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24 소이비도 제2권 공포의 장원莊園
공포의 장원(莊園)
여자가 여자를 강간하다니...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초류빈은 헛기침을 하고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매화도가 만약 진짜 여인이라면 남자를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네. 그러면 그 남자는 그녀를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할 수가 있고 필요하다면 그녀는 다시 그 남자를 제거할 수도 있지."
낭천은 아무 표정없이 대답했다.
"당신은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시는군요."
초류빈은 어깨를 으쓱 추스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많이 생각하는 것이 생각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일세."
그러나 낭천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쩌면...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잘한 것이 잘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초류빈은 빙긋 미소를 던졌다.
"이렇게 계속 나가다가는 얘기가 끝날 날이 없을 것 같네."
낭천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물었다.
"매화도는 삼십 년 전에 나타난 적이 있다는데 그렇다면 지금쯤 나이가 최소한 오십 살은 되었겠군요."
초류빈은 부정적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삼십 년 전에 나타난 매화도가 바로 지금의 매화도라고 단정할 수는 없네. 어쩌면 사제지간이거나 부녀지간일 수도 있을 걸세."
낭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서서히 입을 열었다.
"백요생도 절대 강경을 훔친 주모자가 아닐세. 그는 단지 심감으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모험을 하게 할 방법이 전혀 없었을 뿐이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심감은 소림사에 들어오기 전에 강호를 떠돌아다닌 적이 있어서 만약 재물을 노린다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네. 그래서 어떤 유혹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일세."
낭천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초류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초류빈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잠시 후 다시 흘러나왔다.
"백요생은 비록 공력이 고강하기는 하지만 일단 소림사에 들어가면 공력을 사용할 여지가 없네. 그래서 심감도 그에게 위협을 당할 리는 더더욱 없었네."
낭천은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똑바로 뜨고 물었다.
"어쩌면 백요생에게 어떤 약점이 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그 약점이라는 게 뭐지?"
이렇게 반문한 초류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소림사에 들어오기 전 단악의 모든 행위는 심감과는 아무 관련이 없네. 그것은 출가를 한 사람들이 인과(因果)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네. 이런 것을 잘 알고 있는 백요생이 심감이 출가하기 전에 행했던 행위로 심감을 위협할 수는 없네. 그리고 심감도 일단 소림사에 들어온 후로는 다시는 나쁜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네."
낭천은 다그치듯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초류빈은 신념이 가득찬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만약 그가 나쁜 일을 할 생각이 있다면 소림사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을 것일세. 소림사의 규율이 엄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그가 어찌 감히 그런 모험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초류빈이 말꼬리를 흐리자 낭천은 못내 궁금한 듯이 급히 물어왔다.
"그래서 무엇입니까?"
초류빈은 단정적으로 못박아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 결코 명리(名利) 때문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일세."
낭천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 검미를 찡그렸다.
"명리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면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단 말입니까?"
초류빈은 가볍게 탄식을 하면서 대답했다.
"그 같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절세의 미모를 지닌 여인일 뿐일세."
낭천의 얼굴에 아연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럼 매화도?"
초류빈은 서슴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매화도 같은 여인만이 그로 하여금 소림의 반역자가 되는 것을 불사하게 할 수 있네. 또 매화도 같은 여자만이 감히 소림의 장경을 훔칠 수 있네."
낭천은 흥미로운 듯 눈을 반짝 빛냈다.
"매화도가 절세의 미인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어쩌면 내 짐작이 틀렸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내 짐작이 잘못된 것이기를 바라고 있네."
낭천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다시 흥운장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초류빈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에게 그곳을 제외하고 갈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밤!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오직 작은 누각 위에 희미한 등잔불만이 켜져 어른거리고 있었다.
초류빈은 넋을 잃은 채 도깨비불 같은 등불을 한참 올려다보더니 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으며 심하게 기침을 했다. 순간, 손수건에 시뻘건 선혈이 묻어 나왔다.
초류빈은 손수건을 다시 품속으로 집어 넣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갑자기 들어가고 싶지 않아졌네."
낭천은 그의 웃음이 곰의 쓸개를 씹는 것처럼 쓰디쓰다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까지 오셨으면서 왜 들어가지 않으려 하십니까?"
"내가 하는 일에는 이유가 없는 것들이 매우 많네. 무엇 때문인지 나 자신도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라네."
어둠 속에서 보이는 낭천의 눈은 마치 예리한 칼날과도 같았으며 음성도 칼날처럼 예리했다.
"호유성이 그렇게도 미안해하고 있는데 당신은 그를 만나지 않을 생각인가요?"
"그가 나에게 미안해 할 것은 없네. 자기의 아내나 자식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일을 했어도 용서를 받을 수가 있네."
초류빈은 억양없이 대답하며 낭천의 어깨를 툭 쳤다.
낭천은 한참 동안 초류빈을 바라보더니 서서히 고개를 숙이며 말을 꺼냈다.
"당신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군요. 그리고 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친구입니다."
초류빈은 소리를 죽여 쿡쿡 웃었다.
"자네는 물론 나를 잊지 못할 것이네.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될 테니까."
"하지만...지금은....."
