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22 소이비도 제2권 뜻밖의 함정
뜻밖의 함정
설소하와 낭천은 차가운 밤공기를 헤치며 계속 걸었다.
설소하는 높은 담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 이유는 그의 많은 형제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죠."
"모두 죽다니....."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낭천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 열다섯 형제들이 어떻게 해서 죽은 것이오?"
"소문에 들리는 바로는 병사했다고 하지만 그 이유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들이 죽은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평상시에 그렇게 건강했던 열다섯 명의 형제가 요 이삼 년 사이에 모두 병들어 죽었고 유독 신노삼만이 살아 남았다는 것을 강호의 사람들은 선뜻 믿을 수가 없거든요. 모두들 의심을 품고 있을 거예요."
설소하의 말이 끝나자 낭천은 담의 고도를 측정하듯 고개를 들어 유심히 쳐다봤다.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고 담을 올려다보던 낭천은 이윽고 담담하게 한마디 던졌다.
"내일 밤에 내 그를 찾으러 오겠소."
낭천은 손과 발을 동시에 움직여 높은 담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전개한 것은 벽호유장(壁虎遊牆) 공력이 아니었으며 그는 이러한 공력을 들은 바도 없었다.
하지만 강철과 같은 손으로 담을 잡은 채 다리를 뒤로 뻗으면서 매우 능란하게 위를 향하고 있었다. 낭천의 그러한 동작은 마치 영활한 원숭이와도 같았다.
잠시 후, 결국 그는 높다란 담에 올라서 주의깊게 주위를 살폈다. 담장 안에는 매우 넓은 화원과 겹겹이 싸인 집들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해 있고 주위는 어둠이 깔려 매우 컴컴했으며 잠이 들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불빛이라고는 담장 안의 정원 구석에 몇 개의 희미한 등불만이 그 효력을 약하게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설소하는 능력이 넘치는 여인이었으며 또한 낭천에겐 좋은 방도자였다. 그녀는 신노삼의 한 하인을 매수하여 하인으로 하여금 장원 내의 자세한 약도를 그리게 했다. 대청과 객방 그리고 신노삼의 침실, 심지어 부억이나 화장실까지 자세하고 분명하게 그려진 약도를 얻은 낭천의 얼굴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낭천은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도 거뜬히 신노삼을 찾을 수 있었고, 이날 밤, 낭천이 암중에 습격해 오는 것도 모르는 신노삼은 방의 불을 환하게 밝힌 채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그날 하루 동안의 수입을 계산하기 위해 주판알을 열심히 튕기고 있었다. 신노삼의 주판알을 튕기는 손가락은 몹시도 짧아 식지와 중지, 그리고 무명지의 길이가 모두 새끼손가락의 길이와 같았다.
하지만 짧은 대신에 모든 손가락들은 엄지손가락보다 더 굵었고 손톱조차 보이지 않았다. 부귀와 영화를 한몸에 누리며 살아온 사람의 손이 이렇게 거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노삼은 어렸을 때 몸이 매우 약해 그의 아버지에게 밖으로 내쫓겨 오 년이란 세월 동안을 방랑생활을 하며 지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집으로 다시 돌아온 후에도 오 년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노삼이 오 년 동안 대도적인 변천호를 따라 밑천이 들지 않는 장사를 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시간을 거지의 생활로 허비했다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신노삼이 소림사에 들어가 온갖 고생을 무릅쓰며 무술을 연마했다는 사람도 있었으나 모두 근거가 없는 얘기다. 그래서 그의 형제들이 죽은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적잖은 의혹을 품었지만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숱한 소문에 대해 신노삼은 극구 부인을 했으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의 굵고 짤막한 손가락이다. 다소라도 견식이 있는 사람은 두 손이 철사장(鐵沙掌)과 외문장력(外門掌力)을 연마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또한 그것에 대해 상당한 조예를 지녔다는 것도 물론 알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큰형이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담을 내려선 낭천은 발소리를 죽여 정원을 통과해 창문을 가볍게 열고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낭천은 어떤 특수한 신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숨을 죽인 채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신노삼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전신의 근육과 골절, 그리고 신경, 심지어는 한 방울의 피까지도 혼연일체가 되어 몸을 놀렸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발견한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낭천은 환하게 불이 밝혀진 신노삼의 방에 당도했다.
