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33 소이비도 제3권 간정奸情
간정(奸情)
요리의 가짓수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맛은 훌륭했다. 설소하가 이렇게 훌륭한 요리 솜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실로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요리 이외에 식탁에 술잔이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술잔 속에는 향차(香茶)가 들어 있었다.
설소하는 생글생글 웃으며 겸손하게 말했다.
"워낙 한적한 곳이라 갑자기 술을 준비하지 못했으니 차로써 술을 대신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초류빈은 개의치 않고
"마침 내가 갖고 온 술이 있소....."
하고 말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려 아까 한쪽 담구석에 내려놓았던 술병을 찾았다.
그는 우선 차를 단숨에 마시고 나서 미소를 띠고 낭천에게 말했다.
"자네도 어서 차를 마시게나. 내가 먼저 자네에게 한 잔 따르겠네."
낭천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낭천을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녀의 웃음은 유난히 귀엽게 보였다.
그러자 낭천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술을 끊었습니다."
초류빈은 다시 한번 놀라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어 즉시 반문을 했다.
"술을 끊었다니...그게 정말인가?"
낭천의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설소하가 입을 열었다.
"술을 많이 마시면 몸에 해롭대요. 안 그런가요?"
초류빈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술을 많이 마시면 나 같은 꼴이 될 것이오. 나도 만약 젊었다면 꼭 술을 끊었을 것이오."
낭천은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은 안정돼 있지 않은 듯 갓집은 고기 조각을 식탁 위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설소하는 곱게 그에게 눈을 흘겼다.
"정말 어린애 같군요. 밥을 먹으면서 반찬을 흘리다니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낭천은 묵묵히 식탁에 떨어진 고기 조각을 다시 젓가락으로 집었다.
설소하는 다시 곱게 그를 흘겨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식탁에 떨어진 고기를 다시 먹을 수 있나요?"
말을 하면서 그녀는 스스로 고기를 집어 낭천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초류빈으로선 별로 유쾌한 아침 식사가 아니었다.
저녁 식사 때는 요리가 더욱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자 곧 날이 어두워졌다.
초류빈은 낭천의 침상에서 자고 낭천은 객청에서 자게 되었다. 설소하는 친히 그들을 위해 깨끗한 홑이불을 새로 깔았다.
그리고 새로 빤 옷을 낭천의 침상머리에 준비해 놓았다.
"저는 그이가 매일 옷을 갈아입는 것을 좋아해요."
설소하가 초류빈에게 한 말이다. 잠들기 전에 그녀는 또한 낭천을 위해 세수 물을 대령했다. 낭천이 세수를 마치자 그녀는 수건으로 낭천의 얼굴과 귀를 깨끗이 닦아주었다.
"이 사람은 꼭 어린애 같다니까요. 세수를 하면서도 귀는 잘 씻으려 하지 않아요."
역시 설소하가 초류빈에게 한 말이다. 낭천이 침상에 눕자 그녀는 그를 위해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이곳은 비교적 공기가 차가우니까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그녀는 낭천을 극진하게 위해 주었다. 마치 자상한 어머니가 어린애를 보살피듯 모든 일에 세심한 신경을 기울였다. 낭천은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초류빈은 다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낭천의 이러한 생활이 과연 행복인지 아니면 고통인지...초류빈은 내심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초류빈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객청 쪽에선 벌써 낭천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낭천이 코를 골면서 잠을 자다니, 아니 그것보다 벌써 곤한 잠에 빠지다니...초류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초류빈, 그는 세 살 때부터 아직 이렇게 일찍 잠자리에 든 적이 없다고 기억된다.
설소하의 침실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 그녀도 잠든 모양이다. 초류빈은 침상에서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고 살그머니 객청으로 나갔다. 낭천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낭천은 깊은 잠에 빠져 아무리 밀어도 일어날 줄 몰랐다. 설사 한 마리 돼지라 해도 이렇게 정신없이 자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낭천은 늑대보다 더 신경이 예민하지 않았던가.
