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29 소이비도 제2권 놀라운 소식





놀라운 소식



손소홍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입가엔 여전히 앵두빛같이 싱그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또 그 고질적인 버릇이 나왔군요. 당신이 물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질문을 던지죠?"

나무라듯 곱게 그를 흘겨 보고는 손소홍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상관금홍 같은 사람의 성질을 당신은 물론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보통 보물이라면 절대 그의 마음을 동요시킬 수가 없죠. 그런데 이번에는 왜 마음이 동요되었는지 아세요?"

초류빈의 대답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르겠소."

손소홍은 지체하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았다.

"그는 왕년의 제일 명협(名俠)이라 알려진 심랑(沈浪)이 영존과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초류빈은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요지(要旨)가 무엇인지 걷잡을 수 없어 다소 표정이 굳어졌다.

"심대협과 선친이 절친한 친구였다는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심대협은 오래 전에 이미 배를 타고 어디론가 은거해 버렸소. 그것이 이번 일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요?"

손소홍은 생긋이 웃었다. 살짝 파들어 가는 보조개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당신에게 계속 질문을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갑갑해서 숨통이 막힐 것 같군요. 좋아요, 당신의 질문에 대답해 드리겠어요. 그 대신 먼저 석 잔을 단숨에 들이킨다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녀는 고의로 초류빈을 취하게 할 속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제시한 문제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대답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초류빈은 취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셔야만 했다.

손소홍은 그제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심대협이 은거하기 전에 영존에게 두 가지 무공비급을 맡겼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그 두 가지 무공비급에는 심대협이 평생 동안 연구한 절학이 전부 수록돼 있죠. 당신은 그 중에서 한 가지만 터득했어요. 비도탈명은 이미 천하무적인데 만약 두 가지 다 터득했더라면 더욱 언급할 여지가 없을 거예요. 그래서 상관금홍 같은 사람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초류빈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멍청해졌으나 곧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나까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있겠소?"

손소홍, 그녀는 다시 말을 받았다.

"그것은 전부 설소하가 조작해 낸 헛소문이란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심대협 같은 절세기인이라면 인간의 약점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무공비급을 남겨 두어 후인들로 하여금 피비린내나는 쟁탈전을 벌이게 하겠어요."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가 설사 무공비급을 남긴다 해도 역시 절대 당신네 집에 남겨 두지는 않았을 거예요. 영존과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당신네 집에 화근을 남기게 할 리가 만무하니까요."

초류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틀림없는 말이오."

손소홍은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당신은 나에게 많은 문제를 묻고 싶겠죠? 그래서 당신에게 다시 질문을 할 권리를 주기 위해 이번에는 당신이 분명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하겠어요."

그녀는 눈동자를 유난히 빛내며 천천히 물었다.

"당신의 마음속은 아직도 그녀뿐이죠? 심지어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 되어 있고...제가 말하는 그녀가 누구인지 당신은 물론 알고 있겠죠?"

초류빈은 다시 멍해졌다. 손소홍이 이런 질문을 던져오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어느 누가 그에게 이 질문을 해도 그는 절대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비밀이며 또한 가장 비밀스러운 고통이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즉, 칼로써 그의 가슴을 도려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손소홍의 눈빛은 하도 부드러워 추호의 악의(惡意)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처녀들은 모두 호기심이 많은데 그녀도 단순한 호기심에서 물은 것일까?

초류빈은 그녀가 자기를 해칠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초류빈에게 이렇게 많은 비밀을 털어놓을 리가 만무하다. 더군다나 그 모든 비밀은 초류빈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다.

손소홍, 그녀의 정체는 대관절 무엇일까? 그녀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비밀을 알고 있을까? 그녀의 조부는 풍진이인(風塵異人)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지금의 이름은 뱀이 허물을 벗은 컵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 그 노인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그는 밖으로 사람을 마중나갔다는데 상대방은 누구일까? 혹시 상관금홍이 아닐까?

낭천과 설소하는 또한 어디에 숨어 있는지...이 많은 문제는 초류빈이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알아내야 할 것들이었다.

