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40 소이비도 제3권 이중 미행
이중 미행
몹시 번화한 거리다. 마치 북경(北京)의 천교(天橋)와 같이 이곳에선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아직 정오도 채 되지 않았지만 거리 양쪽엔 이미 가지각색의 장사치들이 진을 치고 가지각색의 물건을 진열해 놓고 가지각색의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 오자 설영령의 눈은 유난히 커졌다. 그녀는 생전 이렇게 즐거워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역시 어린애였다. 초류빈이 자기를 데리고 거리 구경을 하러 나오리라곤 그녀도 실로 생각지 못했다.
'알고 보니 이 사람도 어린애 같은 데가 있군.'
이것은 설영령의 생각이었다.
초류빈의 손에 쥐어져 있는 곶감을 보자 그녀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손에도 여러 가지 먹을 것이 들려져 있었다. 이럴 때 그녀는 손이 두 개밖에 없는 게 한이었다. 여자애는 아무리 많은 물건을 얻어도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초류빈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 주었다. 사실 초류빈이 곶감을 사먹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론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 당시 그는 고뇌가 무엇인지 평정이 무엇인지도 몰랐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 그는 줄곧 한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그의 앞에서 걷고 있었다. 몸엔 누더기를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질질 끌며 머리엔 낡은 털모자를 눌러쓴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고개을 숙인 채 길을 걷고 있었다. 비록 허리를 구부리고 목을 움츠린 채 걷고 있지만 어깨만은 굉장히 넓었다. 만약 그가 허리를 편다면 아마 필시 우람한 사나이로 변모할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사람은 별로 독특한 데가 없었다. 기껏해야 뜻을 상실한 강호객(江湖客)이든가 아니면 거렁뱅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초류빈은 그를 발견하는 즉시 한 동작도 놓치지 않고 유심히 관찰했다. 그가 어딜 가든 초류빈은 줄곧 뒤를 미행했다. 그래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기도 했다. 이상한 것은 그 사람을 미행하는 자는 초류빈뿐만이 아니었다.
초류빈은 원래 앞으로 달려가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으나 홀연 또 한 사람이 그의 뒤를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 사람은 깡마르고 키가 헌칠하며 걸음걸이가 가벼웠다. 비록 차림새는 아주 평범했지만 눈동자를 굴릴 때마다 섬광이 번뜩였다.
초류빈은 첫눈에 그가 예사스러운 인물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그는 별로 초류빈을 유의하지 않았다. 그는 온 정신을 앞서가는 거렁뱅이에게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거렁뱅이가 빨리 걸으면 걸음을 빨리하고, 거렁뱅이가 걸음을 멈추면 그도 즉시 걸음을 멈추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거나 태연하게 신발을 만지작거렸다. 하나, 그의 눈은 잠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미행을 하는데 경험이 풍부한 사람 같았다. 그러한 사람이 무엇 때문에 일개 거렁뱅이를 미행하는 것일까? 초류빈은 마음을 침착하게 먹고 끝까지 지켜보기로 작정했다.
그럼 초류빈은 또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일까? 그는 앞서 가는 거렁뱅이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거렁뱅이는 뒤에서 자기를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계속 허리를 구부린 채 천천히 걸으며 한 번도 고개를 돌리는 적이 없었다.
도중에서 그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돈을 받고, 돈을 주는 사람이 없으면 구걸을 하지도 않았다.
설영령은 까만 눈동자를 연신 굴리다가 홀연 초류빈의 소매를 잡아끌며 나직이 말했다.
"우린 저 거렁뱅이를 미행하고 있나요?"
정말 여우같은 계집이다. 초류빈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니 너도 큰소리로 떠들면 안 된다."
"그는 뭐하는 사람이기에 당신이 그를 미행하죠?"
"그것은 네가 알 필요가 없다."
"만약 가르쳐 주지 않으면 큰소리로 외치겠어요."
