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30 소이비도 제2권 음부淫婦의 눈물
음부(淫婦)의 눈물
남갈자는 몸에 꼭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소매만은 길고 넓었으며 더욱 그녀의 두 손은 모두 소매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무슨 무기로 활패왕을 살해했는지는 도저히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가 어떠한 무기를 사용했든 그것은 단연코 무서운 무기일 것이다.
손꼽추와 손소홍은 냉정한 태도로 방관만 했을 뿐 그녀의 출수를 제지하지 않았다. 제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제지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남갈자는 땅에 쓰러져 있는 활패왕의 시체를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흡사 자신의 성적을 감상하듯, 그리고 나서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아주 요염한 웃음이었다.
"나는 단지 한 가지 초식밖에 사용하지 않았어요. 이젠 당신네들도 내 말을 믿겠죠?"
손꼽추와 손소홍은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남갈자는 눈썹을 살짝 위로 치켜세웠다. 그래도 눈은 크게 보이지 않았다.
"내 무공도 이 정도면 훌륭한 편에 속하죠?"
그래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남갈자는 원래부터 그들의 대꾸를 바라지 않은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곡의 청마수는 비록 병기보에 아홉 번째로 열거돼 있지만 백요생이 만약 나까지 병기보에 올려놓았다면 그는 영락없이 열 번째로 물러나게 되었을 거예요."
그렇다. 그녀의 말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솜씨는 확실히 이곡보다도 빠르고 악독했다.
남갈자는 음탕한 눈빛을 손꼽추에게 집중시키며 마치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는 초류빈을 데려가도 아무 말 않겠죠?"
손꼽추의 두툼한 입술이 열리며 단호한 한 마디가 내밸어졌다.
"안 된다!"
그녀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도리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만 그를 데려갈 수 있죠? 당신과 함께 하룻밤을 자면 될까요?"
손꼽추는 노갈일성과 함께 쌍장을 일제히 격출했다. 그의 왼손은 주먹이 굳게 쥐어져 있으며 오른손은 갈퀴처럼 손가락 끝을 약간 구부린 상태였다. 주먹은 바윗돌을 박살내 버릴 만한 위력을 지녔고 오른손은 무수한 변화가 숨겨져 있어 비록 적수공권(赤手空拳)이지만 그 위세는 활패왕이 전개한 일도(一刀)보다 열 배는 더 강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블구하고 남갈자는 허리를 살짝 비틀며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녀의 허리는 물뱀과 같아 수시로 방향을 돌릴 수 있었다. 분명히 그녀가 왼쪽으로 몸을 피했는데 상대방이 덩달아 왼쪽으로 몸을 돌리면 그녀는 어느 새 오른쪽에 가 있는 것이다.
손꼽추가 일격을 전개하자 그녀는 이미 손꼽추의 뒤쪽에 가 있었다. 다행히 손꼽추는 반응이 빨라 왼쪽 주먹을 적시에 안쪽으로 구부려 격출해 낸 힘을 풀고 동시에 오른손 주먹을 쥐면서 전개했던 힘을 신속하게 거두었다.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일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이미 전개한 초식을 적시에 거두는 일이다. 일단 격출된 초식은 흡사 시위를 벗어난 화살과도 같아 도중에서 거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손꼽추는 이때 어려운 일을 흠잡을 데 없이 해낸 것이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수중의 힘을 졸지에 거두었다면 반동에 의해 몸이 자연히 뒤로 후퇴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갈자가 바로 뒤에서 버티고 있으니 스스로 무덤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손꼽추에게 다행한 것은 그가 원래 꼽추라는 점이다. 그는 전개한 힘을 거두는 순간 전부 등 뒤에 돌기된 타봉(駝峰)에 집중시킨 것이다.
