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41 소이비도 제3권 거인과 비자





거인과 비자



문은 작지만 담장은 높았다. 정원은 고요에 잠긴 채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긴 복도를 지나 한참 걷자 비로소 대청이 나왔다.

이때 병풍 뒤에서 한 사람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러분들은 이미 내 형제를 모셔왔소?"

그 낭랑한 음성을 듣자 초류빈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번 계획의 주모자는 뜻밖에도 호유성이었던 것이다.

장님은 바로 병풍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분부대로 이미 초탐화를 모셔왔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풍 뒤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그는 비단옷을 입고 만면에 웃음을 띤 호유성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는 걸어나오자마자 초류빈의 손을 덥석 잡고 웃으며 말했다.

"그간 이 년 동안 정말 자네를 보고 싶었네. 그동안 별고 없었나?"

초류빈도 그에게 웃음을 보였다.

"형님의 분부만 있으면 저는 한시라도 빨리 이리로 달려올 텐데, 구태여 이렇게 많은 친구들에게 수고를 끼치지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거렁뱅이는 손뼉을 치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내 얼굴이 절로 붉어지는군. 저런 말을 듣고도 안색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

호유성은 별안간 귀머거리가 된 듯 거렁뱅이의 야멸찬 말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초류빈의 손을 잡은 채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자네가 꼭 나를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미리 술을 준비해 두었으니 오래간 만에 실컷 취해 보도록 하세."

그는 초류빈을 부축하며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하지만 장님의 발은 땅에 뿌리가 박힌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지 않자 그의 형제들도 역시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호유성은 약간 멋쩍은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여러분들, 내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자리에 앉아 주시오."

그러자 장님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우리들이 이번 일을 수락한 것은 철전갑을 잡기 위해서였소. 이제 우리들의 임무는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야겠소. 철전갑한테 소식이 오면 즉시 우리들에게 알려 주시오."

말을 끝낸 그는 죽장으로 땅을 한 번 찍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대청엔 과연 푸짐한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장님 등은 떠나갔지만 거렁뱅이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앞을 다투어 상좌(上座)에 앉더니 중얼거리듯 혼자말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 나도 떠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주안상을 보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군."

이어 그는 초류빈에게 술잔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도 한 잔 하시구려. 물론 술맛이 없겠지만....."

호유성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초류빈을 향해 말했다.

"현제, 자네는 아마 이 호대협을 모를 걸세."

초류빈은 그 말을 듣자 눈빛이 빛났다.

"호대협이라면 이름이 혹시 불귀가 아니오?"

거렁뱅이는 술잔을 단숨에 비우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그렇소. 내가 바로 호불귀요. 다시 말해 호불귀가 바로 나란 말이오. 당신은 비록 나를 호대협이라 칭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오?"

초류빈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하하...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오. 보아하니 당신도 역시 미친 사람 같소. 당신이 만약 미치지 않았다면 호유성 같은 사람을 친구로 사귀었겠소?"

초류빈은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호불귀는 자기 술잔에 술을 따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도 그의 친구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내가 그를 도와 준 것은 그에게 온정을 입은 적이 있기 때문이오. 이번 일을 끝냈으니 나는 그와 이제 아무런 관계가 없소."

그는 술잔을 비우더니 갑자기 탁상을 힘껏 내리쳤다.

"단지 이번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비겁한 수단을 전개한 것에 대해선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소. 나는 비겁하고 옹졸하며 아주 쓸모없는 인간이오!"

그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뺨을 여러 차례 후려치더니 다시 책상에 코를 박고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호유성은 그의 괴팍한 행동에 대해 이미 만성이 된 듯 안색이 동요됨이 없이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도리어 초류빈이 멋쩍은 생각이 들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었든 간에 호형이 맨 나중에 출수한 일격은 설사 내가 사전에 경계를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역시 피하지 못했을 것이오."

호불귀는 다시 탁상을 내리치며 성난 음성으로 외쳤다.

"그건 당치도 않은 소리요! 절대 그럴 리가 없소. 내가 만약 간계를 쓰지 않았다면 아예 당신을 건드리지도 못했을 것이오. 내가 당신을 해쳤는 데도 당신은 도리어 나를 위로해 주니 그게 대관절 무슨 뜻이오?"

