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42 소이비도 제3권 탕부
탕 부
호천강의 입에서 신통치 않은 말이 흘러나온다면 상관금홍은 즉시 살수를 전개할 기세였다. 그가 일단 살수를 전개한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드디어 호천강의 입에서 생사를 판가름하는 한 마디가 내뱉어졌다.
"이번 협상은 방주님의 입장으로선 오직 이익이 있을 뿐 해가 없는 것입니다."
협상이라 함은 상례로 보아 상대방에게 모종의 조건을 제시해 그것과 비등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이익을 원한다는 것은 즉 상대방으로 하여금 모종의 희생을 무릅쓰게 하는 것과도 상통된다.
그런데 호천강은 일반 협상의 법규에서 어긋난 말을 했으니 상관금홍은 약간 주춤했다.
"그래?"
호천강은 상대방의 심리를 사전에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방주님의 위명은 천하를 진동시키고 재력 또한 감히 어깨를 겨룰 자가 없으니 방주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무엇이든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상관금홍은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과 협상할 필요를 못 느낀다."
협상을 하러 온 사람들을 지금까지 갈기갈기 찢어 죽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호천강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방주님께서 수중에 넣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상관금홍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공스러운 이 어린애를 주시할 뿐이었다. 물론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굴리고 있는지는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었다.
호천강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 물건 자체는 어쩌면 별로 값어치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방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상관금홍은 다그치듯 되물었다.
"어째서 그렇다는 것이냐?"
호천강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것은 자기의 수중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이라 생각합니다."
그가 시종 핵심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상관금홍은 사뭇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네가 말하는 그게 대관절 무엇이냐?"
그러자 호천강의 작은 입에선 뜻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초류빈의 생명입니다."
적어도 상관금홍에겐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의 냉막하던 눈동자에 금시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뭐라고 했지?"
"초류빈의 목숨은 우리 수중에 쥐어져 있습니다. 방주님께서 원하신다면 후배는 언제라도 그의 목을 방주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상관금홍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에야 그의 타오르던 눈빛이 냉막하게 변해 담담하게 말했다.
"초류빈이 뭐가 대수롭다는 거냐? 나는 아예 그를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
"정녕 그러시다면 후배는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하고 한마디를 남기더니 곧 몸을 돌려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은 느렸다. 그리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상관금홍도 다시는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호천강은 천천히 문 입구까지 걸어가 손잡이를 잡았다.
바로 그때 등뒤에서 상관금홍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깐만!"
호천강의 눈동자엔 금시 한 가닥의 득의에 찬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몸을 돌렸을 때 그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태도가 다시 공손하게 변해 있었다.
"방주님, 아직도 무슨 분부가 남아 있습니까?"
상관금홍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책상 위에 있는 등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초류빈의 목숨으로써 나한테 원하는 게 무엇이냐?"
호천강은 상대방의 윤곽이 뚜렷한 옆얼굴을 주시하며 말했다.
"저의 부친께서는 오래 전부터 방주님의 명성을 들어왔지만 직접 대면할 인연이 없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상관금홍의 음성은 냉랭했다.
"그것은 잔소리고, 단지 네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묻고 있다."
호천강은 입술에 침을 발랐다.
"저의 부친께선 단지 천하 영웅들이 모인 자리에서 방주님과 결의형제를 맺고 싶을 뿐입니다."
상관금홍은 그 말들 듣자 대뜸 눈동자에서 성난 불길이 폭사되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그 불길은 가라앉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호유성은 아주 똑똑한 사람이군. 단지 애석하게도 그의 이번 일은 잘못 생각했다."
호천강이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상관금홍은 살기가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이번 협상을 성사시킬 자신이 있느냐?"
호천강의 말투는 강철처럼 단호했다.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후배가 구태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상관금홍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호유성에게 혈육이라곤 오직 너뿐이지?"
호천강은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너를 보낸 자체가 결정적인 잘못이다."
