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28 소이비도 제2권 비도는 부러지고
비도는 부러지고
담 밖의 가을빛은 담 안보다 완연하여 더욱더 농후했다.
곽숭양은 두 손을 소매 안에 쑤셔 넣은 채 서서히 걸음을 옮겨 앞장서고 초류빈은 갑자기 말을 잃은 사람처럼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길은 매우 길고 좁은 것이 마치 뱀 같았으며 기복도 심했다.
가을 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오고 길가의 초목들은 누렇게 단풍이 들어 있었다.
곽숭양의 걸음은 매우 느렸지만 일보의 간격은 매우 컸다.
초류빈은 그의 발걸음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마치 귀신에게 홀린 사람처럼 넋을 잃은 채 뒤따라갈 뿐이었다. 길 위의 흙은 매우 부드러웠다.
곽숭양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거기에는 발자국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발자국의 깊이는 기계로 찍은 듯이 한 치도 틀리지 않고 발자국 사이의 간격도 역시 똑같아 마치 자로 재는 대로 걸어가는 듯했다.
겉으로 보기엔 아주 가벼운 심정으로 걷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암암리 진력을 주입시키고 있어 그의 몸과 마음은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발에 가해진 힘이나 걸음 사이의 간격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 것이다.
곽숭양의 발길이 멈추는 곳, 그곳이 바로 그들의 생사를 건 결전장이 되는 곳이다. 결전지에 도착하게 되면 그들 두 사람 중 한 명은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초류빈이 이것을 모를 리가 없다. 곽숭양은 명실공히 당금 무림에서 가장 으뜸가는 제일 무서운 고수 중의 하나이다.
공력을 연마한 사람은 만약 자신이 연마한 공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을 땐 십중팔구 모두 고독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그 때가 되면 진정한 적수를 찾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자들은 자신의 패배를 불사하면서까지 진정한 적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기도 한다. 설사 패한다 해도 그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이 후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류빈의 지금 심정은 조금도 유쾌하지 못했다. 그의 지금 심정은 더욱더 어지러워져 있었다. 이러한 심정으로 곽숭양과 상대한다는 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것이라는 것을 초류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패배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이 길은 막다른 골목이었으며 생명의 종착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길은 바로 초류빈의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는 결코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가 어찌 편안히 죽을 수가 있을까.
시야는 점점 더 넓어졌으며 멀리 새빨갛게 단풍이 든 숲이 보였다. 붉은 단풍은 마치 선혈과도 같았다.
곽숭양의 걸음걸이는 갈수록 커졌고 땅바닥에 찍힌 발자국은 갈수록 희미해졌다.
이것은 그의 체내외의 모든 것이 점점 최고조를 향해 치닫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의 모든 것이 최고조에 달한다면 그의 정신력이나 내력, 그리고 육체는 그의 검과 하나로 융화될 것이며 그때 그의 검은 무감각의 쇠붙이가 아니라 영성(靈性)을 띤 무서운 신기(神器)가 되는 것이다.
초류빈은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곽숭양은 그가 정지한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정신은 이미 무아지경에 이르러 있어 천지간의 모든 변화는 그의 이목을 속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바로 이곳에서 할 생각이오?"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오늘...나는 당신과 겨룰 수 없소!"
곽숭양은 서서히 몸을 돌려 칼날같이 예리한 눈빛으로 초류빈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소?"
초류빈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 그의 가슴은 칼날에 찔린 듯이 아팠다. 그는 이번 싸움을 거절한다면 그것은 상대가 두려워 기피하는 것이 되며 공력을 연마한 사람으로선 죽는 한이 있어도 하기 싫어하는 한마디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입장으로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곽숭양은 서릿발 같은 기색으로 반문했다.
"당신은 나와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오?"
초류빈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곽숭양은 의아해 하며 다그쳐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초류빈은 장탄식을 하며
"나는 패배를 시인하겠소!"
하는 말에 곽숭양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세상에 태어난 후로 이런 사람은 처음 보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곽숭양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초류빈! 당신은 과연 당세의 영웅으로서 손색이 없소!"
