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26 소이비도 제2권 생명을 빼앗은 동전
생명을 빼앗은 동전
하지만 그 누구의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않고 모든 동전을 다 떨어뜨린 것이었다. 이 사십여 명의 사람은 모두가 강호에서 유명한 인물들로서 상당한 견식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상상도 못할 만큼 긴 채찍을 신의 경지에 가깝도록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보지를 못했다.
청면 사나이의 손에 들려 있는 채찍은 마치 살아 있는 뱀과 같을 뿐만 아니라 눈까지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사십여 명의 무림인들은 이 순간 서로 마주 쳐다보더니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몸을 날려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디서 그러한 힘이 생겨났는지 머리의 동전이 떨어지는 순간 쏜살같이 달아나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황삼노인의 안색이 확 변했다.
"당신이 그들의 탈명동전(奪命銅錢)을 떨어뜨린 것은 그들을 대신해서 죽어 주겠다는 것이오?"
외다리 괴인이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편신(鞭神) 서문유(西門柔)의 목숨 하나만 있으면 그들 사십여 명의 생명보다도 더 가치가 있지."
이렇게 소리친 외다리 괴인은 철장을 뽑아들더니 마치 태산과 같이 안정되고 위맹한 모습으로 청면 사나이의 앞에 우뚝 섰다. 황삼노인이 두 손을 움츠렸다가 벌리자 그의 소매 안으로부터 한 쌍의 판관필이 나왔다.
얼굴이 녹색인 황삼노인의 손에도 기형(奇形)인 외문(外門) 병기가 들려져 있었다. 이 기형의 외문병기는 칼 같기도 하고 톱 같기도 한 것이 역시 녹색 광채를 띠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병기에 독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황삼노인은 시종일관 입을 열지 않았고, 두 손은 소매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 서서히 빼냈는데 그의 두 손엔 한 자의 자모강환(子母鋼環)이 들려져 있었다. 병기를 사용하는 데에는 한 치가 길면 한 치만큼 더 강하고 한 치가 짧으면 그 만큼 위험이 따른다는 철칙이 있다.
이 자모강환은 위험한 것 중에서도 위험한 병기 중의 하나다. 일단 손을 쓰게 되면 필시 선제공격에서 상대를 제압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림에서 감히 이러한 병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공력은 절대로 약하지 않았다.
네 명의 황삼인은 청면 사나이 서문유를 완전히 포위했다.
다만 외눈의 황의인만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옷고름을 풀어 헤쳤다. 그의 가슴에는 가죽 칼집이 칠(七)자 모양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마흔아홉 개의 표창이 꽂혀 있었다. 표창 중엔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었으며 긴 것은 한 자 석 치 정도이고 짧은 것은 여섯 치 정도로서 창끝이 선혈과 같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다섯 사람의 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서문유의 수중에 있는 채찍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그들도 이 눈이 달려 있는 듯한 긴 채찍에 상당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외다리 황삼인은 음험하게 웃었다.
"우리 이 네 친구의 내력에 대해서 귀하는 잘 알고 있을 것이 오."
서문유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내 벌써 알고 있었소."
외다리 황삼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치대로 말한다면 우리 다섯 사람의 신분으로서 당신 한 사람을 상대하기란 부당한 일일 것이오, 하지만 오늘밤의 상황은 다르오."
서문유는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강호 중에서 많은 인원으로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당신들 다섯 사람뿐만은 아니오."
"나는 본시 당신의 생명을 빼앗을 생각은 없었소. 하지만 당신이 우리의 규칙을 어겼으니 우리가 어찌 당신을 놓아 줄 수 있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규칙이 파괴되면 위신도 떨어진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서문유는 낭랑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만약 내가 꼭 가야겠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외다리 황삼인이 짧게 잘라 말했다.
"당신은 갈 수가 없소!"
서문유는 벼락같이 고함을 터뜨렸다.
