다.
"미안하오. 시주. 잠시 시험을 해본 것 뿐이오."
만일 장천림의 내공이 그보다 반 단계만 낮았어도 본신의 기운을 속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천림은 자유자재로 진기를 혈도의 일정한 부위에 몰아넣을 수 있었으므로 감쪽같이 위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천림은 털썩 주저앉으며 진땀을 훔쳤다.
"아이쿠! 무슨 늙은 중의 손힘이 그렇게 세오?"
그 말에 승려들은 모두 분노의 표정을 드러 내었다. 각현대사를 늙은 중이라니......? 그들이 화를 내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각현대사는 손짓으로 제자들을 진정시켰다. 그는 소림의 노승답게 매사에 침착한 편이었다.
"그나저나 시주는 이곳에 자주 오시오?"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슬쩍 물었다. 순간 장천림은 머리를 굴려야 했다. 이곳을 터로 잡은 사냥꾼이 이곳을 다니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이곳은 사냥꾼들의 임시 거처였다. 설사 이곳 사정을 아무렇게나 꾸며 말한다고 해도 잠시 지나던 길인 소림사의 중들이 그 진위를 알 리가 없었다.
"그러문입죠. 이곳은 소인과 동료들이 자주 들리는 곳이오. 허허! 뿐만 아니라 이 집도 직접 만든 것인데 당신들이 차지하고 주인을 박대하니 정말 적반하장도 유분수가 아니오?"
장천림은 자신의 임기응변이 적절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중들의 안색에 난처함이 떠오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세상사에는 왕왕 뜻밖의 변수가 있는 법이다. 그야말로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마침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장년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사냥꾼의 복장을 한 자였다.
그 자는 들어서며 입을 열고 있었다.
"허허......! 오래 기다리셨겠구려. 스님들. 칡뿌리를 좀 구해왔으니 요기거리는 될 것입니다요. 어? 저 사람은 누구요?"
사냥꾼 사내는 장천림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불행히도 그 자야말로 이 임시 모옥의 주인인 토박이 사냥꾼이었다.
'아차!'
장천림은 일이 어그러졌음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었다.
잘못을 느꼈다면 튀는 것이 제일이다.
펑!
그는 창문을 발로 걷어 차면서 밖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잡아라!"
"아미타불......!"
호통과 불호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인영이 어지럽게 밖으로 쏘아 나갔다.
장천림은 전력을 다해 신형을 날렸다. 소림사의 중들과 싸우는 것은 피해야 했다. 중과부적일뿐더러 그들과 싸우다보면 무림맹의 포위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는 산으로 달아났다. 평야보다는 훨씬 몸을 숨기기가 쉬우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틀렸다.
애당초부터 지리를 모르는 것이 탈이었다. 게다가 소림 승려들에게는 안내자가 있었다. 바로 토박이 사냥꾼을 앞세워 마침내 장천림의 퇴로를 차단해버린 것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소림의 나한승들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더이상의 변명은 소용이 없었다. 결국 전투가 벌어졌다.
차차차창------!
퍼엉! 펑!
싸움은 격렬했다. 처음에는 승려들 중 두 명이 나와 장천림을 상대했다. 그들은 장천림을 얕보았던 것이다.
장천림은 시간을 끌면 끌 수록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독한 마음을 먹고 두 명의 젊은 승려를 거꾸러뜨렸다.
"으악!"
두 승려는 그의 장력을 맞고 삼 장이나 날아가 피를 토했다. 그러자 승려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아미타불......! 저 자의 무공은 뛰어나다. 어서 포진하라!"
각현의 말에 네 명의 나한승들이 일제히 달려 들었다. 소림사에는 그 유명한 백팔나한대진(百八羅漢大陣)이 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소나한진(小羅漢陣)을 펼치기도 한다.
소림의 나한진은 무림개사 이래 단 한 번도 격파된 적이 없는 무적의 진법이었다. 무림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소림의 나한진은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왔던 것이다.
우우우웅!
나한진이 펼쳐졌다. 비록 네 명의 나한승과 각현을 포함하여 오인이 펼치는 것이었으나 그 위력은 가공했다.
장천림은 나한진이 펼쳐지자 주변이 동장철담으로 화한 듯 꼼짝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장력을 날렸으나 그때마다 바다에 돌멩이를 던진 듯 흔적도 없이 소멸되는 것 같았다.
"아미타불! 무릎을 꿇어라!"
각현대사가 웅후한 불호를 외우며 선장을 휘둘렀다.
위이이잉!
선장이 막강한 경풍을 동반하며 장천림을 몰아쳤다. 장천림은 젊은 중에게서 빼앗은 계도를 휘둘렀다.
카카캉!
불꽃이 요란하게 튕겼다. 순간 장천림은 손목이 시큰하여 하마터면 계도를 떨굴 뻔했다.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늙은 중의 내력이 어째서 갑자기 두 배 이상 강해진 것일까?'
그는 나한대진의 묘용(妙用)을 알지 못했다. 소림의 나한진이 무적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나한진을 펼칠 때 여러 명의 내공력이 하나로 합쳐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각현대사가 떨친 선장의 힘은 다른 네 명의 중년 승려들의 내공이 합일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장천림은 가슴이 섬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혹감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진기가 고갈되어 당한다.'
그는 본래 소림사와는 원한이 없었다. 따라서 되도록 소림의 중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일이 이쯤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살수를 쓰지 않는 한 나한진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는 찬바람을 한 숨 삼키고는 신형을 팽이처럼 회전시켰다.
도세가 일변했다. 그것은 불귀곡에서 익힌 탈혼도법(奪魂刀法)이었다. 일단 탈혼도법이 전개되자 주변이 온통 가공할 도기(刀氣)로 가득찼다.
쐐애애애액---!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두 명의 승려들이 어깻죽지가 잘려 쓰러졌다. 그렇게 되자 진세가 흐트러졌다. 그는 눈부신 신법으로 좌충우돌하면서 나머지 이인의 혈도를 발로 걷어찼다.
"크윽!"
