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39 소이비도 제3권 어둠 속의 거래





어둠 속의 거래



그녀는 손을 내밀어 접은이의 손을 잡았다.

"화나셨나요?"

"흥!"

젊은이는 차가운 안색으로 냉소만 칠 뿐이다.

그러자 설소하는 그를 살짝 앞으로 끌어당기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호호호...정말 어린애 같군요. 자, 어서 이리 들어오세요. 제가 오늘은 색다른 방법으로 즐겁게 해 드리겠어요."

젊은이는 계속 차가운 안색을 보이려 했지만 그녀의 말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바로 이때였다.

"으악!"

어디선가 느닷없이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소리는 숲 속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앞서 떠난 회의인이 어찌된 영문인지 뒷걸음질치면서 숲에서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가 뒤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선혈이 발밑에 뚝뚝 떨어졌다. 숲을 빠져나오자 그는 비로소 몸을 돌려 가마가 있는 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주위는 비록 어두웠지만 그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는 것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누구에 의해 양 미간에 일검을 맞은 게 분명했다. 흑의인은 이때 숲 속으로 들어가려다가 그의 모습을 보자 이내 안색이 변하여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졌다. 그와 동시에 회의인이 썩은 통나무처럼 그의 발밑에 쓰러졌다.

회의인은 혹시 숲 속에서 귀신을 만난 게 아닐까? 살인을 하는 악귀(惡鬼)!

흑의인은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져 역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어 칠흑같은 숲 속을 주시하며 싸늘하게 외쳤다.

"누구냐?"

숲 속에선 아무런 반응도 오지 않았다. 잠시 후 비로소 숲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키가 헌칠한 자로서 무릎까지 오는 황금색 장삼을 입고 있었다. 머리엔 커다란 죽립을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는 비단 걸음을 옮기는 자세가 특이할 뿐 아니라 검을 찬 방법도 다른 사람과 달랐다. 단지 아무렇게나 비스듬히 허리춤에 꽂아 놓았을 뿐이다. 검은 길지 않고 검집에 들어 있었다. 이 자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흉악하게 생겼는지 아니면 순하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한데, 흑의인은 그의 모습을 보자 어찌된 영문인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치며 손에 식은땀이 배었다. 그 자가 소리없는 살기를 대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소하는 가마 속에 앉아서도 그 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았다.

형무명.

그가 살아 있으니 죽은 사람은 자연히 초류빈일 것이다. 설소하는 웃었다. 그러나 속으로만 웃은 것이지 얼굴엔 두려워하는 기색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는 곁에 있는 젊은이의 손을 꼭 쥐고 연신 몸을 떨었다.

"무서워요.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젊은이는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그가 누구이든 내가 여기 있는 한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그 말을 들은 설소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생긋이 웃었다.

"이젠 무섭지 않아요. 당신이 절 지켜줄 테니까요. 당신이 제 곁에 있는 한 어느 누구도 감히 저를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젊은이는 그녀의 말에 용기를 얻은 듯 가슴을 폈다.

"그렇소.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이리 가까이 다가오면 당장 없애 버리겠소."

큰소리는 쳤지만 사실 이 젊은이도 형무명에게서 풍기는 살기에 눌려 등줄기에선 이미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만 그는 아직 젊기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 앞에서 나약한 것을 보이고 싶지 않을 따름이었다. 형무명이 흑의인 앞으로 다가왔다.

흑의인의 손엔 여전히 예리한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이 비수로 숱한 사람을 죽인 경험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어찌된 영문인지 선뜻 이 비수를 전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형무명의 죽어 있는 잿빛 눈동자를 보았던 것이다.

형무명은 아예 그를 보지도 않은 듯 냉랭하게 물었다.

"네 손에 쥐고 있는 비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

이 엉뚱한 질문에 흑의인은 멍해졌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질문을 던진 이상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형무명의 서릿발같이 차가운 음성이 곧 그의 말을 이었다.

"그럼 날 죽여라."

