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25 소이비도 제2권 괴변





괴변



한씨 형제, 양승조, 호비, 단개산, 호미 등 여섯 사람은 사색이 되어 서로 마주보면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누가 우리를 죽인다는 것인가? 누가.....'

이것은 그들 여섯 명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그의 공력으로 보아 무림의 일류고수 같은데 어찌 우리들이 그를 모르는 것일까?'

'그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일까?'

한씨 형제 등 여섯 명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내심 불안해 했다. 밖의 바람은 점점 거세게 불기 시작했으며 촛불에 비친 깡마른 사나이의 얼굴은 더욱더 공포스럽고 신비하게 보였다.

한씨 형제 등 여섯 명은 그 사나이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얼마 동안 안절부절 못하였다. 어떤 자들은 도망갈 생각을 하였으나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쥐새끼처럼 도망갔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진다면 차후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을 대한단 말인가. 하물며 그 깡마른 사나이는 설사 도망간다 해도 아무 쓸데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키가 작고 깡마른데다가 얼굴에 흰 털까지 난 호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한씨 형제 앞으로 다가가 포권의 예를 취했다.

"소생은 남산쌍호의 위명을 오래 전부터 듣고 마음속으로 존경해 왔습니다."

남산쌍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대호 한반이 포권의 예를 취해 답례를 했다.

"송구스럽소이다!"

이호 한명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대협과 호낭자 남매의 암기와 경공술이 천하쌍절이라는 것은 저희 형제들도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호비는 내심 흐뭇했으나 내색은 않고 겸손하게 대꾸했다.

"한대협께선 너무 과찬을 하셨습니다."

이때, 수사 호미도 자리에서 일어나 담담하게 웃으면서 답례를 했다.

호비는 빙그레 웃으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만약 두 분께서 괜찮으시다면 저희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얘기를 나누시지 않겠습니까?"

한반이 고개를 끄덕이며 쾌히 승낙했다.

"좋습니다. 소생들도 마침 그러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 두 패의 사람이 만약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어쩌면 생사를 건 혈투를 벌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모두 동일한 적을 상대하게 되었으므로 재빨리 공동전선을 펼쳐 자신들의 목숨을 구할 생각인지라 즉시 한 데 어울렸다.

모두들 자리를 같이하자 호비가 술잔을 높이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두 분께선 관동에 오래 계셨고 소생들은 또 강수 사이에서 한동안 지내왔으니 누가 우리를 일망타진할 수 있을지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군요."

한반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했다.

"소생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호비는 깡마른 사나이를 힐끗 쳐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저 친구의 말투로 보아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자는 공력이 상당히 고강한 것 같군요. 보아하니 우리는 그 사람의 상대가 될 수 없을 것 같소. 하지만....."

말을 중단한 그는 잠시 멈칫거리며 사방을 둘러보고는 자신이 너무 의기소침해 있다는 것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는지 억지로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그 자가 제아무리 공력이 심후하다고 해도 우리 여섯 명이 합심하면 그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한씨 형제는 이 말을 듣자 용기백배해져 찌푸렸던 미간을 활짝 폈다. 한반은 조금 전의 공포에 떨던 태도를 백팔십도로 바꿔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호형께선 말씀 한번 잘하셨습니다. 우리 여섯 명은 감각이 없는 돌부처가 아닌데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있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암암리에 깡마른 사나이를 슬쩍 훔쳐보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이것을 보지 못했다.

한명도 이제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큰소리로 떠들었다.

"이에는 이로 주먹에는 주먹으로 대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가 없지만 정말로 온다면...흐흐흐....."

호미가 간드러지게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만약 정말로 온다면 우린 그 자를 오도가도 못하게 해요!"

이것이 소위 사람이 많이 모이면 담이 커진다는 것이다. 여섯 사람이 한꺼번에 모이자 단개산과 양승조까지도 기고만장해졌다. 이렇게 여섯 사람이 기고만장하여 떠들어대고 있을 때

"흥!"

하는 차갑기 그지없는 냉소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여섯 사람의 안색은 동시에 급변했다. 그리고 목에 무엇이 막힌 듯 비단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손꼽추는 움찔 놀라 한쪽에 서서 넋을 잃고 움직일 줄을 몰랐다. 냉랭한 웃음소리와 함께 문 앞에 네 명의 사람이 나타났는데 이 네 사람은 색깔이 매우 선명한 황색 장삼을 입고 있었다.

이들 중 두 명은 바로 아침에 소식을 물으러 왔던 그 황삼인이었다. 그들은 문 앞에 도착했으나 이내 들어오지 않고 두 손을 내려뜨린 채 장승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손꼽추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고만장해 있던 여섯 명이 어째서 그들에 대해서 이처럼 무서워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 여섯 사람의 표정은 사람이 아닌 귀신을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들 여섯 명은 한쪽에 쓰러져 인사불성이 된 술주정뱅이가 부럽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또 아무것도 듣지 못하니 물론 무서워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백발이 성성한 남삼노인과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여지없이 쓰러질 것 같은 가냘픈 댕기머리 처녀였다. 이 두 조손은 매우 태연했으며 전혀 무서워하는 빛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남삼노인은 오히려 여유만만하게 술까지 마시고 있었다.

주막 안에 기이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갑자기 문 밖에 서 있던 네 명의 황삼인이 뒷짐을 진 채 한 청년과 함께 서서히 걸어 들어왔다. 이 청년 역시 황색 장삼을 입고 있었으며 그의 생김새는 매우 준수하고 또한 품위가 있어 보였다.

다만 네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황색장삼에 금테가 둘러져 있다는 것이다. 황삼청년은 비록 준수하게 생겼으나 얼굴이 얼음장처럼 냉막했으며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선 황삼청년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깡마른 체격을 지닌 청면 사나이에게 시선을 멈췄다.

청면 사나이는 그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술을 마실 뿐이었다. 황삼청년의 입가에 지극히 차가운 냉소가 흘렀다.

황삼청년은 서서히 몸을 돌리더니 이번엔 양승조 등 여섯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여섯 사람은 모두 황삼청년보다 험악하게 생긴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황삼청년의 시선을 받는 순간, 여섯 사람은 혼이 다 빠져나간 듯 앉은 채 비틀거렸다.

황삼청년은 천천히 다가가더니 품속에서 여섯 개의 노란 구리 동전을 꺼내어 여섯 사람의 머리 위에다 각각 하나씩을 올려놓았다.

양승조 등 여섯 사람은 갑자기 돌부처라도 된 듯 황삼청년이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둔 채 꼼짝하지도 못했다.

황삼청년은 다시 몇 개의 동전을 꺼내어 짤랑짤랑 흔들면서 한발 한발 남삼노인과 댕기머리 처녀의 상 앞으로 다가갔다.

남삼노인은 고개를 들어 황삼청년을 응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친구, 만약 술을 마시고 싶다면 여기 와서 앉으시오! 내가 한 잔 사겠소."

남삼노인은 술에 취한 듯 혀가 꼬부라져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황삼청년은 남삼노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냉막하게 웃었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는가 싶자 별안간 상을 힘껏 내리쳤다.

꽝!

이 소리와 동시에 접시에 담겨져 있던 땅콩이 모두 튀어올라 폭풍우와 같이 노인의 얼굴을 향해 폭사되어 나갔다.

남삼노인은 이 광경에 넋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갑자기 화석이라도 됐는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벌떼 같은 땅콩이 막 노인의 안면을 향하는 찰나 황삼청년이 느닷없이 오른손을 뻗었다.

순간, 그 많은 땅콩들은 강한 흡수력에 끌려 그의 소매 속으로 모두 빨려 들어갔다. 황삼청년이 싱긋 웃으며 소매를 떨구자 다시 땅콩이 쏟아져 나와 접시 위에 담겨졌다.

남삼노인은 두 눈이 휘둥그래진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댕기머리 처녀는 황삼청년의 비범한 솜씨에 손뼉을 치면서 간드러지게 웃었다.

"호호호...정말 재미있군요. 당신이 그런 재미있는 놀이를 할 줄 아는 사람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몇 가지 더 재미있는 솜씨를 보여주세요. 그러면 제가 할아버지를 졸라 술을 사드리도록 하겠어요!"

황삼청년은 극히 청순한 내가장력으로 비할 데 없이 절묘한 암기 수법을 전개한 것이다. 그런데 천진난만한 처녀가 이것을 아이들이 하는 구경거리로 생각할 줄이야. 그런데도 황삼 청년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댕기머리 처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서서히 몸을 돌렸다.

댕기머리 처녀는 어리광부리듯 급히 말했다.

"재미있는 구경을 좀더 보여주시지 않겠어요?"

이때였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않고 있던 청면 사나이가 느닷없이 냉혹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런 구경거리는 될 수 있는 한 보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댕기머리 처녀는 두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무엇 때문이지요?"

청면 사나이는 살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당신들이 만약 무공을 할 줄 알았다면 방금 그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당신들을 죽였을 것이오!"

댕기머리 처녀는 황삼청년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으나 내심 겁이 난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삼청년은 청면 사나이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천천히 술주정뱅이 앞으로 다가가 수중의 동전을 흔들었다.

짤랑! 짤랑!

그러나 술주정뱅이는 상에 엎드린 채 인사불성이었다.

황삼청년은 냉혹하게 웃으며 술주정뱅이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아 가볍게 들어올렸다. 황삼청년은 술주정뱅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다시 내려놓았다. 그가 손을 놓자 술주정뱅이의 머리가 상에 꽝! 부딪쳤다.

그러나 술주정뱅이는 여전히 그대로 엎드려 코를 골고 있었다.

청면 사나이가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번 취하면 세상만사를 다 잊는다는데 그게 사실인 모양이군. 술취한 사람은 취하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이점이 많지."

그러나 황삼청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뒷짐을 진 채 서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러자 괴변이 생겼다.

황삼청년이 밖으로 나가자 단개산, 양승조, 호비, 호미, 한반, 한명 등 여섯 사람이 일제히 일어나 황삼청년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끌고가듯 끌려가는데 그들은 모두 울상을 하고 목을 학처럼 길게 뽑고 있었다.

머리 위에 올려진 동전이 떨어질 것이 두려운 듯 상반신을 꼼짝하지 않으며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였다.

손꼽추는 수십 년을 살아왔지만 이처럼 괴이한 일은 생전 처음 보았다. 이들 여섯 사람의 공력이라면 어떠한 사람이든지 능히 상대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이 황삼청년 앞에서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쩔쩔매는 것일까?

손꼽추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구태여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는 세상 풍파를 다 겪은 위인인지라 이런 일은 알지 않는 것이 좋으며 섣불리 알았다가는 원하지 않는 고통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골목 안은 바람과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문득 앞에 있던 네 명의 황삼인이 이때 땅바닥에 수십 개의 원을 그려 놓았다. 그 동그라미는 두 발이 들어가면 꽉 찰 만한 원이었다. 단개산 등 여섯 명은 황삼청년 의 뒤를 따라나가 극히 자연스럽게 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망부석같이 꼼먃┫聘逑舊?않았다.

황삼청년은 다시 객점으로 돌아와 단개산이 앉아 있었던 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황삼청년의 표정은 시종일관 서릿발보다 더 차갑고 지금까지 일언반구도 없었다. 잠시 후 또 한 명의 황삼인이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 사람은 비교적 나이가 많은데 한쪽 귀와 한쪽 눈이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그의 외눈에선 화염이 이글거리듯 무서운 신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가 입고 있는 황색 장삼에도 금빛 테가 둘러져 있었고 그의 뒤로 칠팔 명의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차림새로 보아 결코 무명소졸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도 단개산 등 여섯 명과 똑같이 울상이 된 채 목을 학처럼 길게 내뻗고 극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머리 위엔 한결같이 동전이 하나씩 얹혀져 있었다. 그 중에는 피부가 검고 깡마른데다가 매우 위맹하게 생긴 사람도 끼여 있었다.

단개산 등 여섯 명은 그 사람을 보자 모두들 의아해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이 어째서 이곳에 왔지?'

외눈 장삼인은 단개산 등 여섯 명을 훑어보더니 싸늘하게 웃으며 그 역시 뒷짐을 진 채 서서히 객점 안으로 들어가 황삼 청년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은 마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자 골목 안으로 또 한 명의 황삼인이 들어섰다. 이 황삼인은 머리와 수염이 모두 눈처럼 희었다.

그의 황색 장삼에도 예외없이 금빛 테가 둘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도 역시 십여 명의 사람이 멍하니 뒤따르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황삼노인에게는 별로 이상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가까이 와 보자 그제야 그의 얼굴이 녹색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처럼 하얀 수염과 머리카락에 녹색 얼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비스럽고 공포스럽게 하였다. 비단 얼굴이 녹색일 뿐만 아니라 두 손까지 녹색이었다.

객점 밖의 원 안에 서 있던 사람들은 그 노인을 보는 순간 지옥의 악귀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떤 자들은 새파랗게 질린 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이렇게 해서 반 시간도 채 못되어 객점 밖에 그려진 원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찼다. 그들은 마치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돌부처처럼 굳어 있었다.

황삼에 금빛 테를 두른 사람은 모두 네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황삼인은 더욱더 늙어 보였는데 몸이 꼬부라진 것이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노인이 데리고 온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많았다.

이 네 명의 황삼인은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이들은 모두 벙어리인지 그렇지 않으면 말을 잊어버렸는지 도통 말이 없었다.

일순 작고 누추한 객점 안과 밖은 마치 공포의 무덤처럼 변하여 일정치 않은 숨소리와 바람소리만 들릴 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질식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손꼽추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청면 사나이와 댕기머리 처녀, 그리고 남삼노인은 시종 무표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정녕 이곳의 광경을 구경하고자 하는 것일까.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얼마나 지났을까? 골목 끝에서부터 갑자기 쇠붙이가 땅을 차는 맑고도 무거운 소리가 들려왔다.

딱! 딱! 딱!

지금과 같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을 때 이러한 소리를 듣자니 더욱 음산하고 신비스럽게만 여겨졌다.

딱! 딱! 딱!

그것은 사람의 혼을 빼앗는 듯한 소리였다. 네 명의 황삼인은 서로 마주 쳐다보더니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쇠붙이가 땅을 차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깝게 들려왔다.

이어서 어두운 장막을 뚫고 한 인영이 서서히 나타났는데 그 나타난 사람의 왼쪽 다리는 무릎 부분에서부터 잘려져 나간 채 없었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혼을 빼앗는 듯한 소리는 바로 그 지팡이에서 난 것이었다. 객점 앞에 걸린 등잔불이 희미하게나마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아무렇게나 늘어졌고 솥 밑부분과 같이 검은 얼굴엔 수많은 칼자국이 나 있었다.

삼각으로 된 뱁새눈에 땅을 쓰는 빗자루와 같은 눈썹을 지니고 있었고 코와 입은 사자보다도 더 큰 것 같았다. 이러한 모습의 소유자는 설사 얼굴에 칼자국이 없다고 해도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것이다.

네 명의 황삼인은 급히 달려나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려 예를 올렸다. 이 외발의 괴인은 손을 가볍게 흔들 뿐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객점 안으로 들어왔다.

손꼽추는 이때야 비로소 이 괴인도 황색의 장삼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장삼의 아래쪽을 걷어 허리에다 끼웠고 옷은 색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 더러운 황색 장삼에도 역시 금테가 둘러져 있었다.

청면 사나이는 이 괴인을 보자 안색이 급변했다. 댕기 처녀는 무서운 듯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채 더 이상 바라보지도 않았다.

황삼괴인은 들어서자마자 객점 안을 두루 살펴보다가 청면 사나이를 보더니 미간을 다소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수고했소."

이 황삼괴인은 비록 흉악하기 비할 데 없이 생겼지만 말투는 몹시 부드러웠다.

네 명의 황삼인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스럽습니다."

외다리 괴인이 다시 물었다.

"모두들 데려왔소?"

황삼노인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외다리 괴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 물었다.

"모두 몇 명이나 되오?"

"사십구 명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그 일 하나 때문에 온 것이 틀림없소?"

황삼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소생 등은 이미 엄밀히 조사해 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지난 삼 일 내에 온 사람들로서 그 일 때문에 온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약속도 없이 모두 이곳에 왔겠습니까?"

외다리 괴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되었소. 무고한 자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오."

황삼노인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우리의 뜻에 대해 이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소?"

"아직 모를 것입니다."

"그럼 어서 그들에게 가서 설명해 주시오."

"분부 받들어 거행하겠습니다."

황삼노인은 공손히 예를 취하며 이내 문 앞으로 걸어나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 여러분들은 모두 알고 계시리라 믿소. 그리고 여러분이 이곳에 온 뜻에 대해서 우리도 분명하게 알고 있소."

그는 품속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께선 모두들 이와 똑같은 편지를 받고 이곳으로 왔을 것이오."

이어서 원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감히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또 말을 잘못할 것이 두려운 듯 그저 흐리멍텅하게 콧소리로 대답했다.

황삼노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여러분의 실력으로 이곳에 와서 다른 생각을 하기엔 아예 자격이 없소.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선 이곳에서의 일이 끝난 후에 다시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는 여러분의 안전을 보장해 드리겠소. 그저 여러분들께서 조용히 있기만 한다면 그 누구도 여러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우리는 부득이하지 않은 이상 사람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누군가가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엣취....."

재채기를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수사 호미였다. 여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몸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추위를 느낄 망정 옷을 입지 않는 버릇이 있다. 호미도 이런 버릇이 있었다.

그녀는 옷을 매우 적게 입은 데다가 골목 안의 바람이 또 심하고 맨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감기에 걸린 것이다. 재채기를 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바람에 머리에 얹혀 있던 동전이 떨어져 내려와 멀리 굴러갔다. 순간 호미의 안색이 급변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안색도 변했다.

황삼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우리의 규칙을 모르고 있소?"

호미는 사색이 되어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황삼노인은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으면서 어찌 그리 조심성이 없소?"

호미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후배는 절대 일부러 한 짓이 아닙니다. 선배님께선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일부러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규칙을 어길 수는 없소. 규칙이 파괴되면 위신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오. 당신도 강호에서 자랐으니 이런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 아니오!"

호미는 고개를 돌려 호비를 바라보면서 애걸했다.

"오빠 어떻게...얘기 좀 해 주세요....."

호비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는 얼굴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며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얘기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호미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처량하게 웃었다.

"알겠어요. 오빠를 탓하지는 않겠어요."

그러더니 다시 양승조를 향해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지요? 내가 곧 죽게 될 터인데 마지막으로 무슨 말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니에요?"

양승조는 꼼짝하지 못하고 앞만 바라볼 뿐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호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한번 보아 주지도 않겠다는 것인가요?"

양승조는 이번엔 아주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호미는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호호...하하하....."

그녀는 양승조를 바라보면서 차갑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 이 사람이 바로 저의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어저께 밤만 해도 이 사람은 나를 위하는 일이라면 죽음을 불사하겠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지금 그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녀의 두 눈에서 뜨지운 눈물이 흘러내려 왔다. 또한 웃음소리도 점점 낮아졌다.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혼잣말인 양 중얼거렸다.

"정이란 무엇이죠?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그런 것이 없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요. 모든 번뇌를 버리고....."

이렇게 말한 그녀는 갑자기 몸을 굴려 칠팔 자 밖으로 나가더니 두 손을 휘둘러 수십 점의 한성을 그려내며 황삼노인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몸을 날려 담을 넘으려고 하였다.

수사 호미는 암기술과 경공법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어 솜씨가 과연 비범했다. 그녀가 발해낸 암기는 많을 뿐만 아니라 신속하고 정확했다.

황삼노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은 또 무슨 망동인가?"

그의 말은 매우 느리고 온순했다. 하지만 동작은 육안으로는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했다. 짧은 한마디를 하는 순간 수십 개의 한성이 모두 그의 소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담장 위로 뛰어 올라가던 호미는 갑자기 밑으로 떨어지면서 벽에 부딪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은 순간 완전히 피투성이가 되었다.

황삼노인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본래 매우 편하게 죽을 수가 있었소. 그런데 이게 무슨 경거망동한 짓이오!"