신노삼은 여전히 정신없이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가운데, 낭천은 살그머니 손을 내밀어 창문을 열고 동시에 몸을 날려서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신노삼이란 사람은 그렇게 감각이 무딘 사람이 아니었으니.....
신노삼은 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무언가 환경이 바뀌는 것을 직감하고 급히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낭천은 이미 신노삼의 바로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신노삼은 대경실색하여 의자에 앉은 채 미처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그는 신이 아닌 사람의 행동이 이다지 신속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낭천은 냉랭한 시선으로 신노삼을 노려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분명하게 물었다.
"당신이 바로 신노삼이오?"
신노삼은 여전히 의자에 굳어진 채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엔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일신의 공력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낭천의 냉막한 목소리를 들었다.
"당신은 내가 무엇하러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소?"
신노삼은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또 고개를 끄덕였다.
낭천은 방안을 한바퀴 획 둘러보고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당신...나에게 할 말이 없소?"
신노삼은 선뜻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은 마치 벙어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과 흡사했다. 한편, 낭천은 할 말이 없느냐는 질문을 던질 때 신노삼의 마지막 말을 듣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렇게 생사가 가름되는 긴박한 순간에 신노삼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했다. 비록 숱한 아쉬움이 있었으나 애걸을 할 뜻은 없었다. 또한 반항도 도피도 하려 들지 않았다.
낭천은 날카롭게 검을 뽑아 들었다.
바로 이 순간, 낭천의 가슴 한구석에 무언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싹텄다.
이것은 본시 야수에게만 있는 특유의 본능이었다. 어떠한 순간에 선량한 토끼에게 무서운 늑대가 몰래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물론 낭천은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고 또 어떠한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했다. 낭천은 더 자체하지 않고 뽑아든 검을 앞으로 뻗었다.
싸늘한 검광이 번쩍하면서 신노삼의 가슴 정면을 향해 폭사되어 갔다. 이어 창! 하고 금속이 서로 맞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진동시키며 예리한 불꽃이 사방으로 번져갔다.
이제보니 신노삼의 가슴에는 검광이 뚫지 못할 두꺼운 철판이 덮여져 있었다. 비록 낭천의 검이 신노삼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지 못했지만 그는 충격을 받아 상 밑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낭천은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직감하고 몸을 날렸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낭천이 몸을 날리는 찰나에 거대한 그물이 천장에서부터 덮쳐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의 크기는 방의 크기와 같아 아무리 귀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도저히 그물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낭천은 여지없이 날아든 그물 속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 그물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물은 오동나무에서 짜난 기름을 칠한 아홉 겹의 줄로 짜여진 것이기 때문에 검을 아무리 빨리 휘두른다 해도 한두 가닥밖에 끊을 수 없었다.
낭천은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헌데 이상한 것은 낭천은 미리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조금의 놀라움도 없이 그저 깊은 비애만을 느낄 따름이었으며 한 마리의 맹수가 사냥꾼에 의해 생포된 심정을 맛보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았다. 발버둥을 쳐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두 개의 날렵한 인영이 뛰어들었는데, 수중엔 각각 기다란 백랍간(白蠟干)이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 백랍간을 내뻗어 낭천의 아홉 군데 혈도를 찍었다.
이 두 사람 중 한 명은 몸집이 깡마른 회포승인으로 안색이 몹시 노란 것이 마치 병자 같았으나 두 개의 가느다란 눈에서는 화염 같은 광채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다른 한 명도 역시 마른 체구에 몸이 작고 매부리코에다가 행동 또한 독수리와 같이 날렵했다.
그들은 바로 소림의 심감 대사와 백요생이었다. 이때, 신노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쓰러져 있던 상 밑에 무슨 비밀 통로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결국 낭천은 신노삼의 함정에 자칭해서 빠져든 것이 되고 말았다.
백요생은 득의에 찬 웃음을 짓고 음험하게 입을 열었다.
"난 네놈이 이곳으로 찾아들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네가 네 발로 직접 찾아들었으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어떠냐? 이제 굴복을 하는 것이....."
낭천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백요생은 냉소를 터뜨렸다.
"흥, 입을 열지 못하는군. 더 우물거리지 않고 굴복하는 것이 오히려 너의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흐흐흐....."