아울러 그는 양어깨를 잽싸게 안쪽으로 움츠리며 타봉으로써 남갈자를 겨냥해 부딪쳐갔다. 이것은 또한 손꼽추의 절예(絶藝)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의 등 뒤에 돌기된 타봉은 이미 금강불괴(金剛不壞)에 가까운 경지로 단련되어 백 근이 넘는 쇠뭉치로 얻어맞아도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타봉으로 남갈자를 향해 부딪쳐 가는 기세는 웅후한 장풍에 비교될 바가 아니었다.
남갈자는 풍문에 들은 바가 있어 감히 정면 대결을 하지 못하고 역시 허리를 유연히 비틀어 긴 소매를 허공에 떨치며 이번에는 손꼽추의 면전에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요염한 웃음이 얼룩져 있었다.
손꼽추는 공격이 거듭 실패로 돌아가자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이 죽일 년....."
남갈자는 눈웃음을 치며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죽더라도 나는 당신과 함께 침상에서 죽고 싶어요!"
이런 여인을 상대로 그의 요염한 웃음, 신음을 토할 듯한 묘한 음성을 듣노라면 설사 심신(心神)이 혼란되지 않더라도 역시 마음이 집중되지 않아 가벼운 실수를 범하게 된다.
남갈자는 지금까지 남자들의 그러한 실수를 이용해 왔다. 그래서 십여 년 간 그녀의 손에 죽은 남자는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만난 사람은 애석하게도 손꼽추였다. 손꼽추는 여인에 대해 마치 이빨 빠진 할망구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암소갈비를 보듯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는 남갈자의 음탕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차 기합을 지르며 갈퀴 같은 손을 격출했다.
남갈자는 소매를 슬쩍 위로 걷어붙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는 간드러진 음성으로 외쳤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손꼽추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초식을 거두었다.
"무엇을 기다리란 말이냐?"
남갈자는 버릇처럼 또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출수를 할 생각이 없는데 끝끝내 고집을 부리겠다면 내 무기부터 구경하세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매 속에서 한 줄기 시퍼런 광채가 전광석화같이 손꼽추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손꼽추는 기합을 내지르는 동시에 손을 뻗어 날아오는 시퍼런 광채를 향해 정면으로 낚아채 갔다.
누구와 싸우든 항상 속전속결을 원하는 손꼽추였다. 그래서인지 남갈자의 무기가 필시 특이한 외문병기(外門兵器)임을 짐작하면서도 정면으로 낚아채 간 것이다.
상대방의 무기가 제아무리 예리하여 설사 그의 손을 베어 버린다고 해도 그는 역시 상대방의 무기를 낚아챌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이 너무 지나쳤던 것 같다.
한편 손소홍은 줄곧 제자리에 서서 전혀 출수할 뜻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시종 남갈자의 소매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관찰력은 빠르고 정확했다. 시퍼런 광채가 번쩍이는 찰나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이렇게 기이(奇異)한 무기를 그녀는 난생 처음 본다. 그것은 얼핏 보아 열 배 가량 확대시킨 갈자의 독미(毒尾)와도 같이 길고 꼬불꼬불했다. 그리고 겉보기엔 부드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무쇠처럼 딱딱할 뿐만 아니라 임의로 방향을 꺾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무기의 전신에 모두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시퍼런 광채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시엔 극독이 묻어 있는 게 분명했다.
손소홍도 역시 숙부의 대응조력(大應爪力)에 대해 확고한 신심(信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숙부님의 손이 일단 남갈자의 무기에 닿기만 하면 영락없이 목숨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남갈자의 출수는 물론 빨랐지만 손꼽추의 출수는 더욱 신속했다.
손소홍은 자기가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 저지한다 해도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십사 년 간 상을 닦아온 숙부님의 성격이 예전과 조금도 변함없이 이다지 폭열(暴烈)하리라는 것을 미리 계산해 두지 않았던 것이 큰 실수였다. 사실 손꼽추는 십사 년 동안 억제해 오던 감정이 일시에 폭발한 것이었다.
