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31 소이비도 제2권 소리없는 살풍殺風





소리없는 살풍(殺風)



초류빈이 왼손잡이 검수를 주의하고 있을 즈음 손소홍의 주의력은 다른 데 쏠려 있었다.

선후로 하여 걸어오는 두 사람은 단지 걸음이 느리고 보폭을 비교적 크게 옮길 뿐 얼핏 보아 일반 사람들의 걸음과 별로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녀는 두 사람의 걸음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그녀는 한참 주의를 기울여서야 그 원인을 발견했다.

상례로 보아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걸으면 보조가 거의 같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유별났다. 뒤에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앞에 있는 자가 첫걸음과 두 번째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첫걸음을 내딛곤 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의 다리는 한 사람 몸에 붙어 있는 것같이 걸음이 질서정연했다. 앞에 있는 자가 첫걸음을 내딛으면 뒤에 있는 자가 두 번째 걸음을 옮기고, 앞서 가는 자가 세 번째 걸음을 내딛으면 뒤에 있는 사람이 어김없이 네 번째 걸음을 옮겼다. 한 번도 순서가 틀리거나 속도가 변하지 않았다.

손소홍은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걷는 것은 난생 처음 보았으므로 아주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러나 초류빈은 추호도 재미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비단 재미있다고 느끼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가공스럽게 여겨졌다.

두 사람의 보조가 이렇게 기묘하게 배합돼 있다는 것은 즉, 두 사람의 마음마저도 일종의 해석할 수 없는 기이한 묵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걸음걸이까지 이런 기모한 배합이 형성돼 있으니 만약 합세하여 적을 공격한다면 서로의 초식은 더욱 신기한 배합을 이를 것이다.

앞서 가는 자는 상관금홍일 것이고 뒤를 따르는 자는 형무명임에 분명할 것이다. 단지 상관금홍만 해도 무림에서 으뜸을 다투는 고수이거늘 형무명까지 합세를 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초류빈의 심장은 오그라들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협공을 격파할 수 있는 방책을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정자 안에 있는 노인이 두 사람을 순순히 되돌아 가게 하리라곤 더욱 믿어지지 않았다.

땅거미가 깔린 이후로 이미 다른 행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자 안에 있는 노인은 여전히 담배를 뻐끔뻐끔 피고 있었다. 그것에 따라 불빛이 꺼졌다 일었다 했다.

초류빈은 홀연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담뱃대에서 이는 불꽃 역시 일정한 시간을 두고 깜박거리지 않는가. 그러다가 홀연 작은 한 점의 불꽃이 초롱불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담뱃불로써 이렇게 밝은 빛을 조정하는 사람을 초류빈은 본 적이 없다. 상관금홍도 역시 환한 담뱃불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걸음을 멈추자 뒤따르던 자도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심령(心靈) 상의 기이한 감응(感應)이 있어 서로 심 파(心波)로써 뜻을 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이때 정자 안의 불꽃이 돌연 꺼졌다. 그러자 어렴풋이 보이던 노인의 신형도 이내 어둠 속에 삼켜졌다.

상관금홍은 길 위에 석고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느릿느릿 정자 위로 올라가 노인 앞에 조용히 섰다.

그가 어디로 걸음을 옮기든 형무명은 그림자처럼 따랐다.

네 개의 높이 받쳐 든 초롱불도 위치를 옮겨 정자의 사면을 에 워쌌다. 정자 안은 초롱불에 비쳐 대낮처럼 환해졌다.

초류빈은 그제서야 노안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노인은 주위에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 듯 고개를 숙인 채 정자 안에 놓여 있는 돌의자에 앉아 열심히 담뱃대에 담배를 담고 있었다.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깨끗하게 손질한 남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상관금홍도 역시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진면목을 보이기 싫어서인지 얼굴 전체를 죽립 그늘 속에 깊이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줄곧 노인의 손을 주시했다. 노인의 동작 하나하나를 그는 아주 자세히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느릿한 동작으로 담배주머니에서 연초를 꺼내어 천천히 담뱃대를 쑤셔 넣었다. 그의 동작은 느리지만 손은 매우 온정(穩定)했다.

꼭꼭 연초를 쑤셔 넣은 후에 그는 다시 화섭자를 꺼내 앞에 놓여 있는 상 위에 올려 놓더니 종이를 꺼내어 지연(紙煙)을 말았다. 지연을 똘똘 말아 상 위에 내려놓더니 다시 화섭자를 들었다.

