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34 소이비도 제3권 어떤 쾌락
어떤 쾌락
큰 방이다. 이불은 깨끗하고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살펴도 먼지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방 안은 어딘지 모르게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처럼 허전한 느낌을 주었다.
설소하는 침상머리에 앉아 남자 옷의 단추를 달아 주고 있었다. 그녀의 바느질 솜씨는 검을 사용하는 것만큼 익숙하지 못한 모양이다. 가끔 그녀는 바늘로 자신의 손가락을 찌르곤 했다.
낭천은 창가에 서서 밖의 야색을 멍하니 내다보며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설소하는 단추를 다 달자 고개를 들어 손으로 허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직이 말했다.
"객점은 아무래도 제 성미에 맞지 않나 봐요. 아무리 좋은 객실이라 해도 역시 새장같이 느껴져요.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저는 갑갑해서 숨이 막힐 것만 같았어요."
낭천은 그녀에게 등을 돌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남들이 말하기를 제아무리 금은보석으로 둘러싼 궁전도 자기 소유의 쓰러져 가는 초가삼간만 못하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봐요. 그렇죠?"
낭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응."
설소하는 눈동자를 굴리며 낭천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제가 당신을 집에서 끌어냈다고 해서 마음이 몹시 상한 모양이군요?"
"그렇지 않소."
낭천의 대답은 역시 간단했다.
설소하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입가엔 이상한 미소가 스쳐갔다.
"초류빈이 당신의 친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그를 친구로 사귀는 것도 반대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우린 이미 과거의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을 누리기로 결심했잖아요? 그러려면 그와는 헤어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 같은 사람은 어딜 가나 말썽이 뒤따르니까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다시 눈동자를 사르르 굴렸다.
"우린 다시 말썽을 일으키지 않기로 맹세했잖아요?"
낭천은 여전히 몸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소."
"더욱이 그의 사람됨은 의리를 중요시하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게 탈이에요. 술을 많이 마시면 자연히 실수를 저지르게 되죠. 물론 나중에 술이 깨면 후회하겠지만....."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며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그가 저의 침실문을 박차고 저의 몸을 ....."
낭천은 갑자기 몸을 돌려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며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그 일에 대해선 다시 언급하지 마시오! 알았소?"
설소하는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저도 벌써 그를 용서했어요. 그는 당신의 유일한 친구니까요."
낭천은 눈동자에 고통스러운 빛을 담으며 고개를 떨구더니 힘주어 말했다.
"나에겐 이제 친구는 없소...단지 당신만 있을 뿐이오."
설소하는 몸을 일으켜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 침대 쪽으로 끌고 갔다.
"저에게도 역시 당신뿐이에요."
그녀가 낭천의 손을 잡은 채 침상에 앉았기 때문에 낭천은 자연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녀는 낭천의 얼굴을 바싹 가슴에 끌어안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저는 당신이 제 곁에 있는 것으로 만족해요. 저에게 어떤 귀중한 것을 준다 해도 당신과는 바꿀 수 없어요."
낭천은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설소하는 살짝 몸을 비틀며 긴 치맛자락을 약간 위로 걷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백옥같이 희고 잘 다듬어진 발이 노출되었다. 맨발이었다. 그녀는 낭천의 손을 풀며 아주 자연스럽게 침상에 누웠다.
"급히 길을 달려왔더니 다리가 뻐근하군요. 저의 다리 좀 주물러 주시겠어요?"
낭천이 대답도 하기 전에 그녀는 한쪽 발을 낭천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순간, 낭천의 몸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는 굶주린 늑대가 토실토실한 토끼를 발견한 듯 눈에서 이상한 광채를 번뜩이며 어깨에 올려놓은 그녀의 발을 꼭 쥐었다.
"호호호...간지러워요....."
낭천의 혀가 그녀의 발가락을 애무하자 설소하는 몸을 비비 꼬면서 간드러지게 웃어젖혔다. 낭천은 그녀의 발을 몸 안으로 빨아들이듯 똑같은 행동을 계속했다.