그러나 낭천은 역시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땅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백요생이 지루함을 느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초류빈의 가까운 친구이며 또 초류빈을 구하기 위해 매화도로 가장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자 낭천은 갑자기 미친 야수와 같이 절규를 토했다.
"내가 바로 매화도이다. 한데 가장은 무슨 말라죽을 가장이란 말이냐. 난 초류빈이란 사람을 알지도 못하며 더욱이 그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다."
낭천의 외침에 약간 기가 죽은 백요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심감대사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심감 사형, 이 자는 자신이 바로 매화도라고 하는데 사형께서는 그 말을 믿습니까?"
심감 대사는 선뜻 고개를 흔들었다.
"믿을 수 없네."
낭천은 내심의 불안을 떨치며 더욱더 냉랭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내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무슨 증거라도 있소?"
백요생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더니 낭천을 향해 음흉스레 말했다.
"매화도는 점혈수법의 고수, 넌 조금 전 우리가 너에게 찍은 혈도가 어떠한 혈도였는지 알아내면 우리는 네가 매화도라는 것을 믿어 주겠다. 그리고 또한 초류빈도 석방시킬 것을 아울러 약속한다.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이때, 낭천은 어금니를 꽉 물고 있었기 때문에 입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백요생은 긴 탄식을 뿜어내면서 말했다.
"초류빈과 절친한 친구로서 손색이 없군. 그 자를 위해서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다니...하나 네가 그렇게 아끼는 초류빈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가 의문이구나. 그저 그가 너를 대신해서 그 방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다행이지...흐흐흐"
술잔에 넘칠 듯 술이 가득 채워져 있는데...초류빈은 수중의 술잔을 들어올렸다. 한구석에는 매우 청순하고 연약해 보이는 승인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으며 나이는 비록 중년을 지났지만 보기엔 그다지 늙지 않았다. 이 사람이 바로 소림에서 내력이 가장 심후한 심수 대사일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을 했겠는가.
그는 비록 초류빈의 인질이 된 몸이지만 그의 표정에서 분노의 빛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묵묵히 한구석을 차지한 채 침통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중죄를 지은 죄수처럼 그저 멍청하게 시간만 보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심미 대사의 유체는 아직도 선상(禪床) 위에 남아 있었으며 누가 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의 굳어진 몸에 흰 천이 덮여져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이승과 저승을 갈라 놓는 막인 것이다.
초류빈은 갑자기 심수를 향해 잔을 높이 들어올리더니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소림사에도 이렇게 좋은 술이 있는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한 잔 하시는 것이....."
심수 대사는 고개를 흔들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초류빈은 싸늘한 코웃음을 날렸다.
"제가 영사형의 유체 앞에서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 대사께선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잠시 후, 심수 대사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 술은 매우 순하여 물과 같소. 그래서 선조들의 제사를 지낼 때도 술을 사용하고 있소. 그러므로 어디서 술을 마시건 간에 상관은 없소이다."
초류빈은 씁쓸히 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께선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범하시군요."
심수 대사의 얼굴에는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으나 심한 고통을 애써 참는 듯했다.
초류빈은 다시 한 잔의 술을 마시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이곳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영사형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허허허...만약 영사형께서 호견지배(虎犬之輩)라면 그가 죽었든 살았든 저는 절대로 그의 앞에서 술을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 허허....."
초류빈의 행동과 말투로 보아 이미 술에 취한 듯했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심수 대사는 탄식을 터뜨렸다. 그의 표정이 더욱 고통스럽게 변했다.
다만 그것이 죽은 사형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선 알 수가 없었다.
초류빈은 술잔에 가득 담긴 호박색의 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길게 장탄식을 터뜨렸다.
"흐흠...솔직하게 말해서 이번에 대사가 나를 구해줄 줄이야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난 당신을 구한 것이 아니오."
"십사 년 전에 내가 관직을 버리고 은퇴할 때 전 세상이 증오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상소문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그러한 결심을 하지 않았을 것이오."
"과거상소문을 낸 호운익(胡雲翼)은 이미 세상을 떠났소.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마시오."
"그렇습니다. 일단 불문에 들어서게 되면 속세를 떠나게 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시종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소. 당신은 그때 어사라는관직에 있었고 그 관직에 당연히 충실해야 했으니까....."