초류빈은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 호불귀라는 사람의 마음을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호불귀는 중얼거리듯 말을 계속했다.

"나는 본래 정신이 이상해 회로가 일정치 않고, 흑백을 뚜렷이 분간할 줄 모르며 행동과 언어에 두서가 없으니 표본적인 나쁜 놈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눈을 부라리면서 호유성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너는 나보다 더 나쁜 놈이다. 그리고 너의 아들은 너보다도 더욱더 고약한 녀석이야. 그는 엄연히 두 다리가 있으면서도 개처럼 땅에서 기고 있으니 상다리 밑에 떨어진 뼈다귀라도 갉아먹을 속셈인가 보지?"

좀처럼 붉어질 줄 모르는 호유성의 안색도 이때는 홍당무로 변했다. 그가 즉시 고개를 숙여 보니 과연 호천강이 어느 새 탁상 밑으로 기어 들어와 손에 칼을 쥔 채 초류빈을 겨냥하고 있지 않은가.

호유성은 대뜸 그를 끌어 일으켜 험상궂은 얼굴로 호통을 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호천강의 신색은 뜻밖에도 태연자약했다.

"대장부는 은원(恩怨)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아버님께서 늘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그가 저의 무공을 폐지시켜 평생 동안 그늘에서 살게 만들었으니 제가 그의 두 다리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호유성의 안색은 급기야 붉으락푸르락 연신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너는 복수를 할 생각이란 말이냐?"

호천강의 눈동자는 원한의 불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넌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제가 알고 있는 그는 단지 저의 불공대천의 원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유성의 손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는 너의 원수이기 전에 나와는 피를 나눈 결의형제라는 것을 명심해라. 그가 너에게 어떤 교훈을 내리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그에게 복수심을 품고 함부로 무례하게 구느냐?"

뺨을 얻어맞은 호천강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눈동자를 사르르 굴리더니 홀연 초류빈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제 잘못을 알았습니다. 저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너그러운 아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초류빈이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한데 호불귀가 펄쩍 뛰며 큰소리로 외쳤다.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군. 구역질이 나서...구역질이....."

그는 큰소리로 외쳐 대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호유성이 억지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한 사람의 이름은 혹시 잘못 지어질 경우도 있지만 별호만은 절대 잘못 붙여지지 않는 걸세. 어떤 사람은 미련하기가 곰과 같지만 이름만큼은 총명이라고 지을 수가 있겠지만 한 사람의 별호가 미친 사람이라면 그는 영락없는 미치광이라네."

초류빈은 원래 입을 열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어 한 마디 던졌다.

"하지만 그 사람이 만약 너무 총명하고 아는 일이 많으면 역시 천천히 미치광이로 변할 것입니다."

호유성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미치광이는 왕왕 정상적인 사람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미치광이가 되는 사람도 적지 않죠."

호유성은 빙긋 웃었다.

"다행하게도 나는 똑똑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히 미치광이가 될 수 없군."

이때 호천강은 슬그머니 밖으로 물러났다.

초류빈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숙여 술잔에 담겨 있는 술을 천천히 들이켰다. 그는 혈도가 찍혀 있기 때문에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다. 호유성은 절반 가량 남은 그의 술잔에 다시 술을 따라주며 조용히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초류빈이 느릿느릿 술을 마실 때는 필경 중요한 말이 뒤이어 나오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동안의 침묵이 흐르자 초류빈은 고개를 들었다.

"형님....."

호유성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했다.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이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과연 그의 예측대로 초류빈은 다음 말을 이어갔다.

"형님, 나는 줄곧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말이 있는데 지금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서 말해 보게."

초류빈은 상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다년간 사귀어 온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호유성은 자기 앞에 있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친구가 아니라 형제였지."

"제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형님께서 아마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네."

호유성은 천천히 대답하며 눈가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그도 역시 사람이었다.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다소 인성(人性)을 지니고 있기 마련인가 보다.