"호호호...이제 그만....."
설소하는 다른 한쪽 발로 그의 얼굴을 살짝 밀면서 교성을 질렀지만 상반신을 가볍게 일으켜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낭천의 머리카락을 감고 있었다. 낭천은 얼굴을 그녀의 치맛자락에 감추며 몸을 심하게 떨었다.
그러자 설소하는 상반신을 완전히 일으켜 부드럽게 그를 밀어내며 곱게 눈을 흘겼다.
"또...저를 원하시는군요."
낭천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설소하의 커다란 눈에선 야수만이 지닐 수 있는 욕정의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낭천은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사실 저도 당신을...원하고 있어요. 벌써부터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치고 싶었어요. 하지만...지금은 아직 그럴 수가 없어요."
"무엇 때문에....."
낭천은 눈을 번쩍 뜨고 그녀를 똑바로 주시했다. 설소하는 눈에 이글거리던 원색의 빛깔을 순식간에 지우고 대신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아직 정식으로 당신의 아내가 아니잖아요."
그 말을 들은 낭천은 다시 고개를 떨구어 장미꽃으로 붉게 물들여진 그녀의 발가락을 보았다.
"나는...나는....."
그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자 설소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저를 정정당당하게 아내로 맞아들이지 못하죠? 제가 예전에 저지른 잘못을 아직도 용서할 수 없나요? 당신은 진심으로 저를 사랑하지 않나 보죠?"
낭천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며 그녀의 발을 잡은 손을 떨었다.
설소하는 다시 그의 얼굴을 바싹 무릎 사이로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저는 이미 마음을 당신에게 바쳤어요...제 마음속엔 오직 당신뿐이에요."
그녀는 경련이 이는 다리를 그의 얼굴에 비비고 있었다. 낭천이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며 홀연 몸을 일으키자 두 사람은 동시에 침상에 떨어졌다.
설소하의 입김은 뜨거워지고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당신은 정말 그렇게도 참을 수가 없나요?...그렇다면 제가 다시 손으로....."
낭천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자신의 몸과 영혼이 산산조각으로 파열되는 것만 같았다. 그의 마음은 후회와 괴로움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는 이렇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라고도 몇 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곁을 떠날 용기가 없었다. 단지 그녀를 살싹 품을 수만 있다면 그는 곧 모든 고통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소하는 한쪽 다리를 다른 한쪽 다리 위에 포갠 채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으며, 한 쌍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아직도 춘색(春色)이 어려 있었다.
'누구에게도 즐거움을 줄 수 있지만 낭천에게 만은.....'
설소하는 속으로 생각을 굴리며 입가에 한 가닥의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의 미소는 아름답고도 잔혹했다. 그녀는 남자에게 고통을 주며 괴롭히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이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즐거움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쿵쿵!
바로 이때 별안간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숨이 넘어갈 듯한 음성이 들렸다.
"문을 여시오! 어서 문을 열어요!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왔소!"
낭천은 벌떡 침상에서 일어나며 싸늘하게 외쳤다.
"누구냐?"
그의 외침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곧장 뛰쳐 들어왔다. 제법 영준하게 생긴 젊은이였다. 그가 방 안으로 뛰쳐 들어오자 방 안은 이내 술냄새로 가득찼다. 이 젊은이는 핏발이 선 눈으로 설소하를 노려보며 방 안에 낭천이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설소하를 가리키며 거칠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당신은 나를 외면했지만 나는 당신이 이곳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소! 이렇게 되었으니 설마 달아나진 않겠지....."
설소하의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냉랭하게 도리어 호통을 쳤다.
"당신은 누구죠? 나는 당신을 모르니 냉큼 여기서 나가 주세요!"
젊은이가 다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나를 모른다고?...정말 나를 모르겠단 말이오? 그날 있었던 일을 벌써 잊었소? 좋아요, 좋아. 나는 고생을 해 가며 당신을 위해 수십 통의 서신을 보내 주었는데 이제 와서 나를 모르겠다니....."