초류빈은 낭천의 침상 앞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차츰 분연한 표정으로 일그러져갔다.
'그녀는 매일 일찍 잠자리에 들며 한 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날이 어두워지기만 하면 나는 잠들어 버리죠. 그리고 날이 밝기 전엔 깨 본 적이 없.....'
낭천이 한 말이 다시 귓가에 되살아났다. 초류빈은 오늘 저녁 식사 때 소갈비로 끓인 국물이 식탁에 올라온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갈비가 푹 삶아져 제법 먹음직스러웠다. 낭천은 국물을 많이 마셨다. 설소하는 초류빈에게 많이 마시라고 권하기도 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 국물 속에 죽순이 들어 있었다는 것은 초류빈에게 큰 다행이었다.
초류빈은 비록 식성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지만 죽순은 절대 먹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남의 호의를 면전에서 거절할 수 있는 위인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설소하가 권하는 국물을 사양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주방으로 들어가 밥을 다시 퍼오는 틈을 타서 국물을 낭천에게 따라 주었다.
설소하가 주방에서 돌아와 초류빈 앞에 놓여 있는 국그릇이 비워져 있는 것을 보자 유난히 달콤하게 웃던 모습을 초류빈은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국물 속에 무슨 미약(迷藥)을 집어 넣었을까? 낭천이 깊은 잠에 빠지니 그녀가 무슨 일을 하든 낭천은 자연히 모를 수밖에. 그녀는 국물에다 충분히 독약을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낭천이 아직 이용할 가치가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초류빈의 눈에서 노화(怒火)가 폭사되었다. 그는 홀연 몸을 돌려 주먹으로 설소하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침실 안에선 아무런 반응도 오지 않았다. 초류빈은 여지껏 살아오면서 남의 문을 발길질해서 연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역시 예외였다. 침실 안에는 역시 그가 생각한 대로 아무도 없었다. 설소하는 어디로 간 것일까? 초류빈은 지체하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언덕 위에 위치한 누각의 등불은 여전히 분홍색이다. 어젯밤에 초류빈이 이 누각에서 낭천의 오두막집까지 가는 데는 하룻밤을 거의 세웠지만 이번에 오두막집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는 불과 반 시진밖엔 걸리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설소하가 필시 이 누각에 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가 막 누각을 향해 달려가는데 누각의 작은 문이 홀연 열렸다. 그리고는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문틈에서 새어나온 등불이 그의 몸을 비쳐 주었다. 그 자는 흑색 경장을 하고 있었으며 눈빛이 유난히 빛났다. 역시 상관비와 같이 만족한 표정 뒤의 피곤함이 엿보였다. 초류빈은 좀처럼 놀라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누각에서 나온 자를 보는 순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곽숭양, 누각에서 나온 자가 그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문 안쪽에선 갸름한 손이 내밀어져 그의 손을 잡았다. 밤바람에 나직한 속삭임이 실려왔다. 다시 만날 때를 기약하는 것 같았다. 한참 후에야 그들의 손은 떨어졌다. 그리고 또 한참 뒤에야 곽숭양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의 걸음은 느렸다. 그리고 못내 아쉬워하는 듯 연신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때 누각의 문은 닫혔다. 곽숭양은 별이 총총히 빛나는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모든 상황이 상관비가 나올 때와 똑같았다. 이 누각은 과연 지옥일까? 아니면 천당일까?
초류빈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는 아직 이렇게 분노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당장 달려가 설소하의 비밀을 벗기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곽숭양은 그의 친구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사내대장부가 아닌가.
그는 차마 곽숭양에게 무안을 줄 수 없어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곽숭양은 총총히 앞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갑자기 싸늘하게 외쳤다.
"거기 숨어 있는 자가 누구냐? 어서 모습을 나타내라."