초류빈은 실소를 지었다.
"영웅? 나 같은 사람을 어찌 영웅이라 할 수가 있겠소?"
곽숭양은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탄식을 터뜨렸다.
"당금 무림에선 당신만이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오!"
초류빈은 고개를 떨구었다.
곽숭양이 다시 말했다.
"당신이 패배를 시인할 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나는 알고 있소. 나는 어쩌면 죽는 한이 있어도 패배를 자인할 용기를 갖지 못할 것이오!"
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죽는다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오. 다른 사람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며 남아 대장부인 것이오."
초류빈은 뜻밖의 말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초류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내심 몹시 격동해 입을 열어 무엇인가 말하려고 했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곽숭양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소. 당신이 나와 싸우지 않겠다고 한 것은 당신이 지금으로선 아직 죽을 수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오. 당신은 누군가가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기 때문이오."
초류빈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 보기 드물게 눈물이 고여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가장 절친한 친구가 때로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될 수도 있다.
반면 가장 무서운 적도 때로는 자신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만이 자신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초류빈의 지금 심정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해져 있었다. 괴로움인지 기쁨인지 아니면 감격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벅찬 감정의 혼란 때문에 그는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곽숭양은 다시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당신과 꼭 고하를 가려야겠소."
초류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와 꼭 싸워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소?"
곽숭양은 소리없이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당금 무림 천하에 초류빈이 몇 명이나 되오? 오늘 만약 당신과 승부를 가리지 않는다면 다시는 당신과 같은 상대를 만날 수 없을 것이오. 영원히....."
"이곳의 일이 끝난 후에는 언제든지 나를 불러 주시오. 그땐 천하 없어도 기꺼이 응해 드리겠소!"
하지만 곽숭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가 되면 아마 나는 당신과 겨를 수가 없을 것이오."
초류빈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곽숭양은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똑똑하게 말했다.
"그 때가 되면 당신과 나는 친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초류빈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암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당신은 나와 적대시할 망정 친구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단 말이오?"
"곽숭양은 한평생을 모두 무도에 바쳤는데 또 무슨 친구를 사귈 여력이 있겠소? 하물며....."
여기까지 말하는 동안 그의 표정은 점점 온화해졌다.
"친구란 얻기 쉬우나 간담상조의 진정한 적수는 찾기가 힘든 것이오....."
간담상조란 네 글자는 원래 친구를 형용하는데 쓰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간담상조를 적으로 형용한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비단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초류빈은 그의 말뜻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곽숭양은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금 천하에서 나와 생사를 겨룰 수 있는 사람은 물론 당신 한 사람뿐만은 아니오. 그러나 나보다 몇십 배 강한 사람이라 해도 나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소. 만약 내가 그들의 손에 죽는다면 난 결코 편안하게 눈을 감지 못할 것이오!"
초류빈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소. 당신이 존경할 수 있는 친구를 찾는다는 것은 그리 곤란하지 않소. 하지만 당신이 존경할 수 있는 적을 찾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오."
곽숭양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더욱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바로 그것이오. 그래서 오늘 우리 두 사람의 일전도 불가피한 것이오. 나 곽숭양이 오늘 설사 당신 손에 죽는다 해도 한이 없을 것이오!"
초류빈은 곤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곽숭양은 그의 말을 가로채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의 뜻은 잘 알고 있소. 오늘 만약 당신이 불행하게도 나의 손에 죽게 된다면 당신이 이루지 못한 소원은 내가 대신해서 완수해 주겠소. 당신이 보호해야 할 사람에 대해서는 내 있는 힘을 다해 보호할 것이오."
초류빈은 상대가 이렇게 나오자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해 공수의 예를 취했다.
"귀하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이 초류빈이 설사 죽는다고 해도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오...감사하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감사하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자기와 생사를 건 결투를 하게 될 상대에게는 더욱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감사의 말은 그의 폐부에서 우러나온 절실한 것이었다.