그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앞으로 덮쳐 가 다짜고짜 설소하를 껴안으려 했다.
"당신은 나를 모른다지만 나는 죽는 순간까지 당신을 잊을 수가 없소....."
설소하가 물론 그에게 잡힐 리 만무했다. 그녀는 살짝 몸을 움직여 피하며 놀란 음성으로 외쳤다.
"이 사람이 취했나 봐요!"
젊은이는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외쳤다.
"나는 취하지 않았소! 그때 당신이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서신을 다 보내 주기만 하면 당신은 나와 함께....."
그는 다시 설소하를 향해 덮쳐 가려 했으나 낭천이 이미 앞을 가로막고 칼날같이 예리하게 호통을 쳤다.
"꺼져라!"
젊은이는 그제야 방 안에 제삼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약간 멍해지더니 도리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누구냐? 너는 무슨 자격으로 나를 내쫓느냐? 저 계집의 환심을 사려는 모양인데 분명히 말해 두겠지만 저 계집은 나를 잊듯이 언젠가는 너도 헌신짝처럼 차버릴 것이다."
그는 여기까지 말하더니 다시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어리석은 놈, 가만히 보니 저 계집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군. 저 계집은 최소한 백여 명이 넘는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해 왔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낭천의 주먹이 곧장 앞으로 뻗었다.
펑!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젊은이는 이미 밖으로 날아가 벌렁 마당에 쓰러졌다. 낭천은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쓰러져 있는 젊은이를 한참 노려보았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몸을 돌려 설소하를 응시했다.
설소하는 그제야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엉엉...제가 대관절 무엇을 잘못했죠? 저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왜들 저를 못살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낭천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있는 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한참 후에야 설소하는 울음을 그치고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저에게 당신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당신만이 저를 이해해 주신다면 다른 사람이 저를 어떻게 괴롭혀도 저는 개의치 않을 거예요."
낭천은 눈동자에 분노의 불길을 태우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차후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당신을 괴롭히는 자가 있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소!"
설소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며 애교 있게 물었다.
"정말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건가요?...설사 초류....."
낭천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하게 대꾸했다.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요!"
"고마워요."
설소하는 코메인 소리로 흥얼대며 그를 더욱 힘주어 껴안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이때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엔 비통한 빛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웃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것은 사내들의 마음을 충분히 녹일 수 있는 요염한 웃음이었다.
마당에서도 한 사람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바로 쓰러져 있는 젊은이 옆에 서 있었다. 깡마르고 헌칠한 키에 황금색 옷을 입고 있는 사내로서 허리엔 비스듬히 한 자루의 검이 매달려 있었다. 마당엔 등불이 비치고 있었지만 그다지 훤하지는 못했다. 단지 사내의 얼굴을 어렴풋이 볼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한 등불이었다.
사내의 얼굴엔 세 줄기 흉터가 얼룩져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유난히 깊고 길어 귀밑에서부터 입가까지 그려져 있었다. 그 칼자국으로 인해 사내는 늘 잔혹하고 신비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만약 누가 그의 얼굴을 본다면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의(寒意)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보다도 훨씬 무서운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그의 눈동자는 죽어 있는 빛이었다. 감정도 없을 뿐더러 생명도 없었다.
그는 냉랭히 설소하를 주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남쪽에 있는 객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이어 두 사람이 뜨락으로 들어와 땅에 쓰러져 있는 젊은이를 들고 나갔다. 그 두 사람도 역시 황금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행동이 민첩했다.
설소하는 그제야 완전히 울음을 그치고 발뒤꿈치를 살짝 쳐들어 낭천의 귓부리를 가볍게 깨물며 속삭였다.
"울적해 죽겠어요. 저를 기쁘게 해 주시지 않겠어요?"
낭천은 아무 말없이 침상 쪽으로 걸어가 이불 밑에서 가죽 끈을 꺼내 입에 물더니 침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두 눈으로 침상을 짚은 채 무릎을 꿇었다.
