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27 소이비도 제2권 흑의 검객





흑의 검객



문은 잠기지 않은 채 닫혀 있었다.

술주정뱅이는 문 앞에 잠시 서 있더니 가볍게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자 지독한 술냄새가 풍겨 나왔다.

방 안은 말할 수 없이 더럽고 지저분했으며 상 옆에 한 사람이 엎드려 있었고 그의 손엔 술병이 들려 있었다. 여기에도 또 한 명의 술주정뱅이가 있었다.

술주정뱅이는 씁쓸히 웃더니 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똑똑똑!

상 위에 엎드려 있던 사람이 드디어 깨어나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 사람은 얼굴이 온통 곰보였다.

곰보진 얼굴엔 술에 의한 기미와 주름살이 가득차 있었고 머리카락도 수염도 하얗다. 이 사람이 바로 천하제일의 미인인 설소하의 생부(生父)일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라도 하겠는가.

그 사람은 눈을 비비면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른 새벽부터 문을 두들기는 사람이 있다니 귀신이라도 찾아온 것인가!"

이렇게 말을 하고 난 그는 그제야 문 앞에 한 중년인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절로 미간을 찌푸리면서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오?"

그의 태도는 이 장원의 관리인인 듯했다.

중년인은 가볍게 웃었다.

"우린 이 년 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나를 못 알아보시겠소?"

설륭은 이 남루한 옷차림의 중년인을 자세히 보더니 그제야 안색이 급변했다. 중년인은 바로 초류빈이었던 것이다.

설륭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하려고 하였다.

"초....."

초류빈은 그가 엎드려 절을 하기 전에 급히 만류하더니 그의 입을 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나를 알아보면 되었소. 우리 앉아서 얘기나 합시다."

설륭은 급히 의자를 가져다 초류빈을 앉혔다.

"소인이 어찌 어르신네를 모르겠습니까? 전번엔 소인이 몰라뵙고 그랬지만 이젠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어르신네께선 이 년 사이에 매우 늙으셨군요."

초류빈은 가볍게 탄식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당신도 많이 늙었구려. 우린 모두 늙었나 보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소?"

설륭은 고개를 저으면서 탄식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의 앞에선 거짓말을 할지 모르겠지만 어르신네의 앞에서....."

이렇게 말한 그는 씁쓸히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어르신네께는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는 제 자신도 모르겠군요. 그저 오늘은 이것을 팔고 내일은 저것을 팔면서 지내왔습니다....."

초류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그동안 생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단 말이오?"

설륭은 고개를 숙였다.

초류빈이 다시 물었다.

"허...허...나리께서 떠날 때 집안에서 쓸 생활비를 하나도 남겨 두지 않았단 말이오?"

설륭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두 눈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초류빈의 안색은 일순 더욱 창백해져 다시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설륭은 눈물 섞인 음성으로 차근차근 말했다.

"부인께선 자신의 장식품을 지니고 계셨지요. 하지만 부인께선 그것을 모두 하인들의 생계를 위해서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머뭇거린 후 다시 말을 계속했다.

"부인께선 자신이 고통을 받을 망정 남에게는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가볍게 탄식을 터뜨렸다.

"하지만 당신은 떠나지 않았으니 과연 충신이구려."

설륭은 고개를 숙여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소인은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초류빈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너무 겸손해 하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소. 어떤 사람들은 성미는 비록 좋지 않지만 마음씨는 매우 좋소....."

이렇게 말한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계속 이었다.

"다만 그러한 사람들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매우 드물 따름이오."

설륭의 두 눈은 다시 붉어졌지만 애써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이 술이 비록 많지는 않지만 어르신네께선 사양치 마시고 한 잔 드십시오."

그리고 술을 따르려고 했으나 술병은 이미 비어 있었다.

초류빈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는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소. 다만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을 뿐이오...당신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내가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해서 말이오?"

설륭 역시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소인이 곧 차를 끓여다가 대령하겠습니다."

초류빈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누구를 만나든 간에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마시오."

곰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소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더니 급히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 닫는 것을 잊지 않았다.

초류빈은 표정이 다시 암담하게 변해 혼자 중얼거렸다.

"벽운! 벽운, 당신이 이러한 고생을 하다니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오. 내가 당신을 이렇게 되도록 한 것이오."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러므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당신을 보호해야 하며 그 누구도 당신을 해치지 못하게 할 것이오."

태양은 어느덧 높이 떠올라 창문을 통해 방 안을 환히 비추어 주었다.

