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30 소이비도 제2권 음부淫婦의 눈물





음부(淫婦)의 눈물



남갈자는 몸에 꼭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소매만은 길고 넓었으며 더욱 그녀의 두 손은 모두 소매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무슨 무기로 활패왕을 살해했는지는 도저히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가 어떠한 무기를 사용했든 그것은 단연코 무서운 무기일 것이다.

손꼽추와 손소홍은 냉정한 태도로 방관만 했을 뿐 그녀의 출수를 제지하지 않았다. 제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제지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남갈자는 땅에 쓰러져 있는 활패왕의 시체를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흡사 자신의 성적을 감상하듯, 그리고 나서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아주 요염한 웃음이었다.

"나는 단지 한 가지 초식밖에 사용하지 않았어요. 이젠 당신네들도 내 말을 믿겠죠?"

손꼽추와 손소홍은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남갈자는 눈썹을 살짝 위로 치켜세웠다. 그래도 눈은 크게 보이지 않았다.

"내 무공도 이 정도면 훌륭한 편에 속하죠?"

그래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남갈자는 원래부터 그들의 대꾸를 바라지 않은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곡의 청마수는 비록 병기보에 아홉 번째로 열거돼 있지만 백요생이 만약 나까지 병기보에 올려놓았다면 그는 영락없이 열 번째로 물러나게 되었을 거예요."

그렇다. 그녀의 말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솜씨는 확실히 이곡보다도 빠르고 악독했다.

남갈자는 음탕한 눈빛을 손꼽추에게 집중시키며 마치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는 초류빈을 데려가도 아무 말 않겠죠?"

손꼽추의 두툼한 입술이 열리며 단호한 한 마디가 내밸어졌다.

"안 된다!"

그녀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도리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만 그를 데려갈 수 있죠? 당신과 함께 하룻밤을 자면 될까요?"

손꼽추는 노갈일성과 함께 쌍장을 일제히 격출했다. 그의 왼손은 주먹이 굳게 쥐어져 있으며 오른손은 갈퀴처럼 손가락 끝을 약간 구부린 상태였다. 주먹은 바윗돌을 박살내 버릴 만한 위력을 지녔고 오른손은 무수한 변화가 숨겨져 있어 비록 적수공권(赤手空拳)이지만 그 위세는 활패왕이 전개한 일도(一刀)보다 열 배는 더 강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블구하고 남갈자는 허리를 살짝 비틀며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녀의 허리는 물뱀과 같아 수시로 방향을 돌릴 수 있었다. 분명히 그녀가 왼쪽으로 몸을 피했는데 상대방이 덩달아 왼쪽으로 몸을 돌리면 그녀는 어느 새 오른쪽에 가 있는 것이다.

손꼽추가 일격을 전개하자 그녀는 이미 손꼽추의 뒤쪽에 가 있었다. 다행히 손꼽추는 반응이 빨라 왼쪽 주먹을 적시에 안쪽으로 구부려 격출해 낸 힘을 풀고 동시에 오른손 주먹을 쥐면서 전개했던 힘을 신속하게 거두었다.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일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이미 전개한 초식을 적시에 거두는 일이다. 일단 격출된 초식은 흡사 시위를 벗어난 화살과도 같아 도중에서 거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손꼽추는 이때 어려운 일을 흠잡을 데 없이 해낸 것이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수중의 힘을 졸지에 거두었다면 반동에 의해 몸이 자연히 뒤로 후퇴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갈자가 바로 뒤에서 버티고 있으니 스스로 무덤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손꼽추에게 다행한 것은 그가 원래 꼽추라는 점이다. 그는 전개한 힘을 거두는 순간 전부 등 뒤에 돌기된 타봉(駝峰)에 집중시킨 것이다.

아울러 그는 양어깨를 잽싸게 안쪽으로 움츠리며 타봉으로써 남갈자를 겨냥해 부딪쳐갔다. 이것은 또한 손꼽추의 절예(絶藝)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의 등 뒤에 돌기된 타봉은 이미 금강불괴(金剛不壞)에 가까운 경지로 단련되어 백 근이 넘는 쇠뭉치로 얻어맞아도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타봉으로 남갈자를 향해 부딪쳐 가는 기세는 웅후한 장풍에 비교될 바가 아니었다.

남갈자는 풍문에 들은 바가 있어 감히 정면 대결을 하지 못하고 역시 허리를 유연히 비틀어 긴 소매를 허공에 떨치며 이번에는 손꼽추의 면전에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요염한 웃음이 얼룩져 있었다.

손꼽추는 공격이 거듭 실패로 돌아가자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이 죽일 년....."

남갈자는 눈웃음을 치며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죽더라도 나는 당신과 함께 침상에서 죽고 싶어요!"

이런 여인을 상대로 그의 요염한 웃음, 신음을 토할 듯한 묘한 음성을 듣노라면 설사 심신(心神)이 혼란되지 않더라도 역시 마음이 집중되지 않아 가벼운 실수를 범하게 된다.

남갈자는 지금까지 남자들의 그러한 실수를 이용해 왔다. 그래서 십여 년 간 그녀의 손에 죽은 남자는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만난 사람은 애석하게도 손꼽추였다. 손꼽추는 여인에 대해 마치 이빨 빠진 할망구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암소갈비를 보듯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는 남갈자의 음탕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차 기합을 지르며 갈퀴 같은 손을 격출했다.

남갈자는 소매를 슬쩍 위로 걷어붙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는 간드러진 음성으로 외쳤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손꼽추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초식을 거두었다.

"무엇을 기다리란 말이냐?"