두 명의 중년 승려들이 거꾸러졌다. 바로 그때였다.
"아미타불......!"
웅후한 불호성이 들리며 각현대사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선장을 갈라쳤다.
위이이이잉!
천지를 진동하는 파공성과 함께 선장이 태산처럼 그를 휘몰아쳤다.
각현대사의 무공은 중년 승려들의 무공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장천림은 계도를 휘둘렀으나 선장의 웅후한 기세에 밀려 뒤로 세 걸음이나 밀려 나갔다. 그 순간 바닥에 쓰러졌던 승려들이 다시 뛰어 일어나며 합세했다.
싸움은 다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장천림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간신히 각현과 두 승려와의 싸움에서 평수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소림의 무학이 왜 무림에서 태산북두로 군림하는지 이번 싸움을 통해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소림이다!'
그는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가혹한 살수를 펼 수도 있었다. 그는 초수가 거듭할수록 소림 무학에서도 헛점이 드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뇌리에는 불귀곡의 비밀무고에 있었던 파소림초(破少林招)라는 무경(武經)에 수록되어 있는 무학이 속속 떠오르고 있었다.
당시 원(元)은 중원의 무림제파를 제압하기 위해 각 파 무학의 장단점을 연구하여 그 파해초식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싸움이 백여 초가 흐르자 마침내 장천림은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위이이잉---!
경력과 회오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그는 유유히 옷자락을 날리며 각현과 나한승의 공격권에서도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외쳤다.
"본의 아니게 여러분께 상처를 입히게 되어 유감이오!"
문득 그는 쌍장을 저었다.
퍼퍼퍼펑---!
연이은 폭음이 울렸다.
"헉......!"
여기저기서 신음과 비명이 울렸다.
소림이 자랑하는 나한진이 마침내 와해되었다.
비록 인원이 완전히 갖추어지지는 않았다해도 단 일인을 상대하면서 나한진이 격파되었다는 사실은 강호를 경동시키고도 남을 사건이었다.
두 명의 중년 승려들은 피를 토하며 날아갔고 각현대사도 가슴에 일 장을 얻어맞고 연달아 뒤로 일곱 걸음이나 밀려나갔다.
장천림은 그 틈을 타 홀연히 신형을 날렸다.
"손에 인정을 두었으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오. 한 마디 한다면 난 당신들이 찾는 악마가 아니오! 물론 믿지 않겠지만......"
장천림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각현대사 일행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
각현대사는 멍하니 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그는 놀라움으로 가슴이 마구 뛰고 있었다.
그의 나이 육십팔 세.
그는 소림에서도 서열이 십위 이내의 고수였으며 평생동안 한 번도 패배해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수십 년만에 강호에 나온 직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무명의 청년에게 패한 것이다.
그 충격은 실로 큰 것이었다. 게다가 소림이 자랑하는 나한진을 펼치고도 참패한 것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는 연신 불호를 외우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자위로 한 가닥 눈물이 흘러 내렸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아아! 노납도 이젠 늙었단 말인가......?'
강호무정 제13장 수중혈전(水中血戰) - 검궁인
제13장 수중혈전(水中血戰)
①
홍무(洪武) 15년 3월 1일.
서안(西安).
상관중과 당수문을 살해한 흉수를 찾기 위한 특별조직의 본부는 서안부로 이전해 와 있었다.
서안부의 무림맹 지단.
집무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백유성이었다. 그는 점차 초조해지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직까지도 흉수는 잡히지 않았다.
서릉협에서 한 번 흉수의 꼬리를 잡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자를 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뜻밖의 방해자가 나타나 놓치고 말았다.
완벽하게 포위한 상황에서 정체불명의 복면인이 뛰어들어 그를 구출해간 것이었다.
그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복면인의 정체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봐도 누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자가 벌인 유인작전에 휘말려 엉뚱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종국에는 흉수의 종적을 완전히 놓치고 만 것이었다.
그가 펼쳤던 치밀한 천라지망이 복면괴인에 의해 원점으로 되돌아 가고만 것이었다. 결국 백유성의 자존심은 크게 상했다.
처음 그가 특별조직의 영수를 맡았을 때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이번 사건을 맡음으로써 더욱 명성을 날리게 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일이 갈수록 꼬이는 것이었다. 흉수는 오리무중에 빠져 버렸으며, 얽혀버린 실마리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새제갈이란 별호를 얻을 만큼 두뇌가 뛰어난 그였지만 상대방은 그를 비웃고 있는 듯 했다.
"......."
백유성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의문이 짙어지고 있었다.
대체 누가......?
어떤 자가 상관중과 당수문을 죽인 것일까?
그는 그 점을 알 수가 없었다.
백유성의 앞날은 창창했다. 앞으로 십여 년만 흐른다면 어쩌면 무림맹의 맹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도 않은 먹구름이 그의 신변에 몰려든 것이다.
만일.......
흉수가 노리는 것이 그를 포함한 강호사공자 전체라면......?
그는 그런 가정을 세워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전율과 함께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아니 그 근처까지 가기도 싫은 일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니...... 절대로 그럴 리는 없다!'
그의 상념이 깊어져 갈 때 문득 밖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갈이 오고 있었다.
"낙양 연도에서 흉수로 짐작되는 자를 발견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백유성은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②
쫓기고 있는 자는 백리진강이었다.
그는 조천백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그와 헤어진 직후 무림맹의 인물들과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비록 마음으로는 조천백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일단 무림맹의 인물들을 보는 순간 눈이 뒤집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되지 않았다. 그는 무림맹의 고수들과 충돌했으며 그들에게 무차별 살수를 펼쳤다. 그의 무공은 강했다. 따라서 수많은 무림맹도들을 살해할 수 있었다.
그러자니 자연 행적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마침내 그는 쫓기게 되었다.
죽이고 또 죽이고......
아무리 죽여도 추적하는 자들의 숫자는 오히려 불어날 뿐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신이 아닌 이상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실상 그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아무리 소수혈옥공이 희대의 마공이라고 해도 혼자의 힘으로 무림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적지 않은 중상을 입었고 공력도 크게 소진되어 있었다.