곽숭양도 공손히 답례를 하면서 숙연하게 말했다.
"나의 뜻에 따라 주시겠다니 정말 고맙소. 자! 시작합시다."
초류빈은 한결 홀가분한 기분으로 쾌히 받아들였다.
"자!"
친구간에 상호 존중한다는 것은 매우 고귀한 것이다. 하지만 적대시하는 사람끼리도 서로 존중한다는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일이며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장면을 다른 사람으로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쩌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장면이 더 진귀한지도 모르는 것이다.
가을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붉게 물든 단풍잎을 비오듯이 떨어지게 하였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 흘렀지만 가을이 더욱 깊어진 것 같았다.
싸늘한 검기가 발해지자 주위의 공기는 엄동설한보다 더욱더 냉막하고 살벌하게 돌변했다. 곽숭양은 철검을 뽑아 가슴 높이로 들어올린 채 두 눈이 시종일관 초류빈의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곽숭양은 그의 손이 무서운 손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류빈은 이때 이미 딴 사람으로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더할 수 없이 어지럽게 헝클어졌고 옷도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이미 취해 보이지도, 또 병자 같지도 않았다.
그의 초췌한 얼굴에서 찬란한 광채가 발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이미 한 자루의 칼이 들려져 있었다.
비도탈명!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는 비도탈명인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한번 칼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어 닥쳐와 이 지구상의 모든 물건을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씽! 씽!
엄청난 바람이 광풍폭우와 같이 불어닥쳐 고막을 찌를 듯이 아우성쳤다. 이에 따라 붉게 물든 단풍잎이 사납게 휘날리며 허공으로 올라갔다.
이때, 곽숭양의 철검이 한 줄기 광막처럼 휘둘러졌다. 검의 한광이 초류빈의 목줄기를 노리고 폭사되어 오자 검이 그의 목에 이르기도 전에 예리한 검기가 바람을 가르며 엄습해 왔다.
초류빈은 신속하게 일곱 자나 뒤로 물러서며 등을 한 그루의 나무 뒤에 바싹 붙였다. 그러나 곽숭양이 검은 그림자처럼 달라붙으며 계속 목줄기를 찔러왔다.
초류빈은 뒤에 퇴로가 없다는 것을 알자 나무에 기댄 채 번개같이 돌기 시작했다.
곽숭양은 벽력 같은 고함을 지르며 신형을 공중으로 날리는 한편 예리한 철검을 신랄무비하게 휘둘렀다.
그의 육체와 검은 이미 하나로 융화되어 있었다. 뼈를 깎는 듯한 싸늘한 검기가 발출되자 가지 위에 달려 있던 단풍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시뻘건 피가 뿌려지는 것 같았다. 이러한 광경은 처절한 한편 일대 장관이기도 했다.
초류빈은 두 팔을 독수리 날개처럼 벌려 곽숭양의 일검을 피해 낸 후 낙엽과 함께 다시 지상으로 내려섰다.
곽숭양은 자신의 공격이 번번이 빗나가자 울화가 치밀어 오른 듯 공중에서 한 바퀴 선회하며 벌떼와 같은 한성을 격출시켜 초류빈의 전신을 향해 엄습해 왔다.
이 일검의 위력은 말로써 이루 형용할 수 없었고 다만 사람의 혼백을 앗아 버리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초류빈의 주위 삼 장 안은 삼엄한 검기로 물샐틈없이 포위되어 어떠한 방향으로도 도저히 피할 여지가 없었다.
창!
우렁찬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꽃이 마치 번갯불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초류빈의 수중에 있던 비도가 정확하게 곽숭양의 검끝에 부딪힌 것이다.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시야를 가리며 어지럽게 휘날리던 단풍잎이 떨어져 내린 후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은 처음 싸움을 하기 전의 위치에 서 있었다.
곽숭양은 검을 가슴 높이로 들어올린 채 있었고 제자리에서 전혀 이동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초류빈의 수중에는 비도가 들려 있었으나 예리한 칼끝이 철검에 의해 부러져 있었다.