남갈자는 버릇처럼 또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출수를 할 생각이 없는데 끝끝내 고집을 부리겠다면 내 무기부터 구경하세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매 속에서 한 줄기 시퍼런 광채가 전광석화같이 손꼽추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손꼽추는 기합을 내지르는 동시에 손을 뻗어 날아오는 시퍼런 광채를 향해 정면으로 낚아채 갔다.

누구와 싸우든 항상 속전속결을 원하는 손꼽추였다. 그래서인지 남갈자의 무기가 필시 특이한 외문병기(外門兵器)임을 짐작하면서도 정면으로 낚아채 간 것이다.

상대방의 무기가 제아무리 예리하여 설사 그의 손을 베어 버린다고 해도 그는 역시 상대방의 무기를 낚아챌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이 너무 지나쳤던 것 같다.

한편 손소홍은 줄곧 제자리에 서서 전혀 출수할 뜻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시종 남갈자의 소매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관찰력은 빠르고 정확했다. 시퍼런 광채가 번쩍이는 찰나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이렇게 기이(奇異)한 무기를 그녀는 난생 처음 본다. 그것은 얼핏 보아 열 배 가량 확대시킨 갈자의 독미(毒尾)와도 같이 길고 꼬불꼬불했다. 그리고 겉보기엔 부드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무쇠처럼 딱딱할 뿐만 아니라 임의로 방향을 꺾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무기의 전신에 모두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시퍼런 광채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시엔 극독이 묻어 있는 게 분명했다.

손소홍도 역시 숙부의 대응조력(大應爪力)에 대해 확고한 신심(信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숙부님의 손이 일단 남갈자의 무기에 닿기만 하면 영락없이 목숨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남갈자의 출수는 물론 빨랐지만 손꼽추의 출수는 더욱 신속했다.

손소홍은 자기가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 저지한다 해도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십사 년 간 상을 닦아온 숙부님의 성격이 예전과 조금도 변함없이 이다지 폭열(暴烈)하리라는 것을 미리 계산해 두지 않았던 것이 큰 실수였다. 사실 손꼽추는 십사 년 동안 억제해 오던 감정이 일시에 폭발한 것이었다.

손소홍은 다급한 나머지 놀란 외침을 토했다. 바로 그때 허공을 가로지르며 느닷없이 손이 뻗쳐왔다. 그 손의 동작은 손소홍의 놀란 외침보다도 빨랐다.

그녀의 놀란 외침이 막 입 밖에 내뱉어지자 그 손은 이미 허공에서 남갈자의 손목을 낚아잡았다.

우드득! 쨍!

뼈마디가 부러지는 소리와 예리한 금속성이 들리며 시퍼런 광채는 땅에 떨어졌다. 시퍼런 광채가 땅에 떨어졌을 때 남갈자는 이미 일 장 밖으로 물러났다. 그녀는 너무나 갑작스레 물러났기 때문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담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모든 소리와 모든 동작이 일시에 정지되었다. 집안은 돌연 쥐죽은 듯이 고요해지고 공기마저도 응결된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은 석고상처럼 몸이 굳어져 눈동자는 놀라운 빛을 담고 그 손을 주시했다.

남갈자의 눈엔 놀라움이 충만되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공포와 고통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녀의 손목은 이미 절단되어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놀라움을 안겨 준 손은 드디어 뒤로 거두어졌다. 뻗쳐나오는 동작은 번개처럼 빨랐지만 거두는 속도는 매우 느렸다. 그러더니 한 사람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다름아닌 곤드레 취해 있던 초류빈이었다.

손소홍은 경이와 기쁨이 엇갈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알고 보니 당신은 취하지 않았군요."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었다.

"나는 비록 심정이 좋지 않고 체력이 약해졌지만 주량만큼은 언제나 센 편이었소."

손소홍이 그를 똑바로 주시하는 흑백이 뚜렷한 커다란 눈동자엔 가지각색의 감정이 뒤범벅 돼 있었다. 기쁨인지 놀라움인지 아니면 감탄인지 실망인지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끝내 초류빈을 취하게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남갈자의 눈동자에선 이미 요염하고 음탕한 빛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단지 경황과 공포뿐이었다. 그녀가 공포에 떠는 것은 물론 손목이 잘려진 원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초류빈의 손에 어느새 한 자루의 비도가 쥐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비도탈명.

비도는 아직 손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혼백(魂魄)을 빼앗기엔 충분했다. 비도가 가장 무서울 때는 바로 아직 손을 벗어나지 않았을 때다.

왜냐하면 일단 비도가 손을 벗어나면 상대방은 무엇이 두려움인지조차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은 공포를 느낄 리가 없다.

주위의 존재를 의식하게 하는 것은 호흡소리뿐이다. 무서운 호흡소리는 완전한 고요보다도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고요를 의식하게 만든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모든 사람은 스스로 질식을 하거나 미쳐 버릴 것이다.

남갈자의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쉴새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떨리는 몸을 도저히 억제할 수 없어 홀연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외쳤다.

"왜 비도를 던지지 않죠? 왜 아직 나를 죽이지 않느냔 말이에 요."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로 인해 그녀는 이미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초류빈은 그녀를 주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고 이곡을 위해 복수하려는 것은 아직은 진정(眞情)이 남아 있다는 증거요. 그가 죽었으니 당신은 물론 고통스럽겠지...가슴이 찢어질 듯이....."

초류빈은 손에 쥐고 있는 비도의 칼날을 주시하였다. 그의 눈동자에 한 가닥 고통스러운 빛이 스쳐갔다. 그리고 그의 표정도 울적하게 변했다.

