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삶의 갈림길
초류빈은 아까부터 고개를 깊이 숙이고 무엇인가 조각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붉은 옷으로 감싸 입은 소녀는 그 옆에 멍하니 서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어 물었다.
"당신은 대체 무엇을 조각하고 있어요?"
초류빈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대꾸했다.
"무엇을 조각하고 있는지 보고도 모르겠느냐?"
홍의소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사람을 조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완성을 시킨 적은 한 번도 없죠? 완성을 해야 무엇을 파고 있었는지 분명히 알게 아니에요?"
그때 초류빈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며 대신 심한 경련이 일더니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자기가 조각하고 있는 것을 남에게 보여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완성시키지 않았다. 그때 물론 초류빈은 다른 사람을 조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초류빈의 손은 그의 상념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았고 설사 그녀가 아니라 해도 조각을 해내면 그녀와 닮고는 했다. 이유는 초류빈이 결코 그녀를 잊을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 사실이다.
이때 창 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홍의낭자는 조용히 불을 켜 방 안의 어둠을 몰아내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웃으며 물었다.
"오늘은 어째서 술을 마시지 않는 거죠?"
초류빈은 굳은 듯 그 자리에 앉아 대답이 없었다.
홍의낭자는 몸을 돌리며 다시 물었다.
"왜, 마실 생각이 없나요?"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으며 무겁게 입을 떼었다.
"어쩌다 하루쯤 맑은 정신으로 있어도 나쁘지는 않다."
홍의낭자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관찰하듯 살피고 있다가 낮게 웃었다.
"호호호, 제 생각엔 역시 당신은 술을 마시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손이 떨리니까요."
순간 초류빈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감쪽같이 싹 거두어졌다. 대신 그의 손은 천천히 위로 들어올려지고 있었다. 지금 초류빈의 손에 들려져 있는 예리한 칼날이 희미한 등불에 반사되어 파란 광채를 발했다.
'내 손이 정말로 떨리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먹구름 깔리듯 초류빈의 마음은 점차 무거워져 갔다. 정말 술을 마시지 않을 때 손이 떨리는 날이 오는 것이 매우 두려웠다. 손이 떨린다면 자신의 칼을 어떻게 비도탈명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류빈은 갑자기 칼을 힘껏 쥐었다. 이렇게 되자 그의 손 마디마디는 하얗게 질려갔다. 칼날에서 반사되는 푸른 광채는 마치 숨통을 죄는 듯 예리하게 엄습해 들어왔다.
이때 갑자기 자기의 손이 납덩어리보다 더 무겁다고 느낀 다음 순간에 초류빈은 더 이상 칼날을 들어올리지 못했다. 초류빈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창 밖을 쳐다보며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홍의낭자는 조용히 대꾸했다.
"구월 그믐이에요. 이 밤이 지나면 시월 초하루고요."
초류빈은 천천히 두 눈을 내리감았다. 두 눈을 감고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곽선생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고을을 돌아보시겠다며 아까 나갔어요."
홍의낭자는 대답을 하고 나서 웃으며 물었다.
"어째서 술을 마실 땐 혼자 마시는 법없이 꼭 그분을 기다리시는 건가요? 제가 옆에 있으면 안 되나요?"
"지금부터 술을 마시면 너무 이르다고 생각지 않느냐?"
"늦든 이르든 이왕 마실 것이라면 일찍 마시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그러더니 홍의낭자는 몸을 돌려 술을 가지러 갔다.
초류빈은 멍하니 수중에 쥐고 있던 칼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힘을 주어 나무토막을 깎기 시작했다.
초류빈의 솜씨는 정말 일생을 조각에 바쳐온 사람처럼 재빨랐다. 이즈음 거의 완성 단계에 있던 조각은 눈깜짝할 사이에 완성되었다. 그 청수한 윤곽은 물로 씻은 듯 깨끗하고 오똑 솟은 콧날이 무엇보다 사람의 시선을 끄는, 한 마디로 말해 아름답고 젊은 여자였다.