"호호호...초류빈은 제가 가마를 타는 것을 꿈에서 보았다지만 저는 말을 타는 게 더 재미있어요."
그녀는 요염하게 눈웃음을 치며 침상 위로 맨발을 올려놓았다.
"이랴! 이랴....."
나무침상이 요란하게 흔들리며 연신 삐거덕 소리를 냈다.
밤은 더욱 깊어졌다.
방 안에선 낭천의 규칙적인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설소하가 그에게 엽차 한 잔을 따라 준 후 그는 곧 잠들어 버린 것이다.
뜨락은 조용하기만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오동잎은 탄식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낭천이 자고 있는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한 사람이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걸어나오더니 문을 닫는 동시에 숨을 죽여 가며 뜨락을 지나 남쪽에 위치한 객방을 향해 걸어갔다.
남쪽 객방의 창문은 아직도 불빛에 물들어 있다. 그곳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여인의 얼굴과 눈동자를 비쳐 주었다. 크고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다름 아닌 설소하였다.
그녀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에서 이내 나직하게 가라앉은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설소하가 문을 살짝 밀자 과연 문은 열렸다.
얼마 전에 뜨락에 서 있던 사내는 지금 문 쪽을 바라본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석고상을 연상케 했다.
설소하는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 자의 눈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의 눈은 흑백을 분간할 수 없이 전부 잿빛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누구를 쳐다보아도 상대방은 자기를 쳐다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누구를 쳐다보지 않아도 상대방은 꼭 자기를 노려보는 것만 같은 착각이 생길 정도였다.
그의 눈은 날카롭지 않고 빛나지도 않았다. 단지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사악(邪惡)한 힘이 타오르고 있어 심지어 설소하도 그의 눈을 접하자 온몸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달콤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상대방이 무서운 인물일수록 그녀의 웃음은 더욱 달콤하게 변했다. 이것은 그녀가 남자를 상대하는데 있어 일종의 무기였다. 그녀는 이미 이러한 무기를 숙련되고 효과 있게 사용할 줄 알았다. 그녀는 생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선생인가요?"
형무명은 그녀를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볼 뿐 대꾸를 하거나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설소하는 더욱 달콤하게 웃었다.
"형선생의 대명을 저는 벌써부터 들어왔어요."
형무명은 여전히 차갑게 그녀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그의 눈은 이 천하제일 미인을 흡사 나무토막과 다름없이 보는 것이었다.
설소하는 그렇다고 해서 실망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눈웃음을 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형선생은 언제 이곳에 당도했죠? 조금 전에....."
형무명은 돌연 그녀의 말을 중단시키며 냉랭하게 말했다.
"내 앞에서 말을 할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한 가지 일을 명심하시오."
"형선생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명심하겠어요."
"나는 단지 질문을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소. 이젠 알았소?"
"명심하겠어요."
"그리고 내가 묻는 말엔 꼭 대답을 해야 하오. 간단하고 분명하게, 나는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싫어하오. 알겠소?"
"알겠어요."
고개를 숙이며 다소곳이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은 온순한 양(羊) 같았다. 이것은 바로 그녀가 남자를 상대하는 두 번째 무기이기도 했다. 그녀는 남자들이 온순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만약 한 여자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여자의 모든 행동이 온순해 보인다는 사실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형무명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바로 설소하요?"
설소하는 그의 주문대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네."
"당신이 우리에게 이곳에서 만나자는 서신을 보냈소?"
"네."
"당신은 이미 초류빈과 우리가 만날 수 있게 주선했다는데."
"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주선했소?"
이번에는 설소하도 단 한 마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상관방주께서 줄곧 초류빈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를 도왔다는 거요?"
"네."
형무명의 눈은 홀연 가늘게 감기며 눈빛은 마치 한 자루의 화살처럼 변해 싸늘하게 외쳤다.
"우리들을 돕는 목적이 무엇이오?"
설소하는 정색을 했다. 그녀는 정색을 하며 모든 일을 임하는 데 있어 진지한 태도를 취하는 것 같았다.
