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43 소이비도 제3권 깊고 얕은 물





깊고 얕은 물



오늘 저녁에 들어온 소녀는 바로 설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설소하는 여전히 그 아름다운 얼굴에 선녀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호천강의 표정이 오히려 굳어 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 그는 즉시 웃으며 일어났다.

"이제보니 이모님께서 장난을 치셨군요."

설소하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날 이모라고 부르느냐?"

호천강은 소년답지 않게 능청스러운 어조로 말을 했다.

"어쨌든 이모님은 이모님이 아니십니까?"

설소하는 갑자기 요염하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너는 이제 어른이 되었지? 그렇지?"

설소하는 이렇게 웃고 나서 갑자기 탄식을 했다.

"못 본 지 겨우 이삼 년인데 그동안 많이 컸구나."

"이삼 년 동안 우린 시종 이모님의 소식을 알아내지 못해 모두 궁금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나 난 너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지. 소문을 듣자하니...여자들을 다루는 데 있어,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러더구나. 네가 나이 든 사람들보다 더욱 강하고....."

호천강은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참지 못해 키들거렸다.

"그러나 이모님 앞에서는 아직도 어린애인데요, 뭐....."

그러나 설소하는 눈을 부릅뜨고 토라진 음성으로 소리쳤다.

"아직도 날더러 이모라니, 내가 그처럼 늙어 보이느냐?"

호천강은 참다 못해 고개를 들었다.

설소하는 그의 앞에서 편리한 대로 자세를 잡고 서 있었다. 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유혹이 천 명의 여인들을 갖다 놓는다 하더라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호천강도 마치 그녀의 이 유혹에 흡수된 듯 멍청히 눈을 뜨고 쳐다보았다.

설소하는 입술을 깨물고 슬픈 듯 중얼거렸다.

"소문을 듣자니 넌 앳된 소녀들만 좋아한다던데 난 이미 늙은이야....."

약간은 애교가 섞인 듯하면서도 감미로운 손처럼 전신에 스며드는 그녀의 이 말에 호천강의 가슴은 마구 소용돌이쳤다.

호천강은 크게 소리내어 외쳤다.

"아니에요. 이모님은 조금도 늙지 않았어요."

설소하의 두 눈이 다시 유혹하듯 빛났다.

"정말?"

호천강은 요동치는 가슴을 달랠 길 없어 고개를 숙였다.

"만약 당신더러 늙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장님일 겁니다."

"그렇다면 넌 어떠냐? 장님이냐, 아니면 바보님?"

호천강은 물론 장님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었다. 때문에 설소하는 호천강의 곁을 떠날 때 매우 고통스러웠다. 호천강은 어린아이도 아니었고 장님도 아니었으며 더욱 바보도 아니었다. 그저 미친 것뿐이었다.

호천강은 미쳤다. 그것도 아주 무섭도록 말이다. 세상 남자들을 다 경험해 온 설소하조차도 이렇게 미친 사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설소하의 눈동자에서는 아직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었던 일종의 만족과 유쾌함 그리고 승리감이 번쩍거렸다.

설소하는 여태까지 남자에 대해 전혀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 남자가 바보든 성인군자든 미쳤든 간에 말이다. 때문에 설소하는 늘 남자를 취하고 나서 만족을 느껴왔다. 어느덧 날은 이미 밝았다. 그런데 건넌방에서는 아직도 술을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사람이 큰소리로 웃으며 떠들었다.

"안 마시면 몰라도 마시려면 날이 밝을 때까지 마셔야지."

그러나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사나이는 픽 쓰러졌다. 이때 설소하의 뇌리에 문득 한 사나이가 떠올랐다. 설소하는 아직도 그 사람의 기침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았다.

설소하는 그 사람만 뇌리에 떠오르면 분노가 끓어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그 특유의 미모와 재질 그리고 유혹으로많은 남자들을 정복해 왔지만 그 남자만은 정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그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설소하는 그를 얻지 못하는 보복으로 언제나 그를 죽이려고 마음먹어 왔다.

설소하의 성격은 자신이 얻지 못하는 것이면 다른 사람의 손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성격이었다. 설소하는 이를 악물고 내심 중얼거렸다.

