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32 소이비도 제3권 이중 생활





이중 생활



두메 산골, 산기슭 아래 일련의 숲이 타는 듯 단풍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풍림(楓林)을 끼고 쓰러져 가는 주막집이 자리해 있고 주막 앞에는 높은 대나무에 꽂은 청색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깃발에 새겨져 있는 일곱 글자는 은근히 길손의 주흥(酒興)을 돋운다.

<정차애취풍림만>

'걸음을 멈추고 이 밤을 풍림에서 취하라'

초류빈은 그 글귀만 읽어도 스르르 취하는 기분이었다. 술 빛깔은 혼탁하지 않고 맑았다. 산에서 흐르는 샘물을 길어 빚은 술임에 분명하다.

샘물은 산 저편에서부터 이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샘물 줄기를 따라 산을 끼고 돌면 바로 일편의 매림이 나타날 것이고, 그 속에 은닉된 세 칸의 아담한 목옥(木屋)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초류빈은 손소홍이 준 지도를 뇌리로 되새기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낭천과 설소하는 바로 그 목옥에 있을 것이다. 낭천의 그 영준하고 약간 핼쓱한 얼굴과 맑고 예리한 눈동자 그리고 다소 오만스러운 느낌을 주는 듯한 강인한 표정이 뇌리에 떠오르자 초류빈은 피가 끓기 시작했다.

가장 잊혀지지 않는 것은 보기 어려운 그의 웃음이다. 그리고 얼음장 뒤에 숨겨져 있는 그의 마음, 고향이 가까워지면 흥분과 영문 모를 두려움마저 느끼는 법. 초류빈의 지금 심정은 바로 그러했다. 이곳에 당도하기 전에 그는 단숨에 낭천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막상 이곳에 도착하고 보니 도리어 낭천을 찾아가기가 두려워졌다.

낭천은 이 년 동안 어떻게 변해 있을까? 설소하는 그동안 어떻게 그를 대해 왔을까? 초류빈은 자꾸만 두려움이 앞섰다.

'그녀는 비록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지만 남자를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취미를 지니고 있어요.....'

손소홍이 한 말이다.

'낭천은 혹시 이미 지옥으로 떨어진 게 아닐까?'

초류빈은 더 이상 깊은 생각을 할 용기가 없었다. 그는 낭천을 잘 알고 있다. 낭천 같은 사람은 애정을 위해 설사 지옥에서 사는 것조차 감수할 것이다. 저녁 바람에 실려 또 황혼이 찾아왔다.

주막은 아직 등불을 밝히지 않았다. 아마 등유가 싸지 않은 탓이겠지. 그리고 지금 주막에는 다른 손님이 없었다.

초류빈이 앉아 있는 위치는 주막에서 가장 어두운 구석이다. 이것은 그의 습성이기도 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야지만 들어오는 사람을 똑똑히 볼 수 있고 또한 상대방은 그를 발견하기 어려운 이점이 있다.

그런데 첫 번째로 들어온 손님이 상관비일 줄은 초류빈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상관비는 들어오자마자 문쪽에 위치한 자리에 앉았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듯 줄곧 문 밖을 주시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다소 초조하고 긴장된 표정이었다. 예전에 본 그의 음침하고 차분한 태도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주 중요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사람을 이끌지 않고 단신 홀몸으로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이곳에서의 약속은 비단 중요할 뿐 아니라 극비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황량한 두메 산골에 그가 중요시하는 인물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은 혹시 낭천, 설소하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대되어 갔다.

초류빈은 손으로 이마를 괴어 얼굴을 감추었다. 사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상관비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상관비의 눈은 시종 문 쪽을 주시할 뿐 전혀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았다.

날은 더욱 어두워졌다. 주막 안은 드디어 불이 밝혀졌다.

상관비의 신색은 점점 더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바로 이때 녹색 가마 두 개가 문 앞에서 멎었다.