"만약 내가 진짜 갈 생각이 있다면 당신들의 실력으로선 결코 나를 막지 못할 것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 일순 채찍을 휘둘렀다. 순간 긴 채찍은 여덟 개의 원을 그리면서 서문유의 몸을 완전히 에워싼 채 용수철과 같이 쉴새없이 돌았다.
이에 황삼인도 외마디 고함을 터뜨리며 철장을 휘둘렀다.
"이야압!"
그의 이 일격은 매우 평범한 횡소천군의 초식이었지만 그 힘의 강도와 기세는 비할 데가 없었다. 강호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초식을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하고 있지만 그의 이러한 일격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횡소천군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한데 서문유의 입에서는 쉬지 않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채찍이 더욱 급하게 돌고 있는 가운데 그의 몸이 갑자기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이때 외눈의 황삼인이 두 손을 내휘둘러 단숨에 열 자루의 표창을 발해냈다.
예리한 파공음이 발해지면서 열세 개의 붉은 빛이 서문유의 전신 각 대혈을 향해 폭사되어 갔다. 쏘아지기는 큰 표창이 먼저 쏘아졌지만 도착하기는 짧은 표창이 빨랐다.
그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창! 창!
쇠와 쇠가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리면서 길고 짧은 열세 자루의 표창이 모두 급하게 돌고 있는 채찍에 의해 부러져 사면 팔방으로 날아갔다. 어떤 것은 담 속으로 날아갔고 어떤 것은 담 위에 꽂히면서 소낙비와 같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그리고 서문유의 몸은 더욱 급하게 돌아 돌면 돌수록 몸이 높이 올라갔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안개가 싸여 보이지 않게 될 것이었다.
외다리 황삼인이 노기띤 음성으로 소리쳤다.
"쫓아라!"
이렇게 소리친 그는 철장으로 땅을 힘껏 내리치며 몸을 공중으로 날렸다. 그는 비록 다리가 하나였지만 오히려 두 다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보다 더욱 경쾌하여 눈깜짝할 사이에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머지 황삼인들도 공중에서 들려오는 파공음을 듣고 방향을 식별해 뒤쫓아 갔다.
이렇게 되자 골목 안은 다시 평온함을 되찾았고 두 구의 시체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만약 이 두 시체만 없었다면 손꼽추는 무서운 악몽에서 깨어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때 남삼 노인은 술이 깬 듯, 두 눈에 술기운이 전혀 없었다. 그는 황삼인들이 떠난 것을 보고서야 탄식을 터뜨렸다.
"서문유의 채찍이 천마수보의 위에 나열되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 그가 보인 채찍술은 편신이란 칭호를 받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지. 백요생의 안력은 과연 대단하군."
댕기 처녀가 끼여들면서 입을 열었다.
"무림인들 중 채찍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그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나요?"
남삼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채찍을 이러한 경지까지 이르게 한 사람은 삼십 년래에 한 명도 없었다."
댕기 처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괴물은 누군가요?"
"그 사람은 제갈강(諸葛剛)이라고 하며 강호 사람들은 그를 횡소천군이라고 칭한다."
이렇게 말한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철장의 무게는 육십삼 근이나 나가며 당금 무림에서 그보다 더 무거운 병기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 줄로 알고 있다."
댕기 처녀가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문유와 제갈강 두 사람은 하늘이 내려 주신 상대인 것 같군요."
남삼노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서문유의 공격은 유순하나 반면 그의 사람됨은 매우 강직하지. 그 반면에 제갈강은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음험하고 교활한 사람이다."
여기까지 말한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직이 계속해서 말했다.
"두 사람의 공격은 서로 상극될 뿐만 아니라 성미 또한 다르다. 다만 유순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가 없어 공력으로 논한다면 제갈강이 한 수 앞선다. 하지만 심계(心計)를 겨룬다면 손해볼 것은 뻔한 것이다."
댕기 처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의 말을 받았다.
"제가 보기엔 흰 수염이 달린 노인이 제갈강보다 더욱 음침한 것 같아요."