숭양철검, 과연 천하 절정을 다투는 고수답게 경각심이 높고 반응이 예민했다. 상관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는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무 뒤에서 나온 사람이 초류빈일 줄이야 그도 역시 꿈에도 생각지 못한 듯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누각과 주막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주막까지 걸어오면서 별로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 마음속에 있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만간 그 또한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막은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문이 있을까? 그들은 탁상 위에 모자를 남겨 놓고 주방에서 술단지를 꺼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주막 대들보 위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여러 장소에서 술을 마셨다. 한데 대들보 위에서 술을 마시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이곳이 술을 마시기엔 적합한 장소라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지금 단지의 술은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곽숭양은 평상시 주량보다 많은 술을 마셨다. 초류빈 같은 술친구가 있고 청풍명월이 있으니 어느 누구도 평상시보다 술을 많이 마실 것이다. 왕왕 술을 많이 마셔야지만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 있다.
곽숭양은 홀연 입을 열었다.
"다...당신은 내가 누각에서 무엇을 했는지 물론 알고 있을 거요."
초류빈은 빙긋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이 남자라는 것도 알고 있소."
"그리고 그 누각에 누가 있었는지도 물론 알고 있겠죠?"
"그렇소. 나는 그녀를 자주 찾아가지는 않소. 나는 단지 심정이 좋지 않을 때만 그녀를 찾아가곤 했소."
초류빈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곽숭양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패배를 당한 쓴맛이 어떠한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곽숭양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나도 많은 여자를 알고 있소. 하지만 나에게 가장 즐거움을 주는 여자는 바로 그녀였소."
초류빈은 침묵을 깨며 천천히 물었다.
"당신은 그녀가 어떠한 여인인지 알고 있소?"
"나는 그녀를 안 지 이미 오래 되었소."
"그녀는 당신을 어떻게 대해 왔소?"
"그녀가 나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상관이 없소. 그런 여인은 어떠한 남자에게도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똑같이 대할 것이오."
"당신은 그러한 그녀가 당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이오?"
"물론 알고 있소. 하지만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소. 나도 애써 그녀를 이용하고 있으니 말이오. 그녀가 나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내가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한들 손해볼 게 뭐 있겠소?"
초류빈은 술을 단숨에 마시고 나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확실히 공평한 거래로구려. 하지만...두 사람의 거래로 인해 다른 사람이 해를 입는다면 당신은 역시 개의치 않겠소?"
곽숭양은 즉시 반문했다.
"누가 해를 입는다는 거요?"
"물론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겠죠."
"왕왕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소. 여인은 무엇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손상시키려는지 도무지 모르겠소."
"어쩌면 그녀가 손상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뿐일지도 모르오.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녀에게서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 있겠소?"
"당신은 여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군요."
"이 세상에 진짜로 여인을 이해하는 남자는 없을 것이오. 만약 자기가 진짜로 여자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 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욱 큰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될 것이오."
곽숭양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낭천은 정말 그녀를 사랑하고 있소?"
초류빈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단호했다.
"그렇소."
곽숭양은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당신의 친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소."
초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낭천을 본 적도 그에 대해 아는 바도 없소."
초류빈은 그가 일종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아 정중하게 말했다.
"이번 일에 대해 변명을 할 필요는 없소. 나는 절대 당신을 탓하지 않소."
곽숭양은 다시 긴 침묵을 지키다가 술잔을 비우는 것과 동시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낭천은 지금도 그녀와 함께 있소?"
"그렇소."
하고 초류빈은 대답을 하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낭천은 당신보다 몇백 배 그녀를 사랑하고 필요로 하고 있지만 그와 그녀의 관계는 아직도 남남이오."
그 말을 들은 곽숭양은 느끼는 바가 있는지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둠 속에서지만 그의 눈동자는 의아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럼 낭천은 아직 그녀와....."
"어느 누구도 그녀와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유독 낭천만은 그녀와 관계를 맺을 수 없소."
"무엇 때문에?"
"낭천은 그녀를 존경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강요를 할 수가 없는 거요. 낭천은 그녀를 성녀(聖女)로 인식하고 있소. 그녀 자신도 역시 낭천이 영원히 자기를 성녀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고 있소. 사실 여인은 남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지 남자의 존경을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오. 한 남자가 만약 존경할 가치가 없는 여인을 존경하고 있다면 그가 얻는 것은 고통과 번뇌뿐일 것이오."