초류빈은 그의 눈가에서 이는 경련이 차츰 손으로 옮겨져 가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럼, 형님께서 저에게 무엇을 원하든 직접 대놓고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호유성은 자기의 얼굴을 가리려는 듯 천천히 술잔을 들어올렸다. 초류빈이 그를 위해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다시 한동안의 침묵이 흐르자 호유성은 비로소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자네의 뜻은 내 잘 알고 있네. 하지만...시간은 때로 많은 일에 대해 변화를 가져오게 하네."

초류빈의 눈동자엔 고통스러운 기색이 더욱 농후해져 갔다.

"저도 역시 형님이 저에 대해 다소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초류빈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오해라니....."

초류빈은 힘을 주며 말했다.

"오해입니다. 완전히 오해입니다. 오해를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형님은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호유성의 눈동자에도 한 가닥의 고통스러운 빛이 스쳐갔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일은 절대 오해가 아니라고 나는 장담할 수가 있네."

초류빈은 즉시

"그게 무슨 일입니까?"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었으나 이내 후회했다. 왜냐하면 그는 호유성이 말하려는 그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호유성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가 그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네."

초류빈은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대다수의 사람은 모두 고통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네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깊고 또한 많네."

"그럴까요?"

"자네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기 때문이네."

초류빈은 고개를 숙여 술을 마셨다. 격동되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호유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초류빈은 고개를 숙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자네의 고통은 그래도 가장 깊다고는 말할 수 없네. 한 사람이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돕는다는 것은 때로 안위가 될 수도 있고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수도 있으니 고통은 자연히 감소될 걸세."

칼날같이 예리한 말이었다. 그리고 일리가 없지도 않았다. 단지 그 일리는 결정적인 것이라고는 정의를 내릴 수 없다.

호유성의 술잔을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지 아마 자네는 아직 모르고 있을 걸세."

"글쎄요....."

"자기의 처는 남이 양보해 준 여자이며 그 아내가 줄곧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그렇다. 그것은 가장 큰 고통이다. 그건 고통일 뿐 아니라 일종의 모독이다. 남자라면 원래 그런 말을 죽어도 입 밖에 내지 않으려 한다. 그런 일은 자신에 대해 너무나도 큰 모독이며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한데 호유성은 그런 말을 스스로 입 밖에 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초류빈에게.

초류빈의 마음은 천 길이 넘는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호유성의 그 말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 호유성은 확실히 자기보다도 더 괴로워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무서우리만큼 변한 것이다. 아마 다른 남자라 해도 그같이 변하기는 십상일 것이다. 초류빈은 그도 역시 불쌍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가련한 사람은 왕왕 무서운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호유성이 이미 그의 앞에서 그런 말을 내뱉은 이상 절대 그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초류빈은 비록 생사를 담담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과연 지금 이 상태로 죽을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별로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 마디 할 때마다 깊이 생각한 연후에 천천히 내뱉곤 했다.

밖은 흐린 날씨였다. 그래서 아직 등불을 밝힐 때가 되지 않았는 데도 하늘색이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호유성의 안색은 찌푸린 날씨보다도 더욱 어두웠다. 그는 술잔을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그는 술을 못 마시는 게 아니라 마시기 싫었다.

술은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다. 제아무리 냉혹한 사람일지라도 충동이 일면 다소 감정이 생긴다. 호유성은 행여나 자신의 감정이 되살아 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시 긴 침묵이 흐른 후에야 호유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나도 해선 안 될 말을 했네."

초류빈은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에 담담하게 웃으며 그의 술을 받았다.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말인지 알면서도 왕왕 입 밖에 내는 예가 있죠.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내가 자네를 데려온 것은 그런 말을 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그럼 자네는 내가 자네를 데려온 목적도 알고 있단 말인가?"

초류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호유성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란 기색이 나타났다.

"정말 알고 있나?"

초류빈은 똑갈은 대답을 반복했다.

"물론이죠."

그리고 나서 호유성이 다시 묻기도 전에 이어 말했다.

"형님은 흥운장에 정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까?"

호유성은 오래 생각을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래서 제가 보물이 있는 곳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는군요?"

"자네는 응당 알고 있을 걸세."

초류빈은 히죽 웃었다.