흑의인은 다시 멍해질 수밖에. 그는 잠시 멍청하게 서 있다가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나는 너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너를 죽이겠느냐?"

형무명의 대꾸는 칼날처럼 흑의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네가 나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너를 죽이기 때문이다."

흑의인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의 이마에서 구슬같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얍!"

싸늘한 기합소리와 함께 흑의인은 이를 악문 채 수중의 비수를 전광석화같이 내뻗었다. 무기가 짧을수록 적을 상대함에 있어 위험도가 높다. 그런데 흑의인은 이토록 짧은 비수를 사용하고 있으니 독특한 초식을 터득한 게 분명했다. 물론 속도도 빨랐다.

그러나 비수가 전개되자마자 검광이 허공에 가득 수놓아졌다. 이어 짤막한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흑의인은 땅에 쓰러졌다. 형무명의 검은 아예 검집에서 나온 적이 없는 듯 그대로 검집에 들어 있었다. 정말 빠른 검법이었다.

남색장포를 입은 젊은이도 검의 명수로서 항상 자신의 검법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 자기보다 검법이 더 빠른 사람이 있으리라곤 믿지 않았었다. 지금에서야 그것을 믿게 된 것이다.

설소하는 그의 눈가에 계속 경련이 이는 것을 보자 홀연 그의 손을 들고 조급하게 말했다.

"저 사람의 검법은 너무나도 빨라요. 그러니...당신은 속히 이곳을 떠나세요. 제 염려는 하지 말고....."

이 젊은이의 나이가 만약 사오십 세였다면 그녀의 말대로 당장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사오십 세가 된 사람이라면 생명이 체면보다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생명은 고귀(高貴)하지만 애정은 그보다 더욱 귀중하다는 말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필경 젊은이의 입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오십 세를 넘기기가 어렵다.

젊은이는 이를 악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투는 견결(見決)하기 그지없었으나 당장 뛰쳐나갈 뜻은 없었다.

설소하는 눈동자를 사르르 굴리며 다시 간곡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당신은 죽을 수 없어요. 당신에겐 부모와 처자식이 있잖아요. 그러니 어서 도망가세요. 제가 당신을 위해서 저 사람을 붙잡고 늘어지겠어요. 저는 당신을 위해 죽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젊은이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갔다.

설소하의 입가엔 다시 달콤한 미소가 감돌았다. 여자가 남자로 하여금 자기를 위해 생명을 바치게 하려면 우선 상대방에게 자기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인식시켜 줘야 한다. 그로 하여금 스스로 감동을 느껴 자발적으로 목숨을 바치게끔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을 설소하는 숱하게 사용해 오면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 그녀는 비단 마음속으로 웃었을 뿐 아니라 얼굴 전체로 웃었다. 남색장포를 입은 젊은이는 이제 영원히 자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설소하는 잘 알고 있었다.

검광은 눈부셨다. 남색장포를 입은 젊은이는 비단 검법이 뛰어날 뿐더러 그가 사용하는 검도 역시 찾아보기가 드문 보검이었다. 순식간에 그는 형무명을 향해 다섯 검을 전개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는 벌써 깨닫고 있었다.

형무명은 뜻밖에도 전혀 반격을 하지 않았다. 남의청년이 전개한 다섯 검은 분명히 모두 상대방의 급소를 노려 전개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전부 빗나가고 말았다.

형무명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물론 질문을 던진 것이다.

"너는 점창파(點蒼派)의 부하냐?"

남의청년은 손을 거두고 더 이상 여섯 번째 검초를 전개하지 못했다. 상대방의 잿빛 눈동자는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상대방이 어떻게 해서 자기의 사문(師門)을 단번에 간파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형무명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사천령(謝天靈)은 너와 어떤 관계냐?"

남의청년은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며 대꾸했다.

"나의...스승이다!"

형무명은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곽숭양이 이미 내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아느냐?"

그는 별안간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의청년은 그의 말을 알고 있었다. 사천령은 점창파의 장문인으로서 호(號랐)는 천남제일검객(天南第一劍客)이라 일컫는다.