초류빈은 함참 침묵을 지키다가 드디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무정(無情)과 유정(有情)은 본디 종이 한 장 차이인 것, 정리하려면 더욱 엉키고 끊으려면 더욱 새로워지는 것...유정인지 무정인지 어느 누가 뚜렷한 정의(定義)를 내릴 수 있겠는가...어느 누가...어느 누가....."

그의 음성은 차츰 낮아지며 나중에 이르러서는 무슨 말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손소홍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신색이 울적하게 변했다.

"자고로 다정한 사람에겐 한(恨)이 남기가 일쑤이지만...당신은 무엇 때문에...무엇 때문에....."

처녀의 음성은 더욱 낮아 심지어 자기 자신도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한참 침묵이 흐른 후에 그녀는 홀연 술잔을 들어올려 단숨에 들이키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패배를 시인하겠어요. 묻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어서 물으세요. 당신은 계속 물을 자격이 주어졌어요. 하지만 만약 내가 정확한 대답을 한다면 당신은 역시 패하는 것이니 술을 마셔야 해요."

초류빈은 지체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낭천은 지금 어디에 있소?"

손소홍은 눈을 흘기며 물었다.

"당신이 첫마디에 그 질문을 하리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그녀를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당신이 가장 관심을 갖는 사람은 바로 낭천이겠죠."

초류빈은 탄식이 앞섰다.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그를 친구로 사귀었다면 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오."

손소홍은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만약 다른 사람이 당신 같은 친구를 사귀게 되면 역시 그 정도의 관심을 가질까요?"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품안에서 똘똘 말은 종이를 꺼냈다.

"낭천이 있는 곳의 위치가 그려져 있는 지도예요. 이 지도대로 찾아가면 그를 만나보게 될 거예요."

초류빈은 힘 있게 그 종이를 움켜쥐며

"고맙소."

하고 간단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는 하루 사이에 두 번째 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 것이다.

손소홍은 그를 정면으로 흘겼다.

"제가 당신 신상에 가장 밀접한 비밀을 말했을 때도 당신은 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당신을 죽이려는 자를 지적해 주었을 때도 당신은 역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무엇 때문에 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거죠?"

"....."

초류빈은 침묵으로 대답을 거부했다.

손소홍은 스스로 그 다음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설사 말을 하지 않는다 해도 저는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 지도가 있어야지만 낭천을 찾을 수 있고 그를 찾아야지만 비로소 그를 마의 수중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거예요."

그녀의 입가에 한 가닥 웃음이 스쳐갔다. 처량한 웃음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설벽운을 위해 곽숭양에게 고맙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당신은 영원히 자기 자신을 위해 고맙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건가요?"

초류빈은 여전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손소홍이 그를 주시하는 눈빛은 봄빛의 햇살처럼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의 할아버지께서는 한 사람이 만약 자기 자신을 위해 생각을 갖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자체가 불쌍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초류빈은 홀연 히죽 웃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만일 한 사람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산다면 그것은 더욱 가련한 인생이 아니겠소?"

이번에는 손소홍이 할 말을 잃어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그녀는 초류빈의 말을 자세히 음미하며 한참 후에야 입가에 한 가닥의 온유한 미소를 떠올렸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산다면 그것도 역시 무의미한 삶이 될 것이다.

초류빈은 다시 술잔을 비웠다.

"손어른은 사람을 정중하게 마중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갔다는데 상대방이 대관절 누구요?"

손소홍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엄격히 말한다면 그분은 누구를 마중나간 게 아니라 전송하러 가신 거예요."

초류빈은 다그치듯 물었다.

"전송이라니...누구를....."

손소홍은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내뱉었다.

"상관금홍이에요!"

이 대답은 다시 초류빈으로 하여금 멍청해지게 만들었다.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급히 물었다.

"상관금홍은 아직 입성(入城)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그를 전송하러 간단 말이오?"

손소홍은 흑백이 뚜렷한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얄미울 정도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는 비록 입성하지 않았지만 저의 할아버지가 성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떠나라고 권한다면 그는 되돌아 가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초류빈은 그녀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님을 알고 내심 놀라움이 컸다.

"그렇다면 손어른은...콜록, 콜록....."