남삼노인은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설명했다.
"그 사람은 고행공(高行空)이라고 하며 혈도 찍는 데는 명수이다. 그리고 외눈의 황삼인은 연쌍비(燕雙飛)라고도 하며 두 손으로 단숨에 마혼아홉 개의 표창을 발해낼 수가 있지."
이렇게 말한 그는 숨을 돌린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의 병기는 백발백중으로써 이 두 사람은 백요생의 병기보에 서른일곱 번째와 마흔여섯 번째로 나열되어 있는 강호 중의 일류 고수들이다."
댕기 처녀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물었다.
"마흔여섯 번째 위에 나열되어 있는 데도 고수라고 할 수가 있나요?"
남삼노인은 그녀의 말을 듣자 끌끌 혀를 찼다.
"쯧즛! 이 세상에서 공력을 연마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 병기보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지 아느냐?"
댕기 처녀는 의혹에 찬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다가 또다시 물었다.
"얼굴이 파란 사람이 쓰는 병기는 무엇이죠? 그것도 병기보에 올라 있나요?"
"그 사람은 독당랑 당독(唐獨)이라고 한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병기는 당랑도라고 하며 독이 칠해져 있지....."
여기까지 말한 그는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계속했다.
"누구든지 그것에 의해 조금이라도 긁히기만 하면 한 시간 내에 죽게 된다."
그의 말을 들은 댕기 처녀는 갑자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이제야 생각났어요. 그 사람은 오독(五毒) 만을 전문적으로 먹기 때문에 온몸의 색깔이 녹색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더욱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잡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의 처가 그에게 녹색 모자를 선물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호호....."
남삼노인은 담뱃대에다 불을 붙여 한 모금 빨고 나서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그들 몇 명이 비록 강호상의 일류 고수이기는 하지만 무게가 있기로는 그 젊은 녀석을 따를 자가 없지."
댕기 처녀는 그의 말이 맞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받았다.
"그래요. 저도 그 사람에게 무게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지요.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가장 침착하고, 그가 쓰는 병기도 사용하기가 매우 힘든 것이에요. 그런데 그의 정체는 무엇이죠?"
남삼노인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반문을 했다.
"너는 혹 용봉환(龍鳳環) 상관금홍(上官金虹)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느냐?"
댕기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들어보았지요. 그 사람 손에 있는 한 쌍의 자모용봉환(子母龍鳳環)은 병기보에 두 번째로 나열되어 있으며, 초탐화의 비도탈명보다도 상위에 있지요.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강호에 어디 있겠어요?"
남삼노인은 그녀가 궁금해서 물었던 것에 대해 그제야 이야기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상관비(上官飛)로서 바로 상관금홍의 외동아들이다. 제갈강, 당독, 고행공, 연쌍비는 모두가 상관금홍의 속하들이다."
댕기 처녀는 혀를 내밀어 보였다.
"그들이 행패를 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요. 뒤에 상당한 막후 인물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뭐 있겠어요."
"상관금홍은 다년간 침묵을 지키더니 이 년 전에 갑자기 다시 일어나 병기보에 수록된 열일곱 명의 고수들을 망라해서 금전방(金錢幇)을 조직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지난 이 년 사이에 그는 가는 곳마다 승리를 했고 날로 기세가 상승해 갔다. 그리고 성세(聖勢)도 개방을 능가하고 있는 형편이다."
댕기 처녀가 웃음을 굴렸다.
"개방은 무림 중에 제일 큰 방파인데 그들과 같은 사문 방파와 어찌 비교할 수가 있겠어요?"
"근 이 년 사이엔 인재가 부족해 정파는 소침되고 사파가 날로 번창해 가고 있다. 만약 의기소침한 영웅과 협사들이 분발해 일어나지 않는다면 금전방의 행패는 그칠 날이 없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말한 그들은 의식적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인지 술주정뱅이를 향해 흘깃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술주정뱅이는 완전히 술에 곯아 떨어졌는지 상 위에 엎드린 채 인사불성이었다.