"와아아......!"
"저쪽이다......!"
사방으로부터 그를 쫓는 함성이 마치 산짐승을 모는 몰이꾼들의 함성처럼 들렸다. 백리진강은 이를 갈고 있었다.
'죽일 놈들......!'
생각 같아서는 되돌아가 닥치는 대로 쳐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조천백의 말이 떠올라 억지로 참고 있었다.
......살아 있어야만 복수도 할 수 있는 법이라네.
강(江)이 보였다.
그 강은 이수(伊水)였다. 낙양 근역(近域)을 흐르는 이수의 강물은 아직 이른 봄이라서인지 군데군데 얼어 있었다.
백리진강은 강변에 우뚝 선 채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를 향해 날아오는 인영들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는 조직적인 추적을 당하고 있었다.
그를 쫓는 무리들은 바로 백색마인을 척살하기 위해 소림의 후기지수 오현대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정예고수들이었다.
오현대사는 치밀한 조직을 만들어 그를 차츰차츰 조여오고 있었다. 오현대사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무공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병법에도 능했다. 그가 소림의 차기 장문인감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서서히 백리진강의 숨통을 조르는 작전으로 나왔다. 더구나 오현대사가 동원할 수 있는 무림인들은 수천 명이 넘었다.
따라서 그는 굳이 정면대결을 하지 않아도 백색마인을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더구나 오현대사의 작전 뒤에는 또 한 명의 병법 전문가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추성결(秋星潔).
바로 황궁의 금위대장인 그가 병법을 보완해 주고 있었다. 따라서 오현대사가 펼치는 추적방법은 상처입은 늑대와 같은 백리진강을 괴롭히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
이수의 강물을 내려다 보는 백리진강의 눈빛에서는 핏기가 스쳤다. 그는 굴욕감을 느낌고 있었다.
추적대를 피해 강물에 뛰어들면 최소한 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행해온 그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비겁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는 갈등했다.
여기서 몸을 돌려 무림맹의 더러운 작자들을 쳐죽이고 함께 죽느냐, 아니면 강물에 뛰어들어 훗날을 기약하느냐......?
이때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응?'
이수의 얼어붙은 박빙(薄氷)을 깨뜨리며 한 척의 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 배를 본 순간 백리진강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돛에 새겨진 표식은 바로 무림맹의 문양이 아닌가..
양면합공(兩面合攻)!
그는 절벽에 몰린 것이다. 강물로 뛰어들던 아니면 돌아서던 간에 관계없이 그는 양쪽에 적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이제 그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짧은 순간에 결정을 내렸다. 일단 결정을 내리자 이제까지와는 달리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적이 숫적으로 많은 육지보다는 수중전이 나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풍덩!
이수에 뛰어드는 순간 차가운 강물이 전신에 느껴졌다. 그러자 혼미하던 정신이 소스라치게 깨어났다.
'좋다! 어느 쪽이든 죽을 때까지 싸워보자!'
그는 박빙을 부수며 전면을 향해 헤엄쳐 나갔다.
한편, 이수의 강상(江上)에 나타난 선박은 바로 백유성이 지휘하는 조직이었다.
그는 수하들의 보고를 들었을 때 생각했다.
낙양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그리고 개봉부에는 백색마인을 상대하기 위한 소림 오현대사의 조직이 포진하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공(功)을 오현에게 빼앗길 우려가 있었다. 그는 무림맹에서 가장 큰 경쟁 상대가 오현대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현이 흉수를 제압하게 되면 자신의 장래에 큰 지장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낙양으로 달려가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바로 수로(水路)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의 선택은 옳았다. 비록 오현이 줄기차게 추적하여 이수까지 몰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나서기 직전 현장에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크게 실망했다. 처음 수하들의 보고에는 자신이 쫓는 흉수일지 모른다고 했으나 막상 와보니 상대는 백색마인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좋다. 놈을 내 손으로 잡으면 무림맹 내에서 내 지위는 더욱 확고해질 테니까.'
백유성은 출세욕이 강한 위인이었다. 그는 선박의 뱃머리에 우뚝 서서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백리진강이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입가에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예측대로군. 후후! 백색마인, 오늘 뜻밖의 수확이 될 것이다.'
그는 차갑게 명령했다.
"장강십이신(長江十二神)! 그대들에게 대어(大魚)를 낚을 기회가 왔다."
순간 그의 뒤쪽에서 우렁찬 대답이 들리더니 물 속으로 열두 명의 인영이 뛰어들었다.
장강십이신. 그들은 물 속이라면 두려울 게 없다는 수공의 제일인자들이었다. 지난 날 장강을 장악했던 세력은 녹림도(綠林道)의 장강십팔채(長江十八寨)였다.
그러나 사십일백화대전 이후 녹림의 몰락과 함께 장강십팔채도 사라졌다. 그 이후 장강의 이권은 장강십이신에게 넘어갔다.
실상 장강십이신의 무공은 평범했다. 그러나 그것은 땅에서의 일이었다. 일단 그들이 물 속에 있는 한은 천하에 적수가 없다는 것을 모든 무림인들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만큼 수공(水功)에 관한한 그들은 천하무적이었던 것이다.
애당초 백유성은 이수로 행로를 정하면서 장강십이신을 대동했다. 일찌감치 이런 일을 에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보기좋게 적중했다.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 같았다.
'후후! 예감이 좋다. 오늘 이후 이 백유성의 이름은 무림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백색마인(白色魔人).
그가 얼마나 강한 지 모르나 이미 오랜 전투와 추적으로 인해 진력이 고갈되었다는 보고가 들려오고 있었다. 더구나 물로 뛰어 들었다면 장강십이신의 공격을 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백유성은 행운은 자신에게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수의 강물은 얼음처럼 찼다.
이미 많은 상처를 입은 백리진강은 그 점이 차라리 낫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물에 뛰어드는 순간 혼미했던 정신이 번쩍 든 것이었다.