호천강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왔다면 도저히 방주님을 만나뵈올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제가 온 것입니다."
상관금홍의 입가에 냉혹한 웃음이 스쳐갔다.
"너희들은 원래 이번 협상의 칼자루를 쥐고 있었지만 네가 오는 바람에 상황이 달라졌다."
호천강은 이내 그의 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주님은 저를 인질로 삼아 저의 부친께 초류빈의 목숨을 요구할 생각입니까?"
상관금홍은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그렇다."
그러자 호천강은 홀연 빙긋이 웃는 게 아닌가.
"방주님께선 사람을 보는 눈이 명철하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저의 부친에 대해서는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상관금홍은 즉시 냉소를 쳤다.
"그렇다면 그는 설사 너의 목숨을 잃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초류빈을 내주지 않을 생각이란 말이냐?"
호천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상관금홍은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그럼 너의 부친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호천강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물론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람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상관금홍은 여전히 촛불을 응시한 채 물었다.
"그는 어떠한 종류의 사람이냐?"
호천강은 지체하지 않고 그의 질문에 답했다.
"저의 부친은 방주님과 똑같은 종류의 사람으로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 방법도 가리지 않을 것이며 여하한 희생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상관금홍은 어금니를 깨물고 있는지 양쪽 턱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긴 침묵을 깨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 이십 년 동안 감히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천강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도리어 만족스러워하는 눈빛이었다.
"방주님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후배가 비로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한 말을 해야지만 방주님 같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겠죠."
상관금홍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무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만약 승낙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초류빈을 풀어줄 작정이냐?"
호천강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렇습니다."
상관금홍의 코웃음이 그의 말끝을 이었다.
"흥! 그를 풀어주면 그는 필경 복수를 하기 위해 너희들을 죽일 텐데 그게 두렵지도 않으냐?"
"그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더니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가 만약 복수에 대해 철저한 사람이었다면 오늘날 같은 이런 비참한 신세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관금홍은 눈동자를 굴리더니 갑자기 음성이 싸늘하게 변했다.
"너희들이 그를 풀어준다면 내가 친히 그를 죽이지 못할 것 같으냐?"
호천강의 음성은 신색만큼이나 담담했다.
"비도탈명은 아직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습니다."
상관금홍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그럼 너는 내가 그의 비도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단 말이냐?"
호천강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약간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최소한 방주님께서는 확고한 자신이 없을 것입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흥!"
상관금홍은 냉소로 답변했다.
그러자 호천강이 다시 말했다.
"방주님의 현재 신분과 지위로써 구태여 그런 모험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상관금홍의 입은 굳게 다물어졌다.
호천강은 상대방의 마음이 차츰 동요되어 간다는 사실을 잽싸게 간파했다.
"더군다나 저의 부친께선 비록 무공이 대단하지는 못하지만 명성과 지위, 그리고 심오한 지혜는 어느 누구 못지 않습니다. 방주님께서 그와 결의형제를 맺으신다면 유익무해(有益無害)할 따름입니다."
상관금홍은 다시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홀연 입을 열어 물었다.
"초류빈도 그의 결의형제가 아니더냐?"
호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결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상관금홍은 대뜸 냉소를 터뜨렸다.
"그가 초류빈을 배신하듯이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을 할 수 있겠느냐?"
이 질문에 호천강의 말문이 막힐 것이라 생각했던 상관금홍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호천강은 천연스럽게 웃었다.
"방주님은 초류빈이 아니기 때문에 저의 부친께서는 방주님을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아주 간단한 대답이면서도 송곳 끝같이 예리한 빛이 담겨져 있었다.
상관금홍은 그 말을 듣자 돌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옳은 말이다. 호유성이 설사 나를 배신할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아마 능력이 없을 것이다."
호천강은 즉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방주님께선 수락하시겠습니까?"
상관금홍은 웃음을 거두며 그의 말을 받았다.