하지만 이 조각의 장본인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실상(實像)은 이미 늙어 버렸다. 괴로움과 어떤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사실 사람은 쉽게 늙기 마련이다. 흐르는 세월을 탓할 수도, 인생의 무상함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초류빈은 자기가 조각해 낸 나무 인형을 마치 넋나간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는 데도 그의 두 눈동자는 목각 인형에 박힌 듯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부터는 이제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초류빈이 이렇게 넋이 빠진 이유라면 오직 그것뿐이다.
"매우 아름다운 조각이군요. 누구죠? 사랑하는 사람인가요?"
맑은 목소리가 들리며 어느 사이엔가 홍의낭자가 돌아와 있었다. 홍의낭자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져 있었고 쟁반 위에는 술과 간단한 안주가 마련되어 있었다.
초류빈은 씁쓸하게 웃으며 인형을 소매 속에다 넣었다.
"나도 누구인지 모른다. 어쩌면 하늘의 선녀일지도 모르지."
홍의낭자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지금 저를 속이고 있어요. 하늘의 선녀라면 몹시 활발한데 그 인형은 수심이 가득찼어요....."
"이 지상에도 활발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하늘의 선녀라 하여 수심에 차지 않는 법이 또 있다는 말이냐?"
"그러나 실상 당신은 쾌활하지 못해요. 어쩌면...당신은 그녀를 몹시 좋아하고 있지만 그녀를 소유할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니에요?"
순간 초류빈의 안색은 크게 변했고 가슴도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갔다.
홍의낭자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웃었다.
"저를 속일 필요는 없어요. 저는 당신의 그 표정을 보면 잘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매우 오래 된 일이었다."
"아니 그렇게 오래 되었다면 어째서 잊지 못하는 거죠?"
"아마 네가 내 나이쯤 되면 남자가 가장 잊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홍의낭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초류빈의 이 말뜻을 음미하고 있는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얼마쯤 지나자 홍의낭자는 가벼운 탄식을 터뜨리며 입을 떼었다.
"그래요...남들은 당신더러 매우 잔혹하고 또 무정하다고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당신은 그런 분이 아니신 것 같군요."
초류빈은 담담하게 물었다.
"너는 날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당신은 걱정이 많으면서도 매우 착한 사람인 것 같아요. 정말 나무랄 데 없는 다정다감한 사람이에요. 만약 당신이 진짜로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여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거예요."
"아마도 지금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이 술을 마시고 나면 나도 낭천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홍의낭자는 갑자기 들뜬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럼 우리도 빨리 술을 마셔요. 저도 낭천이 되고 싶어요."
홍의낭자는 말을 끝내고 앞으로 달려들더니 단숨에 술주전자를 들어 절반이나 마셔 버렸다. 원래 젊은 사람일수록 술을 마시는 속도가 빠르다. 그것은 술을 마시는 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기가 많은 사람일수록 술에 취하는 속도도 빠르다. 홍의낭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그녀가 입고 있는 옷보다 더욱 붉어졌다.
홍의낭자는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저는 당신이 초류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제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
"네가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내 어찌 알겠느냐?"
"그래요. 당신이 제게 묻지도 않았는데 제가 무엇 때문에 말을 하겠어요?"
홍의낭자는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서 격동을 참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 나더니 잠시 후에 천천히 말을 꺼냈다.
"당신은 비단 제 이름을 묻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가 어떤 사람이며 또 무엇 때문에 이곳에 혼자 와 있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등등에 대해선 한 마디도 묻지 않았어요. 당신은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리고 얻고 싶지도 않다는 것인가요?"
"취한 것 같군.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면 일찍 자는 것이 좋다."
"당신은 제 얘기가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만 저는 끝까지 얘기를 해야겠어요."
홍의낭자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야무진 음성으로 이었다.