'내 비록 너를 죽이고 싶지만 지금은 결코 죽이지 않겠다. 그리고 난 또 네가 상관금홍의 손에 죽는 것도 절대 바라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그가 두려워하는 존재가 없어지기 때문이지.'

설소하는 여기까지 중얼거리고 나서 다시 잔인하게 웃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꼭 너를 내 손으로 죽이고 말 것이다. 그것도 천천히 말이다. 아주 천천히.....'

검, 한 자루의 얇은 검.

매우 가볍고 또 유연하게 보이는 검이었다. 검 손잡이에는 얇고 가벼운 나무판자를 끼웠다. 그런데 손을 보호하는 검막이 없었다. 이것은 그가 검을 찌를 때 누구도 그 손 가까이에 접근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검고 가벼운 것이다. 그 어떤 무기라도 문제없이 자를 수 있었다. 게다가 일단 그의 검이 앞으로 나갔을 때엔 그 누구도 막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검이었다. 이 세상에서는 오직 한 사람만이 이 검을 쓸 줄 알았다.

검은 침상 옆의 작은 상 위에 놓여 있었는데 그 옆에는 깨끗한 청색 옷이 한 벌 놓여 있었다. 낭천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첫눈에 그 검을 보았다. 순간 낭천의 게슴츠레한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낭천은 검을 대하자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연인들처럼 전신에 뜨거운 피가 용솟음쳐 올랐다.

낭천은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이 아침에 만난 감격이 얼마나 큰지 낭천의 손은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떨렸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이 예리한 검날에 닿는 순간 그 동작이 문득 멈추어졌다. 가볍게 검날을 만지는 낭천의 눈동자가 먼 곳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것은 매우 멀었다. 말할 수 없는 먼 곳으로...아마도 그의 마음 역시 먼 곳으로 줄달음치고 있는 것 같았다. 낭천은 먼저 맨처음 이 검을 사용했을 때의 광경을 생각했다. 시뻘건 선혈이 새파란 검날을 따라 곧장 떨어지던...그리고 그는 이 검날 아래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악독한 사람들...그의 피는 이미 용광로처럼 온몸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이 검으로 사람을 죽이던 시절은 불행과 재난이 한꺼번에 겹쳐 들었지만 몹시 다채롭기도 했고 또 찬란했다. 더욱 쾌의은구(快意恩仇), 이 네 글자는 또 얼마나 장렬했던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지나간 일이다. 무척 오래 전에 지나간 일인 것이다.

낭천은 이미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옛날의 일은 모두 잊겠다고 맹세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이 생활은 편안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적적하기조차 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나쁠 것도 없었다. 조용히 안락하게 일생을 보내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 아닌가.

그때 진한 향기가 코를 자극시키며 발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설소하가 나타났다. 금방 보기에는 약간 피로해 보이고 수척했지만 입가에 맴도는 그 미소만은 여전히 이슬을 머금고 피어 있는 꽃처럼 신선했다. 그 미소, 그 어떤 귀중한 것을 희생하든 간에 그저 매일 이 꽃과 같은 미소만 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낭천은 즉시 검을 내려놓고 빙긋 웃었다.

"오늘은 당신이 나보다 일찍 일어났구려. 나는 점점 잠꾸러기가 되는 것 같군....."

설소하는 그의 이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오히려 물었다.

"이 검 어때요?"

그러나 낭천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차마 사실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고 거짓말은 더욱더 못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낭천이 대답을 못하자 설소하는 다시 물었다.

"이 검이 어디서 온 줄 아세요?"

"모르겠군."

"이것은 어젯밤 제가 특별히 당신을 위해 만든 거예요."

"무엇이, 당신이?"

설소하는 검을 집어들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자, 보세요. 옛날 당신이 사용하던 것과 똑같나요?"

그러나 낭천은 무겁게 입을 다물었다.

설소하는 그의 눈치를 가만히 살폈다.

"왜, 싫으세요?"

낭천은 한참 후에야 입을 떼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내게 이 검을 만들어 주었소?"

"꼭 당신이 써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나더러 살인을 하라는 말이오?"

"살인이 아니에요. 사람을 구하는 거예요."