초류빈은 똑바로 선 채 곽숭양을 주시했으며 곽숭양 역시 초류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초류빈의 비도가 다시는 전개될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비도탈명은 번개보다 더 빠른 것이다. 그러나 칼날이 부러진 상태에서는 그 속도에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설사 손에서 격출된다 해도 곽숭양을 이기기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초류빈은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겐 오직 패배가 있을 뿐 승산이 없다고 내심 단정했다.
초류빈은 서서히 손을 내렸다. 숲 속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으며 이 세상의 만물이 모두 숨을 죽인 것처럼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곽숭양은 별안간 장탄식을 터뜨리며 서서히 철검을 거두었다. 그런 그의 얼굴엔 비록 아무 표정도 없었으나 두 눈에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초류빈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패했소!"
초류빈은 의아해하면서 다그쳐 물었다.
"어째서 당신이 패했다는 것이오?"
곽숭양은 한숨을 내쉬며 처량하게 말했다.
"나는 패배를 시인하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원래 죽는 한이 있어도 이 말만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일단 얘기하게 되자 마음속이 후련하고 통쾌하오....."
그러더니 갑자기 광소를 터뜨리며 서서히 몸을 돌려 숲 밖으로 걸어나갔다.
초류빈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다가 돌연 허리를 구부리고 기침을 심하게 했다.
바로 이 때였다. 느닷없이 한 사람이 나타나 손뼉을 치면서 소리쳤다. 그 음성이 어찌나 맑은지 마치 한 마리의 꾀꼬리가 우는 것 같았다.
초류빈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보니 댕기를 길게 들인 처녀 한 명이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이 처녀는 바로 주막에서 보았던 그 노인의 손녀였다.
댕기 처녀는 흑백이 뚜렷한 두 눈을 깜박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두 분이 겨루는 것을 본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예요."
초류빈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그저 담담하게 웃자 댕기 처녀는 다시 말했다.
"과거제왕곡주 소왕손과 남대선생이 태산 절정에서 싸운 적이 있었지요. 남대선생은 백 근이나 되는 큰 철괴를 가지고 있었고 소왕손은 긴 옷고름을 사용했었습니다. 그는 그 옷고름 하나로 백 근이나 나가는 철괴를 지닌 남대선생과 장장 하루 열두 시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싸움을 벌였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들의 싸움으로 인해 천지가 변했으며 해와 달도 그 빛을 잃었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방그레 웃으며 다시 말했다.
"당신은 그 일전이 멋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초류빈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낭자의 말이 어찌나 생동적인지 나 자신이 마치 태산에서 본 것 같군. 제왕곡주와 남대선생의 결투를 보았다는 것은 정말 멋있는 일일 것이오."
댕기 처녀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다시 방그레 웃었다.
"당신의 입이 당신의 비도보다 더 무섭고 날카로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초류빈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댕기 처녀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호호호...당신의 비도는 단 한 번에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만, 또한 당신의 말 한 마디로 여자들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치려 들 것이 분명하니까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뭇남성들의 혼을 빼앗을 듯한 눈초리로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초류빈은 내심 그녀의 눈초리를 받기가 매우 두려웠고 또 세상에서 이렇게 무서운 처녀가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댕기 처녀는 초류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계속해서 말했다.
"과거에는 수모 음희가 천하제일의 고수라는 호칭을 들었지요. 그러나 협도 초유향의 담량은 그보다 더욱 컸어요. 초유향은 신궁으로 쳐들어가 음희와 일대 혈투를 벌였었지요. 지상에서 물 속으로 물 속에서 공중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결과 공력이 고강한 수모 음희는 끝내 초유향에 의해 패배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반문하였다.
"당신은 이 일전이 멋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초류빈은 더 이상 섣불리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멋있었을 것이오!"
댕기 처녀는 약간 눈을 흘긴 다음 말을 이었다.
"이 모든 싸움이 비록 세상을 놀라게 하고 또 천추에 이름을 떨쳤지만 방금 두 분이 벌인 일전에 비하면 많은 차이가 있을 거예요."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었다.