호미는 가슴을 움켜잡은 채 쉬지 않고 기침을 터뜨렸다. 한데 기침을 할 때마다 붉은 선혈이 쏟아져나왔다.

황삼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죽기 전에 당신의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겠으니 얘기해 보시오."

호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입을 열었다.

"그것도 규칙 중의 하나인가요?"

황삼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소."

호미가 다시 물었다.

"내가 무엇을 요구하든지 다 들어줄 것인가요?"

"만약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우리가 대신 해줄 것이며 아직 끝내지 못한 원한이 있다면 우리가 대신 그 원한을 해결해 주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말을 계속 이었다.

"우리 손에 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가 있소."

순간 호미의 두 눈에서 괴이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내가 꼭 죽어야 할 몸이라면 누구 한 사람을 지적해서 나를 죽이도록 해도 괜찮겠습니까?"

"안 될 것은 없소. 그런데 누구를 택할 것이오?"

호미는 이를 악문 채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바로 저 사람, 양승조예요."

양승조의 안색이 급변했다.

"당신은...당신은 그게 무슨 뜻이오? 나를 해치자는 것이오?"

호미는 씁쓸히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비록 나에 대해서 위선적으로 대해 왔지만 나는 진정한 마음으로 당신을 대했어요. 그저 당신의 손에 의해 죽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거예요."

황삼노인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양승조에게 말했다.

"살인하는 것은 손을 들었다 놓는 것에 불과한 것인데 친구는 한 번도 살인을 해본 적이 없소?"

이렇게 물은 황삼노인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한 황삼노인이 허리에서 칼을 뽑아 양승조에게 건네주면서 살며시 웃었다.

"이 칼은 매우 예리하오. 한 번이면 한 사람 죽이기엔 충분할 것이오."

양승조는 절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때 그가 고개를 젓는 바람에 그의 머리 위에 있던 동전이 흔들려 떨어져 내려오고 말았다. 양승조의 안색이 금방 흙빛으로 변해 이마에서 식은땀을 비오듯 흘렸다. 그러자 호미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전에 만약 내가 죽으면 당신도 같이 죽겠다고 말했지요. 당신은 과연 신용이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이군요. 호호호."

양승조는 전신을 떨기 시작하더니 미친 듯이 소리쳤다.

"네 이 마녀, 악랄하기 그지없구나!"

그러더니 황삼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호미의 목을 내리쳤다. 순간 목이 떨어져 나가면서 붉은 핏기둥이 치솟아 양승조의 전신을 붉게 물들였다. 양승조는 떨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일순 모든 사람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집중되었다. 어느새 어두컴컴한 주위에는 뿌연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양승조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손을 들어 이번엔 자신의 목을 후려쳤다. 다시 핏기둥이 치솟아오르면서 그의 몸은 호미의 시체 위에 떨어졌다.

손꼽추는 그제야 이 사람들이 어째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만약 누구든지 동전을 떨어뜨리는 날엔 영락없이 죽게 되기 때문이다. 손꼽추는 이 황삼인들이 너무 무섭고 또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청면 사나이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태연자약하게 술만 마셨다. 손꼽추는 청면 사나이를 바라보면서 황삼인들이 어째서 이 사람의 머리에다가는 동전을 올려놓지 않은 것인지 의아해 하였다.

바로 이때, 외다리 괴인이 갑자기 일어나 천천히 청면 사나이의 자리로 가 맞은편에 앉았다. 청면 사나이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외다리 괴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면서 피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꼽추는 절로 긴장해 있었다. 그는 이 두 사람의 눈이 모두 예리한 칼과 같으며 당장이라도 상대방의 심장을 꿰뚫을 것만 같이 여겨졌다.

안개는 갈수록 짙어만 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외다리 괴인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웃음은 매우 독특하고도 이상했다. 그가 일단 웃음을 띠게 되면 그의 흉악함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친절하게 보였다.

외다리 괴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귀하께서 누구신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소."

청면 사나이는 정색을 하며 말을 받았다.

"아! 그래요?"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 귀하께서도 아시고 있으리라 믿소."

"요 근래에 와서 당신들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매우 드물 것이오."

외다리 괴인은 가볍게 웃으면서 품속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냈다. 이 편지는 황삼노인이 꺼낸 편지와 똑같았는데 겉보기엔 보통 편지와 같고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손꼽추까지도 호기심에 그 편지 위에 무엇이 쓰여져 있는지 보고 싶었다. 댕기 처녀도 두 눈이 휘둥그래진 채 몰래 편지를 훔쳐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외다리 괴인이 그 편지를 상 위에 올려놓고 손으로 누르고 있어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외다리 괴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귀하께서 천리 먼 길을 불사하고 이곳에 온 것은 이 편지 때문임에 틀림없으시겠지요?"

"그렇습니다."

"귀하께선 이 편지를 누가 썼는지 알고 있소?"

"모르오."

"우리가 알기로는 강호 중에 이와 똑같은 편지를 받은 사람은 최소한 백 명에 이르고 있다고 하오. 하지만 이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라는 것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소. 우리도 사방으로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런 단서도 찾지를 못했소."

청면 사나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당신들이 알아내지 못했다면 또 누가 알아낼 수가 있겠소?"

외다리 괴인 또한 웃으면서 대꾸했다.

"우린 비록 이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그 속셈은 알 수가 있소."

청면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그 속셈이란 무엇이오?"

"그가 강호에서 명성을 지닌 모든 호걸들을 이곳으로 오게 한 것은 바로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곳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쟁탈케 하며, 서로를 살생케 하라는 것이며, 그는 가만히 구경만 하다가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들은 또 어째서 이곳에 온 것이오?"

"바로 그 자의 속셈이 너무나 흉악하여 우리는 이렇게 와야 했던 것이오."

이렇게 말한 외다리 괴인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계속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여러분들이 그 자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타이르기 위한 것이오. 여러분들이 만약 손을 뗀다면 이번 화는 무언중에 사라지게 될 것이오."

청면 사나이는 냉랭하게 웃었다.

"당신들의 마음 씀씀이가 괜찮구려."

외다리 괴인은 그의 말 속에 가시가 돋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역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그저 큰일을 될 수 있는 한 작게 와해시켜 버리고 싶을 뿐이며 작은 일을 무형으로 와해시킬 생각이오. 그래야 모두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소?"

청면 사나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소리쳤다.

"설사 내가 손을 대지 않는다 해도 당신들의 차지는 되지 않을 것이오."

외다리 괴인도 마주 큰소리쳤다.

"귀하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고하를 가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 수중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가 힘껏 밑으로 찍었다. 순간 불꽃이 사방으로 튀면서 네 자 길이의 쇠지팡이가 땅 속으로 석 자나 파묻혔다.

그러더니 괴인은 싸늘하게 소리쳤다.

"귀하의 사편이 백요생의 병기보에 일곱 번째로 나열되어 있다는것을 이미 알고 있었소. 내 오늘 한번 견식해 보고 싶소."

청면 사나이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이곳에 보물이 있는지 없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소?"

외다리 괴인은 손을 비비면서 대답했다.

"그렇소.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이러한 일로 인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너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오."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온 이상 어떻게 된 일인지 최소한 진상은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소."

외다리 괴인의 얼굴이 돌연 차갑게 변했다.

"그렇다면 귀하께선 손을 떼지 않겠다는 것이오?"

청면 사나이는 싸늘한 어조로 대꾸했다.

"나도 마침 당신들에게 견식을 시켜주려던 참이었소."

이렇게 대꾸한 청면 사나이는 왼손으로 상을 가볍게 누르며 몸을 공중으로 날렸다. 순간 예리한 파공음이 들리면서 그의 오른손엔 새까맣고 긴 채찍이 하나 들려졌다.

연한 병기는 길면 길수록 사용하기가 어렵다. 일곱 자 길이의 채찍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일류고수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청면 사나이의 수중에 들려 있는 긴 채찍은 상상할 수조차 없이 길었다. 설사 삼 장이 되지는 않는다 해도 이 장 대여섯 자는 능히 되었다.

그가 오른손을 가볍게 내휘두르자 그 긴 채찍은 날카로운 파공음을 발하면서 원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향해 감아갔다.

순간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면서 사십여 개의 동전이 한꺼번에 떨어져 내려왔다. 원 안에 들어가 서 있는 사십여 명의 사람들은 키가 유난히 큰 사람도 있었고 또 반면에 키가 유별나게 작은 사람도 있었다.

24 소이비도 제2권 공포의 장원莊園





공포의 장원(莊園)



여자가 여자를 강간하다니...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초류빈은 헛기침을 하고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매화도가 만약 진짜 여인이라면 남자를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네. 그러면 그 남자는 그녀를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할 수가 있고 필요하다면 그녀는 다시 그 남자를 제거할 수도 있지."

낭천은 아무 표정없이 대답했다.

"당신은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시는군요."

초류빈은 어깨를 으쓱 추스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많이 생각하는 것이 생각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일세."

그러나 낭천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쩌면...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잘한 것이 잘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초류빈은 빙긋 미소를 던졌다.

"이렇게 계속 나가다가는 얘기가 끝날 날이 없을 것 같네."

낭천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물었다.

"매화도는 삼십 년 전에 나타난 적이 있다는데 그렇다면 지금쯤 나이가 최소한 오십 살은 되었겠군요."

초류빈은 부정적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삼십 년 전에 나타난 매화도가 바로 지금의 매화도라고 단정할 수는 없네. 어쩌면 사제지간이거나 부녀지간일 수도 있을 걸세."

낭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서서히 입을 열었다.

"백요생도 절대 강경을 훔친 주모자가 아닐세. 그는 단지 심감으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모험을 하게 할 방법이 전혀 없었을 뿐이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심감은 소림사에 들어오기 전에 강호를 떠돌아다닌 적이 있어서 만약 재물을 노린다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네. 그래서 어떤 유혹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일세."

낭천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초류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초류빈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잠시 후 다시 흘러나왔다.

"백요생은 비록 공력이 고강하기는 하지만 일단 소림사에 들어가면 공력을 사용할 여지가 없네. 그래서 심감도 그에게 위협을 당할 리는 더더욱 없었네."

낭천은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똑바로 뜨고 물었다.

"어쩌면 백요생에게 어떤 약점이 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그 약점이라는 게 뭐지?"

이렇게 반문한 초류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소림사에 들어오기 전 단악의 모든 행위는 심감과는 아무 관련이 없네. 그것은 출가를 한 사람들이 인과(因果)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네. 이런 것을 잘 알고 있는 백요생이 심감이 출가하기 전에 행했던 행위로 심감을 위협할 수는 없네. 그리고 심감도 일단 소림사에 들어온 후로는 다시는 나쁜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네."

낭천은 다그치듯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초류빈은 신념이 가득찬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만약 그가 나쁜 일을 할 생각이 있다면 소림사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을 것일세. 소림사의 규율이 엄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그가 어찌 감히 그런 모험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초류빈이 말꼬리를 흐리자 낭천은 못내 궁금한 듯이 급히 물어왔다.

"그래서 무엇입니까?"

초류빈은 단정적으로 못박아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 결코 명리(名利) 때문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일세."

낭천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 검미를 찡그렸다.

"명리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면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단 말입니까?"

초류빈은 가볍게 탄식을 하면서 대답했다.

"그 같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절세의 미모를 지닌 여인일 뿐일세."

낭천의 얼굴에 아연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럼 매화도?"

초류빈은 서슴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매화도 같은 여인만이 그로 하여금 소림의 반역자가 되는 것을 불사하게 할 수 있네. 또 매화도 같은 여자만이 감히 소림의 장경을 훔칠 수 있네."

낭천은 흥미로운 듯 눈을 반짝 빛냈다.

"매화도가 절세의 미인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어쩌면 내 짐작이 틀렸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내 짐작이 잘못된 것이기를 바라고 있네."

낭천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다시 흥운장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초류빈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에게 그곳을 제외하고 갈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밤!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오직 작은 누각 위에 희미한 등잔불만이 켜져 어른거리고 있었다.

초류빈은 넋을 잃은 채 도깨비불 같은 등불을 한참 올려다보더니 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으며 심하게 기침을 했다. 순간, 손수건에 시뻘건 선혈이 묻어 나왔다.

초류빈은 손수건을 다시 품속으로 집어 넣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갑자기 들어가고 싶지 않아졌네."

낭천은 그의 웃음이 곰의 쓸개를 씹는 것처럼 쓰디쓰다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까지 오셨으면서 왜 들어가지 않으려 하십니까?"

"내가 하는 일에는 이유가 없는 것들이 매우 많네. 무엇 때문인지 나 자신도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라네."

어둠 속에서 보이는 낭천의 눈은 마치 예리한 칼날과도 같았으며 음성도 칼날처럼 예리했다.

"호유성이 그렇게도 미안해하고 있는데 당신은 그를 만나지 않을 생각인가요?"

"그가 나에게 미안해 할 것은 없네. 자기의 아내나 자식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일을 했어도 용서를 받을 수가 있네."

초류빈은 억양없이 대답하며 낭천의 어깨를 툭 쳤다.

낭천은 한참 동안 초류빈을 바라보더니 서서히 고개를 숙이며 말을 꺼냈다.

"당신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군요. 그리고 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친구입니다."

초류빈은 소리를 죽여 쿡쿡 웃었다.

"자네는 물론 나를 잊지 못할 것이네.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될 테니까."

"하지만...지금은....."

낭천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초류빈이 얼른 말을 가로챘다.

"나는 지금 자네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러니 어서 가 보게."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싸늘한 바람이 사람을 오싹 떨게 할 정도로 매섭게 불어왔다. 멀리서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소리와도 같았다.

말없는 가운데 두 사람의 맑은 눈에 안개가 끼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달은 물론 별도 없었고 다만 안개만이 그들의 온몸과 주위를 완전히 덮고 있었다.

초류빈은 갑자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안개가 끼는 것을 보니 내일 날씨는 매우 좋겠군."

그제야 낭천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목에 무엇이 꽉 막힌 것처럼 지극히 어색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홱 몸을 돌려 떠나갔다.

초류빈은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몸과 생명이 일순간이나마 어둠과 하나로 융합되는 것 같았다.

한편, 낭천은 초류빈과 헤어져 담장을 넘어서야 냉향소축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누르스름하게 퇴색한 창호지에 하나의 섬세한 인영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순간, 낭천의 간이 콩알만큼이나 졸아들었다. 방안의 사람은 책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낭천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그의 시야에 한시도 잊지 않고 생각해 왔던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문을 연 그는 문 앞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문이 열리자 발딱 일어나 놀라움과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었군요."

"그렇소, 나요."

낭천은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멀리서 들리는 남의 목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설소하는 요염한 몸매를 보기 좋게 흔들며 달려와 낭천의 가슴을 치며 원망스러운 것처럼 아양을 떨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법이 어디 있어요? 하마터면 놀라 기절할 뻔했잖아요."

이때 낭천의 표정은 지극히 차분하게 변해 있었다.

"당신은 죽은 줄만 알았던 내가 나타나서 놀랐소?"

설소하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안색마저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서 들어오세요. 바람이 차니까."

그러고는 낭천의 차가운 손을 잡고 안으로 끌어들였다. 설소하의 손은 따뜻하면서도 매끄러웠다. 어떤 상처라 해도 그녀의 손에 만져진다면 나을 것만 같은 그런 것이었으나 낭천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설소하는 의외라는 듯이 두 눈을 깜박거리더니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화가 나셨나요? 무엇 때문에 화가 나셨죠? 제게 얘기해 보세요. 제가 대신 그 화를 풀어드릴 게요."

그러고는 살포시 낭천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몸은 손보다 더 부드럽고 따스했으며 어떤 남자도 취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묘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뭉클한 감촉으로 낭천의 가슴에 와닿는 젖가슴이 그토록 달콤한 전율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낭천은 손을 들어 거칠게 그녀를 밀어냈다.

설소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다가 그 자리에 쓰러진 채 넋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제가 당신에게 뭘 잘못했지요? 무엇 때문에 저를 이렇게 대하는 거죠?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서 얘기해 보세요."

낭천은 돌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지금 설소하가 보고 있던 책이 바로 소림사가 잃어버린 장경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설소하는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미인의 눈물은 처절하리만큼 아름답고 가련하게 보였다.

"그날 당신이 떠난 후 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당신을 기다렸어요. 당신은 내가 얼마나 당신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영원히 알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돌아온 당신이 이렇게 변했으니 저는....."

그녀의 애소에도 불구하고 낭천은 마치 그녀를 처음 보는 것처럼 멍청하게 바라보다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신노삼의 방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어째서 나를 기다렸다는 것이오?"

설소하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고는 더듬거렸다.

"당신...당신 그게 무슨 뜻이에요?"

"백요생과 단악이 소림사의 장경을 당신에게 건네줄 때 당신은 그들로 하여금 신노삼의 방에다 무서운 함정을 설치하도록 했소. 당신은 나를 해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초류빈까지도 죽이려 했소."

낭천의 목소리가 살얼음보다 차갑게 흘러나오자, 설소하는 피가 맺히도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정말 제가 당신을 해쳤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물론이오. 내가 신노삼을 찾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오직 당신밖에 없었으니까."

"으흐흐흑!"

설소하는 참을 수 없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지만...그렇지만 제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해치려 했겠어요? 무엇 때문에....."

"그것은 당신이 바로 매화도이기 때문이오."

"네?"

설소하는 마치 벼락에 놀란 토끼처럼 발딱 뛰쳐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제가 매화도라고요?"

낭천은 확신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이 바로 매화도요."

설소하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입을 딱 벌렸다.

"매화도는 이미 당신에게 살해되었는데 당신은....."

낭천은 그녀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가로챘다.

"내가 죽인 사람은 당신이 속임수를 쓴 희생물에 지나지 않소. 타인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단 말이오."

낭천은 차츰 격해오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금사갑이 초류빈의 손에 들어갔고 또 그가 절대 당신에게 속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소. 그래서 자신의 입장이 매우 위태로워진 것을 발견하자 그날 밤 당신은 일부러 초류빈을 당신이 있는 곳으로 오게 한 것이오."

설소하의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그날 밤 저는 확실히 초류빈과 약속을 했어요. 그 때는 아직 당신을 몰랐을 때예요."

낭천은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고용한 그 꼭두각시로 하여금 당신을 납치해 가도록 한 것은 바로 초류빈으로 하여금 당신을 구하고 또 초류빈으로 하여금 그 꼭두각시를 살해하기 위함인데 그 이유가 도대체 뭐요? 즉 그건 세상 사람들이 매화도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신도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었소. 당신은 초류빈을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충실한 앞잡이까지 죽였소."

이 무렵 설소하는 눈물을 거두고 도리어 침착해지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낭천을 마주보았다.

"계속 얘기해 보세요."

낭천은 주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초류빈에게 의외가 생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고 나라는 사람이 당신을 구해낼 줄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소."

설소하의 눈빛 이 반짝 빛났다.

"제가 당신을 구해준 적이 있다는 것을 잊었나요?"

"잊지 않았소."

"제가 만약 매화도라면 무엇 때문에 당신을 구했겠어요?"

"그건 그 당시 일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당신은 나까지 이용하려 했던 것이오. 당신이 여기에다 나를 숨겨두었을 때 아무도 수색하러 오지 않자 나는 그때부터 의심했던 것이오."

설소하는 암울한 얼굴로 낭천의 냉혹한 얼굴을 주시했다.

"당신은 호유성도 나와 같은 공모자라고 생각하나요?"

낭천은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물론 당신의 음모를 모르고 있었소. 단지 당신의 이용을 받고만 있었을 뿐이오. 그리고 호유성도 초류빈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한 짓은 모두가 그 자신을 위한 것에 불과하오."

설소하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이 말은 모두 초류빈이 당신에게 해준 건가요?"

낭천의 얼굴이 한차례 실룩거렸다.

"당신은 천하의 남자가 다 바보들이라 생각하오? 당신이 두려워하는 남자는 초류빈 한 사람뿐이오. 그래서 당신은 온갖 방법을 다해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겠소?"