가마를 들고 온 사람들은 모두 삼십 세 가량의 건장한 대한들로서 몸에 꽉 붙는 남색 경장을 하고 다리엔 칭칭 끈을 맸으며 허리엔 붉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앞쪽 가마에서 빨간 옷을 입은 계집애가 내려왔다. 나이는 줄잡아 열세 살, 비록 남자의 마음을 끄는 매력은 없지만 깜찍하게 생겼다.

상관비는 들어올렸던 술잔을 얼른 내려놓았다.

계집애는 눈동자를 사르르 돌려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사뿐사뿐 주막으로 걸어들어와 상관비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생긋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공자,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상관비는 예리한 눈빛으로 계집애를 훑어보았다.

"너는....."

홍의소녀는 다시 주위를 훑어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춘삼월에 피는 꽃은 님의 얼굴 같대요."

이것은 일종의 암호인 것 같았다. 상관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왜 오지 않았느냐?"

대뜸 묻는 말에 홍의소녀는 섬섬옥수로 입을 가리고 까르르 웃었다.

"공자, 서둘지 말고 저를 따라오세요."

그리고는 앞장서 밖으로 나갔다.

초류빈은 상관비가 소녀의 뒤를 따라나가 두 번째 가마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가마꾼이 가마를 들어올리는 순간 그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가마꾼들은 모두 허우대가 장대하고 민첩했다. 앞쪽에 있는 가마를 든 가마꾼은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고 거뜬히 가마를 들어올렸다. 그런데 뒤쪽에 있는 인부들은 가마를 들 때 몹시 힘겨워 보였다.

똑같은 가마. 기력이 비슷한 가마꾼이다. 그리고 상관비의 몸집은 큰 편이 아니었다. 물론 앞가마에 앉아 있는 홍의소녀의 몸무게가 가볍겠지만 상관비와 현격한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뒷가마는 앞가마보다 훨씬 무거울까?

초류빈은 즉시 술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원래 남의 일에 신경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이 남의 비밀을 캐는 취미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관비의 뒤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그와 약속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상 필경 낭천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누구의 일도 상관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낭천의 일만큼은 꼭 상관을 해야 한다. 이곳 두메 산골의 길은 오직 한 줄기뿐이다. 관도에서 가지처럼 뻗쳐나와 기름과 소금을 파는 잡화상을 지나 싸전과 조금 전에 나온 주막집 그리고 십여 가호를 거쳐 길은 꾸불꾸불 풍림으로 뻗어 있었다.

지금 가마는 이미 풍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앞쪽 가마를 든 인부의 걸음은 가벼웠다. 그러나 뒤쪽 가마를 들고 가는 인부들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가는 가마는 비단 무거울 뿐 아니라 연신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돌연, 가마 속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애교가 잘잘 흐르는 분홍빛 웃음이었다. 그 웃음소리의 꼬리를 이어 미약한 숨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남자라면 그러한 웃음소리를 듣고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애교를 잘 부리고 가장 요염한 여인이어야지만 그런 웃음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마엔 분명히 상관비가 타고 있지 않는가.

혹시 상관비가 갑자기 여자로 변신한 게 아닐까? 그럴 리는 없다. 그럼 어떻게 된 영문일까?

잠시 후, 가마 안에서 다시 혼백을 녹이는 듯한 교성이 들려왔다.

"음...이러지 마세요...조금만...조금만 참으세요."

상관비의 숨 넘어갈 듯한 음성이 뒤따랐다.

"참을 수가 없소...어서 계속....."

"음...미워요...당신의 취미는 유별나군요...얼굴에 묻겠어요 ....."

"앗!...음....."

자갈을 입에 문 듯한 여인의 야릇한 교성과 함께 상관비의 거친 숨소리가 더욱 극렬해지더니 차츰 연약해져 갔다. 가마는 이미 언덕 위에 올라가 있었다.

초류빈은 언덕 아래서 나무에 기대어 나직이 기침을 했다.

"알고 보니 가마엔 두 사람이 타고 있었군."

그중 한 사람은 물론 상관비일 것이다. 그러면 가마 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여인은 누구일까?