"저는 아버지도 없고 엄마도 없어요. 그래서 제 성이 무엇인지도 몰라요. 단지 오 년 전에 아씨께서 저를 사들였기 때문에 저의 성은 설씨가 되었고 또 아씨께서 영령(鈴鈴)이라는 이름을 매우 좋아하시는 까닭에 제 이름은 설영령이 된 것이에요....."
홍의낭자는 또 여기서 말을 끊고 방그레 웃더니 다시 계속했다.
"설영령, 어때요? 저는 마치 방울과 같아 사람들이 흔드는 대로 소리를 낸답니다."
초류빈은 절로 긴 탄식을 토해냈다. 이제야 그는 이 어린 낭자에게 가슴 아픈 과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초류빈은 다시 마음 한구석이 비어 오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어째서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독하거나 외로운 사람들뿐이고 유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일까......'
이때 설영령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혼자 남게 되었는지 말씀드리죠. 아씨께서 절 시켜 이곳에 남게 한 것은 당신에게 매일같이 술을 먹여 당신의 손이 떨리게 만들기 위해서예요. 아씨의 말에 따르면 당신의 손이 떨리기만 하면 당신은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하셨어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설영령은 초류빈이 무섭도록 화를 내기를 바라는 듯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초류빈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담담하게 웃었다.
"십 년 전에 내가 곧 죽을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지. 그러나 나는 아직 이날까지 살아왔다. 낭자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설영령은 정말 뜻밖이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제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당신을 해치기 위한 것이라고 말을 했는 데도 당신은 어째서 화를 내지 않는 거죠?"
"내가 무엇 때문에 너에게 화를 내겠느냐? 너는 단지 은방울에 불과한데....."
초류빈은 길게 장탄식을 터뜨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남의 종이 된 것을 면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너는 남의 종이라고는 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 종을 흔드는 사람의 몸에도 어쩌면 줄이 매어져 있어 누군가에 의해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설영령은 초류빈을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이제야 당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아씨는 어째서 당신이 꼭 죽기를 바라는지 모르겠어요."
초류빈은 역시 담담하게 웃었다.
"남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도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그럼 세상은 고르지 못해요.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는 몹시 기뻐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는 또 그렇게 슬퍼하더군요."
설영령은 갑자기 고개를 푹 떨어뜨리더니 우울하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죽는다면 저는 눈물을 흘릴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이미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우리는 며칠 동안이나마 같이 있었으니까."
"아니에요. 그건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저는 당신보다 곽선생을 더 오랫동안 대해 왔지만 만약 그가 죽는다 해도 저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거예요."
설영령은 이렇게 반박하고 나서 다시 몇 마디 덧붙였다.
"그 이유는 제가 죽어도 그 역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초류빈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너는 그의 마음이 매우 냉정하다고 생각하느냐?"
설영령은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쩌면 그에게 마음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없는지도 몰라요."
"만약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그는 겉으로 보기엔 매우 냉혹해 보이지만 실상 그 내부는 의리로 가득차 있다."
초류빈은 내심으로 많은 것을 감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설영령과 얘기를 나누면서 곽숭양이 문 밖에 와 있는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곽숭양, 그는 감정이 동요될 때가 매우 드문 사람이다. 지금 곽숭양은 문 밖에 멍하니 서 있었는데 그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 석고 같은 사람이.....
밝은 태양이 온 대지를 찬란하게 비추며 동쪽에서 떠올랐다.
이날 초류빈은 아침 일찍부터 깨어났는데 마치 전혀 잠을 자지 않은 것 같았다. 날이 밝을 무렵에 그는 냉수로 목욕을 했고 머리도 깨끗하게 빗었다. 그런 후 사흘 전에 고을에서 산 청색 옷으로 갈아입었다. 초류빈의 몸집은 뚱뚱하지도 깡마르지도 않은 까닭에 비록 그 옷이 광목으로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몸에 매우 잘 어울렸다.