그러자 상관금홍은 홀연 앞으로 걸어가 상 위에 있는 지연을 집었다. 등불을 빌어 지연이 아주 가늘고 고르게 말아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관금홍은 두 손가락으로 지연을 들고 자세히 살펴보더니 비로소 지연을 천천히 화섭자 앞으로 내밀었다.

팍!

나직한 마찰음이 들리며 화섭자에서 불꽃이 튕겼다. 지연은 금세 불이 붙었다.

상관금홍은 불이 붙은 지연을 천천히 노인의 담뱃대로 갖다댔다.

손소홍과 초류빈은 비록 정자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이 서 있는 곳이 어둡기 때문에 노인과 상관금홍의 모든 동작을 낱낱이 지켜볼 수 있었다.

"우리가 나서야 되지 않겠소?"

손소홍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럴 필요없어요. 저의 할아버님은 꼭 그들을 되돌아 가게 할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녀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 그러나 초류빈은 그녀의 손이 갑자기 차가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손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물론 그녀가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담뱃대의 길이는 불과 두 자, 지금 상관금홍의 손은 노인에게서 두 자도 못 미치는 거리에 있었다.

그는 수시로 노인의 어떤 혈도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출수를 하지 않았다. 기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인은 상관금홍이 내민 지연에 대고 계속 담뱃대를 빨고 있었다. 연초가 너무 젖었는지 아니면 너무 꽉 쑤셔 넣었는지 불이 붙을 것 같으면서도 좀처럼 붙지 않았다. 그가 담배를 피우는 자세는 매우 특이했다. 왼손 엄지손가락과 식지(食指), 중지(中指)로 담뱃대를 들고 무명지(無名指)와 새끼손가락은 살짝 위로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상관금홍은 엄지와 식지로서 지연을 집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약간 안쪽으로 구부린 자세였다.

노인의 무명지와 새끼손가락은 그의 완맥에서 약 일곱 자 가량 떨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상관금홍이 쥐고 있는 지연만이 연신 불꽃을 깜박이며 안으로 타들어 갔다. 불꽃은 급기야 상관금홍의 손가락까지 연소시켰다.

그러나 상관금홍은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바로 이 때였다.

팍!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담뱃대에 쑤셔 넣은 연초에 드디어 불이 붙었다.

그와 동시에 상관금홍의 안쪽으로 구부린 세 손가락이 살짝 움직이는 듯싶었다. 노인의 무명지와 새끼손가락도 역시 파르르 떨렸다.

그들의 동작은 매우 빨랐다. 그리고 아주 경미하여 살짝 움직인 후에 곧 정지되었다.

그러자 상관금홍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노인은 길게 숨을 들이켜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두 사람은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어느 누구도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제야 초류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정자 안에 있는 두 사람이 단지 담뱃불을 붙인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초류빈은 그것이 바로 일장 경천동지할 결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관금홍은 줄곧 기회를 포착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일단 노인의 신지(神志)에 털끝만큼의 빈틈이 보이거나 손목이 약간만 불안정했다면 그는 즉시 출수를 했을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일단 그가 출수를 하면 그것은 필시 치명적인 살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종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 나중에 그는 단호한 결심을 내려 구부린 세 손가락으로 출수할 시도를 했다.

그의 손가락 동작 하나하나에는 모두 오묘한 변화가 숨겨져 있었다.

그런데 노인의 무명지와 새끼손가락이 즉시 그의 모든 변화를 봉쇄시킨 것이다. 그 짤막한 순간에 일어난 기묘한 변화는 물론 초류빈 같은 사람만 비로소 감상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공에 있어 가장 심오한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단지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을 뿐이지만 그것은 생사를 결정하는 천변만화(千變萬化)였다고 아니할 수 없었다.

그간의 위기는 절대 다른 사람이 장검이나 비도로써 피비린내 나는 악투를 전개하는 것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려는 것을 땅에서 가느다란 대나무로 받친 듯 긴장과 공포, 그리고 죽음이 뒤범벅된 일순이었다.

지금 그 아슬아슬한 위기는 이미 지나갔다. 상관금홍은 뒤로 세 걸음 물러나 원래 서 있는 자리로 되돌아 왔다.