"그렇다면 금전방이 끼여든 이상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구경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하지만 이때 남삼노인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럼 상관금홍의 공력보다 더 고명한 신인이라도 나왔단 말인가요?"
"용봉환은 비록 병기보에 이 위로 나열되어 있지만 삼 위에 나열되어 있는 비도탈명 초류빈이나 사 위에 나열되어 있는 숭양철검(崇陽鐵劍)의 공력도 상관금홍에 비해서 뒤떨어지지 않는단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빙긋 웃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하물며 용봉환 위에는 변화무쌍하고 오묘하기 이를 데 없는 여의봉(如意棒)이 있지 않느냐?"
댕기 처녀의 두 눈에서 일순 강한 광채가 번뜩였다.
"그 여의봉이 얼마나 오묘하길래 병기보에 일 위로 기록된 것인가요?"
"여의봉은 일명 천기봉(天機棒)이라고도 한다. 그 비밀에 대해서는 천기노인(天機老人)을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
"금전방이 설사 대단하다고 해도 방파의 이름은 그다지 고명하지가 못하고 그야말로 속되고 가소롭군요."
"돈이라면 귀신도 부릴 수가 있고 신과 교통한다고 하지 않느냐. 천하 만물 중에서 돈보다 더 큰 마력을 지닌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렇게 말한 그는 마른침을 한차례 꿀꺽 삼키고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네가 내 나이쯤 되어 보면 이 이름이 조금도 가소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댕기 처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돈에 현혹되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 사람은 매우 드물 뿐만 아니라 갈수록 그 수가 작아지는구나....."
댕기 처녀는 또 입을 삐죽거리더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남삼노인은 담뱃대를 상 옆에다 톡톡 털고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내 말을 알아듣겠느냐?"
댕기처녀는 큰 눈을 돌려 상 위에 엎드려 있는 술주정뱅이를 한번 쳐다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어째서 못 알아듣겠어요."
남삼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다짐을 받았다.
"너는 그 사람들의 정체에 대해서 모두 알았겠지?"
"모두 알았어요."
"그럼 됐다. 이젠 그들을 만나게 되면 각별히 조심하여야 한다....."
이렇게 말한 그는 서서히 일어나더니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이곳의 술이 비록 좋기는 하지만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술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지. 가야 할 때는 가야 하는 것이다...주인장.....안 그렇소?"
손꼽추는 이들 두 조손이 얘기를 주고받고 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얘기가 다 끝나자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께선 강호의 일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아시고 계시는군요. 보아하니 대단하신 노영웅 같으신데 술값은 그만두십시오."
남삼노인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나는 무림 영웅이 아니오. 한낱 술꾼에 불과하지...하지만 영웅이나 술꾼을 막론하고 나에게 빚을 지게 되면 언젠가는 갚아야 하며 빚을 지고 있는 동안은 마음이 편하지 못하오."
이렇게 말한 남삼노인은 은자를 꺼내 상 위에 올려 놓더니 손녀의 어깨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손꼽추는 그들 조손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술주정뱅이는 어느 새 깨어 있었다. 그리고 편신 서문유가 앉아 있던 상 앞으로 가 제갈강이 꺼내 놓은 편지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손꼽추는 씁쓸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술에 취하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오. 그 바람에 많은 구경거리를 놓치고 말았지 않았소."
술주정뱅이 역시 가볍게 웃더니 이내 탄식을 터뜨렸다.
"진짜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아직 뒤에 남아 있소. 아마 나는 보지 않으려고 해도 안 될 것이오."
손꼽추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오늘 만난 사람들마다 그 말투가 이상하고 신비스럽다고 느껴졌다. 술주정뱅이는 편지를 들어 읽기 시작했다. 일순 그의 창백한 얼굴에 이상한 홍조가 떠오르더니 허리를 숙인 채 계속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손꼽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소?"
술주정뱅이는 머뭇거리며 얼버무렸다.