이른 아침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그처럼 밝고 또 유쾌할 수가 없었다. 몸이 깨끗할 때는 그 사람의 정신도 깨끗하고 맑다. 그리고 오늘은 더욱 특별한 날로 그는 필히 정신이 깨끗하고 또 맑아야 했다. 오늘밤이 되면 어쩌면 초류빈이라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몸이 깨끗하다면 물론 죽은 후에도 깨끗할 것이다. 오늘의 이 일전은 승산이 그리 크지 않다. 그리고 살 수 있는 희망도 매우 희박하다. 그러나 지금 어떤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 있는 한 초류빈은 이 대결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초류빈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러운 사람의 손에 죽게 되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았다.
태양은 오늘따라 유난히 찬란했고 붉게 물든 단풍잎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세상엔 갖가지 아름다운 것들이 많지만 이것만 보아도 한 인간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이 그처럼 나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초류빈이 막 청색 헝겊으로 머리를 동여맨 후 얼굴을 다듬으려고 할 때 등뒤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머리가 그 모양으로 어떻게 가인(佳人)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제가 잘 빗겨 드릴게요."
바로 설영령이었다. 설영령은 아직 술이 덜 깼는지 아니면 밤새 울었는지 눈언저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초류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창문 앞에 있는 의자에 가 앉았다.
창문으로부터 밝은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와 그는 스르르 두 눈을 감았다. 순간 초류빈의 뇌리에는 문득 십여 년 전 일이 떠올랐다.
그날의 날씨도 오늘과 비슷했다. 창 밖에는 국화가 향기를 가득 안고 만발해 있었고 그는 마침 누각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등뒤에서 한 사람이 그의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
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초류빈은 그 따스한 손길을 포근히 느끼고 있었다. 그날도 마침 집을 떠날 일이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 유난히도 느리게 그리고 세심하게 머리를 빗겨 주었다.
그녀는 아쉬움을 이 느린 동작으로 다 표현했고 머리를 다 빗겼을 땐 눈물을 흘렸다. 그때 초류빈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무서운 강적을 만나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다행히 호유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그것은 그에게 있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호유성이 비록 목숨을 구해 주기는 했지만 일생을 망쳐 놓은 장본인임을 초류빈은 잊고 있었다.
이윽고 초류빈은 천천히 눈을 뜨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날은 갔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오늘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내가 만약 그때 떠나서 돌아오지 못했다면 이런 일은 다시 없었을 텐데.....'
초류빈은 여기까지 생각을 하다가 더 이상 계속하지를 못하고 다시 두 눈을 감았다. 이때 자신이 갑자기 자기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여인의 손길이 매우 따스하고 느리다는 것을 느꼈다. 초류빈이 고개를 돌려 보니 설영령이 말없이 서서 맑고 수정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똑같은 따스한 손길, 이별을 아쉬워하는 저 여인의 눈물, 초류빈은 마치 자신이 십여 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착각을 할 뻔했다.
초류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뻗어 그녀의 손을 잡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울었느냐?....."
설영령은 절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고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오늘이 바로 약속 날짜죠? 그래서 이렇게 차리는 거죠?"
초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잡고 있는 손이 그녀의 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강산까지 변한다는 십여 년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세월이다.
이때 설영령이 우울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가인을 만나러 가는데 어찌 제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어요?"
초류빈은 그제야 그녀의 손을 놓고 나서 매우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너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해. 그래서 마음이 편치 못하다는 것이다."
설영령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소리쳤다.
"그래요. 전에는 몰랐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아니 어제까지도 어쩌면 몰랐을지 모르나 오늘은 알아요."
초류빈은 웃으며 눈을 크게 떴다.
"하루 사이에 그렇게 컸단 말인가?"
설영령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물론이죠. 어떤 사람들은 하릇밤 사이에 백발이 된다고들 하지 않아요?"
초류빈은 검미를 한 데 모았다.
"그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을 결정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너는 무엇 때문이지?"