초류빈은 이 깜찍한 계집애한테는 별도리가 없는 듯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나와 오래 전에 헤어졌던 친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설영령은 더욱 이상하게 생각되었는지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의 친구라뇨? 그럼 개방의 제자인가요?"
초류빈은 귀찮았지만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비위를 건드리면 무슨 철부지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니다."
그 대답은 물론 그녀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그럼 누구죠?"
"내가 그의 이름을 밝혀도 너는 전혀 모를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자도 역시 그를 미행하고 있는데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제법 보는 눈이 예리하구나."
"저 사람은 또한 누구죠? 역시 당신의 친구인가요?"
"아니다."
설영령은 그 대답을 듣자 다시 눈동자를 사르르 굴리며 자기 나롬대로 추측을 했다.
"친구가 아니라면 그럼 원수겠네요?"
초류빈은 계속 모른다고만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왜 당신의 친구에게 알리지 않죠?"
초류빈은 속으로 생각을 굴리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친구는 워낙 성격이 괴팍해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는....."
설영령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이때 그녀의 눈은 한 곳에 고정된 채 휘둥그레져 있었다.
지금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은 굉장히 길어 한참 걸었는 데도 겨우 절반밖에 오지 못했다. 그 거렁뱅이는 마침 만두를 파는 가게 앞까지 걸어갔다.
만두가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술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몇몇 사람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관상을 보는 장님도 끼여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 처마 밑에는 청색옷을 입은 사나이가 서 있었다. 이때 두부장수가 지게를 지고 앞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외에는 몸집이 큰 부인이 줄곧 잡화 앞에서 바늘을 고르고 있다가 이때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 때야 이 부인이 외눈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렁뱅이는 이미 잡화상 앞까지 걸어갔다.
순간, 술장수가 손에 쥐고 있던 닭다리를 내려놓았다. 술을 마시던 장님도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처마 밑에 있던 청의대한이 돌연 앞으로 뒤쳐오는 것과 동시에 외눈박이 부인이 날렵하게 몸을 돌렸다.
게다가 줄곧 거렁뱅이의 뒤를 미행하던 깡마른 사나이까지 합쳐 몇몇 사람이 일제히 사면팔방에서 거렁뱅이를 향해 포위해 갔다. 그 두부장수는 지게를 가로내려 놓아 마침 거렁뱅이의 앞길을 막아주었다. 주위엔 물론 사람이 많았지만 이들 몇몇 사람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설영령마저도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눈이 휘둥그레졌으니 초류빈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이 벌써 안색이 변했다. 그는 처음 거렁뱅이를 발견할 때부터 철전갑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더욱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경거망동을 하지 않았다.
상대방은 철전갑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이번 살수는 필시 사전에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초류빈이 섣불리 나선다면 그들은 모든 것을 젖혀 놓고 우선 철전갑을 죽이고 볼 것이다.
초류빈은 설사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철전갑이 어떠한 손상을 입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평생 동안 단지 몇몇 사람에게 신세를 졌다. 철전갑은 바로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절대 철전갑이란 친구를 잃을 수 없었다. 바로 그 찰나적인 순간에 몇몇 사람이 재빠르게 거렁뱅이를 가운데 두고 포위했다.
어울러 싸늘한 광채가 번뜩이는 가운데 세 자루의 예리한 날이 거렁뱅이의 가슴과 등을 겨냥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어떻게 된 일임을 깨닫고 분분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아무도 이런 강호의 원한사건에 휘말려 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먼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 소리 말고 순순히 우리들을 따라와라. 알겠느냐?"
그 청색옷을 입은 사나이도 이를 부드득 갈며 싸늘하게 외쳤다.
"순순히 우리들의 말에 복종하면 좀더 오래 살 수 있지만 만약 서투른 행동을 한다면 당장 네놈을 없애 버리겠다!"
거렁뱅이는 반응이 몹시 우둔한 듯 지금에서야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외눈박이 부인은 세차게 그의 등을 밀며 호통을 쳤다.