"그렇다면 그녀의 모든 행위에 대해 그는 전혀 알 도리가 없소? 그럼 당신은 왜 낭천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았소?"
"내가 설사 그에게 말한다 해도 그는 믿지 않을 것이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귀머거리가 되고 장님으로 변하기 마련이오."
"그럼 당신의 뜻은 나더러 낭천에게 얘기하라는 거요?"
"낭천은 원래 전도가 밝은 젊은이였소. 그리고 나의 친구요. 그가 설소하 같은 여인의 손에 부패되어 가는 것을 차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소."
곽숭양은 입을 다문 채 매우 심각한 표정이었다.
초류빈은 힘주어 말을 이어갔다.
"나는 생전 누구에게 부탁을 드린 적이 없었소. 하지만 이번에는....."
곽숭양은 홀연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하지만...그가 내 말을 믿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소?"
초류빈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당신은 그녀와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그녀가 완전히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오."
곽숭양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좋소. 당신과 함께 가겠소."
초류빈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내가 역시 당신을 잘못 보지는 않았구려. 당신과 낭천은 필시 좋은 친구가 될 것이오."
곽숭양은 길게 숨을 토했다.
"친구는 단 한 사람으로 족하오. 낭천이 당신 같은 친구를 사귀었다는 것은 일생의 가장 큰 복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오."
오두막집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낭천이 자던 이불은 여전히 객청에 깔려 있었다.
주방엔 어젯밤에 먹다 남은 반찬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쇠고기 국물을 끓인 솥은 깨끗이 닦여져 있었다.
설소하의 침실에 놓여 있던 물건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초류빈이 걷어찬 부서진 문만이 바람에 흔들려 삐거덕삐거덕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낭천의 방에 있는 물건도 전혀 움직인 흔적이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갖지 않고 떠난 것이다. 심지어 설소하가 어젯밤 낭천에게 갈아입으라던 새 옷도 그 자리에 놓여져 있었다. 그들은 필시 총총히 떠난 것이다.
낭천이 아무 말 없이 떠나다니, 초류빈은 실로 믿겨지지 않았다.
그는 부서진 문을 바라보다가 홀연 허리를 구부리고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곽숭양은 뒷짐을 진 채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가 기침이 멎자 비로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낭천이 친구라고 하지 않았소?"
초류빈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곽숭양은 그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살피며 다시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그가 떠난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았소."
초류빈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아마 그에게 무슨 의외의 일이 생긴 것 같소. 그렇지 않으면....."
곽숭양이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아넘겼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그는 여자의 말을 비교적 잘 듣는 편인 것 같소."
그는 초류빈에게 반발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곧 이어서 조용히 물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얼마 정도 살았소?"
"아마 이 년이 가까울 것이오."
"나는 이 년 전에도 그녀와 그 작은 누각에서 만나곤 했소. 그 누각은 어쩌면 그녀의 소굴인지도 모르오."
초류빈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교활한 토끼는 집을 세 군데나 갖고 있다는 말이 있듯이 그녀의 소굴은 한 군데에 국한돼 있지 않을 것이오."
곽숭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한 군데밖에 모르고 있소."
초류빈은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천천히 설소하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침실 안엔 침상, 장롱, 탁상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침상은 투명한 청색 망사로 드리워져 있고 이불은 사람이 자고 일어난 듯 어수선해 있었다. 그것은 물론 낭천에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헝클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장롱 속에 옷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 검소한 옷가지뿐이었다. 탁상 위에 놓여 있는 화장품을 담는 상자 안엔 별로 특이할 만한 화장품도 없었다. 그녀가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 입는 곳은 여기가 아닌 그 작은 누각이기 때문이다.
침실 안에 있는 물건을 초류빈은 모두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기에서 그는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곽숭양도 주위를 훑어보고 나서 심각하게 말했다.
"내가 누각에서 나올 때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소. 그런데 그녀가 이곳으로 돌아와 낭천과 떠났는 데도 우리는 도중에서 그들을 보지 못했소."