"나는 겸손해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나의 일은 내가 알고 있을 정도의 자명성(自明性)은 있소. 그러니 낭자께선 너무 과찬을 하지 마시오."
"저는 진정에서 하는 말이에요. 당신은 세 번씩이나 곽숭양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손을 쓰지 않았어요. 그러니 당신은 살기가 사라져 비도가 부러진 거예요. 그때 곽숭양도 어쩌면 당신을 죽일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패배를 시인한 것이에요."
그녀는 가볍게 탄식을 터뜨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진정한 남아대장부며 진정한 영웅들이에요. 만약 당신이 그를 죽였거나 그가 당신을 죽였다면 당신들의 공력이 제아무리 절륜하다고 해도 저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을 거예요!"
초류빈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장탄식을 했다.
"곽숭양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의 자질을 지닌 사람이오!"
댕기 처녀는 눈을 영롱하게 빛내며 다그쳐 물었다.
"당신은?"
초류빈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 말이오?...내가 그 무엇이 될 수 있겠소?"
댕기 처녀는 호수처럼 맑은 눈을 한번 굴리더니 말을 꺼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묻겠어요. 곽숭양이 제일 처음에 전개한 초식이 무슨 초식이지요?"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며 시원하게 얘기했다.
"풍권유운(風捲流雲)."
댕기 처녀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재차 물었다.
"제 이초는 무엇이지요?"
초류빈은 아무 생각없이 대답하였다.
"유성추월(流星追月)."
"그가 제 일초인 풍권유운에서 제 이초인 유성추월로 변초할 때 그 변화가 너무나 신속해 빈틈이 생겼었어요. 당신이 만약 그 순간에 그를 죽이려고 했다면 충분하고도 남았을 거예요."
초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댕기 처녀는 정색을 하며 다시 말했다.
"이것은 당신이 그를 죽일 수 있었던 첫 번째 기회였어요. 제가 두 번째 기회도 얘기해 드릴까요?"
초류빈은 고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하시오."
그녀는 갑자기 냉랭하게 웃으며 조롱조로 말했다.
"남들은 초류빈이 진정한 남아대장부라고 하던데 이렇게 여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군요."
초류빈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숱한 욕을 먹어왔다. 하지만 여성적인 기질을 지녔다고 한 말은 생전 처음이었다.
댕기 처녀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할 말이 없다면 어째서 헛기침도 하지 않지요?"
초류빈은 탄식을 하면서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낭자께선 눈빛이 형형하신 것으로 보아 고인임에 틀림없으신 것 같은데 미처 몰라보고 실례를 범한 것 같소."
"그만하세요! 저는 당신보다도 키가 작은데 어찌 고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초류빈은 별안간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댕기 처녀는 안쓰러운 듯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당신이 생전 자화자찬을 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 칭찬하기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그것이 당신의 좋은 점이면서도 또한 나쁜 버릇이지요. 하지만 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자신을 너무 도외시해도 안 되는 것이에요."
초류빈은 허탈하게 웃었다.
"낭자....."
그가 채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가로챘다.
"저의 이름은 낭자가 아니에요. 그런데 어째서 시종 낭자라고만 하는 것이지요?"
초류빈은 그녀의 말을 듣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는 갑자기 이 처녀가 매우 재미있다고 느껴진 것이다.
댕기 처녀는 앙칼진 표정으로 말했다.
"저의 성은 손(孫)이며 이름은 소홍(小紅)이에요. 붉을 홍이지만 상관금홍의 홍은 아니에요!"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생은 초....."
손소홍은 대뜸 그의 말을 가로채며 손을 흔들었다.
"당신의 이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당신과 한번 겨루어 보고 싶었고요."
초류빈은 그녀의 뜻밖의 말에 얼떨떨해 하면서 다그쳐 물었다.
"무엇을 겨루겠다는 것이오?"
손소홍은 허리가 끊어질 듯이 호들갑스럽게 웃고 나서 말을 받았다.