"어서 가지 않고 뭘 꾸물대느냐?"
그녀가 거렁뱅이를 밀지 않았다면 별문제겠지만 미는 바람에 몇몇 사람의 표정이 굳어지며 입이 딱 벌어졌다. 거렁뱅이를 밀치는 바람에 깊이 눌러쓰고 있던 모자가 떨어지면서 얼굴이 드러난 것이다.
마치 중병을 앓다가 갓 완쾌한 듯 누르스름한 안색에 주독이 오른 듯한 빨간코, 입을 헤벌쭉 벌리고 주위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철전갑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좀 부족한 백치였다. 초류빈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외눈박이 부인은 화가 치밀어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앙칼지게 외쳤다.
"아니...이게...이게...어떻게 된 일이죠?"
물론 거렁뱅이의 뒤를 미행해 오던 깡마른 사나이도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분명히 철전갑인데...나는 한시도 그를 놓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어째서....."
청색옷을 입은 사나이는 분해서 땅을 걷어차며 다짜고짜 거렁뱅이의 뺨을 후려쳤다.
"너는 누구냐? 대관절 누구란 말이냐?"
그의 음성은 성난 야수의 울부짖음 같았다.
거렁뱅이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여전히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나는 나고 너는 넌데 왜 때리느냐?"
이번엔 술을 팔던 사나이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칠전갑이 위장한 것인지도 모르니 우선 그의 얼굴 껍질을 벗겨 보도록 합시다!"
그러나 장님이 홀연 냉랭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럴 필요는 없네. 그는 절대 철전갑이 아닐세."
단지 그의 안색만이 여전히 얼음장같이 차갑게 굳어 있어 동요되지 않았다.
청의대한은 즉시 반문을 했다.
"형님은 그의 음성으로 자신있게 판단을 할 수 있습니까?"
장님의 음성은 여전히 차가왔다.
"철전갑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에게 뺨을 맞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는 눈가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더니 말을 계속했다.
"다섯째, 자네가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깡마른 사나이의 안색은 연신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이 사람은 필시 칠전갑과 내통해 내 눈을 속인 겁니다."
외눈박이 부인이 성난 음성으로 다그쳤다.
"줄곧 철가놈의 뒤를 따랐다는데 어떻게 해서 놓쳤단 말이에요?"
깡마른 사나이는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말했다.
"아마 뒷간에 들어갔을 때...나는 그곳까지 따라 들어갈 수 없어서....."
청의대한이 대뜸 우악스럽게 외쳤다
"알고 보니 네놈은 철가 녀석과 한패였군. 우선 네놈부터 없애 주겠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편담(扁擔)을 들어올려 거렁뱅이의 머리를 향해 후려쳐 버렸다. 편담이라 함은 두부통을 양쪽에 매달아 놓아 어깨에 짊어지는 납작하고 긴 막대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초류빈은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렁뱅이가 정말 백치든 아니면 철전갑의 친구이든 철전갑이 그의 도움을 받은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초류빈은 그가 맞아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철전갑의 소식을 알아내려면 그 자에게서 단서를 얻어야 했다. 초류빈의 몸은 바람같이 미끄러져 나갔다. 그러나 막 한 걸음을 내딛자 이내 다시 몸을 거두었다.
그의 몸놀림은 워낙 빨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그가 움직였던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이미 출수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다시 몸을 거둔 것이다.
뚝!
하는 소리가 들리며 내리친 편담이 허공에서 두 동강이로 부러졌다. 청의대한은 중심을 잃고 하마터면 땅에 쓰러질 뻔했다. 무엇이 날아와 편담을 부러뜨렸는지 아무도 똑똑히 보지 못했다.
모든 사람은 안색이 급변하여 분분히 뒤로 한걸음씩 물러나며 냉랭하게 외쳤다.
"일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냐?"
