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38 소이비도 제3권 고깃덩어리의 벽을 뚫고
고깃덩어리의 벽을 뚫고
유룡생의 검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비단 신속할 뿐만 아니라 그가 사용하는 탈정검은 더할 수 없이 날카로운 것이다.
초류빈은 이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인간의 육체로서 이 일검을 막기란 매우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완전히 상상에서 벗어났다.
"악!"
순간 경악에 가득찬 비명이 터져나오는가 싶었는데 유룡생은 마치 탄력성이 강한 나무에 부딪힌 듯 튀어나와 그 반대쪽에 있는 여자의 몸에 쓰러졌다. 그 여인은 담담하게 웃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유룡생을 꼭 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유룡생이 뻗쳐낸 검은 정확하게 대환희여보살의 목 가운데 꽂혔다.
그러나 대환희여보살은 고통의 빛은커녕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단정하게 앉아 초류빈을 쳐다보며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초류빈은 그만 그 자리에서 넋을 잃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환희여보살은 목에 있는 비곗살로 검을 꽉 끼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공력에 대해서 초류빈은 비단 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듣지도 못했다.
대환희여보살은 가볍게 웃으며 입을 떼었다.
"뚱뚱한 여자에겐 뚱뚱한 대로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시겠소?"
초류빈은 탄식을 터뜨리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여보살께선 정말 놀라운 공력을 지니셨군요."
초류빈은 이 점에 대해선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그녀보다 더 살이 찐 사람은 결단코 없기 때문이었다.
초류빈이 묵묵히 서 있으려니까 대환희여보살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의 비도탈명이 백발백중이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소. 나의 보물단지와 같은 수양아들도 당신의 그 비도탈명에서 피해 내지를 못했으니까. 물론 당신 자신도 매우 자부심을 갖고 있겠지."
초류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대환희여보살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비도를 믿고 이곳에 온 게 분명하겠지."
대환희여보살은 목에 꽂힌 검을 뽑아내더니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이었다.
"그러나 당신의 비도가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초류빈은 다시 탄식을 터뜨리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죽이지 못할 거요."
"호호호...그럼 당신은 아직도 남갈자를 데려갈 생각이 있소?"
초류빈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순간 대환희여보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당신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재미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그녀를 데려갈 생각이오?"
초류빈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천천히 생각해 보면 무슨 방법이 나올 거요."
"좋소. 그렇다면 이곳에 남아 천천히 생각해 보시오."
초류빈은 주위를 둘러보며 넉살좋게 말했다.
"이곳엔 향기로운 술이 있으니 며칠 있어도 무방할 거요."
대환희여보살의 음성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술은 절대 그냥 줄 수가 없는 것이오."
"그러면 여보살께선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대환희여보살은 잠시 뜸을 들이고 있다가 음탕하게 웃었다.
"본래 나는 당신이 늙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당신은 볼수록 호감이 가고 매력이 넘치는 남자요. 그러니 딴 생각 말고 나와 여기서 며칠 지냅시다. 그러면 내 남갈자를 순순히 내주겠소."
초류빈 역시 지지 않고 맞섰다.
"당신이 나를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이 너무 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만약 당신이 그 몸에 있는 살덩어리를 일백 근 정도 없앨 수 있다면 나는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이라도 당신과 함께 지낼 수 있소. 그러나 지금은....."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솔직히 말해 도무지 구미가 당기지 않소....."
순간 대환희여보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놈.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방자하기 이를 데 없구나!"
이렇게 소리친 그녀는 육중한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초류빈의 사방에 앉아 있던 몇 명의 여인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녀들은 비록 비대하기는 했지만 행동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여인들은 일어서자마자 코끼리와 같은 육중한 다리를 움직여 천천히 초류빈을 향해 육박해 들어왔다. 여인들 중에서 가장 마른 사람이 초류빈의 세 배는 되었는데 그녀들이 주위를 둥그렇게 에워싸자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그리고 천장도 매우 낮아 초류빈은 공중으로도 날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밑으로도 숨을 수 없는 것이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아니 그것은 잠깐 감수한다손 치더라도 여자들의 이 육중한 몸을 보니 절로 구토증이 났다. 여인들은 점차 가까이 다가오면서 마치 초류빈을 산 채로 찢어 죽이려는 것 같았다. 완전히 포위된 이 상태에서 초류빈이 설사 비도를 전개해 낸다고 하더라도 한 번에 한 사람밖에 처치할 수가 없으므로 실로 난감할 뿐이었다.