차맛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차라는 것은 씁쓸하기는 하나 마시기는 힘들지 않았다. 이것은 여자와 같다고 비유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자가 젊었을 때, 비록 빼어나게 아름답지는 못하다 해도 싫어하는 남자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초류빈은 입에 별로 맞지 않는 차를 음미하면서 서서히 마셨다. 차를 다 마시고 난 초류빈은 소리없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에게 매우 총명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이런 재미있는 말을 한 적이 있소."

설륭이 웃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나리께서 하시는 말씀이 더욱 재미있습니다."

초류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마셔서 취하지 않는 술은 없으며 보기 흉한 여자는 또 없다고 말했소. 그리고 그 자신은 바로 그 두 가지 때문에 살아간다고 하였소."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빙그레 웃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 술이란 오래 저장할수록 그 맛이 좋고 향기로운 것이며 여자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세련되고 재미있는 것이오."

설륭은 초류빈의 이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초류빈에게 차를 따라 주면서 말했다.

"나리께선 이번에 무슨 일이 있으셔서 돌아온 것입니까?"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한참 후에야 서서히 말했다.

"소문을 듣자하니 이곳에 무슨 중요한 보물이 있다고 하더군....."

설륭은 실소를 하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보물이 있다구요? 이곳에 보물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그는 초류빈을 슬쩍 떠보았다.

"만약 이곳에 진짜 보물이 있다면 나리께서 아시고 계실 것이 아닙니까?"

초류빈은 탄식을 터뜨렸다.

"나와 당신은 이곳에 보물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진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소."

이 말에 설륭은 되물었다.

"유언비어를 퍼뜨린 사람이 누구일까요? 무엇 때문에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까?"

초류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할 수 있소. 그 중 첫째는 많은 사람을 이곳으로 끌어들여서 쟁탈전을 벌여 피차지간에 살생을 범하게 한 후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것이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륭이 급급히 물었다.

"또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초류빈은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이미 이 년 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소. 그리고 많은 무림인들이 나의 행적에 대해 조사하고 있소."

여기까지 말한 초류빈은 한 차례 기침을 토한 후 말을 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나를 끌어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 기회에 그들에게 나리의 솜씨를 한번 보여 주십시오."

"이번에 이곳에 온 사람 중엔 나의 실력으로도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몇 명 있소."

"이 세상에 나리께서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이때 문 밖에서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밝고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바로 호사야의 장원입니까? 소생, 특별히 뵙고자 이렇게 방문을 했습니다."

설륭은 안색이 가볍게 변하면서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이곳엔 이 년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를 않았는데 갑자기 웬 손님일까?"

설륭은 즉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약 반 시진이 지난 뒤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되돌아 와 말했다.

"이제 보니 오늘이 바로 부인의 생신이시군요. 저도 잊고 있었는데 그래도 기억하고 있다가 이렇게 축하해 주러 오는 사람이 다 있다니 정말 기쁘군요."

초류빈은 깊은 생각에 잠겨 무겁게 입을 열었다.

"누가 찾아왔소?"

"모두 다섯 명입니다. 한 분은 매우 위엄이 있어 보이는 어르신네이고 또 한 분은 매우 준수하게 생긴 청년입니다."

그는 갑자기 긴장한 표정을 계속 지으며 얘기했다.

"또 한 사랍은 외눈이고 가장 무서운 사람은 얼굴이 녹색인 사람입니다."

초류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그 중에 다리가 하나 없는 절름발이도 있소?"

설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나리께서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나리께선 그들을 알고 계십니까?"

일순 초류빈의 두 눈에서 칼날과 같이 예리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그리고 또 가볍게 기침을 토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콜록!"

설륭은 그의 눈빛이 변한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이 다섯 사람이 비록 매우 괴상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가지고 온 예물은 대단하더군요."

이렇게 말한 그는 신이 난 듯이 계속해서 지껄였다.

"호사야께서 이곳에 계실 때도 그만한 예물을 가지고 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초류빈은 담담하게 물었다.

"어떠한 선물을 가지고 왔소?"

"그들이 가지고 온 갖가지 예물 중엔 순금으로 된 큰 돈이 있었습니다. 최소한 대여섯 근은 되지요.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큰 돈은 처음 보았습니다."

초류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다시 물었다.

"부인께선 그들이 가지고 온 예물을 받았소?"

설륭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부인께선 본시 사양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객청에 앉아서 부인을 만나기 전엔 떠나지 않을 것이며 또 호사야의 절친한 친구라고 하자 부인께선 어쩔 수 없이 도련님으로 하여금 모시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도련님께선 비록 어리시지만 사람을 대하는 솜씨는 어른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 손님들은 이구동성으로 도련님의 총명함을 칭찬하였습니다."

초류빈은 그의 말을 듣고 찻잔 속의 차를 멍하니 내려다보면서 혼잣말인 양 중얼거렸다.