그 요염한 웃음, 혼백을 녹일 듯한 교성, 모두 초류빈의 귀에 익은 것이었다.

그는 여자에 관한 지식이 많다. 이 세상에 애교를 부릴 줄 아는 여인은 적지 않지만 애교를 부려 남자의 마음을 동요하게 하는 여인은 많지 않다. 그는 가마 속에 있는 여인의 이름을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감히 말할 수 없었다. 아직 확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대하든 그는 경솔하게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과오를 범하기가 싫었다. 그에게 있어 한 번의 과오라 할지라도 그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번의 오판으로 그는 비단 자신의 일생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생마저 해쳤다.

언덕 위 풍림 깊숙한 곳에 한 채의 작은 누각이 보였다. 가마는 바로 그 누각 앞에 내려졌다. 뒤쪽 가마를 들고 온 인부는 가마를 내려놓기 무섭게 수건을 꺼내어 얼굴의 땀을 훔쳤다.

앞쪽 가마에서 그 홍의소녀가 걸어나와 누각 옆으로 나 있는 문을 두드렸다.

똑, 똑똑!

그녀는 단지 세 번을 두드렸을 뿐인데 문이 열렸다.

뒤쪽 가마에선 그제야 사람이 걸어나왔다. 여인이었다.

초류빈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옷맵시와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특히 여인의 몸매와 걸음걸이가 매우 매혹적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처럼 흔들며 걸었다. 그러나 심하게 흔드는 편은 아니었다.

여인이 걸음을 옮길 때 허리를 흔들지 않으면 좀 딱딱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요란하게 흔드는 것도 보는 이로 하여금 구역질을 느끼게 한다. 이 여인은 보기 좋고 적당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그녀의 걸음은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아 사뿐사뿐 흡사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그 자태 역시 초류빈의 눈에 익은 것이다. 여인은 물론 두 다리가 달려 모두 걸을 수 있지만 정말 걸을 줄 아는 여자는 그리 많지 않다. 대다수 여인의 걸음걸이는 나무토막 같거나 빗자루가 움직이는 것 같다. 또한 대부분의 여인은 길을 걸으며 연신 몸을 흔들어 댄다.

지금 가마 속에서 나온 여인은 사뿐사뿐 층계 위로 올라 고개를 돌리더니 막 가마에서 나온 상관비를 향해 손짓을 하고는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 초류빈은 그녀의 반쪽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백옥처럼 희면서도 불그스름한 느낌을 주었다. 이번에는 초류빈이 단호한 확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녀는 틀림없는 설소하였다.

설소하가 이곳에 있다니...그럼 낭천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초류빈은 당장 앞으로 달려가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만약 지금 누각 안으로 뛰쳐들어 간다면 그는 여지없이 설소하와 상관비의 모종의 행동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는 구역질나는 것이 두려웠다.

초류빈, 그는 아주 이상한 사람이다. 그는 비록 군자라 할 수 없지만 그가 하는 일은 대다수의 군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하기 싫어할 것이고 어쩌면 영원히 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은 어느 누구도 모방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 초류빈은 단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에도 초류빈이 없었고 앞으로도 역시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류빈이 죽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지만 또한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그가 계속 이 세상에서 살아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도 있다.

밤은 깊었다. 초류빈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지루하도록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사람은 왕왕 많은 일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초류빈은 낭천을 만났을 때의 일이 생각되었다.

당시 낭천은 엄동설한 눈발이 휘날리는 날씨에도 홀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렇게도 고독하고 그렇게도 피곤해 보였던 낭천, 그러나 고독과 피곤 그리고 굶주림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의 은혜를 받기 거부한 낭천.

그날 초류빈은 철전갑과 함께 있었기에 별로 심심하지는 않았다. 지난날을 더듬는 생각의 나래가 다시 철전갑의 윤곽을 초류빈의 뇌리에 부각시켰다. 그 착하고 충성스러운 얼굴, 무쇠를 다져 만든 듯한 체격...단지 애석한 것이 있다면 그의 몸이 강철처럼 견강(堅强)한데 비해 마음은 보살처럼 연약하다는 것이다.