소위 남자가 여자에 의해 할켜 죽는다는 것은, 초류빈은 그 다음에는 차마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때 대환희여보살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으하하하...초류빈, 너는 소림사의 나한진까지도 무사히 돌파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를 돌파하기는 약간 어려울 것이다."
대환희여보살의 웃음소리는 갈수록 점점 커졌고 온 누각이 그녀의 웃음소리에 의해 지진을 만난 듯 크게 흔들렸다. 아니 그뿐이 아니라 누각을 받치고 있던 기둥까지도 삐걱거렸다.
순간 초류빈의 두 눈동자가 빛났다. 그는 갑자기 설영령을 생각해 낸 것이다. 설영령은 지금 아래층에 있다. 그녀는 물론 초류빈이 죽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지 않을 것이며 무엇이든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
펑!
그때 갑자기 경천동지할 폭음이 터지더니 온 누각이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우르릉, 꽝 하는 소리가 쉴새없이 들리는 가운데 누각 위에 있던 사람들이 속속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그리고 지붕이 갈라지면서 커다란 구멍이 하나 생겼다.
'이때다!'
초류빈은 속으로 소리치며 그 뚫어진 구멍을 향해 물찬 제비처럼 뛰어올랐다. 초류빈은 지붕 밖으로 빠져나오며 대환희여보살도 자기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필경 떨어져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떨어져 내렸다면 설사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반나절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러나 초류빈의 상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대환희여보살은 그 몸놀림의 동작이 놀랍게도 신속했을 뿐만 아니라 경공 또한 대단했다. 초류빈이 막 지붕 위를 뚫고 나왔을 땐 다시 거센 폭음이 터지더니 대환희여보살도 지붕을 뚫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거대한 풍선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 같았으며 그녀의 거대한 덩치에 의해 사방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누각은 계속해서 밑으로 붕괴되어 내려갔고 회색 먼지가 뿌옇게 피어 올라 밝은 달빛을 가렸다.
초류빈은 고개도 한 번 돌리지 않고 평사낙안(平沙洛雁)이라는 초식을 전개하여 지상으로 가볍게 내려섰다.
그 순간 대환희여보살의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으하하하하...초류빈, 넌 내 눈에 띈 이상 결코 도망가지 못한다!"
고함소리와 동시에 육중하고 거대한 몸이 초류빈을 향해 번개같이 덮쳐왔다.
순간 초류빈은 갑자기 태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거대한 압력을 받았다. 초류빈은 그때 손을 뒤로 내뻗었다. 한광이 번쩍 하는 순간 비도탈명이 드디어 오색 광채를 발하며 앞으로 날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백발백중의 비도탈명이 발해지자 대환희여보살의 얼굴에선 즉시 시뻘건 선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번에 초류빈이 던져낸 비도탈명의 목표는 그녀의 목이 아닌 눈이었다.
초류빈은 눈 외에 다른 곳을 명증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눈을 겨낭한 것이었다.
"으하하하...하하하....."
그러나 대환희여보살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멎지 않고 사람의 간장을 조일 듯 터져나왔다.
초류빈은 이 순간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끼고 급히 몸을 돌렸다. 차가운 달빛이 비치는 아래 대환희여보살은 선혈을 비오듯 흘리며 계속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무덤을 파고 나온 여자 거인(巨人)이 걸어오는 것 같았다.
대환희여보살은 비단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웃으면서 말했다.
"초류빈, 내가 이미 널 본 이상 너는 결코 내게서 도망갈 수가 없다! 너에게 비도탈명이 몇 개나 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서슴지 말고 모두 던져라. 이런 칼이라면 열 개가 아니라 백 개라도 내 맞아 줄 수 있다!"