낭천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초류빈이 얼른 말을 가로챘다.
"나는 지금 자네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러니 어서 가 보게."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싸늘한 바람이 사람을 오싹 떨게 할 정도로 매섭게 불어왔다. 멀리서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소리와도 같았다.
말없는 가운데 두 사람의 맑은 눈에 안개가 끼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달은 물론 별도 없었고 다만 안개만이 그들의 온몸과 주위를 완전히 덮고 있었다.
초류빈은 갑자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안개가 끼는 것을 보니 내일 날씨는 매우 좋겠군."
그제야 낭천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목에 무엇이 꽉 막힌 것처럼 지극히 어색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홱 몸을 돌려 떠나갔다.
초류빈은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몸과 생명이 일순간이나마 어둠과 하나로 융합되는 것 같았다.
한편, 낭천은 초류빈과 헤어져 담장을 넘어서야 냉향소축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누르스름하게 퇴색한 창호지에 하나의 섬세한 인영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순간, 낭천의 간이 콩알만큼이나 졸아들었다. 방안의 사람은 책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낭천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그의 시야에 한시도 잊지 않고 생각해 왔던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문을 연 그는 문 앞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문이 열리자 발딱 일어나 놀라움과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었군요."
"그렇소, 나요."
낭천은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멀리서 들리는 남의 목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설소하는 요염한 몸매를 보기 좋게 흔들며 달려와 낭천의 가슴을 치며 원망스러운 것처럼 아양을 떨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법이 어디 있어요? 하마터면 놀라 기절할 뻔했잖아요."
이때 낭천의 표정은 지극히 차분하게 변해 있었다.
"당신은 죽은 줄만 알았던 내가 나타나서 놀랐소?"
설소하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안색마저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서 들어오세요. 바람이 차니까."
그러고는 낭천의 차가운 손을 잡고 안으로 끌어들였다. 설소하의 손은 따뜻하면서도 매끄러웠다. 어떤 상처라 해도 그녀의 손에 만져진다면 나을 것만 같은 그런 것이었으나 낭천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설소하는 의외라는 듯이 두 눈을 깜박거리더니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화가 나셨나요? 무엇 때문에 화가 나셨죠? 제게 얘기해 보세요. 제가 대신 그 화를 풀어드릴 게요."
그러고는 살포시 낭천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몸은 손보다 더 부드럽고 따스했으며 어떤 남자도 취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묘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뭉클한 감촉으로 낭천의 가슴에 와닿는 젖가슴이 그토록 달콤한 전율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낭천은 손을 들어 거칠게 그녀를 밀어냈다.
설소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다가 그 자리에 쓰러진 채 넋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제가 당신에게 뭘 잘못했지요? 무엇 때문에 저를 이렇게 대하는 거죠?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서 얘기해 보세요."
낭천은 돌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지금 설소하가 보고 있던 책이 바로 소림사가 잃어버린 장경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설소하는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미인의 눈물은 처절하리만큼 아름답고 가련하게 보였다.
"그날 당신이 떠난 후 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당신을 기다렸어요. 당신은 내가 얼마나 당신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영원히 알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돌아온 당신이 이렇게 변했으니 저는....."
그녀의 애소에도 불구하고 낭천은 마치 그녀를 처음 보는 것처럼 멍청하게 바라보다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신노삼의 방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어째서 나를 기다렸다는 것이오?"
설소하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고는 더듬거렸다.
"당신...당신 그게 무슨 뜻이에요?"
"백요생과 단악이 소림사의 장경을 당신에게 건네줄 때 당신은 그들로 하여금 신노삼의 방에다 무서운 함정을 설치하도록 했소. 당신은 나를 해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초류빈까지도 죽이려 했소."
낭천의 목소리가 살얼음보다 차갑게 흘러나오자, 설소하는 피가 맺히도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정말 제가 당신을 해쳤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물론이오. 내가 신노삼을 찾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오직 당신밖에 없었으니까."
"으흐흐흑!"
설소하는 참을 수 없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지만...그렇지만 제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해치려 했겠어요? 무엇 때문에....."
"그것은 당신이 바로 매화도이기 때문이오."
"네?"
설소하는 마치 벼락에 놀란 토끼처럼 발딱 뛰쳐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제가 매화도라고요?"
낭천은 확신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이 바로 매화도요."
설소하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입을 딱 벌렸다.
"매화도는 이미 당신에게 살해되었는데 당신은....."
낭천은 그녀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가로챘다.
"내가 죽인 사람은 당신이 속임수를 쓴 희생물에 지나지 않소. 타인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단 말이오."
낭천은 차츰 격해오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금사갑이 초류빈의 손에 들어갔고 또 그가 절대 당신에게 속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소. 그래서 자신의 입장이 매우 위태로워진 것을 발견하자 그날 밤 당신은 일부러 초류빈을 당신이 있는 곳으로 오게 한 것이오."
설소하의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그날 밤 저는 확실히 초류빈과 약속을 했어요. 그 때는 아직 당신을 몰랐을 때예요."