그는 평생 동안 천하무적이었지만 유독 곽숭양에게 계속 세 번을 패했다. 그런데 지금 곽숭양이 형무명의 손에 죽었다니 사천령은 자연히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사천령의 제자라면 더욱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남의청년의 안색이 금방 창백하게 변했다. 누구라 하더라도 형무명같은 사람은 절대 거짓말을 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형무명은 다시 말을 꺼냈다.

"나는 단 일격에 너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믿느냐?"

남의청년은 이를 악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검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형무명은 어느 새 검을 전개해 이미 검끝으로 남의청년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형무명은 냉랭하게 말했다.

"나는 단 일격에 네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이젠 믿겠느냐?"

남의청년의 이마에선 구슬 같은 땀방울이 비오듯 떨어지고,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죽이려면 어서 죽여라!"

"너는 정말 죽고 싶으냐?"

남의청년은 설소하가 들을 수 있도록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외쳤다.

"대장부로 태어나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느냐? 어서 죽여라."

그는 비록 죽음을 도외시하는 장부의 호기(豪氣)를 연출하려고 애썼지만 기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형무명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말했다.

"내가 만일 너를 죽이지 않겠다면, 그래도 너는 죽고 싶으냐?"

남의청년은 그 말을 듣자 멍해졌다. 계속 생을 누릴 수 있다면 누가 죽길 원하겠는가.

형무명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그녀를 위해 죽음으로써 그녀의 마음속에 네가 영웅이라는 생각을 뿌리 깊이 박아 주고 싶겠지만 만약 네가 정말 죽는다면 그래도 그녀가 너를 좋아할 것 같으냐?"

여기까지 말한 그는 검끝으로 가마쪽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좀더 간단하게 말해 저기 있는 계집이 지금 죽는다면 그래도 너는 그녀를 좋아하겠느냐?"

남의청년은 대답할 말을 잃었다. 차가운 검날은 이미 그의 목줄기에서 떠났다. 그는 자기가 갑자기 바보가 된 느낌이 들었다.

형무명은 그의 대답을 애당초 기대하지 않은 듯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여자가 보는 견지로선 이미 죽은 백 명의 영웅보다는 아직 살아 있는 한 명의 졸부가 낫다. 네 자신도 마찬가지로 백 명의 미녀보다 살아 있는 한 명의 평범한 여인을 원할 것이다. 내가 말한 뜻을 알겠느냐?"

남의청년은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의 말투가 공손하게 변해 있었다.

형무명은 아무 표정도 없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지금도 역시 죽고 싶으냐?"

남의청년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멋쩍게 대답했다.

"역시 산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 이제야 너는 간단한 진리를 깨달았군."

하고 형무명은 말하더니 다음 말을 이어갔다.

"나는 평소에 별로 말이 없다. 그런데 오늘은 너에게 그 간단한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네가 그 진리를 깨달아야지만 나는 비로소 너를 죽일 수 있다."

남의청년은 질겁을 했다.

"나를 죽이겠다니....."

형무명의 음성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나는 질문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는다. 단지 곧 죽게 될 사람에게는 예외다."

"하지만...끝내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어째서 그런 말을?"

"나는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네가 만약 죽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내 무슨 재미로 너를 죽이겠느냐?"

남의청년은 야수가 울부짖듯 고함을 지르며 일검을 전개했다. 그의 고함소리는 극히 짧았다. 그가 검을 전개하자마자 형무명의 검이 이미 그의 입 속으로 파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차가운 검날이 그의 혓바닥에 붙었다. 그는 어쨌든 죽음의 맛을 음미했다. 검은 이미 검집으로 들어가 있었다.

형무명에겐 특이한 습관이 있다. 그것은 그가 매번 살인을 한 후 꼭 재빨리 검을 검집에 넣는 것이다. 마치 다시는 검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왜냐하면 그의 검이 검집 속에 있으면 다른 사람은 비교적 경계를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경계를 소홀히 하길 바란다. 그러한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비교적 빨리 죽는다.