그러더니 대환희여보살은 눈에 꽂힌 칼을 뽑아 우지끈 씹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강철로 만들어진 비도는 눈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입에서 엿처럼 녹아 버렸다. 초류빈은 정말 이런 사람을 처음 보았다. 아니 심지어 저것이 인간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태고적부터 생존해 온 거대한 야수와 같았다. 아닌게 아니라 비도탈명이 백 개가 있어도 그녀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때 갑자기 대환희여보살이 미친 듯 고함을 터뜨렸다. 그 고함소리는 얼마나 크던지 주위 경물이 심하게 흔들렸고 무서운 해일이 육지를 삼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초류빈은 어떤 싸늘한 광채를 발하는 물건이 그녀의 가슴을 꿰뚫고 나온 것을 보았다. 이어 그 싸늘한 물건 끝에서 시뻘건 선혈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초류빈은 유룡생이 대환희여보살의 등뒤에 와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넉자 길이에 가까운 탈정검이 대환희여보살의 살 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끼아악!"
대환희여보살이 다시 짐승 같은 고함을 내지르자 유룡생의 몸은 공중으로 붕 떠오르더니 바로 그녀의 발밑에 떨어졌다. 동시에 대환희여보살의 산더미 같은 육중한 몸이 그의 몸 위로 쓰러졌다.
우지끈 하며 어떤 딱딱한 물체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보아하니 유룡생의 뼈마디가 모두 박살이 난 게 분명했다.
대환희여보살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겨우 말을 꺼냈다.
"이놈, 네놈이 감히 나를 암살하다니....."
유룡생은 그녀의 밑에 깔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면서 대꾸를 했다.
"오냐, 미처 생각도 못했겠지....."
"나는...네놈을 매우 관대하게 대해 주었는데....."
유룡생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뒤범벅되어 있었으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받았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바로 오늘이 있기를 기다려서였다 ....."
유룡생은 대환희여보살의 밑에 깔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때 대환희여보살의 몸이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즉시 유룡생의 몸에서 굴러 떨어져 내려왔다. 이 순간 유룡생은 눈앞이 가물가물했으나 초류빈의 수심에 가득차 있는 두 눈을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매우 안정되고 편안한 두 손이 얼굴에 흐르고 있는 땀을 닦아 주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이 두 손은 비록 수시로 남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손이지만 또 언제라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손이기도 했다. 이 손에는 항상 살인을 하는 칼이 쥐어져 있기도 하지만 때때로는 동정이 쥐어지기도 했다.
유룡생은 문득 가슴에 뜨거운 감사를 느끼고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러나 유룡생은 있는 힘을 다해 억지로 입을 떼었다.
"나는 유룡생이 아니오."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은 유룡생이 아니오."
유룡생은 다시 헐떡거렸다.
"유...유룡생은 이미 죽었소....."
초류빈은 암담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유룡생은 이미 죽고 없소."
유룡생은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했다.
"당신은 오늘 유룡생을 보지 못했소."
초류빈은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소."
이때 유룡생의 입가에 처량한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과 같은 사람을 친구로 사귈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행운아일 거요. 그러나 나는....."
유룡생은 숨을 헐떡이며 마지막 한 가닥의 숨을 끌어올리기 위해 잠시 멈추더니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나는 당신의 손에 죽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오!"
어느덧 밤의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아침이 밝아왔다.
단풍나무숲 밖에 세 개의 새로운 무덤이 생겨났다. 그것은 바로 유룡생과 남갈자 그리고 대환희여보살의 무덤이었다. 무덤을 만든 사람들은 대환희여보살의 문하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여보살의 죽음에 대해 조금도 슬픔을 느끼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 누각을 파괴시킨 사람은 설영령이었다.
설영령은 초류빈이 살아난 것에 대해 그리고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떠들었다.
"저는 그저 기둥만 흔들었을 뿐인데 누각 전체가 무너져 내리더군요. 만약 저의 행동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당신은 산 채로 깔려 죽었을 거예요."
설영령은 떠들다가 대환희여보살의 문하들이 아무런 슬픔의 표정도 짓지 않고 묵묵히 떠나는 것을 보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었다.
"아니 저들은 어째서 사부를 대신해 복수할 뜻이 없는 걸까요?"
초류빈은 길게 탄식을 터뜨렸다.