"사람을 구하라고? 누구를?"

"당신의 제일 좋은 친구....."

설소하가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낭천은 펄쩍 뛰었다.

"초류빈을!"

설소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낭천의 창백했던 얼굴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또 무슨 일이 일어났소?"

설소하는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자리에 앉혔다.

"우선 앉아서 천천히 제 말부터 들으세요. 이런 일은 아무리 급해 보았자 소용이 없어요."

낭천은 길게 한숨을 토하며 무겁게 자리에 앉았다.

"이 세상에는 당신 외에 또 네 명의 무서운 고수가 있어요. 당신은 알고 있나요?"

"말해 보시오."

설소하는 숨을 길게 내쉰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 사람은 천기노인이며 두 번째는 상관금홍이에요. 그리고 초류빈도 결코 그들보다 약하지 않죠."

설소하가 여기서 말을 맺자 낭천은 다시 재촉했다.

"또 한 명은 누구요?"

설소하는 깊이 탄식을 내뿜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형무명으로서 그들 중 나이가 가장 젊고 또 제일 무서운 상대예요."

"제일 무섭다고?"

"그 이유는 그는 전혀 사람이 아닌 데다 인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요. 형무명, 그의 인생의 최대 목적은 바로 살인으로 그것을 인생의 가장 큰 쾌락으로 느끼고 있어요. 그는 살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를 뿐 아니라 알고자 하지도 않아요."

순간 낭천의 두 눈동자에 광채가 번뜩였다.

"그의 무기는 어떤 것이오?"

설소하는 그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바로 검이에요."

낭천의 손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검을 잡았다. 그 힘이 어찌나 세었던지 설소하의 손까지도 떨릴 뻔했다.

설소하는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소문에 듣자니 그의 검법은 당신과 똑같이 악랄하고 빠르다고 해요."

낭천은 가볍게 코웃음을 날렸다.

"난 검법 따위는 모르오. 그저 이 검으로 사람의 목을 찌르는 것밖에는 모르오."

"그것이 바로 검법이에요. 무슨 검법을 쓰든 간에 그 사람의 최후의 목적도 바로 살인을 하는 공통된 것이 아닌가요?"

낭천은 갑자기 바짝 긴장하며 설소하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쏘아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초류빈이 바로 그 사람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말이오?"

설소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혼자뿐만 아니라 상관금홍까지도 있어요. 그러나 상관금홍은 어쩌면 그곳에 없을 테니 당신은 그 한 사람만 대적하면 돼요."

설소하는 낭천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급히 뒤이었다.

"그 사람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그 사람의 무서움을 몰라요. 물론 당신의 검이 그보다 빠를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래서 지금 그 사람이 어디 있다는 거요?"

"저는 본래 두 번 다시 당신으로 하여금 검을 쓰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살인을 시키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모험하는 것도 더욱 싫어하지만 초류빈을 위해...당신을 잡아둘 수가 없었어요. 저는 그렇게까지 제 욕심만을 채울 수가 없어요."

설소하를 쳐다보는 낭천의 두 눈동자는 감격의 빛으로 가득찼다.

설소하는 눈물을 흘리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당신에게 그를 찾아갈 방법을 가르쳐 주겠어요. 그렇지만 당신...당신도 제 부탁을 꼭 들어 주셔야 해요."

낭천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말해 보오."

설소하는 더욱 그의 손을 힘껏 잡고는 눈물이 가득차 있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꼭 돌아오신다고 제게 말해 주세요. 저는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영원히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호천강은 아까부터 구석진 곳에 앉아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차 안은 매우 넓었으나 심한 요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장대처럼 서 있었다. 아니 마차에 처음 올라탈 때부터 그는 앉지 않았다. 마차가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며 극성스레 요동을 쳐도 그 사람은 시종일관 장승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호천강은 한 번도 이런 사람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었는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호천강은 어릴 때부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전부 제 손아귀에 넣고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오만하고 안하무인격인 성격이 이 사람을 본 순간부터 약간 겁을 집어먹은 것이었다. 그리고 호천강은 이 사람이 곁에 있을 때 한 가닥의 형용할 수 없는 살기를 느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호천강에게 어떤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호천강이 요구한 것을 상관금홍은 모두 승낙했다.