사소한 일에도 그는 피가 끓고 감정이 앞섰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항상 고통이 즐거움보다 비중을 많이 차지했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던 끝에 초류빈은 문득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다행하게도 그는 늘 몸에 백은으로 만든 납작한 술병을 지니고 다녔다.

그는 술병의 술을 전부 마셔 버렸다. 그리고 나서 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 년 동안 기침을 하는 횟수는 다소 줄어든 것 같았다. 그러나 일단 기침을 하기 시작하면 정지하기가 곤란했다.

그것은 결국 좋은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인해 염려는 하지 않았다. 그는 생전 자신을 위해 염려해 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바로 이때 누각의 문이 열렸다.

상관비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열려진 문틈 새로 등불이 새어나와 그의 몸을 훤하게 비쳐 주었다. 그는 평상시보다 몹시 유쾌해 보였다. 단지 다소 피곤해 보일 뿐이다. 이때 문 안쪽에서 갸름한 손이 나와 그의 손을 잡았다. 밤바람에 나직한 속삭임이 실려왔다. 다시 만날 때를 기약하는 것 같았다. 한참 후에야 그들의 손은 떨어졌으며, 상관비는 천천히 층계를 내려왔다. 그의 걸음은 느렸다. 그리고 못내 아쉬워하는 듯 연신 뒤로 고개를 돌렸다. 이때 누각의 문이 닫혔다.

상관비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눈빛은 술에 취한 듯 게슴츠레해 보였으며 때로 미소를 짓고 때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혹시 지옥에서 헤매다 나온 게 아닐까?

누각의 등불이 창문을 분홍빛으로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상관비는 드디어 떠나갔다.

초류빈은 홀연 이 젊은이가 불쌍하다고 여겨졌다.

이 세상엔 똑똑하고 고매한 젊은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여인에게 속고 여인에게 조롱당하는 것을 스스로 원했다.

초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성큼성큼 누각을 향해 걸어갔다. 누각은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산을 등 진 채 산허리에 건축되어 아담할 뿐만 아니라 운치까지 있어 보였다.

똑,

초류빈은 우선 문을 한 번 두드렸다.

똑똑!

그리고 나서 다시 두 번을 두드렸다. 그는 앞서 홍의소녀가 문을 두드린 방법을 이미 뇌리에 기억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똑, 똑똑!

세 번 두드리자 과연 문이 열렸다.

"당신은....."

상대방은 한 마디를 내뱉더니 초류빈의 모습을 보고는 즉시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초류빈의 동작은 그보다 빨라 이미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설소하가 아니었다. 또한 홍의소녀도 아닌 백발이 성성한 할망구였다.

할망구는 놀라운 표정으로 초류빈을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당...당신은 누구요? 무엇하러 이곳에 왔소?"

초류빈은 예리하게 사방을 훑어보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옛친구를 찾아왔소."

"옛친구라뇨? 누가 당신의 옛친구란 말이에요?"

초류빈은 히죽 웃더니

"직접 대면을 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오."

하고 말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할망구는 황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고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에 당신의 옛친구는 없어요. 이곳엔 단지 나와 손녀 두 사람뿐이에요."

초류빈은 할망구의 곁을 스쳐 계속 앞으로 걸어가며 상대방의 말을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누각 안은 세 칸으로 되어 있었다. 객점, 식당을 겸한 부엌 그리고 안쪽에 위치한 침실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세 군데에는 전부 설소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빨간 옷을 입은 계집애는 공포에 질린 듯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해 할망구의 품속에 숨어 계속 몸을 떨고 있었다.

"할머님, 저 사람 강도인가 봐요!"

할망구는 너무나 놀란 탓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초류빈은 비록 가끔 다른 사람에게 불량배, 색마, 심지어 무서운 흉수로 인식돼 왔지만 강도로 오인받기는 아마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정말 강도로 보이는가!"

홍의소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도리어 반문했다.