순간 심수 대사의 얼굴에 가벼운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당신이 탐화랑직을 버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불문에 들어왔소. 그것은 약이 많으면 실수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것을 자각시키기 위한 것이었소. 그런데...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초류빈은 그저 힘없이 웃었다.
"흐흐흐...과거의 풍류객인 철담어사(鐵擔御史)가 고승이 되어 있을 줄은 나 역시 예견치 못했소. 또한 생사가 판가름되는 순간에 나를 구해줄 줄은 더더욱 생각지 못했소."
심수 대사는 갑자기 감았던 눈을 부릅뜨고 벼락같이 소리쳤다.
"내 아까도 말했지만 난 당신을 구하지 않았소. 그리고 나는 공력이 부족해서 당신에 의해 이렇게 납치되었잖소. 당신은 어째서 그 말을 자꾸만 반복하는 거요. 당신은 절대로 나에게 감격하는 마음을 가져선 아니 되오."
초류빈은 빙긋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떨구었으나 여전히 그의 손은 술잔을 잡고 있었다. 마치 술에 만취된 사람이 푸념을 늘어놓듯이 그는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방안에서 나에게 눈짓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곳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며, 만약 당신이 조금이라도 저항했다면 나는 결코 당신을 이곳에 남겨두지 못했을 것이오."
초류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심수 대사는 무엇인가 급히 말하려고 입을 실룩거렸으나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초류빈은 다시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출가한 사람은 거짓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나보다 더 잘 알 것이오. 더구나 이곳엔 우리 두 사람 외엔 아무도 없잖소."
초류빈의 표정도 매우 괴로운 듯했다.
심수 대사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설사 내가 당신을 도와줄 의사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과거의 정 때문은 아니오."
순간, 초류빈은 갑자기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듯 고개를 쳐들더니 매우 엄숙하게 말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날 구한 것이오?"
심수 대사는 선뜻 대꾸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또 열려다가는 선뜻 말을 하지 못하곤 했다.
초류빈은 재촉하지 않고 서서히 술잔을 비웠다.
바로 이때, 창밖에서부터 갑자기 한 사람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초류빈, 창문을 좀 여시오. 할 말이 있소."
이것은 심감 대사의 음성이 분명했다. 초류빈은 의혹의 표정을 짓고 서서히 창가로 다가가 창틈을 통해 밖을 바라보다 그만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낭천이 심감 대사의 손에 걸려든 것을 보았다. 이것은 초류빈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백요생은 만면에 득의에 찬 미소를 띠고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초탐화, 당신은 이 사람을 알고 있겠지. 이 자는 당신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매화도라고 자인했는데 당신은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할 생각이오?"
심감 대사가 뒤이어 냉랭하게 소리쳤다.
"만약 이 자의 생명을 살리고 싶다면 순순히 포박을 받으시오."
초류빈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낭천은 중상을 입은 듯 땅에 엎드려 있어 그는 낭천의 얼굴을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심감 대사는 갑자기 낭천의 머리카락을 움켜잡더니 낭천의 얼굴과 창과 마주치게 하고는 고함을 질렀다.
"초류빈! 당신에게 두 시진의 여유를 주겠소. 해가 지기 전까지 나의 오사형(五師兄)을 무사히 내보내지 않으면 다시는 당신의 절친한 친구를 만나지 못할 것이오!"
이어 백요생이 입을 열었다.
"초탐화! 이 사람은 당신을 극진히 믿고 있는데 당신도 그를 배반해선 아니 될 것이오."
순간, 초류빈은 전신이 마비된 듯 창가에서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는 낭천이 마치 목을 매인 개처럼 질질 끌려가는 것과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고역을 치루었다는 것을 곧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강인한 낭천은 결코 신음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초류빈은 비틀거리며 제자리로 들어오더니 연속 석 잔의 술을 들이켰다.
"낭천! 나의 좋은 친구...나는 자네의 뜻을 알고 있네. 자네는 내가 자네를 구해주길 원치 않고 있어....."
심수 대사는 그런 초류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초류빈은 그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다시 석 잔의 술을 연이어 마시더니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순순히 포박을 받을 것이오. 자, 나를 결박해서 데리고 나가시오."