그는 말을 끝까지 맺기도 전에 허리를 구부리고 심한 기침을 했다.

손꼽추는 줄곧 떨어져 있었으나 이때 차마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는지 앞으로 달려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오늘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소. 그리고 너무 빨리 마셨소. 할 말이 더 남아 있다면 내일 다시 하도록 하시오."

초류빈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빙긋이 웃었다.

"당신은 상관금홍이란 사람을 알고 있소?"

손꼽추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모르오. 하지만 모른다는 대답을 했다고 나에게도 술을 권하지는 마시오."

초류빈은 그의 대답을 듣자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나는 당신과 술내기를 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물론 마실 필요가 없소."

손꼽추는 흡사 처음으로 초류빈을 본 듯 눈이 휘둥그래진 채 그를 주시했다. 왜냐하면 그는 초류빈이 이렇게 대소를 터뜨리는 것을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초류빈 같은 사람도 대소를 터뜨리리라곤 아마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초류빈은 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대답은 내가 해 주겠소. 상관금홍은 천하제일 고수로 자부하는 자로서 눈에 보이는 게 없을 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의 뜻을 꺾을 수가 없소. 그런데 손어른이 그를 되돌려 보낼 재간이 있다니 손어른이 어떠한 인물인지 당신은 짐작할 수 있겠소?"

손꼽추는 고개를 좌우로 내둘렀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소?"

초류빈은 다시 피식 웃었다.

"나도 역시 걷잡을 수가 없소. 그래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물어야겠소. 설사 내가 취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손꼽추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은 너무나 많은 문제를 물었소. 이 상태로 나가면 곧 취해서 정신을 잃게 될 것이오."

초류빈은 계속 히죽히죽 웃을 뿐이었다.

"취한들 어떻소? 사람이 살아가는데 취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을 것 같소?"

그는 다시 술잔을 들어올렸다.

"손낭자, 묻겠는데 손어른은 도대체 누구요?"

손소홍은 깜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손어른은 바로 저의 아버님의 부친이며 저의 조부님이에요."

초류빈은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그렇군. 그래. 아주 정확한 대답이군....."

그는 말을 끝내는 즉시 술잔을 비워 버렸다. 이 한 잔을 들이키자 그의 눈빛이 게슴츠레하게 변해 혀마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직도 묻고 싶은 말이 있소!"

그의 표정을 살피던 손소홍의 눈빛이 횃불처럼 밝아졌다.

"취해서 정신을 잃기 전에 어서 물어 보세요."

초류빈은 상체를 기우뚱거리며 불투명한 음성으로 물었다.

"묻겠는데 낭자는 무엇 때문에 나를 취하게 만들었소? 그 속셈이 무엇이오....."

"애당초부터 당신과 술 내기를 했으니 당연히 당신을 취하게 만들어야죠. 누구나 술을 마실 때는 상대방이 자기보다 일찍 취하기를 바라니까요. 제 말이 틀리나요?"

초류빈은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번쩍 들어올려

"맞았소, 맞았소. 일리가 있는 말이오....."

하고 흥얼거리더니 술잔을 비우고는 드디어 상 위에 머리를 처박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대취한 모양이다.

손소홍과 손꼽추는 모두 아무 말없이 조용히 초류빈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초류빈이 진짜로 취했는지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손꼽추는 등불을 밝히며 중얼거렸다.

"저녁 밥을 먹을 시간이 되었으니 또 손님들이 들어오겠군."

그는 중얼거리면서 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뜻밖에도 겉문을 닫고 다시 안쪽에서 문을 잠그는 게 아닌가. 장사를 할 뜻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손소홍마저 내보내지 않을 모양인 것 같았다. 그런데도 손소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겉문은 제법 무거웠다. 평상시라면 손꼽추는 겉문을 닫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지만 오늘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마치 지푸라기라도 들어올리듯 겉문을 거뜬히 들어올리는 게 아닌가.

손소홍은 홀연 명랑하게 웃었다.

"남들이 다 이숙부(二叔父)님을 천하 제일가는 장사라 일컫지만 저는 오늘에서야....."