낭천은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고용한 그 꼭두각시로 하여금 당신을 납치해 가도록 한 것은 바로 초류빈으로 하여금 당신을 구하고 또 초류빈으로 하여금 그 꼭두각시를 살해하기 위함인데 그 이유가 도대체 뭐요? 즉 그건 세상 사람들이 매화도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신도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었소. 당신은 초류빈을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충실한 앞잡이까지 죽였소."
이 무렵 설소하는 눈물을 거두고 도리어 침착해지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낭천을 마주보았다.
"계속 얘기해 보세요."
낭천은 주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초류빈에게 의외가 생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고 나라는 사람이 당신을 구해낼 줄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소."
설소하의 눈빛 이 반짝 빛났다.
"제가 당신을 구해준 적이 있다는 것을 잊었나요?"
"잊지 않았소."
"제가 만약 매화도라면 무엇 때문에 당신을 구했겠어요?"
"그건 그 당시 일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당신은 나까지 이용하려 했던 것이오. 당신이 여기에다 나를 숨겨두었을 때 아무도 수색하러 오지 않자 나는 그때부터 의심했던 것이오."
설소하는 암울한 얼굴로 낭천의 냉혹한 얼굴을 주시했다.
"당신은 호유성도 나와 같은 공모자라고 생각하나요?"
낭천은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물론 당신의 음모를 모르고 있었소. 단지 당신의 이용을 받고만 있었을 뿐이오. 그리고 호유성도 초류빈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한 짓은 모두가 그 자신을 위한 것에 불과하오."
설소하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이 말은 모두 초류빈이 당신에게 해준 건가요?"
낭천의 얼굴이 한차례 실룩거렸다.
"당신은 천하의 남자가 다 바보들이라 생각하오? 당신이 두려워하는 남자는 초류빈 한 사람뿐이오. 그래서 당신은 온갖 방법을 다해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겠소?"
낭천의 음성은 갈수록 격동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놀라운 자제력으로 이를 악문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마음이 검을 뿐만 아니라 파렴치한 욕심쟁이요. 소림사의 장경까지도 갖고 싶어하며 출가한 사람까지 괴롭히다니, 당신은....."
설소하의 눈에서 다시 구슬 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는 당신을 잘못 보았어요."
낭천은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바라보며 분명하게 잘라 말했다."
"하지만 나는 결코 당신을 잘못 보지 않았소."
설소하는 하소연하듯 낭천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만약 제가 이 장경을 백요생이나 단악이 저에게 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믿겠어요?"
"당신이 어떤 말을 하든 나는 믿지 않을 것이오."
"이제야 당신의 뜻을 알겠군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서서히 낭천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걸음은 매우 느렸다. 그러나 무슨 결심을 굳힌 듯 한걸음 한걸음 힘이 들어가 있었고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등잔불이 그녀의 백옥같이 희고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고 흑백이 분명한 두 눈동자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녀는 한참 멍하니 낭천을 바라보다가 우울하게 입을 열어 물었다.
"당신은 저를 죽이러 왔지요? 그렇지요?"
낭천은 두 주먹을 불끈 헌 채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갑자기 자기의 옷을 찢어 눈같이 희고도 풍만한 젖가슴을 드러내고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야무지게 말했다.
"당신의 허리에 검이 있으니 저를 죽이세요. 저는 당신의 검이 제 가슴을 찔러 주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녀의 가슴, 티 하나 없이 곱고 부드러운 살결, 연분홍빛 젖꼭지, 그것은 아직 아이를 낳아 보지 않은 순결한 처녀의 것과 같았다. 뇌쇄적인 굴곡이 낭천의 목에서 갈증을 일으키게 했다.
낭천의 손이 서서히 검으로 이동되어 갔다.
그러자 설소하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달콤하고도 안정된 어조로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었다.
"어서 죽여 주세요. 당신 손에 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저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가 있어요."
그녀의 가슴이 심하게 떨려 큼직한 젖무덤이 묘한 율동으로 출렁거리고 긴 속눈썹에 덮인 두 눈에는 이슬처럼 맑고 깨끗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낭천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무정한 검은 날카로우면서도 차가웠다.
낭천은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시인하는 것이오?"
설소하는 다시 눈을 뜨고 낭천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그녀의 두 눈에는 처량함과 절망 그리고 사랑과 한이 한꺼번에 뒤범벅 되어 있었다.
"당신은 제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에요. 그런 당신이 저를 믿지 않는다면 제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슨 보람이 있겠어요?"
낭천은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했고 손등에는 파란 힘줄이 나타났다.
설소하는 낭천을 바라보며 애잔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매화도이며 또 제가 그렇게 악독한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어서 저를 죽이세요. 저는...절대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어요."
일순 낭천의 검을 잡고 있던 손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무정한 검!
검은 원래가 무정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어떠한가? 인간으로서 어찌 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펄럭이는 옷자락에 불이 꺼지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보는 설소하의 얼굴은 더욱 뇌쇄적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호흡소리는 감미로운 속삭임 같았고 또 사람을 흥분시키는 신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세상에 이런 감정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지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강한 감정을 안겨다 주었고 그 감정으로 인해 얼마 동안이나마 자신도 인간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했던 낭천이다. 그런 낭천이 어찌 그녀의 심장을 찌를 수 있을까? 검은 무정하다고 하지만 사람으로서, 아니 청년으로서 어찌 정이 없을 수 있으랴?