"그것은 대환희여보살이 자기 배만 채우기 바빠 저들을 전혀 살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설영령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원래 인간이란 자기 배만 부르면 다른 사람 생각은 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종종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저들을 이대로 보낼 생각인가요?"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게는 저들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다."
설영령은 입술을 깨문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초류빈을 흘겨보며 앙칼지게 외쳤다.
"만약 한 사람을 먹여 살리라면 할 수 있겠어요?"
설영령은 소리쳐 묻더니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며 재차 말을 이었다.
"그 여자는 많이 먹지도 못하고 또 많이 마시지도 못해요. 고기를 잘 먹지 않으니 매일 야채나 두부 따위만 먹어도 돼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그 여자는 밥도 음식도 잘 만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잘 때엔 이부자리까지 봐 주며 또 아침에 일어났을 땐 머리까지 빗겨 주지요."
초류빈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한쪽 눈을 감았다.
"그런 사람이라면 혼자라도 편히 살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나를 따라 고생을 하지?"
설영령은 곧 울음을 터뜨릴 듯 양볼이 퉁퉁 부었다.
"지금 당신의 마음속엔 남갈자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 여자의 허리는 내 허리보다 더 날씬했지요."
초류빈은 씁쓸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너는 어째서 내 마음속에 남갈자밖에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그녀를 위해 당신은 죽음까지도 불사했어요. 사실 그녀는 이미 죽었고 또 당신이 그렇게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데도 말이에요."
초류빈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나의 친구라면 죽어서도 내 친구인 것이다."
설영령은 눈을 크게 뜨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친구가 아니란 말인가요?"
"물론 친구지."
"그런데도 당신은 죽은 친구를 위해선 목숨까지 내걸고 싸우면서 살아 있는 친구에겐 이리도 무관심하신가요?"
설영령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계속 따지고 물었다.
"저는 집도 없고 어디 의지할 곳도 없는 외톨박이예요. 그런데 당신은 제가 한길을 방황하면서 남의 집 찬밥이나 얻어 먹는 것을 보고만 있을 작정인가요?"
그러나 초류빈은 말이 없었다. 단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초류빈은 이 소녀가 갈수록 하는 말이 청산유수처럼 늘어가는 것을 느꼈다. 설영령은 초류빈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연신 그를 흘기며 원망스런 어투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만약 절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 저희 아씨를 찾을 수 있죠? 그리고 당신의 친구인 낭천은 또 어떻게 찾는다는 말인가요?"
숲 속은 조용했고 계속해서 설영령의 투덜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낭천은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 국물을 들이키고 있었다. 쇠고깃국은 매우 향기롭고도 진했다. 그러나 낭천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두 손으로 그릇을 들고 천천히 마셨다.
낭천의 눈동자는 그릇 옆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시고 있는 국에 대해서는 그 맛이 어떤지 전혀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설소하는 낭천의 맞은편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요사이 당신의 혈색이 매우 좋아졌어요. 앞으론 거르지 말고 국을 좀더 드세요. 자, 이 국물은 몸에 매우 좋다니까 뜨거울 때 마셔요. 식으면 기름이 떠서 아주 맛이 없어져요."
낭천은 그녀의 말이 다 끝나자 국사발을 들어 단숨에 다 마셔버렸다.
설소하는 낭천의 입가를 가만히 닦아 주면서 말했다.
"맛있어요?"
낭천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설소하는 다시 물었다.
"한 그릇 더 갖다 드릴까요?"
낭천은 여전히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설소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만족한 듯 방그레 웃었다.
"물론 그래야죠. 당신은 원래 식사를 적게 하니 국이라도 많이 마셔야 돼요."
그러면서 이내 부엌으로 달려갔다.
집 안은 매우 간소했다. 최근에 새로 단장을 한 듯 부엌에는 장작을 땐 그을음이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이 이곳에 온 지는 불과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설소하는 다시 따뜻한 한 그릇의 국을 낭천에게 갖다 주었다.
"이곳은 비록 크지는 않지만 시장은 많아요. 다만 고기를 사기가 좀 곤란할 뿐...한 근에 거의 십 전이나 받는다니까요."