손꼽추는 고개를 돌려 이맛살을 찌푸렸다.

"누가 낭자의 이숙부란 말이오? 낭자는 혹 취한 게 아니오?"

손소홍은 까르르 웃었다.

"숙부님의 연기는 그 동안 정말 훌륭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숨길 필요가 없어요."

손꼽추는 그녀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돌연 한광(寒光)이 폭사돼 나왔다.

그 한 쌍의 눈은 도저히 손꼽추의 눈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초류빈도 만약 그의 눈을 보았다면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근 이 년 동안이나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 왔지만 초류빈은 손꼽추의 진면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지 초류빈이 지금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게 애석할 뿐이다.

손소홍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오늘 일부러 취한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취했어요."

손꼽추의 음성은 심각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그를 취하게 만들었지?"

"숙부님도 모르고 있었군요. 그것은 할아버님의 분부였어요."

"무엇이....."

"그의 행적이 이미 탄로났기 때문에 며칠 사이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연속 이곳에 나타날 거예요. 그래서 할아버님은 잠시 풍파를 피하기 위해서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갈 생각인가 봐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숙부님도 그의 성격을 잘 아시잖아요. 만약 그를 취하게 만들지 않으면 어떻게 다른 곳으로 데려갈 수가 있겠어요?"

손꼽추는 못마땅한 듯 흥, 코웃음을 쳤다.

"솔직히 말해 너의 할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대해선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이해가 가지 않는다뇨? 어느 것을 이해 못하겠다는 거죠?"

"초류빈이 사기소침(士氣消沈)하여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그를 나타나게 하더니 이제 와서 초류빈이 나서게 되니 그 어르신네가 도리어 그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다니. 대관절 무슨 속셈인지 걷잡을 수가 없구나."

손소홍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숙부님 그것은 숙부님의 그릇된 생각이에요. 사기소침과 당분간 피신하는 것을 어떻게 한 데 묶어 논할 수가 있나요? 그것은 엄연히 별도의 문제예요."

그녀는 상 위에 엎드러져 있는 초류빈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숙부님은 이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나요?"

손꼽추는 여전히 냉랭한 표정이었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제아무리 많다 해도 상관금홍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느냐?"

손소홍은 그의 말을 부인했다.

"숙부님은 또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초류빈의 목숨을 노리는 자라면 자연히 무시할 인물들이 아니에요."

손꼽추는 그래도 불복하는 기색이었다.

"그 자들이 누구인지 어디 한번 말해 봐라."

손소홍은 지체하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았다.

"남자는 제쳐 놓고 우선 여자만 하더라도 묘강(苗疆)의 대환희 여보살(大歡喜女菩薩)과 관외(關外)의 남갈자....."

그녀가 단지 두 사람의 이름을 내뱉었는 데도 손꼽추는 이미 눈살을 잔뜩 찌푸려야만 했다.

손소홍은 차분한 음성으로 계속했다.

"백요생은 원래 중남경녀(重男輕女)하여 병기보를 작성할 때 여자 고수들을 열거하지 않았지만 방금 두 여자의 이름을 숙부님은 들은 바가 있겠죠?"

손꼽추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소홍은 손꼽추를 바라보며 앵두 같은 입술을 계속 나불거렸다.

"남갈자는 청마수의 정인이고 대환희 여보살은 오독 동자의 의모(義母)예요. 그들은 벌써부터 초류빈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곳에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당장 달려올 것이 분명해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그들 중에 한 사람만 달려와도 초류반은 골머리를 앓게 되는 거예요."

손꼽추는 걸레를 집어 천천히 상을 닦고 있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늘 걸레질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손소홍이 다시 말했다.

"남자 고수라면....."

그녀는 눈을 감으며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상관금홍을 비롯해 여봉선(女鳳先), 형무명(荊無命)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는데 숙부님은 아마 누구인지 알아맞히지 못할 거예요."

손꼽추는 계속 천천히 상을 훔치며 고개를 돌리고 반문했다.

"그게 누구냐?"

"호불귀(胡不歸)예요."

그녀가 호불귀라는 세 글자를 입 밖에 내뱉자 손꼽추는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놀라운 빛이 역력히 서려 있었다.