설영령은 고개를 푹 떨구더니 자그만 음성으로 대꾸했다.
"당신 때문이에요. 만약 오늘 당신이 간다면 또다시 돌아올 수가 있을까요?"
설영령의 말은 이상하게 초류빈의 마음을 크게 울렸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초류빈은 장탄식을 터뜨리며 입을 떼었다.
"너는 내가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인지 알고 있느냐?"
설영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지막 손질로 초류빈의 머리를 청색 띠로 동여매 주면서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갈 것이고, 그 누구도 당신의 발길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초류빈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영령도 조금 더 크면 잘 알겠지만 이 세상에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무수히 많다. 그것은 또한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도 하지."
"그러나 만약 제가 어제 조각한 여인이라면 분명히 이곳에 남아 있겠죠?"
"나는 설사 그녀라 할지라도 이곳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나는 여태까지 그녀를 위해 무언가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나는....."
초류빈은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 밖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나는 이제 가봐야 해....."
초류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숭양이 걸어 들어오며 큰소리로 떠들었다.
"아니, 지금 떠나려 하시오?"
곽숭양의 손에는 술병이 들려져 있었고 이미 매우 취했는지 비틀거리고 있었다. 곽숭양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강한 술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초류빈은 미소로서 그를 맞았다.
"이제 보니 곽형은 어젯밤 마을에 나가시더니 밤새껏 술을 드셨구려. 그런데 어째서 내겐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던 것이오?"
곽숭양은 입가를 쓱 문지르며 크게 웃어젖혔다.
"하하하하...그렇소. 어느 땐 단 둘만 마셔야 술맛이 날 때가 있소."
곽숭양은 한 손을 들어 초류빈의 어깨를 잡더니 갑자기 음성을 낮추었다.
"소제는 기분이 날땐 무엇인가 일을 저지르는 것을 좋아하는데 초형께선 아시고 계시오?"
"이제 보니 곽형께선....."
그러나 초류빈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곽숭양은 갑자기 손을 뻗어 초류빈의 일곱 대혈을 번개같이 찍는 것이 아닌가.
초류빈은 아무런 방비도 못한 순간에 그만 혈도를 찍히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설령이 대경실색하여 초류빈을 부축하면서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그러나 곽숭양은 전혀 술에 취하지 않은 듯 그 표정이 말할 수 없이 차가웠다.
"그가 깨어나거든 얘기해 주어라. 상관금홍과 싸울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은 것이며 나는 절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설영령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당신이 대신해서....."
곽숭양은 그녀의 말을 가로채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절대로 내가 따라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 역시 그가 따라오는 것을 원치 않아. 이것은 마치 술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필요할 때만 둘이서 마시는 것이야."
설영령이 멍하니 곽숭양을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저분의 말이 틀림없군요. 당신은 분명히 좋은 사람이었어요."
곽숭양은 냉랭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나는 내가 죽든 살든 날 위해 눈물을 흘려 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지 않아. 여자가 우는 것만 봐도 구토를 느끼는 사람이야. 그러니 너의 그 눈물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흘리거라."
이 말을 끝으로 곽숭양은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초류빈은 비록 혈도가 쩍혀 있어 움직이지도, 말을 할 수도 없었지만 지각은 아직 살아 있었다. 초류빈은 곽숭양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을 담았다.
고요한 침묵이 흐른 잠시 후에 설영령은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어떤 사람이 일생을 사는 동안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의리의 친구를 사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일 거야....."
설영령은 다시 고개를 돌려 초류빈을 쳐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도 물론 그를 위해 많은 일을 했겠죠. 그래서 그도 당신을 위해....."