그러자 처마 밑에서 한 사람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 사람이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처마 밑에 서 있는 자는 일신에 흰 옷을 입고 뒷짐을 진 채 처마 끝에 대롱대롱 걸려 있는 새장을 감상하고 있었다. 새장들 속의 새가 한가롭게 지저귀고 있었다.
이 백의인은 사람들보다 새에 대해 많은 흥미를 갖고 있는 듯 주위에 있는 강호객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눈가엔 가느다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검미에 햇살같이 빛나는 눈동자, 백등같이 희디흰 안색은 멀리서 보아도 조금도 험잡을 데 없는 영준비범한 귀공자였다.
청의대한은 대뜸 그를 향해 포악스럽게 외쳤다.
"나의 편담을 부러뜨린 게 바로 네녀석이냐?"
백의인은 이번에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청의대한, 외눈박이 부인이 거의 동시에 노갈일성을 지르며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장님의 나직하면저도 신중한 외침이 들렸다.
"잠깐만!"
이렇게 한 마디를 내던진 그는 땅에서 은자(銀子) 한 조각을 주워 냉랭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 사람은 비록 자네의 편담을 부러뜨렸지만 이 은자로써 편담 백 개를 사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 망정 무례한 짓을 하다니....."
청의대한은 수중에 쥔 절반밖에 남지 않은 편담과 장님이 쥐고 있는 은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곱상하게 생긴 백의인이 작은 은자로써 자기 편담을 부러뜨렸으리라곤 도저히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백의인은 홀연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앞 못 보는 소경이 다른 사람보다도 눈이 밝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오. 그 은자를 당신에게 드리겠소."
장님은 신색 하나 변함이 없이 냉랭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노부는 비록 눈이 멀었지만 마음까지 멀지는 않았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손에 쥔 은자를 송편 빚듯 주물럭거리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일전(一錢)의 은자면 충분히 편담을 살 수 있소. 그런데 이 은자는 넉히 십 냥은 될 것이니 너무 많은 것 같소."
그는 한편으로는 말을 하며 한편으로는 수중에 있는 은자를 가느다란 은봉(銀棒)으로 만들어 왼손으로 줄부분을 살짝 떼어 버리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이 일전의 은자는 노부가 고맙게 받겠지만 나머지는 돌려 드리겠소!"
그 말이 끝나는 즉시 은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한 자 남짓한 은봉이 예리한 바람소리를 내면서 백의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가 전개한 것은 무당파 양의검법(兩儀劍法) 중의 한 절초(絶招)였다. 은광이 허공을 수놓는 것과 함께 백의인의 가슴 앞 다섯 군데 혈도가 완전히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백의인은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그는 은봉이 눈빛까지 뻗쳐올 때서야 돌연 식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뻗어 은봉을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검법은 훌륭하지만 너무 느린 것이 흠이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수중에 있는 은봉을 두 손가락으로 마치 가위질을 하듯 열두 토막을 내버렸다.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설영령은 눈을 토끼마냥 둥그렇게 치뜨고 나직이 말했다.
"저 사람의 손가락은 살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요?"
주위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장님이 은자를 가느다란 은봉으로 만드는 것을 보고서도 이미 놀란 나머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는데 지금 백의인의 솜씨를 보자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편 외눈박이 부인 등도 독사한테 물린 듯 일순 표정이 굳어졌다. 장님도 역시 은자 토막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백의인은 뒷짐을 지며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한 번 남에게 준 물건은 되돌려 받지 않소. 그러니 어서 주워 가시오."
장님은 앞으로 걸어와 땅에 떨어진 은자 토막을 하나하나 주워들고 아무 말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청의대한, 외눈박이 부인 등도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설영령은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처음의 그 위풍당당하던 기세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마치 꼬리를 감추고 도망가는 초상집 개 같군요."
초류빈은 생각을 굴리며 앞쪽에 있는 만두가게를 가리켰다.
"저기 만두를 파는 작은 가게가 보이느냐?"
설영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긋이 웃었다.
"어디 보일 뿐인가요? 벌써부터 만두가 먹고 싶었어요."