낭천의 음성은 갈수록 격동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놀라운 자제력으로 이를 악문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마음이 검을 뿐만 아니라 파렴치한 욕심쟁이요. 소림사의 장경까지도 갖고 싶어하며 출가한 사람까지 괴롭히다니, 당신은....."

설소하의 눈에서 다시 구슬 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는 당신을 잘못 보았어요."

낭천은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바라보며 분명하게 잘라 말했다."

"하지만 나는 결코 당신을 잘못 보지 않았소."

설소하는 하소연하듯 낭천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만약 제가 이 장경을 백요생이나 단악이 저에게 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믿겠어요?"

"당신이 어떤 말을 하든 나는 믿지 않을 것이오."

"이제야 당신의 뜻을 알겠군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서서히 낭천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걸음은 매우 느렸다. 그러나 무슨 결심을 굳힌 듯 한걸음 한걸음 힘이 들어가 있었고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등잔불이 그녀의 백옥같이 희고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고 흑백이 분명한 두 눈동자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녀는 한참 멍하니 낭천을 바라보다가 우울하게 입을 열어 물었다.

"당신은 저를 죽이러 왔지요? 그렇지요?"

낭천은 두 주먹을 불끈 헌 채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갑자기 자기의 옷을 찢어 눈같이 희고도 풍만한 젖가슴을 드러내고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야무지게 말했다.

"당신의 허리에 검이 있으니 저를 죽이세요. 저는 당신의 검이 제 가슴을 찔러 주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녀의 가슴, 티 하나 없이 곱고 부드러운 살결, 연분홍빛 젖꼭지, 그것은 아직 아이를 낳아 보지 않은 순결한 처녀의 것과 같았다. 뇌쇄적인 굴곡이 낭천의 목에서 갈증을 일으키게 했다.

낭천의 손이 서서히 검으로 이동되어 갔다.

그러자 설소하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달콤하고도 안정된 어조로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었다.

"어서 죽여 주세요. 당신 손에 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저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가 있어요."

그녀의 가슴이 심하게 떨려 큼직한 젖무덤이 묘한 율동으로 출렁거리고 긴 속눈썹에 덮인 두 눈에는 이슬처럼 맑고 깨끗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낭천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무정한 검은 날카로우면서도 차가웠다.

낭천은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시인하는 것이오?"

설소하는 다시 눈을 뜨고 낭천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그녀의 두 눈에는 처량함과 절망 그리고 사랑과 한이 한꺼번에 뒤범벅 되어 있었다.

"당신은 제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에요. 그런 당신이 저를 믿지 않는다면 제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슨 보람이 있겠어요?"

낭천은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했고 손등에는 파란 힘줄이 나타났다.

설소하는 낭천을 바라보며 애잔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매화도이며 또 제가 그렇게 악독한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어서 저를 죽이세요. 저는...절대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어요."

일순 낭천의 검을 잡고 있던 손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무정한 검!

검은 원래가 무정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어떠한가? 인간으로서 어찌 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펄럭이는 옷자락에 불이 꺼지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보는 설소하의 얼굴은 더욱 뇌쇄적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호흡소리는 감미로운 속삭임 같았고 또 사람을 흥분시키는 신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세상에 이런 감정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지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강한 감정을 안겨다 주었고 그 감정으로 인해 얼마 동안이나마 자신도 인간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했던 낭천이다. 그런 낭천이 어찌 그녀의 심장을 찌를 수 있을까? 검은 무정하다고 하지만 사람으로서, 아니 청년으로서 어찌 정이 없을 수 있으랴?

가을, 낙엽을 우수수 떨어뜨리고 나무는 동면으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길가의 맨 끝으로 거대한 장원 하나가 있었다.

이 거대한 장원도 가을 낙엽처럼 아무렇게나 내버려진 듯 매우 외롭고 고독해 보였다.

두 개의 큼직한 문은 일 년 내내 열려본 적이 없는 것처럼 붉은 칠도 퇴색하거나 떨어져나가 있었다. 커다란 문고리에도 녹이 슬어 있었다.

높다란 담장 안에서는 오래 전부터 사람의 소리라고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늦은 여름이나 초가을에는 이름모를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이 거대한 장원을 더욱 적막에 싸이게 한다.

이 장원도 전성기를 맞은 때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과거 일곱 명의 진사와 세 명의 탐화랑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이 중에는 공력이 경이적이며 가히 천하무쌍인 이름난 인물도 있었다. 십여 년 전 이 장원의 주인이 바뀌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무림을 진동시킨 많은 사건들이 벌어졌으며 이와 비례해서 수많은 강호 풍운아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후 이 장원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대(二代) 주인도 갑자기 종적을 감추어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자, 강호에는 이 장원이 흉가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고승(高僧)이건 기인이건 신분의 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이곳에 오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공포의 장원으로 변한 이곳은 밤이나 낮이나 사람이 감히 접근을 하지 못해 결국 찬란했던 과거의 빛을 잃고 버려진 것이다.

그러나 다만 밤이 되면 뒤뜰에 있는 누각 위에 시종 희미한 등잔불이 켜졌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 누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이며 또 무엇 때문에 혼자 이 공포스러운 장원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담장 뒤쪽으로는 자그마한 골목길이 하나 있었는데 바람이 불 때면 먼지가 눈앞을 가리고, 비가 내리면 진흙탕이 되어 걷기조차 어려웠다.

높다란 담장에 가리워져 이 골목에는 한 번도 햇빛이 든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지저분하고 음산한 곳이라 해도 사람이 산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이 골목에는 조그마한 주막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앞쪽은 싸구려 음식을 파는 식탁이 몇 개 있었고 뒤쪽으로는 성냥갑만한 객실 서너 개가 있는 주막의 주인은 불구자인 손꼽추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골목에 귀한 손님이 찾아들 리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천한 사람들을 손님으로 삼아 싼 가격으로 팔며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두더지 같은 천한 생활을 하고 있을망정 밖으로 나가 남의 비웃음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억만금의 재산이 있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손꼽추는 깨닫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람은 고독하다.

그는 때때로 집 앞에 앉아 장원 안의 누각 위에 켜져 있는 등잔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가 일쑤였다.

'저 누각 위에 있는 사람이 설사 의식주 모든 것이 풍족하다고 해도 그의 하루하루는 나보다 더 고통스럽고 적막할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자신에 대한 비웃음이기도 했고 또 자신에 대한 일종의 자위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 년 전 황혼 무렵이었을까. 이곳 주루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그렇다고 이 손님이 입고 있던 옷은 무슨 화려한 옷이 아니고 또 남들처럼 특별하게 생기지도 않았다.

이 손님은 몸집이 매우 크고 생김새는 지극히 준수했다. 그러나 보기는 매우 초췌했고 병자와 같은 모습에 가끔 허리를 숙인 채 심하게 기침을 하곤 했다.

그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객잔의 주인 손꼽추는 이 사람을 본 순간 다른 사람과는 차이가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꼽추가 불구자라 해서 비웃지도 않았고 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또 가련하다거나 동정하는 빛도 나타내지 않았다. 가여워한다거나 동정하는 것은 때때로 비웃음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손꼽추에게 안겨다 주었다.

이 손님은 술이나 음식을 가리지 않고 좋다 나쁘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며 꼭 해야 할 말 이외엔 마치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가장 이상한 것은 이 손님이 객잔에 들어온 이후로 한 번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손님은 처음 객잔을 찾아와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콩자반과 쇠고기 각각 한 접시와 만두 두 개, 그리고 일곱 주전자의 술을 시켰다. 일곱 주전자를 다 마신 그는 또 일곱 주전자의 술을 청해 그것도 말끔히 비웠다.

그런 후 일 년이 지났으나 그는 똑같은 생활을 해왔다.

그는 계속 기침을 하면서도 계속 술을 마셨고 일곱 주전자의 술을 다 마시면 다시 일곱 주전자의 술을 요구하여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쉬고 다음날 저녁 무렵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곤 한다.

손꼽추도 술을 매우 즐기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이 손님의 주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열네 주전자의 술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 사람은 생전토록 보지 못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아마 이런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며 후에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땐 하도 궁금하여 이 사람의 성명과 내력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웬지 말을 걸기가 어려워 지금까지 참아왔다.

또 물어본다 해도 대답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꼽추도 말이 없는 편에 드는 사람이다. 손님이 자기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이상 그 역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비가 십여 일 동안 계속 쏟아졌다. 날씨가 유난히 추워 손꼽추는 밤에 손님을 돌보기 위해 뒤에 있는 객실로 갔다.

그는 그 손님이 기거하고 있는 방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이상한 손님은 방바닥에 엎드린 채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 무서우리만큼 시뻘겋게 되어서 마치 얼굴에다 피를 바른 것 같았다.

그것을 본 손꼽추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조심스럽게 타일렀다.

"이렇게 쉬지 않고 술을 마시면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오래 살지 못합니다."

손님은 담담하게 웃으며 반문을 하는 것이었다.

"주인장께선 내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오?"

손꼽추는 일순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다정한 친구처럼 변해 버렸다. 손님이 없을 때면 두 사람은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손꼽추는 이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이 괴상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손님의 이름과 내력에 대해서만은 묻지 않았다.

이렇게 또 며칠이 지나자 손꼽추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우린 친구인데 최소한 친구의 이름은 알아둬야 할 것이 아니겠소?"

그 손님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껄껄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하하하...나는 술주정뱅이에 불과한 인간인데 어째서 주정뱅이라 부르지 않소?"

상대의 대답이 이쯤 되자 손꼽추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손꼽추는 이 신비스러운 손님에겐 어떤 절망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남은 목숨을 술에 담아 마셔 버리고자 함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나 이 신비의 손님은 술 외에도 매우 이상한 버릇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각을 하는 것이었으며 이 주정뱅이의 손에는 항상 예리한 칼이 들려져 있었는데 그 칼로 시종일관 조각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손꼽추는 그가 무엇을 조각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주정뱅이가 그 조각을 한 번도 완성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람은 너무나 괴상하고 신비스러워 보통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꼽추는 이 손님이 영원히 이곳에 기거하면서 같이 있어 주기를 갈망했다.

그날 아침, 손꼽추는 자리에서 일어나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는 것을 깨닫고 두툼한 솜옷을 꺼내 입고서야 밖으로 나갔다.

이 날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장사도 매우 한산했다. 몇 명의 마부들이 왔다 가자 손꼽추는 의자를 끌어다가 문 입구에 앉아 콩을 갈았다. 이때 골목 끝에서부터 두 필의 말이 달려왔다.

이 골목은 말이 다닌 적이 거의 없어 손꼽추는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았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노란색 장삼을 입고 있었다. 앞장선 사람은 짙은 눈썹에 큰 눈을 지니고 있었고 뒤의 사람은 매부리코를 한 사나이였다.

두 사람은 턱 밑에 염소 같은 수염을 길렀는데 나이는 삼십 세 정도였으며 생김새는 별로 이상한 것이 없지만 노란색 장삼이 매우 선명했다. 그들은 손꼽추를 보지 못하고 마상에 앉은 채로 공포의 장원을 담장 너머로 살펴보는 것이었다.

손꼽추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다시 콩을 갈기 시작했다.

얼마 후, 말발굽소리가 다시 들리는가 싶더니 두 사람은 객잔 앞에서 말을 내렸다.

손꼽추는 성미가 매우 괴상하기는 하지만 결코 자기가 장사꾼이라는 신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자기 집 앞에서 내리는 것을 보자 콩을 가는 것을 중지하고 공손히 물었다.

"두 분께선 뭘 드시려는 것입니까?"

짙은 눈썹에 눈이 큰 황삼인이 말을 받았다.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몇 가지 물어보려는 것뿐이오."

사나이의 말을 들은 손꼽추는 흥미가 없다는 듯이 다시 콩을 갈기 시작했다.

매부리코를 한 황삼인이 갑자기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우리는 당신의 말(言)을 사려는 것이오. 한마디 해 주는데 은자 하나씩을 드리겠소."

손꼽추는 구미가 당기는 듯 다시 손을 멈추고 쾌히 승낙했다.

"좋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그는 즉시 손가락을 내보였다. 눈이 큰 황삼인이 嬋퓬恬?금치 못하면서 물었다.

"그것도 한마디에 해당하는 것이오?"

"물론이오."

꼽추는 대답과 함께 다시 손가락 하나를 폈다.

매부리코의 황삼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정색을 하고 물었다.

"당신은 이곳에서 얼마나 살았소?"

"이십 년은 살았을 것입니다."

"이 장원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소?"

"초가의 장원이오."

"나중의 주인은 누구였소?"

"호유성이라는 사람이었소."

"당신은 그를 본 적이 있소?"

"없소이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손꼽추는 지극히 짤막하게 응수하고 있었다.

"장원을 떠났습니다."

"언제 떠났소?"

"일 년쯤 되었소."

"그 후론 돌아오지 않았소?"

"돌아오지 않았소."

매부리코의 장한이 미간을 슬쩍 찡그리며 다그쳤다.

"당신은 그를 보지도 못했다면서 어찌 그렇게 상세하게 알고 있소?"

손꼽추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저 장원의 하인들이 가끔 이곳에 와서 술을 팔아 주기 때문에 알고 있소."

매부리코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물었다.

"최근 낯선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무엇을 물어본 적이 없소?"

"없소이다. 만약 있었다면 나는 벌써 부자가 되어 이곳을 떠났을 테니까 말입니다."

짙은 눈썹에 눈이 큰 황삼인은 빙긋이 웃으며

"고맙소. 자! 받으시오."

하고는 한 냥 가량 되는 은자를 던져 주고는 이내 말에 올라 골목을 빠져나가 계속해서 장원 안을 살피는 것이었다.

손꼽추는 수중의 은자를 들여다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돈을 번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군....."

무의식 중에 고개를 든 그는 어느 틈엔가 주정뱅이가 나와서 멍청하게 선 채 황삼인들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손꼽추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늘은 매우 일찍 일어났군요?"

주정뱅이는 그제야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어젯밤에 어찌나 술을 빨리 마셨던지 벌써 깨어 버렸소."

그리고는 잠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오?"

"구월 열나흘입니다."

주정뱅이의 얼굴에 이상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이 보름이겠군요."

손꼽추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십사 일이면 내일은 당연히 보름이 아니겠소?"

주정뱅이는 무엇인가 다시 말을 하려다가 허리를 구부리고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손을 들어 탁상에 있는 술주전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술을 달라는 뜻이다.

손꼽추는 혀를 내두르며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만약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술을 마신다면 술을 파는 사람들은 甕醍?벼락부자가 되었을 거요."

황혼이 다가오자 장원 뒤뜰에 있는 누각 위에 등불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어둑어둑 날이 저무는 저녁의 공기는 나태하면서도 무언중에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술주정꾼은 아예 자신의 자리로 정해 놓은 듯한 자리에 뿌리를 박고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데 오늘의 태도는 평소와 달리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그는 술맛을 음미하듯 한모금 한모금 들이키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두 눈동자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또록또록 빛나며 조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상 위에 켜 놓은 촛불의 위치도 변해 있었다.

그는 누군가 기다리는 듯 시종일관 문쪽으로 시선을 주며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손님을 기다리기에 무료하던 손꼽추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몸을 뒤틀고 나서 말을 꺼냈다.

"오늘은 더 이상 손님이 오지 않을 것 같구려. 우리 문을 닫은 후 술이나 같이 나누기로 합시다."

그러자 술주정뱅이는 술잔에 남은 빈잔을 홀짝 들이키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시오. 내 짐작으론 아마 밤 늦게야 장사가 잘 될 것 같소."

손꼽추는 눈이 번쩍 뜨여 반색을 하다가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아시오?"

술주정뱅이는 제법 의젓한 태도를 짓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점을 약간 칠 줄 아오."

그의 이 말은 잠시 후에 너무나도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과연 용한 점장이란 말인가!

약 반 시진이 지나자 객잔 문앞이 별안간 소란스러워지고 서너 패의 손님들이 무더기로 들어온 것이다.

첫 번째 들어온 손님은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백발이 성성하고 남색 장삼을 입었으며, 손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뱃대를 든 노인이었으며 또 한 명은 검고 긴 두 줄기의 댕기를 늘어뜨린 처녀로 두 개의 영롱한 눈망울은 댕기보다 더 검게 빛났다. 보아하니 남삼노인의 손녀인 것 같았다.

그들의 뒤를 따르듯 두 번째 들어온 일행도 역시 두 명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신체가 우람하고 건장하게 보이는 구레나룻을 기른 사나이였다. 한데 이들 두 사람의 옷차림과 생김새는 서로 바뀌어도 모를 정도로 똑같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허리에 찬 칼마저도 똑같았다.

그리고 세 번째 패거리는 네 사람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은 몸집이 크고 다른 한 명은 그와 대조적으로 왜소하여 웃음을 자아내었다. 또 세 번째 사람은 젊은이로 자줏빛 안색에 자색의 긴 창을 등에 메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녹색 의상에 머리엔 금으로 된 장식을 꽂은 여자였다. 걸음걸이가 사뿐사뿐한 것이 처녀처럼 보였지만 나이는 다 큰 처녀의 어머니뻘은 되는 것 같았다.

손꼽추는 그녀가 허리를 그렇게 흔들고 다니다가 허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마지막 손님은 단 한 명이었다. 이 사람은 마치 해골에다가 가죽만 씌운 것처럼 깡말랐으며 얼굴은 지독히도 긴 말상이었다. 그리고 그 긴 얼굴에 손바닥만한 푸른 점이 있는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객잔 안에는 모두 다섯 개의 상이 있었다.

네 무리의 사람에다 주정뱅이까지 구석자리를 차지하여 앉자 좌석은 꽉 찼다.

손꼽추는 눈코 뜰새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한편 그는 손님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것을 원망도 했고 내일은 장사가 이렇게 잘 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이 네 패의 손님들은 모두 말이 적었다. 그저 묵묵히 앉아 술과 음식을 먹고 있을 따름이었다. 설혹 말을 하기는 한다 해도 속삭이는 것처럼 낮아 다른 사람들은 전혀 들을 수가 었었다.

'이상한 노릇이로구나.....'

하고 손꼽추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행동과 옷차림으로 보아 평상시에는 절대 이런 곳에 올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났을 때, 어깨에 긴 창을 메고 얼굴이 자줏빛인 젊은이가 긴 댕기를 들인 처녀를 똑바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댕기를 들인 처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여전히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자면(紫面) 청년이 갑자기 웃으면서 처녀를 향해 물었다.

"낭자는 노래를 파는 사람이오?"

댕기를 들인 처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태연하게 댕기를 높이 들어올려 보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면청년은 빙긋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한 곡 부를 줄은 알 게 아니오? 그저 잘만 부른다면 내 섭섭지 않게 상을 주겠소."

댕기를 들인 처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의미심장하게 대꾸했다.

"저는 노래는 못해도 얘기는 할 줄 알아요."

자면청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급히 물었다.

"무엇을 얘기할 줄 안다는 거요?"

댕기머리 처녀의 대답은 암팡진 것이었다.

"책이나 옛날 이야기라면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지요."

"그럼 더욱 잘 되었소. 그런데 어떤 얘기를 잘 하시오? 옥루몽이오? 아니면 금병매요?"

"다 틀렸어요. 저는 강호에서 일어난 가장 큰 소식과 무림에서 최근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요. 들어보시면 아마 신기하고도 긴장될 거예요."

"하하하...그거 더욱 잘 됐군요. 그런 일이라면 아마 모두들 듣고 싶어할 것이오. 어서 얘기해 보시오."

댕기머리 처녀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방긋이 웃었다.

"하지만 저는 하지 못하고 제 할아버지께서 할 줄 아세요."

자면청년은 처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백발의 남삼노인을 힐끗 바라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그럼 낭자는 무엇을 할 줄 아시오?"

댕기머리 처녀는 방그레 웃더니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할아버지께서 얘기하실 때 더욱 흥미가 진진해지도록 말동무가 되어 옆에서 도와드리고 있어요."

댕기머리 처녀가 방그레 웃을 때 양쪽 볼에 살짝 보조개가 생겼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매혹적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자면청년은 넋을 빼앗긴 듯 그 자리에 멍청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때 녹의를 입은 중년부인이 냉막한 표정을 한 채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얘기를 하려면 빨리 해봐라. 더럽게 추파를 던지지 말고."