"저는 물론 당신과 공력으로는 겨룰 수 없어요. 제가 앞으로 백 년을 더 연마한다고 해도 역시 당신을 능가할 수는 없어요. 제가 당신과 겨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술이에요. 이 세상에서 저보다 주량이 더 강한 사람이 있다는 소리만 들어도 저는 배가 아파 견디지 못해요."
초류빈은 어이가 없어 선뜻 대답을 못하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술 먹는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그러한 버릇이 있지만 손낭자에게도 그러한 버릇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손소홍은 앵두같이 붉은 입술을 삐죽이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시합하면 당신이 불리해요."
초류빈은 어리둥절하여 다그치듯 반문했다.
"그것은 또 무엇 때문이오?"
그녀는 정색을 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은 방금 싸우고 났기 때문에 체력에 큰 소모가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자연히 주량에도 차질이 생기게 돼요. 술 마시는 것도 공력을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시간과 장소 그리고 기분까지 그 어느 하나라도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요."
초류빈은 그녀에게 바싹 흥미가 당겨 빙그레 웃었다.
"손낭자는 과연 술에 대한 고수로서 손색이 없구려. 낭자와 같은 고수와 술을 겨룬다는 것은 기쁜 일이오."
손소홍의 두 눈에선 기쁨의 빛이 번쩍였다. 그러나 일부러 차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장소는 당신이 정하세요!"
초류빈은 웃음을 금치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시오!"
손소홍은 희색이 만면하여 천진스럽게 웃었다.
"그럼 앞장서세요."
황혼 전이면 모든 장사는 대부분 한가한 시간이다.
손꼽추는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햇빛을 쬐고 있었다. 바로 이때 초류빈이 손소홍과 함께 들어왔다.
손꼽추는 두 사람이 함께 어울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듯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 두 사람이 친구가 되다니, 이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초류빈은 일부러 손꼽추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나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자신조차도 이 처녀와 친구가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손소홍이 일단 말문을 열면 마치 장강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땐 그녀의 말을 도저히 제지할 재간이 없었다.
초류빈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골치 아픈 일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는 식사를 하는데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이 모두 술을 마시지 못할 때, 그리고 말이 많은 여자를 만났을 때였다.
그 중에서 말 많은 여자를 대할 때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대할 때보다 더욱더 골치가 아팠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하게도 골치가 아프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분이 상쾌하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주량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술내기를 좋아하며 누구든지 자신과 주량을 겨룰 사람이 있다면 만사를 제쳐 놓고 시합을 한다. 거기에다 상대가 아리따운 미녀일 때는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여인이 만약 총명하면서 아름답고 또 술까지 마실 줄 안다면 설사 말이 많다고 해도 남자들은 같이 어울리기를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자를 제외하고는 말이 많은 여자는 그리 흔하지가 않다.
이곳 손꼽추의 주막까지 오는 동안 초류빈은 손소홍의 할아버지가 이름은 손백발이며 그녀의 친할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부모는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왔다고 한다.
여기까지 얘기를 들은 초류빈은 궁금증을 참지 못해 그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와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서 어찌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오?"
손소홍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성 밖으로 사람을 마중하러 가셨어요."
초류빈은 마중할 사람이 누구이며 어째서 같이 가지 않았는지를 물으려고 했으나 자신이 그녀에게 말 많은 남자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실 손소홍과 같이 있으면 그에겐 좀처럼 말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간단하게 대답하고 난 그녀는 초류빈이 입을 여는 것을 막기라도 할 듯이 급히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비도탈명을 쓰는 방법을 어떻게 연마하셨지요?"
"듣자 하니 당신에겐 낭천이라고 하는 절친한 친구가 있으며 그의 솜씨도 당신과 비슷하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그런데 그가 갑자기 실종되었다면서요? 당신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당신도 이 년 동안 실종되었고 강호 사람들은 당신이 모두 죽었거나 은퇴했다고 생각해 왔는데 어째서 이곳 주막에 숨어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 당신의 행적이 탄로난 이상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찾으러올 것인데 그래도 당신은 계속 이곳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요?"