가을, 낙엽을 우수수 떨어뜨리고 나무는 동면으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길가의 맨 끝으로 거대한 장원 하나가 있었다.
이 거대한 장원도 가을 낙엽처럼 아무렇게나 내버려진 듯 매우 외롭고 고독해 보였다.
두 개의 큼직한 문은 일 년 내내 열려본 적이 없는 것처럼 붉은 칠도 퇴색하거나 떨어져나가 있었다. 커다란 문고리에도 녹이 슬어 있었다.
높다란 담장 안에서는 오래 전부터 사람의 소리라고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늦은 여름이나 초가을에는 이름모를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이 거대한 장원을 더욱 적막에 싸이게 한다.
이 장원도 전성기를 맞은 때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과거 일곱 명의 진사와 세 명의 탐화랑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이 중에는 공력이 경이적이며 가히 천하무쌍인 이름난 인물도 있었다. 십여 년 전 이 장원의 주인이 바뀌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무림을 진동시킨 많은 사건들이 벌어졌으며 이와 비례해서 수많은 강호 풍운아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후 이 장원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대(二代) 주인도 갑자기 종적을 감추어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자, 강호에는 이 장원이 흉가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고승(高僧)이건 기인이건 신분의 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이곳에 오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공포의 장원으로 변한 이곳은 밤이나 낮이나 사람이 감히 접근을 하지 못해 결국 찬란했던 과거의 빛을 잃고 버려진 것이다.
그러나 다만 밤이 되면 뒤뜰에 있는 누각 위에 시종 희미한 등잔불이 켜졌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 누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이며 또 무엇 때문에 혼자 이 공포스러운 장원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담장 뒤쪽으로는 자그마한 골목길이 하나 있었는데 바람이 불 때면 먼지가 눈앞을 가리고, 비가 내리면 진흙탕이 되어 걷기조차 어려웠다.
높다란 담장에 가리워져 이 골목에는 한 번도 햇빛이 든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지저분하고 음산한 곳이라 해도 사람이 산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이 골목에는 조그마한 주막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앞쪽은 싸구려 음식을 파는 식탁이 몇 개 있었고 뒤쪽으로는 성냥갑만한 객실 서너 개가 있는 주막의 주인은 불구자인 손꼽추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골목에 귀한 손님이 찾아들 리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천한 사람들을 손님으로 삼아 싼 가격으로 팔며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두더지 같은 천한 생활을 하고 있을망정 밖으로 나가 남의 비웃음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억만금의 재산이 있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손꼽추는 깨닫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람은 고독하다.
그는 때때로 집 앞에 앉아 장원 안의 누각 위에 켜져 있는 등잔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가 일쑤였다.
'저 누각 위에 있는 사람이 설사 의식주 모든 것이 풍족하다고 해도 그의 하루하루는 나보다 더 고통스럽고 적막할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자신에 대한 비웃음이기도 했고 또 자신에 대한 일종의 자위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 년 전 황혼 무렵이었을까. 이곳 주루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그렇다고 이 손님이 입고 있던 옷은 무슨 화려한 옷이 아니고 또 남들처럼 특별하게 생기지도 않았다.
이 손님은 몸집이 매우 크고 생김새는 지극히 준수했다. 그러나 보기는 매우 초췌했고 병자와 같은 모습에 가끔 허리를 숙인 채 심하게 기침을 하곤 했다.
그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객잔의 주인 손꼽추는 이 사람을 본 순간 다른 사람과는 차이가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꼽추가 불구자라 해서 비웃지도 않았고 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또 가련하다거나 동정하는 빛도 나타내지 않았다. 가여워한다거나 동정하는 것은 때때로 비웃음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손꼽추에게 안겨다 주었다.
이 손님은 술이나 음식을 가리지 않고 좋다 나쁘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며 꼭 해야 할 말 이외엔 마치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가장 이상한 것은 이 손님이 객잔에 들어온 이후로 한 번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손님은 처음 객잔을 찾아와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콩자반과 쇠고기 각각 한 접시와 만두 두 개, 그리고 일곱 주전자의 술을 시켰다. 일곱 주전자를 다 마신 그는 또 일곱 주전자의 술을 청해 그것도 말끔히 비웠다.
그런 후 일 년이 지났으나 그는 똑같은 생활을 해왔다.
그는 계속 기침을 하면서도 계속 술을 마셨고 일곱 주전자의 술을 다 마시면 다시 일곱 주전자의 술을 요구하여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쉬고 다음날 저녁 무렵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곤 한다.
손꼽추도 술을 매우 즐기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이 손님의 주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열네 주전자의 술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 사람은 생전토록 보지 못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아마 이런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며 후에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땐 하도 궁금하여 이 사람의 성명과 내력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웬지 말을 걸기가 어려워 지금까지 참아왔다.
또 물어본다 해도 대답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꼽추도 말이 없는 편에 드는 사람이다. 손님이 자기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이상 그 역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비가 십여 일 동안 계속 쏟아졌다. 날씨가 유난히 추워 손꼽추는 밤에 손님을 돌보기 위해 뒤에 있는 객실로 갔다.