낭천은 고개를 숙인 채 국물을 두 모금 들이키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우리 내일은 쇠고깃국을 먹지 말도록 합시다."
설소하는 매우 의아해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무엇 때문이에요? 쇠고기를 싫어하나요?"
낭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무거운 어조로 대꾸했다.
"물론 먹고는 싶지만 형편이 그렇지가 못하지 않소?"
설소하는 웃으며 온화한 음성으로 그를 위로했다.
"돈 때문이라면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여우 가죽을 팔아서 모은 스물일곱 냥의 은자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요."
낭천은 푹 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뿜었다.
"그것도 언젠가는 다 쓰게 될 거요. 그리고 이곳엔 여우 사냥을 할 데도 없지 않소?"
설소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우선 급한 대로 써야죠. 그리고 제겐 또 방값이 있잖아요?"
낭천은 갑자기 검미를 세우며 무서운 어조로 내쏘았다.
"그러나 그 돈은 쓸 수가 없소."
"어째서 쓸 수 없다는 거죠? 그 돈은 훔쳐온 것도 아니고 또 빼앗아 온 것도 아니며 남의 삯바느질을 해 주며 열 손가락으로 한 푼 두 푼씩 번 돈이란 말이에요."
설소하는 말을 하면서 눈시울이 축축해지더니 급기야 수정같이 맑은 두 줄기의 눈물을 흘렸다.
"전에 있었던 그 많은 돈은 벌써 당신의 말대로 원주인에게 돌려주었어요. 당신은 제 말을 믿지 않나요?"
낭천은 길게 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단지?...내가 당신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설소하는 등뒤에서 그를 꼭 껴안고 몸을 바싹 붙인 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당신이 진심으로 저를 위해 주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아직껏 저에게 이렇게 잘 대해 준 사람은 없었어요. 그러니 더 이상 당신 것이니 내 것이니 하는 말은 하지 마세요. 저의...심지어 저의 마음까지도 당신의 소유가 아니에요?"
낭천은 눈을 감고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영원히 이 손만 쥐고 있을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었다. 얼마 후 낭천은 잠들었다.
설소하는 살그머니 그의 손에서 자기의 손을 빼냈다. 그녀는 침상머리에 서서 조용히 낭천을 바라보며 입가에 한 가닥의 미소를 떠올렸다. 아름답고 잔혹한 미소...그리고 나서 그녀는 살그머니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자기의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낡은 상자 속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그 다음 차 한 잔을 따라 작은 병에서 은광(銀光)이 번쩍이는 분말을 쏟아 차와 함께 복용했다.
이 분말을 복용하는 것은 그녀의 일과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진주(眞珠)를 갈은 분말로써 전설에 의하면 여인이 그것을 복용하면 영원히 청춘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늙어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녀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청춘을 지키려 하지만 청춘은 어떠한 방법으로써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수양(修養)을 쌓아 영적인 청춘을 유지한다면 모르지만.....
수중에 쥐어져 있는 작은 옥병을 바라보며 설소하는 배시시 웃었다.
"낭천이 만약 이 분말의 가격을 안다면 틀림없이 깜짝 놀랄 거야....."
그녀는 남자를 속인다는 것이 지극히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를 속인다는 것은 더욱 식은 죽 먹기와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남자가 불쌍할 뿐 아니라 가소롭다고 생각해 왔다. 그녀는 아직 속지 않는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 아니, 어쩌면 단 한 사람 있을지도 모른다.
초류빈, 초류빈의 모습이 문득 뇌리에 떠오르자 그녀의 가슴은 즉시 내려앉았다.
"오늘이 벌써 시월 초닷새인데....."
초류빈은 이미 죽었을까? 어째서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걸까?