"나는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소. 누구보다도...나는 단지 당신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아 주길 바라오. 그러한 고통은 절대 살인을 함으로써 감소되는 게 아니오. 당신이 제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인다 해도 그 고통은 추호도 감소되지 않을 것이오."

말을 끝내는 동시 싸늘한 광채가 번뜩이며 허공을 수놓았다. 비도는 이미 그의 수중에서 벗어난 것이다.

팍!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시퍼런 광채를 띤 비도는 남갈자 옆에 있는 나무기둥에 꽂혔다.

초류빈은 손을 내저었다.

"이젠 떠나가시오."

남갈자는 마치 귀신에게 홀린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만 이 고통이 감소될 수가 있죠?"

초류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겠소...어쩌면 그를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게 되면 그 고통이 감소될 수도 있을 것이오. 당신이 꼭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길 바라겠소."

남갈자는 멍하니 그를 주시하며 소리없는 눈물을 양볼에서 흘렸다.

손소홍도 역시 넋빠진 사람처럼 초류빈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초류빈 같은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세상에 이러한 남자가 있다고는 거의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주시했다.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남갈자는 이미 떠났다. 눈물을 흘리며 떠난 것이다.

초류빈은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홀연 빙긋이 웃었다.

"낭자, 당신은 내가 왜 그녀를 죽이지 않았는지 몹시 이상하게 생각하는 모양이구려."

손소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손꼽추는 줄곧 땅에 떨어져 있는 남갈자의 그 이상한 무기를 응시하며 역시 시종 입을 열지 않았다.

초류빈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의 표정은 조금도 술에 취한 것 같지 않았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죽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왔소. 그래서 그녀를 살려 준 것이오."

손소홍도 홀연 웃음을 지었다.

"나는 당신이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이 그녀를 죽이지 않은 데 대해서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당신은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일부러 취한 척한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뿐이에요."

초류빈은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낭자도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니 물론 취한 척하는 게 진짜로 취한 것보다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오. 만약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취한다면 비단 그 당시도 재미가 없을 뿐더러 다음날까지 골치 아픈 고역을 치러야 될 것이 아니겠소?"

손소홍은 생긋이 웃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군요."

초류빈은 그녀가 비꼬고 있는 것 같아 얼른 다음 말을 보충해 주었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취할 때가 있을 것이오. 낭자가 정말 나를 취하게 하고 싶으면 차후에도 기회가 많을 테니 그때는 실수없도록 하시오."

손소홍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커다란 눈망울을 깜박거렸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놓쳤으니 나중에 당신을 취하게 할 기회란 좀처럼 오지 않을 거예요."

초류빈은 실소를 금치 못하며

"사실 나는......"

하고 막 말문을 열다가 갑자기 눈에 띄는 것이 있어 하던 말을 중단했다. 알고 보니 손꼽추가 이때 성큼성큼 부엌 쪽으로 걸어가 술단지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마개를 따는 즉시 꿀꺽꿀꺽 술을 들이키는 것이었다.

그가 단숨에 약 한 단지 가량 들이켰을 때 손소홍은 비로소 간신히 그의 손에서 술단지를 빼앗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다른 사람은 일부러 취한 척을 해 가면서까지 취하기를 원하지 않는데 숙부님은 왜 스스로 자신을 취하게 만들려 하시죠?"

손꼽추는 가까운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초점을 잃은 눈을 뜨고 주정을 하듯 흥얼거렸다.

"일취해천수란 말이 있듯이 취함으로써 모든 시름을 잊고 싶다. 나는 취해야 돼...취하지 않고는....."

손소홍은 울먹이듯 다그쳐 물었다.

"왜 꼭 취해야 하죠?"

그러나 손꼽추는 다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왜 꼭 취해야 되느냐고 물었지? 좋다, 그럼 너에게 말하 마. 나는 어느 누구의 은혜도 받고 싶지 않단 말이다!"

그는 다시 쓰러질 듯 의자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중얼거렸다.

"초류빈, 초류빈,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를 살려 주었소? 나는 한 사람에게 구명지은(救命之恩)을 받았기 때문에 여지껏 이런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이오....."

초류빈은 그에게 묻고 싶었다.

'누가 당신을 구해 주었소? 당신은 무엇 때문에 목숨을 살려 준 사람에게 이곳에서 십여 년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소? 당신이 이곳에서 지키고 있는 것이 대관절 무엇이오?'

하지만 그는 물을 수가 없었다. 손꼽추의 흥얼거리는 음성은 점점 미약해지더니 끝내 들리지 않았다. 취했는지 아니면 잠들어 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초류빈은 손소홍에게 시선을 돌려 그녀에게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깜찍하고도 지혜로운 눈동자를 보자 물으려던 생각을 이내 취소했다. 손소홍이 말하기 싫은 비밀을 캐묻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임을 초류빈은 알고 있었다.

초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는 도리밖에 없었다.

"낭자의 숙부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대장부요."

손소홍은 곁눈으로 그를 흘겨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대장부라야만 비로소 진짜 빨리 취할 수 있다는 것인가요?"

초류빈은 상에 엎어진 손꼽추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손소홍의 표정을 뇌리로 읽어내릴 수 있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대장부만이 죽을 때까지 일언천금의 언약을 지킬 수 있고 대장부만이 남의 은혜를 받기 싫어하는 법이오. 그리고 진정한 대장부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소."

손소홍은 눈동자를 사르르 굴렸다.

"그래서 당신도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남아 있는 건가요?"

초류빈은 침묵으로 그녀의 질문을 대답했다.

손소홍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떠한 이유를 내세운다 해도 당신은 이곳을 떠나지 않을 작정인가요?"