"아...아무것도 아니오."
손꼽추는 두 눈을 깜박거리더니 입을 떼었다.
"듣자하니 그 사람들은 모두 이 편지 때문에 온 것이라고 하던데....."
술주정뱅이는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손꼽추는 궁금한 듯 말을 계속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잠꼬대 같은 말입니까?"
이렇게 말한 그는 가볍게 웃더니 다른 방향으로 말을 돌렸다.
"술을 더 마시지 않겠소? 오늘은 내가 한턱 내겠소."
그러나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들어 보자 술주정뱅이는 그 자리에서 넋을 잃은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는 취기가 서려 있기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처량한 빛이 내포되어 있었다. 손꼽추가 그의 눈길을 따라가 보니 높은 담장 너머에 있는 작은 누각 위에서 희미한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
그도 술주정뱅이와 같이, 등잔불이 비치고 있는 곳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자욱한 안개에 싸인 등불은 마치 망망대해에서 보는 등대의 불빛과도 같았다.
손꼽추가 뒤뜰로 돌아왔을 땐 삼경이 벌써 지나 있었다. 뒤뜰은 언제나 조용했다. 술주정뱅이의 방은 아직도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방문도 반쯤 열려져 있었다.
손꼽추는 지난번 비오던 날 밤의 일이 생각나 급히 다가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자고 있소? 어째서 문을 닫지 않았소?"
그러나 방 안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손꼽추가 반쯤 열린 방문을 통해 안을 바라보니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침상은 매우 잘 정돈되어 있었고 사람이 잔 흔적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술주정뱅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밤이 이렇게 깊었는데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손꼽추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방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침상을 제외하고는 매우 어지러웠다. 침상 머리 맡에 이십 개의 목각이 있었고 상 위엔 먹다 남은 술도 있었다. 하지만 목각을 깎던 칼은 보이지 않았다.
손꼽추의 시선이 순간 한 곳에 집중되었다. 술잔 옆에 한 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제갈강이 놓고 갔던 그 편지였다. 그는 호기심이 절로 생겨 그쪽으로 다가가 편지를 꺼내 보았다. 편지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구월 십오일, 흥운장에 보물이 나타날 것이니 귀하께선 꼭 와 주시기 바라오.>
편지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보낸 자의 이름은 물론 받는 자의 이름도 없었다. 편지를 쓴 사람은 상대의 심리를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손꼽추는 절로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에 괴이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는 흥운장이 바로 맞은편에 있는 거대한 장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술주정뱅이가 흥운장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안개는 더욱 짙어만 갔다.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이 남았고 연못 안은 낙엽으로 가득차 있었다. 과거의 푸른 나무와 아름다운 꽃들, 그리고 온갖 새들의 노랫소리로 가득찼던 정원은 더할 수 없이 황량하게 변해 있었다.
작은 구름다리 건너편에 서너 개의 정자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냉향소축이다. 이곳은 강호 제일의 명협이 기거했고 또 강호 제일의 영인(靈人)이 살았던 곳으로 찬란한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과거의 찬란했던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누각 위의 불은 희미한 빛을 발하면서 계속 타고 있었다. 새벽을 알리는 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가운데 짙은 안개를 헤치며 한 인영이 나타났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아니 지옥에서 온 죽음의 사자가 아닐까? 인영의 머리카락은 온통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고 옷도 제대로 정돈되지 못했다. 겉보기에는 매우 초췌하고 나태해 보였지만 그의 기풍은 매우 당당했고 두 눈빛은 마치 가을밤의 별과 같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인영은 매우 안정된 걸음으로 구름다리를 건너갔다.
앙상하게 말라 있는 매화나무를 본 그는 깊은 장탄식을 터뜨렸다. 이 매화는 과거 그와 매우 절친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같이 매우 초췌해 보이는 것이다.