문 밖은 한적한 좁은 길, 별도 없고 달도 없다. 멀리서 반짝이던 등불도 꺼져 버린 지 오래인 듯 무거운 적막만이 내리깔리고, 돌연 멀리서 일진의 발걸음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두 명의 건장한 청의대한이 작은 가마를 들고 날 듯이 달려와 바로 문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후 설소하가 도둑고양이처럼 문 밖으로 나가 가마에 올랐다. 그러자 사면에 대나무로 엮은 발이 드리워졌다. 대나무로 엮은 발은 별로 조밀하지 않아 밖에서 다른 사람은 그녀를 볼 수 없지만 그녀는 안에 앉아 밖의 모든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녀를 실은 가마는 곧 오던 길로 해서 질주해 갔다. 가마꾼은 큰길을 이용하지 않고 한적한 골목을 택해 일단의 거리를 가자 비로소 걸음을 늦추었다. 주위는 고요에 잠긴 채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일 장의 거리를 가자 앙상한 가지만이 남아 바람결에 흩날리는 제법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 숲이 나왔다. 숲을 끼고 왼쪽에 작은 토지묘(土地廟)가 있고 오른쪽엔 황량한 묘지가 보였다. 가마는 바로 그곳에서 멈추었다.
앞쪽에 있는 가마꾼은 가마 밑에서 초롱을 꺼내 불을 밝히더니 높이 쳐들었다. 초롱은 분홍색이며 그 위에 한 송이의 선홍빛 매화가 그려져 있었다. 등불을 밝히자 숲 속, 무덤 뒤 토지묘 안에서 홀연 귀신 같은 인영이 어른거리더니 제각기 다른 방향에서 가마를 향해 달려왔다.
모두 네 사람이었다. 그들이 달려오는 걸음이 가벼운 것으로 미루어 모두들 기분이 유쾌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즉시 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들은 서로의 표정을 살피며 눈동자에 금세 경계의 빛과 적의(敵意)를 띠었다.
숲 속에서 나온 자는 얼굴이 둥근 중년인으로서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차림새와 풍기는 인상으로 보아 장사를 하여 재미를 많이 본 거상(巨商) 같았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민첩하여 제법 단단히 무공 기초를 닦은 것 같았다.
무덤 쪽에서 걸어나온 사람은 두 명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자는 일신에 흑의를 입고 키가 작달막하며 눈빛이 유난히 예리했다. 그의 경공도 역시 무림 고수의 대열에 낄 수 있었다. 왼쪽에 있는 자는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몸집도 역시 뚱뚱하다거나 마르지도 않았다. 차림새도 역시 평범하여 남의 이목을 끌 만한 데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경공은 흑의를 입은 왜소한 자보다 한 수 높은 것 같았다.
토지묘에서 나온 사람은 가장 젊었다. 그리고 풍기는 기도(氣度)도 가장 강렬하며, 형형한 눈빛만 보아도 다른 사람보다 무공이 뛰어난 게 분명했다. 그는 남색 장포를 입고 허리엔 악어 가죽으로 만든 검집을 매달고 황금으로 된 검자루를 지니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풍채가 늠름한 귀공자였다.
설소하는 이 네 사람을 잘 알고 있는 듯 가마에서 내려오거나 대나무발을 젖히지도 않고 단지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웃음을 발하며 입을 열었다.
"호호호...먼길을 오시느라고 모두들 수고가 많았어요. 여기에선 네 분에게 술 대접을 할 수 없으니 그 점 양해해 주시길 바래요."
네 사람은 그녀의 음성을 듣자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서로 앞을 다투어 입을 열려는 눈치였으나 피차 눈빛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설소하의 부드러운 음성이 다시 가마 속에서 흘러나왔다.
"네 분께서 모두 저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어느 분이 먼저 말씀하시겠어요?"
지극히 평범하게 생긴 회의인(灰衣人)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감히 다른 사람과 말을 다툴 용기가 없는 것같이 보였다. 또 남색 장포를 입고 있는 젊은이는 뒷짐을 진 채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조용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는 다른 사람과 어울려 앞을 다투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러자 얼굴이 둥근 중년인이 만면에 웃음을 담고 흑의인에게 공수의 예를 취했다.
"형씨께서 먼저 하십시오."
흑의인은 사양하는 말 한 마디 없이 대뜸 앞으로 몸을 솟구쳐 가마 앞에 내려섰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가마 안에서 설소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두 달 간 만나지 못한 사이에 당신의 경공은 더욱 진전이 있었군요. 정말 축하할 만한 일이에요."
흑의인은 음침한 얼굴에 득의만면한 기색을 나타내며 얼른 포권의 예를 취했다.
"그것은 과찬입니다."