초류빈의 표정도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다른 길을 통해 떠났기 때문일 것이오."
"다른 길이라니...이곳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어떻게 다른 길이 있을 수 있겠소?"
"그 길은 어쩌면 산 속으로 뚫려져 있을 것이오."
초류빈은 말을 끝내는 즉시 벽에 붙여 놓은 침상을 홀연 옆으로 옮겼다. 과연 침상 밑에서 한 줄기 비밀통로가 나타났다. 비밀통로는 곧장 산허리를 뚫고 길게 뻗어 있었다. 초류빈은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이 비밀통로의 출구가 어디인지 짐작이 갔다.
마침 그때 곽숭양이 물었다.
"이 통로의 출구가 어디인 것 같소?"
"바로 그 작은 누각의 침상 밑일 거요."
"나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
곽숭양은 그렇게 말하며 냉소를 터뜨렸다.
"흥! 이 침상을 내려가 곧장 그 침상에 오를 수 있으니 그녀는 정말 시간을 절약할 줄 아는군....."
초류빈이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워낙 약속이 많으므로 시간을 절약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오."
그 말을 들은 곽숭양은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도 물론 이제 어떻게 된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초류빈이 말을 해 버리자 불쾌한 느낌이 드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남자들은 여인네들의 도량이 작다고들 늘 말하지만 사실 남자 자신의 도량도 여자보다 큰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 또한 여인네들보다 더욱 소견이 좁은 남자도 허다하다.
그들은 한 여자를 수중에 넣고서도 그 외의 많은 여자들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여자들이 자기만을 생각해 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설사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여자라 할지라도 그 여자는 영원히 자기를 좋아해 주길 원한다.
비밀통로는 물론 너무 길 수가 없다. 출구는 과연 두 사람이 예측한 대로 그 작은 누각의 침실 침상 밑이었다. 이곳에 있는 침상은 목옥에 놓여 있는 침상보다 훨씬 호화스러웠다. 원앙이 수놓아진 이불이 깔려 있고 침상 자체도 푹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곳에 누으면 흡사 구름에 떠 있는 듯 좀처럼 일어나기가 싫을 정도였다.
설소하는 물론 그곳에 없었다. 그곳엔 단지 그 홍의소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지금 화장대 앞에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초류빈과 곽숭양이 돌연 나타났는 데도 홍의소녀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그들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녀는 단지 곁눈질로 그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보니 두 분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군요."
곽숭양은 차가운 안색으로 싸늘하게 다그쳐 물었다.
"여기엔 너밖에 남지 않았느냐?"
홍의소녀는 억울한 일을 당한 듯 작은 입을 삐죽거렸다.
"왜 그렇게 사나운 얼굴을 하죠? 당신이 이곳에 올 때마다 당신을 위해 이불을 깔아드리고 나중에 당신이 떠나면 이불을 개는 사람도 전데, 그러한 일들을 벌써 잊으셨나요?"
곽숭양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홍의소녀는 커다란 눈으로 초류빈을 유심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이 바로 초탐화라는 사람인가요?"
"그렇다."
초류빈이 단호하게 대답을 했는 데도 홍의소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당신이 정말 그 대명(大名)이 혁혁한 초탐화란 말예요?"
이번에 초류빈은 대답 대신 반문을 했다.
"내 말을 믿지 않느냐?"
홍의소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홀연 한숨을 내쉬었다.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단지 몇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어서 그래요."
"이해가 가지 않다니...무엇을 말하는 거냐?"
"다른 사람들은 한결같이 초탐화는 비단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사람도 영특하다고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저한테 간단히 속아넘어갔으니 뜻밖일 수밖에요."
그녀는 눈을 깜박거리며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번에 제가 당신을 속인 것에 대해 사과를 드리겠어요."
"괜찮다. 가끔 어린애에게 속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너에게 한 번 속은 후 내 자신이 많이 젊어진 느낌이다."