그는 뼈를 에이는 물 속으로 깊이 잠수해 들어갔다. 수면 가까이 헤엄쳐 가면 외부에서 육안으로 발견하게 되고, 자칫하면 궁노수들의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강상에 떠 있는 괴선박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깊이 잠수해 들어갔다. 다행히도 그는 장강십팔채 출신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물에서 살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므로 헤엄에는 자신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숨이 차올라 막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쏴아아!
그는 문득 머리 위로 무겁게 눌러오는 기류를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한 예감에 고개를 돌린 순간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머리 위로 커다란 그물이 덮어 씌어져 오는 것이 아닌가?
'억!'
그는 바짝 긴장하고 손을 저었다.
콰류류류류류......!
손바닥에서 경력이 발출되자 무서운 물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물은 위쪽으로 뒤집혀 날아가고 있었다. 간신히 불의의 기습을 피한 그는 시선을 돌렸다.
이수의 물은 맑았다. 그러나 심저(深低) 쪽에는 탁류가 고여 있었다.
이때 그는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았으나 자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들을 느낄 수 있었다.
'수공에 능한 자들이다.'
그는 위기를 느꼈다. 그는 헤엄을 잘 치는 편이었으나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수공을 익히지는 않았다.
그는 숨이 차올랐다. 위로 부상하여 새로운 공기를 마시지 않는 한은 진기를 이어갈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위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 일이다.
강력한 소용돌이가 다가오더니 우측과 좌측에서 온통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검은 가죽옷을 껴입은 괴인들이 무엇인가를 휘둘러 오는 것이 아닌가?
촤아악!
괴상하게 생긴 병기였다. 그것은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물 속에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쾌속하게 날아왔다.
'분수아미자(分水蛾眉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중공부의 전문가들이다. 으으! 놈들이 수공을 익힌 놈까지 동원할 줄이야!'
그러나 쉽게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쌍장을 좌우로 벌리며 두 발을 움직였다. 그러자 신형이 위로 떠오르며 두 괴인의 분수아미자가 튕겨나갔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다리 아래쪽의 물이 갈라지며 허벅지가 화끈해졌다.
'당했다.'
순식간에 핏물이 안개처럼 자욱히 번지고 있었다. 물 속에서 자상은 치명적이다. 그것은 몸 속의 피가 물 속으로 쾌속하게 빨려나가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리를 통해 체내의 피가 빠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이때 다시 왼쪽으로 두 괴인이 쏘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제 한 모금의 진기 밖에 없었으나 살기를 뿜으며 그들을 향해 부딪쳐 갔다.
양쪽에서 아미자가 날아왔다. 백리진강은 상관하지 않고 쌍장을 뻗었다.
퍽! 퍽!
둔탁한 느낌이 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옆구리와 어깨에 화끈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팔다리를 휘저으며 위로 부상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제히 사방으로부터 공격이 가해져 왔다. 백리진강은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가슴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고 있어 더이상 공격을 받지 않아도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다시 여섯 군데의 상처를 입었다. 그의 몸 주위로는 붉은 안개가 뭉클뭉클 일어나고 있었다. 모두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었다.
실로 가공할 악전(惡戰)이었다.
백리진강이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는 이미 주변의 강물은 온통 핏물로 화해 있는 상태였다.
그가 막 한 모금의 공기를 들이마셨을 때였다.
"후후후! 꽤나 끈질긴 놈이군!"
문득 머리 위쪽에서 차갑고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백리진강은 그를 보았다.
선박 위에 우뚝 서 있는 자는 백색의 무복을 입은 영준한 청년이었다. 그가 막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청년은 검(劍)을 날렸다.
번쩍......!
아찔하고 현란한 느낌이었다. 백리진강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검비도술(馭劍飛刀術)이라는 절정의 검법이었다.
검을 날린 자는 바로 백유성이었다.
그는 수면에 막 떠오른 백리진강을 향해 절정검학을 펼친 것이었다. 백리진강은 급히 수중으로 잠수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크윽!"
그는 등줄기에 화끈한 느낌을 받고 중심을 잃었다. 한 자루의 장검이 등에 깊숙이 박혀 버린 것이었다.
안돼.......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백리진강은 이를 악물고 가물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한편 장강십이신은 그의 손에 모두 죽고 단 두 명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동료들을 잃자 반쯤 미쳐 있었다.
그들이 아귀처럼 백리진강을 향해 달려 들었다. 좌와 우로 다가든 장강십이신은 동귀어진한다는 각오로 아미자와 몸이 하나가 되어 그에게 부딪쳐 왔다.
'헉!'
백리진강은 그들의 아미자를 각각 옆구리와 오른쪽 아랫배에 맞았다.
그러나 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양손을 뻗어 두 사람의 목을 움켜쥔 것이었다.
손 안에서 두 사람의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이 전달되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백리진강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강물은 말없이 흐른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③
시뻘겋게 변한 수면을 바라보면서 오현대사는 합장했다.
"아미타불....... 이로써 백색악마도 끝이로군......."
그러나 이때 그의 옆에서 날카로운 눈을 번쩍이고 있던 추성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형님. 아직 끝나지 않았소."
"......?"
"놈의 시신을 찾을 때까지는 추적을 중지할 수 없소."
오현대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우, 그 자는 중상을 입었고 장강십이신의 공격을 받았네. 그 아이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해도 신(神)이 아닌 이상에야 도저히......."
추성결은 단호히 말했다.
"그렇지 않소. 형님."
그는 자신을 따르던 두 명의 수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류로 가자!"
"......."
오현대사는 신형을 날리는 삼인을 바라보며 더욱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강호무정 제14장 백유성(白流星)의 의도(意圖) - 검궁인
제14장 백유성(白流星)의 의도(意圖)
①
홍무(洪武) 15년 4월 14일.
안가점(安家店).
화산에서 십 리쯤 떨어진 작은 시진이었다. 이곳에 네 명의 사나이가 하나둘 모여 들었다.