"강도가 아니라면 왜 야밤중에 남의 집에 뛰어들어 왔죠?"

초류빈은 그녀의 눈동자를 주시하며 말했다.

"나는 설낭자를 찾으러 왔네."

홍의소녀는 상대방이 부드러운 태도로 나오자 두려움이 가셨는지 눈을 깜박거리며 안정된 음성으로 대꾸했다.

"이곳엔 설낭자는 없고 주낭자만 있을 뿐이에요."

설소하가 혹시 가명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초류빈은 즉시 다그쳐 물었다.

"주낭자는 지금 어디 있는가?"

그러나 홍의소녀는 엉뚱하게도 손가락으로 자기의 코를 가리켰다.

"저의 성이 주예요. 그러니 주낭자는 바로 저 자신이죠."

초류빈은 멍해지는 표정을 보이기 싫어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이 갑자기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홍의소녀는 눈을 깜박거렸다. 이제는 그 눈에 웃음을 담는 여유까지 보였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몰라요. 당신은 무엇 때문에 저를 찾아왔어요?"

초류빈은 고소를 지었다.

"내가 찾는 것은 말만한 낭자지 결코 복슬강아지 같은 어린 계집애가 아닐세."

홍의소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곳엔 말만한 낭자는 없어요."

초류빈은 상대방의 천진스러운 웃음이 무섭게 여겨졌다.

"조금 전에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 없었나?"

소녀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있었죠."

순간, 초류빈의 눈빛이 빛났다.

"그가 누구인가?"

소녀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저와 할머님이 방금 고을에서 돌아왔어요."

그녀는 도리어 초류빈이 그러한 질문을 하는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이곳엔 단지 우리 두 사람뿐이에요. 어린 사람은 저고 큰 사람은 저의 할머님이에요. 하지만 할머님은 오래 전부터 낭자라는 칭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어요. 당신은 혹시 저의 할머님을 찾아온 것은 아니겠죠?"

초류빈은 다시 웃었다. 자신이 미련해졌다고 생각될 때 그는 항상 웃었다.

홍의소녀는 초류빈이 웃는 의미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저와 할머님 이외에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 있다면 당신뿐이에요. 그리고 나간 사람은 없어요. 당신이 만약 다른 사람을 보았다면 그것은 필시 낮도깨비를 본 것일 거예요."

초류빈은 설소하가 나가는 것을 확실히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들어온 것은 분명히 지켜보았다. 홍의소녀의 말대로 설소하가 낮도깨비로 변한 게 아닐까? 그래서 그 낮도깨비는 다시 할망구로 둔갑한 것이 아닌지.....

할망구는 초류빈이 침묵을 지키자 홀연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우린 아주 불쌍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곳엔 값나가는 물건이 없으니 나리께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서슴지 말고 갖고 가세요."

초류빈은 사뭇 정색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허락을 받았으니 내가 원하는 것을 갖고 가겠소."

식당 탁자 위엔 술병이 놓여 있었다.

초류빈은 그 술병을 집어들자마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의 등뒤에서 홍의낭자의 웃음섞인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호호호...알고 보니 저 사람은 강도가 아니라 술에 환장한 사람인가 봐요....."

달빛은 여전히 밝았다. 산천이 달빛을 받자 마치 빛을 발산하는 은대(銀帶)와 같았다.

초류빈은 여전히 손에 술병을 들고 있었다.

술병엔 아직도 절반 가량의 술이 남아 있었다.

고요한 밤, 샘물이 흐르는 소리는 음악과 같았다. 초류빈은 샘물 줄기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는 날이 밝기 전에 낭천이 있는 곳에 당도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단잠을 깨우기 싫어서였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를 끼치기 싫어했다. 하지만 누구라 할지라도 또한 어느 때라도 그를 찾아와 그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그 할망구는 틀림없는 할망구였다. 절대 설소하가 변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설소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초류빈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혹시 내 눈이 쓸모없이 흐려진 게 아닐까.....?'