"호불귀라면...바로 그 호풍자(胡風子)를 말하는 것이냐?"

호풍자라 함은 즉 미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손소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자는 항상 미친 사람처럼 횡설수설하여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죠. 그가 사용하는 것은 죽검인데 풍문에 의하면 때로는 몸의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하면서 절묘한 검초(劍招)가 전개된다지만, 어느 때는 검법이 형편없대요. 그래서 백요생이 병기보를 작성할 당시 그의 이름을 열거하지 않았다더군요."

손꼽추의 신색은 더욱 심각하게 변했다.

"절모한 초식은 그의 진짜 실력이고 형편없는 검법은 그가 고의로 꾸민 것이다."

이렇게 중얼거린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신조가 있어 여지껏 누구와 친분을 맺거나 원한을 맺은 일이 없는데 이번에 어째서 초류빈의 목숨을 노리게 되었지?"

손소홍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풍문에 의하면 호유성이 그를 모셔왔다고 해요. 호유성의 스승은 또 왕년에 그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고요."

손꼽추는 그래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사람을 모셔내기는 하늘의 별따기인데 호유성은 제법 수단이 비범하군."

"그를 모셔오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호유성은 집을 떠난 지 이 년 만에 돌아온 거예요."

"네가 방금 말한 여봉선은 바로 그 병기보에 다섯 번째로 열거돼 있는 온후은극(溫侯銀戟)이냐?"

"네, 맞아요. 그가 찾고 있는 대상은 초류빈 한 사람에게 국한돼 있지 않죠."

"그럼 다른 사람의 목숨도 노리고 있단 말이냐?"

"그 자는 근래에 와서 몇 가지 독특한 무공을 터득했기 때문에, 병기보에 그의 앞쪽에 이름이 열거돼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겨루어 볼 생각을 갖고 있죠."

"그...형...형....."

"형무명 말이에요."

"그렇다. 그 형무명은 또한 어떤 인물이냐?"

"그도 역시 검을 사용하는 사람이에요. 그의 수법은 낭천과 같이 악랄하고 정확하며 빠르죠. 그 외에 또 한 가지 무서운 점이 있어요."

손꼽추는 정신을 집중시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손소홍은 숨을 한 번 크게 쉬더니 청산유수처럼 말끝을 끌어나갔다.

"그는 웬만해선 출수를 하지 않죠. 하지만 일단 손에 검이 쥐어지면 우선 자신의 생명을 도외시해 버리죠. 죽음을 각오하고 초식을 전개하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형무명이라고 하는 것 같아요."

이번에 손꼽추는 더욱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의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그 어르신네와 저는 성 밖에서 만나기로 약속돼 있어요."

하고 말한 그녀는 생긋이 웃으며 다시 초류빈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할아버님은 제가 초류빈을 데려올 능력이 있을 것이라 믿고 계시죠."

심각한 신색을 하고 있던 손꼽추는 그녀의 퉁명스러운 말을 듣자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요 깜찍한 계집애, 이제는 정말 불여우가 되었구나."

손소홍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곱게 흘겼다.

"제 나이도 이제는 스물에 가까운데 숙부님은 그래도 저를 계집애라고 부를 거예요?"

손꼽추는 감회가 깊은 듯 길게 숨을 들이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군. 너도 이제는 다 컸구나. 전에 내가 너를 보았을 때는 대여섯 살 먹은 어린애였는데 어느 새 어른이 되어 버리다니...세월은 덧없이 흘러가 버렸군....."

그는 고개를 숙여 자기가 들고 있는 걸레를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다시 천천히 상을 훔치기 시작했다.

손소홍 역시 고개를 숙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숙부님이 집을 떠난 지가 아마 십사 년은 되었죠?"

손꼽추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며칠만 지나면 꼭 십사 년이 된다."

손소홍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숙부님은 왜 그동안 한 번도 집에 돌아오시지 않았죠?"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꼽추는 홀연 상을 내리치며 호통을 치듯 외쳤다.