손소홍은 다급한 나머지 놀란 외침을 토했다. 바로 그때 허공을 가로지르며 느닷없이 손이 뻗쳐왔다. 그 손의 동작은 손소홍의 놀란 외침보다도 빨랐다.
그녀의 놀란 외침이 막 입 밖에 내뱉어지자 그 손은 이미 허공에서 남갈자의 손목을 낚아잡았다.
우드득! 쨍!
뼈마디가 부러지는 소리와 예리한 금속성이 들리며 시퍼런 광채는 땅에 떨어졌다. 시퍼런 광채가 땅에 떨어졌을 때 남갈자는 이미 일 장 밖으로 물러났다. 그녀는 너무나 갑작스레 물러났기 때문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담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모든 소리와 모든 동작이 일시에 정지되었다. 집안은 돌연 쥐죽은 듯이 고요해지고 공기마저도 응결된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은 석고상처럼 몸이 굳어져 눈동자는 놀라운 빛을 담고 그 손을 주시했다.
남갈자의 눈엔 놀라움이 충만되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공포와 고통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녀의 손목은 이미 절단되어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놀라움을 안겨 준 손은 드디어 뒤로 거두어졌다. 뻗쳐나오는 동작은 번개처럼 빨랐지만 거두는 속도는 매우 느렸다. 그러더니 한 사람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다름아닌 곤드레 취해 있던 초류빈이었다.
손소홍은 경이와 기쁨이 엇갈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알고 보니 당신은 취하지 않았군요."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었다.
"나는 비록 심정이 좋지 않고 체력이 약해졌지만 주량만큼은 언제나 센 편이었소."
손소홍이 그를 똑바로 주시하는 흑백이 뚜렷한 커다란 눈동자엔 가지각색의 감정이 뒤범벅 돼 있었다. 기쁨인지 놀라움인지 아니면 감탄인지 실망인지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끝내 초류빈을 취하게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남갈자의 눈동자에선 이미 요염하고 음탕한 빛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단지 경황과 공포뿐이었다. 그녀가 공포에 떠는 것은 물론 손목이 잘려진 원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초류빈의 손에 어느새 한 자루의 비도가 쥐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비도탈명.
비도는 아직 손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혼백(魂魄)을 빼앗기엔 충분했다. 비도가 가장 무서울 때는 바로 아직 손을 벗어나지 않았을 때다.
왜냐하면 일단 비도가 손을 벗어나면 상대방은 무엇이 두려움인지조차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은 공포를 느낄 리가 없다.
주위의 존재를 의식하게 하는 것은 호흡소리뿐이다. 무서운 호흡소리는 완전한 고요보다도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고요를 의식하게 만든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모든 사람은 스스로 질식을 하거나 미쳐 버릴 것이다.
남갈자의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쉴새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떨리는 몸을 도저히 억제할 수 없어 홀연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외쳤다.
"왜 비도를 던지지 않죠? 왜 아직 나를 죽이지 않느냔 말이에 요."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로 인해 그녀는 이미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초류빈은 그녀를 주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고 이곡을 위해 복수하려는 것은 아직은 진정(眞情)이 남아 있다는 증거요. 그가 죽었으니 당신은 물론 고통스럽겠지...가슴이 찢어질 듯이....."
초류빈은 손에 쥐고 있는 비도의 칼날을 주시하였다. 그의 눈동자에 한 가닥 고통스러운 빛이 스쳐갔다. 그리고 그의 표정도 울적하게 변했다.
"나는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소. 누구보다도...나는 단지 당신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아 주길 바라오. 그러한 고통은 절대 살인을 함으로써 감소되는 게 아니오. 당신이 제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인다 해도 그 고통은 추호도 감소되지 않을 것이오."
말을 끝내는 동시 싸늘한 광채가 번뜩이며 허공을 수놓았다. 비도는 이미 그의 수중에서 벗어난 것이다.
팍!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시퍼런 광채를 띤 비도는 남갈자 옆에 있는 나무기둥에 꽂혔다.