"이 다섯 사람이 왔으니 누가 또 이곳에 올 수 있겠는가."

제갈강, 고행공, 연쌍비, 당독, 그리고 상관비는 붉은색 옷을 입은 한 소년과 대청에 마주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강호의 제일가는 고수들이지만 이 어린 소년에 대해 예의로서 대했고 말투도 높였다. 다만 상관비만이 한쪽에 조용히 앉아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갈강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소장주께선 문무를 겸비하고 계시며 모든 것이 월등하여 훗날 무한한 영예를 성취하실 것이라고 믿소."

이렇게 말한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때가 되면 소장수께선 이 늙은 것들을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럼 저희들은 평생을 두고 감격할 것입니다."

어린 소년은 웃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만약 후배의 장래가 지금 노선배님들의 반만 된다 해도 저는 만족할 것입니다. 그것도 여러 선배님들의 많으신 보살핌과 가르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갈강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소장주께선 말씀도 잘하시는군요. 호....."

제갈강은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대청 밖을 바라보았다.

@ 이때 설륭이 한 손님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자는 일신에 검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검까지도 까만 흑의인이었다. 그의 몸집은 매우 커서 설륭보다 배나 더 컸다. 하지만 균형잡힌 체격은 매우 날렵해 보였다.

한데 안색이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회색과 같은 이상한 빛을 띠고 있었고 두 눈은 마치 날아가기라도 할 듯이 위로 치켜져 있었다. 그리고 가지런히 난 턱수염이 바람에 날려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갈강 등은 이 흑의인을 보자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가 비범한 솜씨를 지닌 강호 고수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흑의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의아해 하였다.

어린 소년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중나가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후배 호천강이라고 합니다. 어르신네께서 왕림하신 것을 미처 마중나가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흑의인은 호천강을 위아래로 유심히 살펴보더니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냉막한 어조로 물었다.

"자네가 호유성의 아들인가?"

호천강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선배님께선 가부(家父)의 옛 친구분이신 것 같은데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십니까?"

흑의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이름을 말한다고 해도 자네는 모를 것일세."

그러더니 큰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객청 내로 걸어 들어왔다.

제갈강 등은 흑의인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중을 했다.

제갈강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포권의 예를 올리면서 말했다.

"소생....."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흑의인이 그의 말을 가로채면서 냉랭하게 외쳤다.

"나는 당신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니 나의 내력에 대해 알려고 할 필요가 없소."

제갈강이 급급히 그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또 제갈강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흑의인은 그의 말을 가로채면서 차갑게 내뱉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당신들과는 다르오. 나는 다만 한번 와 본 것뿐이오."

제갈강이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잘 되었소. 이곳의 일이 끝난 후 소생 등은 귀하에게 감사를 드릴 것이오."

"나는 당신들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니 당신들도 나를 상관하지 마시오. 그리고 서로 왕래도 없었으니 감사해 할 것도 없소."

그러더니 의자를 하나 끌어다가 앉고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흑의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제갈강 등 다섯 명은 서로 마주 쳐다만 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고행공이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곳은 강호에서 제일가는 명원(名園)이라고 들어왔는데 소장주께선 소생들에게 구경시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호천강은 탄식을 터뜨리면서 대답했다.

"후배가 무능하여 가문이 중도에서 몰락하여 정원은 이미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고행공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산이란 높다고 해서 명산이 아니며 물은 깊다고 해서 모두 명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십 년 내에 명협과 미인고사들을 배출해 낸 이곳이 아무리 폐허가 되었다 하더라도 구경할 가치는 클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호천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러분들께서 원하신다면 어쩔 수가 없군요. 자, 후배를 따라 오십시오."

그러자 일행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호천강의 뒤를 따랐다. 이어 맨 앞에서 호천강이 길을 안내했고 맨 뒤에는 흑의인이 따르고 있었다. 이 흑의인은 눈이 반쯤 감겨져 있는 데다가 두 손은 또 소매 안에 들어가 있어서 매우 음험하게 여겨졌다.

호천강은 멀리 보이는 매화나무 숲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쪽이 바로 냉향소축입니다."

연쌍비의 두 눈에서 순간 강한 광채가 번뜩였다.

"듣자하니 초탐화가 이곳에서 기거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호천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연쌍비는 장삼 속에 감추어져 있는 표창을 만지면서 냉랭하게 웃었다.

"그는 비도이지만 나에겐 비창이 있소. 언젠가 그와 한번 대결해 보았으면 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때 맨 뒤에 서 있던 흑의인이 차갑게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이 만약 진짜 초탐화와 비교할 수가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정말 대단한 일이오."

연쌍비는 급히 몸을 돌리고 노기띤 눈초리로 흑의인을 노려보았다.