설소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음성만 들어도 그녀가 지금 활짝 웃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당신에게 부탁한 두 가지 일은 완수했겠죠? 당신은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니까요."
흑의인은 즉시 품안에서 한 뭉치의 은표(銀票)를 꺼내어 두 손으로 바쳤다.
"보경(寶慶) 일대의 장부를 전부 거두어 들였습니다. 모두 구천팔백오십 냥이죠. 가장 신용 있는 산서 동복호(東福號)의 은표로 바꾸어 왔습니다."
설소하는 가마 속에서 파뿌리같이 희디흰 손을 내밀어 흑의인이 들고 있는 은표를 받아갔다. 그리고는 액수를 점검하는 듯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비로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 무어라 감사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흑의인은 조금 전에 설소하가 손을 내민 곳을 넋 빠진 사람처럼 응시하고 있다가 그녀의 말을 듣자 어색하게 웃었다.
"소인이 어찌 감사를 바라겠습니까? 단지 아씨께서 소인을 잊지 않으시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가마 속에서 다시 설소하의 음성이 들렸다.
"그 설서(說書)를 하는 손가 늙은이와 손녀의 행방을 찾아냈으리라 믿는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흑의인은 고개를 떨구며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처음엔 줄곧 그들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관중(關中) 부근에서 그들은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일대에 있는 친구들도 두 사람을 전혀 보지 못했답니다. 저...그 두 사람은 마치 별안간 땅 속으로 꺼진 것 같습니다."
가마 속에선 아무런 대꾸도 들리지 않았다.
흑의인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두 사람의 행동은 신비에 싸여 있더군요. 겉으로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척하지만 제가 보기엔 절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씨께서 며칠의 여유만 더 주신다면 기필코 그들의 정체를 파악해 드리겠습니다."
설소하는 다시 잠깐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당신의 실력으로선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힘들 거예요. 이 일은 비록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당신을 탓하지는 않겠어요. 잠시 후에 다시 일을 맡길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네....."
흑의인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한쪽으로 물러나 숙연한 자세로 섰다.
그러자 얼굴이 둥근 중년인이 다른 두 사람에게 포권의 예를 취하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하며 연신 굽신거리면서 가마 앞으로 걸어갔다.
가마 속에서 다시 애교가 살살 흐르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호호호...역시 장사를 하는 사람답게 예의가 바르군요. 이제 당신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거상이에요."
중년인은 얼굴이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저는 단지 아씨 발밑에 있는 일개 점원에 불과합니다. 아씨께서 저를 마다하신다면 저는 이불을 싸들고 떠나는 수밖에 없습죠."
설소하의 음성은 연인에게 속삭이듯 부드럽기만 했다.
"저의 장사는 바로 당신의 장사예요. 당신이 잘만 운영해 준다면 언제가는 그 장사가 당신의 소유가 될 거예요."
중년인은 눈동자를 환하게 빛내고 연신 굽신거리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거듭 말하더니 품안에서 역시 한 뭉치의 은표를 꺼내어 두 손으로 바쳤다.
"이것은 일 년 동안 벌어들인 순이익입니다. 역시 동복호의 은표로 바꾸어 왔으니 아씨께서 액수를 직접 세어 보십시오."
"정말 수고가 많았어요. 당신은 비단 성실하고 솔직할 뿐만 아니라 능력도 뛰어나군요."
그녀는 은표를 받아 액수를 세어 보더니 갑자기 음성이 차갑게 변했다.
"아니, 어째서 육천 냥밖에 없죠?"
중년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냈다.
"육천삼백 냥입니다."
"작년엔 얼마였죠?"
"구천사백 냥이었습니다."
"재작년은요?"
중년인은 소매로 이마의 땀방울을 닦으며 더듬거렸다.
"재작년은...아마 만 냥이 넘는 것 같았습니다."
설소하의 냉랭한 코웃음이 곧 뒤따랐다.
"흥! 당신은 정말 능력이 대단하군요. 이 상태로 계속 몇 년만 더 끌어 나간다면 우리 밑천마저 털어먹게 되겠군요?"
중년인은 연신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간 이 년 동안은 비단이 잘 팔리지 않아 그랬지만 내년 봄부터는 필시 호경기가 돌아올 것입니다."