"초류빈이 정말 너희들에게 잡혀 있는지 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호천강은 일단 일이 성사되었다고 생각하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방주님께서 일단 청첩장을 발부해 천하 영웅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해 저의 부친과 정식으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관금홍은 냉랭하게 가로챘다.
"내가 청첩장을 발부한다 해도 그들이 감히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호천강은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오든 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모두들 그 일을 알고 있으면 됩니다."
상관금홍으로선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적수였다.
"생각이 치밀하군!"
"방주님께서도 아마 이번 일에 대해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으니 후배는 바로 성 안에 있는 여운객잔에서 방주님의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말하고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말을 천천히 이어갔다.
"단지 방주님께서 청첩장을 발부해 다른 사람들이 다 받아 보았다는 것이 확인만 되면 후배는 언제든지 초류빈을 이리로 데려오겠습니다."
상관금홍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날렸다.
"이리로 데려온다고?...흥! 너희 부자에게 그럴 만한 재간이 있단 말이냐?"
호천강은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그 점에 대해 후배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소림의 심수 대사께서도 해내지 못한 일을 후배가 어떻게 해낼 수 있겠습니까? 단지....."
"단지 뭐냐?"
상관금홍의 가슴을 찌르는 창끝 같은 질문에 호천강은 한쪽에 서 있는 형무명에게 힐끗 눈길을 던졌다.
"형선생께서 호송을 맡아 주신다면 절대 실수가 없을 겁니다."
상관금홍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석고상처럼 잠자코 있던 형무명이 돌연 입을 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호천강은 황급히 그에게 정중히 읍을 하며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감사합니다."
상관금홍은 다시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했다.
"너의 무공을 폐지시킨 사람이 바로 초류빈이 아니냐?"
호천강은 얼굴에 핀 웃음을 금시 굳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상관금홍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물었다.
"너는 그를 원망하고 있느냐?"
호천강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빨 틈새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상관금홍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너는 그를 원망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도리어 감사를 느껴야 한다."
호천강은 멍해지는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상관금홍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만약 그가 너의 무공을 폐지시키지 않았다면 너는 오늘 영락없이 이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호천강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상관금홍은 다시 말했다.
"너는 어린 나이에 벌써 이다지도 음독 교활하니 십여 년 만 지나면 충분히 나와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너의 무공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내가 너를 살려 둘 것 같으냐?"
호천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시종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암흑, 완연한 어둠이 대지를 가득 덮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신음과 막 넘어갈 것 같은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소리가 멎고 난 후에는 밤은 더욱 깊은 정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 여인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도 당신에게 꼭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이 여인의 음성은 달콤하고도 매우 부드러웠다. 유혹이 가득 깃든 음성, 세상의 남자가 만약 이 음성의 유혹을 이기려면 귀머거리가 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인의 음성의 여운이 사라지자 한 남자의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엇을 물어보려는 것이냐?"
그런데 이 남자의 음성은 몹시 특이했다. 가까운 곳에서 그의 말을 들으면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고 먼 곳에서 들으면 그와 정반대로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인은 약간 의혹을 담은 음성으로 다시 물어왔다.
"당신은 사람이에요? 아니면 강철로 만들었어요?"
남자는 별 억양없이 되물었다.
"왜, 모르겠느냐?"
그러자 여인의 음성이 더욱 달콤해지고 마치 녹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만약 진짜 사람이라면 어째서 조금도 지치지 않는 거죠?"
"감당해 내지 못하겠느냐?"
여인은 다시 간드러지게 웃어젖혔다.
"호호호...그럼 당신은 제가 지칠 줄 아세요? 어디 한번 해 봐요."
"지금은 안 된다."
"어째서요?"
"내 지금 너에게 시킬 일이 있기 때문이다."
"뭐예요? 당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듣겠어요."
"좋다! 지금 곧 가서 낭천을 죽여라."