그는 그 손님이 기거하고 있는 방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이상한 손님은 방바닥에 엎드린 채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 무서우리만큼 시뻘겋게 되어서 마치 얼굴에다 피를 바른 것 같았다.
그것을 본 손꼽추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조심스럽게 타일렀다.
"이렇게 쉬지 않고 술을 마시면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오래 살지 못합니다."
손님은 담담하게 웃으며 반문을 하는 것이었다.
"주인장께선 내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오?"
손꼽추는 일순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다정한 친구처럼 변해 버렸다. 손님이 없을 때면 두 사람은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손꼽추는 이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이 괴상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손님의 이름과 내력에 대해서만은 묻지 않았다.
이렇게 또 며칠이 지나자 손꼽추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우린 친구인데 최소한 친구의 이름은 알아둬야 할 것이 아니겠소?"
그 손님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껄껄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하하하...나는 술주정뱅이에 불과한 인간인데 어째서 주정뱅이라 부르지 않소?"
상대의 대답이 이쯤 되자 손꼽추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손꼽추는 이 신비스러운 손님에겐 어떤 절망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남은 목숨을 술에 담아 마셔 버리고자 함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나 이 신비의 손님은 술 외에도 매우 이상한 버릇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각을 하는 것이었으며 이 주정뱅이의 손에는 항상 예리한 칼이 들려져 있었는데 그 칼로 시종일관 조각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손꼽추는 그가 무엇을 조각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주정뱅이가 그 조각을 한 번도 완성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람은 너무나 괴상하고 신비스러워 보통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꼽추는 이 손님이 영원히 이곳에 기거하면서 같이 있어 주기를 갈망했다.
그날 아침, 손꼽추는 자리에서 일어나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는 것을 깨닫고 두툼한 솜옷을 꺼내 입고서야 밖으로 나갔다.
이 날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장사도 매우 한산했다. 몇 명의 마부들이 왔다 가자 손꼽추는 의자를 끌어다가 문 입구에 앉아 콩을 갈았다. 이때 골목 끝에서부터 두 필의 말이 달려왔다.
이 골목은 말이 다닌 적이 거의 없어 손꼽추는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았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노란색 장삼을 입고 있었다. 앞장선 사람은 짙은 눈썹에 큰 눈을 지니고 있었고 뒤의 사람은 매부리코를 한 사나이였다.
두 사람은 턱 밑에 염소 같은 수염을 길렀는데 나이는 삼십 세 정도였으며 생김새는 별로 이상한 것이 없지만 노란색 장삼이 매우 선명했다. 그들은 손꼽추를 보지 못하고 마상에 앉은 채로 공포의 장원을 담장 너머로 살펴보는 것이었다.
손꼽추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다시 콩을 갈기 시작했다.
얼마 후, 말발굽소리가 다시 들리는가 싶더니 두 사람은 객잔 앞에서 말을 내렸다.
손꼽추는 성미가 매우 괴상하기는 하지만 결코 자기가 장사꾼이라는 신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자기 집 앞에서 내리는 것을 보자 콩을 가는 것을 중지하고 공손히 물었다.
"두 분께선 뭘 드시려는 것입니까?"
짙은 눈썹에 눈이 큰 황삼인이 말을 받았다.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몇 가지 물어보려는 것뿐이오."
사나이의 말을 들은 손꼽추는 흥미가 없다는 듯이 다시 콩을 갈기 시작했다.
매부리코를 한 황삼인이 갑자기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우리는 당신의 말(言)을 사려는 것이오. 한마디 해 주는데 은자 하나씩을 드리겠소."
손꼽추는 구미가 당기는 듯 다시 손을 멈추고 쾌히 승낙했다.
"좋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그는 즉시 손가락을 내보였다. 눈이 큰 황삼인이 嬋퓬恬?금치 못하면서 물었다.
"그것도 한마디에 해당하는 것이오?"
"물론이오."
꼽추는 대답과 함께 다시 손가락 하나를 폈다.
매부리코의 황삼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정색을 하고 물었다.
"당신은 이곳에서 얼마나 살았소?"
"이십 년은 살았을 것입니다."
"이 장원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소?"
"초가의 장원이오."
"나중의 주인은 누구였소?"
"호유성이라는 사람이었소."
"당신은 그를 본 적이 있소?"
"없소이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손꼽추는 지극히 짤막하게 응수하고 있었다.
"장원을 떠났습니다."
"언제 떠났소?"
"일 년쯤 되었소."
"그 후론 돌아오지 않았소?"
"돌아오지 않았소."
매부리코의 장한이 미간을 슬쩍 찡그리며 다그쳤다.
"당신은 그를 보지도 못했다면서 어찌 그렇게 상세하게 알고 있소?"
손꼽추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저 장원의 하인들이 가끔 이곳에 와서 술을 팔아 주기 때문에 알고 있소."
매부리코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물었다.
"최근 낯선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무엇을 물어본 적이 없소?"
"없소이다. 만약 있었다면 나는 벌써 부자가 되어 이곳을 떠났을 테니까 말입니다."