호천강은 연쌍비가 노한 것을 보자 급히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비도는 한낱 쇠붙이에 불과하며 무슨 선병신기(仙兵神器)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강호인들이 마치 그를 전설 속의 검선(劍仙)처럼 여기고 있으니 제가 들어도 어느 땐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흑의인이 담담하게 물었다.

"듣자하니 자네는 그에 의해서 공력이 제거됐다고 하던데 그 때문에 자네는 그를 증오하고 있는가?"

호천강은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초아저씨는 원래 저의 장배 어르신네입니다. 장배가 후배를 다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늘 후배가 어찌 감히 원망을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공력이 없다고 해서 큰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선배님?"

그의 웃음은 천진스러워 사악함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흑의인은 이 어린 소년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는 듯이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제갈강이 웃으면서 말했다.

"소장주께선 과연 패기가 있소. 그 한 마디만 들어도 호사야의 공자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소."

호천강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선배님께선 과찬하셨습니다."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던 상관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소문에 의하면 설소하도 이곳에서 기거하고 있었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이오?"

호천강은 그가 입을 연 것이 뜻밖인 듯 두 눈을 깜박거리더니 만 면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상관비는 조급한 기색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소?"

호천강은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이모님께선 이 년 전 어느 날 밤 갑자기 실종되었습니다. 자신의 옷가지도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아비에 의해 실종되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미 아비의 손에 죽었다고도 합니다."

상관비는 몹시 실망하여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들은 곧 다리를 건너 작은 누각 앞에 도착했다.

제갈강은 이 누각에 대해 몹시 흥미가 있는 듯 누각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고행공이 호천강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누가 기거하고 있는 곳이오?"

호천강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곳은 어머님께서 기거하시는 곳입니다."

고행공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다가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소생 등은 본시 영당대인의 생신을 축하해 드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소장주께선 영당대인을 좀 만나도록 허락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호천강은 난색을 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머님께선 손님을 통 만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후배에게 여쭤볼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고행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물론입니다. 어서 올라가 보시오."

호천강은 서서히 걸음을 옮겨 누각 위로 올라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매우 안정되어 있어 어린 소년의 활발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고행공은 그가 누각 위로 올라가자 냉랭하게 웃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아이는 정말 영특하군. 이 다음에 성장하면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오."

당독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저런 아이가 오래 살 수 있을는지 그게 의문이오."

누각의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던 제갈강이 또한 엄숙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이곳이 틀림없소!"

고행공은 주위를 힐끗 둘러보더니 더욱 음성을 낮추었다.

"내 어젯밤에 본 편지에 대해 누차에 걸쳐 연구해 보았는데 초가의 보물은 이 누각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오. 듣자하니 누대에 걸쳐 고관을 지내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물을 지니고 있다고 하오."

이렇게 말한 그는 의식적으로 흑의인을 훔쳐보았다. 이때 흑의인은 멀리 떨어진 채 어지럽게 자라고 있는 풀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두 마리의 귀뚜라미가 싸우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이들이 무슨 짓을 하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갈강의 두 눈에선 탐욕에 이글거리는 광채가 폭사되었다.

"보물은 별것이 아니오. 오직 초탐화 부자의 골동품과 공력비급을 방주께서 꼭 얻고자 하는 것이므로 오늘은 절대 빈손으로 돌아가선 안 되오."

고행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려고 하는데 호천강이 누각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제갈강은 시치미를 뚝 떼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영당대인께선 승낙하셨습니까?"

호천강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님께선 안 계십니다."

제갈강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물었다.

"어딜 가셨소?"

호천강은 고개를 흔들며 걱정스럽게 대꾸했다.

"후배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머님께선 누각에서 내려오신 적이 매우 드물었는데...."

제갈강은 내심 몹시 초조해 했으나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곧 돌아오실 것 같으니 우리 누각 위에 올라가서 기다리기로 합시다."

그러자 세 명의 황삼인이 급히 달려와서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속하들이 먼저 올라가 대략 청소해 놓겠습니다."

세 명의 황삼인은 본래 흑의인보다 멀리 서 있었다.

호천강은 세 명의 황삼인을 가로막으려고 했으나 제갈강의 수하라 섣불리 제지하지 못하고 불쾌한 기색을 띠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 명의 황삼인이 급히 몸을 날려 누각 위로 향했다.

바로 이 때였다.

누각 위에서부터 별안간 한 인영이 뛰쳐나오더니 기다란 채찍을 휘둘렀다.

휙!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파공음이 들리는가 싶자 석 장 길이의 채찍이 세 개의 커다란 원을 그렸을 때 이미 세 황삼인의 목은 채찍에 휘감겨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채찍은 다시 거두어졌다.