노인은 천천히 담배를 빨아들이더니 비로소 태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제서야 상관금홍을 처음 본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당신이 왔구려."

하며 담담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상관금홍도 역시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소."

노인은 코로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입가에 여전히 미소를 담았다.

"생각한 것보다 늦게 왔소그려."

상관금홍은 담뱃대를 쥐고 있는 그의 손을 주시하며

"그렇다면 귀하는 내가 필시 이곳을 지나가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오?"

하고 반문을 했다.

노인의 눈빛은 그가 쓰고 있는 죽렵 가장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나는 단지 당신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소."

상관금홍은 상대방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그치듯 물었다.

"무엇 때문에....."

노인은 천천히 대답했다.

"당신이 설사 이곳에 당도한다 하더라도 즉시 떠나야 하니까 ....."

상관금홍은 길게 숨을 들이키고는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내뱉었다.

"내가 만약 떠나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겠소?"

그의 말투에는 모종의 단호한 결심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상대방의 대꾸에 따라 그는 즉시 행동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조금도 신색이 동요되지 않았다.

"당신은 필시 떠나가리라 믿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관금홍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시종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형무명의 왼손에도 즉시 검자루가 쥐어졌다. 정자 안은 이내 살기로 충만되었다.

한데 노인은 조금도 신색이 동요되지 않고 길게 담뱃대를 빨더니 천천히 연기를 내뿜는 것이었다. 그가 내뿜은 연기는 원래 막대기같은 한 줄기의 가느다란 연주(煙柱)였다.

그런데 그 연주는 천천히 일종의 특이한 곡선의 변화를 일으키더니 돌연 허공에서 흩어지며 상관금홍의 얼굴을 향해 폭사되어 갔다.

상관금홍은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연기는 별안간 사방으로 분산되었다. 상관금홍은 아지랑이처럼 퍼져가는 연기를 주시하며 주먹을 쥐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형무명의 손도 검자루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상관금홍은 노인을 향해 정중히 읍을 했다.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요."

노인은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별말씀을....."

상관금홍의 시선이 노인의 손에서 얼굴로 옮겨졌다.

"당신과 나는 십칠 년 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또 헤어져야 하다니 섭섭한 마음 금할 길이 없소. 언제 다시 만나보게 될 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인은 덤덤한 음성으로 받았다.

"만나는 것보다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리고 만난들 또 무얼 하겠소?"

상관금홍은 침묵을 지키며 무슨 말을 하려는 눈치였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노인은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관금홍은 천천히 몸을 돌려 정자 밖으로 걸어나갔다.

형무명은 그림자같이 그의 뒤를 따랐다. 초롱불이 점점 멀어져 감에 따라 대지는 다시 어둠 속에 잠겼다.

초류빈의 눈빛은 초롱불이 사라진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슨 근심사가 있는 듯 시무룩했다. 상관금홍이 떠나기 직전에 고의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그와 손소홍이 있는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초류빈은 그 순간 비로소 처음으로 상관금홍의 눈동자를 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보는 음험하고 예리한 눈빛이었다. 그 한 쌍의 눈에서 상관금홍의 내공이 풍문에 나도는 것보다 더욱 무섭다는 사실을 초류빈은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형무명의 눈동자였다. 상관금홍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도 역시 이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단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그의 눈빛과 한 번만 마주치면 마치 살아 있는 뱀이 뱃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듯, 속이 메스껍고 심지어 구토증을 일으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예 사람의 눈이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야수의 눈도 아니었다.

사람의 눈이든 야수의 눈이든 최소한 감정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탐욕이든 잔혹, 혹은 악랄함이든 다소의 감정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한 쌍의 눈은 죽어 있었다. 그 눈동자는 모든 사물을 냉시하고 있었다. 모든 생명과 심지어 자신의 생명마저도.

손소홍은 그러한 것을 주의하지 못했다. 그녀는 초류빈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류빈을 똑똑히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어둠 속에서지만 초류빈의 얼굴 윤곽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특히 그의 눈과 코는 손소홍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의 눈은 심원(深遠)하고도 맑았다. 그리고 지혜로 가득차 있었다. 그의 눈빛은 다소 피곤함과 조롱이 깃들어 있지만 또한 위대한 감정으로 충만돼 있었다.