달은 이미 떨어지고 별님의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동녘 하늘에서 서서히 서광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가을도 막바지에 이르니 겨울이 눈앞에 와 있고 매화도 이젠 계절을 맞아 한껏 아름다움을 자랑할 것이다.

초류빈은 홀연 일진의 담담한 향내음을 맡았다. 고개를 드니 매림(梅林)이 시야에 들어왔다. 매림 깊숙한 곳에 오두막집의 일각(一角)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침 바람에 파도처럼 흔들리는 일편의 매림을 바라보고 있자니 초류빈은 넋 빠진 사람처럼 멍해지는 것 같았다.

매림 옆, 바로 샘물 줄기의 끝이다. 샘물이 산허리를 가로질러 거꾸로 걸려 있는 일편의 매림과 어울리니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형성했다. 그림 속에 뜻밖에도 사람이 서 있었다.

초류빈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단지 깨끗한 청색장삼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고 윤이 나게 빗어 올린 것만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손에 물통을 들고 매림을 뚫고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의 몸집으로 보아 낭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낭천의 모습은 절대 그렇게 조심스러울 리 없으며 절대 머리를 그렇게 단정하게 빗어올리지 않는다.

그럼 그 사람은 누구인가? 낭천과 함께 살고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초류빈은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두막집의 문은 열려 있었다. 실내 장식은 비록 호화스럽지는 못하지만 먼지 한 점 찾아볼 수 없이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오두막집 한 어귀에 커다란 팔선탁이 놓여져 있었다.

방금 안으로 들어간 새 옷을 입은 젊은이는 물통 속에서 걸레를 꺼내 물을 짜더니 탁상을 닦기 시작했다.

그가 탁상을 닦는 동작은 손꼽추보다는 느렸다. 그러나 더욱 열심히 닦았다. 흡사 탁상에 먼지 한 점이 남기라도 하면 누구에게 큰 벌을 받을 것만 같은 느낌마저 줄 정도로 열심히 닦았다.

초류빈은 그의 등뒤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정말 낭천을 닮았다.

그러나 그는 절대 낭천이 아니다. 초류빈은 낭천이 상을 닦는 모습을 아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도 역시 여기에 살고 있는 한 필시 낭천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초류빈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말을 물어야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고개를 돌리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 사람의 반응은 빠르지 않았으나 느릿하게나마 고개를 돌렸다.

순간 초류빈의 표정이 얼음장같이 굳어졌다. 그가 절대 낭천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 그 사람은 놀랍게도 바로 낭천이었다. 낭천의 몸만은 별로 변한 데가 없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크고 콧날이 우뚝 솟아 있어 심지어 예전보다 더 영준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신색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선 예전의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마력(魔力)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얼굴에 나타나 있던 그의 강인하고 고독한 신색도 어디론가 사라졌으며 이제는 아주 담담하여 심지어 바보스러운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다.

이 자가 바로 낭천이라니...이 사람이 정말 예전에 눈보라속을 고독하게 걸으며 죽음과 은혜를 놓고 차라리 죽음을 택하던 그 강인한 낭천이란 말인가. 번개같이 빠른 검을 사용해 천하 군웅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낭천이 바로 이 젊은이란 말인가?

초류빈은 문득 겁이 났다. 지금 이 새 옷을 단정하게 입고 손에 걸레를 쥔 사람이 바로 그가 예전에 알고 있던 낭천이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낭천도 자연히 초류빈을 보았다.

그는 먼저 멍해지는 표정이더니 점점 얼굴에 한 가닥의 미소를 떠올렸다. 초류빈은 하늘을 향해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낭천의 미소만은 예전과 변함없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류빈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울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며 서로 웃고 있을 뿐 아무도 움직이거나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시울은 차츰 붉어지며 젖어 갔다. 얼마 동안이 흘렀을까?

낭천은 비로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왔군요."

초류빈은 눈물과 함께 침을 꿀꺽 삼켰다.

"왔네."