인영은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갑자기 물찬 제비와 같이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누각 위의 창문은 닫혀 있었으며 누렇게 변해 있는 창호지에는 섬세한 인영이 반영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적막하고 쓸쓸해 보였다. 창문 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니 한 고독한 사람이 등잔불 앞에 다소곳이 앉아서 옷을 꿰매고 있었다.
이 누각 내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여자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고 초췌했으며 과거의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녀는 마치 인간의 환희와 모든 고난, 그리고 번뇌를 망각한 지 오래된 듯한 사람 같았다. 그녀는 모든, 아니 남은 청춘을 바늘 끝에다 실은 채 옷을 꿰매면서 보내고 있었다. 옷이 뜯어지거나 찢어지면 바늘과 실로 꿰맬 수가 있겠지만 마음에 난 그 구멍은 어느 누가 꿰맬 수 있겠는가.
그녀의 맞은편에 열서너 살쯤 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이 소년은 매우 청수(淸秀)하게 생겼고, 크고 흑백이 분명한 두 눈은 그를 한층 더 총명하게 보이게 하였다. 하지만 안색은 매우 창백했다. 소년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채 글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가 비록 어리기는 했지만 이미 고독을 참을 수 있는 인내심을 키우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은 인영은 창가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의 빛나는 두 눈엔 어느새 이슬과 같은 눈물이 고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린 소년이 갑자기 책을 내려놓더니 고개를 들어 멍하니 등잔불을 바라보았다. 부인도 이때 바느질을 멈추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따스한 빛이 새어 나왔다.
"천강! 너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어린 소년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언제쯤 돌아오실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순간 여인의 손이 떨려 바늘에 손가락을 찔렸다. 하지만 여인은 조금도 아픈 기색이 없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아픔은 가슴에 있었던 것이다.
어린 소년이 다시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께선 왜 갑자기 떠나신 것이지요? 그리고 일 년이 지나도록 어째서 아무 소식도 없는 것이지요?"
여인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가볍게 탄식을 터뜨렸다.
"너의 아버님께서 떠나실 땐 이 에미도 몰랐단다."
어린 소년의 두 눈에서 일순 강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하지만 저는 아버님께서 무엇 때문에 갑자기 떠난 것인지 알고 있어요."
여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볍게 소리쳤다.
"아직 어린 네가 무엇을 안다는 것이냐!"
어린 소년은 씁쓸하면서도 낭랑하게 말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선 초류빈이 복수할까 봐 두려워 떠나신 것이에요."
이렇게 말한 소년은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아버님께선 초류빈이라는 이름을 들으실 때마다 안색이 변하셨지요."
여인은 무엇인가 말하려 했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탄식을 터뜨렸다. 이 여인은 어린 자식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어쩌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린 소년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초류빈은 시종 오지 않았는데, 어째서 어머님을 한번 만나러 오지도 않는 것인가요?"
여인의 얼굴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이 어머니를 만나러 오겠느냐?"
어린 소년은 씁쓸히 웃었다.
"저는 그 사람이 어머님과 절친했던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안 그렇습니까?"
그러자 여인의 하얗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녀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날이 곧 밝을 것 같은데 어서 가서 자지 않고 무얼 하느냐?"
어린 소년은 두 눈을 깜박거리면서 말했다.
"제가 잠을 자지 않는 것은 어머님과 같이 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머님께선 요 이 년 사이에 한시도 주무신 적이 없으신데 소자의 마음까지도....."
여인은 서서히 두 눈을 감았다. 감긴 눈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린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가서 자겠어요. 내일은 어머님 생신이신데 일찍 일어나야지요."
그러더니 여인에게 다가가 뺨에다 대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어머님께서도 그만 주무세요. 안녕히 주무십시오."
이렇게 인사를 한 어린 소년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방 밖으로 걸어나왔다. 방문 밖으로 나온 소년의 얼굴에서 일순간 웃음이 사라지고 대신 두 눈에서 원한의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초류빈,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두려워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결코 당신이 두렵지 않소. 언젠가 당신은 반드시 나의 손에 죽게 될 것이오."