초류빈은 손을 내저었다.
"이젠 떠나가시오."
남갈자는 마치 귀신에게 홀린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만 이 고통이 감소될 수가 있죠?"
초류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겠소...어쩌면 그를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게 되면 그 고통이 감소될 수도 있을 것이오. 당신이 꼭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길 바라겠소."
남갈자는 멍하니 그를 주시하며 소리없는 눈물을 양볼에서 흘렸다.
손소홍도 역시 넋빠진 사람처럼 초류빈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초류빈 같은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세상에 이러한 남자가 있다고는 거의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주시했다.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남갈자는 이미 떠났다. 눈물을 흘리며 떠난 것이다.
초류빈은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홀연 빙긋이 웃었다.
"낭자, 당신은 내가 왜 그녀를 죽이지 않았는지 몹시 이상하게 생각하는 모양이구려."
손소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손꼽추는 줄곧 땅에 떨어져 있는 남갈자의 그 이상한 무기를 응시하며 역시 시종 입을 열지 않았다.
초류빈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의 표정은 조금도 술에 취한 것 같지 않았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죽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왔소. 그래서 그녀를 살려 준 것이오."
손소홍도 홀연 웃음을 지었다.
"나는 당신이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이 그녀를 죽이지 않은 데 대해서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당신은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일부러 취한 척한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뿐이에요."
초류빈은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낭자도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니 물론 취한 척하는 게 진짜로 취한 것보다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오. 만약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취한다면 비단 그 당시도 재미가 없을 뿐더러 다음날까지 골치 아픈 고역을 치러야 될 것이 아니겠소?"
손소홍은 생긋이 웃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군요."
초류빈은 그녀가 비꼬고 있는 것 같아 얼른 다음 말을 보충해 주었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취할 때가 있을 것이오. 낭자가 정말 나를 취하게 하고 싶으면 차후에도 기회가 많을 테니 그때는 실수없도록 하시오."
손소홍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커다란 눈망울을 깜박거렸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놓쳤으니 나중에 당신을 취하게 할 기회란 좀처럼 오지 않을 거예요."
초류빈은 실소를 금치 못하며
"사실 나는......"
하고 막 말문을 열다가 갑자기 눈에 띄는 것이 있어 하던 말을 중단했다. 알고 보니 손꼽추가 이때 성큼성큼 부엌 쪽으로 걸어가 술단지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마개를 따는 즉시 꿀꺽꿀꺽 술을 들이키는 것이었다.
그가 단숨에 약 한 단지 가량 들이켰을 때 손소홍은 비로소 간신히 그의 손에서 술단지를 빼앗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다른 사람은 일부러 취한 척을 해 가면서까지 취하기를 원하지 않는데 숙부님은 왜 스스로 자신을 취하게 만들려 하시죠?"
손꼽추는 가까운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초점을 잃은 눈을 뜨고 주정을 하듯 흥얼거렸다.
"일취해천수란 말이 있듯이 취함으로써 모든 시름을 잊고 싶다. 나는 취해야 돼...취하지 않고는....."
손소홍은 울먹이듯 다그쳐 물었다.
"왜 꼭 취해야 하죠?"
그러나 손꼽추는 다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왜 꼭 취해야 되느냐고 물었지? 좋다, 그럼 너에게 말하 마. 나는 어느 누구의 은혜도 받고 싶지 않단 말이다!"
그는 다시 쓰러질 듯 의자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중얼거렸다.
"초류빈, 초류빈,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를 살려 주었소? 나는 한 사람에게 구명지은(救命之恩)을 받았기 때문에 여지껏 이런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이오....."
초류빈은 그에게 묻고 싶었다.
'누가 당신을 구해 주었소? 당신은 무엇 때문에 목숨을 살려 준 사람에게 이곳에서 십여 년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소? 당신이 이곳에서 지키고 있는 것이 대관절 무엇이오?'