"내가 이곳에서 십오 년을 지키겠다고 남과 약속한 이상 한 시라도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대장부의 약속이 어떠한 것인지 너는 모른단 말이냐?"

손소홍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잘 알고 있어요."

한참 시간이 경과되자 손꼽추의 눈길은 다시 손에 쥐어져 있는 걸레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가 다시 상을 훔치기 시작하자 예리하던 눈빛은 점점 색채를 잃어갔다. 전에 무슨 일을 했던 인물이든 십사 년이란 세월을 걸레질하는 데에만 전념을 했다면 역시 손꼽추같이 변할 것이다. 걸레질은 비단 상에 묻어 있는 기름때를 훔쳐 버릴 뿐 아니라 자신의 광채마저 닦아 버리는 것이다.

손꼽추는 한숨을 삼키며 서서히 물었다.

"그동안 집안 식구는 모두 무고하더냐?"

손소홍은 그제서야 얼굴을 쳐들고 활짝 웃었다.

"네, 모두 잘 있어요. 단지 숙부님이 하루 속히 돌아오시길 바라고 있을 뿐이에요."

손꼽추는 억지로 미소를 보였다.

"내년 설날엔 돌아가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너는 어서 초류빈을 데리고 떠나도록 해라."

그는 여기까지 말하더니 초류빈을 힐끗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렇게 무거운 사람을 어떻게 네가 데리고 갈 작정이냐?"

손소홍은 생긋이 웃었다.

"취한 산돼지라 생각하고 어깨에 짊어지고 가면 되죠."

그녀가 말을 하면서 막 몸을 일으키자 홀연 한 사람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임의로 떠날 수 있지만 저 취한 산돼지는 남겨 두고 가거라."

느닷없이 들려온 음성은 나직한 신음 같기도 하고 남자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매력이 곁들여 있기도 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여인의 음성임이 분명했다.

손꼽추와 손소홍은 모두 문 쪽을 향해 서 있었는데 그 음성은 뒤뜰로 통하는 작은 길 쪽에서 들려왔다. 여인이 언제 집안으로 들어왔는지 손소홍과 손꼽추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손꼽추는 대뜸 안색이 변하며 손에 쥐고 있는 걸레를 냅다 던졌다.

그는 십사 년 간 상을 닦아왔다. 매일 만약 스무 번을 닦았다면, 일 년이면 칠천삼백 번, 십사 년이면 십만 하고도 이천이백 번을 닦았을 것이다.

상을 닦을 때 그의 손은 항상 걸레를 꼭 쥐었다. 어느 누구라 해도 십사 년 간 상을 닦아왔다면 손 힘이 다른 사람보다는 클 것이다. 더군다나 손타자의 대응조력(大應爪力)은 원래부터 강호에 이름이 나 있던 터였다.

지금 그가 걸레를 냅다 던지자 그 위력은 천하의 어느 암기만 못지 않았다.

펑!

굉음이 울리는 가운데 흙먼지가 일며 벽 돌담이 걸레에 맞아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문 옆에 서 있는 여인은 어떻게 몸을 피했는지 제자리에 여전히 서 있었다.

그녀는 전혀 몸을 움직인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서 있는 위치로 보아 걸레는 그녀의 가슴에 구멍을 내야지만 이치가 성립된다. 그런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걸레는 그녀의 몸을 지나 담벽에 격중된 것이다.

아마 그녀의 허리가 유난히 가늘기 때문에 몸을 비틀기에 편리했던 모양이다. 허리가 가는 여인은 외관상 몸매가 늘씬하고 성적인 매력마저 느끼게 한다.

이 여인의 매력적인 부분은 비단 허리뿐만이 아니었다. 쭉 뻗은 다리, 풍만한 젖가슴, 갸름해야 할 데는 절대 굵지 않고 풍만해야 할 부분은 절대로 빈약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자석이 달려 있는 것 같았고 입은 비교적 컸다. 그리고 입술도 두터운 편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비록 희지만 매끈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머리칼은 숱이 많고 윤기가 흘렀다.