순간, 첫 번째 황삼인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머리가 잘려져 나간 채 일 장 밖으로 날아갔다. 이와 동시에 시뻘건 선혈이 잘라진 목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첫 번째 황삼인의 몸뚱어리가 채 쓰러지기도 전에 두 번째 황삼인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발랑 나자빠졌다.

그리고 혀가 쑥 빠져나오며 두 눈은 밖으로 툭 튀어나온 채 잠시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으며, 세 번째 황삼인도 두 손으로 목을 감싼 채 서너 걸음이나 뛰어가서야 픽 쓰러졌다.

그 고통이 얼마나 격심한지 사나이의 몸은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심하게 떨렸다. 그는 다행히 죽지 않았으나 그 고통은 죽음보다 수십 배나 더 큰 것이었다.

벼락같이 뛰쳐나와 세 명을 눈깜짝할 사이에 염라대왕 앞으로 보낸 사람은 바로 얼굴에 손바닥만한 푸른 점을 지닌 편신 서문유였다. 그의 귀신 같은 편법에 제갈강조차도 안색이 급변했다.

이때 흑의인이 냉막하게 코웃음을 치고 나서 담담하게 말했다.

"편신의 사편도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군!"

그러더니 몹시 실망했다는 듯이 고개를 높이 들고는 장탄식을 터뜨렸다.

제갈강이 음산하게 웃으며 살기띤 어조로 말했다.

"서문유! 어제는 용케도 도망쳤지만 오늘은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서문유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일언반구도 없이 다시 수중의 채찍을 휘둘렀다. 그가 처음 채찍을 휘둘렀을 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으나, 채찍이 완전히 퍼졌을 때는 강한 과공음이 들려왔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쾌속한 채찍 수법이 섬전보다도 더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이때 제갈강이 느닷없이 신형을 날리며 쇠지팡이로 응수해 갔다. 서문유의 채찍은 영활한 독사같이 상대의 쇠지팡이를 두르륵 휘감기 시작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제갈강의 쇠지팡이는 바닥에 깊숙이 꽂히고 말았다.

제갈강은 외다리를 높이 쳐든 채 쇠지팡이 위에 물구나무를 서서풍차와 같이 맹렬하게 돌기 시작했고 쇠지팡이도 같이 따라 돌았다.

그러자 쇠지팡이에 감긴 채찍은 점점 바싹 감겨져 시간이 갈수록 서문유는 어쩔 수 없이 가까이 끌려가야만 했다.

석 장 길이의 긴 채찍은 이미 반 이상이나 쇠지팡이에 감겼다.

서문유는 한 손으로 채찍을 움켜잡았지만 제갈강은 전신의 힘을 쇠지팡이 위에 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 힘은 물론 제갈강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유는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가 잠시 후에는 검붉은 색으로 변했고 비오는 듯한 땀방울이 코 양쪽의 선을 따라 흘러 내려왔다.

제갈강은 별안간 벽력 같은 폭갈을 터뜨리더니 쇠지팡이 위에 거꾸로 서 있던 몸을 비호처럼 옆으로 쓰러뜨렸다. 그는 자신의 몸을 쇠지팡이 대신으로 하여 횡소천군 초식을 전개한 것이다.

쇠지팡이는 생명이 없는 물체이지만 사람은 살아 있지 않은가. 그의 이런 변칙적인 공격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정말 오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약 서문유가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선다면 상대의 공격을 능히 피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편신이란 외호를 가진 그가 채찍을 버리고 피했다는 것이 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그는 다시 무슨 면목으로 강호인을 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손을 잡지 않는다면 왼손으로 제갈강의 다리를 정면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서문유의 손은 박살이 날 것이 뻔한 일이다.

사실 내공이나 적을 대하는 임기응변의 수법을 논한다면 서문유는 결코 제갈강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제갈강의 이 일초는 서문유를 상대하기 위해 이를 갈며 연마한 것이라 서문유에게는 극히 불리한 것이었다.

서문유는 비록 최악의 위기를 맞았으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갑자기 몸을 날려 쇠지팡이와 같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쇠지팡이에 감긴 채찍을 풀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갈강은 그가 이렇게 나올 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자신의 다리를 될 수 있는 한 길게 뻗어 서문유의 가슴에서 한 치 정도 떨어진 곳까지 접근시킨 채 시종 떨어질 줄 몰랐다.

두 사람의 싸움은 정말 신출귀몰하여 우열을 가리기가 몹시 힘들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용호상박에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오직 한 사람 흑의인만이 탄식을 터뜨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금강철괴도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구나!"