그들은 하루나 이틀 간격으로 안가점에 당도하였으며, 하나같이 안가점에서 유일한 객점인 십리향(十理香)이란 객점에 투숙했다.
십리향은 한적한 마을의 객점답게 손님이 드물었다. 이들 사인 외에는 고작해야 장사치 몇 명이 손님의 전부였다.
처음에는 사인이 각기 방에 들었으므로 객점 주인은 그들이 한 일행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네 사람은 한 방에 모여 있었다. 네 사람은 서로를 감회깊은 눈으로 마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냥꾼 차림의 사나이였다.
"다행이군.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어서......."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이들이 이토록 생명을 내건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을 꺼내자 삼인의 청년은 한결같이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천림! 이제와서 새삼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리를 진정한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인가?"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다면 네 놈을 친구로 여기지도 않았을 거야!"
"......."
사냥꾼 차림의 청년은 장천림이었다. 그는 머리를 긁었다.
"미안하다. 난 단지......."
"또 그 소리!"
석회림이 그의 어깨를 치며 정색을 했다.
"과거에 네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이제와서 간신히 그 빚을 탕감할 희망에 젖어 있는데 그따위 소리를 하다니 정말 형편없는 친구로군!"
"회림......."
장천림은 특히 석회림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석회림이 어떤 각오로 자신을 돕기 위해 나섰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아파오는 것이었다. 이때 장하영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우리는 무사히 이곳으로 합류했다. 그동안 각자가 겪은 일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 거야. 후후후....... 대단한 소용돌이를 건너왔지."
"......."
그 말에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사실 당가보에서 당수문을 죽인 후 그들은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 각자 길을 따로 잡았다. 그동안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어디 한 두 번이랴.
혈명단 이후로 그들은 또다시 백척간두의 위기 속에 처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도 지긋지긋한 위기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하영의 그 말 한 마디에 삼인은 모두 기분이 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우정과 의리로 뭉친 사나이들인 것이다.
설사 그보다 더한 고생을 한다해도 그들은 한 잔의 술로 모든 것을 껄껄 웃어넘길 그런 위인들이었다.
"자, 이제 모두 무사히 모였으니 세 번째 작전을 진행해야지."
장하영. 그는 매번 작전을 담당했다. 그것은 그의 전문분야였던 것이다.
장천림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화산의 천인검객 북리웅풍은 사실 강호사공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네. 이번 일은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이 될 걸세."
장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는 나름대로 그 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지. 그 결과 역시 사공자 가운데 그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 자가 근 사 년 가깝도록 폐관했다는 것이네."
장천림도 그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백가소를 납치한 사공자 모두 똑같은 위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천인검객이 폐관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궁금한 것은......."
장하영의 시선이 장천림에게로 향해졌다
"과연 그도 꼭 죽여야 할 인간이냐 하는 것이다. 천림. 이젠 우리에게 사공자와 원한을 맺게 된 원인을 이야기해 줄 수 없을까?"
"......!"
장천림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석회림과 조천백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동감이라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모두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장천림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군....... 영원히 말하지 않으려 했었는데......."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스런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 일은 한 명의 천진하고 아름다운 소녀로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당시 나이는 열여섯 살....... 이름은 백가소....... 즐겨 입는 옷은 붉은 장미가 수놓아진 백의였네. 그녀는 세상의 험난함을 모른 채 금문장이란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
장천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장하영을 비롯한 삼인은 침을 삼키며 장천림의 입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결국 장천림은 백가소의 죽음에 관한 일들을 모두 털어 놓았다.
백가소가 실종되었던 일.......
그녀를 찾아 헤매고 다녔던 일들.......
노예상인들을 찾아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일들과.......
천신만고 끝에 그녀를 찾기는 찾았으나 그녀가 마약에 중독되어 폐인이 되어 있었던 일하며.......
그녀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가 행했던 모든 일들........
그러나 결국 그녀가 네 장의 그림을 남기고 목을 매었다는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의 긴 이야기가 끝났다.
"......!"
삼인은 모두 멍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세상에 이렇게 기막힌 일이 있을 수 있다는데 경악하고 있었다. 장천림의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참동안 가슴 한 구석을 칼로 후벼낸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특히 백가소가 네 장의 그림을 남기고 목을 매었다는 말을 했을 때 그들은 주먹을 움켜쥐며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군......."
석회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참......."
조천백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장하영만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미심쩍은 일이 생각나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천림.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있는데......."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말해 보게."
"상관중이나 당수문, 백유성이라면 그런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그들은 위선의 탈을 쓰고 있는 자들이니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북리웅풍이 그들과 함께 일을 저질렀다는 건 어딘가 좀......."
그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이었다.
"내가 알기로 북리웅풍은 사공자 가운데 가장 수양이 깊은 인물이네. 그는 화산파의 속계이면서도 사문의 도계 인물들이 오히려 더 존경을 하고 있네. 평소 그의 언행이나 태도도 정인군자의 자세에서 한 치도 어긋난 적이 없었네.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명예에 먹칠할 그런 조잡하고 더러운 짓을 저질렀을까?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드네."
"......."
좌중의 인물들은 침묵했다. 석회림이나 조천백도 동감이었다. 그들은 북리웅풍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색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위인이었다. 북리웅풍에게 천인검객이라는 별호가 붙은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수양이 깊은 위인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장천림의 얼굴에는 분노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가소가 내게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그녀가 죽기 전에 남긴 그림에는 분명 그 작자의 얼굴도 들어 있었네!"
"......."
삼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죽어버린 소녀. 아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녀가 거짓을 남길 리는 만무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장천림은 차갑게 말했다.
"어쨌든 나는 가소의 죽음을 잊을 수가 없네. 따라서 강호사공자와는 한 하늘을 대할 수 없네!"
"......."
장내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②
화산파(華山派)는 무당과 더불어 중원 이대검파로 일컬어지는 명문이었으나 그 규모에 있어서는 무당보다 빈약한 감이 있었다.
그것은 화산의 문규가 엄하게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화산문도는 장문인의 윤허를 얻지 않고는 강호로 나갈 수 없었다. 따라서 강호상에서 화산의 영향력은 무당에 비해 위세를 떨칠 수가 없었다.