지극히 모욕적인 언사라 보통사람이라면 벌써 발끈하여 한바탕 소란을 부렸을 것이건만 그 댕기머리 처녀는 그녀의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께서 말씀해 보세요. 술값 정도는 나올 테니까요."

남삼노인은 두 눈을 반쯤 감은 채 술을 한 잔 마시고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초류빈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당초 자면청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늙은이와 댕기머리 처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초류빈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모든 사람은 안색이 급변하면서 일제히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댕기머리 처녀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들어 보았어요. 의협심이 강하고 황금을 돌처럼 여긴다는 그 유명한 초탐화 아니에요?"

남삼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 네 말이 맞다."

댕기머리 처녀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듣자하니 그의 비도는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의 비도를 피해내지 못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남삼노인은 담배연기를 한 모금 뿜어내고 나서 나직이 말했다.

"만약 못 믿겠다면 너는 백요생이나 오독동자에게 가서 물어보아라. 그러면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백요생과 오독동자는 모두 죽지 않았나요?"

"그렇다! 그들은 모두 죽었지. 그들이 죽은 원인이 바로 그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댕기머리 처녀는 귀엽게 혀를 쏙 내밀었다.

"그럼 저는 믿어지지 않아도 믿어야 되겠군요. 그 말을 믿지 않았다가는 죽을 테니까요."

이 때였다.

얼굴에 푸른 점이 있는 깡마른 사나이가 냉막하게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 두 조손(祖孫)의 이야기에 끌려 이것을 전혀 듣지 못했으며 술주정꾼은 이미 만취한 듯 상에 엎드려 있었다.

남삼노인은 뻐끔뻐끔 담배를 빨고 차를 한 잔 마시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초류빈과 같은 영웅호걸이 지금은 죽고 이 세상에 없다."

댕기머리 처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그쳤다.

"죽었다고요? 그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가 이 세상에 또 있었나요?"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꼭 한 명 있다."

"그게 누구지요?"

"그것은 바로 초류빈 자신이다."

댕기머리 처녀는 잠시 멍하니 노인을 쳐다보고 있다가 소리없이 웃으며 물었다.

"사람이 어찌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있겠어요? 제 생각 같아서는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 같군요."

"설사 그가 세상에 살아 있다고 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한스럽고 안타까운 일이지....."

"그 사람 외에 또 어떤 사람을 영웅이라 할 수 있나요?"

남삼노인은 지체없이 입을 열었다.

"너는 낭천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들은 것 같군요."

이렇게 대답한 처녀는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말했다.

"듣자하니 그 사람의 검법은 신속하기가 천하무쌍이라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남삼노인은 오히려 반문했다.

"이곡의 공력은 어떻지?"

"그의 청마수는 병기보에 아흡 번째로 나열되어 있으니 공력도 물론 상당하겠지요."

"철적 선생. 소림의 심감 대사, 조정의, 전칠 등의 공력은 또 어느 정도지?"

"그들은 모두 강호에서 제일가는 고수들이에요."

남삼노인은 그제야 빙그레 웃으며 핵심적인 말을 했다.

"낭천의 검법이 만약 쾌속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왜 그의 검법에 패했겠느냐?"

댕기머리 처녀는 궁금한 듯이 물었다.

"낭천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지요?"

남삼노인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 역시 초류빈과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소식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들은 바가 없고 다만 설소하와 함께 실종이 되었다고 하더군 "

설소하라면 천하 제일의 미인으로 호칭되었던 설낭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았다. 바로 그녀야."

댕기머리 처녀는 탄식을 금치 못하여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이라는 게 뭐죠? 정 때문에 울고 웃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심지어는 정으로 인해 목숨까지 잃는 사람이 있으니....."

이때 자면 청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참견을 했다.

"서론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하겠다는 얘기가 도대체 뭐요?"

남삼노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초류빈이나 낭천 같은 인물들의 행방이 묘연하니 강호에 또 무슨 큰일이 일어나겠소.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 늙은이는 더 할 얘기가 없구려."

얼굴에 푸른 점이 있는 깡마른 사나이가 냉랭하게 웃으면서 말 틈에 끼여들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남삼노인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요? 그럼 귀하의 소식이 이 늙은이보다 더 영롱하단 말이오?"

깡마른 사나이는 주위를 휘둘러보며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얼마 안 있어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할 것이오!"

"언제 어디서 발생한다는 말이오?"

깡마른 사나이는 가볍게 상을 쳤다.

"지금 바로 이곳에서 발생할 것이오!"

"뭐라고요?"

이 말이 나오자 쌍동이 형제와 세 번째로 온 네 명의 안색이 일시에 싹 변했다. 그러자 녹의의 중년부인이 무엇인가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호들갑스럽게 웃으면서 소리쳤다.

"지금 이 시간에 이런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믿을 수가 없군요."

깡마른 사나이는 냉랭하게 웃으며 자신있게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최소한 여섯 명이 죽게 될 것이오."

녹의를 입은 중년부인이 급히 물었다.

"누구누구 여섯 명이죠?"

깡마른 사나이는 술을 한 잔 마시고 나서 또박또박 말했다.

"백모후(白毛厚) 호비(胡非), 대력신(大力神) 단개산(段開山), 철창 소패왕(鐵槍 小覇王) 양승조(楊承祖), 수사(手蛇) 호미, 그리고 남산쌍호(南山雙虎) 한(韓)씨 형제 등 여섯 명이오."

단숨에 여섯 명의 이름을 대자 쌍동이 형제와 세 번째로 들어온 네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놈은 뭘하는 놈이기에 감히 이곳에서 그 따위 방자한 소리를 하느냐?"

이렇게 고함을 지른 사람은 바로 대력신 단개산이었다. 이 사람이 일어선 모습은 마치 반으로 잘려진 철탑과 흡사했다.

남산 쌍호 한씨 형제도 몸집이 크고 우람했으나 그에 비해서는 머리 하나가 작았다.

대력신은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네놈이야말로 재수가 없게 생긴 것이 오늘밤을 넘기기기 어렵겠구나."

말이 막 끝나는 순간, 갑자기 깡마른 사나이는 가벼운 연기처럼 몸을 날려 그의 앞으로 달려가 대력신의 따귀를 이십여 차례나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단개산에게는 분명히 두 손이 있었지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으며 또 두 다리가 있었으나 전혀 피할 수도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깡마른 사나이의 동작은 정녕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신속무비한 동작에 놀라 멍청히 넋을 잃고 말았다.

깡마른 사나이의 냉혹한 목소리가 실내의 정적을 깨뜨렸다.

"너는 내가 너희들을 죽일 것이라 생각했느냐? 너희들이라면 아직 내가 손을 쓸 필요가 없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너희들의 말투가 불손해서 그저 경고를 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한 그는 다시 제자리로 천천히 돌아갔다.

이때 철창 소패왕 양승조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잠깐! 누가 우리를 죽이려 한다는 것인지 얘기해 보아라."

고함을 지른 그는 번개같이 긴 창을 내밀어 깡마른 사나이를 향해 찔렀다.

퍽!

?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무수한 창화(槍花)가 형성되어 폭사되어 나갔다. 바로 정통적인 양가의 창법이었다.

깡마른 사나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너희들을 죽일 사람이 곧 올 것이다!"

하고는 슬쩍 허리를 틀더니 그의 긴 창을 옆구리에다 끼는 것이 아닌가.

양승조는 있는 힘을 다해서 빼내려고 했으나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자줏빛 얼굴이 괴상한 색깔로 변했다.

깡마른 사나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희들은 도망을 하려 해도 소용이 없으니 조용히 앉아서 기다려라."

그러고서야 그는 옆구리에 있는 창을 놓아주었다. 그 바람에 있는 힘을 다해 창을 당기고 있던 양승조는 보기좋게 뒤로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수사 호미가 그를 붙잡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술상이 박살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양승조의 창은 이때 하나의 평범한 철봉으로 변해 있었다. 창날이 어느 틈엔가 부러져나가 온데간데없이 없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탁!

깡마른 사나이는 떨어진 창을 상 위에다 찍고는 자리에 앉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서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23 소이비도 제2권 찾을 수 없는 길





찾을 수 없는 길



초류빈은 빙긋 미소를 띠며 말했다.

"대사께선 운수가 매우 좋은 것 같습니다. 극락동자에 의해 독살된 사람은 실로 매우 보기가 흉하오."

심수 대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몇 년 전에 극락동자에 의해 독살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중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신이 검게 변했고 이내 온몸이 썩어 나중엔 뼈만 앙상하게 남았을 뿐이오. 그리고는 뼈까지 검게 변해 버렸소."

심수 대사는 심미 대사의 변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 이사형께선 중독되신 지 며칠이 지났지만....."

그때, 초류빈은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세심히 시체를 살펴보았다.

"그렇습니다. 심미 대사께선 중독된 지 며칠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아직 무서운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소. 대사께선 무엇 때문인지 모르시오?"

심수 대사가 고개만 끄덕여 보이자, 초류빈은 정색을 하고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그것은 심미 대사께서 또 한 가지 무서운 독에 독살되었기 때문이오."

심수 대사는 대경실색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초류빈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심미 대사께선 비록 극락동자의 오독수정에 중독되기는 했으나 독상은 그리 깊지가 않았소. 게다가 심후한 내력으로 독물을 체외로 밀어내 돌아올 때까지 독성이 발작하지 않았던 것이오."

심수는 이해하겠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흉수는 심미 대사가 비밀을 폭로할 것이 두려워 다시 극히 무서운 독으로 심미 대사를 해친 것이오."

심수 대사는 의혹스런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매우 많소. 그런데 어째서 또 독을 사용한 것일까요?"

"그것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 사람을 죽이든 자연 흔적이 남게 되기 때문이오. 심미 대사가 중독되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흉수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다시 독을 사용한 것이오."

심수 대사는 초류빈의 말이 모두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들은 이사형이 극락동자의 독에 의해 죽었다고만 생각할 뿐 더 이상 흉수를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요."

초류빈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흉수는 비록 수법이 매우 세밀하고 노련했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심수 대사는 긴장하며 흥분한 신색으로 황급히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그것은 바로 어떠한 독이건 간에 서로 상극된다는 것이오. 흉수가 내린 독이 오독수정독의 독성보다 강했기 때문에 심미 대사의 유체는 아직까지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던 거요."

심수 대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뜻은 알겠소. 하지만 독을 내린 자가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잖습니까?"

초류빈의 표정은 더욱 신중해졌다.

"대사께서는 심미 대사가 돌아오신 후 무엇을 복용했는지 아시는지요?"

심수는 눈동자를 굴리며 기억하려 애쓰더니 이내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복용하신 거라고는 약 한 사발뿐이오."

"그 약을 누가 복용시켰습니까?"

"그 약은 칠사제 심감이 지은 것이고 먹이기는 사사형인 심촉(心觸)과 육사제 심등(心燈)이오."

심수 대사는 암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므로 그들 세 사람에게 모두 독을 쓸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요."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천하의 독은 크게 나누어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독약은 무색무미하지만 중독된 사람으로 하여금 처참히 죽게 할 수 있소. 이러한 독은 비단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무서운 독성은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경계심을 갖게 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심수 대사가 급히 물었다.

"그 오독수정독은 물론 그러한 독에 속하는 것이겠군요?"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초류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또 한 가지의 독은 무색무미는 아닐지언정 독살된 사람으로 하여금 죽은 후에 아무런 이상도 나타나게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독살되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심미 사형을 독살한 사람이 바로 그러한 독을 사용했단 말입니까?

"바로 이 두 가지 독의 독성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서로 상극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독도 무섭기는 하나 두 번째 독은 더욱 무서운 것으로 강호 중에서 그러한 독을 사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심수 대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소림의 문하 중에서 독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은 몇이나 있습 니까?"

그러자 심수 대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더듬거렸다.

"그것은....."

"소림사는 강호의 영도자격이며 무림의 정종으로써 물론 독에 대해선 금기로 삼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잠시 머뭇거리던 심수 대사는 어떤 결단을 내린 듯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꺼냈다.

"소림의 칠십이 절예 중에 독이라는 것은 없소이다."

"심촉 대사와 심등 대사는....."

초류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수 대사가 급급히 말을 받았 다.

"사사형께선 아홉 살 때 이미 삭발을 하셨으며 육사제는 강보에 싸인 채로 불문에 들어왔소. 그들 두 사람은 아마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독약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오."

초류빈은 담담히 웃었다.

"그러면 독을 내린 자가 누구겠소?"

순간, 심수 대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럼 칠사제 심감의 짓이란 말이오?"

초류빈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심감 대사는 중도에 불문에 들어왔고 불문에 들어서기 이전에는 칠교서생(七巧書生)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독의 대가였던 것이다.

심수 대사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심감이.....

작은 정자 밑에 다섯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장문인 심호 대사를 위시하여 심촉 대사, 심등 대사, 심감 대사 그리고 백요생 등 이 모여 앉아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굳어져 있어 주위의 공기마저도 그들 의 표정에 의해 응결된 것 같은 기분을 자아냈다. 낭천은 정자의 한구석에 있는 기둥 옆에 쓰러져 있었는데 머리를 들 기운조차 없는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심호 대사는 낭천을 한참 동안이나 내려다보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백요생에게 말을 건넸다.

"초류빈의 표정이 어떠했소? 나올 것 같소?"

백요생은 자신이 있는 듯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인물이라고 생각하오?"

백요생은 여전히 빙글거리고 있었다.

"도둑질에도 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심호 대사는 장탄식을 터뜨리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 그 자리에서 돌부처처럼 굳어졌다. 그의 눈에 심수 대사가 나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심수 대사는 이때 이 미 원내로 들어서고 있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초류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심호 대사는 매우 반가운 듯 급히 마중을 하면서 물었다.

"별고 없었는가?"

심호 대사는 소림의 장문인으로서 추호의 손색도 없는 인물답게심수 대사를 보자마자 우선 그의 몸부터 걱정을 한 것이다.

심수 대사는 공손히 합장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사형의 관대한 배려에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제가 무사히 나왔습니다."

이때 심감 대사가 심수에게 다가오며 궁금한 얼굴을 감추지 못 하며 물었다.

"초류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심수 대사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는 이미 장경을 가지고 갔네."

심감 대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라고요? 어떤 장경을 가지고 갔습니까?"

그의 표정은 심수 대사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 다.

"장경각에서 잃었던 것 말일세."

순간 심감 대사는 얼굴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며 이어 냉랭하게 웃었다.

"장경을 훔쳐 간 자가 바로 그였군요. 그런데 사형께선 어찌하 여 그를 가볍게 놓아 주었습니까?"

"그것은 장경을 훔쳐 간 자가 바로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세."

이렇게 말한 그는 심감 대사의 속마음을 꿰뚫기라도 할 듯이 그의 표정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말했다.

"장경을 훔쳐 간 자가 바로 이사형을 해친 흉수일세. 이사형께 서 그 흉수의 비밀을 발견하자 그는 자신의 비밀이 탄로날까 봐 이사형을 해쳐 입을 막은 것이지...하지만 그 흉수는 초류빈이 아니다."

심감 대사의 얼굴이 핼쓱하게 굳어지며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다그쳤다.

"그럼 그게 누굽니까?"

심수 대사의 눈엔 그의 표정이 매우 불안해 보이는 것을 꿰뚫어 보며 두 눈으로 무서운 살기를 내뿜었다.

"바로 네놈이다!"

심감 대사의 얼굴이 변하면서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그러나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말했다.

"아니...오사형께선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제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심수 대사는 냉막하게 소리쳤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이냐!"

이미 모든 것이 판명되었는데도 시치미를 떼려 하는 심감 대사의 목을 당장에 잘라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심감 대사는 더 이상 심수 대사와 대항할 용기가 없었다. 그는 급히 몸을 돌려 심호 대사를 향해 공손히 예를 취했다.

"대사형께선 이 일을 원만히 해결해 주십시오. 제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당치 않은 모함도 있습니까? 제자 정말 로 억울합니다."

심촉과 심등 그리고 백요생도 이 갑작스럽고도 믿어지지 않는 일에 대해서 크게 놀라 잠시 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심호 대사 역시 의외가 아닐 수 없었던지 극도로 창백해져 신음을 하듯 입을 열었다.

"이사제는 분명히 초류빈의 독수에 당했는데 자네는 어찌하여 그를 감싸고 도는가?"

이때 백요생이 급히 말을 받았다.

"만약 소생의 기억이 틀림없다면 심수 사형께서는 과거 초류빈과 같은 관직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심감 대사는 분에 찬 어조로 소리쳤다.

"오사형께서도 초류빈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 같습니다."

심수 대사는 주위의 여러 사람의 말에 상관하지 않고 살기어린 어조로 말했다.

"이사형께서 돌아가시게 된 원인은 극락동자의 오독수 때문이 아닙니다."

심수 대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심감 대사가 급히 끼여들었다.

"사형께선 그것을 어떻게 단정지을 수가 있습니까?"

심감 대사는 심수 대사를 완전히 적대시하고 있었으나 심수 대사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날렸다.

"흐흥! 어리석은 놈! 너는 네가 한 짓이 영원히 감추어질 줄 알았느냐? 이사형께서 임종하시기 전에 한 가지 남기신 물건을 잊진 않았겠지?"

이렇게 소리친 그는 품속에서 심미 대사의 독경잡기를 꺼내 들었다.

심호 대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이사형께서는 본사를 떠나시기 전에 이미 장경을 훔쳐 간 반역자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다만 너무나 착하신 이사형께선 사실을 증명하시지 않고 또 반역자의 이름을 밝히시기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만일에 대비해 이 책에다 이름을 남기셨던 것입니다."

심호 대사의 안색이 재차 변했다.

"아니, 그것이 사실인가?"

심감이 다시 끼여들었다.

"거기에 진짜 나의 이름이 적혀 있다면 저는 기꺼이....."

심수 대사는 냉랭하게 웃었다.

"흥! 기꺼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네놈이 비록 이름이 적혀 있던 마지막 장을 찢어내긴 했지만 너의 그 교활한 심보를 잘 알고 계신 이사형께서 또 한 장에다 이름을 써 놓았다는 사실을 몰랐구나."

심감은 대경실색하여 갑자기 심호 대사의 앞에 엎드리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오사형께서는 외인과 내통하여 제자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합니다. 대사형께선 통촉해 주십시오."

심호 대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시선을 백요생에게로 옮겼다.

백요생은 주위 사람을 한 번 둘러보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백지 위에 비록 검은 글자가 쓰여져 있다고 해도 그것은 누구나가 다 쓸 수 있을 것이오."

심감 대사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설사 이사형의 책에 저의 이름이 쓰여 있다 해도 그것을 이사형께서 쓴 것이라고 어떻게 증명할 수가 있습니까?"

백요생이 담담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듣자하니 초탐화는 문무를 다 갖춘 자로서 특히 서예에 조예가 깊고 명가의 글이라면 모두 배웠다고 하오."

심감 대사가 다시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그러한 그가 한 사람의 필적을 모방한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쉬울 것입니다."

심호 대사는 심수 대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꾸짖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자네는 평소에 매우 신중했거늘 오늘은 어째서 이렇게 경솔한 짓을 하는가?"

그러나 심수 대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강경하면서도 공손하게 말했다.

"사형께서 만약 이 증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또 다른 증거를 대겠습니다."

"어서 말해 보게."

"원래 이사형의 방에 있던 달마역근경도 이미 없어졌습니다."

심호 대사는 아연실색하여 다그쳤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심수 대사는 엄숙한 표정을 짓고 우렁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초탐화는 그 장경이 아직 본사에서 나가지 못했으며 필시 심감의 방에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는 이미 일진과 일균을 시켜 심감의 방을 감시하도록 시켰습니다."

심감 대사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여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사형께선 그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귀를 기울일 가치조차 없습니다."

이렇게 소리친 그는 급히 밖으로 달려갔다.