초류빈의 반응은 역시 침묵이다.

손소홍은 몸을 약간 돌려 정면으로 그를 주시했다.

"하지만 당신은 낭천을 찾아갈 생각이 없단 말이에요? 그는 당신의 친구가 아닌가요?"

초류빈은 다시 침묵을 지키다가 비로소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최소한 자기를 지킬 줄은 알 것이오."

손소홍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들은 바에 의하면 설소하는 비록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이 아름다운 용모와 몸매를 지녔다지만 남자를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취미가 있다던데요?"

그녀는 다음 말을 유난히 또렷하게 이어갔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원하나요?"

초류빈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손소홍은 눈빛이 흐릿해져 탄식을 했다.

"당신은 절대 이곳을 떠나지 않을 모양이군요. 그녀를 위해 당신은 어떠한 일도 포기할 결심이 가슴 깊이 뿌리박혀 있는 거예요."

그녀의 흐릿해진 눈빛이 다시 야광주처럼 빛나며 무한히 따사로운 정을 담고 초류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당신은 왜 남갈자에게 얘기했듯이 그녀를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지 않죠?"

초류빈의 얼굴에 금세 고통스러운 빛이 떠오르더니 허리를 구부려 연방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손소홍은 고개를 숙여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면 저도 강요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당신은 최소한 저의 할아버님을 한번 만나뵈어야 할 게 아니겠어요?"

초류빈은 억지로 기침을 멎게 하고 물었다.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오?"

"그 어르신네는 성 밖 정자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세요."

"정자라니....."

"상관금홍이 필시 그곳을 지나기 때문이에요."

초류빈은 생각을 굴리며 말했다.

"설사 상관금홍이 그곳을 지나간다 해도 낭자의 할아버지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오."

손소홍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그의 말을 부정했다.

"꼭 만나게 될 거예요. 상관금홍은 생전 마차를 타지 않을 뿐더러 말을 타지도 않죠. 그는 늘 걷기를 좋아해요. 그는 사람이 걷기 위해 두 다리가 생겼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죠."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었다.

"낭자가 알고 있는 것은 정말 많구려."

손소홍은 자랑스럽게 활짝 웃었다.

초류빈은 즉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낭자는 비단 상관금홍이 온다는 사실을 알 뿐만 아니라 그가 어느 쪽에서 오는 것까지 알고 있으며, 그리고 그 편지는 설소하가 쓴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그녀가 어디에 숨어 있는 것까지 알고 있으니....."

그는 손소홍의 눈동자를 주시하며 천천히 물었다.

"그러한 일들을 낭자는 어떻게 알았소?"

손소홍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애교 있게 말했다.

"물론 제나름대로 방법이 있어요. 하지만 그 방법을 당신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어요."

초류빈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밤이 깊었다. 성 밖의 야색은 성 안의 야색보다 더 짙게 느껴졌다. 천지간에 오직 고요만이 존재할 뿐, 밤바람에 이따금 이름모를 벌레의 밀어가 들려왔다.

손소홍의 걸음은 매우 경쾌했다. 그녀는 영원히 지칠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모두 흥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삶에 대해 자신으로 가득차 있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 젊다. 그녀의 곁에서 걷고 있는 초류빈은 마침 그녀와 강렬한 대조가 되었다. 초류빈은 그녀가 부러웠다. 심지어 담담한 질투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그러한 질투를 발견했을 때 비로소 내심 깜짝 놀랐다.

'나는 정말 노쇠한 것일까.....'

오직 노쇠한 사람만이 젊은이의 생동력에 대해 질투를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초류빈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비웃듯 히죽 웃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만약 십 년 전이라면 나는 절대 낭자와 이렇게 가까이 걷지 못했을 것이오."

손소홍은 약간 멍해지는 표정으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엇 때문에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죠?"

초류빈은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의 행실이 좋지 않다는 것은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겠소? 그런데 낭자같이 젊은 여인과 밤길을 함께 걷는 것이 발각되면 듣기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기가 일쑤일 것이오."

그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도 나는 이미 늙었소.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본다면 필시 부녀라 생각할 것이오."

손소홍은 그의 말을 듣자 펄쩍 뛰었다.

"저의 아버지로 보인다고요? 그것은 당치도 않은 소리예요. 당신은 정말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나요?"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오."

그러자 손소홍은 홀연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초류빈이 그녀의 갑작스러운 웃음에 표정이 약간 멍해지며 반문했다.

"무엇 때문에 웃소?"

손소홍은 손으로 입을 가려 웃음을 멎게 하고는 힐끗 초류빈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저를 웃겼기 때문이에요."

초류빈은 더욱 멍청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이라니....."

초류빈을 바라보는 손소홍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성화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 당신은 저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죠?"

이것 또한 엉뚱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초류빈은 내심 뜨끔해지는 것을 뚜렷이 의식할 수 있었다.

그는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고 퉁명스레 되물었다.

"낭자를 두려워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손소홍의 눈동자는 더욱 빛나 초류빈의 얼굴을 환히 비추어 주는 것 같았다. 그 눈동자는 철부지 어린애처럼 천진스럽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자상한 어머니처럼 포근한 느낌마저 주었다.

"당신은 행여나 자신의 감정이 다소나마 저에게...쏠릴까 봐 두려워서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고의로 강조하는 게 아닐까요?"