하지만 그는 물을 수가 없었다. 손꼽추의 흥얼거리는 음성은 점점 미약해지더니 끝내 들리지 않았다. 취했는지 아니면 잠들어 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초류빈은 손소홍에게 시선을 돌려 그녀에게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깜찍하고도 지혜로운 눈동자를 보자 물으려던 생각을 이내 취소했다. 손소홍이 말하기 싫은 비밀을 캐묻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임을 초류빈은 알고 있었다.
초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는 도리밖에 없었다.
"낭자의 숙부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대장부요."
손소홍은 곁눈으로 그를 흘겨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대장부라야만 비로소 진짜 빨리 취할 수 있다는 것인가요?"
초류빈은 상에 엎어진 손꼽추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손소홍의 표정을 뇌리로 읽어내릴 수 있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대장부만이 죽을 때까지 일언천금의 언약을 지킬 수 있고 대장부만이 남의 은혜를 받기 싫어하는 법이오. 그리고 진정한 대장부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소."
손소홍은 눈동자를 사르르 굴렸다.
"그래서 당신도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남아 있는 건가요?"
초류빈은 침묵으로 그녀의 질문을 대답했다.
손소홍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떠한 이유를 내세운다 해도 당신은 이곳을 떠나지 않을 작정인가요?"
초류빈의 반응은 역시 침묵이다.
손소홍은 몸을 약간 돌려 정면으로 그를 주시했다.
"하지만 당신은 낭천을 찾아갈 생각이 없단 말이에요? 그는 당신의 친구가 아닌가요?"
초류빈은 다시 침묵을 지키다가 비로소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최소한 자기를 지킬 줄은 알 것이오."
손소홍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들은 바에 의하면 설소하는 비록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이 아름다운 용모와 몸매를 지녔다지만 남자를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취미가 있다던데요?"
그녀는 다음 말을 유난히 또렷하게 이어갔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원하나요?"
초류빈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손소홍은 눈빛이 흐릿해져 탄식을 했다.
"당신은 절대 이곳을 떠나지 않을 모양이군요. 그녀를 위해 당신은 어떠한 일도 포기할 결심이 가슴 깊이 뿌리박혀 있는 거예요."
그녀의 흐릿해진 눈빛이 다시 야광주처럼 빛나며 무한히 따사로운 정을 담고 초류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당신은 왜 남갈자에게 얘기했듯이 그녀를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지 않죠?"
초류빈의 얼굴에 금세 고통스러운 빛이 떠오르더니 허리를 구부려 연방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손소홍은 고개를 숙여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면 저도 강요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당신은 최소한 저의 할아버님을 한번 만나뵈어야 할 게 아니겠어요?"
초류빈은 억지로 기침을 멎게 하고 물었다.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오?"
"그 어르신네는 성 밖 정자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세요."
"정자라니....."
"상관금홍이 필시 그곳을 지나기 때문이에요."
초류빈은 생각을 굴리며 말했다.
"설사 상관금홍이 그곳을 지나간다 해도 낭자의 할아버지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오."
손소홍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그의 말을 부정했다.
"꼭 만나게 될 거예요. 상관금홍은 생전 마차를 타지 않을 뿐더러 말을 타지도 않죠. 그는 늘 걷기를 좋아해요. 그는 사람이 걷기 위해 두 다리가 생겼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죠."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었다.
"낭자가 알고 있는 것은 정말 많구려."
손소홍은 자랑스럽게 활짝 웃었다.
초류빈은 즉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낭자는 비단 상관금홍이 온다는 사실을 알 뿐만 아니라 그가 어느 쪽에서 오는 것까지 알고 있으며, 그리고 그 편지는 설소하가 쓴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그녀가 어디에 숨어 있는 것까지 알고 있으니....."
그는 손소홍의 눈동자를 주시하며 천천히 물었다.
"그러한 일들을 낭자는 어떻게 알았소?"