장내의 대사들이 제각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이 뜻밖의 일을 긍정하려 들지 않았으나, 심수 대사의 얼굴엔 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는 가슴이 요동침을 느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눈앞의 일이 모두 사실이건만 심수 대사 역시 지금의 이 일들이 사실이 아니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심감이 바로 장경을 훔치고 이 사람을 죽인 흉수라니...앞으로 닥쳐올 일들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우선 자신도 소림의 한 제자로서 소림사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소림의 장문인 심호 대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즉시 몸을 날려 심감 대사의 뒤를 따랐다. 그 역시 심감 대사가 자신을 배반했다는 치욕감에 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심감 대사는 정자에서 뛰어나와 단숨에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심감 대사의 방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그는 방안으로 뛰어들자마자 일장을 밀어내 목함을 부수었다. 과연 그 안에는 바로 심미 대사가 아끼던 역근경(易筋經)이 들어 있었다. 심감 대사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미친 듯이 소리쳤다.

"이것은 본시 이사형의 방안에 있던 것인데 그들이 나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일부러 이곳에다 갖다 놓은 것입니다. 대사형께선 절대로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닥쳐라! 내 너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는 역근경이 이 목함 속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어찌하여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이 목함을 부순 것이냐?"

그러자 심감 대사는 그 자리에 선 채 멍청해지며 대꾸할 말을 잊었다. 아니, 더 발악을 할 용기를 잃은 것이다.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눈총이 얼굴과 가슴 구석구석을 날카롭게 찔러오자, 그는 시커먼 절망의 막이 서서히 자신을 덮쳐 오고 있음을 느꼈다.

심수 대사는 심호 대사의 표정을 살피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초탐화는 이러한 방법을 써야만이 그의 혐의를 증명할 수가 있다고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때, 웃음 섞인 호탕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저의 그러한 방법은 매우 모험적인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걸려들지 않았다면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동시에 초류빈의 모습이 장내에 나타나자 심호 대사는 장탄식을 터뜨리며 공손히 합장의 예를 취했다.

초류빈도 급히 포권의 예를 취해 답례를 했다. 쌍방간의 이 예의에는 숱한 대화가 포함되어 있었고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심감 대사는 서서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심촉 대사와 심등 대사가 이미 그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매우 엄숙했다.

심호 대사는 부드득 이를 갈며 소리쳤다.

"단악! 소림은 오늘날까지 너를 후하게 대해 왔거늘 너는 무엇이 부족하여 이같은 일을 겁없이 저지른 것이냐?"

단악은 바로 심감 대사의 속명이다. 심호 대사가 그를 속명으로 부른 것은 이미 그를 불문에서 축출시켰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단악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제자...잘...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땅에 엎드리더니 애걸을 하기 시작했다.

"제자는 사실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은 것입니다. 그에게 현혹당해 그만...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대사께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심호 대사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 대노하여 소리쳤다.

"누구에게 지시를 받은 것이냐?"

이때 백요생이 심호 대사에게 가까이 다가서면서 입을 열었다.

"누가 그를 지시했는지 소생은 대략 짐작이 갑니다."

심호 대사는 의아해하며 급히 다그쳤다.

"선생께선 어서 얘기해 보시오."

백요생은 음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흐흐흐...바로 나요."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요생에게 집중되었다. 이때, 심호 대사의 안색은 누구보다 크게 변해 있었다. 백요생의 손이 이미 심호 대사의 병풍, 천정, 부분, 백호의 사대 혈도를 찍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안 심수 대사는 대경실색하여 소리쳤다.

"이제보니 심감을 지시했던 자가 바로 당신이었군!"

심수 대사는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백요생을 향해 싸늘한 살기를 폭사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백요생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가벼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소생은 그저 귀사의 장경을 한번 구경해 보고 싶었을 뿐이오. 흐흐흐...여러분들이 이렇게 소심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구려."

심호 대사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흠, 나는 당신과 수십 년을 사귀어 왔지만 당신이 이렇게 나를 배신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소."

백요생은 장탄식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소. 하지만 단악이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내가 만약 그를 도와주지 않으면 그는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거요."

"하지만 이젠 그 누구도 그를 구할 수 없게 되었소."

이때였다. 엎드린 채 용서를 빌던 단악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부리나케 뛰어나와 역근경을 집어 들고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흐.....당신들의 말이 맞소. 이젠 누구도 나를 도울 수가 없으며 또 도울 필요조차 없소. 자! 이젠 장문인께서 우리를 산 밑까지 좀 바래다 주어야겠소. 당신들이 만약 장문인을 살리고 싶다면 경거망동을 삼가하시오."

심수 대사는 화가 치밀어 전신이 심하게 떨렸지만 장문인의 앞이어서 감히 나설 수가 없었다. 또한 심수 대사뿐만 아니라 다른 소림의 제자들도 심감 대사가 물어뜯고 싶도록 밉고 저주스러웠지만 감히 나서질 못했다. 장내는 무거운 침묵으로 사람들의 표정도 침통하게 굳어져 있었다.

잠시 후, 심호 대사는 소림의 제자들을 한 번 휘둘러보더니 명령조로 소리쳤다.

"자네들은 나의 말을 명심하게. 만약에 자네들이 소림을 중요시한다면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어서 이 반역자를 처치하게."

그러나 백요생은 느긋한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 뭐라고 하시든 간에 저 사람들은 대사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하지는 못할 것이오. 흐흐흐...소림 장문인의 목숨 하나가 소림사의 모든 제자들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니까....."

그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백요생의 마지막 한마디가 끝나는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싹 가셔지고 몸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순간, 칼빛이 번쩍하더니 비도탈명이 이미 날아가 백요생의 목에 여지없이 꽂히고 말았다. 어찌나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었든지 초류빈이 어떻게 칼을 던졌는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백요생은 심호 대사를 방패로 삼고 있었고 그의 목은 바로 심호 대사의 목 옆에 있어 수시로 심호 대사의 목 뒤로 자신의 목을 숨길 수가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감히 누가 경거망동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칼빛이 번쩍하고 백요생이 미처 피하기도 전에 초류빈의 비도는 이미 백요생의 목에 관통되고 말았던 것이다. 심수 대사와 심촉 대사, 그리고 심등 대사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심호 대사를 보호했다.

백요생은 튀어나올 듯한 눈동자로 초류빈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얼굴이 경련에 따라 점점 일그러져 갔고 경악과 회의 그리고 의혹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초류빈의 비도가 자신의 목을 관통시킬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한참 동안이나 초류빈을 노려보던 백요생은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실룩거렸으나 그의 입에서는 그 어떤 말도 나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를 응시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백요생이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을 입모양만으로도 짐작했다.

'내가 잘못했다...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야.'

그렇다. 백요생은 확실히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다. 결국 자신의 꾀에 자신이 속은 것이라고 할까. 이윽고 백요생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졌다.

초류빈은 장탄식을 터뜨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놈은 병기보를 만들어 천하의 병기를 비평하면서 무림의 지자(智者)로 군림해 오더니 결국 자신이 비평을 하던 병기에 의해 죽을 줄이야....."

초류빈의 비도는 백요생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욱 신속하고 정확했던 것이다.

심호 대사는 초류빈의 앞에 합장의 예를 취했다.

"노승도 잘못 생각했었소."

이렇게 말하던 그는 갑자기 아연실색하면서 소리쳤다.

"반역자!"

단악은 어느새 방에서 빠져 달아난 것이다. 사실 단악이란 사람은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반응이 빠를 뿐만 아니라 신법도 신속해 단숨에 마당으로 달려나간 것이다.

소림의 많은 문하들은 아직 이 일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설사 그를 보았다 해도 막지 못한다. 소림의 수석대사의 앞길을 누가 감히 막겠는가.

심감 대사 단악이 막 정자를 통과할 때 낭천은 마침 있는 힘을 다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백요생과 단악의 점혈수법이 비록 중하기는 했지만 가끔 그 효과를 잃을 때가 있었던 것이다.

낭천이 일어나는 모습을 발견한 단악의 두 눈에 즉시 살기가 번뜩였다. 지금 자신은 비록 쫓기고 있는 몸이지만 자신의 가슴을 무겁게 메우고 있는 모든 울분을 낭천의 몸에다 발산하리라고 마음을 다졌다.

단악은 몸을 잽싸게 날려 낭천에게 덮쳐 갔다. 이 때의 낭천은 전신에 아무런 기력도 없었고 마치 한 뭉치의 솜덩어리와 다를 바 없었다. 잔뜩 울분에 찬 단악이 이렇게 무기력한 낭천을 처치한다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단악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소림신권을 격출했다. 단악이 소림사에 들어온 지 이미 십여 년이 지났고 또 그 시간을 결코 헛되게 보내지 않았다. 소림신권은 당시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는 매우 위력있는 공력으로써 그 힘은 더할 수 없이 강하여 낭천과 같이 무기력한 사람을 처치하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단악의 손이 낭천을 향해 덮치는 순간,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낭천의 팔도 앞으로 뻗쳐졌다. 낭천의 동작은 비록 느렸지만 마지막 순간에선 단악보다 빨랐다.

단악이 손을 내뻗는 다음 순간 그는 갑자기 목이 싸늘해지면서 심한 통증과 호흡이 정지되는 것을 느꼈다. 마치 마귀의 날카로운 손에 자신의 목이 여지없이 잡힌 것 같았다. 그의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으며 그의 두 눈엔 경악과 회의 그리고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단악 역시 낭천의 동작이 얼마만큼 빠르고 유력한 것인지 이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청년이 무엇으로 자신의 목을 찌른 것인지 그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단악의 분노에 어린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낭천은 난간에 기댄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이때, 단악을 뒤따라 달려온 심호 대사 일행이 이 광경을 보고 대경실색하며 그 자리에 굳어졌다.

그들은 역시 이 청년이 이렇게 허약한 중에서도 악에 받친 단악을 쓰러뜨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엄청난 일이었다.

단악의 몸에선 뜨거운 선혈이 쉴새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 가운데엔 엄지손가락 굵기의 고드름이 꽂혀 있었다. 이때, 고드름은 뜨거운 피에 의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정자의 바로 밑엔 많은 고드름이 맺혀 있었다. 낭천은 바로 그 중의 하나를 끊어 소림사의 칠대 고수인 심감 대사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심호 대사는 낭천의 창백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뿐 일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낭천은 소림사의 사람들은 보지도 않고 그저 초류빈만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창백한 그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초류빈도 따라 웃었다.

심호 대사는 이제야 나직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두 분께선 노승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낭천이 고개를 돌리며 심호 대사를 향하여 냉랭히 소리쳤다.

"초류빈이 매화도입니까?"

심호 대사는 당황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럼 내가 매화도인가요?"

"시주도 또한 아니오."

낭천은 심호 대사를 무섭게 쏘아보며 다그쳤다.

"그렇다면 이제 우린 가도 좋습니까?"

심호 대사는 만면에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시주께선...행동이 불편하실 것 같은데...우선....."

그러나 심호 대사의 의도를 안 낭천은 그가 말을 다하기 전에 차갑게 소리쳤다.

"대사께서는 염려하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직은 걸을 수 있습니다. 설사 걷지 못한다 해도 나는 기어서라도 이 산을 내려갑니다."

심촉 대사와 심등 대사도 고개를 떨구었다. 수백 년 이래 소림사의 장문인에게 감히 이렇게 무례하게 대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입이 열 개라도 입을 열지 못할 형편이었다.

낭천은 초류빈에게 다가가 덥석 손을 움켜잡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낭천은 더욱 가슴을 폈다. 이 청년의 몸은 쇠로 만들어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더할 수 없이 큰 학대를 해도 그를 결코 굴복시킬 수 없었다.

초류빈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돌려 심수 대사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대사들께선 저희들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훗날 다시 만나뵙겠습니다."

심수 대사가 급히 따라 나서며 말했다

"제가 배웅해 드리겠소."

초류빈은 빙그레 미소를 짓고 대꾸했다

"성의는 대단히 고맙습니다. 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대사께선 조금의 염려도 마십시오."

"그러시다면 내 염려하지 않겠소. 편히들 가시오."

초류빈과 낭천이 멀어지자 심호 대사는 그제야 장탄식을 터뜨렸다. 그는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지금의 심정은 더할 수 없이 괴로워 견디기 어려웠다.

심촉 대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형께선 그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심호 대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그런가?"

"초류빈이 비록 장경을 훔치지 않았고 이사형을 살해한 흉수도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매화도가 아니라고는 단정할 수가 없잖습니까?"

심호 대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해야 그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으로서는 그가 진짜 매화도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심호 대사는 다시 탄식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그는 반드시 진짜 매화도를 찾아낼 것일세. 그리고 이곳으로 보내 줄 거야. 우리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네. 다만 나머지 여섯 부의 장경을....."

한 부의 장경을 훔쳐 간 자를 이미 찾아냈지만 나머지 여섯 부의 장경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들은 여섯 부의 장경을 다른 누구인가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러나 그게 누구인지는 아직 모르는 것이다. 이 사건의 뒤에는 또 다른 주모자가 존재한다는 것인가.....

초류빈은 걷기를 싫어했다. 특히 살을 에이는 듯한 엄동설한에 눈이 쌓인 빙판을 걷는 것은 더욱 싫어했다. 하지만 그는 걸어야만 했다. 지금으로선 당장 어디에서 말이나 마차를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낭천은 걷는 데 숙달이 된 듯 아무 부담감없이 걸음을 옮겼다. 길을 걷는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겐 일종의 노동일 수가 있지만 그에게는 차라리 휴식이었다.

낭천은 한걸음씩 옮길 때마다 그만큼 힘이 솟았다. 그의 걸음은 그다지 빠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느린 편도 아니었다. 걸음걸이가 마치 가벼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듯이 매우 경쾌해 보였다. 그들 두 사람은 그동안 자신들이 겪었던 일에 대해서 모두 얘기했다.

초류빈은 먼 곳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나나 자네가 모두 매화도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럼 매화도는 누구란 말인가?"

낭천은 시선을 먼 곳에다 멈추고 대답했다.

"매화도는 이미 죽었습니다."

초류빈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아니...그것이 정말인가? 그럼 자네가 죽인 사람이 정말 매화도란 말인가?"

낭천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갑자기 환한 미소를 띠고 물었다.

"자네는 매화도가 어쩌면 남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낭천이 의아해하자 초류빈은 농담을 하듯 여전히 빙글거리며 계속 입을 열었다.

"남자가 아니면 물론 여자지....."

낭천은 더욱 알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자가 여자를 강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그 여자가 펴놓은 연막전술일 수도 있지. 그렇게 하면 매화도가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낭천은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자가 어떻게 동성인 여자를 강간할 수 있습니까?"

초류빈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의 표정은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도 여자를 강간할 수 있다네!"

22 소이비도 제2권 뜻밖의 함정





뜻밖의 함정



설소하와 낭천은 차가운 밤공기를 헤치며 계속 걸었다.

설소하는 높은 담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 이유는 그의 많은 형제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죠."

"모두 죽다니....."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낭천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 열다섯 형제들이 어떻게 해서 죽은 것이오?"

"소문에 들리는 바로는 병사했다고 하지만 그 이유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들이 죽은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평상시에 그렇게 건강했던 열다섯 명의 형제가 요 이삼 년 사이에 모두 병들어 죽었고 유독 신노삼만이 살아 남았다는 것을 강호의 사람들은 선뜻 믿을 수가 없거든요. 모두들 의심을 품고 있을 거예요."

설소하의 말이 끝나자 낭천은 담의 고도를 측정하듯 고개를 들어 유심히 쳐다봤다.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고 담을 올려다보던 낭천은 이윽고 담담하게 한마디 던졌다.

"내일 밤에 내 그를 찾으러 오겠소."

낭천은 손과 발을 동시에 움직여 높은 담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전개한 것은 벽호유장(壁虎遊牆) 공력이 아니었으며 그는 이러한 공력을 들은 바도 없었다.

하지만 강철과 같은 손으로 담을 잡은 채 다리를 뒤로 뻗으면서 매우 능란하게 위를 향하고 있었다. 낭천의 그러한 동작은 마치 영활한 원숭이와도 같았다.

잠시 후, 결국 그는 높다란 담에 올라서 주의깊게 주위를 살폈다. 담장 안에는 매우 넓은 화원과 겹겹이 싸인 집들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해 있고 주위는 어둠이 깔려 매우 컴컴했으며 잠이 들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불빛이라고는 담장 안의 정원 구석에 몇 개의 희미한 등불만이 그 효력을 약하게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설소하는 능력이 넘치는 여인이었으며 또한 낭천에겐 좋은 방도자였다. 그녀는 신노삼의 한 하인을 매수하여 하인으로 하여금 장원 내의 자세한 약도를 그리게 했다. 대청과 객방 그리고 신노삼의 침실, 심지어 부억이나 화장실까지 자세하고 분명하게 그려진 약도를 얻은 낭천의 얼굴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낭천은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도 거뜬히 신노삼을 찾을 수 있었고, 이날 밤, 낭천이 암중에 습격해 오는 것도 모르는 신노삼은 방의 불을 환하게 밝힌 채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그날 하루 동안의 수입을 계산하기 위해 주판알을 열심히 튕기고 있었다. 신노삼의 주판알을 튕기는 손가락은 몹시도 짧아 식지와 중지, 그리고 무명지의 길이가 모두 새끼손가락의 길이와 같았다.

하지만 짧은 대신에 모든 손가락들은 엄지손가락보다 더 굵었고 손톱조차 보이지 않았다. 부귀와 영화를 한몸에 누리며 살아온 사람의 손이 이렇게 거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노삼은 어렸을 때 몸이 매우 약해 그의 아버지에게 밖으로 내쫓겨 오 년이란 세월 동안을 방랑생활을 하며 지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집으로 다시 돌아온 후에도 오 년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노삼이 오 년 동안 대도적인 변천호를 따라 밑천이 들지 않는 장사를 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시간을 거지의 생활로 허비했다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신노삼이 소림사에 들어가 온갖 고생을 무릅쓰며 무술을 연마했다는 사람도 있었으나 모두 근거가 없는 얘기다. 그래서 그의 형제들이 죽은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적잖은 의혹을 품었지만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숱한 소문에 대해 신노삼은 극구 부인을 했으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의 굵고 짤막한 손가락이다. 다소라도 견식이 있는 사람은 두 손이 철사장(鐵沙掌)과 외문장력(外門掌力)을 연마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또한 그것에 대해 상당한 조예를 지녔다는 것도 물론 알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큰형이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담을 내려선 낭천은 발소리를 죽여 정원을 통과해 창문을 가볍게 열고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낭천은 어떤 특수한 신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숨을 죽인 채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신노삼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전신의 근육과 골절, 그리고 신경, 심지어는 한 방울의 피까지도 혼연일체가 되어 몸을 놀렸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발견한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낭천은 환하게 불이 밝혀진 신노삼의 방에 당도했다.

신노삼은 여전히 정신없이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가운데, 낭천은 살그머니 손을 내밀어 창문을 열고 동시에 몸을 날려서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신노삼이란 사람은 그렇게 감각이 무딘 사람이 아니었으니.....

신노삼은 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무언가 환경이 바뀌는 것을 직감하고 급히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낭천은 이미 신노삼의 바로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신노삼은 대경실색하여 의자에 앉은 채 미처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그는 신이 아닌 사람의 행동이 이다지 신속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낭천은 냉랭한 시선으로 신노삼을 노려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분명하게 물었다.

"당신이 바로 신노삼이오?"

신노삼은 여전히 의자에 굳어진 채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엔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일신의 공력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낭천의 냉막한 목소리를 들었다.

"당신은 내가 무엇하러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소?"

신노삼은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또 고개를 끄덕였다.

낭천은 방안을 한바퀴 획 둘러보고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당신...나에게 할 말이 없소?"

신노삼은 선뜻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은 마치 벙어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과 흡사했다. 한편, 낭천은 할 말이 없느냐는 질문을 던질 때 신노삼의 마지막 말을 듣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렇게 생사가 가름되는 긴박한 순간에 신노삼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했다. 비록 숱한 아쉬움이 있었으나 애걸을 할 뜻은 없었다. 또한 반항도 도피도 하려 들지 않았다.

낭천은 날카롭게 검을 뽑아 들었다.