"그럼 마침 잘 되었다. 너는 저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거라."
그 말에 설영령은 멍해졌다.
"당신은 저 거렁뱅이의 뒤를 계속 쫓아갈 작정인가요?"
이때 거렁뱅이는 몸을 일으켜 다시 히죽히죽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백의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자기와 하등의 관계도 없다는 태도였다.
초류빈은 설영령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설영령은 울상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저도 함께 가면 안 되나요?"
초류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절대 안 된다."
설영령은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저를 떨쳐 버릴 생각이죠?"
초류빈은 한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도 만두가 먹고 싶은데 어찌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니?"
그제야 설영령은 입술을 깨물며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좋아요. 당신을 믿겠어요. 만약 저를 속인다면 저는 평생토록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그녀의 말투는 다분히 위협적인 냄새가 풍겼다.
거렁뱅이의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이 길은 원체 사람이 많기 때문에 초류빈은 성급하게 그를 불러 세울 생각은 없었다.
사람이 많은 데서는 대화를 나누기가 불편하다. 더욱이 백의인이 줄곧 그를 주시하고 있지 않은가.
백의인은 홀연 취미를 바꾸어 새보다는 사람에게 흥미를 느낀 모양이다. 초류빈도 백의인을 자세히 관찰하고 싶었다. 조금 전에 그가 전개한 솜씨는 실로 초류빈의 흥취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무림에 그 같은 고수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초류빈은 이 세상에서 그런 지력을 지닌 자가 누구인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영령이 그를 형용한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
'저 사람의 손은 살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요?'
무공을 연마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백의인같이 비범한 솜씨를 지닌 자에겐 흥미를 느끼기 마련이다. 친구로 사귀고 싶다든가 아니면 한번 겨루어 보고 싶은 충동을 자연히 느끼는 것이다. 평상시였더라면 초류빈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데, 그에겐 지금 그럴 만한 심적인 여유가 없었다. 오래 전부터 찾아오던 철전갑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는 이번 기회를 그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백의인은 그의 앞길을 가로막으려는 듯 성큼성큼 그를 향해 걸어왔다. 다행하게도 흩어졌던 군중들이 백의인의 풍채를 좀더 가까운 곳에서 보기 위해 다시 몰려왔다.
초류빈은 그 틈을 타서 미꾸라지처럼 앞으로 빠져나갔다. 그때 거렁뱅이는 길 끝쪽에서 막 왼쪽으로 돌려는 순간이었다. 왼쪽 길은 사람도 적게 왕래하고 그다지 길지도 않았다.
초류빈은 성큼성큼 앞으로 쫓아갔다. 그리고는 황급히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으나 거렁뱅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늘로 솟은 것일까? 땅 속으로 꺼진 것일까? 초류빈은 길게 숨을 내쉬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이 길은 양쪽이 거의 인가의 뒷문이었다. 앞에 보이는 뒷문 구석진 곳에 한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손에 무엇을 쥐고 있는지 연신 자기의 옷에 문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초류빈은 그 사람을 확인도 하기 전에 먼저 그 낡은 털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알고보니 거렁뱅이는 이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초류빈은 그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그 거렁뱅이는 역시 깜짝 놀라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얼른 등뒤로 감추었다.
하지만 초류빈의 눈은 그의 손보다 훨씬 빨랐다. 그가 쥐고 있는 것은 토막난 작은 은자였다. 아마 백의인이 은봉을 여러 토막낼 때 몰래 주운 모양이다.
초류빈은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친구, 나한테 이름을 밝혀 줄 수 있겠소?"
거렁뱅이는 대뜸 눈을 부라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네 친구가 아니야, 너도 내 친구가 아니야....."
초류빈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당신에게 한 사람에 관해 묻고 싶소. 당신은 분명히 그 사람을 알 것이오."
거렁뱅이는 계속 고개를 내둘렀다.
"나는 아무도 몰라. 그리고 날 아는 사람도 없어. 나는 한 사람도 모르고 한 사람도 나를 아는 자가 없어."