초류빈은 그만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지금 그의 가슴은 수천 개의 비수가 내리꽂히는 것처럼 매우 아팠다. 초류빈은 이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이 매우 이해하기 힘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류빈, 그는 실로 남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왔다. 그러나 그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포기하거나 잊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를 배반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곽숭양은 지금 그를 위해서 죽음도 불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우정일 것이다. 이런 우정은 천금을 주어도 살 수가 없는 것이며 또 그 어떠한 물건으로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 이런 우정이 존재해 있기 때문에 인류의 찬란함은 영원히 남아 빛을 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때 방 안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설영령이 문을 닫고 또 창문도 닫았기 때문이었다. 설영령은 초류빈의 옆에 앉아 아무 말도 없이 초류빈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사방은 찬물 세례를 맞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지금 시각이 어떻게 되었을까. 곽숭양은 지금 상관금홍과 생사의 결투를 벌일까? 두 사람의 생사는 어쩌면 일순간에 결정이 날 것이다. 그런데도 초류빈 자신은 지금 이곳에 누운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지 않은가.
초류빈은 여기까지 생각을 해 보다가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등뒤에서 누군가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소리는 매우 가벼웠고 또 느렸다.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으로서 상당한 공력의 조예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발걸음소리가 멎더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똑...순간 설영령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누가 찾아온 것일까...어쩌면 곽숭양이 이미 그들의 독수에 걸려 제지를 받는 동안 상관금홍이 찾아온 것은 아닐까.
똑, 똑똑.....
이번의 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컸다.
설영령의 이마 위에선 어느덧 구슬 같은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설영령은 재빨리 초류빈을 안아 올리더니 어디 숨길 만한 곳이 없을까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심장을 압박해 올 듯 계속해서 들려왔다. 문 밖에 있는 사람은 매우 조급한 듯, 만약 문이 열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덮쳐 들어올 것 같았다.
설영령은 다급한 나머지 크게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려요. 옷을 입어야 문을 열 게 아니겠어요?"
설영령은 소리치며 발끝으로 옷장 문을 연 후 초류빈을 처넣고는 그 위를 덮어 버렸다. 이어 설영령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콧등의 땀을 닦아 낸 후 문을 열었다.
"오래간 만에 마음껏 자려고 했더니 누가 또 찾아온 것일까? 아유, 이놈의 팔자는 왜 이처럼 사납다지....."
설영령은 매우 졸린 듯한 표정으로 짜증을 가득 담고 말하다가 이어 물었다.
"두 분께선 누굴 찾으시는 건가요?"
그러나 상대는 정작 문을 여니 아무 말도 없었고 대신 무엇인가 쓰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계속해서 다시 두 사람의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옷장 속은 답답하고도 매우 어두웠다. 만약 초류빈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은 상황 아래서 옷장에 갇혔다면 아마 질식과 긴장으로 인해 미쳐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초류빈은 오히려 마음이 매우 안정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그는 우선 자기의 마음부터 안정시킨다. 아무리 조급해 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설영령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아니, 이게 무슨 짓들이에요? 당신들은 강도인가요?"
초류빈은 이 말을 듣자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자신이 맨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설영령이 강도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설영령은 비록 다른 것은 잘 배우지 못했지만 거짓말을 하고 시치미를 떼는 것은 설소하가 무색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타난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리저리 헤매며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는 듯했다. 그때 설영령의 고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곳은 저희 아씨의 규방인데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함부로 들어오는 거죠?"
이제야 들어온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린 너희 아씨를 찾으러 왔다."
이 음성은 매우 부드러웠고 듣기도 좋을 뿐만 아니라 웃음까지 섞여 있었다. 나타난 사람은 의외에도 여인이었다. 초류빈은 설마 여자가 이곳을 찾아올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설영령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두 분께선 저희 아씨를 찾아오신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저희 아씨를 알고 계시나요?"
그 여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물론 알고 있다. 그리고 매우 절친한 친구이다."
설영령이 웃으며 눈을 곱게 흘겼다.
"그렇다면 진작 말씀해 주실 것이지 저는 두 분이 강도인 줄만 알았잖아요?"
그 여자도 웃으며 되물었다.
"우리가 정말 강도처럼 보이느냐?"