짙은 눈썹에 눈이 큰 황삼인은 빙긋이 웃으며
"고맙소. 자! 받으시오."
하고는 한 냥 가량 되는 은자를 던져 주고는 이내 말에 올라 골목을 빠져나가 계속해서 장원 안을 살피는 것이었다.
손꼽추는 수중의 은자를 들여다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돈을 번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군....."
무의식 중에 고개를 든 그는 어느 틈엔가 주정뱅이가 나와서 멍청하게 선 채 황삼인들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손꼽추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늘은 매우 일찍 일어났군요?"
주정뱅이는 그제야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어젯밤에 어찌나 술을 빨리 마셨던지 벌써 깨어 버렸소."
그리고는 잠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오?"
"구월 열나흘입니다."
주정뱅이의 얼굴에 이상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이 보름이겠군요."
손꼽추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십사 일이면 내일은 당연히 보름이 아니겠소?"
주정뱅이는 무엇인가 다시 말을 하려다가 허리를 구부리고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손을 들어 탁상에 있는 술주전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술을 달라는 뜻이다.
손꼽추는 혀를 내두르며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만약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술을 마신다면 술을 파는 사람들은 甕醍?벼락부자가 되었을 거요."
황혼이 다가오자 장원 뒤뜰에 있는 누각 위에 등불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어둑어둑 날이 저무는 저녁의 공기는 나태하면서도 무언중에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술주정꾼은 아예 자신의 자리로 정해 놓은 듯한 자리에 뿌리를 박고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데 오늘의 태도는 평소와 달리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그는 술맛을 음미하듯 한모금 한모금 들이키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두 눈동자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또록또록 빛나며 조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상 위에 켜 놓은 촛불의 위치도 변해 있었다.
그는 누군가 기다리는 듯 시종일관 문쪽으로 시선을 주며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손님을 기다리기에 무료하던 손꼽추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몸을 뒤틀고 나서 말을 꺼냈다.
"오늘은 더 이상 손님이 오지 않을 것 같구려. 우리 문을 닫은 후 술이나 같이 나누기로 합시다."
그러자 술주정뱅이는 술잔에 남은 빈잔을 홀짝 들이키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시오. 내 짐작으론 아마 밤 늦게야 장사가 잘 될 것 같소."
손꼽추는 눈이 번쩍 뜨여 반색을 하다가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아시오?"
술주정뱅이는 제법 의젓한 태도를 짓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점을 약간 칠 줄 아오."
그의 이 말은 잠시 후에 너무나도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과연 용한 점장이란 말인가!
약 반 시진이 지나자 객잔 문앞이 별안간 소란스러워지고 서너 패의 손님들이 무더기로 들어온 것이다.
첫 번째 들어온 손님은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백발이 성성하고 남색 장삼을 입었으며, 손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뱃대를 든 노인이었으며 또 한 명은 검고 긴 두 줄기의 댕기를 늘어뜨린 처녀로 두 개의 영롱한 눈망울은 댕기보다 더 검게 빛났다. 보아하니 남삼노인의 손녀인 것 같았다.
그들의 뒤를 따르듯 두 번째 들어온 일행도 역시 두 명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신체가 우람하고 건장하게 보이는 구레나룻을 기른 사나이였다. 한데 이들 두 사람의 옷차림과 생김새는 서로 바뀌어도 모를 정도로 똑같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허리에 찬 칼마저도 똑같았다.
그리고 세 번째 패거리는 네 사람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은 몸집이 크고 다른 한 명은 그와 대조적으로 왜소하여 웃음을 자아내었다. 또 세 번째 사람은 젊은이로 자줏빛 안색에 자색의 긴 창을 등에 메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녹색 의상에 머리엔 금으로 된 장식을 꽂은 여자였다. 걸음걸이가 사뿐사뿐한 것이 처녀처럼 보였지만 나이는 다 큰 처녀의 어머니뻘은 되는 것 같았다.
손꼽추는 그녀가 허리를 그렇게 흔들고 다니다가 허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마지막 손님은 단 한 명이었다. 이 사람은 마치 해골에다가 가죽만 씌운 것처럼 깡말랐으며 얼굴은 지독히도 긴 말상이었다. 그리고 그 긴 얼굴에 손바닥만한 푸른 점이 있는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객잔 안에는 모두 다섯 개의 상이 있었다.
네 무리의 사람에다 주정뱅이까지 구석자리를 차지하여 앉자 좌석은 꽉 찼다.
손꼽추는 눈코 뜰새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한편 그는 손님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것을 원망도 했고 내일은 장사가 이렇게 잘 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이 네 패의 손님들은 모두 말이 적었다. 그저 묵묵히 앉아 술과 음식을 먹고 있을 따름이었다. 설혹 말을 하기는 한다 해도 속삭이는 것처럼 낮아 다른 사람들은 전혀 들을 수가 었었다.
'이상한 노릇이로구나.....'
하고 손꼽추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행동과 옷차림으로 보아 평상시에는 절대 이런 곳에 올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났을 때, 어깨에 긴 창을 메고 얼굴이 자줏빛인 젊은이가 긴 댕기를 들인 처녀를 똑바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댕기를 들인 처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여전히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자면(紫面) 청년이 갑자기 웃으면서 처녀를 향해 물었다.