두 사람의 음성은 모두 낮았으며 서로 간단하게 한 마디씩 내뱉더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었다. 바로 이때 낭천이 홀연 집 안에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와 같은 순간에 초류빈도 역시 밖에서 안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문 입구에서 마주치며 서로의 몸을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일순 두 사람의 호흡이 전부 정지된 것 같았다.

한참 후에야 초류빈은 길게 숨을 들이켜 자신의 격동을 억누르고 말했다.

"그 동안 별고 없었나?"

낭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별고 없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초류빈은 빙긋이 웃으며

"나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네."

하고 말하더니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들어올렸다.

"자, 보게. 나에겐 아직도 술이 남아 있지 않은가? 기침을 하는 버릇마저 계속 술을 마신 덕분으로 많이 치료되었...콜록...콜록....."

그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다시 기침을 심하게 했다. 조용히 그를 바라보는 낭천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때 집 안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렸다.

"당신도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초탐화께서 일부러 찾아오셨는데 어서 집 안으로 모시지 않고 멍청히 문에 서 있다니, 누가 보면 우리를 정말 흉보겠어요."

꾀꼬리같이 아름답고 애교가 깃들어 있는 여인의 음성이었다. 설소하가 드디어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전과 조금도 변한 데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우며 웃음소리 역시 그렇게도 명랑하고 눈동자 또한 변함없이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맑았다.

만약 그녀에게 변한 게 있다면 그것은 예전보다 더욱 성숙해 보이고 더욱 매력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녀는 그곳에 서서 부드럽게 초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년 동안 왜 한 번도 저희들을 찾아오지 않았죠? 필경 우리를 벌써 잊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초류빈이 그들의 거처를 벌써 알고 있으면서도 찾아오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초류빈은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가마도 보내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올 수 있었겠소?"

설소하는 눈을 깜박거리며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가마 얘기가 나오니 정말 한번 타 보고 싶군요."

초류빈의 눈동자에 한 가닥 섬광이 번쩍였다.

"그럼 당신은 가마를 탄 적이 없단 말이오?"

설소하는 고개를 숙이며 원망하는 투로 말했다.

"저 같은 사람이 가마를 탈 자격이 있나요?"

"어젯밤 가마를 탄 사람을 보았는데 정말 당신과 닮았더군요."

그러나 설소하는 조금도 당황해하는 표정이 없었다. 도리어 여유 있게 미소를 띠고 말했다.

"제가 꿈속에서 가마를 탄 것을 본 것이겠지요? 안 그래요?"

마지막 한 마디는 그녀가 낭천을 향해 한 것이다.

낭천은 즉시 그녀의 말을 이었다.

"우리는 늘 일찍 잠자리에 들고 그녀는 한 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초류빈은 그 말을 듣자 다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에 휘말려 들어갔다. 낭천은 절대 자기에게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설소하가 한 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다면 어젯밤 가마 속에서 나온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설소하는 낭천에게 바싹 다가가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젯밤은 편히 주무셨나요?"

낭천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설소하가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럼 당신은 초탐화를 모시고 신선한 아침 공기나 쐬세요. 저는 초탐화를 위해 몇 가지 요리를 만들어야겠어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초류빈을 힐끗 쳐다보며 생긋이 웃었다.

"밖에 매화가 이미 피었어요. 초탐화께서 매화를 유난히 좋아한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죠."

낭천의 걷는 자세도 변한 것 같았다. 예전에 그는 길을 걸을 때 항상 가슴을 당당하게 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일정한 간격이 있고 근육은 늘 풀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길을 걷는 게 일종의 노동이지만 그에게는 엄연한 휴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가슴이 예전과 같이 당당히 펴져 있지 않고 표정 또한 어딘지 모르게 긴장돼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걸었다. 초류빈은 시종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낭천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왜 이런 곳에 숨어 있으며 설소하는 자신의 죄행(罪行)을 시인했는지, 그리고 그녀가 탈취해 온 재물을 이미 원주인에게 돌려주었는지? 그러나 초류빈은 묻지 않았다. 그는 낭천의 아픈 곳을 건드리기 싫었다.