"저는 초류빈을 저주하기 때문에 그가 죽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럼 왜 당신이 직접 그를 죽이지 않소?"
"저는 그를 죽일 수가 없어요. 그의 앞에 있을 때는 심지어 죽이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어요. 그의 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고 그의 비도는 여지없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 때문이에요."
여지껏 한 대답 중에서 가장 긴 대답이었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형무명의 질문이 뒤따랐다.
"초류빈은 정말 그렇게도 무서운 인물이오?"
"그는 제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람이에요. 그를 죽이려던 사람은 모두 그의 손에 죽었죠. 형선생과 상관방주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서 그를 죽일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들고 살얼음을 녹이는 봄볕같이 온유한 눈빛으로 형무명을 쳐다보았다. 형무명의 검법을 그녀는 비록 보지 못했지만 그의 차가운 신색은 그녀의 눈빛으로 인해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무엇으로 알 수 있다는 거요?"
설소하는 앵두같이 붉은 입술에 살짝 침을 발라가며 대답했다.
"형선생의 그 침착과 냉정한 태도로써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저는 비록 검을 사용할 줄 모르지만 고수들이 싸우는 데 있어 검법의 변화와 출수의 속도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침착과 냉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어째서?"
설소하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천장을 주시하며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싶더니 꾀꼬리같이 울어댔다.
"고수들의 검법이라면 변화를 구사하는데 있어 별로 큰 차이가 없죠. 무공을 어느 단계까지 연마하면 심지어 출수의 속도도 별로 두드러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어느 누구의 태도가 냉정하고 침착한지 거기에 따라 상대방의 약점을 잽싸게 간파할 수 있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죠."
그녀는 부러워하는 듯이 충만된 눈동자로 형무명을 주시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당금 강호에서 검법이 뛰어난 자들을 저도 많이 보았죠. 하지만 어느 누구도 형선생의 침착과 냉정은 따를 수가 없어요."
한 사람을 추켜세우려면 아첨을 떤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상대방의 약점을 적시 적절하게 파고들어 가 그것을 찬양해야 한다. 설소하는 이 방면에 있어 뛰어난 조예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남자를 상대하는 세 번째 무기인 것이다.
남자는 남들이 자기를 추켜세우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상대가 여자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설소하는 그러한 남자의 심리를 노린 것이다. 한 남자의 마음을 정복하려면 천군만마(千軍萬馬)보다도 왕왕 추켜세우는 한 마디가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형무명의 얼굴에선 여전히 아무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은 시월 초하루를 약속 날짜로 정했소?"
설소하는 상대방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내심 당황해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추호도 내색하지 않았다.
"네, 그때까지는 형선생과 상관방주께서 필시 달려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형무명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물었다.
"한데, 당신은 초류빈도 그 날짜에 약속 장소에 나타날 것이라 장담할 수 있겠소?"
"그도 역시 편지를 받았을 테니 틀림없이 나타날 거예요."
"정말 장담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 싸움을 피하지 않아요."
그리고는 웃음을 거두고 부드럽게 말을 계속했다.
"당신의 무공은 물론 그보다 고강하지만 그와 싸울 때는 각별히 조심하세요. 초류빈 같은 사람은 때로 미친 들소로 변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의 눈동자엔 염려와 기대의 빛이 가득차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네 번째 무기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으려면 먼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주고 염려해 줄 줄 알아야 한다.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 만약 이 네 가지 무기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면 백 명의 남자 중에서 아흔아홉 명은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 설소하가 만난 사람은 예외였다. 그는 비단 남자가 아닐 뿐더러 아예 사람이라고조차 할 수 없었다. 다행하게도 설소하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최후의 무기이기도 하며 또한 여인의 가장 원시적인 무기이다. 여인은 때로 남자를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무기가 과연 형무명에게도 효과가 있을지.....