"낭자는 노래를 파는 사람이오?"
댕기를 들인 처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태연하게 댕기를 높이 들어올려 보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면청년은 빙긋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한 곡 부를 줄은 알 게 아니오? 그저 잘만 부른다면 내 섭섭지 않게 상을 주겠소."
댕기를 들인 처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의미심장하게 대꾸했다.
"저는 노래는 못해도 얘기는 할 줄 알아요."
자면청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급히 물었다.
"무엇을 얘기할 줄 안다는 거요?"
댕기머리 처녀의 대답은 암팡진 것이었다.
"책이나 옛날 이야기라면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지요."
"그럼 더욱 잘 되었소. 그런데 어떤 얘기를 잘 하시오? 옥루몽이오? 아니면 금병매요?"
"다 틀렸어요. 저는 강호에서 일어난 가장 큰 소식과 무림에서 최근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요. 들어보시면 아마 신기하고도 긴장될 거예요."
"하하하...그거 더욱 잘 됐군요. 그런 일이라면 아마 모두들 듣고 싶어할 것이오. 어서 얘기해 보시오."
댕기머리 처녀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방긋이 웃었다.
"하지만 저는 하지 못하고 제 할아버지께서 할 줄 아세요."
자면청년은 처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백발의 남삼노인을 힐끗 바라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그럼 낭자는 무엇을 할 줄 아시오?"
댕기머리 처녀는 방그레 웃더니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할아버지께서 얘기하실 때 더욱 흥미가 진진해지도록 말동무가 되어 옆에서 도와드리고 있어요."
댕기머리 처녀가 방그레 웃을 때 양쪽 볼에 살짝 보조개가 생겼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매혹적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자면청년은 넋을 빼앗긴 듯 그 자리에 멍청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때 녹의를 입은 중년부인이 냉막한 표정을 한 채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얘기를 하려면 빨리 해봐라. 더럽게 추파를 던지지 말고."
지극히 모욕적인 언사라 보통사람이라면 벌써 발끈하여 한바탕 소란을 부렸을 것이건만 그 댕기머리 처녀는 그녀의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께서 말씀해 보세요. 술값 정도는 나올 테니까요."
남삼노인은 두 눈을 반쯤 감은 채 술을 한 잔 마시고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초류빈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당초 자면청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늙은이와 댕기머리 처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초류빈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모든 사람은 안색이 급변하면서 일제히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댕기머리 처녀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들어 보았어요. 의협심이 강하고 황금을 돌처럼 여긴다는 그 유명한 초탐화 아니에요?"
남삼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 네 말이 맞다."
댕기머리 처녀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듣자하니 그의 비도는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의 비도를 피해내지 못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남삼노인은 담배연기를 한 모금 뿜어내고 나서 나직이 말했다.
"만약 못 믿겠다면 너는 백요생이나 오독동자에게 가서 물어보아라. 그러면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백요생과 오독동자는 모두 죽지 않았나요?"
"그렇다! 그들은 모두 죽었지. 그들이 죽은 원인이 바로 그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댕기머리 처녀는 귀엽게 혀를 쏙 내밀었다.
"그럼 저는 믿어지지 않아도 믿어야 되겠군요. 그 말을 믿지 않았다가는 죽을 테니까요."
이 때였다.
얼굴에 푸른 점이 있는 깡마른 사나이가 냉막하게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 두 조손(祖孫)의 이야기에 끌려 이것을 전혀 듣지 못했으며 술주정꾼은 이미 만취한 듯 상에 엎드려 있었다.
남삼노인은 뻐끔뻐끔 담배를 빨고 차를 한 잔 마시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초류빈과 같은 영웅호걸이 지금은 죽고 이 세상에 없다."
댕기머리 처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그쳤다.
"죽었다고요? 그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가 이 세상에 또 있었나요?"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꼭 한 명 있다."
"그게 누구지요?"
"그것은 바로 초류빈 자신이다."
댕기머리 처녀는 잠시 멍하니 노인을 쳐다보고 있다가 소리없이 웃으며 물었다.
"사람이 어찌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있겠어요? 제 생각 같아서는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 같군요."
"설사 그가 세상에 살아 있다고 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한스럽고 안타까운 일이지....."
"그 사람 외에 또 어떤 사람을 영웅이라 할 수 있나요?"
남삼노인은 지체없이 입을 열었다.
"너는 낭천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들은 것 같군요."
이렇게 대답한 처녀는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말했다.
"듣자하니 그 사람의 검법은 신속하기가 천하무쌍이라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남삼노인은 오히려 반문했다.
"이곡의 공력은 어떻지?"
"그의 청마수는 병기보에 아흡 번째로 나열되어 있으니 공력도 물론 상당하겠지요."
"철적 선생. 소림의 심감 대사, 조정의, 전칠 등의 공력은 또 어느 정도지?"
"그들은 모두 강호에서 제일가는 고수들이에요."
남삼노인은 그제야 빙그레 웃으며 핵심적인 말을 했다.