홍의소녀는 재미있다는 듯 눈을 연신 깜박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초류빈 같은 사람은 본디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저에게 속지 않았다 해도 역시 젊은 것 같아요. 만약 제가 계속 몇 번만 더 속인다면 당신은 아마 어린애로 변하겠군요."
"다음엔 속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겠다. 마흔 살의 어린애라면 누가 보아도 요물로 생각할 테니까....."
"그 점에 대해선 이제 염려를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에 제가 당신을 속인 것은 당신이 낯설기 때문이었어요. 할머님은 제가 어릴 적부터 낯선 사람에게는 절대 솔직한 말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왔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사람에게 유괴당한대요."
초류빈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넌지지 물었다.
"지금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홍의소녀는 사뭇 정색을 했다.
"지금 우리는 서로 아는 사이가 되었으니 더 이상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예요."
초류빈은 침상 밑에 뚫린 구멍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너에게 묻겠는데 얼마 전에 저기에서 나온 사람을 보았느냐?"
홍의소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아무도 보지 못했어요."
하고 말하더니 눈을 깜박거리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밖에서 들어온 사람은 보았어요."
"그 사람은 누구냐?"
초류빈의 질문에 그녀는 천진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전혀 모르는 남자였어요. 저는 당신 이외에 아는 남자가 별로 많지 않아요."
"그 사람은 무엇하러 왔느냐?"
"그 사람은 아주 흉악하게 생겼어요. 시커먼 수염이 얼굴을 덮고 있었으며 칼자국이 역력하게 보였죠. 그는 들어오자마자 저에게 초류빈을 아느냐? 그가 이곳에 올 것이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너는 어떻게 대답했느냐?"
"저는 그 사람을 모르기 때문에 일부러 그에게 거짓말을 했죠.저는 초류빈을 알며 곧 이곳에 올 것이라고요....."
"그래! 그는 뭐라고 하더냐?"
"그는 당신에게 전해 달라면서 서신을 한 장 남기고 갔어요. 그리고 떠나면서 꼭 본인에게 전하라고 위협조로 말했어요."
"그래서 너는 그 서신을 받아 두었단 말이지?"
"물론이죠. 제가 만약 그 저신을 받지 않는다면 거짓말이 금방 탄로나게요. 그 사람은 워낙 무섭게 생겨 만약 제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면 그 자리에서 저의 머리통을 박살내 버렸을 거예요."
초류빈은 잠자코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 홍의소녀에게는 한 가지 신통한 재주가 있었다. 그것은 즉 어떠한 거짓말을 해도 진짜같이 들린다는 일이었다. 초류빈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필시 그녀에게 물었을 것이었다.
'그 편지를 갖고 온 자는 어디로 갔느냐? 그가 어째서 나에게 전할 서신을 이곳으로 가지고 왔느냐?'
하지만 초류빈은 묻지 않았다. 그에게도 유별난 재주가 있었다. 그것은 즉 다른 사람이 어떠한 거짓말을 해도 그는 진짜 믿는 것같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초류빈을 속였다는 오산을 왕왕 하게 되는 것이다.
홍의소녀는 과연 서신을 꺼냈다. 겉봉엔 정말 초류빈의 이름이 똑똑히 적혀 있었다. 서신은 밀봉되어 있었는데 상상 외로 홍의소녀는 서신을 뜯어 보지 않았다.
그곳에 적혀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존경하는 초탐화, 오래 전부터 그대의 위명을 듣고 직접 만나 뵐 영광이 있기를 학수고대해 왔소. 시월 초하루 산곡(山谷) 샘물 줄기 아래서 기다리겠소. 귀하는 군자이니 나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리라 믿소.>
아래 서명은 놀랍게도 상관금홍이었다. 이 서신은 아주 간단하고 글귀 또한 공손했다. 하지만 이 서신을 받은 사람이라면 설사 후사(後事)에 대해 생각해 놓지 않더라도 아마 질겁을 하며 놀랄 것이다.
이 서신은 영락없는 최명부(催命符)이기도 했다. 상관금홍이 만약 누구의 목숨을 노린다면 아직 그 누구도 살아남은 예가 없었다.