초류빈은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손소홍은 코를 찡긋하며익살을 부리듯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해 당신이 만약 영감이라면 저도 역시 할망구일 거예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쳐들어 초류빈을 정시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자신이 먼저 늙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로 늙어지기가 쉬워요. 저의 할아버님은 항상 늙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죠. 당신은 아직 젊어요. 그러니까 차후로는 제발 자기가 늙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야색이 짙어 그녀의 표정을 똑똑히 볼 수는 없었다.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단지 그녀의 빛나는 큰 눈동자일뿐이다. 그녀의 눈동자엔 유정으로 충만돼 있다. 그것은 순진한 유정이었다.

오직 처녀의 감정만이 그렇게 순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쌍의 눈을 바라보는 초류빈은 홀연 십여 년 전의 설벽운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 때의 설벽운도 이렇게 순진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초류빈은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눈빛을 피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저것들을 보시오. 정자가 보이는구려. 낭자의 할아버지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서 길을 재촉합시다."

하늘엔 별도 달도 없고 또한 등불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침침한 야색 속에 단지 멀리 보이는 정자 쪽으로 한 점의 불꽃이 반짝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불꽃이 반짝거리는 순간 비로소 한 사람의 그림자를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손소홍은 그 작은 불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당신은 저 불꽃을 보았나요?"

"보았소."

손소홍은 눈동자를 굴리며 다시 물었다.

"저 불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것은 낭자 할아버지의 담뱃대에서 생긴 불꽃일 것이오."

그러자 손소홍은 어린애처럼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와...당신은 정말 상상력이 대단하군요.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예요. 호호호....."

초류빈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숨김없는 웃음이었다. 그 자신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여자와 함께 있으면 평상시보다 웃음이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기침을 하는 횟수도 줄어드는 것 같았다.

손소홍은 불꽃이 반짝이는 곳을 주시하며

"상관금홍이 과연 이미 다녀갔는지 모르겠군요."

하고 말하더니 안색이 약간 심각하게 변했다.

"어찌 되었든 빨리....."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초류빈은 별안간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소홍은 그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살짝 곁눈질로 초류빈을 훔쳐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초류빈이 심각한 안색으로 먼 길 쪽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먼 길 쪽에 두 점의 불꽃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두 개의 초롱블이다. 초롱불은 대나무 끝에 높이 매달려 있었다. 등신(燈身)이 황금색이므로 등불마저 황금색으로 변했다.

더욱이 등을 받쳐 들고 있는 사람도 황금색의 옷을 입고 심지어 그들의 얼굴마저도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때문에 유난히 신비스럽고 으시시해 보였다.

초류빈은 몸을 번뜩여 재빠르게 손소홍을 길 옆의 나무 뒤로 끌고 갔다.

손소홍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금전방인가요?"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손소홍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알고 보니 상관금홍이 이제야 당도했군요. 혹시 도중에서 무슨 일이 생겨 시간이 지체된 게 아닐까요?"

초류빈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마 다리가 둘밖에 없어 빨리 걷지 못한 모양이오."

그들은 곧 자세히 앞쪽을 살폈다. 앞서 나타난 두 개의 초롱불 뒤에 두 개의 초롱불이 더 보였다. 그들은 서로 삼 장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앞쪽의 초롱불과 뒤에 보이는 초롱불 사이에 두 사람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선후로 해서 비록 느리게 걷고 있지만 걸음 폭은 크게 옮겼다.

두 사람의 키는 모두 컸다. 그리고 모두 황금색 장삼을 입고 있었다. 앞에 있는 자의 옷자락이 너무 길어 거의 발을 덮을 정도였다. 뒤에 있는 자는 그와 대조적으로 옷자락이 짧아 무릎을 간신히 덮을 정도였다.

두 사람에게 또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가장자리가 넓은 죽립을 깊이 눌러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초롱불의 불빛은 매우 밝았지만 그들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앞에 있는 남자는 적수공권으로 아무런 무기도 휴대하지 않았다. 뒤에 있는 자는 허리에 한 자루의 장검을 차고 있었다. 검집이 없는 검이었다.

초류빈은 그것을 보자 문득 그 자가 차고 있는 방식이 낭천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다. 단지 낭천은 검을 허리 중앙에 차고 검자루를 우측으로 향한 데 비해, 이 사람은 검을 허리 오른쪽에 꽂고 검자루는 좌측을 향하게 하고 있었다.

그는 아마 왼손잡이가 아닐까? 초류빈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연히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는 왼손잡이 검수(劍手)와 싸우는 것을 싫어했다. 왼손으로 검을 사용한다면 그 검법은 필경 다른 사람과 상반될 것이다. 게다가 검초 역시 일반 사람에 비해 악랄하고 신비스러워 상대하기가 한층 힘들었다.

검자루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신속함을 위주로 하는 검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초류빈은 첫눈에 그가 만만치 않은 적수임을 간파했다. 그것은 초류빈이 다년간 적을 상대해 온 경험에서 얻어진 결론일 뿐 아니라 그의 초인적인 육감에서 비롯된 판단이었다.

29 소이비도 제2권 놀라운 소식





놀라운 소식



손소홍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입가엔 여전히 앵두빛같이 싱그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또 그 고질적인 버릇이 나왔군요. 당신이 물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질문을 던지죠?"

나무라듯 곱게 그를 흘겨 보고는 손소홍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상관금홍 같은 사람의 성질을 당신은 물론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보통 보물이라면 절대 그의 마음을 동요시킬 수가 없죠. 그런데 이번에는 왜 마음이 동요되었는지 아세요?"

초류빈의 대답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르겠소."

손소홍은 지체하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았다.

"그는 왕년의 제일 명협(名俠)이라 알려진 심랑(沈浪)이 영존과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초류빈은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요지(要旨)가 무엇인지 걷잡을 수 없어 다소 표정이 굳어졌다.