"두 분께선 정말 뭘 모르시는군요. 지금의 강도는 옛날과 달라 어떤 강도는 두 분보다 더 아름다워 강도질을 하기 전에는 강도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라니까요."
설영령은 정말 영리한 소녀였다. 그녀는 은근히 상대를 모욕하면서도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말은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
이때 또 다른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 아씨께선 어딜 가셨느냐? 좀 불러 주겠니?"
이 음성은 매우 낮았고 약간 쉰 듯했지만 듣기에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초류빈은 이 음성이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고 느꼈지만 누구인지는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설영령이 웃음 섞인 음성으로 대꾸했다.
"저희 아씨께선 며칠 전 이곳을 떠나셔서 지금은 저 혼자 있어요. 그러니 두 분께선 무슨 용무가 계신지 모르겠으나 제게 얘기해 보세요."
그 여자가 약간 의아한 음성으로 물었다.
"언제쯤이면 돌아올까?"
"모르겠어요. 아씨께선 아무 말씀이 없으셨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여쭙겠어요?"
그때 다른 한 명의 여자가 냉랭하게 웃었다.
"우리가 오니까 나갔다니 이처럼 우연한 일이 어디 있다지? 혹시 우리가 온다는 것을 알고 미리 피한 게 아닐까?"
이 말은 보통 감정의 말이 아니었다. 혹 그녀들은 남편이 이곳에 와 바람을 피우기 때문에 따지러 온 것이 아닐까.
그러나 설영령은 여전히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두 분께서 아씨의 친구라면 두 분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왜 피했겠어요?"
그 여인은 약간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은 다 만나도 친구는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가 아니냐?"
그러자 한 여인이 다시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어쩌면 그 친구들에게 미안한 일을 무수히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설영령은 웃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두 분께선 참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이렇게 좁은 곳에 숨었다면 어디에 숨었겠어요?"
"그래? 내 비록 이 방에 대해선 익숙치 않으나 만약 내가 숨는다면 어디엔가 숨을 곳이 반드시 있을 거야."
설영령은 등뒤에 있는 옷장을 두들겼다.
"그렇다면 이 옷장 속에 숨었겠군요?"
이렇게 반문한 그녀는 생긋 웃으며 다시 보충했다.
"그러나 옷장 안에 숨는 게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알고 계시나요?"
그 여자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다. 너희 아씨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옷장 안에 숨을 수 있겠느냐?"
여자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러나 지금 너희 아씨가 이 옷장 속에 없다면 이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누구냐?"
설영령은 짐짓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누구라니요? 이 옷장 안에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여자는 매섭게 다그쳤다.
"만약 옷장 안에 사람이 없다면 너는 어째서 옷장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 거냐? 우리가 너희 아씨의 옷을 훔쳐갈까 봐 겁이 나서 그러느냐?"
설영령은 몸을 심하게 움직이면서 두 여인을 번갈아 보았다.
"제...제가 언제 옷장 문을 막았다는 거죠?"
여인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것 봐, 꼬마 아가씨. 자넨 비록 총명하기는 하지만 너무 어려. 우리 같은 여우를 속이려면 몇 년 더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이에 초류빈은 비록 옷장 안에 갇혀 있어서 설영령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지금 그녀의 표정이 매우 흉하게 변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심정 또한 매우 고통스러웠다.
한 남자가 옷장 속에 숨어 있는 것이 발각된다는 것은 별로 유쾌한 일이 못된다. 더구나 초류빈은 지금 두 여자가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여길는지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여자의 음성은 매우 가늘고 부드럽기는 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돋혀 있는 것으로 보아 보통 무서운 여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한 여자는 비록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시비적인 어투였고 설소하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여자의 발걸음소리로 미루어 보아 공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모르긴 해도 설소하와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 같았다.
초류빈은 머리가 어지러워 지금 옷장 안에 있는 인간이 자신이 아닌 설소하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 두 여자에게 호되게 혼이 나길 원했다. 설소하는 남자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잘 알고 있겠지만 여자를 대하는 방법은 별로 모를 것이다.