엄격히 말해 아리따운 여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들로 하여금 죄를 저지르게 할 마력을 지녔다고 하면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대다수의 남자가 그녀를 본다면 자연히 가슴 밑바닥에서 일종의 묘한 충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녀 자신도 그 묘한 충동으로 인해 갈구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남자에게 실망을 준 적이 극히 드물었다. 그녀는 몸에 꼭 달라붙는 남색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곡선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손꼽추는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도 역시 손꼽추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손꼽추를 이 세상에서 가장 영준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남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손소홍에게 옮겨졌을 때 눈빛은 즉시 얼음장같이 차갑게 변했다. 그녀는 어떠한 남자라 해도 다소간 흥미를 갖고 있었다. 반면 어떠한 여인에 대해서도 그녀는 적의를 품고 있었다.

손꼽추는 헛기침을 두 번 하더니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네가 바로 남갈자냐?"

남갈자는 대답을 하기에 앞서 만면에 웃음을 떠올렸다.

그녀가 웃자 긴 눈은 더욱 가늘어지며 한 줄기 선(線)을 형성했다. 그것은 남자의 마음을 낚아챌 수 있는 선이었다. 그녀는 눈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보는 눈이 정확하군요. 저는 그런 남자를 좋아해요."

손꼽추는 험악한 표정을 하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남갈자가 말을 계속했다.

"나도 역시 보는 눈이 정확하죠. 당신네들의 신분을 알고 있으니까요."

손꼽추는 그제서야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우리들의 신분을 알면서도 감히 이곳에 나타났단 말이냐?"

남갈자는 눈고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당신네들과 적대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초류빈만은 데려가야 해요."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아마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남자는 그다지 많지 않아요. 천신만고 끝에 한 사람을 찾아냈는데 초류빈 때문에 목숨을 잃었어요."

손소홍은 참다 못해 한 마디를 내던졌다.

"이곡은 그의 손에 살해당한 게 아니에요!"

남갈자의 말투는 강경했다.

"비록 그가 친히 손을 쓰진 않았지만 그로 인해 이곡이 살해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손소홍의 태도도 역시 강경했다.

"어찌 되었든 절대 그를 데려가게 할 순 없어요."

남갈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여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당신네들이 쉽사리 그를 내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당신네들과 싸움을 벌일 생각도 없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현명하죠?"

그녀는 여기까지 말하더니 홀연 등 뒤를 향해 손짓을 하며 나직이 외쳤다.

"이리 가까이 오세요."

손꼽추는 그제서야 뒤뜰에 있는 한 줄기의 인영을 발견했다. 그자의 허우대는 우람했다. 남갈자가 손짓을 하자 사나이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왔다. 나타난 사나이는 일신에 호화스러운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허리엔 한 자루의 구환도(九環刀)를 차고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것은 턱밑에 기른 윤기가 흐르는 긴 수염이었다.

남갈자는 그 사나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당신네들은 이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손꼽추는 고개를 돌려 흔들었으나 손소홍이 앞을 다투어 대꾸했다.

"나는 알고 있어요. 그의 이름은 초상우(初相羽)라 하며 별호로는 활패왕(活覇王), 경성 홍운표국의 총표두죠."

남갈자는 활패왕을 요염하게 흘겨보며 말했다.

"저렇게 젊고 예쁜 낭자도 당신을 알고 있으니 정말 명성이 혁혁한 모양이군요."

활패왕은 가슴을 펴며 득의양양해 했다.

손소홍의 경멸하는 말투가 뒤이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강호에서 다소 명성이 있는 자라면 거의 알고 있죠. 한데 저 초총표두가 어떻게 해서 당신과 함께 어울리게 되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남갈자는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라 어제 길가에서 나를 낚았기 때문에 알게 되었죠."

그녀는 활패왕의 긴 수염을 어루만지며 요염하게 웃었다.

"나도 역시 이분의 수염이 마음에 들어 순순히 그를 따라간 거예요."

손소홍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가 당신을 낚았는지, 아니면 당신이 그를 낚았는지 모르겠군요."

남갈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활패왕과 손소홍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물론 그가 나를 낚은 거죠. 당신네들은 단지 활패왕의 명성과 무공이 높다는 사실만 알 뿐 미인을 낚는 그의 고명한 솜씨에 대해선 모르는 모양이군요."