"심대협과 선친이 절친한 친구였다는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심대협은 오래 전에 이미 배를 타고 어디론가 은거해 버렸소. 그것이 이번 일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요?"

손소홍은 생긋이 웃었다. 살짝 파들어 가는 보조개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당신에게 계속 질문을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갑갑해서 숨통이 막힐 것 같군요. 좋아요, 당신의 질문에 대답해 드리겠어요. 그 대신 먼저 석 잔을 단숨에 들이킨다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녀는 고의로 초류빈을 취하게 할 속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제시한 문제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대답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초류빈은 취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셔야만 했다.

손소홍은 그제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심대협이 은거하기 전에 영존에게 두 가지 무공비급을 맡겼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그 두 가지 무공비급에는 심대협이 평생 동안 연구한 절학이 전부 수록돼 있죠. 당신은 그 중에서 한 가지만 터득했어요. 비도탈명은 이미 천하무적인데 만약 두 가지 다 터득했더라면 더욱 언급할 여지가 없을 거예요. 그래서 상관금홍 같은 사람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초류빈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멍청해졌으나 곧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나까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있겠소?"

손소홍, 그녀는 다시 말을 받았다.

"그것은 전부 설소하가 조작해 낸 헛소문이란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심대협 같은 절세기인이라면 인간의 약점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무공비급을 남겨 두어 후인들로 하여금 피비린내나는 쟁탈전을 벌이게 하겠어요."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가 설사 무공비급을 남긴다 해도 역시 절대 당신네 집에 남겨 두지는 않았을 거예요. 영존과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당신네 집에 화근을 남기게 할 리가 만무하니까요."

초류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틀림없는 말이오."

손소홍은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당신은 나에게 많은 문제를 묻고 싶겠죠? 그래서 당신에게 다시 질문을 할 권리를 주기 위해 이번에는 당신이 분명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하겠어요."

그녀는 눈동자를 유난히 빛내며 천천히 물었다.

"당신의 마음속은 아직도 그녀뿐이죠? 심지어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 되어 있고...제가 말하는 그녀가 누구인지 당신은 물론 알고 있겠죠?"

초류빈은 다시 멍해졌다. 손소홍이 이런 질문을 던져오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어느 누가 그에게 이 질문을 해도 그는 절대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비밀이며 또한 가장 비밀스러운 고통이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즉, 칼로써 그의 가슴을 도려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손소홍의 눈빛은 하도 부드러워 추호의 악의(惡意)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처녀들은 모두 호기심이 많은데 그녀도 단순한 호기심에서 물은 것일까?

초류빈은 그녀가 자기를 해칠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초류빈에게 이렇게 많은 비밀을 털어놓을 리가 만무하다. 더군다나 그 모든 비밀은 초류빈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다.

손소홍, 그녀의 정체는 대관절 무엇일까? 그녀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비밀을 알고 있을까? 그녀의 조부는 풍진이인(風塵異人)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지금의 이름은 뱀이 허물을 벗은 컵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 그 노인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그는 밖으로 사람을 마중나갔다는데 상대방은 누구일까? 혹시 상관금홍이 아닐까?

낭천과 설소하는 또한 어디에 숨어 있는지...이 많은 문제는 초류빈이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알아내야 할 것들이었다.

초류빈은 함참 침묵을 지키다가 드디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무정(無情)과 유정(有情)은 본디 종이 한 장 차이인 것, 정리하려면 더욱 엉키고 끊으려면 더욱 새로워지는 것...유정인지 무정인지 어느 누가 뚜렷한 정의(定義)를 내릴 수 있겠는가...어느 누가...어느 누가....."

그의 음성은 차츰 낮아지며 나중에 이르러서는 무슨 말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손소홍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신색이 울적하게 변했다.

"자고로 다정한 사람에겐 한(恨)이 남기가 일쑤이지만...당신은 무엇 때문에...무엇 때문에....."

처녀의 음성은 더욱 낮아 심지어 자기 자신도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한참 침묵이 흐른 후에 그녀는 홀연 술잔을 들어올려 단숨에 들이키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패배를 시인하겠어요. 묻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어서 물으세요. 당신은 계속 물을 자격이 주어졌어요. 하지만 만약 내가 정확한 대답을 한다면 당신은 역시 패하는 것이니 술을 마셔야 해요."

초류빈은 지체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낭천은 지금 어디에 있소?"

손소홍은 눈을 흘기며 물었다.

"당신이 첫마디에 그 질문을 하리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그녀를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당신이 가장 관심을 갖는 사람은 바로 낭천이겠죠."

초류빈은 탄식이 앞섰다.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그를 친구로 사귀었다면 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오."

손소홍은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만약 다른 사람이 당신 같은 친구를 사귀게 되면 역시 그 정도의 관심을 가질까요?"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품안에서 똘똘 말은 종이를 꺼냈다.

"낭천이 있는 곳의 위치가 그려져 있는 지도예요. 이 지도대로 찾아가면 그를 만나보게 될 거예요."

초류빈은 힘 있게 그 종이를 움켜쥐며

"고맙소."

하고 간단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는 하루 사이에 두 번째 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 것이다.

손소홍은 그를 정면으로 흘겼다.

"제가 당신 신상에 가장 밀접한 비밀을 말했을 때도 당신은 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당신을 죽이려는 자를 지적해 주었을 때도 당신은 역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무엇 때문에 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거죠?"

"....."

초류빈은 침묵으로 대답을 거부했다.

손소홍은 스스로 그 다음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설사 말을 하지 않는다 해도 저는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 지도가 있어야지만 낭천을 찾을 수 있고 그를 찾아야지만 비로소 그를 마의 수중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거예요."