밤이다.
정양은 내심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소사숙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매일 공양을 해야 하다니.......'
그는 지금 소사숙, 그러니까 천인검객 북리웅풍이 면벽하고 있는 초옥으로 음식을 날라가고 있었다.
이 일은 불과 두어 달 전부터 시작되었으나 그에게는 귀찮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소사숙이 강호로 떠난 후, 무림맹으로부터 한 명의 손님이 찾아 왔었다. 그 자는 은밀히 화산의 장문인을 만나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듯 했다. 그 이후 그 자는 소사숙이 거처하는 초옥에 기거하게 되었다.
그 자가 소사숙의 초옥에 기거하게 된 날 정양은 장문인에게 불려가 이런 말을 들었다.
"...... 잘 들어라, 정양. 네 소사숙이 강호에 나갔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매일 소사숙이 초옥에 머무르는 것처럼 공양을 바치거라."
정양은 장문인이 무엇 때문에 그런 명을 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사실 정양의 머리로 알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일에는 무림맹의 소장파 핵심 인물인 백유성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림맹에서 온 인물은 바로 백유성이 특파한 인물이었다.
백유성은 북리웅풍이 강호로 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북리웅풍은 무림맹에 오지 않았다.
백유성은 마음 속으로 한 가지 의심나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상관중과 당수문을 죽인 흉수가 과연 강호사공자 모두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화산의 북리웅풍을 이용하자는 계책을 떠올린 것이었다.
마침 북리웅풍은 화산을 떠난 상태였다. 그는 수하를 보내 대신 북리웅풍으로 위장케 했다. 그것은 북리웅풍이 아직도 화산에 있는 것으로 위장함으로써 흉수가 화산에 찾아오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정양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소사숙의 거처까지 왔다.
초옥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문은 안으로 잠겨져 있었다. 정양은 다시 내심 투덜거렸다.
'이런 바보같은 일이 어디 있담? 가짜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매일 공양을 바치다니.......'
그러나 지엄한 장문인의 명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사숙. 저녁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의 말투는 자연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초옥 안에서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거기 두고 가거라."
항상 똑같은 말이었다. 정양은 음식을 담은 소반을 마루에 내려 놓고 물러났다. 그리고 종종걸음을 쳤다.
사실 그는 한 시가 아까왔다. 소사숙이 강호로 떠나면서 그의 애검을 선사한 것은 그를 크게 고무시켰다. 아니, 그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된 것이다.
그는 이후로 소사숙을 능가하는 천하제일의 검객이 되리라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 일과를 마친 후에도 열심히 검법을 연마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종종걸음을 치는 것도 검법 연마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초옥을 뒤로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때 어디에선가 낮은 음성이 들렸다.
"음. 이상한 일이군. 저 도동은 북리웅풍을 조금도 존경하지 않는것 같군."
어둠 속.
사인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장천림 일행이었다.
그들은 화산의 경비가 의외로 허술하여 함께 행동을 하게 된 것이었다.
방금 말을 한 것은 장하영이었다. 그의 관찰력은 범인을 초월했다. 그래서 도동 정양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장천림의 마음은 격동으로 온통 들끓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한 마장 밖에 보이는 초옥의 방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손 하나가 뻗어나와 식사를 방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북리웅풍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만일 장하영이 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게 뭐 중요한 일인가? 어쨌든 그 자가 저기 있는 것이 확실한 이상......."
장하영이 그의 입을 막았다.
"아니, 뭔가 수상해. 이미 강호에 소문이 파다한데 어째서 저 자의 주위에는 경비가 없단 말인가? 설마하니 죽음을 앉아서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매사에 치밀한 장하영다운 말이었다. 석회림이나 조천백도 동감이었다.
조천백이 말했다.
"어쩌면 함정이 있는 지도 몰라."
장천림은 차갑게 말했다.
"그런 것을 두려워했다면 나는 이 일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는 앞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잠깐!"
장하영이 그를 만류했으나 장천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초옥으로 걸어갔다. 그의 행동에 장하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우리는 각자 방향을 나누어 경계하세."
그의 말이 떨어지자 석회림과 조천백은 미리 약속한 듯 신형을 날렸다. 그들은 각각 초옥의 사방으로 나누어 매복했다.
한편, 장천림은 초옥 앞에 다달았다. 그의 마음 속은 이미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방문에 비치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이때 그림자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듯 움직임을 정지하고 있었다.
장천림은 방문을 노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북리웅풍. 왜 나서지 않는 거냐? 지옥사자가 너를 방문한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느냐?"
"......."
방 안의 그림자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장천림은 다소 흥분해 있었다.
그는 장하영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장하영은 북리웅풍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기분이 몹시 나빴다. 아울러 명문 출신인 북리웅풍에 대한 반감이 일고 있었다.
"후후! 복리웅풍, 설마 벌써 잊지는 않았겠지? 백가소란 어린 소녀에 대한 일을 말이다. 네가 진정한 사나이라면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장천림은 방문을 노려 보았다.
그러나 기이한 일이었다. 방 안의 그림자는 마치 목각인형이라도 되는 양 처음부터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장천림도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었다.
장하영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미 상관중과 당수문의 죽음으로 인해 강호사공자는 위기를 느끼고 있어야 옳다. 그렇다면 모종의 대비를 할 것이 아닌가?
장천림은 긴장을 느끼며 허리춤의 철검을 손으로 잡았다.
"......."
그의 눈에서 강렬한 광채가 솟는 순간,
번뜩!
그는 전광석화같은 신법으로 쏘아나갔다.
와장창!
방문이 부서지며 검과 몸이 하나가 된 그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편, 멀리서 장하영 등은 그가 방 안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여차하면 구원의 손길을 뻗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 아니......!"
방 안으로부터 장천림의 당혹성이 울렸다. 장하영 등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
방 안에 뛰어든 사인은 어리둥절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방문에 비쳤던 그림자는 놀랍게도 하나의 짚으로 만든 인형(人形)일 뿐이었다. 인형이 불빛에 비쳐 사람의 형태로 보인 것이다.