손소홍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애교 있게 말했다.
"물론 제나름대로 방법이 있어요. 하지만 그 방법을 당신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어요."
초류빈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밤이 깊었다. 성 밖의 야색은 성 안의 야색보다 더 짙게 느껴졌다. 천지간에 오직 고요만이 존재할 뿐, 밤바람에 이따금 이름모를 벌레의 밀어가 들려왔다.
손소홍의 걸음은 매우 경쾌했다. 그녀는 영원히 지칠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모두 흥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삶에 대해 자신으로 가득차 있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 젊다. 그녀의 곁에서 걷고 있는 초류빈은 마침 그녀와 강렬한 대조가 되었다. 초류빈은 그녀가 부러웠다. 심지어 담담한 질투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그러한 질투를 발견했을 때 비로소 내심 깜짝 놀랐다.
'나는 정말 노쇠한 것일까.....'
오직 노쇠한 사람만이 젊은이의 생동력에 대해 질투를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초류빈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비웃듯 히죽 웃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만약 십 년 전이라면 나는 절대 낭자와 이렇게 가까이 걷지 못했을 것이오."
손소홍은 약간 멍해지는 표정으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엇 때문에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죠?"
초류빈은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의 행실이 좋지 않다는 것은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겠소? 그런데 낭자같이 젊은 여인과 밤길을 함께 걷는 것이 발각되면 듣기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기가 일쑤일 것이오."
그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도 나는 이미 늙었소.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본다면 필시 부녀라 생각할 것이오."
손소홍은 그의 말을 듣자 펄쩍 뛰었다.
"저의 아버지로 보인다고요? 그것은 당치도 않은 소리예요. 당신은 정말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나요?"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오."
그러자 손소홍은 홀연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초류빈이 그녀의 갑작스러운 웃음에 표정이 약간 멍해지며 반문했다.
"무엇 때문에 웃소?"
손소홍은 손으로 입을 가려 웃음을 멎게 하고는 힐끗 초류빈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저를 웃겼기 때문이에요."
초류빈은 더욱 멍청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이라니....."
초류빈을 바라보는 손소홍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성화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 당신은 저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죠?"
이것 또한 엉뚱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초류빈은 내심 뜨끔해지는 것을 뚜렷이 의식할 수 있었다.
그는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고 퉁명스레 되물었다.
"낭자를 두려워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손소홍의 눈동자는 더욱 빛나 초류빈의 얼굴을 환히 비추어 주는 것 같았다. 그 눈동자는 철부지 어린애처럼 천진스럽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자상한 어머니처럼 포근한 느낌마저 주었다.
"당신은 행여나 자신의 감정이 다소나마 저에게...쏠릴까 봐 두려워서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고의로 강조하는 게 아닐까요?"
초류빈은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손소홍은 코를 찡긋하며익살을 부리듯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해 당신이 만약 영감이라면 저도 역시 할망구일 거예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쳐들어 초류빈을 정시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자신이 먼저 늙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로 늙어지기가 쉬워요. 저의 할아버님은 항상 늙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죠. 당신은 아직 젊어요. 그러니까 차후로는 제발 자기가 늙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야색이 짙어 그녀의 표정을 똑똑히 볼 수는 없었다.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단지 그녀의 빛나는 큰 눈동자일뿐이다. 그녀의 눈동자엔 유정으로 충만돼 있다. 그것은 순진한 유정이었다.
오직 처녀의 감정만이 그렇게 순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쌍의 눈을 바라보는 초류빈은 홀연 십여 년 전의 설벽운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 때의 설벽운도 이렇게 순진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초류빈은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눈빛을 피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저것들을 보시오. 정자가 보이는구려. 낭자의 할아버지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서 길을 재촉합시다."
하늘엔 별도 달도 없고 또한 등불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침침한 야색 속에 단지 멀리 보이는 정자 쪽으로 한 점의 불꽃이 반짝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불꽃이 반짝거리는 순간 비로소 한 사람의 그림자를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손소홍은 그 작은 불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당신은 저 불꽃을 보았나요?"