그의 코는 그의 강인, 정직, 그리고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을 상징하듯 일직선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눈가엔 비록 잔주름이 생겼지만 그것은 더욱 그를 성숙하게 보이도록 했고 무한한 흡인력과 안정감을 풍기게 했다.

그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완전히 그를 믿게 되고 모든 것을 그에게 의탁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대다수의 처녀들이 꿈에 그리는 전형적인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인이 이미 가까이 걸어와 그들을 향해 웃음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동자엔 흐뭇해하는 빛으로 출렁였다.

노인은 한참 동안 그들을 바라보다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이 늙은이와 얘기를 나눌 생각이 없느냐?"

두 사람은 그제야 현실로 돌아와 일제히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노인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온화한 웃음이었다.

어느 틈에 달이 먹구름을 뚫고 모습을 나타냈는지 알 수 없었다. 회색의 관도(官道)는 달빛을 받아 곧장 앞으로 뻗어 있었다.

노인과 초류빈은 앞에서 걷고 손소홍은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비록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슴이 터질 듯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그녀가 고개만 들면 곧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과 가장 사랑스러운 남자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달빛이 점점 쏟아져 그들의 그림자로 하여금 포근히 그녀를 감싸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마저 따사롭게 감싸 주었다. 그녀는 밤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러 이 행복감을 표현하고 싶었다.

노인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네. 벌써부터 자네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오늘 이렇게 얘기를 나누게 되었으니 그저 기쁘기 한이 없네."

초류빈이 빙긋이 웃자 뒤를 쫓아오던 손소홍이 고소를 터뜨리며 먼저 노인의 말을 이어 받았다.

"하지만 그는 단지 할아버님께 형식적인 안부만 물었을 뿐 다른 말은 일절 하지 않았잖아요?"

노인은 입에 물려던 담뱃대를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그것이 바로 초류빈의 좋은 점이다. 그는 항상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입 밖에 내지 않고 묻지 말아야 할 일도 절대 언급을 하지 않지.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필경 벌써 우리들의 내력부터 물었을 것이다."

초류빈은 미소를 띠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쩌면 제가 이미 선배님의 내력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래....."

하고 의문을 표했다.

초류빈은 금세 이어 말했다.

"세상은 넓지만 상관금홍을 경퇴(驚退)시킬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으니까요."

그러자 노인은 그에게 고개를 돌리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관금홍이 나 때문에 되돌아 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일세."

그는 초류빈이 대꾸도 하기 전에 다음 말을 이어갔다.

"상관금홍의 무공에 대해 아마 자네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갈 걸세. 그리고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젊은이는 더욱 무서운 적수지. 그들 두 사람이 합세를 하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절대 그들의 삼백 초식 이상을 받아내진 못할 걸세. 하물며 그들을 이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네."

초류빈은 눈동자를 반짝 빛내며 조심스레 물었다.

"선배님도 그들을 당해낼 수 없습니까?"

노인은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네. 나는 그들의 적수가 될 수 없지."

초류빈은 흥미가 있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그들은 왜 순순히 떠나갔을까요?"

노인은 담배를 길게 빨아들여 연기를 내뿜으면서 설명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이 아직 나를 죽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자네가 바로 정자 부근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냥 돌아갔을 것이네. 그들은 우리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해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 말일세."

손소홍은 호기심이 어린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나섰다.

"그들이 설사 나무 뒤에 사람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해도 어떻게 초...초탐화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노인은 한 가지 예를 들어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 주려 했다.

"초탐화 같은 절정고수는 설사 어둠 속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일단 그가 마음속으로 어느 누구에게 적개심을 느끼게 되면 자연히 일종의 살기가 암산되기 마련이지."

손소홍은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반문했다

"살기라고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무형의 살기다. 하지만 그런 살기는 물론 상관금홍 같은 고수라야지만 느낄 수가 있지."

손소홍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할아버님의 말씀은 너무 심오해 저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

노인의 신색이 숙연하게 변했다.

"무공 자체가 원래 심오한 것이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자연히 많지 않지."

이번에는 초류빈이 입을 열었다

"그들이 어떠한 이유 때문에 되돌아 갔든 선배님이 도와주신 점은....."

노인은 담뱃대를 쥐지 않은 손을 들어올려 초류빈의 말을 중단시켰다.