"만약 이곳에 있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실 생각이지요?"
"매화도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요?"
"그는 이미 이 년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는데 누군한테 살해된 것이 아닐까요?"
"만약 제거됐다면 누구에게 살해됐는지 당신은 알고 있나요?"
손소홍이 마치 저수지의 수문이 터진 것처럼 단숨에 여기까지 물었으니 초류빈이 어찌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떠한 물음에 대해선 대답하기를 원치 않았지만 또 어떤 물음에 대해선 자신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초류빈은 설소하가 바로 매화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낭천이 절대로 설소하에게 살수를 쓰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날 그는 낭천이 떠나게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낭천이란 청년이 비록 겉으로는 냉혹하지만 내심은 불같이 뜨겁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낭천이 설소하를 데리고 갔음이 분명하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으나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나 그 이유는 전혀 몰랐다.
설소하는 지금쯤 개과천선해서 새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설소하가 진정 낭천에게 사랑을 느낄 수가 있을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선 초류빈도 알 수가 없어 그저 탄식만 할 뿐이었다. 이후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초류빈은 손꼽추의 주막에 와 자리에 앉고서야 이런 번뇌스러운 일에 대해서 잠시 뒤로 제쳐 놓았다. 그것은 그의 앞에 이미 술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손소홍의 시선은 초류빈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몰랐으며 그 시선엔 웃음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녀는 마치 초류빈에게 굉장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으며 또 어떻게 보면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초류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무겁게 뛰기 시작했다.
손소홍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자, 이제 술을 마셔 보기로 할까요?"
초류빈은 소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녀는 영롱한 두 눈을 깜박이며 나직이 물었다.
"어떻게 마셨으면 좋겠어요?"
초류빈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해 보이며 반문했다.
"주량을 겨루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단 말이오?"
손소홍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그것도 모르고 계셨나요?"
"나는 한 가지 방법밖에 모르고 있소. 그것은 술을 마시다가 먼저 취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술 마시는 학문이 부족하군요."
"그게 무슨 말이오? 술을 겨루는 데도 학문이 있단 말이오?"
그녀는 정색을 하며 확실한 어조로 대답했다.
"주량을 겨루는 데도 문(文)과 무(武), 두 가지가 있어요."
"문은 어떻게 겨루는 것이며 무는 어떻게 겨루는 것이오?"
손소홍은 어머니가 아이들을 가르치듯 자상하게 말했다.
"당신이 방금 말한 것은 무적으로 겨루는 것이며 그것은 소가 술을 마시는 격이에요."
초류빈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직이 얼버무렸다.
"소가 술을 마시는 격이라?"
손소홍은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목을 쭉 뻗고 입 속으로 술을 처넣는 짓이 소가 물을 마시는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그럼 술을 입에다 넣지 않으면 귓속에 붓는단 말이오?"
"만약 당신이 정말로 귀에다 술을 넣어서 마실 수 있다면 저는 패배를 시인하겠어요."
"귀로 술을 마시는 것은 너무 느려서 재미가 없소."
"나 같은 어린 계집아이가 어찌 당신과 무적으로 겨룰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무적으로 겨루는 것도 여러 가지니까 당신이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세요."
"어떠한 방법들이 있소?"
"가위, 바위, 보 형식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결같이 저속한 것들이에요. 우리는 물론 저속한 방법으로 술을 마실 수는 없어 요."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겨루는 것이 좋겠소?"
"저속한 방법 외에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초류빈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아무 말없이 웃기만 하자 그녀는 계속해서 방법을 제시했다.
"비록 한 가지 방법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 방법은 신기할 뿐만 아니라 매우 재미가 있어요. 만약 만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해도 당신은 꼭 이 방법을 택할 것이에요."
초류빈은 들을수록 흥미가 생겨 재촉하듯 말했다.
"술은 이미 상 위에 차려졌으니 어떤 방법이든지 빨리 마셨으면 좋겠소."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제 말을 들으세요. 이 방법은 매우 간단한 것이에요."