이때 당독이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죽음을 눈앞에 둔 놈이 멋모르고 날뛰다니 가소롭구나. 내가 네놈의 최후를 장식해 주마."

말을 마친 그는 자신의 독문병기인 당랑도를 뽑아 들어 서문유의 등을 노리고 빠르게 찔러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막 뛰쳐나가던 당독은 마치 무형의 주먹에 의해 격타당한 듯 뒤로 발랑 나자빠지는 게 아닌가.

그는 찍소리 한번 못하고 저승길로 줄달음질쳤다.

그의 목에는 어느 틈엔가 한 자루 비수가 꽂혀 있었다. 그것은 보통 비수와 별로 다른 데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제갈강은 그 비수를 보자 대경실색하여 소리쳤다.

"비도탈명!"

경악의 외침을 터뜨린 그는 심신이 어지럽고 진력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그러자 그의 몸이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이때를 노려 서문유는 급히 채찍을 잡아당겨 쇠지팡이에 감긴 것을 끌어냈다. 제갈강은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며 이 장 밖으로 사뿐히 내려섰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공포의 빛을 띤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때, 누각 위에서 한 중년인이 서서히 걸어나왔다.

그 사람의 옷은 매우 남루했으며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처럼 헝클어져 더할 수 없이 초라하였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신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제갈강은 자신도 모르게 쇠지팡이를 바싹 움켜쥐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납덩이처럼 하얗게 변했다.

"초탐화!"

중년인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송구스럽소이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골목 안 객점에서 일 년 동안이나 숨었던 술주정뱅이 초류빈이었다.

제갈강은 엉겁결에 뒤로 주춤 물러나면서 소리쳤다.

"우리는 당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거늘 어째서 우리를 적대시하는 것이오?"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평생을 지내오면서 남과 적대시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오. ?그리고 또한 남이 나를 적대시하는 것은 더욱 싫어하는 성미요."

초류빈은 수중의 칼을 매만지면서 계속 말했다.

"이곳에는 여러분의 마음을 자극하는 보물이 없으니 속히 떠나시오! 그리고 매우 미안한 말씀이지만 돌아가실 땐 가지고 왔던 예물들을 다시 찾아 가지고 가시오."

제갈강, 상관비, 고행공 등은 그의 수중에 들려 있는 예리한 칼을 바라보면서 마치 목에 무엇이 걸린 듯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연쌍비가 버럭 소리질렀다.

"우리가 가지 않겠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초류빈은 시종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귀하에게 정중히 권하겠지만 이대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연쌍비는 대노하여 대갈일성하였다.

"초류빈, 너무 기고만장하지 마라! 나는 벌써부터 너와 고하를 가려 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너를 두려워할지 몰라도 나 연쌍비는 너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 그는 장삼을 벗어 두 줄의 가죽띠를 나타내 보였다. 가죽띠에는 빙 둘러 가며 붉은 색의 표창이 가지런히 꽂혀져 있었으며 반짝거리는 예리한 날은 마치 맹수의 이빨과도 같았다.

하나 초류빈의 입가에는 담담한 미소만 흐르고 있을 뿐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번개같이 손을 휘둘러 연쌍비는 느닷없이 폭갈을 터뜨리며 아홉 개의 표창을 격출시켰다.

쌍! 쌍!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아홉 개의 표창은 초류빈의 전신을 꿰뚫을 듯이 격사해 갔으나 보이지 않는 강철 벽에 부딪힌 것처럼 갑자기 우루루 땅에 모두 떨어졌다.

그리고 연쌍비는 목에 반짝이는 칼이 꽂힌 채 쓰러져 있었다.

비도탈명!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다.

그의 비도가 언제 연쌍비의 목에 꽂혔는지 분명하게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결과로 보아 연쌍비가 두 손을 휘두르는 순간에 맞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쌍비가 미처 표창을 다 날리기도 전에 초류빈의 비도는 이미 그의 목을 여지없이 관통시켰으며 그로 인해 연쌍비의 표창은 초류빈의 몸에 채 닿기도 전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연쌍비의 두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의 빛을 띤 채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불거져 나왔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이 세상에서 자신의 표창보다 더 빠른 비도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죽는 이 시간에도 역시 자신보다 더 빠른 자가 있었던 것에 대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흑의인은 고개를 숙여 연쌍비의 시체를 보더니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아까 뭐라고 했소. 이제야 내 말을 믿겠소?"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초류빈을 바라보며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비도탈명,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구려!"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며 흑의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귀하께선....."

흑의인은 그의 말을 가로채면서 서서히 말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초탐화라는 이름을 듣고 존경해 왔었소. 오늘 이렇게 만났으니 보잘것 없지만 한 가지 선물을 드리겠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장검은 검신까지 검은 빛을 띠고 있었으며 아무런 특징도 발견할 수 없었으나 검이 검집에서 뽑혀지는 순간 싸늘한 검기가 주위에 퍼졌다.