"저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이라니...그게 무엇인가?"

"알고 있어야 할 일은 도리어 모르고 있다는 점이죠."

호유성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초류빈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사실 그 일의 자초지종은 한 사람에 의해 꾸며진 헛소문이라는 것을 형님은 모르....."

하고 말하자 호유성이 급히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나는 자네를 믿네. 자네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는 초류빈을 똑바로 주시하며 말을 끌어나갔다.

"이 세상에서 내가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네뿐이네. 그리고 나에게 친구가 있다면 그것도 역시 자네뿐이네. 내가 한 말이 다 거짓이라 해도 이 말만은 진실일세."

초류빈도 역시 그를 주시하며 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역시 형님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콜록콜록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호유성은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대청을 두 바퀴 돌았다. 대청은 조용하기 때문에 그의 걸음소리가 더욱 무겁게 들렸다. 물론 그의 마음이 무겁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는 일부러 초류빈에게 자기의 마음이 무겁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게 목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더니 그는 홀연 초류빈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네는 내가 자네를 죽일 것이라 생각하나?"

초류빈의 신색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평정했다.

"형님이 어떻게 하시든 저는 형님을 탓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절대 자네를 죽이지 않을 걸세."

이렇게 말한 호유성의 음성에 약간 격동이 일었다.

"내가 설사 자네를 죽인다 해도 그녀의 마음을 차지할 수는 없을 뿐더러 도리어 그녀는 더욱 나를 미워하게 될 걸세."

초류빈은 장탄식을 했다.

"인생을 살아 가는데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이 가끔 있기 마련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

담담한 한 마디지만 기실 그것은 인생의 최대 비애(悲哀)이며 최상의 고통이었다. 그런 일이 닥치면 분투, 발버둥, 반항을 해도 소용이 없다. 심지어 자신의 육신을 발기발기 찢고 자신의 가슴을 도려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은 역시 어쩔 수 없다.

호유성은 주먹을 불끈 쥐며 음성도 격동으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비록 자네를 죽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네를 놓아 줄 수도 없네."

초류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직 당신에게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호유성이 제아무리 그를 배신하고 해치려 하지만 그는 아직껏 호유성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호유성은 더욱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초류빈 앞에서의 그 자신은 언제나 왜소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초류빈의 그런 위대한 우정은 비단 그에게 감동을 줄 수 없을 뿐더러 도리어 더욱 짙은 분노를 일으키게 했다. 그는 주먹을 쥐고 초류빈을 노려보며 한마디 한마디 뚜렷이 내뱉었다.

"나는 자네를 다른 사람에게 데려다 줄 생각이네. 그 사람은 벌써부터 자네를 만나고 싶어했네. 자네도...어쩌면 그를 만나야 할 필요가 있겠지."

굉장히 큰 방이었다. 그런데 창문은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작은 창문이었다. 게다가 창문은 꼭꼭 닫혀 있기 때문에 밖의 경물은 전혀 볼 수 없었다. 문도 극히 작아 어깨가 다소 넓은 사람이라면 몸을 비스듬히 해야 들어올 수 있었다.

문도 역시 닫혀 있었다. 담벽은 흰 칠을 두껍게 하여 석벽인 지 흙으로 쌓은 벽인지, 아니면 강철로 세운 벽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방 한쪽 구석엔 침상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침상에 깔려 있는 이불은 깨끗하고 간복(簡僕)했다.

그 이외에 방안에 있는 것이라곤 큼지막한 책상 하나뿐이다. 책상 위에는 가지각색의 책이 높이 쌓여 있었다. 지금 한 사람이 책상 앞에 서서 붉은 붓으로 연신 책에다 그려대며 이따금씩 입가에 득의에 찬 미소를 떠올리곤 했다.

그 사람은 시종 서 있었다. 방안에 의자라곤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앉는 것을 싫어했다. 일단 의자에 편하게 앉으면 자신의 정신이 느슨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느슨해지면 착오를 조성하기가 쉽다. 바늘구멍만한 착오라 할지라도 그것은 곧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마치 제방에 작은 구멍이 뚫리면 붕괴되는 것같이.