영웅첩을 발출해서 많은 사람들의 승낙을 받았다. 그리고 결의의 성전은 다음달 초하루로 정해졌다. 지금 그는 형무명과 함께 초류빈을 죽이러 가는 것이다. 호천강은 이 일에 매우 자신을 갖고 있던 까닭에 이 세상에 또 누가 초류빈을 구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다. 호천강이 깊게 한숨을 토하고 눈을 감자 눈앞에는 즉시 달콤한 미소를 잔뜩 머금고 웃는 아름다운 얼굴이 자기의 품속에 안겨 속삭이던 정경이 떠올랐다.

'너는 정말로 이젠 어린애가 아니구나. 네가 알고 있는 것은 어느 어른 못지 않게 많다. 도대체 넌 이런 일을 어디서 배웠니?'

여기까지 생각을 하던 호천강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런 일은 전혀 배울 필요가 없어요.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되는 일이 아닌가요?'

호천강은 이렇게 대꾸하며 확실히 자기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다. 이런 우월한 감정은 대다수의 아직 성장하지 아니한 소년들을 충분히 도취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소년들은 항상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하지만 노인들은 항상 그들을 어린애로 보고 있다.

이것은 인류가 탄생되면서 전해 내려온 많은 비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여기까지 생각을 했다면 황홀하여 더 이상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호천강은 달랐다. 그는 더욱 깊이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내게 그렇게 대한 것일까?'

호천강은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다시 중얼거렸다.

'혹시 초류빈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호천강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즉시 많은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초류빈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을까.....'

호천강은 다시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혹시 초류빈을 구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호천강은 설소하가 초류빈을 철저하게 증오하고 있으며, 오늘의 이 죽음의 설계도 설소하가 상관금홍과 형무명으로 하여금 초류빈을 살해하도록 꾸민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총명하고 영악한 호천강도 그 이상은 짐작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호천강은 지금의 상황이 이상하게 변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전날 설소하는 상관금홍의 손을 빌어 초류빈을 죽이려 했지만 지금은 백팔십 도로 상황이 달라졌다.

설소하는 상관금홍과 평등한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코 초류빈과 낭천을 죽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상관금홍은 그녀를 짓밟고 일어설 것이다.

설소하는 이 말을 상관금홍의 입에서 직접 들어 그의 속셈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는 형무명도 아니고 낭천도 아니다. 오직 나 상관금홍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이용만 하고 있을 뿐이다. 이 이용 가치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서로 가차없이 등을 돌릴 수가 있는 것이다!'

강호의 풍운이라는 것은 바로 여인의 마음과 같이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것이다.

마차는 먼지를 일으키며 계속 달리다가 성 안에 있는 가장 번화하고 큰 포목점 앞에 멈추었다. 그렇다면 초류빈이 바로 이곳에 갇혀 있다는 말인가.

호천강 부자는 과연 무서운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제일 번화한 곳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호천강은 일어서며 미소를 지었다.

"내리십시오."

"자네가 먼저 내리게."

형무명이 그 먼 길을 달려오면서 말을 한 것은 이 한마디가 처음이었다. 형무명은 누구든 자기의 뒤를 따르는 것을 싫어할 뿐 아니라 또 남의 앞을 가로질러 가는 성미도 아니었다.

일행은 주인과 점원 등의 응접을 받으며 점포를 지나갔다. 점포 뒤에는 주단을 쌓아 놓는 창고가 있었다. 초류빈이 바로 이 창고 안에 갇혀 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더할 수 없이 좋은 곳이다. 그러나 호천강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 앞을 지나쳤다.

창고를 지나면 후원이다.

후문 밖에는 이들이 타고 온 마차와 똑같은 마차가 서 있었다. 호천강은 아무 말없이 형무명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마차 위로 올라갔다. 이제보니 초류빈은 이곳에 갇혀 있지 않았다.

호천강이 이렇게 한 것은 사람의 추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부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일에 대해 심사숙고 한 것 같았다. 마차는 즉시 길 모퉁이를 돌아 교외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교외의 미곡창고 앞에 멈추었으나 이곳도 초류빈이 갇힌 곳은 아니었다.