바로 이 순간, 낭천의 가슴 한구석에 무언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싹텄다.

이것은 본시 야수에게만 있는 특유의 본능이었다. 어떠한 순간에 선량한 토끼에게 무서운 늑대가 몰래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물론 낭천은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고 또 어떠한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했다. 낭천은 더 자체하지 않고 뽑아든 검을 앞으로 뻗었다.

싸늘한 검광이 번쩍하면서 신노삼의 가슴 정면을 향해 폭사되어 갔다. 이어 창! 하고 금속이 서로 맞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진동시키며 예리한 불꽃이 사방으로 번져갔다.

이제보니 신노삼의 가슴에는 검광이 뚫지 못할 두꺼운 철판이 덮여져 있었다. 비록 낭천의 검이 신노삼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지 못했지만 그는 충격을 받아 상 밑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낭천은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직감하고 몸을 날렸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낭천이 몸을 날리는 찰나에 거대한 그물이 천장에서부터 덮쳐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의 크기는 방의 크기와 같아 아무리 귀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도저히 그물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낭천은 여지없이 날아든 그물 속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 그물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물은 오동나무에서 짜난 기름을 칠한 아홉 겹의 줄로 짜여진 것이기 때문에 검을 아무리 빨리 휘두른다 해도 한두 가닥밖에 끊을 수 없었다.

낭천은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헌데 이상한 것은 낭천은 미리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조금의 놀라움도 없이 그저 깊은 비애만을 느낄 따름이었으며 한 마리의 맹수가 사냥꾼에 의해 생포된 심정을 맛보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았다. 발버둥을 쳐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두 개의 날렵한 인영이 뛰어들었는데, 수중엔 각각 기다란 백랍간(白蠟干)이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 백랍간을 내뻗어 낭천의 아홉 군데 혈도를 찍었다.

이 두 사람 중 한 명은 몸집이 깡마른 회포승인으로 안색이 몹시 노란 것이 마치 병자 같았으나 두 개의 가느다란 눈에서는 화염 같은 광채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다른 한 명도 역시 마른 체구에 몸이 작고 매부리코에다가 행동 또한 독수리와 같이 날렵했다.

그들은 바로 소림의 심감 대사와 백요생이었다. 이때, 신노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쓰러져 있던 상 밑에 무슨 비밀 통로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결국 낭천은 신노삼의 함정에 자칭해서 빠져든 것이 되고 말았다.

백요생은 득의에 찬 웃음을 짓고 음험하게 입을 열었다.

"난 네놈이 이곳으로 찾아들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네가 네 발로 직접 찾아들었으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어떠냐? 이제 굴복을 하는 것이....."

낭천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백요생은 냉소를 터뜨렸다.

"흥, 입을 열지 못하는군. 더 우물거리지 않고 굴복하는 것이 오히려 너의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흐흐흐....."

그러나 낭천은 역시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땅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백요생이 지루함을 느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초류빈의 가까운 친구이며 또 초류빈을 구하기 위해 매화도로 가장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자 낭천은 갑자기 미친 야수와 같이 절규를 토했다.

"내가 바로 매화도이다. 한데 가장은 무슨 말라죽을 가장이란 말이냐. 난 초류빈이란 사람을 알지도 못하며 더욱이 그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다."

낭천의 외침에 약간 기가 죽은 백요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심감대사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심감 사형, 이 자는 자신이 바로 매화도라고 하는데 사형께서는 그 말을 믿습니까?"

심감 대사는 선뜻 고개를 흔들었다.

"믿을 수 없네."

낭천은 내심의 불안을 떨치며 더욱더 냉랭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내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무슨 증거라도 있소?"

백요생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더니 낭천을 향해 음흉스레 말했다.

"매화도는 점혈수법의 고수, 넌 조금 전 우리가 너에게 찍은 혈도가 어떠한 혈도였는지 알아내면 우리는 네가 매화도라는 것을 믿어 주겠다. 그리고 또한 초류빈도 석방시킬 것을 아울러 약속한다.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이때, 낭천은 어금니를 꽉 물고 있었기 때문에 입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백요생은 긴 탄식을 뿜어내면서 말했다.

"초류빈과 절친한 친구로서 손색이 없군. 그 자를 위해서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다니...하나 네가 그렇게 아끼는 초류빈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가 의문이구나. 그저 그가 너를 대신해서 그 방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다행이지...흐흐흐"

술잔에 넘칠 듯 술이 가득 채워져 있는데...초류빈은 수중의 술잔을 들어올렸다. 한구석에는 매우 청순하고 연약해 보이는 승인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으며 나이는 비록 중년을 지났지만 보기엔 그다지 늙지 않았다. 이 사람이 바로 소림에서 내력이 가장 심후한 심수 대사일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을 했겠는가.

그는 비록 초류빈의 인질이 된 몸이지만 그의 표정에서 분노의 빛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묵묵히 한구석을 차지한 채 침통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중죄를 지은 죄수처럼 그저 멍청하게 시간만 보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심미 대사의 유체는 아직도 선상(禪床) 위에 남아 있었으며 누가 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의 굳어진 몸에 흰 천이 덮여져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이승과 저승을 갈라 놓는 막인 것이다.

초류빈은 갑자기 심수를 향해 잔을 높이 들어올리더니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소림사에도 이렇게 좋은 술이 있는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한 잔 하시는 것이....."

심수 대사는 고개를 흔들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초류빈은 싸늘한 코웃음을 날렸다.

"제가 영사형의 유체 앞에서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 대사께선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잠시 후, 심수 대사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 술은 매우 순하여 물과 같소. 그래서 선조들의 제사를 지낼 때도 술을 사용하고 있소. 그러므로 어디서 술을 마시건 간에 상관은 없소이다."

초류빈은 씁쓸히 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께선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범하시군요."

심수 대사의 얼굴에는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으나 심한 고통을 애써 참는 듯했다.

초류빈은 다시 한 잔의 술을 마시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이곳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영사형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허허허...만약 영사형께서 호견지배(虎犬之輩)라면 그가 죽었든 살았든 저는 절대로 그의 앞에서 술을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 허허....."

초류빈의 행동과 말투로 보아 이미 술에 취한 듯했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심수 대사는 탄식을 터뜨렸다. 그의 표정이 더욱 고통스럽게 변했다.

다만 그것이 죽은 사형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선 알 수가 없었다.

초류빈은 술잔에 가득 담긴 호박색의 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길게 장탄식을 터뜨렸다.

"흐흠...솔직하게 말해서 이번에 대사가 나를 구해줄 줄이야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난 당신을 구한 것이 아니오."

"십사 년 전에 내가 관직을 버리고 은퇴할 때 전 세상이 증오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상소문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그러한 결심을 하지 않았을 것이오."

"과거상소문을 낸 호운익(胡雲翼)은 이미 세상을 떠났소.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마시오."

"그렇습니다. 일단 불문에 들어서게 되면 속세를 떠나게 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시종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소. 당신은 그때 어사라는관직에 있었고 그 관직에 당연히 충실해야 했으니까....."

순간 심수 대사의 얼굴에 가벼운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당신이 탐화랑직을 버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불문에 들어왔소. 그것은 약이 많으면 실수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것을 자각시키기 위한 것이었소. 그런데...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초류빈은 그저 힘없이 웃었다.

"흐흐흐...과거의 풍류객인 철담어사(鐵擔御史)가 고승이 되어 있을 줄은 나 역시 예견치 못했소. 또한 생사가 판가름되는 순간에 나를 구해줄 줄은 더더욱 생각지 못했소."

심수 대사는 갑자기 감았던 눈을 부릅뜨고 벼락같이 소리쳤다.

"내 아까도 말했지만 난 당신을 구하지 않았소. 그리고 나는 공력이 부족해서 당신에 의해 이렇게 납치되었잖소. 당신은 어째서 그 말을 자꾸만 반복하는 거요. 당신은 절대로 나에게 감격하는 마음을 가져선 아니 되오."

초류빈은 빙긋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떨구었으나 여전히 그의 손은 술잔을 잡고 있었다. 마치 술에 만취된 사람이 푸념을 늘어놓듯이 그는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방안에서 나에게 눈짓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곳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며, 만약 당신이 조금이라도 저항했다면 나는 결코 당신을 이곳에 남겨두지 못했을 것이오."

초류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심수 대사는 무엇인가 급히 말하려고 입을 실룩거렸으나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초류빈은 다시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출가한 사람은 거짓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나보다 더 잘 알 것이오. 더구나 이곳엔 우리 두 사람 외엔 아무도 없잖소."

초류빈의 표정도 매우 괴로운 듯했다.

심수 대사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설사 내가 당신을 도와줄 의사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과거의 정 때문은 아니오."

순간, 초류빈은 갑자기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듯 고개를 쳐들더니 매우 엄숙하게 말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날 구한 것이오?"

심수 대사는 선뜻 대꾸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또 열려다가는 선뜻 말을 하지 못하곤 했다.

초류빈은 재촉하지 않고 서서히 술잔을 비웠다.

바로 이때, 창밖에서부터 갑자기 한 사람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초류빈, 창문을 좀 여시오. 할 말이 있소."

이것은 심감 대사의 음성이 분명했다. 초류빈은 의혹의 표정을 짓고 서서히 창가로 다가가 창틈을 통해 밖을 바라보다 그만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낭천이 심감 대사의 손에 걸려든 것을 보았다. 이것은 초류빈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백요생은 만면에 득의에 찬 미소를 띠고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초탐화, 당신은 이 사람을 알고 있겠지. 이 자는 당신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매화도라고 자인했는데 당신은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할 생각이오?"

심감 대사가 뒤이어 냉랭하게 소리쳤다.

"만약 이 자의 생명을 살리고 싶다면 순순히 포박을 받으시오."

초류빈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낭천은 중상을 입은 듯 땅에 엎드려 있어 그는 낭천의 얼굴을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심감 대사는 갑자기 낭천의 머리카락을 움켜잡더니 낭천의 얼굴과 창과 마주치게 하고는 고함을 질렀다.

"초류빈! 당신에게 두 시진의 여유를 주겠소. 해가 지기 전까지 나의 오사형(五師兄)을 무사히 내보내지 않으면 다시는 당신의 절친한 친구를 만나지 못할 것이오!"

이어 백요생이 입을 열었다.

"초탐화! 이 사람은 당신을 극진히 믿고 있는데 당신도 그를 배반해선 아니 될 것이오."

순간, 초류빈은 전신이 마비된 듯 창가에서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는 낭천이 마치 목을 매인 개처럼 질질 끌려가는 것과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고역을 치루었다는 것을 곧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강인한 낭천은 결코 신음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초류빈은 비틀거리며 제자리로 들어오더니 연속 석 잔의 술을 들이켰다.

"낭천! 나의 좋은 친구...나는 자네의 뜻을 알고 있네. 자네는 내가 자네를 구해주길 원치 않고 있어....."

심수 대사는 그런 초류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초류빈은 그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다시 석 잔의 술을 연이어 마시더니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순순히 포박을 받을 것이오. 자, 나를 결박해서 데리고 나가시오."

"이곳을 나가 일단 그들의 손에 잡히면 오직 죽음만이 있을 것이오."

"흥! 그건 나도 알고 있소."

"당신이 나가 죽는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당신의 친구를 살려주지는 않을 것이오."

"그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소."

"그런데 어째서 나가겠다는 것이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가야 하오!"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사람은 평생을 사는 동안 때때로 몇 가지 어리석은 일을 하기 마련이오. 만약에 모든 사람이 총명한 일만 한다면 인생은 더욱 재미없게 변할 것이오."

심수 대사는 고개를 떨군 채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렇소. 사내대장부라면 일단 결심한 일은 반드시 행해야 하오. 당신이 그가 죽을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를 고집하는 것은 단지 당신이 꼭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오."

초류빈은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은 나의 지기라고 할 수가 있겠구려."

"의리를 위해서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은 오직 초류빈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일 것이오."

초류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몸을 홱 돌리며 소리쳤다.

"내가 먼저 나가겠소. 안녕히 계시오."

심수 대사가 갑자기 소리쳤다.

"잠깐만!"

이렇게 소리친 그는 매우 커다란 결심을 내린 듯이 입을 굳게 다물며 초류빈을 똑바로 응시했다.

잠시 후, 기다리다 못한 초류빈이 얼굴을 찌푸리며 다그쳤다.

"무엇이오?"

하지만 심수 대사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초류빈이 크게 소리쳤다.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소?"

"내가 당신을 구해준 이유에 대해서 얘기하겠소."

초류빈은 심수 대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심수 대사는 침중한 표정으로 서서히 입을 열었다.

"이것은 소림사의 비밀이며 매우 중대한 문제요. 그래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었소."

초류빈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심수 대사의 말이 계속 되기를 기다렸다.

"소림사엔 장경이 풍부하여 천하에서 으뜸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오. 그 중엔 비단 적지 않은 불문중전(佛門重典)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림의 부전지비(不傳之秘)들도 있소."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소."

"지난 백 년 동안 수많은 자들이 장경을 훔치기 위해 소림사로 들어왔소. 하지만 누구 하나 소원을 성사시키고 무사히 빠져나간 자는 없었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아스라히 멀어진 옛 일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 후, 심수 대사가 말을 이었다.

"출가한 사람은 살생을 금기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장경은 소림의 뿌리와 같은 것으로써 누구든지 그 장경에 대해 흑심을 품을 땐 소림 문하는 결코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오."

초류빈은 매우 의아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근래에 와서도 그렇게 흑심을 품는 자들이 있단 말이오?"

"당신은 외인이라 물론 내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오. 사실은 요 이 년 사이에 장경은 일곱 번씩이나 겁탈당했소. 그중 하나가 내평심경이고 그 외의 나머지는 모두가 강호에 오래 전부터 절전(絶傳)된 무림비급이오."

그때서야 초류빈의 안색이 급변했다. 이 일은 강호 전체와도 관련되는 일이 아닌가!

"그것을 훔쳐간 자가 누구요?"

다그치는 질문에 심수 대사는 침통하게 말을 이었다.

"가장 이상한 것은 맨 나중 일곱 번째의 도난사건이오. 그땐 누구도 어떤 기미를 느끼지 못했고 일이 끝난 후에도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했소. 한마디로 말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그것을 잃은 것이오.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 세 번째의 도난사건이 일어남에 따라 장경각의 경비는 최고조에 달했소. 하지만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났소. 이로 인해 장경각을 담당하고 계시던 삼사형께선 자진해서 관직에서 물러나 지금까지에 이르고 계신 거요."

그때 돌연 초류빈이 심수 대사의 말을 막았다.

"그런데 어찌해서 강호에 조금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오?"

"이 사건은 소림의 체면에 커다란 손실이 있으므로 장문 사형께선 비밀을 반드시 지키라는 엄명을 내리셨소. 지금까지 이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을 합해서 아홉 명밖에 되지 않소."

"대사를 위시한 일곱 명의 수석 대사 이외에 또 누가 이 일을 알고 있소?"

"백요생!"

"그는 감초같이 어디에서나 빠지지 않는 인물이군요."

"삼사형께선 우리 사형들 중에서 조심성이 가장 많은 사람이었소. 한데 삼사형께서 물러나신 후에 장경각은 나와 이사형께서 책임을 맡았지만 지금까지 겨우 보름에 지나지 못하오."

심수 대사의 말이 못마땅했는지 초류빈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직이 말을 건넸다.

"심미 대사가 그러한 중책을 맡았으면서도 어찌 이번에 소림사를 떠나 외출을 했소?"

"이사형께선 이 일이 매화도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어 명확히 조사하기 위해 장경각을 떠나신 거요. 그런데...영원히 떠나실 줄이야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소?"

심수 대사는 이윽고 목이 메어 말을 그치고 심미 대사의 유체를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초류빈도 암암리에 탄식을 터뜨릴 때 심수 대사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다가 곧 입을 열었다.

"이사형께서 장경각을 떠나시기 전에 만일에 대비해 가장 중요한 삼부(三部)의 장경을 꺼내 각각 은밀한 곳에 숨겨두었소. 이 일에 대해선 장문 사형과 나 이외에 아는 사람은 없소."

초류빈은 방안을 한눈으로 훑어보았다.

"그 중의 한 부가 바로 이 방 어디엔가 있을 것이 아니오?"

"그렇소."

초류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심수 대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자 심수 대사가 입을 열었다.

"이번의 사건들이 하도 이상해서 이사형과 저는 이 일을 비밀리에 의논한 끝에 어쩌면 외인이 아닌 내적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얻었소."

초류빈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내적?"

심수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심심히 탄식을 내뿜었다.

"우린 비록 그러한 의심을 가졌지만 감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소. 그것은 장경각을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일곱 명의 사형제뿐이며 나머지 제자들은 장경각엔 얼씬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오."

이때 초류빈의 눈빛은 유난히 영롱했다.

"그렇다면 장경을 훔친 자가 바로 일곱 사형제 중의 한 사람이겠군요!"

심수 대사는 초류빈의 말을 듣고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져 갔다.

"우리 동문 사형제는 적어도 십 년 이상을 동고동락해 왔소. 사형제 중의 어느 누구를 의심한다는 것은 매우 가당찮은 일이오. 그래서 우리는 각별히 조심해서 처리해야만 하오. 다만....."

초류빈이 의혹스런 눈길로 심수 대사를 바라보자 그는 슬픔이 가득한 눈길로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 처량한 음성을 토해냈다.

"다만 이사형께서 본사(本寺)를 떠나시기 전에 그는 우리 일곱 사람 중에 장경을 훔쳐 간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슬쩍 일러 두었소."

"그게 누굽니까?"

"이사형께선 그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직접 말하진 않으셨습니다. 이사형께선 그저 장경을 훔쳐 간 사람이 진짜 매화도이기를 원했을 뿐 사문에 치욕이 되기를 원치는 않으셨습니다."

심수 대사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초류빈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심수 대사의 심정은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장경을 훔쳐 간 사람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커다란 화를 초래할 따름입니다."

"이사형께서도 그 점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이사형께서 자신에게 어떠한 차질이 생기면 그분의 독경잡기를 꺼내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의 마지막 장에 의심이 가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잡기가 지금 어디에 있소?"

"본시 장경과 함께 있었으나 지금은 이곳에 있소."

심수 대사는 말을 함과 동시에 품속에서 노란색의 비단에 곱게 싸인 한 권의 책자를 꺼내 초류빈에게 건네었다.

초류빈은 얼른 그것을 받아 심수 대사의 말대로 마지막 장을 펼쳤으나 거기엔 장경이 도난당한 일에 대해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초류빈은 매우 실망한 눈초리로 심수 대사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 책의 마지막 장이 누군가에 의해 찢겨진 것이 아닙니까?"

"비단 마지막 장이 찢겨졌을 뿐만 아니라 그 장경도 백지화가 되었소."

"그렇다면 장경을 훔친 사람도 심미 대사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닙니까?"

"그런 셈이죠."

초류빈은 자신이 묻는 말에 대꾸만 하는 심수 대사가 매우 못마땅했다. 매우 답답한 초류빈은 심수 대사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하지만 장경을 감춘 곳을 아는 사람은 대사와 심호 대사 단 두 사람뿐이 아니오?"

"그렇소."

초류빈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그렇다면 대사께선 심호 대사를 의심하고....."

초류빈은 심수 대사의 표정을 살폈으나 그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장경을 훔쳐 간 사람이 이사형께서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물론 이사형의 행동에 대해서도 각별하게 관심을 가졌을 것이오. 그러면 이사형께서 장경을 어디에다 숨기실 때 훔쳐 보았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오. 다만....."

"다만 무엇입니까?"

심수 대사는 초류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다만 이사형께서 돌아오셨을 때 돌아가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소. 한데 갑자기 세상을 등지신 일이 의심스러울 뿐이오."

심수 대사는 갑자기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비록 독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진 못했지만 근년에 와서는 독에 대한 책자를 조금 보았소. 이사형께서 돌아오셨을 때 저는 이미 그분이 독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소. 하지만 절대로 죽을 만큼 위중한 것은 아니었소."