고행공이 섬뜩해 하는 찰나 흑의인의 검은 이미 소리없이 엄습해와 그의 눈을 정확하게 찔렀다. 그는 막 눈을 감는 순간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제갈강이 이 광경을 발견했을 때 고행공의 눈에선 선혈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고행공은 손을 써서 막아 내지도 못했으며 또한 피하지도 못했다. 제갈강은 고행공의 공력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행공이 이 흑의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고행공이 어째서 방어는커녕 피하지도 않았는지에 대해선 도저히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뼈를 깎는 듯한 한기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고 외마디 고함을 발한 것과 동시에 철괴를 휘둘렀다.

그는 횡소천군이라는 별호를 지니고 있으며 횡소천군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이 일초는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휭!

광풍노도와 같은 거센 바람이 일면서 철괴는 흑의인의 머리를 박살낼 듯이 강타해 갔다.

흑의인은 장검을 휘둘러 응수했다.

창!

청아한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예순세 근이나 되는 금강 철괴는 이미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제갈강은 안면에 한기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자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털끝만큼의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서문유가 별안간 장탄식을 하면서 혼자 중얼거렷다.

"보아하니 당금 강호에서 이 서문유가 발디딜 곳은 없나 보군....."

그리고는 즉시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몸을 날리자 상관비도 몸을 날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싸늘한 검기가 엄습해 갔다. 상관비는 외마디 기합을 지르며 수중의 자모용봉환을 격출했다.

창! 창!

청아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는 동시에 두 개의 용봉환이 흑의인의 장검 가운데 달라붙었다.

흑의인은 가볍게 소리쳤다.

"대단하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장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순간 용봉환이 여지없이 두 조각이 나고 장검은 이미 상관비의 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상관비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두 눈을 서서히 감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너무도 차가워 두려움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흑의인은 그러한 상관비를 무섭게 쏘아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네가 상관금홍의 아들이냐."

상관비는 냉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흑의인은 약간 안색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나의 이 검에서 살아난 자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너 같은 젊은 나이에 나의 일검을 막아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목을 겨냥하고 있던 검으로 상관비의 어깨를 가볍게 치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오늘은 너를 놓아 주마!"

상관비는 천천히 두 눈을 뜨면서 제자리에 선 채 냉혹하게 말했다.

"비록 당신이 나를 살려 주었지만 내 당신에게 분명히 말할 게 있소."

흑의인은 소리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든지 해 봐라!"

상관비는 시종 차가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당신이 나를 놓아 주었지만 훗날 반드시 당신에게 복수할 것이오. 그때 가서 내가 당신의 사정을 보아 주지는 않을 것이오."

흑의인은 느닷없이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좋다! 과연 상관금홍의 아들답구나."

말을 마친 그는 웃음을 뚝 멈추더니 예리한 눈초리로 상관비를 노려보면서 다시 말했다.

"훗날 네가 나를 죽일 수만 있다면 내 비단 너를 원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랑으로 여길 것이다. 내가 필경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상관비의 안색은 털끝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생 이만 물러가겠소."

흑의인은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대꾸했다.

"잘해 보아라. 언제든지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상관비는 형식적으로 공수의 예를 취한 후 몸을 돌렸다.

이때 흑의인이 별안간 소리쳤다.

"잠깐만!"

상관비는 걸음을 멈추었으나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또 무슨 할 말이 남았소?"

흑의인은 싸늘한 표정으로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너는 이것을 똑똑히 기억해 둬라! 오늘 내가 너를 놓아 주는 것은 네가 상관금홍의 자식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너 자신을 생각해서 놓아 준 것이다."

상관비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서서히 걸음을 옮겨 떠났다.

흑의인은 상관비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초류빈과 마주 섰다. 그리고는 장검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구의 시체를 가리키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이것은 초탐화를 만난 선물 대신해서 나의 조그마한 성의를 표시하는 바이오!"

초류빈은 흑의인의 수중에 있는 검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均錚?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숭양철검(崇陽鐵劍)?"

흑의인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바로 곽숭양(郭崇陽)이오!"

초류빈은 장탄식을 터뜨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과연 숭양철검도 소문대로군!"

곽숭양은 자기의 수중에 있는 철검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이 숭양철검이 당신의 비도탈명과 비교해서 어느 것이 나을지 모르겠구려!"

초류빈은 흥미가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것을 별로 알고 싶지 않소!"

곽숭양은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무엇 때문이오?"

초류빈은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당신이나 나나 이 궁금증을 풀려고 한다면 모두 후회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오!"