이렇게 중얼거린 소년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편 방 안에 있는 여인은 아들이 나가자 두 눈에 고통의 빛을 담았다.
그녀에게 자식이란 이 아이 하나뿐이다. 어린 소년은 그녀의 생명과도 같은 존재로서 그 아이가 어떠한 짓이나 어떠한 말을 한다고 해도 그녀는 역시 마찬가지로 사랑해 줄 것이다. 어머니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무상한 것이며 아무런 조건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아 등잔불을 더욱 밝게 해 놓았다. 그녀는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매번 밤만 되면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 절로 두려움이 생긴다.
바로 이때
"콜록!"
창 밖에서 가벼운 기침소리가 난 것을 그녀는 들었다. 그녀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런 여인의 두 눈에선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분간할 수 없는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열었다.
"누구시지요?"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손이 떨리듯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창 밖의 자욱한 안개로 인해 문자 그대로 오리무중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인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처량한 어조로 나직이 말했다.
"저는 당신이 온 것을 알고 있어요. 기왕 왔으면 어째서 저를 만나지 않고 피하는 것이지요?"
밖에선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여인은 장탄식을 터뜨리더니 다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와 만나지 않으신다고 해도 당신을 탓하진 않겠어요. 우리는 당신에게 미안해 하고 있으니까요. 진심이에요, 정말로."
그녀의 음성은 점점 낮아졌다. 또 얼마쯤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방 안의 불을 끄자 사방은 온통 어둠에 싸이고 말았다. 여명이 밝아을 때의 어둠은 어느 때보다도 더 어둡다. 그러나 어둠이 걷히고 여명이 밝아오는 천연적인 원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어둠과 함께 찾아왔던 안개도 서서히 걷히기 시작할 때 누각 앞에 있는 오동나무 뒤에서 한 인영이 서서히 그 모습을 나타냈다. 인영은 마치 석상과 같이 오동나무 뒤에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머리와 옷은 안개에 의해 축축히 젖어 있었으며, 멍청하게 서서 누각 위의 창문을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피로에 지쳐 넋을 잃고 있었고 또 더할 수 없이 초췌해 보였다. 그는 바로 어젯밤에 유령과 같이 안개를 뚫고 나타났던 사람이었으며 바로 손꼽추의 주점에서 기거해 왔던 그 술주정뱅이였다. 그는 비록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터져나오는 슬픔을 짓씹고 있었다.
'벽운! 벽운, 당신은 나에게 미안해 할 것이 하나도 없소.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소.....'
이렇게 속으로 외치는 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내 비록 당신을 만날 수가 없지만 지난 이 년 동안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당신 부근에서 당신을 보호하고 있었소.'
이때 동녘 하늘에서 크고 붉은 태양이 떠올라 날이 완전히 밝아졌다. 술주정뱅이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계속 기침을 했다.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큰 장원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과거 웅장했던 대청도 지금은 먼지와 거미줄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한편 여인은 창문을 닫은 채 기척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초조함으로 긴장이 되어 있었다. 얼마를 기다려도 밖에서 기척이 없자 그녀는 뜬눈으로 또 밤을 지새웠다. 장원의 창문은 비바람에 의해 변색이 되고 창호지도 다 찢겨 있었다.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힘없이 서서히 계단을 내려와 앞뜰로 갔다. 앞뜰은 뒤뜰보다 더욱 황량하고 어지러웠다. 유독 대문 옆에 있는 행랑만이 문과 창틀이 퇴색된 채 그대로 옛 모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 전성기의 휘황찬란했던 이 궁궐과 같은 장원이 단 이 년 사이에 이렇게 폐허가 되어 버릴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인들 했겠는가.
술주정뱅이는 다시 허리를 구부려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이때, 햇빛이 그의 전신을 감싸듯 비추어 주었다.
본래 검었던 그의 머리카락이 하룻밤 사이에 하얗게 변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기침이 멎자 서서히 행랑방을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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