이 사람은 과연 어디가 부족한 듯했다. 간단한 한마디를 그는 거듭 몇 번을 반복했다. 또한 입에 자갈을 문 듯 어조가 분명치 않았다. 초류빈은 다른 방면으로 그에게 질문을 하려 했으나 그는 이미 초류빈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 잽싸게 앞으로 도망갔다.
그의 뛰어가는 속도는 빨랐지만 절대 경공기초가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거렁뱅이라면 거의 걸음이 빨랐다. 이미 생활 수단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초류빈은 물론 그보다 훨씬 빨랐다.
그 거렁뱅이는 도망가면서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왜 이래? 내 은자를 빼앗으려는 거지?"
초류빈은 빙긋이 웃으며 홀연 손을 내밀어 뜻밖에도 그의 손에서 은자를 빼앗았다. 그러자 거렁뱅이는 큰소리로 외쳤다.
"강도다! 은자를 빼앗는 강도다!"
다행스럽게도 이 길은 한적해 행인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 거렁뱅이의 은자를 빼앗았으니 영락없이 강도 중에서도 팔류(八流) 강도로 오인될 뻔했다.
거렁뱅이는 더욱 목청이 터져라 하고 외쳐댔다.
"어서 은자를 내 놔. 그렇지 않으면 너와 생사결단을 짓겠다!"
초류빈은 그를 주시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을 해 준다면 이 은자를 돌려 주고 또 한아름의 은자를 주겠소."
거렁뱅이는 눈을 깜박거리며 한참 생각을 굴리다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서 물어봐."
초류빈은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물었다.
"철전갑은 당신의 친구가 아니오?"
거렁뱅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에겐 친구가 없어. 거지에게 친구가 있다는 것을 본 적이 있나?"
초류빈의 질문이 줄을 이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를 도와주었소?"
거렁뱅이는 더욱 세차게 고개를 내둘렀다.
"나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 그리고 아무도 나를 도와준 사람이 없어."
초류빈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오늘 몸집이 크고 피부색이 검은 텁석부리 사나이를 본 일이 있소?"
거렁뱅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그런 사람을 본 것 같아."
그 말을 듣자 초류빈의 눈빛이 이내 빛났다.
"어디에서 그를 보았소?"
거렁뱅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작은집에서 보았지."
초류빈은 멍해지며 즉시 반문했다.
"작은집이라면....."
거렁뱅이는 헤벌쭉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작은집은 바로 똥을 싸는 데지. 내가 똥을 싸고 있는데 그 녀석이 갑자기 뛰쳐 들어와서 나한테 술값을 벌고 싶으냐고 묻지 않겠어?"
초류빈은 손으로 턱을 괴며 빙긋이 웃었다.
"술값을 번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지."
거렁뱅이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스스로 말을 이어갔다.
"한데, 그 녀석은 나보다도 낡은 옷을 입어 전혀 술값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 않았어."
초류빈은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었다.
"돈 있는 사람일수록 남루한 차림을 하기 좋아하오. 그러한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군."
거렁뱅이는 히죽히죽 웃었다.
"맞아, 그 말이 틀림없어. 그 녀석은 과연 은자를 꺼내 나에게 주었어. 그래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지만 은자를 벌 수 있느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가 뭐라고 했소?"
"나는 그가 이상한 짓을 요구하는 줄 알았더니 그냥 자기와 옷을 바꿔 입고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가 계속 고개를 들지 말고 걸으라는 거야."
초류빈의 얼굴에 드물게 웃음이 활짝 폈다.
"정말 간단하게 은자를 벌었구려."
그는 이렇게 유쾌하게 웃어본 적이 드물었다. 철전갑 같은 사람도 이젠 이런 묘책을 쓰는 요령을 터득했으니 초류빈으로서는 더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거렁뱅이는 길게 흘러나온 콧물을 더러운 손등으로 쓱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서 난 그 녀석을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어."