초류빈은 심수 대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장경을 훔쳐 간 자는 이사형께서 눈치를 채신 것을 알자 입을 막기 위해 죽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초류빈은 방안의 공기가 숨쉬기조차 곤란할 정도로 응결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방안을 한 바퀴 돌더니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심미 대사께서 돌아오신 후로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은 몇 사람입니까?"

"대사형, 사사형, 육사제 그리고 칠사제가 이 방에 있었소 "

"대사의 뜻은 그들 모두가 손을 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오?"

심수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탄식을 터뜨렸다.

"이것은 본문의 커다란 불행입니다. 나 역시 당신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소. 하지만 나는 당신이 결코 친구를 배반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소. 그래서 당신이....."

"대사께선 나더러 흉수를 찾아내라는 것이오?"

심수 대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류빈은 심수 대사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한마디 한마디 똑똑하게 물었다.

"그 흉수가 만약 심호 대사라면 어떻게 하시겠소?"

심수 대사는 그 자리에 굳어진 듯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마에 식은땀을 비오듯 흘렸다.

초류빈은 바늘끝 갈은 시선으로 심수 대사를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설사 소림의 모든 사람이 다 흉수가 심호 대사라고 해도 누구 하나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오. 안 그렇소?"

심수 대사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설사 말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해도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강호의 모든 사람들은 소림사를 명문정종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한 소림사의 장문인이 살인자라면 소림사의 수백 년 명성이 하루 아침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설사 내가 심호 대사가 흉수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다고 해도 대사 자신은 아마 나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오. 소림사의 명성을 위해서라도 대사께선 아마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려 할 것이오."

심수 대사는 한숨을 내뿜었다.

"그렇소. 소림사의 명성을 위해서는 나 역시 그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것이오. 난 비록 본 소림사의 수백 년 명예가 손상되는 일에 대해선 어쩔 수 없더라도 당신이 심미 대사를 죽인 흉수를 찾아만 준다면 나는 이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심미 대사의 원한을 갚고 반드시 흑백을 가려내야 하오."

"출가한 사람으로서 어찌 그런 생각을 하오! 보아하니 대사의 육안이 아직 잘 다듬어지지 않은 것 같구려."

심수 대사는 갑자기 합장을 하면서 말을 꺼냈다.

"부처님께서도 화가 나시면 사나운 사자가 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시다면 안심을 하겠소. 혹시 흉수가 누구라는 것을 이미 아시는 것은 아니오?"

"나는 모르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소."

"그런 말이 어디에 있소? 물론 흉수 자신은 알 것이 아니오?"

"흉수 자신 말고도 또 한 사람이 알고 있소. 그 사람은 바로 이 방에 있소."

"그게 누구요?"

초류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윽고 심미 대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바로 심미 대사요."

그러자 심수 대사의 안색이 약간 변하며 이내 암담해졌다.

"하지만 이사형께선 이제 아무 말도 하시지 못하게 된 것이 퍽이나 아쉽구려."

초류빈은 빙긋 미소지었다.

"죽은 사람도 때때로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갑자기 심미 대사의 시체를 덮어 놓은 흰 천을 벗겼다. 심미 대사의 혈색 없는 얼굴은 이때 회색으로 변하여 파리해 보였다.

초류빈은 고개를 돌려 심수 대사의 표정을 살피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사께선 극락동자의 독에 의해 독살된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21 소이비도 제2권 일대의 영웅