이번에 그들이 바꾸어 탄 마차는 쌀을 성으로 운반할 때 쓰이는 달구지였다. 그러나 쌀가마니가 쌓여 있는 달구지 안에는 단 두 사람밖에는 숨을 수가 없었다.

호천강은 형무명을 보며 빙긋 웃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형무명은 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달구지는 다시 성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이 계획은 세밀했을 뿐 아니라 그 행동도 매우 신속했다. 더욱이 노선의 전환은 사람으로 하여금 도저히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도적의 종적을 수사하는데 흑도에서 그 이름을 떨친 구성명포(九城名浦)의 사람들이 구비사자구(九鼻獅子狗)라고 칭하는 만무실(萬無失)이라도 이쯤 되면 도저히 쫓아올 수가 없을 것이다.

호천강은 형무명이 자기의 이런 계획에 대해 절대로 칭찬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다소나마 감복해 하는 기색이라도 나타내 주기를 은근히 원했다. 만족스러운 일을 한 사람이 남의 칭찬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마치 오랜만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사랑하는 연안을 찾아갔으나 그 연인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때 호천강은 뭔가 뜨거운 것이 마음속에서 치미는 것을 느꼈다. 호천강은 확실히 어린애임에 틀림없었다. 남자들이 보는 관점에서는 이런 미성장한 소년들의 심리와 여인의 심리는 때때로 일치한다고 느낀다.

형무명은 얼굴에 아무 표정도 떠올리지 않았다. 이때 달구지는 길고 한적한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긴 도로에는 오직 일곱 가구밖에 살고 있지 않았다. 이 일곱 가구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관가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달구지가 계속 앞으로 나가는데 갑자기 한 집의 문이 열렸다.

그러자 달구지는 기다렸다는 듯 속력을 내어 그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 집은 강호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좌도어사(左都御史) 빈임천(賓林泉)의 집이다. 강호의 호걸들이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이런 관가의 인물과 교분을 맺지 않는다. 그렇다면 초류빈이 바로 이곳에 감금되어 있다는 것일까. 이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대청 계단에 환한 미소를 띠며 응접을 해 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호유성이 아닌가. 형무명이 달구지에서 내리는 즉시 호유성은 앞으로 달려나가 입을 열었다.

"일찍부터 형대협의 명성은 들어왔습니다만 오늘 이렇게 만나보니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이곳에 오려면 남의 이목을 피해야 하는 까닭에 고생을 끼쳐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형무명의 회색 눈동자는 자기의 손만 주시하고 있을 뿐 호유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호유성은 아직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대청에 술상을 봐 놓았으니 어서 들어가시죠."

형무명은 굳은 듯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냉랭하게 물었다.

"초류빈은 바로 이곳에 있소?"

호유성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이곳은 본래 빈공의 거처인데 빈선생께선 관무에 시달려 몇 개월 휴가를 얻고 며칠 전에 갑자기 떠나셨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호유성의 표정엔 일종의 득의에 가득찬 미소가 피어올랐다.

"빈공 혼자서 사는 집인데, 그는 이미 휴가를 얻어 나갔고 또 관가는 저와 잘 통하는 사이라 겨우 이곳을 빌린 것입니다."

호유성이 이곳을 빌린 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이유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들은 도저히 생각하지 못할 일이기도 했다. 때문에 호유성이 이렇게 득의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형무명은 아직까지 자기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당신을 여기까지 추종해 올 사람이 없을 것 같소?"

호유성은 안색이 변했으나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

"만약 정말 이곳까지 추종해 온 사람이 있다면 내 기꺼이 그에게 큰절을 올려 경의를 표할 것입니다."

형무명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좋소. 그렇다면 어서 절을 올릴 준비나 하시오."

"그러나 만약....."

그러나 호유성의 얼굴은 그 다음 말을 채 계속하지도 못하고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호천강도 자기 아버지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돌리다가 그 창백하던 얼굴이 그만 시퍼렇게 질렸다.