그의 정신은 영원히 느슨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여지껏 착오가 없었고 실패도 없었다.

또 한 사람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이 사람의 몸은 마치 창대처럼 더욱 꼿꼿했다. 그는 계속 이렇게 서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보지 못했다.

어디서 날아온 모기인지 바로 그의 눈앞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모기는 그의 코끝에 앉아 피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일 줄 몰랐다. 그의 몸은 흡사 완전히 마비된 듯 가렵다거나 아프다는 것도 느끼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조차 그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상관금홍과 형무명이었다. 이 세상에서 그들과 같은 사람은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강호에서 가장 명성이 혁혁하고 세력이 가장 크며 재력 또한 으뜸인 금전방의 방주는 뜻밖에도 이런 누추한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눈으로 본 금전은 단지 일종의 이용가치가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모든 향락은 그의 눈에 목적을 달성하는 기구로밖에 미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애호는 바로 권력이었다. 만약 그의 몸에서 권욕을 뺀다면 그는 아마 송장이 될 것이다. 그는 권력을 위해 살고 심지어 권력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고요. 책장을 넘기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등불이 밝혀졌다. 그들이 이곳에서 얼마 동안 서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창 밖의 하늘색은 어둠에서 밝아오고 또 어두워졌다. 그들은 허기와 피곤과는 담을 쌓은 사람 같았다.

이때 고요를 깨고 밖에서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지 한 번, 그것도 아주 가볍게. 상관금홍은 책장을 넘기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고개도 들지 않았다.

형무명이 무덤 속에서 새어나오는 듯한 괴성으로 물었다.

"누구냐?"

문 밖에선 즉시 대답이 들렸다.

"백칠십구 호입니다."

"무슨 일이냐?"

"방주님을 뵙겠다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게 누구냐?"

"상대방은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로 방주를 뵙겠다더냐?"

"그것도 방주님을 직접 뵈어야지만 말하겠답니다."

형무명은 입을 다물더니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상관금홍이 홀연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

"앞뜰에 있습니다."

상관금홍은 고개도 들지 않고 한마디 내뱉었다.

"그를 죽여라!"

밖에서 즉시 대답을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상관금홍은 다시 물었다.

"그를 데려온 자는 누구냐?"

"제팔 타주(第八舵主) 향송(向松)입니다."

이때 형무명이 나서며

"제가 가겠습니다."

하고 한마디를 하더니 홀연 강시처럼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살인을 하는 데 있어 형무명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향송은 별호가 풍우유성(風雨流聖)으로서 사용하는 무기인 한 쌍의 유성추(柳聲追)만 해도 무기보에 십구 위를 차지하고 있어 그를 죽인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상관금홍을 찾아온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무슨 일로 그를 찾아온 것일까?

상관금홍은 그러한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한 가닥의 호기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차라리 인성(人性)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는 여전히 책장을 넘기면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문이 열리면서 형무명이 다시 나타났다. 상관금홍은 그에게 죽였느냐고 묻지 않았다. 형무명은 살인을 하는 데 있어 아직 실수한 적이 없기 때문에 물을 필요도 없었다.

상관금홍은 단지 담담하게

"향송이 만약 반격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가족에게 황금 만 냥을 주고 만일 반격을 했다면 가족을 전부 없애라."

한데 형무명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저는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상관금홍은 그제야 번쩍 고개를 들며 칼날같이 예리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형무명의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데리고 온 사람은 죽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상관금홍은 싸늘하게 외쳤다.

"세상 사람이라면 다 죽일 수 있거늘 왜 죽일 수 없다는 거냐?"

형무명의 차가운 음성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저는 어린애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 말은 들은 상관금홍도 멍해지는 듯싶더니 손에 쥐고 있던 붓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나를 만나려고 찾아온 자가 일개 어린애더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무공이 완전히 폐지된 어린애입니다."

상관금홍은 눈에서 섬광을 번뜩이더니 잠시 생각을 굴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이리 데려오도록 해라."

형무명은 즉시 밖으로 나갔다.