"만약 내가 자네를 도와주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도 역시 오산이네. 나는 항상 나 자신을 위해 일을 할 뿐이네."

"하지만....."

노인은 다시 그의 말을 끊으며 미소를 띠고 말했다.

"나는 단지 자네 같은 사람이 무사히 살아가길 바랄 뿐이네. 자네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흔하지 않으니까."

초류빈은 미소를 보이고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다시 말했다.

"우리는 비록 정식으로 처음 만나는 것이지만 나는 자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지. 그래서 자네더러 이곳을 떠나라고 권하지는 않겠네."

그의 눈길은 초류빈의 표정을 살피며 홀연 심각하게 변했다.

"단지 자네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아 주었으면 좋겠네."

초류빈은 상대방의 심각한 표정에서 심각한 말이 나오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선배님의 가르침을 원합니다."

노인은 정색을 했다.

"설벽운은 자네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네. 자네가 만약 이곳을 떠난다면 그녀에게 도움이 될 것일세."

초류빈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노인은 원래부터 그의 대답을 바라지 않았는지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설벽운 자신은 다른 사람의 상해의 대상이 되지 않네. 다른 사람이 그녀를 살해하려는 것은 자네 때문일세.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 그녀를 살해하려는 것은 자네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니, 자네가 만약 그녀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아예 그녀를 살해하려는 사람이 없을 걸세...내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하겠나?"

초류빈은 누구에 의해 홀연 채찍질을 호되게 맞은 듯 그 고통으로 인해 전신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일순간 그는 자신이 단지 삼 척밖에 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노인은 그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전혀 유의치 못한 듯 말을 계속했다.

"자네가 만약 그녀가 외롭다고 생각해서 그녀와 가까운 곳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네.호유성이 이미 돌아왔으니까. 자네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단지 그녀에게 번뇌를 증가시킬 뿐일세."

초류빈은 초점을 잃은 듯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멍하니 어둠 속을 응시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 잘못이야, 내 잘못...또 내 잘못이군....."

그의 허리는 약간 앞으로 구부러졌다. 그는 가슴을 펼 수 없었다.

손소홍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콧등이 시큰해졌다.

그것은 단지 동정만이 아니었다. 설벽운에게 너무나 강한 집념을 가진 초류빈이 밉기까지 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일부러 그에게 자극을 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의로 그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그를 위해서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손소홍은 가슴이 아팠다.

노인은 약간의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호유성이 갑자기 돌아온 것은 초류빈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을 포섭했기 때문이네."

초류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는데...저는 여전히 그를 친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자네는 그가 찾은 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초류빈은 손소홍과 손꼽추의 대화를 들었기 때문에 즉시 대꾸했다.

"호불귀가 아닙니까?"

노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바로 그 호풍자지."

이때 손소홍이 다시 나섰다.

"그 호풍자의 무공은 정말 그렇게도 무서운가요?"

노인은 대답을 하기 앞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천하를 총망라하여 무공을 추측할 수 없는 사람은 단 둘 뿐이란다."

손소홍이 즉시 물었다.

"그 두 사람은 누구죠?"

노인은 미소를 머금고 우선 초류빈을 쳐다보았다.

"그 중 한 사람운 초탐화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바로 호풍자지."

초류빈은 멋쩍게 웃었다.

"선배님, 그것은 정말 과찬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저의 친구인 낭천의 무공도 절대 저만 못하지 않고 또한 형무명도 역시....."

노인은 단호한 어조로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낭천은 형무명과 같이 전혀 무공에 대해 아는 바가 없네."

이 엉뚱한 말에 초류빈은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아는 것은 단지 살인뿐이네!"

초류빈은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낭천과 형무명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번엔 노인이 반문을 했다.

"어째서 다르다는 건가?"

그들이 살인하는 방법이 어쩌면 같을지 모르겠지만 살인을 하는 목적은 절대 같지 않을 겁니다."

"그래?"

"낭천은 부득이할 경우에만 살인을 하지만 형무명은 살인을 하기 위해 살인을 할 뿐입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이 맞았네. 낭천이 자네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네.자네는 지금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가? 왜 그를 한번 찾아가지 않지?"

초류빈은 고개를 떨구었다.

"저는....."

노인은 그에게 일종의 무서운 힘을 주입시키듯 눈빛을 예리하게 번쩍이며 힘주어 말했다.