사인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분명 방 안에서 사람의 음성을 들었고, 또한 식사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목도하지 않았던가?
사인은 한결같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때였다.
"이곳으로 달아났다!"
조천백이 놀라 부르짖었다. 그가 가리킨 곳을 본 삼인은 안색이 변했다.
한 쪽 벽면, 그곳에는 한 장의 족자가 걸려 있던 곳이었다. 조천백이 그곳을 들추자 벽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구멍은 밖을 향해 뚫려 있었다. 방 안에 있던 자는 바로 그 구멍으로 달아난 것이었다.
"......!"
사인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장하영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가 이런 일을 할 리가......"
장천림의 안색이 굳어졌다.
"무슨 뜻인가?"
"이곳에 있던 자는 북리웅풍이 아니야."
장하영이 단정적으로 말하자 그는 의혹의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어째서?"
"그는 아무리 위기에 처했다해도 결코 달아날 위인이 아니다. 더욱이 이렇게 미리 구멍을 파두고 있을 비겁한 위인은 더욱 아니다."
"......."
장천림은 이번에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도 장하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기는 중이었다.
문득 장천림은 신형을 날렸다. 그가 느닷없이 신형을 날리는 바람에 삼인은 흠칫했다.
그러나 곧 서로 눈짓을 주고 받으며 함께 장천림이 날아간 곳으로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③
장천림은 달빛 아래 검술을 연마하고 있는 한 명의 도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동은 바로 정양이었다.
정양은 검을 곧추 세운 채 서서히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으되 자세는 진중하고 신색이 엄숙하였다.
"야압!"
번쩍!
검광이 달무리를 베어내려는 듯 허공에 줄기줄기 은하의 물결을 이루며 검막을 형성했다.
그 광경을 보고 곁에 있던 장하영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저 아이의 검을 잘 보게. 저 검은 한백(寒白)이라고 하는 명검(名劍)이야. 비록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나 실은 화산의 삼대명검의 하나일세."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저 검이 바로 천인검객 북리웅풍의 애검이라는 사실이야."
"......!"
조천백, 석회림도 이미 근처에 와 있었다. 장하영의 낮은 음성이 이어졌다.
"저 검이 어떻게 저 동자의 손에 있는 지는 몰라도 저것만으로도 이미 이곳에 북리웅풍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
"......."
"가만. 저기 누가 오고 있다."
장하영의 말에 삼인은 숨을 죽였다. 과연 희디흰 도복자락을 날리며 한 명의 노도인이 나타났다.
그러나 정양은 그것도 모르고 한창 검법 연마에 몰두하고 있었다.
도인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입가에 이따금씩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윽고 정양이 땀방울을 훔치고 검법 하나를 다 마치자 도인은 헛기침을 했다.
"험! 정양아. 너의 검도가 많이 늘었구나."
정양은 깜짝 놀라다가 도인을 보고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
"자...... 장문인......! 언제 오셨나요?"
"허허허....... 방금 전에 왔다. 그래, 초옥에 공양은 하고 왔느냐?"
"헹....... 그 가짜 소사숙 말인가요?"
그 말에 도인, 즉 화산 장문인은 정색을 지었다.
"그런 말을 하면 못쓴다."
정양은 불만인 듯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대체 알 수가 없어요. 소사숙께선 화산을 떠나신 지 오래되었는데 무림맹에선 어쩌자고 소사숙의 흉내를 내게 하는 거죠?"
도인은 탄식했다.
"그것은 네 사숙과 함께 이름을 날리고 있는 무당의 백유성 소협의 부탁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알아볼 것이 있어 그런 연극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너는 다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흥......."
정양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자신의 소사숙 외에는 누구도 존경하지 않았다. 도인은 그에게 다가가더니 뭐라고 이야기했다.
정양은 눈을 빛내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말을 들으며 손을 잠시도 쉬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화산 장문인으로부터 어떤 검법의 요결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장천림 일행은 화산을 떠나고 있었다.
달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화산을 뒤로 하고 떠나는 그들의 가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들은 화산 장문인과 정양의 대화를 듣고 여러 가지 의혹에 젖어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로 미루어 볼 때 북리웅풍이 이미 오래전에 화산을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그가 무엇때문에 화산을 떠났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강호에 북리웅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또 한 가지 의문은 가짜 북리웅풍 행세를 한 자는 백유성이 보낸 자였는데 백유성이 무엇때문에 수하로 하여금 그런 연극을 하게 했느냐는 점이었다.
"......."
일행은 어쨌든 화산을 떠나기로 했다.
북리웅풍이 없는 이상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문득 장하영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렇군! 바로 그 때문이었어! 왜 그걸 바로 생각하지 못했을까?"
"......?"
나머지 삼인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장하영은 눈썹을 움직이며 설명했다.
"백유성이란 자는 도대체 상관중과 당수문을 죽인 우리들이 누구일까 궁금했을 거야. 그리고 우리의 목적이 강호사공자 모두를 겨냥한 것인지도 확실히 알고 싶었겠지. 그래서 그는 북리웅풍에게도 우리의 손이 뻗는가를 시험하기로 한 것이다. 만일 이곳에도 손이 뻗치면 목적이 강호사공자에게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고, 더불어 그 이유마저 알게 될 테지. 그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어!"
"......!"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아주 교활한 놈이야. 이번에 그의 수하가 달아났으니 그는 확실히 우리의 목적과 원한의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석회림이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의미가 있고 말고! 병법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한다고 했다. 그 자는 우리의 정체를 알고 싶어했어. 이제 대상을 알고 이유를 안 이상 그는 좀더 유리하게 대처할 자신을 얻을 것이다. 그로 미루어 그 자는 아주 교활하고 치밀한 자임에 틀림없다."
장하영의 말에 세 사람은 침묵했다.
장하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앞으로 부딪치게 될 백유성은 상대하기가 극히 어려운 난적일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들의 가슴은 이내 무거워졌다.