21 소이비도 제2권 일대의 영웅




제2권 일대의 영웅


일대의 영웅

손님들은 서로 웃으며 돈을 내놓았다.
식당의 점원은 벌써 쟁반을 들고 노인 옆에 선 채 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 노선생은 그제야 하품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일의 시작은 흥운장에서부터다."
긴 머리 낭자가 다시 얼른 말을 가로챘다.
"흥운장이라고요? 혹시 그곳은 호유성, 호나리께서 계시는 곳이 아닙니까? 듣기론 그곳은 집이 굉장히 좋고 또 경치가 아름다우며 양쪽에 강이 자리잡고 있어 정말 좋은 곳이라 하더군요."
손 노선생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좋은 집은 원래 초류빈이 호유성에게 준 것이다. 두 사람은 생사를 같이하기로 한 형제이며 호부인은 또 초탐화의 무슨 친척이 되는 사람이라고....."
조부와 손녀 두 사람은 주거니받거니 하며 전날 흥운장에서 일어난 일을 대충 얘기하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초류빈이 어떻게 해서 호천강을 다치게 했으며 또 어떻게 해서 매복하고 있던 사람에게 붙잡혔는가 하는 것이었다.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가 아쉬운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또 설소하의 이야기도 나왔다.
즉 그녀가 어떻게 납치를 당했고 청년 낭천이 번개 같은 검으로 어떻게 해서 설소하를 구했는가 하는 얘기였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손 노선생의 눈에서 전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리고는 우연인지 고의인지 줄곧 낭천과 설소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긴 머리 낭자의 눈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자주 시선이 옮겨졌다.
낭천은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혹시 우리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우리더러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얘기가 아닐까?'
이때 긴 머리 낭자가 다시 맑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매화도는 이미 그...비검객이란 사람에게 살해를 당했다는 말인가요?"
손 노선생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조대야(趙大爺)와 전(田)대야는 그 죽은 사람이 매화도가 아니라 초류빈이 진짜 매화도라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누가 진짜 매화도인가요?"
"그 누구도 진짜 매화도를 보지 못했으니 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리가 없지. 그러나 조대야와 전대야가 신분을 내걸고 맹세코 초류빈이 매화도라 하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그래서 심미 대사가 그를 데리고 가게 되었다....."
그는 담배를 한 모금 맛있게 빨아대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소림사에 도착했을 때는 초탐화가 심미 대사를 모시고 돌아가게 되었다."
이 말은 설소하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도록 했다.
낭천은 그녀보다 더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길에서 무슨 변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긴 머리 낭자가 질문을 해주었다.
손 노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기를
"알고보니 그를 소림사로 압송해 가던 심미 대사와 전칠, 그리고 소림 제자 네 사람은 그만 도중에서 묘강 극락동의 독수를 당했다. 심미 대사는 중독이 된 후 초류빈을 석방해 주었다. 그러나 초류빈은 그의 중독이 심한 것을 보고 소림사에 해독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소림사로 데리고 갔단다."
머리가 긴 낭자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초탐화는 정말 일대의 영웅이시군요. 만약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어찌 그를 구할 수 있었겠어요?"
"그렇지. 그러나 소림사의 승려들은 그를 고맙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 하고 있다."
"왜 그런가요?"
"이 모든 사실은 초탐화가 직접 얘기한 것이다. 그러나 소림사의 승려들은 그의 말이라면 하나도 믿지 않으니까."
"하지만...그건 심미 대사께서 인정하시면 되잖아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심미 대사는 소림사에 도착하자마자 돌아가셨단다. 심미 대사 외에는 이 세상에 그 사실의 진상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단다."
손 노선생이 여기까지 말하자 사방의 객석에서는 모두 이구동성으로 한탄을 했다.
낭천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럼 초탐화는 이미 소림사의 독수를 당했습니까?"
손 노선생은 낭천을 힐끔 흘겨보더니 천천히 입을 떼었다.
"소림사가 비록 무림에 군림하고 있고 문하 제자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뛰어난 일류고수들이지만 초탐화를 죽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머리가 긴 낭자도 낭천을 날카롭게 흘겨보고는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잘 하는 사람이라도 혼자서 그 많은 소림사의 제자들을 어찌 당해낼 수 있겠어요?"
손 노선생의 표정은 이때 엄숙하게 굳어져 있었다.
"설혹 소림사에 팔백 명의 제자가 있다 해도 누가 감히 먼저 덤벼들겠느냐? 또 누가 먼저 초탐화의 첫 칼을 맞을 용기가 있겠느냐?"
긴 머리의 낭자는 손뻑을 치며 흥미진진한 듯이 말했다.
"맞았어요. 비도탈명은 헛소문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소림사에 설사 팔백 명의 제자가 있다고 해도 그를 당할 수는 없을 거예요. 아마 그분은 지금쯤 멀리 달아나고 있을 거예요."
손 노선생은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가지 않았다."
긴 머리 낭자는 아연 놀란 신색을 만면에 떠올렸다.
"왜요?"
손 노선생은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림사의 제자들이 그를 당할 수는 없지만 그 소림 제자들의 포위를 뚫고 나갈 수는 없지. 더구나 아직은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
머리가 긴 낭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양손을 비벼댔다.
"갈 수도 없고 싸울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하죠?"
손 노선생은 날카롭게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만약 그가 팔백 명 소림 제자의 포위 속에서 비도를 한 번 날렸다 하면 꼼짝없이 죽게 된다. 그건 소림의 제자들이 단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을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의 비도가 제아무리 강하고 위력이 있다 해도 팔백 명의 제자를 어찌 다 죽일 수 있겠느냐?"
긴 머리의 낭자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버텨도 안 되잖아요? 언젠가는 쓰러질 때가 있으니까요."
확실히 그건 낭천이 염려한 문제였으며 그는 지금 자신이 초류빈과 같은 상황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다시 손 노선생의 음성이 그의 귓가로 울려왔다.
"그때 그들이 얘기하던 장소는 바로 심미 대사께서 기거하시던 선방(禪房) 옆이었다. 쌍방은 서로 의견충돌이 되자 초류빈은 틈을 타서 그 선방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그러자 머리가 긴 낭자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되면 독 안에 든 쥐가 아니에요?"
"소림의 제자는 그가 바깥으로 뚫고 나가리라 생각했지 안으로 뛰어들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선방으로 뛰어들고 난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후회라고요? 초류빈이 자진해서 독 안으로 뛰어들었는데 그들이무엇 때문에 후회를 하죠?"
"선방 안에는 심미 대사의 유해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림사의 보물로 대대로 내려오는 경전(經典)이 있고 또 암기가 수두룩한데 어찌 함부로 접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들이 선방 밖에서 닷새만 지켜도 초류빈은 굶어 죽거나 아니면 목이 말라서라도 죽을 게 아니에요?"
"소림의 제자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들은 다섯째 사숙인 심수(心樹) 대사가 그 선방에 남아 있다가 초탐화에게 혈도를 찍혀 버렸다. 그런데 그들이 어찌 그들의 사숙마저 함께 굶겨 죽일 수 있겠느냐?"
"당연히 그렇게 할 수야 없죠."
"맞았다. 그래서 그들은 음식과 물을 들여보내 줄 수밖에 없다. 심수가 굶어 죽지 않으면 초류빈도 죽을 수가 없다."
"소림사는 무림의 성지(聖地)로 불려오면서 수백 년 동안 어느 누구도 넘겨다 보지 못한 곳이에요. 그런데 초탐화는 단 혼자서 소림사의 사람이든 짐승이든 할 것 없이 발칵 뒤집어 놓았으니...소림의 팔백 제자는 그를 어떻게 잡아낼 수도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 매일 매일 먹여 주고 입혀 주어야 하고 또 들여보낸 물건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기까지 말한 머리 긴 낭자는 무엇이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더니
"정말 초탐화는 훌륭하고도 멋있는 분이에요. 오늘 얘기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하고는 말을 끊는 것이었다.
모든 얘기를 다 듣고 난 낭천은 전신의 피가 끓어올랐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뛰쳐 일어나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초류빈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요. 친한 친구란 말이오!'
사실 누구를 막론하고 초류빈을 친구로 두었다면 천하에 떠들고 다니며 자랑할 만했다
손 노선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 초탐화는 정말 일대의 영웅호걸이다. 그러나 그 위대한 영웅도 언젠가는 소림에다 뼈를 묻게 될 것이다."
머리가 긴 낭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얼굴을 노인의 턱밑으로 바싹 들이댔다.
"그건 또 왜 그렇죠?"
손 노선생은 고의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낭천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누가 나서서 초류빈이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과 심미 대사가 오독동자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 외에는 아무 방도가 없지. 모르면 몰라도 소림사에서는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머리가 긴 낭자는 눈빛을 빛내며 신중하게 물었다.
"누가 그의 결백을 증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손 노선생은 침묵을 지키다가 한참 후에야 긴 한숨과 함께 절망적으로 입을 여는 것이었다.
"이 천지에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제는 점심시간도 다 지났고 얘기도 다 끝났다.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가버리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들 초류빈의 얘기로 화제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지만 하늘은 차츰 음침하게 어두워졌다.
이제 식당 안에는 몇 명의 사람만 남아 있을 뿐 모두 떠나가고 없었다.
손 노선생은 아직도 술을 마시며 계속해서 담배를 뻐끔뻐끔 빨아댔다.
그의 손녀딸은 고개를 숙이고 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녀가 국수를 먹는 방법은 매우 재미있었다. 국수를 젓가락에 칭칭 감은 후 입을 벌려 쏙 집어넣는 것이었다.
설소하는 그윽한 시선으로 낭천을 주시하고 있었으나 낭천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상 위에 갖다 놓은 음식을 건드리지도 않아 맨 위에는 허연 기름이 굳어져 있었다.
얼마나 또 지났을까?
머리가 긴 낭자는 천천히 젓가락을 놓더니 궁금한 듯이 물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보기에 그분 초탐화는 억울한가요?"
손 노선생은 연기를 뿜어내며 씁쓸하게 대답했다.
"글쎄...설령 내가 억울하게 생각한다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긴 머리 낭자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분의 친구는요? 그를 구해줄 만한 친구는 없나요?"
손 노선생은 길게 탄식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다른 곳에 갇혀 있다면 누가 무슨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구해준다지만 소림사에 갇혀 있는 이상 이 세상에서 그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긴 머리 낭자는 애처로운 눈으로 다그쳤다.
"그럼...그렇게 훌륭한 영웅이 이대로 죽어 간단 말인가요?"
손 노선생은 한참 침묵을 지킨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법이야 있지만...희망은 매우 적어."
이 말을 들은 낭천의 가느스름한 눈이 갑자기 커지면서 밝아졌다.
긴 머리의 낭자가 낭천의 질문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어떤 방법인데요?"
손 노선생은 다시 낭천을 잠시 주시하다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진짜 매화도가 죽지 않고 다시 나타난다면 초류빈이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지. 그가 진짜 매화도가 아닌 이상 심미 대사를 죽일 만한 이유가 없게 되니까 말이야."
긴 머리의 낭자는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바랄 수 없는 희망이군요. 진짜 매화도가 설령 죽지 않았다고 해도 그는 이미 어디론가 숨어 버렸을 거예요. 초류빈이 자기를 대신해서 죽게 말이에요."
손 노선생은 갑자기 담뱃대를 상에다 탁탁 치더니 불쑥 말머리를 돌렸다.
"넌 국수를 다 먹었느냐?"
긴 머리의 낭자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몹시 배가 고팠는데 그 얘기를 들으니 더 먹히지 않아요."
"먹히지 않으면 그만 가자꾸나. 어찌 되었든 우리가 여기 한평생 앉아 있어 봤자 초탐화를 구해줄 수는 없지 않겠느냐?"
"하긴 그렇군요."
긴 머리 낭자는 문 입구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낭천을 흘겨보고는 입으로 뭐라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낭천의 귀에 마치 이런 말로 들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대로 여기 앉아 있기만 하면 어떻게 그분을 구할 수 있겠어요?'
"흥! 저 늙은이와 젊은 처녀의 정체가 뭔지 아세요?"
낭천은 아무 생각도 없이 반문했다.
"정체가 뭐란 말이오?"
설소하는 살며시 웃으면서도 목소리는 진중했다.
"저 영감장이의 눈에 신광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결코 내공이 약한 사람 같지 않아요. 그리고 처녀는 발걸음이 가볍고 동작이 날렵한 것으로 보아 경공이 저보다 과히 뒤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낭천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래요?"
설소하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보기에 두 사람은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사주팔자나 봐주는 사람 같지는 않고 필경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아요."
낭천은 멍청한 표정으로 설소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목적이겠소?"
설소하는 곱게 눈을 흘겼다.
"그는 일부러 이런 얘기를 당신에게 해주고 당신더러 죽음을 자초하라는 것이에요."
"죽음을 자초하라니?"
설소하는 가벼운 한숨을 불어냈다.
"당신은 초류빈이 소림사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모든 것을 물리치고 달려갈 것은 뻔하잖아요. 그런데 당신 혼자서 그 팔백 명의 제자들을 상대할 수 있겠어요?"
낭천은 침묵을 지키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눈빛을 빛내며 야무지게 잘라 말했다.
"또 그들이 한 얘기가 모두 거짓이고 단지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수작일는지도 몰라요."
그리고는 낭천의 손을 꼭 잡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설사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초류빈은 지금으로서는 아무 위험도 없을 거예요. 당신이 가면 오히려 그가 더 곤경에 빠지게 될지도 몰라요. 소림의 제자들이 당신을 미끼로 그분을 위협한다면 그분은 위험도 불구하고 당신을 구하러 나올 게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당신이 그분을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해치는 격이 돼요."
낭천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당신의 생각이 치밀하고 옳소."
설소하는 더할 수 없이 고운 손으로 낭천의 양 손을 애무했다.
"당신, 소림에 가지 않겠다고 저와 약속해요, 네?"
낭천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가 이렇게 통쾌하게 승낙을 하자 설소하는 오히려 의심이 갔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은 암암리에 심각한 것이었다.
설소하가 차를 따라 낭천에게 갖다 주자 갑자기 낭천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새어나왔다.
"난 소림에 가지 않을 테니까 당신도 돌아가시오."
설소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급히 다그쳤다.
"당신은요?
낭천은 심각한 표정으로 우물쭈물 대답했다.
"나...나는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소."
설소하는 심한 충격을 받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바람에 찻잔에 따르던 차가 전부 밖으로 쏟아져 그녀의 옷자락을 흠뻑 적셨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부르짖었다.
"당신은 혹시 매화도로 변장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낭천은 눈을 들어 그녀를 한참 응시하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렇소!"
설소하는 붉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이미 결정을 내리셨나요?"
낭천은 조금도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소."
이 짧은 세 글자는 다시 생각해 볼 여지도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설소하는 약간 질린 듯한 얼굴로 침울하게 물었다.
"그런데...왜 저더러 돌아가라는 거죠?"
낭천의 대답은 역시 같았다.
"이건 내 일이오."
그러자 설소하는 고개를 떨구면서 간절하게 말했다.
"당신의 일은 또 저의 일이에요."
"그렇지만 초류빈은 당신의 친구가 아니잖소?"
설소하는 그윽한 눈길로 낭천을 쳐다보면서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당신의 친구라면 제 친구와도 다름이 없어요."
낭천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감격에 어린 빛이 떠올랐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더운 숨결을 낭천의 이마에 내쏟으며 지극히 상냥하게 말했다.
"당신이 친구에게 그만한 의리를 지켜주는데 저라고 그렇게 하지 말란 법이 있나요? 비록 아무 쓸모없는 저일는지 모르지만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서로 상의할 수도 있잖아요?"
낭천은 갑자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의 눈과 표정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말없는 언어가 때로는 겉치레만 있는 말보다 감동적일 때가 있다.
설소하는 풍만한 몸을 낭천에게 살며시 기대고 방그레 웃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 매화도 흉내를 내려면 먼저 손을 쓸 상대를 물색해야 해요."
낭천도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설소하는 화사한 꽃향기 같은 향기를 뿜어내면서 정답게 속삭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죄없는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는 없잖아요?"
낭천은 자기에게 기대온 여인의 젖가슴이 지극히 부드럽다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오. 내가 찾는 상대는 바로 부정한 수법으로 돈을 긁어 모으는 부잣집이나 강도들이오."
설소하는 매력적으로 웃으며 낭천의 까칠한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이 근처에 당신이 말한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제가 알고 있어요."
낭천은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을 의식하며 발작적으로 물었다.
"누구요?"
설소하는 가볍게 몸을 틀고 낭천의 맞은편 의자에 가서 앉으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 사람은 지난 날 녹림의 유명한 강도였어요. 그러나 오십 세 이후로는 깨끗이 손을 씻었죠. 그래도 가끔 남몰래 나쁜 짓을 하고 다녀요."
낭천의 표정에는 별달리 큰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당신은 그 자의 이름을 아시오?"
설소하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그의 본명은 장승기(張勝奇)예요. 그러나 지금은 모두 장원외(張員外)라 하죠. 강호인이래요."
낭천은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강호인이라고?"
설소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는 은 십만 냥을 강탈하면 그 중 백 냥으로 길을 고치고 다리를 놓죠. 그리고 밤에 백 명의 사람을 죽였다면 아침에 약을 선사하고 또 죽까지 사람들에게 나눠주죠. 강도가 호인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더 쉬운 거예요."
장승기는 화려하게 꾸민 침상에 비스듬히 앉아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벌겋게 달아오른 화롯불을 바라보며 흰 죽을 한 모금씩 마시면서 그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밖에는 흰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으나 방안은 화창한 봄날 씨처럼 따뜻했다. 방안 한구석에 놓여져 있는 화분에는 수선화가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그 화분 옆으로는 살이 통통하게 찐 고양이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장승기는 허리를 쭉 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올해는 봄이 매우 일찍 오는군."
오늘은 그도 눈보라를 맞으며 몇 리 길을 다녔다.
그것은 자기가 일을 시키는 일꾼이 노새의 발길질에 걷어채여 몸져 눕게 되어 그 집에 병문안을 가기 위해서였다. 지금 그는 매우 피곤하나 기분은 좋았다.
대개 좋은 일을 하게 되면 기분이 좋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가 병문안을 갔을 때 그의 셋째 부인이 오동통하고 탐스러운 사내아이를 낳아 주었기 때문에 한층 더 마음이 뿌듯했다. 장승기는 하녀가 들고 온 담뱃대를 들어 몇 모금 깊이 빨았다.
그리고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순간 하녀가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죽이 담긴 그릇을 떨어뜨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응?"
장승기는 대경실색하여 번쩍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는 어느 틈엔가 흑의인이 어떻게 방안으로 들어왔는지 우뚝 서 있었다.
장승기는 비륵 녹림에서 손을 씻은 지 오래나 그래도 무공은 여전했다. 그는 갑작스런 침입자를 향해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어떤 놈이 감히 나리의 머리 위에서 흙장난이냐?"
폭갈을 지르는 가운데 그는 어느새 목침을 들고 흑의인을 향해 집어던졌으나 장승기는 상대가 언제 어떻게 출수를 했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다만 그의 가슴이 썰렁해지는 지극히 짧은 느낌만 받았을 뿐이건만 가슴에는 어느 틈엔가 다섯 개의 핏구멍이 뚫려져 있었다.
매화도가 다시 나타났다. 주루나 객점 어디서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쑥덕공론이 벌어졌다. 장승기를 죽인 사람이 그럼 진짜 매화도란 말인가?
또 이 다음의 상대는 누구일까?
재산이 있고 세도가 있는 사람은 그날부터 발을 뻗고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다.
황혼 무렵, 땅땅땅! 하는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표정이 엄숙하고 냉담한 소림사의 승려들이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불전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발걸음은 평상시보다 더 가벼운 것 같았다. 그건 지난 여러 날 동안 소림사의 모든 사람 마음이 침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염불을 외우는 소리는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소림사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이런 종소리와 염불을 외우는 소리를 듣고 소림 제자들이 저녁 수업을 시작하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산세가 험악한 숭산(崇山) 중원오악(中原五嶽) 중의 하나이며 대소림사(大小林寺)가 있는 곳은 추위가 더 한층 심했다. 그 눈과 얼음이 쌓인 산을 한 사람이 급히 오르고 있었는데, 바로 소림의 문하이며 속가제자인 남양대협(南陽大俠) 소정이었다.
소정은 뒷산을 순시하는 동문 사형제들과 황급히 몇 마디 나누고는 곧장 후원으로 들어섰다. 주지의 방은 아무런 소리도 없고 조용했으며 오직 한 가닥 향긋한 향내음이 창문에서 흘러나와 사방으로 은은히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소정은 발걸음이 몹시 가벼워 땅을 디뎌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후원으로 들어서자마자 장문인의 방에서 심호 대사(心湖大師)의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누구냐?"
소정은 문 밖 멀찌감치 서서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제자 소정입니다. 긴히 여쭐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방장실에는 심호와 심감 그리고 백요생 세 사람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안색이 창백하여 무슨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소정은 안으로 들어가 다시 인사를 올리고 용건부터 말했다.
"강호에 매화도가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심감과 백요생은 동시에 안색이 확 변했다.
"뭐? 매화도가?"
소정은 지체없이 아뢰었다.
"사흘 전 벌써 손을 씻고 은퇴한 독행도(獨行盜) 장승기가 갑자기 피살을 당하고 집안의 값진 물건들을 송두리째 가지고 갔습니다. 장승기의 치명상은 바로 가슴팍에 있는 다섯 점 매화 모양의 핏구멍입니다."
심감과 백요생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쳐다보고 있었으나 혈색은 파리하게 굳어 있었다.
심호 대사 역시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마치 대웅보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과도 흡사했으나 손에 쥐어 있는 백팔염주는 어딘가 모르게 떨리는 것 같았다. 잠시 납덩어리 같은 침묵이 흘렀을 때 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매화도가 또다시 나타났다면 초류빈의 얘기가 거짓이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그 자는 정말 억울한 것이 아닌가?"
백요생은 심감에게 동의라도 구하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심감은 창문으로 걸어가 창밖에 쌓여 있는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아마 이것은 더욱더 초류빈이 매화도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심호 대사는 어리둥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심감은 예지로 번뜩이는 눈을 그들에게로 돌리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만약 매화도라면 누가 저 대신 잡혔다고 합시다. 그러면 저는 틀림없이 잠시 동안 숨어서 동정을 살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시 떠돌아다니면 오히려 초류빈을 구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백요생도 심감의 말에 신중한 맞장구를 보냈다.
"그렇습니다. 매화도가 다시 나타난 것은 누군가 초류빈을 구출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심호 대사는 곤혹스러운 빛으로 천천히 물었다.
"그럼 자네들의 의견은?"
심감은 방안을 서성거리며 신중하게 자기의 의견을 피력했다.
"장승기를 죽인 사람은 틀림없이 초류빈과 한패일 것입니다. 그가 매화도 행세를 하여 장승기를 죽인 것은 초류빈의 누명을 씻어 주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백요생이 말을 받았다.
"초류빈이 정말 매화도가 아니라면 그의 한패들도 그렇게까지 행동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심호 대사는 벌떡 일어서서 심감과 같이 한동안 방안을 서성거리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오늘 보제원(菩提院)당번이 누군가?"
심감이 즉시 대답했다.
"둘째 사형의 문하인 일균(一菌)과 일진(一塵)입니다."
심호 대사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 듯 심감에게 명령을 내렸다.
"빨리 그들을 들라고 하게."
심감은 즉시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심호 대사는 뒷짐을 지고 서서 불화로에서 피어나는 향연기를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는 일균과 일진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다섯째 사숙의 저녁 진지를 너희들이 갖다 드렸느냐?"
일균이 머리를 조아리며 황송한 듯이 대답했다.
"갖다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꼬리를 흐리자 심호 대사는 급히 다그쳤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일균이 고개를 떨구고 차분히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제자들은 며칠 전의 규칙대로 식사를 문 앞에다 갖다 놓았습니다. 분량도 어제와 같고 물도 갖다 드렸습니다."
일진이 뒷말을 받았다.
"밥상은 제자가 직접 문 밖에다 놓았습니다. 그건 제자가 방안의 동정을 살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문 밖까지 가자 초류빈이 빨리 가라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제자는 더 머물지 못하고 몇 걸음 옆으로 갔습니다. 그때 초류빈의 손이 문틈으로 나오더니 그 밥상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그런데 잠시 후 그는 밥상을 내던지고 말았습니다."
심호 대사는 그제야 번쩍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랬다더냐?"
일진은 더듬거리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그는 반찬이 나쁘고 또 술이 없다고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심호 대사는 얼굴에 노기를 띠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놈이 여기를 어디로 생각한단 말이냐? 여기가 주루인 줄 알았던가?"
일균과 일진은 삭발을 하고 장문인을 모신 지 십여 년이 되었으나 장문인이 이토록 크게 화를 내는 것은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말없는 가운데 앙금처럼 내리깔린 침묵 속에서 시간은 흘러가고, 심호 대사는 안색을 차츰 가라앉히더니 타오르는 향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그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해주고 술도 갖다 주도록 하여라."
그러자 심감이 한걸음 다가서며 황급히 물었다.
"사형, 어쩌시려고....."
심호 대사는 얼른 손을 휘저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초류빈이 먹지 않겠다면 다섯째 사제도 그와 함께 굶어야 하지 않는가? 그는 원래 몸이 약한 데다 요 근래에 와서 또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니 그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하네."
심감은 괴로운 표정으로 사형인 장문인 심호 대사를 주시했다.
"하지만...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면 초류빈은 더 발악을 할 것이 아닙니까?"
심호 대사는 신광을 번뜩이더니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네. 그놈이 하루 이틀쯤 더 날뛰도록 내버려 두게."
한편,
낭천은 반듯하게 침상에 누워 팔베개를 하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의 두 시진이나 이렇게 누운 자세로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은 마치 화강암이라도 된 것 같았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이것도 일종의 고된 훈련이었으며 반드시 초인적인 인내력이 있어야만 했다. 어떤 사람은 쉬지 않고 두 시진 동안 격렬한 운동을 할 수 있으나, 두 시진 동안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몇 명 없을 것이다.
황야의 생활로 이런 재주는 매우 큰 효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고 이 재주가 낭천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 주었는지 모른다.
낭천은 여러 날 동안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찾지 못한 적이 있어 하는 수 없이 참고 기다렸다. 그러면서 몸은 움직이지 말아야 했다.
이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체력을 아낄 수 있었으며, 체력이 있어야만 음식을 찾아 먹을 수가 있고 또 달릴 수도 있다.
동물 중에서 감각이 예민하고 영리하기로 이름난 토끼도 여러 번 그가 화석(化石)인 줄 알았다. 그때 그는 너무나도 허기가 져서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다. 그리고 한 번은 거의 보름 동안 눈과 바람만 불어 광막한 대지가 온통 하얀 벌떼들이 웅웅거리는 듯했다.
낭천의 나이 그때 겨우 열 살 그리고 또 이틀을 더 굶었다.
이런 상태 속에서 그는 곰 한 마리를 만난 것이다. 그는 이미 저?항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며,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그 상황 속에서도 그는 문득 곰은 죽은 사람을 먹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누운 채 죽은 척했으나, 뜻밖에도 그가 만난 곰은 늙고 간사스러운 놈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놈도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놈은 갈 생각을 않고 혓바닥으로 낭천의 얼굴을 핥아보고 발도 긁어보며 심지어는 이빨로 물어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낭천은 끝내 참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튿날, 그는 얼어 죽은 들개 한 마리를 찾아 그것으로 요기를 하여 체력을 되찾은 후 그 곰을 찾아 복수했다.
이런 인내력은 천성이 아니라 길고도 고된 단련이 필요했다. 처음 시작 할 때는 얼마 되지 않아 전신이 근질근질하고 가려워서 미칠 것만 같더니 이윽고 그것은 차츰 마비되며 끝내는 전신 근육의 감각도 느끼지 못하게끔 되었다. 지금은 그가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느껴지면 여러 시진 움직이지 않고 있을 수 있었다.
설소하도 밖에서 돌아왔을 때 그가 깊은 잠이 든 줄 알았다.
오늘 설소하의 옷차림은 매우 이상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광목으로 만든 헐렁한 옷으로 그녀의 아름다운 몸의 곡선을 모두 덮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그녀의 머리에 낡고 헌 털실로 짠 모자를 써서 얼굴을 모두 가렸다. 그녀는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나갔다가 두 시진 만에 들어온 것이다.
이때 낭천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어머나?"
설소하는 깜짝 놀라는 듯하더니 얼른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며 두 손으로 낭천의 가슴을 두드렸다.
"주무시는 척했군요? 저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여인의 매혹적인 웃음을 본 낭천은 살며시 그녀를 껴안았다. 마치 강하게 껴안으면 부서져 버릴 보물처럼.
설소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쳐들며 남자의 입술과 애무를 기다렸다. 설소하에게 있어 그 짜릿한 쾌감이야말로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낭천은 천천히 손을 풀었다.
눈을 뜬 설소하는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통통하고 붉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제가 귀찮아요?"
낭천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절대로 아니오."
설소하는 처절하리만큼 요염한 빛을 떠올리며 나직이 물었다.
"그러데...이 이틀 동안 당신은 왜 저를 피하시죠?"
낭천은 그녀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난...난 나 자신을 억제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그러자 설소하는 갑자기 그의 볼에다 자기의 입을 갖다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낭천은 그녀의 탄력있는 젖가슴이 가슴에 와 닿자 얼른 빠져나가 그녀의 벗어 놓은 모자를 들고 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자기의 가쁜 호흡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돌리며 담담하게 물었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소?"
설소하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낭천의 눈빛이 암울해졌다.
"그 중들이 아직도 그를 놓아 주지 않는단 말이오?"
"숭산의 소림사는 항상 침착해요. 무슨 일을 하건 오래오래 관찰하고 절대 경거망동하지 않아요.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않았지 잘못을 하진 않아요."
"하지만 이미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소?"
"아마 그들은 장승기를 죽인 사람이 매화도라는 것을 믿지 않나 봐요. 그건 매화도가 항상 계속해서 사건을 저지르지 절대 단 한 번으로는 그만두지 않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 같아요."
"그들이 믿는 날이 올 것이오. 나는 꼭 믿게 할 것이오."
"절 따라오세요. 가 볼 데가 있어요."
"어딜 간단 말이오?"
설소하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당신의 두 번째 상대를 찾는 거예요."
황혼 무렵, 타는 듯한 낙조가 대지 위에 내리자 거리는 낮과는 달리 또 다른 복잡함이 있었다. 수많은 인파들.....
낭천과 설소하도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차림이 전과 달리 매우 허술하여 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남의 주위를 받지 않았다.
이때 설소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전당포 하나를 가리켰다.
"저 간판을 좀 보세요."
그녀가 가리키는 전당포는 규모가 매우 컸다.
<신기당포(申記當鋪)>
낭천은 영문을 모르고 다그쳤다.
"저 간판이 뭐가 어쨌단 말이오?"
설소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 앞을 지나 일곱 번째 되는 집 앞에서 또 한 군데 주루 밖에 걸려 있는 현판을 가리켰다.
"또 저걸 보세요."
이 집은 장사가 매우 잘 되었으며 길 밖에서도 주방 안의 음식을 만드느라 부산한 칼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층으로 된 이 집에는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차 있었다. 그 주루의 간판도 역시 '신기장원루'라 쓰여져 있었다.
이번에는 낭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건 그가 이미 건너편에 있는 포목점에서도 검은 현판에 금으로 새긴 '신기포목점'이라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 안에서 비교적 사람이 많이 붐비는 거리는 세 군데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세 군데 거리 중에서 다섯 집 건너뛰고 일곱 집 건너뛸 때마다 모두 신기라는 금글씨로 쓴 간판이 걸려 있는 집은 모두 장사가 잘되었다.
낭천의 표정에 야릇한 변화가 생겼다.
"이 많은 점포를 모두 한 사람이 경영한단 말이오?"
설소하는 눈빛을 빛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모두 신노삼(申老三)이라는 자가 경영하는 거예요 "
낭천은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이젠 또 어딜 가야 하오?"
설소하는 소리없이 웃으며 낭천의 팔을 잡아 끌었다.
"저만 따라오시면 돼요."
낭천은 원래 말이 없고 묻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 더 묻지 않고 그녀를 따라 성 밖으로 나갔다. 그곳은 불빛도 없고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이었다.
가장 시끄러운 곳에서 또 가장 황량한 곳으로 오면 그 누구도 처량하고 침울해지기 쉬우나, 반대로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눈앞에 탁 트인 들판을 바라보며 낭천은 찬 공기를 듬뿍 들이켰다가 내뿜자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고 온 천지가 모두 자기 것처럼 생각되었다.
설소하는 낭천의 어깨에 가만히 기대고 서서 그의 상념을 깨뜨리지 않은 채 어두운 밤하늘을 응시하다 유성 하나가 길게 꼬리를 끌며 떨어지는 것을 보자 활짝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저걸 봐요, 유성(流星)이에요!"
낭천은 천천히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원을 빌었소?"
설소하는 입을 삐죽거렸다.
"유성은 언제나 눈 깜짝하는 순간에 사라지기 때문에 미처 소원을 빌지 못해요. 그건 유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미리 아는 사람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누가 유성이 언제 나타날지 알고 있나요? 제가 보기에 그건 모두 거짓말인 것 같아요."
"설혹 거짓말이라 해도 그것이 사람에게 많은 아름다운 환상을 만들어 주지 않소? 사람이 아름다운 꿈이나 희망을 오래 간직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음성은 지극히 부드러웠다.
설소하는 낭천을 올려다보며 고혹적으로 웃었다.
"당신도 그 전설을 알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낭천의 시선은 푸른 별들이 반짝이는 어두운 밤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유성은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고 대신 그의 눈에는 한 가닥 처량한 슬픔이 감돌고 있었다.
낭천은 유유히 입을 열었다.
"그 전설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소."
설소하는 의지가 담긴 그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당신, 어머님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어머님이 얘기해 주시던가요?"
낭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갑자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밤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초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은은히 들려왔으며, 어두운 먹구름에 가려 둥근 보름달은 절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낭천은 앞에 매우 큰 장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점점 가까이 가자 그 장원은 오히려 보이지 않았다. 그 장원의 담이 너무 높아 그의 시선을 가렸기 때문이었다.
설소하는 담 너머를 보려고 발돋움을 했다.
"굉장히 높은 담이군요. 높이가 사 장은 충분히 될까요?"
"거의 그 정도는 되겠소."
"넘어갈 수 있겠어요?"
"이 세상에서 자기 키의 네 배나 되는 담을 그냥 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소. 그러나 굳이 들어가려 한다면 다른 방도가 있소."
설소하는 고개를 떨구고 잠시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다. 비록 허름한 무명옷에 감싸이긴 했어도 하얀 그녀의 목덜미가 너무나도 곱다고 낭천은 생각했다. 이윽고 그녀는 담장을 따라 서너 걸음 옮기고 난 후 다시 낭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기가 바로 신노삼의 집이에요."
낭천의 눈빛이 돌연 번쩍 광채를 발했다.
"신노삼이 바로 내가 죽일 두 번째 상대란 말이오?"
"이 근처 몇백 리 안에서 그 자보다 더 좋은 상대는 없어요."
"하지만 그는 장사꾼이 아니오?"
"저도 당신이 장사꾼에게 손을 쓰는 것을 꺼린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장사꾼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요."
낭천의 얼굴은 흐린 달빛을 받아 약간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어떤 종류요?"
설소하는 높은 담장을 한 번 더 올려다보고 나서 냉담하게 대답했다.
"아주 얌전하지 못한 종류예요. 생각해 보세요. 얌전하게 장사를 한 사람이 같은 성내에서 그리고 그것도 같은 거리에서 열 몇 개의 점포를 열고, 또 얌전한 장사꾼이 이렇게 높은 담을 쌓을 필요가 있을까요?"
낭천의 목소리에는 약간 강한 억양이 들어 있었다.
"담이 높고 점포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법을 어기는 것은 아니잖소?"
설소하는 당치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담이 높은 것은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격으로 남의 보복이 두려워서이고 점포가 많다는 것은 그가 부당한 강탈을 할 줄 알기 때문이죠."
낭천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강탈?"
설소하는 눈빛을 빛내며 다시 말했다.
"이 신씨 집은 대가족이라 사촌 형제들까지 모두 열여섯이나 되어요. 이 열여섯 사람이 모두 사십여 개의 점포를 경영하고 있어요."
낭천은 손으로 턱을 고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따져보면 한 사람 앞에 점포가 두 개 내지 세 개씩 나누어지겠지. 으음.....별로 많지도 않군."
설소하는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 사십여 개가 되는 점포가 모두 신노삼의 것이 되었어요."
낭천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아니, 그건 또 왜 그렇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