담구석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이 사람이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어디로 들어왔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일신에 청색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은 본래 새것이었으나 지금은 땀과 먼지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팔꿈치와 무릎 등 옷이 형편없도록 찢어져 나갔다. 또한 그의 몸이 시궁창에서 나온 것처럼 매우 더러웠을 뿐 아니라 머리도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그러나 호천강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한 가닥의 살기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온몸은 마치 허리에 차고 있는 검과 같이 보였다.

검집도 없는 한 자루의 검!

낭천이었다.

낭천은 기어코 오고 만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낭천만이 이곳까지 추종해 올 수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제일 교묘하며 제일 도피를 잘하고 가장 몸을 잘 숨기는 동물이 바로 여우다. 때문에 귀가 밝고 엄격한 훈련을 받은 사냥개라 할지라도 이 여우를 잡아 낼 수가 있을는지 의문이다.

그런데 낭천은 열한 살 때 무기도 없는 맨손으로 여우를 잡은 일이 있었다. 이들을 따라오는 동안 그 여정이 너무 고난의 연속이라 깨끗한 그의 몸이 이처럼 더러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낭천의 모습이었다.

더럽고 추하고 옷이 찢어지고 머리가 헝클어지고...야성미가 철철 넘치는 낭천의 참모습. 낭천에게는 일종의 잠재적인 조용한 인성과 또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특이한 야성이 있었다.

호유성은 즉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보니 낭천형이구려. 오랜만이오."

낭천은 무섭도록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호유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꺼냈다.

"형제께선 정말 용케도 이곳까지 따라왔구려. 정말 대단하오."

그러나 낭천은 여전히 싸늘한 눈동자로 말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낭천의 눈동자는 번들거리고 있는 반면 매우 예리했다. 이 이틀 동안의 피나는 추종이 낭천을 다시 옛날 그 검과 같이 매섭고 날카로운 인간으로 회복시킨 것 같았다. 이것은 형무명의 둔탁한 회색 눈동자와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호유성은 빙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형제의 추종이 비록 교묘하기는 했지만 이분 형대협께서 눈치채셨소."

순간 낭천의 눈동자가 형무명에게로 향했다. 형무명도 역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마치 한 자루의 검이 천 년이나 묵은 암석을 뚫는 것 같았다.

누구의 검날이 더 날카로울 것인가. 아니 어쩌면 그들이 지향하는 암석이 더 견고한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비록 얘기는 주고받지 않았지만 서로 마주치는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호유성은 형무명을 쳐다보다가 다지 낭천을 바라보았다.

"형대협이 비록 형제를 발견했지만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아시오?"

그러나 낭천의 눈동자는 마치 형무명의 눈동자에 흡수되어 들어간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호유성은 웃으며 다시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 이유는 형대협께서는 본래부터 형제가 오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오."

여기서 말을 끊고 그는 몸을 돌려 형무명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형대협, 제 말이 맞았습니까?"

그러나 형무명의 두 눈 역시 낭천의 눈동자에 빨려들어간 듯 한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지난 후 호유성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형대협께서 형제가 이곳에 오길 원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일념에서였소. 그것은 바로 형제를 죽이기 위해서요."

이때 호천강이 숨을 크게 내쉬며 말을 받았다.

"형대협께서 죽이려고 마음먹은 사람은 여태까지 한 명도 살아난 적이 없소."

낭천의 눈동자가 그제야 형무명이 차고 있는 검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러자 형무명의 눈동자도 동시에 낭천이 차고 있는 검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흡사한 두 자루의 검인지도 모른다. 이 두 자루의 검은 상고의 이름난 병기도 아니었고 또 이름난 대장장이가 만든 검도 아니었다.

두 자루의 검은 바늘도 자를 수 있을 만큼 예리했으나 너무 얇고 약해서 곧 부러질 것 같았다. 검은 비록 똑같았으나 두 사람이 검을 찬 모습은 달랐다. 낭천은 허리 가운데 검을 차고 있었고 검자루를 오른쪽으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형무명의 검은 허리 오른쪽에 차여져 있었는데 손잡이는 왼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두 자루의 검 사이에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특수한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검에 마찰되자 서로 한 걸음씩 상대방을 향해 접근해 갔다. 그러나 눈길은 한시도 상대방의 검에서 떼지 않은 채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차 좁혀져 약 다섯 자 정도의 사이를 두었을 때 갑자기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두 사람은 그곳에 뿌리를 내린 듯 꼼짝하지 않고 섰다.