달빛은 숨이 막힐 정도로 밝았다. 그러나 달빛 아래를 걸어가고 있는 사인의 가슴은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했다.
④
홍무(洪武) 15년 4월 16일
쏴아아.......
물소리가 들린다. 귓전에 찰랑이는 물소리는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오랫동안 그의 귓전에 부딪치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 그는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도 힘에 겨웠으나 초인적인 의지력이 그로 하여금 물가를 향해 기어가도록 만들고 있었다.
장강(長江).
수만 년을 도도하게 흘러내린 장강의 물은 탁하다. 그 탁류가 그의 몸을 흠뻑 적셔 놓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꼬박 이틀 간을 물에 떠밀려 내려온 것이다. 그러고도 죽지 않았다면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전신은 온통 상처 투성이였다. 등에는 부러진 장검이 아직도 박혀 있었으며, 옆구리에는 기이한 모양의 날카로운 병기가 꽂혀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전신에 최소한 열여섯 군데 이상의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그 상처는 물에 불어 흉하게 벌어져 있기까지 했다.
게다가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 이제는 흘러내릴 피가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
"으음......."
신음을 흘리고 있는 소년, 그는 백리진강이었다.
그가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것은 과거 황궁의 비밀창고에서 훔쳐먹은 각종의 영약 덕분이었다. 만일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백리진강은 강가에 드러누운 채 눈을 떴다.
태양(太陽).......
하늘에는 태양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흐려진 망막에 비친 태양은 그저 뿌연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쨌든 태양이 떠 있어 춥지 않아 좋다. 그는 전신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혼미함 속으로 잠겨 들었다.
.......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밤중이었다. 밤이 되자 극심한 추위가 그를 괴롭혔다.
피를 많이 흘린 데다 체력이 극도로 떨어져 추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손가락조차도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미루어 그는 회복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눈을 뜨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암천에는 드문드문 별이 떠 있었다. 그는 생각한다.
별 하나에 한 인간의 운명이 달려 있다면.......
나의 별은 저 중 어느 별일까.
그는 아무리 찾아도 자신의 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득한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별을 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몇 번이나 울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자신이 정했던 별은 어김없이 유성(流星)이 되어 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래.......
애당초 나의 별은 없었던 거야.
훗훗....... 나같은 놈은 애당초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백리진강의 눈은 이슬에 젖었다. 그는 아직 인생을 안다고 할 수 없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고초를 겪었다.
세상은 그에게 있어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고, 인간이란 믿음이 아니고 증오의 대상이며, 미래는 희망이 아니고 파국(破局)일 뿐이었다.
백리진강은 인생을 다분히 염세적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철이 들 때부터 이미 인생의 목적을 복수라는 명제로 정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몽사몽간에 밤하늘의 별이 모두 와르르! 허물어져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허억......!"
그 순간 다시 정신을 잃어 버렸다.
여인의 운명은 기구한 것이었다.
그녀는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죽었고 아홉 살 때는 부친마저 타계했다. 다행한 것은 그나마 집안이 부유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별 고생은 하지 않았다.
그녀를 열한 살 때까지 키운 것은 외조모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외조모는 그녀를 끔찍히도 귀여워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외조모도 곧 돌아가시고 말았다. 고아가 된 그녀는 결국 어머니의 인척인 어떤 집안에 의탁되었다. 그녀의 유산이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접을 받고 자랄 수 있었다.
그런데 불행은 쉬지 않고 그녀를 따라왔다. 그녀의 나이 십삼 세가 되었을 때였다.
한밤중에 그녀의 침실로 들어온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그녀가 이모라고 부르는 여인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고.......
그 바람에 온 집안이 난리가 나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일이 있은 직후 그 집안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술에 취한 사나이가 이모를 구타하고 허구한 날 도박에 미쳐 집을 나가기 일쑤였다.
그나마 그가 집어 가지고 나가는 패물이나 은자는 결국 소녀의 유산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 열네 살이 되었을 때.......
마침내 가산은 완전히 기울어 빚더미에 앉고 말았다. 결국 그로인해 이모는 자살을 하고 말았다.
이모가 죽은 후 여전히 이모부는 그녀를 탐내고 있었다. 아니 노골적으로 소녀를 겁탈하려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어느 날 밤 도망을 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상은 넓었으나 그녀 한 몸이 의지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는 낙양 근교에서 한 불한당을 만나 그때까지 고이 간직해 왔던 순결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그 불한당에게 반 년쯤 잡혀 있다가 마침내 기루(妓樓)로 팔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기녀가 된 그녀는 무척 아름다왔다. 어머니를 닮은 선천적인 미모와 비단결같은 피부가 수많은 사내들을 끓게 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항상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기루에서도 그녀는 얼마 있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칼부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몰래 기루를 도망쳐 나오게 되었다.
하늘도 무심치 않았음인가?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던 그녀는 한 마음씨 착한 젊은 어부(漁夫)를 만나게 되었다. 어부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다.
그녀는 어부와 함께 하면서 비로소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어부의 평범한 아내가 되어 하루하루를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심이었을까? 그녀의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고기잡이를 나갔던 남편이 그만 풍랑에 휩쓸려 실종되어버린 것이었다.
여인의 나이 열여덟 살의 일이었다. 비록 한창의 나이였으나 그녀의 마음은 이미 황혼이었다. 너무나 많은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마음이 늙어 버린 것이다.
그녀의 이름 환사금(幻思琴)이었다.
그녀는 어부를 잃고는 더이상 살아갈 자신을 잃었다. 결국 그녀는 한밤중에 강가로 나왔다.
그래.......
죽자.
이 한 몸 죽고 나면 더이상 괴로운 일은 없을 게 아니냐.
그녀는 별빛이 곱게 부스러지는 밤중에 장강의 언덕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신발을 나란히 강가에 벗어두고 강물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강물에 반쯤 들어갔을 때 그녀는 무엇인가 둥둥 떠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나무토막이려니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죽어가고 있는 한 사내였다.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