설소하는 줄곧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첫사랑의 연인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처럼 온유하기만 했다.

형무명은 시종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때 설소하는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인 자세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도 역시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에게 눈길을 돌리진 않았다. 설소하는 비록 웃고 있지만 눈동자는 축소되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꼈다.

설소하가 허리를 흔들고 있었기에 두 젊은 가마꾼은 그만 넋을 잃어 번개보다도 빠른 검광을 보지 못했다. 설소하 앞으로 걸어온 형무명의 눈동자는 여전히 죽은 것이었다. 그리고 텅빈 상태에서 먼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먼 곳은 일편의 암흑이 깔려 있었다.

설소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왜 감히 저를 쳐다보지 못하죠? 저를 쳐다본 후에는 저를 죽일 용기를 잃을까 봐 두려워서인가요?"

그녀가 느낀 심상치 않은 육감은 죽음의 그림자였다.

형무명은 입가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며 한참 후에야 싸늘하게 외쳤다.

"내가 당신을 죽이러 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오?"

설소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어요. 제아무리 잔혹하고 무정한 사람일지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죽일 땐 역시 신색이 달라지기 마련이죠."

그녀는 처량하게 웃으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당신에게 한마디 묻겠어요. 저의 죽음은 이미 결정됐으니 제 질문에 대답해 주겠죠?"

형무명은 다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비로소 냉랭하게 말했다.

"물으시오. 곧 죽게 될 사람에겐 거짓말을 하지 않소."

설소하는 그의 얼굴을 주시하며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묻겠는데 누가 당신을 시켜 저를 죽이라 했죠?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이죠?"

형무명은 주먹에 힘을 주며 발광하듯 싸늘하게 외쳤다.

"아무도 없소. 그리고 이유도 없소!"

"아니에요. 필시 당신에게 지령을 내린 사람이 있을 거예요. 당신은 절대 스스로 생각해서 저를 죽이지는 않을 사람이니까요."

그녀는 더욱 처량하고 더욱 아름답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당신이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절대 저를 죽일 생각은 하지 못할 거예요."

사랑, 다른 사람의 입에서 이 단어가 튀어나오면 때로 어색한 느낌도 있지만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온 그 한마디는 아름다운 음률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비단 입으로 말할 뿐 아니라 혀로써 그리고 손, 다리, 허리, 눈까지 동원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말을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을 하기 싫어하고 어떤 이는 입 밖에 낼 용기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밥먹듯이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세상에서 설소하보다 그 단어를 아름답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먹을 쥔 형무명의 손에 더욱 힘이 가해졌다. 거의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선 여전히 하등의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설소하가 설사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아도 입가에 띠어진 자신 있는 미소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자신이 있어요. 당신이 만약 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절대 조금 전에 그 사람들을 죽이진 않았을 거예요."

형무명은 그녀의 말을 중단시키지 않고 계속 들었다.

설소하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그들을 죽인 것은 질투에서 비롯된 거예요."

"질투라고?"

"그래요. 저를 건드린 사람, 아니 심지어 저를 본 사람마저도 당신은 죽이려 할 거예요. 그것이 바로 질투예요. 저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질투를 느낄 수 있나요?"

형무명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짐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단지 당신을 죽여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오. 내가 죽여야 할 사람은 절대 살아 남을 수가 없소!"

"정말 저를 죽일 생각인가요? 그런데 왜 제게 눈길을 돌리지 않죠? 그럴 용기가 없나요?"

형무명의 손이 드디어 검자루를 쥐었다. 희미한 등불 아래서도 그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 있음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식은땀이다.

설소하는 그의 얼굴을 주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만약 저를 쳐다볼 용기조차 없다면 설사 저를 죽여도 필시 후회하게 될 거예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형무명은 움직이지 않았다. 설소하의 손은 드디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어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면 저를 그 사람에게 데려다 주세요."

그녀의 손가락이 교묘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어느 곳에서 손가락이 멎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형무명의 호흡과 근육이 긴장돼 갔다. 그는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누...누구에게 데려가 달라는 거요?"