여인은 깜짝 놀라며 일시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한숨을 뿜으며 입을 열었다.
"전날에도 말을 했지만 아직은 그를 죽일 때가 되지 않았어요."
"아니다. 이미 죽일 때가 왔다."
"무엇 때문이죠? 초류빈은 이미 죽었잖아요?"
"아직 죽지 않았지만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
여인은 약간 동요된 음성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그는 지금 어디 있어요?"
"이미 나의 손아귀에 있다."
"요 며칠 동안 나는 당신과 같이 있었는데 당신이 무슨 수로 그를 잡아왔다는 말이에요? 당신은 분신술이라도 할 줄 안다는 말인가요?"
"내가 갖고 싶어하는 물건이라면 내가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이 모두 보내오는 사람이 있다."
"누가 보내왔죠? 그 누가 초류빈을 잡아올 만큼 실력이 있어요?"
"호유성."
남자의 이 간결한 대답에 여인은 움찔하더니 이내 웃었다.
"맞았어요. 오직 초류빈의 친구만이 그를 죽일 수가 있어요. 만약 친구가 아닌 다른 무기로 그를 쓰러뜨리려면 그 어떤 것으로라도 어림없어요. 오직 정감만이 그를 사로잡을 수 있어요."
남자는 코웃음을 치더니 냉정하게 말했다.
"제법 그를 알고 있군."
여인은 방그레 웃었다.
"저는 적을 친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요. 마치...내가 당신을 잘 모르듯이 말예요."
그러더니 그녀는 무엇이 생각났는지 즉시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호유성의 사람됨으로 봐서 그는 결코 아무런 목적없이 초류빈을 당신에게 보내진 않았을 거예요."
남자는 그 말에 움찔했다.
"아니, 뭐라고?"
"그는 자기가 초류빈을 죽이기 싫어 남의 칼을 빌리는 거예요."
"너는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이 그런 목적 때문이라고 생각하느 냐?"
"그럼 무엇 때문이겠어요?"
"그는 나더러 형제가 되어 달라고 했다."
"모두 자기들 편리한 대로 하는군요. 그런데 당신은 승낙을 했단 말예요?"
"그렇다."
"그가 당신을 이용하려는 것인 줄 모르고 있다는 말예요?"
"흥, 그러나 그는 너무 천진스럽게 생각하고 있어."
"천진스럽다고요?"
"그는 자기가 나와 의형제만 되면 내가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의형제가 아니고 또 친형제라면 어때? 죽이는 것에는....."
"호호호...그래요. 그는 초류빈을 속였으므로 당신도 그를 속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나 호유성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아들놈이 정말 무서운 놈이다."
"그 애를 만나봤나요?"
"음, 이번엔 호유성이 오지 않고 그 어린 놈이 왔더군."
"맞았어요. 그애야말로 정말 보통 아이가 아니에요."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며 무엇인가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저를 더 남겨 놓고 싶지 않다는 말이에요? 다른 남자들은 밤이건 낮이건 나로부터 떠나기 싫어하는데 당신만은 늘상 한 번 일을 끝내자마자 나를 쫓아내는군요."
"그 이유를 가르쳐 줄까? 나는 네가 상대해 온 다른 남자가 아니고 또 너의 친구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린 서로를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다. 우린 이렇게 서로를 잘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거짓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겠느냐?"
여인은 아무 말없이 침상에서 일어났다. 방안은 매우 컴컴했으나 집 밖에는 희미한 불빛이 있었다. 희미한 별빛이 대지를 하얗게 비추고 있는 아래 한 사람이 어둠에 싸인 집을 지키고 있었다.
한 쌍의 회색 눈동자로 초점없이 먼 곳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몸이 마치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 굳은 동체와는 달리 그 회색 눈동자에는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고통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방안에서 새어나오는 각양각색의 소리들은 더욱 참아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잔혹하게도 어쩔 수 없이 그는 참아야 했다.