그녀의 입가에 한 가닥 웃음이 스쳐갔다. 처량한 웃음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설벽운을 위해 곽숭양에게 고맙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당신은 영원히 자기 자신을 위해 고맙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건가요?"

초류빈은 여전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손소홍이 그를 주시하는 눈빛은 봄빛의 햇살처럼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의 할아버지께서는 한 사람이 만약 자기 자신을 위해 생각을 갖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자체가 불쌍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초류빈은 홀연 히죽 웃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만일 한 사람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산다면 그것은 더욱 가련한 인생이 아니겠소?"

이번에는 손소홍이 할 말을 잃어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그녀는 초류빈의 말을 자세히 음미하며 한참 후에야 입가에 한 가닥의 온유한 미소를 떠올렸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산다면 그것도 역시 무의미한 삶이 될 것이다.

초류빈은 다시 술잔을 비웠다.

"손어른은 사람을 정중하게 마중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갔다는데 상대방이 대관절 누구요?"

손소홍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엄격히 말한다면 그분은 누구를 마중나간 게 아니라 전송하러 가신 거예요."

초류빈은 다그치듯 물었다.

"전송이라니...누구를....."

손소홍은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내뱉었다.

"상관금홍이에요!"

이 대답은 다시 초류빈으로 하여금 멍청해지게 만들었다.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급히 물었다.

"상관금홍은 아직 입성(入城)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그를 전송하러 간단 말이오?"

손소홍은 흑백이 뚜렷한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얄미울 정도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는 비록 입성하지 않았지만 저의 할아버지가 성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떠나라고 권한다면 그는 되돌아 가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초류빈은 그녀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님을 알고 내심 놀라움이 컸다.

"그렇다면 손어른은...콜록, 콜록....."

그는 말을 끝까지 맺기도 전에 허리를 구부리고 심한 기침을 했다.

손꼽추는 줄곧 떨어져 있었으나 이때 차마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는지 앞으로 달려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오늘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소. 그리고 너무 빨리 마셨소. 할 말이 더 남아 있다면 내일 다시 하도록 하시오."

초류빈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빙긋이 웃었다.

"당신은 상관금홍이란 사람을 알고 있소?"

손꼽추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모르오. 하지만 모른다는 대답을 했다고 나에게도 술을 권하지는 마시오."

초류빈은 그의 대답을 듣자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나는 당신과 술내기를 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물론 마실 필요가 없소."

손꼽추는 흡사 처음으로 초류빈을 본 듯 눈이 휘둥그래진 채 그를 주시했다. 왜냐하면 그는 초류빈이 이렇게 대소를 터뜨리는 것을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초류빈 같은 사람도 대소를 터뜨리리라곤 아마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초류빈은 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대답은 내가 해 주겠소. 상관금홍은 천하제일 고수로 자부하는 자로서 눈에 보이는 게 없을 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의 뜻을 꺾을 수가 없소. 그런데 손어른이 그를 되돌려 보낼 재간이 있다니 손어른이 어떠한 인물인지 당신은 짐작할 수 있겠소?"

손꼽추는 고개를 좌우로 내둘렀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소?"

초류빈은 다시 피식 웃었다.

"나도 역시 걷잡을 수가 없소. 그래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물어야겠소. 설사 내가 취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손꼽추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은 너무나 많은 문제를 물었소. 이 상태로 나가면 곧 취해서 정신을 잃게 될 것이오."

초류빈은 계속 히죽히죽 웃을 뿐이었다.

"취한들 어떻소? 사람이 살아가는데 취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을 것 같소?"

그는 다시 술잔을 들어올렸다.

"손낭자, 묻겠는데 손어른은 도대체 누구요?"

손소홍은 깜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손어른은 바로 저의 아버님의 부친이며 저의 조부님이에요."

초류빈은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그렇군. 그래. 아주 정확한 대답이군....."

그는 말을 끝내는 즉시 술잔을 비워 버렸다. 이 한 잔을 들이키자 그의 눈빛이 게슴츠레하게 변해 혀마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직도 묻고 싶은 말이 있소!"

그의 표정을 살피던 손소홍의 눈빛이 횃불처럼 밝아졌다.

"취해서 정신을 잃기 전에 어서 물어 보세요."

초류빈은 상체를 기우뚱거리며 불투명한 음성으로 물었다.

"묻겠는데 낭자는 무엇 때문에 나를 취하게 만들었소? 그 속셈이 무엇이오....."

"애당초부터 당신과 술 내기를 했으니 당연히 당신을 취하게 만들어야죠. 누구나 술을 마실 때는 상대방이 자기보다 일찍 취하기를 바라니까요. 제 말이 틀리나요?"

초류빈은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번쩍 들어올려

"맞았소, 맞았소. 일리가 있는 말이오....."

하고 흥얼거리더니 술잔을 비우고는 드디어 상 위에 머리를 처박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대취한 모양이다.

손소홍과 손꼽추는 모두 아무 말없이 조용히 초류빈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초류빈이 진짜로 취했는지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손꼽추는 등불을 밝히며 중얼거렸다.

"저녁 밥을 먹을 시간이 되었으니 또 손님들이 들어오겠군."

그는 중얼거리면서 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뜻밖에도 겉문을 닫고 다시 안쪽에서 문을 잠그는 게 아닌가. 장사를 할 뜻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손소홍마저 내보내지 않을 모양인 것 같았다. 그런데도 손소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겉문은 제법 무거웠다. 평상시라면 손꼽추는 겉문을 닫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지만 오늘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마치 지푸라기라도 들어올리듯 겉문을 거뜬히 들어올리는 게 아닌가.