형무명은 매우 짧은 황삼을 입고 있었다. 장삼의 끝은 그저 무릎을 약간 덮고 있었고 옷소매도 접혀져 있었다. 그 소매 속에서 나온 손가락은 매우 길고 가늘었으나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것이 매우 힘이 있어 보였다.

한데 낭천의 옷은 그보다 더욱 짧았다.

옷소매는 거의 완전히 찢겨져 나갔고 손가락도 매우 가늘고 길었으나 역시 산에서 생활해 온 만큼 거칠고 우악스러웠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손톱은 둘 다 매우 짧았다. 아마도 두 사람은 검을 뽑을 때 그 어떤 방해라도 원치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그 두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 닮은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기어코 서로 만났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맞서 있을 때 외모상으로는 극히 비슷한 것 같아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본질상으로 완전히 그 기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 형무명은 마치 가면을 쓴 듯 여태껏 그 얼굴에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낭천의 얼굴 역시 빙산처럼 싸늘했으나 그 텁수룩한 머리에 가려져 있는 두 눈빛만은 언제든지 화염에 불타오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어떤 일에 대해 자기 영혼을 모두 불태워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순간 형무명의 온몸은 완전히 한 줌의 재가 되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고고의 성을 울렸던 순간부터 그는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낭천은 모든 일을 인내로써 참고 기다릴 수 있었으나 어떤 사람이 몸을 놀리면 그땐 참지를 못했다. 하지만 형무명은 비록 한마디로써 그리고 눈치로 살인을 할 수 있었으나 꼭 필요할 때면 상대방의 그 어떤 몸놀림도 참아낼 수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매우 특이할 뿐만 아니라 또 무서운 사나이들이었다. 조물주께선 어째서 이 두 사람을 만드셨는지 그리고 어째서 이들로 하여금 오늘과 같은 상종이 있게 하셨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어느덧 가을은 꽤 깊어가고 있었다. 초록빛으로 빛나던 나뭇잎도 물기를 잃고 시들어갔다.

불어오는 바람은 세지 않았으나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눈물처럼 이곳저곳으로 떨어졌다. 어쩌면 이것은 바람의 조화가 아니라 두 사람의 살기를 감당해 내지 못하고 죽음을 재촉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을, 떨어지는 나뭇잎. 먼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일종의 말할 수 없는 처량한 느낌이 이 땅에 충만했다.

낭천과 형무명의 검은 여전히 허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호천강 부자는 이미 긴장상태로 돌입해 들어가 숨도 제대로 쉬지를 못했다.

가을과 바람과 떨어지는 나뭇잎...그리고 굳어 버린 두 사내.

돌연, 우수에 가득찬 공간을 가르고 싸늘한 한망이 번쩍였다. 십여 개의 한망이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사방으로 쫙 퍼져서 낭천을 향해 덮쳐들고 있었다. 호유성이 먼저 출수를 해낸 것이었다. 그때 또 한 줄기의 검빛이 일어났다.

창, 창.....

한 차례 요란한 소리가 일어난 후 허공을 덮고 있던 한망이 비오듯 전부 떨어졌다.

형무명의 검이 이미 허리에서 빠져나왔다. 그 검날은 바로 낭천의 귓전에 닿아 있었다. 낭천의 손 역시 검자루를 잡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검을 빼지 않고 있었다.

호유성이 날린 암기를 바로 형무명이 떨어뜨린 것이었다. 순간, 호유성 부자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때 형무명과 낭천은 다시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는데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얼마쯤 지나자 형무명은 검을 다시 천천히 허리에 찔러 넣었다.

그러자 낭천의 손도 내려갔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 지 모르겠으나 형무명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는 나의 검이 암기를 치기 위한 것이지 너를 찌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느냐?"

낭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형무명은 훅 한숨을 뿜어냈다.

"너는 담이 매우 크구나."

암기가 날아오고 형무명의 검이 찔러올 때 낭천은 검을 뽑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추호도 당황해 하지 않았다.

형무명은 낭천이 무엇이라 대꾸를 하기 전에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너의 반응은 너무 늦었다."