"자네가 그를 찾아갈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지금이 바로 적절한 시기일세. 지금 찾아가지 않으면 앞으로는 늦을 걸세."

과연 초류빈은 어떤 자극을 받은 듯 홀연 가슴을 폈다.

"좋습니다. 지금 당장 그를 찾아가야겠습니다."

노인은 그제야 입가에 한 가닥의 미소를 떠올렸다.

"자네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하고 초류빈이 막 대답을 하자 뒤에 있던 손소홍이 별안간 앞으로 달려왔다. 그녀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지도만 가지고는 쉽사리 찾지 못할 거예요.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는 게 좋겠어요."

초류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노인은 엄숙한 신색으로 말했다.

"너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그리고 초탐화는 너의 안내가 없어도 쉽사리 그곳을 찾아갈 것이다."

그러자 손소홍은 금시 뾰로통하게 변해 고개를 숙였다.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초류빈은 그녀의 표정을 감히 정면으로 볼 용기가 없어 얼른 포권의 예를 춰했다.

"그럼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그의 마음속엔 할 말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간단하게 작별을 고했을 뿐이다. 이 노인 앞에선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노인은 잠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맞았네. 간다면 곧 출발해야지. 그래야지만 남아대장부라 할 수 있지!"

초류빈은 과연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손소홍의 눈언저리가 붉어져 있었다.

노인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심정이 괴로우냐?"

손소홍은 초류빈의 모습이 사라진 지점을 멍하니 주시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둘렀다.

"그렇지 않아요."

제딴엔 강경하게 말했지만 그녀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무한히 자상한 웃음이었다.

"얘야, 이 할아버지가 네 마음을 모를 성싶으냐?"

손소홍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어 노인의 품안으로 파고들며 울먹이는 소리로 외쳤다.

"할아버님은 저의 마음을 알면서도 왜 그를 따라가지 못하게 했죠?"

노인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 어리석은 것아, 초류빈 같은 남자를 사로잡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라."

하고 말하는 노인의 세고(世故)의 지혜가 반짝였다.

"그를 사로잡으려면 우선 그의 마음부터 얻어야 한다. 그것은 간단한 게 아니야. 차근차근 노력을 쌓아 올려야 한다. 만약 네가 너무 서둘러 그를 붙잡으려면 그는 도리어 당황하여 달아나기가 쉽단다."

노인의 품속에 안겨 있으면 손소홍은 언제나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초류빈은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비록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무형의 줄에 매어져 있었다. 아니, 꽉 조여져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지금 떠나면 언제 다시 설벽운을 만나보게 될지 그 자신 기약할 수 없었다.

만남이 어렵듯이 헤어짐은 더욱 어려운 것!

그간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그가 설벽운을 본 것은 단 세 번. 그것도 언제나 총총한 만남이었다. 심지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잡은 줄은 영원히 설벽운의 수중에 쥐어져 있었다.

이어서 그녀를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다면, 아니 그녀가 자기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느낌만 가질 수 있다면 그는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살갗을 할퀴고 지나가는 가을바람은 곧 닥쳐올 겨울을 의식케 했다. 가을은 점점 깊어져 갔다.

초류빈의 심정도 늦가을의 날씨처럼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자네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단지 그녀의 번뇌와 고통을 증가댙쳔?뿐이네.....'

노인의 말이 다시 그의 귓전을 때리는 것 같았다. 만나서는 안 될 여자, 심지어 생각도 해선 안 될 여인, 초류빈인들 왜 그것을 모르겠는가?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고목나무에 기대어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이 멎자 그는 생각해선 안 될 일은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행하게도 그에게는 생각해야 할 다른 일들이 많았다.

그 노인은 비단 지자(知者)일 뿐 아니라 필시 풍진이인(風塵異人)이며 절정고수일 것이다. 어떠한 세상사에 대해서도 그는 거의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신분만큼은 너무나 신비스러웠다.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손꼽추에 대해서도 초류빈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

상 닦는 일로써 자신을 십사 년 간이나 가두어 둘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다른 사람의 감탄을 받을 자격이 있을 것이다.

그는 대관절 누구를 위해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또한 그가 지키는 것은 무엇일까? 손소홍, 그녀의 마음을 그는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받아들일 용기도 없다.

아무튼 그 집안 식구는 어떻게 보면 무서우리만큼 신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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