"이곳을 나가 일단 그들의 손에 잡히면 오직 죽음만이 있을 것이오."
"흥! 그건 나도 알고 있소."
"당신이 나가 죽는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당신의 친구를 살려주지는 않을 것이오."
"그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소."
"그런데 어째서 나가겠다는 것이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가야 하오!"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사람은 평생을 사는 동안 때때로 몇 가지 어리석은 일을 하기 마련이오. 만약에 모든 사람이 총명한 일만 한다면 인생은 더욱 재미없게 변할 것이오."
심수 대사는 고개를 떨군 채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렇소. 사내대장부라면 일단 결심한 일은 반드시 행해야 하오. 당신이 그가 죽을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를 고집하는 것은 단지 당신이 꼭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오."
초류빈은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은 나의 지기라고 할 수가 있겠구려."
"의리를 위해서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은 오직 초류빈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일 것이오."
초류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몸을 홱 돌리며 소리쳤다.
"내가 먼저 나가겠소. 안녕히 계시오."
심수 대사가 갑자기 소리쳤다.
"잠깐만!"
이렇게 소리친 그는 매우 커다란 결심을 내린 듯이 입을 굳게 다물며 초류빈을 똑바로 응시했다.
잠시 후, 기다리다 못한 초류빈이 얼굴을 찌푸리며 다그쳤다.
"무엇이오?"
하지만 심수 대사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초류빈이 크게 소리쳤다.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소?"
"내가 당신을 구해준 이유에 대해서 얘기하겠소."
초류빈은 심수 대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심수 대사는 침중한 표정으로 서서히 입을 열었다.
"이것은 소림사의 비밀이며 매우 중대한 문제요. 그래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었소."
초류빈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심수 대사의 말이 계속 되기를 기다렸다.
"소림사엔 장경이 풍부하여 천하에서 으뜸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오. 그 중엔 비단 적지 않은 불문중전(佛門重典)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림의 부전지비(不傳之秘)들도 있소."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소."
"지난 백 년 동안 수많은 자들이 장경을 훔치기 위해 소림사로 들어왔소. 하지만 누구 하나 소원을 성사시키고 무사히 빠져나간 자는 없었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아스라히 멀어진 옛 일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 후, 심수 대사가 말을 이었다.
"출가한 사람은 살생을 금기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장경은 소림의 뿌리와 같은 것으로써 누구든지 그 장경에 대해 흑심을 품을 땐 소림 문하는 결코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오."
초류빈은 매우 의아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근래에 와서도 그렇게 흑심을 품는 자들이 있단 말이오?"
"당신은 외인이라 물론 내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오. 사실은 요 이 년 사이에 장경은 일곱 번씩이나 겁탈당했소. 그중 하나가 내평심경이고 그 외의 나머지는 모두가 강호에 오래 전부터 절전(絶傳)된 무림비급이오."
그때서야 초류빈의 안색이 급변했다. 이 일은 강호 전체와도 관련되는 일이 아닌가!
"그것을 훔쳐간 자가 누구요?"
다그치는 질문에 심수 대사는 침통하게 말을 이었다.
"가장 이상한 것은 맨 나중 일곱 번째의 도난사건이오. 그땐 누구도 어떤 기미를 느끼지 못했고 일이 끝난 후에도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했소. 한마디로 말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그것을 잃은 것이오.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 세 번째의 도난사건이 일어남에 따라 장경각의 경비는 최고조에 달했소. 하지만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났소. 이로 인해 장경각을 담당하고 계시던 삼사형께선 자진해서 관직에서 물러나 지금까지에 이르고 계신 거요."
그때 돌연 초류빈이 심수 대사의 말을 막았다.
"그런데 어찌해서 강호에 조금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오?"
"이 사건은 소림의 체면에 커다란 손실이 있으므로 장문 사형께선 비밀을 반드시 지키라는 엄명을 내리셨소. 지금까지 이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을 합해서 아홉 명밖에 되지 않소."
"대사를 위시한 일곱 명의 수석 대사 이외에 또 누가 이 일을 알고 있소?"
"백요생!"
"그는 감초같이 어디에서나 빠지지 않는 인물이군요."