"당신에게 저를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사람을 말하는 거죠. 저는 그로 하여금 생각을 달리하게 할 자신이 있어요."

그녀는 그의 귀뿌리를 가볍게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

"안심하세요. 저는 절대 당신으로 하여금 후회하지 않게 하겠어요."

형무명은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칠흑같은 숲 속을 바라보았다.

설소하는 눈동자를 사르르 소리없이 굴리더니 나직이 물었다.

"그는 바로 저 숲 속에 있나요?"

형무명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설소하의 달콤한 음성이 다시 그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좋아요. 제가 가서 그를 만나보겠어요. 그가 정말 저를 놓아주지 않겠다면 그때 다시 당신이 저를 죽여도 늦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가 몸을 돌려 숲 속으로 걸어가자 형무명의 눈동자는 비로소 그녀의 뒷모습에 던져졌다. 일순 그의 잿빛 눈동자에 난생 처음으로 생명이 되살아났다. 환희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후회인지 그것은 심지어 그 자신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어둠에 잠긴 숲 속은 손을 코앞에 내밀어도 다섯 손가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설소하는 비록 빠른 걸음으로 걷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한 사람과 정면으로 충돌할 뻔했다. 그 사람은 그곳에 한 채의 빙산(氷山)처럼 서 있었다.

사실 그의 몸집은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태산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설소하는 본래 몸을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피하기는커녕 도리어 상대방의 품안으로 쓰러졌다.

상대방은 뜻밖에도 그녀의 몸을 부축해 주지 않았다.

설소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자신의 몸을 고정시켰다.

"너무나 컴컴해서...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상대방과 한 자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 있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필시 자기의 가쁜 숨소리를 듣고 있으리라 믿었다. 또한 그 호흡소리는 충분히 남자의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방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역시 이런 방법으로 형무명의 살수를 전개할 수 없도록 만들었느냐?"

설소하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진주처럼 빛났다.

"그를 시켜 저를 죽이게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인가요? 당신이 바로 상관방주란 말예요?"

"그렇다. 내 사전에 분명히 밝혀 두지만 너의 이러한 방법은 나에겐 하등의 효과가 없다."

그의 음성은 냉혹하지도 않고 음흉하지도 않았다. 마치 책을 읽어 나가듯 천천히, 감정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설소하의 눈동자가 더욱 빛났다.

"그럼 무슨 방법을 동원하여야지만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나요?"

상관금홍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네가 지니고 있는 방법을 전부 동원해 보아라."

설소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절대 여자에게 쉽사리 마음이 동요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형무명을 시켜 저를 죽이게 했지요?"

상관금홍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수시로 살인을 해야 될 사람은 절대 감정을 지녀선 안 되지. 전혀 감정이 없는 사람을 훈련해 낸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형무명을 너한테로 보낸 것이다."

설소하는 백옥처럽 희디흰 치아를 드러내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저를 죽인다면 손실이 많을 거예요."

상관금홍은 아무 표정없이 반문했다.

"그래?"

설소하는 그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저는 형무명보다도 쓸모가 많아요."

"그래서?"

"형무명은 단지 살인을 할 줄 알지만 저도 역시 살인은 할 줄 알아요. 그는 검으로써 살인을 하며 피까지 흘리게 하여야 되기 때문에 수준이 낮아요. 저는 피를 보이지 않고 검을 사용하지 않아도 살인을 할 수 있죠."

"그는 살인을 하는데 있어 최소한 너보다 빠르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늦은 것은 늦은 대로 이점이 있어요. 안 그런가요?"

"너는 살인을 하는 이외에 또 무슨 이점이 있느냐?"

"저에겐 돈이 많아요. 제가 지니고 있는 돈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요. 남들이 알면 미칠 정도로 많죠."

"그것은 굉장한 이점이군."

그의 음성은 다소 감정이 곁들여 있었다. 그는 돈의 용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소하는 강조하듯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저는 똑똑하므로 당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해 드릴 수도 있어요."