초류빈은 천천히 서신을 집어 겉봉에 집어 넣더니 품속에 간직했다. 그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웃음이 띠어져 있었다.
홍의소녀는 줄곧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이내 궁금한 눈빛으로 물었다.
"서신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죠?"
초류빈은 여전히 웃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별것 아니다."
"연신 싱글벙글 웃는 것을 보니 여자한테서 온 서신임에 틀림없는 것 같군요."
"맞았다."
"그녀가 당신을 만나자는 서신인가요?"
"이번에도 알아맞혔군."
"여자한테서 온 서신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당신에게 내주지 않았을 텐데....."
"네가 만약 서신을 나한테 내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필경 몹시 상심해 할 것이다."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요? 예쁘게 생겼나요?"
"물론 예쁘게 생겼지. 그렇지 않다면 나는 벌써 서신을 찢어 버렸을 것이다. 추악하게 생긴 여인의 서신을 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지."
소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의 나이는 몇인가요?"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지."
그러자 소녀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최소한 저보다는 위겠죠?"
"다행하게도 너보다 나이가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녀를 수양딸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소녀는 쥐고 있던 바늘을 힘주어 헝겊에 꽂으며 안색이 차갑게 변했다.
"정녕 그런 예쁘장한 할망구가 만나자는 서신을 보내 왔다면 왜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지 않고 이곳에서 꾸물대죠?"
"너는 이곳의 주인인데 함부로 손님을 쫓아서야 되겠느냐?"
"제가 당신을 쫓지 않아도 당신은 이곳을 떠날 게 아니겠어요?"
"내가 만약 떠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소녀의 눈빛이 금시 야광주처럼 빛났다.
"당신이 만약 떠나지 않겠다면 저는 주인된 입장에서 당연히 당신을 접대해야죠."
"그게 정말인가?"
"물론 정말이죠. 당신이 만약 이곳에서 열흘을 머물겠다면 저는 열흘 동안 당신을 접대할 것이고 만약 당신이 평생토록 이곳에 남아 있겠다면 저는...역시 당신을 내쫓지 않을 거예요."
말을 하면서 그녀의 얼굴은 복숭아빛으로 물들어갔다. 계집애의 얼굴이 붉어졌다는 것은 이미 어린애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초류빈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난 이곳에 남아 있기로 결심....."
"그게 정말인가요?"
"물론 진짜지. 너 같은 좋은 주인을 만났는데 내가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느냐?"
"당신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지금 당장 당신을 위해 주안상을 차려 오겠어요. 이곳에 다른 것은 없지만 술만큼은 많아요...당신이 목욕을 해도 충분할 정도로 많이 저장되어 있어요."
"술 이외에도 나는 몇 토막의 나무가 필요한데 딱딱한 나무일수록 좋다."
소녀는 그 말에 약간 멍해지는 표정이었다.
"나무라고요? 나무를 어디에 쓰려고 그러죠? 혹시 나무토막을 안주로 삼으려는 건 아닌가요?"
말을 하면서 그녀는 스스로도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었다. 은방울 갈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나무토막을 원한다면 곧 갖다 드리겠어요. 단지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설사 하늘에 걸려 있는 달도 따다 드릴 용의가 있어요."
곽숭양은 줄곧 초류빈의 표정을 주시하고 있다가 이때 홀연 입을 열었다.
"나는 나무토막으로 안주를 삼을 수 없으니 다른 요리를 만들어 오도록 해라."
그 말을 들은 소녀의 얼굴이 다시 차갑게 변했다. 그녀는 곽숭양의 아래위를 노려보며 냉랭하게 물었다.
"당신도 이곳에 남아 있을 생각인가요?"
곽숭양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너 같은 인심 좋은 주인을 만났는데 내가 어찌 서운하게 그냥 떠날 수 있겠느냐?"
소녀는 입을 옆으로 씰룩이고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투덜댔다.
"정말 별꼴이군. 그렇게도 할 일이 없는가. 남의 호젓한 분위기를 방해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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