초류빈은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나도 역시 미친 사람이오. 내 은자는 그의 은자보다 더 벌기 쉽소."
거렁뱅이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정말이야?"
초류빈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은자를 전부 꺼냈다. 상당한 액수였다. 거렁뱅이는 그의 손에 있는 은자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류빈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나를 그 텁석부리에게 데려다 준다면 이 모든 은자를 전부 드리겠소."
거렁뱅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당장 데리고 가겠어. 하지만 은자를 먼저 나한테 줘야 돼."
초류빈은 즉시 두 손에 든 은자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거렁뱅이는 침까지 질질 흘려 가면서 빼앗듯이 은자를 집어 연신 품안으로 집어넣었다.
"이렇게 많은 은자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보니 필경 어디서 훔쳐 온 것이군."
그는 은자를 집으면서 자연히 초류빈의 손을 건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손가락이 초류빈의 손에 닿자 홀연 갈퀴처럼 구부러졌다. 순간, 초류빈은 갑자기 손목이 잘라져 나간 듯 감각을 잃고 생각을 굴릴 여지도 없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 거렁뱅이의 출수는 비단 놀랄 정도로 빠를 뿐 아니라 손가락을 구부리고 살짝 젖히는 두 동작에 당대 무림의 네 가지 가공(可恐)할 무공이 포함돼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막 초류빈의 손에 닿았을 때 이미 정통내력(正統內力)인 점의십팔질(點衣十八秩)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라 해도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생각은 아예 할 수 없었다.
이어 그가 전개한 것은 무당파의 칠십이로금나수(七十二路金羅手)로써 여지없이 초류빈의 맥문(脈門)을 낚아 잡은 것이다. 어느 누구라 해도 일단 그 수법에 맥문이 잡히면 진력을 사용할 망상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분근착골(分筋錯骨) 수법으로써 초류빈의 손목을 탈골시켰다. 나중에 그가 살짝 손을 젖히면서 초류빈을 쓰러뜨린 수법은 새외솔질인데 한 번 쓰러진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 없었다. 이 네 가지 수법에는 소림(小林)의 정통무학도 있고 무당의 진전(眞傳)도 있었으며 내공과 외공도 곁들여 있었다.
한데 어느 한 가지도 쉽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설사 배울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터득하기가 어렵고 설령 터득을 한다 해도 최소한 십 년은 피땀어린 고된 훈련을 쌓아야만 가능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거렁뱅이는 네 가지 수법을 전부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로 터득했다.
초류빈은 필시 상대방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이미 알았다 해도 그가 이런 고수라고는 절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설령 이런 고수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자기를 암습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초류빈은 여지껏 살아오면서 아직 이렇게 놀란 적은 없었다.
초류빈은 공판장의 보릿자루처럼 땅에 내팽개쳐져 눈에서 불꽃이 튕기며 거의 기절할 듯한 상태였다. 그가 차츰 정신을 차렸을 때 그 거렁뱅이는 바로 그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나를 암습한 것일까? 그는 벌써 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는 철전갑과 또한 무슨 관계가 있을까?'
초류빈은 비록 의문이 많았으나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이런 상황하에서는 역시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것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거렁뱅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아무 말도 묻지 않소?"
그의 말투는 다소 변했지만 여전히 장난기가 농후했다.
초류빈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한다면 귀하는 이런 상황에서 입을 열 수 있겠소?"
거렁뱅이는 약간 멍해지더니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만약 내가 당신의 입장이 되었다면 우선 욕설부터 내뱉었을 것이오."
초류빈은 정신을 가다듬고 퉁명스레 말했다.
"눈을 말짱하게 뜨고서도 귀하게 절세의 무공을 지닌 고수라는 사실을 진작 알아보지 못했으니 욕을 하더라도 나 자신에게 하는 게 옳을 것이오."
거렁뱅이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당신은 과연 괴팍한 사람이군. 당신 같은 괴인은 내 난생 처음이오. 당신이 두 마디만 더 한다면 내 얼굴은 분명히 붉어질 것이오."