"흠....."
그때 설영령의 신음 같은 한숨이 새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옷장 문이 열렸다. 초류빈은 그만 두 눈을 감았다. 그는 이 두 여자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했으면 하고 속으로 열심히 원했다.
이때 그 여자는 옷장 안에 설소하가 아닌 다른 남자가 숨어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매우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얼마쯤 멍청하게 서 있던 그 여자는 까르르 웃으며 설영령에게 물었다.
"호호호호...이 사람이 누구인데 이곳에서 자고 있는 거지?"
설영령은 더듬거리며 겨우 대꾸했다.
"그...그 사람은 제 사촌오빠예요."
그 여자는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하며 빈정거렸다.
"정말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나도 어렸을 땐 가끔 사랑하는 사람을 옷장 속에다 숨겨 두었지. 그런데 언젠가 한 번 발견이 되었을 때 나도 사촌오빠라고 변명을 했었다."
그녀는 짐짓 재미있는 듯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어째서 세상 여자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촌오빠라고 하길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그보다 더 좋은 칭호는 없을까?"
설영령은 귀엽게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저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아마 다음 번엔 사촌오빠라고는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재미있는 아가씨군. 철도 없고 말이야."
이때 쉰 음성의 여자가 더 지체하기 싫은 듯 말했다.
"설소하가 이곳에 없으니 우린 그만 가기로 하죠."
그러나 정작 옷장 앞에 선 여자는 다른 속셈이 있는 듯했다.
"뭐가 그리 급하지? 우리 기왕 온 김에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하자."
초류빈은 옷장 문이 열린 순간 진한 향기를 맡았다. 그런데 그 향기가 점점 짙어지는 것으로 보아 그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 간의 답답하고 지루한 침묵이 흘렀을 때 그 여자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아가씨, 아가씨는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남자를 선택하는 데는 상당한 솜씨와 조예를 갖고 있군."
그러자 설영령의 웃음 섞인 맑은 음성이 뒤따랐다.
"이곳엔 남자들이 없어요. 설사 있다고 한들 아씨께서 전부 차지하시니 저는 어쩔 수 없이 이런 남자를 택할 수밖에요."
그 여자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초류빈을 탐색하듯 온몸을 두루 살폈다.
"어째서 이런 남자를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냐? 이 사람은 비대하지도 마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생김새도 괜찮고 더 나아가선 여자에 대한 경험도 매우 많은 것 같은데."
설영령은 그제야 말할 구실을 찾은 듯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그래요. 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물론 괜찮기는 하지만 너무 잠자는 것을 좋아해서 탈이에요. 한번 잠들었다 하면 세상이 두 조각이 나도 일어날 줄을 몰라요."
그 여자는 재미있다는 듯 다시 까르르 웃어댔다.
"호호호호...어쩌면 너무 피곤했는지도 모른다. 너같이 어린 계집애를 만났으니 당연히 피곤하기도 할 거야!"
그러나 설영령은 불만스럽다는 듯 앙칼지게 말했다.
"그렇지만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그 여자는 눈알을 굴리며 시종 초류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구나. 너 같은 계집아이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것 같다. 마침 나라면 알맞겠구나."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한바탕 방이 떠나가라 웃어젖히고 난 후 다시 이었다.
"이것 봐, 아가씨. 만약 이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게 주는 게 어때? 대신 이 사내보다 훨씬 젊고 멋있는 남자를 소개해 줄 테니까."
그녀는 초류빈을 본 순간 갑자기 음탕한 여자로 변해 버렸다. 여자는 입으로 웃고 떠들며 손을 내밀어 마치 어린아이를 안 듯 초류빈을 안아올렸다. 이렇게 되자 초류빈은 자연히 두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간 초류빈은 두 눈을 떴다가 하마터면 놀라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할 뻔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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