그의 일생은 오직 그 어떤 한 사람에게 충성으로써 바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관금홍.
그의 생명, 아니 영혼까지도 완전히 상관금홍의 것이었다.
삐걱 하는 미세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어 진한 향기가 봄날의 꽃향기처럼 풍겨오며 하나의 인영이 살그머니 그의 등뒤에 와서 섰다.
별빛이 그 얼굴을 가만히 비추었다. 그 아래 나타난 얼굴, 청순하고 아름답고 그렇게 순진스러울 수가 없었다. 마치 선녀가 살포시 내려와 선 듯 방금 그녀가 무슨 일을 치르고 나왔는지 세상 모든 사람들은 미처 알아낼 수가 없으리라. 선녀의 미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악귀의 영혼을 소유한 여인, 설소하 외에 누가 있겠는가.
여인의 체취가 질식할 듯 밀려왔으나 형무명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러자 설소하는 즉시 몸을 날려 그의 앞으로 와 얼굴을 주시했다. 지금 그녀의 두 눈은 별빛보다 부드러웠다.
그러나 형무명은 여전히 먼 곳을 주시하며 마치 눈앞에 그녀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하얀 포물선이 그어지며 설소하의 손이 형무명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이어 그녀의 손은 다시 위로 올라가 가볍게 그의 귀를 어루만졌다. 설소하는 이곳이 남자의 성욕을 자극하는 민감한 부분임을 잘 알고 있는 여자였다.
형무명은 마치 전신이 마비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귀를 매만지고 있던 설소하는 방그레 옥수수처럼 가지런한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밖에서 우리를 지켜 주어 정말 고마워요. 나는 그런 당신이 밖에 있다는 것만 알아도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껴 무슨 일을 하든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어요."
설소하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그의 귀에다 입술을 바짝 갖다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내 또 당신에게 해 줄 비밀 얘기가 있어요. 그는 비록 나이가 많지만 아직도 건강한 것으로 아마 여자 경험이 남보다 풍부한 것 갈더군요."
설소하는 말을 끝내고 간드러진 웃음의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다. 형무명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으나 온몸의 근육이 아까와는 달리 중풍을 맞은 듯 떨리고 있었다.
설소하. 그 독보적인 미소와 유혹을 지닌 여자는 모든 사내들의 마음을 흐트러 놓고 있는 것이다.
여운잔(如雲棧).
여운잔은 이 성에서 가장 크고 가장 고급스럽고 화려한 객잔이었다. 때문에 이 객잔의 술이나 음식 등 모든 것이 다 비싸다. 이 객잔에서는 그저 돈만 풍부하게 갖고 있으면 객잔문을 나설 필요도 없이 모든 재미를 다 볼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그저 돈만 내놓고 입만 연다면 성 안에서 제일 훌륭하고 비싼 요리 그리고 유명한 기생, 무릇 제일 아름다운 여인까지도 마음대로 희롱할 수 있었다.
이곳은 대낮에도 모든 문이 닫혀 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괴상한 곳이었다. 그러나 밤만 되면 모든 문이 다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문이 열리면서 제일 먼저 들리는 것은 여인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였고 그 다음에는 술잔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소녀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한 데 섞여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가 점차 약해지면 이 세상에 있는 불규칙한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많은 방들 중에서 단 한 방에서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단지 가끔씩 짤막한 여인의 신음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방의 문도 언제나 굳게 닫혀져 있었다. 그러다가 매일 황혼 무렵이 되면 한 명의 소녀가 들어가고는 했다. 들어가는 소녀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어여쁘고 아름다웠으며 또 어렸다. 소녀들은 들어갈 때 예쁘게 화장을 했고 또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에는 그윽한 미소를 띠었다.
아무리 잘 훈련된 직업 여성이라고는 하지만 이 웃음이 그녀들의 얼굴에 나타날 때는 비단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이 되어 그 방을 나설 때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곱게 빗은 머리가 보기 싫게 헝클어지고 군데군데 뽑힌 자국들도 있었다.