"삼사형께선 우리 사형들 중에서 조심성이 가장 많은 사람이었소. 한데 삼사형께서 물러나신 후에 장경각은 나와 이사형께서 책임을 맡았지만 지금까지 겨우 보름에 지나지 못하오."
심수 대사의 말이 못마땅했는지 초류빈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직이 말을 건넸다.
"심미 대사가 그러한 중책을 맡았으면서도 어찌 이번에 소림사를 떠나 외출을 했소?"
"이사형께선 이 일이 매화도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어 명확히 조사하기 위해 장경각을 떠나신 거요. 그런데...영원히 떠나실 줄이야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소?"
심수 대사는 이윽고 목이 메어 말을 그치고 심미 대사의 유체를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초류빈도 암암리에 탄식을 터뜨릴 때 심수 대사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다가 곧 입을 열었다.
"이사형께서 장경각을 떠나시기 전에 만일에 대비해 가장 중요한 삼부(三部)의 장경을 꺼내 각각 은밀한 곳에 숨겨두었소. 이 일에 대해선 장문 사형과 나 이외에 아는 사람은 없소."
초류빈은 방안을 한눈으로 훑어보았다.
"그 중의 한 부가 바로 이 방 어디엔가 있을 것이 아니오?"
"그렇소."
초류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심수 대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자 심수 대사가 입을 열었다.
"이번의 사건들이 하도 이상해서 이사형과 저는 이 일을 비밀리에 의논한 끝에 어쩌면 외인이 아닌 내적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얻었소."
초류빈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내적?"
심수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심심히 탄식을 내뿜었다.
"우린 비록 그러한 의심을 가졌지만 감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소. 그것은 장경각을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일곱 명의 사형제뿐이며 나머지 제자들은 장경각엔 얼씬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오."
이때 초류빈의 눈빛은 유난히 영롱했다.
"그렇다면 장경을 훔친 자가 바로 일곱 사형제 중의 한 사람이겠군요!"
심수 대사는 초류빈의 말을 듣고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져 갔다.
"우리 동문 사형제는 적어도 십 년 이상을 동고동락해 왔소. 사형제 중의 어느 누구를 의심한다는 것은 매우 가당찮은 일이오. 그래서 우리는 각별히 조심해서 처리해야만 하오. 다만....."
초류빈이 의혹스런 눈길로 심수 대사를 바라보자 그는 슬픔이 가득한 눈길로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 처량한 음성을 토해냈다.
"다만 이사형께서 본사(本寺)를 떠나시기 전에 그는 우리 일곱 사람 중에 장경을 훔쳐 간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슬쩍 일러 두었소."
"그게 누굽니까?"
"이사형께선 그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직접 말하진 않으셨습니다. 이사형께선 그저 장경을 훔쳐 간 사람이 진짜 매화도이기를 원했을 뿐 사문에 치욕이 되기를 원치는 않으셨습니다."
심수 대사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초류빈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심수 대사의 심정은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장경을 훔쳐 간 사람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커다란 화를 초래할 따름입니다."
"이사형께서도 그 점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이사형께서 자신에게 어떠한 차질이 생기면 그분의 독경잡기를 꺼내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의 마지막 장에 의심이 가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잡기가 지금 어디에 있소?"
"본시 장경과 함께 있었으나 지금은 이곳에 있소."
심수 대사는 말을 함과 동시에 품속에서 노란색의 비단에 곱게 싸인 한 권의 책자를 꺼내 초류빈에게 건네었다.
초류빈은 얼른 그것을 받아 심수 대사의 말대로 마지막 장을 펼쳤으나 거기엔 장경이 도난당한 일에 대해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초류빈은 매우 실망한 눈초리로 심수 대사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 책의 마지막 장이 누군가에 의해 찢겨진 것이 아닙니까?"
"비단 마지막 장이 찢겨졌을 뿐만 아니라 그 장경도 백지화가 되었소."
"그렇다면 장경을 훔친 사람도 심미 대사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닙니까?"
"그런 셈이죠."
초류빈은 자신이 묻는 말에 대꾸만 하는 심수 대사가 매우 못마땅했다. 매우 답답한 초류빈은 심수 대사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하지만 장경을 감춘 곳을 아는 사람은 대사와 심호 대사 단 두 사람뿐이 아니오?"
"그렇소."