그녀는 일부러 말을 중단하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제가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보아서 당신이 대답할 수 있다면 제가 진 것으로 하고 술을 한 잔 마시는 것이에요."
초류빈은 눈을 반짝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만약 내가 대답하지 못한다면 내가 지는 것이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재빨리 말을 받았다.
"당신이 대답하지 못했다고 진 것으로 할 수는 없어요. 내가 낸 문제를 내가 대답해야 당신이 지는 것이에요."
초류빈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지면 내가 문제를 내는 것이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야릇하게 웃었다.
"틀렸어요. 이긴 사람이 질 때까지 계속 묻는 것이에요."
초류빈은 내심 그녀가 재미있다고 느끼며 빙그레 웃었다.
"낭자가 만약 낭자의 사적인 일에 대해서 물어온다면 나는 한 번도 이길 기회가 없지 않소?"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다부지게 대꾸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만약 제가 당신에게 저의 어머니가 누구이며 형제가 몇 사람이냐는 등의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물론 알 수가 없어요."
초류빈은 호기심이 가득찬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그럼 어떤 것을 물을 생각이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곧 알게 될 것이에요."
초류빈은 소리없이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나는 질 것을 준비하고 있소."
손소홍도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좋아요. 그러면 지금부터 제가 묻겠어요."
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초류빈을 정면으로 주시한 채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 편지를 누가 썼는지 알고 있나요?"
그녀의 물음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라 초류빈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급히 물었다.
"모르겠소! 낭자는 알고 있소?"
그녀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모른다면 어찌 당신에게 물을 수 있겠어요. 그 편지를 쓴 사람은 바로....."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일부러 한동안 뜸을 들이더니 서서히
"바로 설소하예요."
그녀의 대답은 더욱더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초류빈은 매우 침착한 성격이었으나 이 때만은 그렇지 못했다.
"낭자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아연실색하여 묻는 초류빈에게 그녀는 신비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내가 대답했으니 당신이 진 것이에요. 그러니 당신은 물론 자격이 없어요. 자! 우선 약속대로 한 잔 드세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초류빈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녀는 그가 술을 다 마신 것을 보자 다시 물었다.
"당신은 지금 낭천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시나요?"
초류빈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손소홍은 야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비록 설소하와 같이 있기는 하지만 설소하가 한 일에 대해 모두 덮어주고 있어요."
초류빈은 냉정을 잃다시피 황급하게 물었다.
"지금 그는 어디에 있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방그레 웃었다.
"당신은 뭐가 그리 급하세요? 제가 진 다음에 물으면 될 게 아니에요?"
초류빈은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잔을 비웠다. 그가 가지고 있는 술잔은 보통 그릇보다 훨씬 컸으나 술을 마시는 속도는 평상시보다 더욱 빨랐다. 그것은 세 번째 문제를 일각이라도 빨리 듣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술잔을 어루만지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설소하가 무엇 때문에 그 편지를 썼는지 알고 있나요?"
초류빈은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오!"
그는 비록 설소하의 목적에 대해 대략은 짐작했지만 확실한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모른다고 대답한 것이다.
손소홍은 뜻모를 미소를 띠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호부인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므로 당신이 꼭 나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녀는 당신으로 하여금 모습을 나타내게 하는 한편 남들로 하여금 당신을 상대하게 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녀는 당신을 가장 무서운 상대라고 생각했으며 아울러 당신을 가장 증오하고 있어요. 만약 당신이 죽지 않는다면 그녀는 영원히 강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에요."
초류빈은 장탄식을 하며 세 번째 잔을 단숨에 비웠다.
손소홍은 보이지 않는 미소를 띠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을 제일 먼저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초류빈은 씁쓸히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내가 어떻게 그걸 알겠소?"
"하지만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두서너 명밖에 없어요.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상관금홍이에요!"
이 대답이 초류빈의 상상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네 번째 잔을 비우고 나서 급히 다그쳐 물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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