낭천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두 눈동자에 매우 침통하고 처량한 빛을 띠었다.

"그렇소."

낭천이 순순히 시인을 하자 형무명이 다시 이었다.

"난 충분히 너를 죽일 수 있었다."

이 말에 낭천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선뜻 동의했다.

"그렇소."

낭천의 대답이 여기까지 나왔을 때 호천강 부자는 서로 암중으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속으로 길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때 형무명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난 너를 죽이지 않겠다."

순간, 호천강 부자의 안색이 동시에 크게 변했다.

낭천은 놀랐는지 형무명의 회색 눈동자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형무명은 표정없는 얼굴로 간단하게 대꾸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은 네가 낭천이기 때문이다."

이때 형무명의 회색 눈동자에 일종의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형무명의 이런 눈빛은 지금 낭천의 눈초리보다 더욱 침통한 것이었다. 마치 먼 곳에 서 있는 사람처럼 형무명은 낭천을 멀건히 바라보았다.

이 순간 마치 하나의 천사와 마귀가 혼합한 것 같았다. 천사와 마귀의 싸움은 무서운 것이다.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싸움, 누가 이길 것인가를 예측할 수 없다.

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형무명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만약 너라면 너는 오늘 나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낭천도 이해할 수 없으며 오직 말을 한 형무명 자신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을 쓰는 사람 중 누구를 막론하고 거의 이 년 동안이나 낭천과 같이 침체된 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반응이 늦어지기 마련이다.

더구나 낭천은 매일 밤마다 어떤 여인에 의해 마취를 당해 온 터다. 그러므로 검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낭천의 반응을 조절할 수가 있다. 형무명이 낭천을 죽이지 않는 것은 절대 어떤 동정심에서가 아니었다. 형무명은 낭천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낭천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형무명이 낭천을 죽이지 않는 것은 낭천도 살아 남아 자신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원해서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게 실연을 당한 사람이 자기를 버린 그 사람도 역시 실연을 당했다면 그 고통은 훨씬 덜어진다. 또 재물을 잃어버린 사람이 남이 자기보다 더 많은 재물을 잃어버렸다면 어느 정도 자신을 위로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 낭천은 아직도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형무명은 낮은 기침을 하며 입을 떼었다.

"그만 가도 좋다."

순간 낭천은 고개를 갑자기 홱 쳐들었다.

"나는 가지 않겠소!"

형무명은 처음으로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안 가겠다고? 그렇다면 나더러 널 죽이라는 말이냐?"

낭천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형무명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초류빈 때문이냐?"

"그렇소. 그가 이곳에 있는 한 절대 당신의 손에 죽게 하지 않을 거요."

이때 호유성이 크게 소리쳤다.

"설소하는 어떻게 하고? 그녀가 당신 때문에 고통을 받아도 좋다는 말이오?"

순간 낭천의 마음은 마치 한 개의 비수를 맞은 듯 몹시 아팠다.

형무명은 몸을 돌려 두 부자를 향해 소리쳤다.

"난 살인을 좋아하는 사람이오. 물론 그대들도 알겠지?"

호유성은 입가의 근육을 씰룩이며 억지로 웃었다. 그 웃음은 매우 어색한 것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형무명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난 당신이 틀림없이 알고 있기를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난 당신을 죽일 것이니까."

형무명은 여기까지 말한 후 호유성을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초류빈은 어디 있소? 나를 데려다 주시오."

"하지만 그는....."

형무명이 다시 무섭게 소리쳤다.

"난 언제든지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오."

음식은 물론이고 물도 없었다. 이곳에 감금된 지 거의 십여 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초류빈은 혈도가 제압되었기 때문에 굶주림으로 전신의 힘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형무명이 그의 앞에 서서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초류빈은 구석진 곳에 축 늘어져 있었다. 지하실 안은 다섯 손가락을 한참만에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컴컴했다. 초류빈의 표정은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희미하게나마 더러운 옷 그리고 수척하며 피곤에 찌들은 신체와 절망적인 눈동자만은 분별할 수가 있었다.

형무명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바로 초류빈이오?"

호유성은 별 감정없이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형무명은 약간 실망한 듯 다시 물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초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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