손꼽추는 벌써부터 노기충천해 있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우악스럽게 외쳤다.

"그 자를 데려온 목적이 무엇이냐?"

남갈자는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도리어 반문했다.

"총표두란 직책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히 무공도 고강하겠죠?"

손꼽추는 냉소를 날릴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남갈자는 자기의 권력과 관계 있는 일을 얘기하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 초총표두의 도법(刀法)은 남이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일가견을 지니고 있죠. 일단 만승연환도법(萬勝連環刀法)을 전개하면 웬만한 사람 십여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감히 그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어요."

손꼽추는 다시 냉소를 터뜨렸다.

남갈자는 다정한 눈빛으로 활패왕을 바라보며 엉뚱한 방향으로 말을 돌렸다.

"이렇게 무공이 고강한 활패왕을 내가 만약 단 일격에 죽여 버릴 수 있다면 당신네들은 믿겠어요?"

줄곧 득의에 찬 미소를 띠고 그 자리에 서 있던 활패왕은 이때 마치 독사에게 갑자기 물린 듯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뭐라고 했소?"

남갈자의 음성은 부드럽기만 했다.

"대수로운 것은 아니에요. 단지 당신의 목숨을 요구했을 뿐이에요."

활패왕은 더 이상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으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홀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농담도 잘하는군."

그로서는 남갈자가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남갈자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아 올린다는 말이 있으니 설마 내가 당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겠죠?"

활패왕은 멋쩍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당신의 농담은 다소 지나친 것 같소."

남갈자는 안색 하나 변하지도 않고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갈자(蝎子)라는 독벌레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요?"

활패왕은 그녀가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지 영문을 몰라 약간 멍해졌으나 역시 대답을 했다.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북부지방에 그런 독벌레가 가장 많지 않소!"

"그렇다면 암갈자에게 한 가지 괴상한 버릇이 있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겠네요?"

"무슨 버릇인지....."

"모른다면 내가 가르쳐 드리겠어요. 암갈자는 수갈자와 교배한 후 꼭 수갈자를 잡아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약한 버릇을 지니고 있어요."

활패왕의 안색이 약간 변했으나 입가엔 여전히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갈자가 아니잖소?"

남갈자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요염하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오산이에요. 내가 바로 남들이 말하는 남갈자예요. 이젠 알았겠죠?"

그 말을 들은 활패왕은 즉시 몸을 번뜩여 뒤로 일곱 자 가량이나 물러났다. 그리고는 마치 무덤에서 방금 나온 귀신을 만난 듯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허리에서 구환도를 뽑아 가슴 앞으로 비스듬히 들어올렸다.

남갈자를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엔 공포의 기색이 역력히 보였다. 그는 강호 물을 다년간 마셔온 위인으로서 물론 남갈자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송사리보다 더욱 낚기 쉬웠던 여인이 바로 남갈자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남갈자의 음성은 유난히 부드러웠다.

"한마디 충고를 해 주겠는데 저승에 가서라도 길에서 여인을 낚으려면 우선 상대방의 정체부터 정확히 간파할 줄 알아야 해요 ....."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활패왕에게 다가갔다.

"내 말을 명심하면 저승에서는 좀더 오래 살 수 있을 거예요."

활패왕은 그녀가 한걸음씩 다가오는 것을 보자 찢어지는 듯한 소h리로 외쳤다.

"멈춰라! 한걸음만 더 내딛는다면 우선 네년을 없애 버리겠다!"

남갈자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코맹맹이 음성으로 말했다.

"좋아요. 소원이라면 어서 나를 죽이세요. 당신 손에 죽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군요."

활패왕은 대갈일성과 함께 구환도를 후려쳐냈다. 주위는 이내 광풍노도와 같은 도풍(刀風)에 휩싸였다. 대단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 일격밖에 전개하지 못했다.

한 줄기 시퍼런 광채가 하늘을 수놓는 순간 활패왕은 이미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땅에 쓰러졌다. 비명소리는 지극히 짧았다. 그의 몸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단지 목줄기 부분에 두 개의 붉은 점이 나타나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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