초류빈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그렇다면 대사께선 심호 대사를 의심하고....."
초류빈은 심수 대사의 표정을 살폈으나 그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장경을 훔쳐 간 사람이 이사형께서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물론 이사형의 행동에 대해서도 각별하게 관심을 가졌을 것이오. 그러면 이사형께서 장경을 어디에다 숨기실 때 훔쳐 보았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오. 다만....."
"다만 무엇입니까?"
심수 대사는 초류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다만 이사형께서 돌아오셨을 때 돌아가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소. 한데 갑자기 세상을 등지신 일이 의심스러울 뿐이오."
심수 대사는 갑자기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비록 독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진 못했지만 근년에 와서는 독에 대한 책자를 조금 보았소. 이사형께서 돌아오셨을 때 저는 이미 그분이 독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소. 하지만 절대로 죽을 만큼 위중한 것은 아니었소."
초류빈은 심수 대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장경을 훔쳐 간 자는 이사형께서 눈치를 채신 것을 알자 입을 막기 위해 죽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초류빈은 방안의 공기가 숨쉬기조차 곤란할 정도로 응결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방안을 한 바퀴 돌더니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심미 대사께서 돌아오신 후로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은 몇 사람입니까?"
"대사형, 사사형, 육사제 그리고 칠사제가 이 방에 있었소 "
"대사의 뜻은 그들 모두가 손을 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오?"
심수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탄식을 터뜨렸다.
"이것은 본문의 커다란 불행입니다. 나 역시 당신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소. 하지만 나는 당신이 결코 친구를 배반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소. 그래서 당신이....."
"대사께선 나더러 흉수를 찾아내라는 것이오?"
심수 대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류빈은 심수 대사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한마디 한마디 똑똑하게 물었다.
"그 흉수가 만약 심호 대사라면 어떻게 하시겠소?"
심수 대사는 그 자리에 굳어진 듯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마에 식은땀을 비오듯 흘렸다.
초류빈은 바늘끝 갈은 시선으로 심수 대사를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설사 소림의 모든 사람이 다 흉수가 심호 대사라고 해도 누구 하나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오. 안 그렇소?"
심수 대사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설사 말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해도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강호의 모든 사람들은 소림사를 명문정종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한 소림사의 장문인이 살인자라면 소림사의 수백 년 명성이 하루 아침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설사 내가 심호 대사가 흉수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다고 해도 대사 자신은 아마 나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오. 소림사의 명성을 위해서라도 대사께선 아마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려 할 것이오."
심수 대사는 한숨을 내뿜었다.
"그렇소. 소림사의 명성을 위해서는 나 역시 그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것이오. 난 비록 본 소림사의 수백 년 명예가 손상되는 일에 대해선 어쩔 수 없더라도 당신이 심미 대사를 죽인 흉수를 찾아만 준다면 나는 이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심미 대사의 원한을 갚고 반드시 흑백을 가려내야 하오."
"출가한 사람으로서 어찌 그런 생각을 하오! 보아하니 대사의 육안이 아직 잘 다듬어지지 않은 것 같구려."
심수 대사는 갑자기 합장을 하면서 말을 꺼냈다.
"부처님께서도 화가 나시면 사나운 사자가 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시다면 안심을 하겠소. 혹시 흉수가 누구라는 것을 이미 아시는 것은 아니오?"
"나는 모르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소."
"그런 말이 어디에 있소? 물론 흉수 자신은 알 것이 아니오?"
"흉수 자신 말고도 또 한 사람이 알고 있소. 그 사람은 바로 이 방에 있소."
"그게 누구요?"
초류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윽고 심미 대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바로 심미 대사요."
그러자 심수 대사의 안색이 약간 변하며 이내 암담해졌다.
"하지만 이사형께선 이제 아무 말도 하시지 못하게 된 것이 퍽이나 아쉽구려."
초류빈은 빙긋 미소지었다.
"죽은 사람도 때때로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갑자기 심미 대사의 시체를 덮어 놓은 흰 천을 벗겼다. 심미 대사의 혈색 없는 얼굴은 이때 회색으로 변하여 파리해 보였다.
초류빈은 고개를 돌려 심수 대사의 표정을 살피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사께선 극락동자의 독에 의해 독살된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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