"보았소."
손소홍은 눈동자를 굴리며 다시 물었다.
"저 불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것은 낭자 할아버지의 담뱃대에서 생긴 불꽃일 것이오."
그러자 손소홍은 어린애처럼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와...당신은 정말 상상력이 대단하군요.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예요. 호호호....."
초류빈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숨김없는 웃음이었다. 그 자신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여자와 함께 있으면 평상시보다 웃음이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기침을 하는 횟수도 줄어드는 것 같았다.
손소홍은 불꽃이 반짝이는 곳을 주시하며
"상관금홍이 과연 이미 다녀갔는지 모르겠군요."
하고 말하더니 안색이 약간 심각하게 변했다.
"어찌 되었든 빨리....."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초류빈은 별안간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소홍은 그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살짝 곁눈질로 초류빈을 훔쳐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초류빈이 심각한 안색으로 먼 길 쪽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먼 길 쪽에 두 점의 불꽃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두 개의 초롱블이다. 초롱불은 대나무 끝에 높이 매달려 있었다. 등신(燈身)이 황금색이므로 등불마저 황금색으로 변했다.
더욱이 등을 받쳐 들고 있는 사람도 황금색의 옷을 입고 심지어 그들의 얼굴마저도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때문에 유난히 신비스럽고 으시시해 보였다.
초류빈은 몸을 번뜩여 재빠르게 손소홍을 길 옆의 나무 뒤로 끌고 갔다.
손소홍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금전방인가요?"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손소홍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알고 보니 상관금홍이 이제야 당도했군요. 혹시 도중에서 무슨 일이 생겨 시간이 지체된 게 아닐까요?"
초류빈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마 다리가 둘밖에 없어 빨리 걷지 못한 모양이오."
그들은 곧 자세히 앞쪽을 살폈다. 앞서 나타난 두 개의 초롱불 뒤에 두 개의 초롱불이 더 보였다. 그들은 서로 삼 장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앞쪽의 초롱불과 뒤에 보이는 초롱불 사이에 두 사람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선후로 해서 비록 느리게 걷고 있지만 걸음 폭은 크게 옮겼다.
두 사람의 키는 모두 컸다. 그리고 모두 황금색 장삼을 입고 있었다. 앞에 있는 자의 옷자락이 너무 길어 거의 발을 덮을 정도였다. 뒤에 있는 자는 그와 대조적으로 옷자락이 짧아 무릎을 간신히 덮을 정도였다.
두 사람에게 또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가장자리가 넓은 죽립을 깊이 눌러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초롱불의 불빛은 매우 밝았지만 그들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앞에 있는 남자는 적수공권으로 아무런 무기도 휴대하지 않았다. 뒤에 있는 자는 허리에 한 자루의 장검을 차고 있었다. 검집이 없는 검이었다.
초류빈은 그것을 보자 문득 그 자가 차고 있는 방식이 낭천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다. 단지 낭천은 검을 허리 중앙에 차고 검자루를 우측으로 향한 데 비해, 이 사람은 검을 허리 오른쪽에 꽂고 검자루는 좌측을 향하게 하고 있었다.
그는 아마 왼손잡이가 아닐까? 초류빈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연히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는 왼손잡이 검수(劍手)와 싸우는 것을 싫어했다. 왼손으로 검을 사용한다면 그 검법은 필경 다른 사람과 상반될 것이다. 게다가 검초 역시 일반 사람에 비해 악랄하고 신비스러워 상대하기가 한층 힘들었다.
검자루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신속함을 위주로 하는 검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초류빈은 첫눈에 그가 만만치 않은 적수임을 간파했다. 그것은 초류빈이 다년간 적을 상대해 온 경험에서 얻어진 결론일 뿐 아니라 그의 초인적인 육감에서 비롯된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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