설소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음성이 홀연 부드럽게 변했다.
"그간 이 년 동안 고생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이젠 고생할 필요없이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도록 하세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는 즉시 중년인의 안색이 대뜸 변하며 음성마저 떨렸다.
"하지만...하지만 그쪽의 장사는....."
설소하의 음성은 여전히 속삭이듯 했다.
"그쪽의 장사는 자연히 다른 사람이 대신 맡아서 할 것이니 아무 염려 마세요."
중년인의 안색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렇다면 아씨께선...혹시 저를....."
그는 말을 하면서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나더니 홀연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나는 듯이 숲 쪽으로 줄달음쳐 갔다. 그러나 얼마 달리지 않아 한 줄기의 싸늘한 광채가 허공을 그리며 날아갔다.
"으악!"
비명소리와 함께 핏빛이 사방으로 뿌려지며 중년인은 힘없이 땅에 쓰러졌다. 그 남색 장포를 입은 젊은이의 손엔 어느 새 한 자루의 장검이 쥐어져 있어 검끝에선 아직도 시뻘건 선혈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편 회의인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좋은 검이군."
남색 장포를 입은 젊은이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검에 묻은 선혈을 신발바닥에 닦더니 한 송이의 검화를 펼쳐내는 동시에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회의인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선 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 기다려 남색 장포를 입은 젊은이가 그의 앞을 다툴 의향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비로소 가볍게 공수의 예를 취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설소하는 이 사람의 냉막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듯 서론을 늘어놓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호유성은 이미 흥운장으로 돌아왔나요?"
회의인은 즉시 대답했다.
"돌아온 지 보름이 가까워 옵니다. 그와 함께 온 사람은 호풍자 이외에도 여(呂)씨 성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풍문에 의하면 그는 온후은주 여봉선의 사촌동생이라고 하더군요. 그도 역시 쌍극(雙戟)을 사용하며 무공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 술을 파는 꼽추에 관해선 알아낸 게 있나요?"
"그는 아직도 그곳에서 술을 팔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신비스러워 아무도 그의 내력을 추측할 수 없죠. 호유성도 그곳에 몇 번 들렀지만 역시 아무런 단서도 얻어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필시 모종의 단서를 잡았으리라 믿어요.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당신의 눈을 속일 순 없으니까요."
"만약 내 추측이 틀림없다면 그 꼽추는 필시 그 설서를 하는 손늙은이와 관계가 있을 겁니다. 어쩌면 바로 그는 왕년에 천하 으뜸가는 장사(壯士)로 알려진 손노이(孫老二)일 겁니다."
설소하는 그 말을 듣자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비로소 나직이 입을 열었다.
"좀더 확실하게 알아보세요. 그리고 내일....."
그녀의 음성이 차츰 낮아져 가기에 회의인은 가볍게 귀를 바싹 대고 듣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계속 몇 마디를 듣더니 그 냉막한 얼굴에 기쁨의 빛을 역력히 나타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네, 명심하죠. 그럼 이만 떠나겠습니다."
떠나가는 그의 걸음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가벼웠다.
설소하는 확실히 남자의 마음을 정복할 수 있는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한쪽에 서 있던 흑의인은 줄곧 회의인을 지켜보며 당장 달려가 그의 가슴에 칼을 꽂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이때 설소하가 다시 가마 속에서 손을 내밀어 흑의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백옥을 다듬어 놓은 듯한 고운 손이 초롱불 아래 유난히 돋보였다. 흑의인은 그 손을 보자 침을 꿀꺽 삼키며 자석에 끌리듯 앞으로 다가갔다.
설소하는 부드럽게
"이리 좀더 가까이 오세요. 모래 앞으로....."
하며 무엇이라 속삭이자 흑의인은 입이 헤벌어지더니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네, 알겠습니다. 제 어찌 잊겠습니까!"
그는 떠나갈 때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었다.
그가 떠나자 남색 장포를 입은 젊은이가 비로소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설낭자, 굉장히 바쁜 모양이구려."
설소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어요. 그들은 당신과 틀려요...그런 대로 적당히 구슬러야지 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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