곽숭양은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한 해답을 들어야 할 것이오! 안 그렇 소?"

초류빈은 땅이 꺼져라 탄식을 터뜨리면서 말을 받았다.

"나는 될 수 있으면 그 시기가 늦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바이오....."

곽숭양은 흥분한 기색으로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나는 그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하오!"

이에 초류빈은 곽숭양을 지그시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무엇이오?"

곽숭양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우리가 고하를 가리지 않으면 나는 한시도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오!"

초류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것이 언제였으면 좋겠소?"

곽숭양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말을 받았다.

"바로 지금이오!"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마치 남의 일같이 말했다.

"이곳에서?"

곽숭양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냉랭하게 웃었다.

"이곳은 바로 당신의 옛 집이오. 내가 당신과 이곳에서 싸운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지리적인 이점을 안겨다 주는 것이 될 것이오!"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소! 귀하는 과연 절정의 고수라 할 수 있소."

곽숭양은 미미하게 웃으며 조급한 기색으로 말했다.

"시간은 내가 정했으니 장소는 당신이 지정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오."

초류빈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잘라 말했다.

"그렇지 않소!"

초류빈이 거절하자 곽숭양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시오."

초류빈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좋소! 앞장서시오."

초류빈은 이렇게 대답한 후 몇 걸음 걸어가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누각 위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호천강이 원한이 가득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곽숭양의 철검이 제아무리 절묘하고 제갈강의 죽음이 더할 수 없이 비참해도 이 어린 소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초류빈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즉시 웃음을 띠면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초아저씨! 그동안 어르신네께선 안녕하셨습니까?"

초류빈은 내심 우울했으나 내색을 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너도 잘 있었느냐?"

호천강은 약간 멈칫하더니 이내 분명하게 말했다.

"가모께선 한시도 어르신네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어르신네께선 가끔 오셨어야 했습니다."

초류빈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어린 소년의 말은 때때로 초류빈을 매우 곤란하게 할 때가 있었다.

호천강은 눈알을 한 번 굴리더니 별안간 초류빈의 옷자락을 잡아 끌면서 나직하고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저 사람은 흉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저씨께선 제발 따라가지 마십시오!"

초류빈은 고소를 지으면서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네가 성장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은 자기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상황에 따라선 꼭 해야 할 일들이 많은 법이다."

호천강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하지만...하지만 만약 아저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누가 우리 모자를 보호해 준단 말입니까?"

초류빈은 그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 틈엔가 설벽운이 누각 위에 서서 초류빈과 자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엔 말로 다할 수 없는 원망과 고뇌의 빛이 가득차 있었으나 한편으론 위안의 빛도 어려 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이 초류빈과 화해를 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친밀한 것을 보자 내심 더할 수 없이 기뻤던 것이다.

일순, 초류빈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급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자 호천강이 설벽운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어머니!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세요. 초아저씨께선 오시자마자 다시 떠나려고 하십니다."

설벽운은 매우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얘야! 그분께선 하시는 일이 많으므로 꼭 가셔야 하느니라."

호천강은 애석하다는 듯이 발을 구르며 말했다.

"어머님! 어머님께선 아저씨께 드릴 말씀이 겨우 그것밖에 없단 말입니까?"

설벽운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음성이 떨리기까지 했다.

"무슨 말이든 그분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 말씀드려도 늦지는 않다."

호천강은 두 눈을 깜박이며 힘없이 말했다.

"제가 보기엔...아저씨께서 이번에 가시면 다시는 돌아오시지 못하실 것입니다."

설벽운은 금방 쓰러질 듯이 몸을 휘청하더니 나무라는 어조로 소리쳤다.

"닥쳐라! 어서 올라오너라. 아저씨께선 속히 떠나셔야 한다."

호천강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초류빈의 옷자락을 서서히 놓아 주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저씨께선 어서 가 보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저희 모자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모자는 이제 습관이 되어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더니 눈물을 닦는 것인지 아니면 눈에 티가 들어갔는지 손으로 눈을 비볐다. 이때 곽숭양은 이미 다리 위로 올라가서 팔짱을 ` 끼고 이쪽을 냉혹한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초류빈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천 근이나 되는 듯 무거운 발길을 서서히 옮겼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없이 천 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 시간에 그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그는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며 감히 설벽운을 쳐다볼 생각도 못했다.

초류빈이 점점 멀어져 가자 호천강이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멀건히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엔 원한의 빛이 이글거리고 입가에는 악독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당신의 심정이 견디기 어렵도록 고통스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나는 바로 당신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이러는 것이오. 지금과 같은 심정으로 곽숭양과 같은 고수와 대결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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