일개 나이 어린 녀석이 상관금홍을 만나러 왔다니 상관금홍 자신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 어린애는 호랑이 담을 먹었든가 아니면 미친 녀석일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 후 형무명이 과연 어린애를 데리고 들어왔다. 전혀 혈기를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 창백한 어린애였다. 그의 눈동자는 어린애들이 응당히 지녀야 할 밝고 맑은 광채가 없이 도리어 음침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그는 느릿느릿 걸으며 허리도 약간 구부정한 것 같았다.

이 어린애는 보기에 흡사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 같았다.

이 어린애는 다름 아닌 호천강이었다. 어느 누구라 해도 호천강 같은 어린애를 보면 자연히 그의 거동과 표정을 유심히 살피게 된다.

상관금홍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눈빛은 칼날같이 호천강의 얼굴에 폭사되었다. 누구라 할지라도 상관금홍의 이러한 눈빛을 접하면 설사 몸을 부들부들 떨지 않더라도 겁에 질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호천강은 예외였다.

그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와 몸을 숙여 공손히 인사를 하더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후배 호천강이 방주께 인사를 드립니다."

상관금홍은 눈알을 굴리며 살얼음 같은 음성으로 반문했다.

"호천강이라고? 그럼 호유성은 너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호천강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저의 부친입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상관금홍의 안색도 다소 변화가 이는 것 같았다.

"너의 부친이 너를 이리로 보낸 것이냐?"

"그렇습니다."

상관금홍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왜 그가 직접 오지 않았느냐?"

호천강의 표정은 서당의 훈장처럼 의젓하고 태연했다.

"만약 저의 부친께서 오셨다면 비단 방주님을 만나뵙지 못할 뿐더러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당하기 십상이기에 부득이 제가 대신 온 것입니다."

상관금홍은 상대방의 유연한 태도에 무의식적으로 한 가닥의 적의를 느끼며 음성이 싸늘하게 변했다.

"너를 죽이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느냐?"

호천강의 태도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침착했다.

"세상 사람들의 생명은 물론 방주님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데 따라 좌우되겠지만 저를 죽일 가치를 못 느끼리라 믿습니다."

상관금홍의 싸늘했던 안색이 뜻밖에도 온화해졌다.

"너는 비록 나이가 어리고 몸이 약하지만 간담만은 굉장히 크구나."

호천강은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을 받았다.

"중대한 목적을 품은 자라면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자연히 간담이 커지게 마련입니다."

상관금홍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고는 돌연 고개를 돌려 형무명에게 빙긋 웃고 물었다.

"너는 이 애의 말만 듣고 그가 어린애라고 생각했느냐?"

형무명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저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상관금홍이 그를 응시하며 얼굴에 띠었던 그 귀한 한 가닥의 웃음이 돌연 응결되었다. 호천강은 그들의 표정을 번갈아 쳐다보며 그들의 관계에 대해 굉장히 흥미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상관금홍은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너의 가장 큰 장점이지만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어쩌면 너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형무명은 이번에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다시 긴 시간 침묵을 지키더니 상관금홍이 호천강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호천강은 한 차례 헛기침을 하고 나서 대답했다.

"똑같은 일이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후배는 원래 좀더 온화하게 이번 일을 설명드릴 생각이었는데 방주님께서 한가한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아 가장 직선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상관금홍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예도 흔치 않았다.

"좋다. 나도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혀를 잘라 버리는 거지."

호천강은 차분하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후배가 이곳에 온 것은 방주님과 한 가지 협상을 하기 위함입니다."

상관금홍은 대뜸 반문했다.

"협상이라고?"

그의 안색은 더욱 차갑게 변했다.

"전에도 나와 협상을 하자는 사람이 있었지. 그런데 너는 내가 무슨 방법으로 그들을 상대했는지 알고 있느냐?"

호천강은 눈을 깜박거렸다. 상관금홍 앞에서 눈을 깜박거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후배는 귀를 씻고 듣겠습니다."

상관금홍은 뚫어지게 그의 눈동자를 주시하며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내뱉었다.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단 한 가지 방법뿐이다."

그 말에도 호천강의 안색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협상은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후배도 감히 이곳에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순 상관금홍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번뜩였다.

"협상은 어디까지나 협상일 뿐 뭐가 다르다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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