여기까지 말한 거렁뱅이는 돌연 음성을 높여 외쳤다.
"이 사람은 비단 군자일 뿐 아니라 세상에서 둘도 찾아볼 수 없는 초인이다. 난 실상 이런 사람에게는 약하니 너희들이 계속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난 이대로 떠나겠다!"
알고 보니 그에겐 또 패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초류빈은 그의 패거리가 누구인지 전혀 추측할 수 없어 호기심마저 생겼다. 그때, 삐그덕 하는 소리가 들리며 바로 길 옆에 있는 작은 문이 열리더니 연이어 대여섯 명이 나왔다.
새로 나타난 대여섯 명을 보는 순간 초류빈은 비로소 정말 놀랐다. 그는 이 몇몇 사람이 거렁뱅이와 한패일 줄이야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알고보니 이번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각본에 의해 치밀하게 짜여진 함정이었다. 처음으로 작은 문에서 나온 사람은 바로 점을 치는 장님이었다. 이어 나온 사람은 외눈박이 부인, 청의인, 두부 장수.....
초류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빈틈없는 계획이었소. 내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오."
장님은 여전히 차가운 안색으로 냉랭하게 대꾸했다.
"별말씀을....."
초류빈은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알고 보니 이번 일은 철전갑과 전혀 관계가 없었구려."
하고 말하자 장님이 천천히 그의 말을 받았다.
"그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소. 단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렁뱅이가 말을 다투어 나섰다.
"단지 나는 철전갑을 본 일도 없고 또한 그가 누구라는 것도 모르기 때문에 당신부터 잡기 위해 조금 전에 그 연극을 꾸민 것이오."
초류빈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쓴웃음만 지었다.
"정말 멋진 연극이었소."
장님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멋진 연극을 꾸미지 않고서야 어떻게 초탐화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겠소?"
"알고 보니 여러분들은 내가 누구라는 것도 벌써 알고 있었구 려."
"당신이 이 성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우린 이미 당신의 뒤를 따랐소."
"그런데 나를 함정에 유도한 목적이 무엇이오?"
그의 질문에 답하는 자는 항상 앞 못 보는 장님이었다.
"철전갑 때문에 일이 비롯된 것이오. 우린 천방백계로서 그를 찾으려 했지만 도저히 행방을 알아낼 수가 없었소. 그런데 만약 초탐화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는 만사를 제쳐 놓고 우리한테 달려올 것이오."
초류빈은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만약 그가 오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노고는 수포로 돌아갈 게 아니겠소?"
장님의 말투는 단호했다.
"당신이 그의 일에 절대 관여하지 않을 수 없듯이 그 역시 당신의 일이라면 목숨마저 바칠 각오가 돼 있을 것이오. 두 분의 관계에 대해 우리들은 낱낱이 알고 있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계획을 세울 리가 있겠소?"
초류빈은 이런 계획을 꾸민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있는 장님이라고 생각했다.
"귀하께서 이런 계획을 세운 것으로 미루어 지모(智謀)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장님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에게 그런 지모가 있다면 앞 못 보는 장님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오."
"당신이 아니라면......"
초류빈의 눈길은 자연히 거렁뱅이에게 쏠렸다.
거렁뱅이는 히죽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묘책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위인이 아니오. 나는 머리가 이상하기 때문에 남을 해친다는 생각만 해도 골이 부서질 것만 같소."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심각하게 말했다.
"알고 보니 여러분의 막후엔 다른 주모자가 있는 모양이구려."
장님은 지체하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았다.
"그가 누구인지는 묻지 마시오. 잠시 후면 자연히 만나게 될 테니....."
이어 그는 수중의 죽장을 살짝 떨쳐 초류빈의 양쪽 무릎 환골혈(環骨穴)을 찍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그를 만나게 되면 당신은 곧 삶의 회의를 느끼게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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