"낭천의 검법이 만약 쾌속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왜 그의 검법에 패했겠느냐?"
댕기머리 처녀는 궁금한 듯이 물었다.
"낭천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지요?"
남삼노인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 역시 초류빈과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소식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들은 바가 없고 다만 설소하와 함께 실종이 되었다고 하더군 "
설소하라면 천하 제일의 미인으로 호칭되었던 설낭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았다. 바로 그녀야."
댕기머리 처녀는 탄식을 금치 못하여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이라는 게 뭐죠? 정 때문에 울고 웃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심지어는 정으로 인해 목숨까지 잃는 사람이 있으니....."
이때 자면 청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참견을 했다.
"서론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하겠다는 얘기가 도대체 뭐요?"
남삼노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초류빈이나 낭천 같은 인물들의 행방이 묘연하니 강호에 또 무슨 큰일이 일어나겠소.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 늙은이는 더 할 얘기가 없구려."
얼굴에 푸른 점이 있는 깡마른 사나이가 냉랭하게 웃으면서 말 틈에 끼여들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남삼노인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요? 그럼 귀하의 소식이 이 늙은이보다 더 영롱하단 말이오?"
깡마른 사나이는 주위를 휘둘러보며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얼마 안 있어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할 것이오!"
"언제 어디서 발생한다는 말이오?"
깡마른 사나이는 가볍게 상을 쳤다.
"지금 바로 이곳에서 발생할 것이오!"
"뭐라고요?"
이 말이 나오자 쌍동이 형제와 세 번째로 온 네 명의 안색이 일시에 싹 변했다. 그러자 녹의의 중년부인이 무엇인가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호들갑스럽게 웃으면서 소리쳤다.
"지금 이 시간에 이런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믿을 수가 없군요."
깡마른 사나이는 냉랭하게 웃으며 자신있게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최소한 여섯 명이 죽게 될 것이오."
녹의를 입은 중년부인이 급히 물었다.
"누구누구 여섯 명이죠?"
깡마른 사나이는 술을 한 잔 마시고 나서 또박또박 말했다.
"백모후(白毛厚) 호비(胡非), 대력신(大力神) 단개산(段開山), 철창 소패왕(鐵槍 小覇王) 양승조(楊承祖), 수사(手蛇) 호미, 그리고 남산쌍호(南山雙虎) 한(韓)씨 형제 등 여섯 명이오."
단숨에 여섯 명의 이름을 대자 쌍동이 형제와 세 번째로 들어온 네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놈은 뭘하는 놈이기에 감히 이곳에서 그 따위 방자한 소리를 하느냐?"
이렇게 고함을 지른 사람은 바로 대력신 단개산이었다. 이 사람이 일어선 모습은 마치 반으로 잘려진 철탑과 흡사했다.
남산 쌍호 한씨 형제도 몸집이 크고 우람했으나 그에 비해서는 머리 하나가 작았다.
대력신은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네놈이야말로 재수가 없게 생긴 것이 오늘밤을 넘기기기 어렵겠구나."
말이 막 끝나는 순간, 갑자기 깡마른 사나이는 가벼운 연기처럼 몸을 날려 그의 앞으로 달려가 대력신의 따귀를 이십여 차례나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단개산에게는 분명히 두 손이 있었지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으며 또 두 다리가 있었으나 전혀 피할 수도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깡마른 사나이의 동작은 정녕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신속무비한 동작에 놀라 멍청히 넋을 잃고 말았다.
깡마른 사나이의 냉혹한 목소리가 실내의 정적을 깨뜨렸다.
"너는 내가 너희들을 죽일 것이라 생각했느냐? 너희들이라면 아직 내가 손을 쓸 필요가 없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너희들의 말투가 불손해서 그저 경고를 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한 그는 다시 제자리로 천천히 돌아갔다.
이때 철창 소패왕 양승조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잠깐! 누가 우리를 죽이려 한다는 것인지 얘기해 보아라."
고함을 지른 그는 번개같이 긴 창을 내밀어 깡마른 사나이를 향해 찔렀다.
퍽!
?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무수한 창화(槍花)가 형성되어 폭사되어 나갔다. 바로 정통적인 양가의 창법이었다.
깡마른 사나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너희들을 죽일 사람이 곧 올 것이다!"
하고는 슬쩍 허리를 틀더니 그의 긴 창을 옆구리에다 끼는 것이 아닌가.
양승조는 있는 힘을 다해서 빼내려고 했으나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자줏빛 얼굴이 괴상한 색깔로 변했다.
깡마른 사나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희들은 도망을 하려 해도 소용이 없으니 조용히 앉아서 기다려라."
그러고서야 그는 옆구리에 있는 창을 놓아주었다. 그 바람에 있는 힘을 다해 창을 당기고 있던 양승조는 보기좋게 뒤로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수사 호미가 그를 붙잡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술상이 박살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양승조의 창은 이때 하나의 평범한 철봉으로 변해 있었다. 창날이 어느 틈엔가 부러져나가 온데간데없이 없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탁!
깡마른 사나이는 떨어진 창을 상 위에다 찍고는 자리에 앉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서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