그리고 유혹과 기대로 빛나던 눈동자는 광채가 사라지고 혼탁한 물처럼 충혈되었으며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깊이 패어 들어갔다. 그뿐 아니라 생기와 웃음으로 충만된 얼굴은 하얗게 변하고 눈물 흔적까지도 있었다. 그것은 하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날이면 날마다 그랬고 들어가는 소녀마다 매번 그런 몰골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주의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특히 기방을 찾는 사람들은 이런 일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모아 이 방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한마디씩 했다.
"그 방엔 대체 어떤 사람이 들어 있기에 이처럼 무서운 것일까?
"그 방 손님은 필경 정력이 왕성하고 건강한 대한일 것이다."
사람들은 말로만 궁금증을 풀 수 없었는지 모두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알아본 결과 사람들은 더욱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을까? 이 방에 있는 손님은 머리에 채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애였어....."
이 말이 이 사람 저 사람의 귀로 퍼지자 사람들은 모두 호기심에 불타 그 방에 들어갔다 온 소녀들을 불러 물어 보았다. 그러나 이 일을 물었을 때 소녀들은 새파랗게 질리며 그야말로 몸서리를 쳤다. 소녀들은 눈물을 쏟으며 아무리 캐물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캐물었다.
결국 그녀들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모두 공통된
"아...아, 그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이 아니에요....."
이 한 마디뿐이었다. 또다시 이 땅에 황혼이 깔리기 시작했다. 여운잔 객잔의 그 신비의 방은 여전히 문이 꼭 닫혀 있었다. 그러나 건너편 창문이 반쯤 열려져 방안으로 시원한 공기를 실어다 주었다.
창문 앞에 얼굴이 하얗고 영준한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소년은 창 밖에 서 있는 한 그루 오동나무를 바라보며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의 눈동자는 비록 희미했으나 사람의 소름을 끼치게 하는 독기가 번쩍이고 있었다.
호천강, 그는 상 위에 가득 차려져 있는 술과 안주에 손도 대지 않았다. 호천강은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떤 커다란 재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먹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호천강은 어리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두뇌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붉은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방안에서 호천강은 일말의 흥미를 느끼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드디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호천강은 거만하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문이 열렸으니 어서 들어오너라."
그러자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발걸음소리는 매우 가볍고 또 느렸다. 오늘은 작은 여자가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더욱이 호천강이 바라는 대로 약간 겁을 먹은 채 말이다. 이것은 호천강이 아주 좋아하는 그런 소녀였다.
이유는 호천강은 매우 약골인 까닭에 강자가 되려면 오직 소녀들만이 그를 강자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발자국소리는 상 옆에서 멈추었다. 호천강은 그제야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널 데리고 온 사람은 이미 돈에 대해 얘기를 했겠지?"
그 소녀는 다소곳이 대꾸했다.
"했어요."
호천강은 득의하여 다시 말했다.
"이 대가는 평소 네가 받는 것보다 두 배나 많지?"
"그래요."
소녀가 대꾸하자 호천강은 냉정하게 말했다.
"알았으면 내 말에 절대 복종을 해야 한다."
"알겠어요."
호천강은 다소 싸늘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좋다. 그렇다면 옷을 벗어라. 전부 남김없이 말이다."
소녀는 그 말에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돌연 물었다.
"제가 옷을 벗을 때 보지 않을 건가요?"
그 목소리는 매우 아름답고 또 달콤했다. 남자의 온 넋을 빼앗을 만큼 말이다. 호천강은 소녀의 대담함에 일시 말을 잊고 멈칫했다.
이때 소녀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웃었다.
"여자애들이 옷을 벗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인데 어째서 포기를 하는 것이지?"
호천강은 이 순간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호천강은 넋이 달아날 듯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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