설소하는 망설였다. 절대적인 자신이 있기 전에는 그녀는 절대 섣불리 이러한 무기를 전개하지 않았다. 형무명의 가늘게 뜬 눈은 점점 크게 확산돼 가며 다시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세상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흥미가 없는 것 갈았다. 설소하는 암암리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한 남자에 대해선 그녀도 사실 자신이 없었다.
형무명은 천천히 말했다.
"이제 당신이 하고자 하는 말은 전부 끝났소?"
설소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제야 형무명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한쪽에 놓여 있는 탁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를 등진 채 천천히 찻잔에 차를 따르며 더 이상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설소하는 심지어 일종의 모욕감마저 느끼며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형선생, 만약 다른 분부가 없다면 이만 작별을 고하겠어요."
형무명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품속에서 작은 알약을 꺼내 차와 함께 뱃속으로 삼켰다.
설소하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몰라 한참 기다렸다가 형무명이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자 더 이상 멍하니 서 있을 수가 없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녀가 채 문을 열기도 전에 홀연 등뒤에서 형무명의 음성이 들려왔다.
"풍문에 들으니 당신은 남자를 낚는 것이 취미라는데 그게 사실이오?"
설소하는 멍해졌다.
형무명은 냉랭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은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나를 낚으려 하지 않았소?"
설소하는 눈빛이 새로이 빛나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저는 침착한 남자를 좋아해요."
형무명은 홱 몸을 돌렸다.
"그럼 지금은 왜 포기하려는 거요?"
설소하는 그의 눈이 다시 가느다란 실로 변해 자기의 몸을 훑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눈빛은 마치 그녀의 전나(全裸)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설소하는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의 마음은 무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저는...저는 도저히....."
"하지만 내 몸은 무쇠가 아니오."
설소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형무명은 다시 이빨에 힘을 주어가며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나를 낚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오. 가장 직선적인 방법."
그녀의 눈동자에 점점 춘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설소하는 얼굴을 붉힌 채
"그 방법을 왜 저한테 가르쳐 주지 않죠?"
하고 말하자 형무명은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 방법을 구태여 내가 가르쳐 줘야 한단 말이오?"
말을 끝내는 즉시 그는 홀연 손을 젖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찰싹!
하는 예리한 소리와 함게 설소하의 몸은 허공으로 붕 뜨면서 침상 위에 쓰러졌다.
"음....."
나직한 신음을 토하며 그녀의 얼굴은 아픔으로 일그러졌지만 눈동자에선 광열(狂熱)의 불꽃이 폭사되었다.
형무명은 천천히 몸을 돌려 침상 가까이 걸어왔다. 그리고는 잿빛 눈동자로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설소하는 침상에 쓰러진 채 숙달된 동작으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적나라하게 동체를 드러낸 그녀는 형무명의 허리를 부등켜 안고 신음을 토하듯 외쳤다.
"어서 때려요! 어서...저를 때려 죽여도 좋아요. 저는 당신의 손에 죽기를 원해요....."
형무명의 손은 다시 허공을 그리며 떨어졌다.
방 안에선 쉴새없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속에는 고통보다도 희열이 더 많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학마저 즐기는 게 아닐까?
설소하가 형무명의 방에서 나왔을 때는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멋대로 헝클어져 있고 무척 피곤해 보였다. 심지어 다리를 옮길 힘마저 없어 보였지만 신색만큼은 말할 수 없이 만족스러웠다.
매번 그녀는 낭천의 마음에 불을 질러 놓은 후 자기의 마음대로 불길이 타오르곤 했다. 그래서 그녀는 매번 다른 상대를 찾아 자신의 불길을 꺼야만 했다. 그녀는 가해를 함으로써 즐거움을 만끽하고 가해를 받음으로써 만족을 느낀다.
아침 안개는 뿌옇게 주위에 깔려 있었다. 형무명의 방은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설소하는 그쪽을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고개를 쳐들어 밝아오는 동녘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리고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구월 스무 닷새날이니 아직 닷새가 남았군."
그녀의 입가에 절로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초류빈, 너의 생명도 이제 닷새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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