낭천 역시 침묵을 지킨 채 다시 일단의 먼 거리를 걷더니 홀연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는 정말 미안합니다."

그의 엉뚱한 말에 초류빈은 약간 멍해지며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어서 낭천은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내가 떠날 때 최소한 당신에게는 한마디 알려야 옳았을 것입니다."

초류빈은 그를 위로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에게 필시 곡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 자네를 탓하지는 않았네."

낭천의 신색이 울적하게 변했다.

"내 행동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차마 그녀에게 살수를 전개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그녀를....."

초류빈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네. 그런데 자네는 왜 자신을 탓하고 있나?"

"그러나...그러나....."

낭천은 몹시 격동되어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매화도 때문에 살해된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죄해야 될지 모르겠군요."

초류빈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는 떠나기 전에 그녀가 탈취해 온 물건을 전부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정녕 그렇다면 더 이상 무엇 때문에 괴로워해야 하는가? 사람에게는 누구나 잘못이 있는 법일세. 그 잘못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되찾을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흘륭하다고 생각하네."

초류빈은 더 이상 그 일을 논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저것을 보게. 저 나무엔 매화가 이미 피었군."

낭천은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류빈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네는 저 매화가 몇 송이 피었는지 아는가?"

낭천은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모두 열일곱 송이입니다.

그 말을 들은 초류빈은 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입가에 띠어진 미소도 거두어졌다. 그는 매화송이를 헤아려 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매화송이를 헤아리는 사람은 고독에 젖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낭천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보아하니 또 한 송이가 피겠군요. 일찍 피는 꽃은 일찍 시들기 마련인데....."

오두막집은 모두 다섯 칸으로 되어 있었다. 객청, 창고 그리고 뒤에 주방이 있으며 나머지 두 칸은 침상이 놓여져 있었다.비교적 밝고 시설이 깨끗한 침실에는 화장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낭천이 말했다.

"소하가 이 침실을 사용하죠."

비교적 작은 침실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내 침실은 이곳입니다."

그는 그제야 낭천과 설소하가 침실을 따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이 년 동안 함께 생활을 해 왔으며 낭천 또한 혈기왕성한 젊은이가 아닌가.

그런데 두 사람이 침실을 따로 사용하고 있다니, 초류빈은 의외라는 생각에 앞서 낭천의 억제력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낭천의 얼굴에 홀연 한 가닥의 쓴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그동안 늘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는 말을 들으면 당신은 아마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그래....."

초류빈의 반문을 하는 듯한 말에 낭천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날이 어두워지면 나는 곧 잠들어 버리죠. 그리고 어찌나 깊은 잠에 빠지는지 날이 밝기 전에는 깬 적이 별로 없습니다."

초류빈은 생각을 굴리며 입가에 태연하게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당연하지."

낭천은 다시 말했다.

"그동안 나는 조용한 나날을 보냈죠. 내 평생 이런 안정된 생활을 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그녀도 나를 잘 대해 주었습니다."

초류빈은 계속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변화가 일고 있어 자세히 관찰하면 알 수 있었다.

"자네의 그러한 말을 들으니 나도 기쁘네....."

그는 낭천에게 자신의 어색한 웃음을 보일 수 없어 말을 하면서 슬쩍 고개를 들어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약간 의아해 하는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의 검은 어째서 보이지 않지?"

낭천은 대수롭지 않은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벌써부터 검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번엔 초류빈은 정말 놀랐다. 거의 외치다시피 물었다.

"검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니?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검은 흉기가 아닙니까? 그리고 검을 보면 늘 과거가 생각나기 때문에 버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초류빈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 물었다.

"혹시 그녀의 권유를 따른 게 아닌가?"

"그녀 자신도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나 스스로 검을 버렸죠. 이제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겁니다."

초류빈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천천히 말했다.

"좋은 일이네. 잘된 일이야....."

그는 아직도 할 말이 많았으나 이때 주방 쪽에서 설소하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음식를 다 차려 놓았어요. 제가 나리들을 직접 모시러 가야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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