"그것은 사실이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많은 돈을 모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설소하의 음성은 점점 변화가 일었다. 만약 그것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필시 분홍빛일 것이다.

"그 외에도 저에겐 물론 다른 이점도 있어요."

말끝을 약간 흐린 그녀는 요염하게 웃었다.

"호호호...당신이 남자라면 곧 제가 한 말이 사실임을 믿게 될 거예요. 당신만 원하신다면 저의 모든 이점은 전부 당신 거예요."

상관금홍은 또다시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내뱉었다.

"나는 남자다."

숲 속에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형무명의 전신은 이미 이슬로 인해 축축히 젖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덧 동녘 하늘에서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으나 안개가 짙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데 숲 속에서는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음인지 탄식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간혹 설소하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만이 안개를 뚫고 뚜렷이 들려왔다.

"호호호...당신은 과연 남자예요. 그리고 당신같은 남자는 난생 처음이에요. 당신이 이러한 남자일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곧이어 상관금홍의 음성이 들렸다.

"네가 이러한 여자이기 때문에 내가 비로소 이러한 남자가 된 것이다."

그의 음성은 뜻밖에도 여전히 담담했다. 이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족에 찬 설소하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날이 곧 밝아올 테니 저는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왜 이렇게 서두르느냐?"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게 누구냐?"

"낭천이지요. 당신도 물론 그의 이름을 들었겠죠!"

"나는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다. 너는 왜 아직 그를 죽이지 않았지? 너의 살인수법은 과연 속도가 느리구나."

"저는 그를 죽일 수가 없어요. 그리고 감히 죽일 수도 없어요."

"어째서?"

"제가 만약 그를 죽이면 초류빈이 필시 저를 죽일 거예요."

이번에는 상관금홍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설소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저는 당신이 초류빈을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고서는 형무명을 시켜 저를 죽이게 할 리가 없으니까요. 당신은 형무명으로 하여금 초류빈을 상대케 하기 위해 그가 연약해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상관금홍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초류빈을 두려워하고 있느냐?"

설소하는 왜 형무명과 상관금홍이 모두 자기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도 역시 초류빈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설소하는 상관금홍의 마음을 좀더 자극시키기 위해선 두려움을 더욱 과장시켜야만 했다. 그녀는 대답을 하기 앞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칠 정도로 두려워요."

과연 그녀의 예측대로 상관금홍은 다음 질문을 던졌다.

"나와 비교해서 어떠냐?"

설소하는 어떠한 기회도 놓치지 않는 여자다.

"그는 당신보다도 더 무서워요. 저는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게는 할 수 있지만 절대 그의 마음을 동요시킬 수는 없어요."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그만 없애 버린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될 거예요. 초류빈의 가장 무서운 점은 이 세상 어떤 것에 대해서든 미련을 두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도 역시 사람이니 필경 어떤 약점이 있을 것이다."

"그의 유일한 약점은 설벽운이에요. 하지만 저는 감히 설벽운으로써 그를 위협할 용기가 없어요."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느냐?"

"저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의 손에 비도가 쥐어져 있는 한 저는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어요."

그녀는 다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가 살아 있는 한 감히 그를 건드릴 생각조차 할 수 없어요."

상관금홍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참 허공을 바라보다가 못을 박듯 뚜렷하게 말했다.

"이젠 안심해도 좋다. 그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설소하의 응석을 부리는 듯한 교성이 들리더니 그들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안개가 차츰 걷히기 시작했다.

형무명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서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듯 이슬방울이 매달려 있는 죽림의 가장자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상관금홍이 홀로 숲 속에서 걸어나오는 것도 보지 못한 듯했다.

상관금홍도 역시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그의 앞을 지나가며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아침은 안개가 깔렸으니 필시 좋은 날씨가 될 것이다."

형무명은 잠자코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좋은 날씨가 될 것입니다."

이어 그는 몸을 돌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상관금홍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선후로 해서 드디어 잠잠한 아침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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