손소홍은 홀연 명랑하게 웃었다.

"남들이 다 이숙부(二叔父)님을 천하 제일가는 장사라 일컫지만 저는 오늘에서야....."

손꼽추는 고개를 돌려 이맛살을 찌푸렸다.

"누가 낭자의 이숙부란 말이오? 낭자는 혹 취한 게 아니오?"

손소홍은 까르르 웃었다.

"숙부님의 연기는 그 동안 정말 훌륭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숨길 필요가 없어요."

손꼽추는 그녀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돌연 한광(寒光)이 폭사돼 나왔다.

그 한 쌍의 눈은 도저히 손꼽추의 눈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초류빈도 만약 그의 눈을 보았다면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근 이 년 동안이나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 왔지만 초류빈은 손꼽추의 진면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지 초류빈이 지금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게 애석할 뿐이다.

손소홍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오늘 일부러 취한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취했어요."

손꼽추의 음성은 심각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그를 취하게 만들었지?"

"숙부님도 모르고 있었군요. 그것은 할아버님의 분부였어요."

"무엇이....."

"그의 행적이 이미 탄로났기 때문에 며칠 사이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연속 이곳에 나타날 거예요. 그래서 할아버님은 잠시 풍파를 피하기 위해서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갈 생각인가 봐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숙부님도 그의 성격을 잘 아시잖아요. 만약 그를 취하게 만들지 않으면 어떻게 다른 곳으로 데려갈 수가 있겠어요?"

손꼽추는 못마땅한 듯 흥, 코웃음을 쳤다.

"솔직히 말해 너의 할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대해선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이해가 가지 않는다뇨? 어느 것을 이해 못하겠다는 거죠?"

"초류빈이 사기소침(士氣消沈)하여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그를 나타나게 하더니 이제 와서 초류빈이 나서게 되니 그 어르신네가 도리어 그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다니. 대관절 무슨 속셈인지 걷잡을 수가 없구나."

손소홍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숙부님 그것은 숙부님의 그릇된 생각이에요. 사기소침과 당분간 피신하는 것을 어떻게 한 데 묶어 논할 수가 있나요? 그것은 엄연히 별도의 문제예요."

그녀는 상 위에 엎드러져 있는 초류빈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숙부님은 이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나요?"

손꼽추는 여전히 냉랭한 표정이었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제아무리 많다 해도 상관금홍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느냐?"

손소홍은 그의 말을 부인했다.

"숙부님은 또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초류빈의 목숨을 노리는 자라면 자연히 무시할 인물들이 아니에요."

손꼽추는 그래도 불복하는 기색이었다.

"그 자들이 누구인지 어디 한번 말해 봐라."

손소홍은 지체하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았다.

"남자는 제쳐 놓고 우선 여자만 하더라도 묘강(苗疆)의 대환희 여보살(大歡喜女菩薩)과 관외(關外)의 남갈자....."

그녀가 단지 두 사람의 이름을 내뱉었는 데도 손꼽추는 이미 눈살을 잔뜩 찌푸려야만 했다.

손소홍은 차분한 음성으로 계속했다.

"백요생은 원래 중남경녀(重男輕女)하여 병기보를 작성할 때 여자 고수들을 열거하지 않았지만 방금 두 여자의 이름을 숙부님은 들은 바가 있겠죠?"

손꼽추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소홍은 손꼽추를 바라보며 앵두 같은 입술을 계속 나불거렸다.

"남갈자는 청마수의 정인이고 대환희 여보살은 오독 동자의 의모(義母)예요. 그들은 벌써부터 초류빈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곳에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당장 달려올 것이 분명해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그들 중에 한 사람만 달려와도 초류반은 골머리를 앓게 되는 거예요."

손꼽추는 걸레를 집어 천천히 상을 닦고 있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늘 걸레질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손소홍이 다시 말했다.

"남자 고수라면....."

그녀는 눈을 감으며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상관금홍을 비롯해 여봉선(女鳳先), 형무명(荊無命)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는데 숙부님은 아마 누구인지 알아맞히지 못할 거예요."

손꼽추는 계속 천천히 상을 훔치며 고개를 돌리고 반문했다.

"그게 누구냐?"

"호불귀(胡不歸)예요."

그녀가 호불귀라는 세 글자를 입 밖에 내뱉자 손꼽추는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놀라운 빛이 역력히 서려 있었다.

"호불귀라면...바로 그 호풍자(胡風子)를 말하는 것이냐?"

호풍자라 함은 즉 미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손소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자는 항상 미친 사람처럼 횡설수설하여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죠. 그가 사용하는 것은 죽검인데 풍문에 의하면 때로는 몸의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하면서 절묘한 검초(劍招)가 전개된다지만, 어느 때는 검법이 형편없대요. 그래서 백요생이 병기보를 작성할 당시 그의 이름을 열거하지 않았다더군요."

손꼽추의 신색은 더욱 심각하게 변했다.

"절모한 초식은 그의 진짜 실력이고 형편없는 검법은 그가 고의로 꾸민 것이다."

이렇게 중얼거린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신조가 있어 여지껏 누구와 친분을 맺거나 원한을 맺은 일이 없는데 이번에 어째서 초류빈의 목숨을 노리게 되었지?"

손소홍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풍문에 의하면 호유성이 그를 모셔왔다고 해요. 호유성의 스승은 또 왕년에 그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고요."

손꼽추는 그래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사람을 모셔내기는 하늘의 별따기인데 호유성은 제법 수단이 비범하군."

"그를 모셔오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호유성은 집을 떠난 지 이 년 만에 돌아온 거예요."

"네가 방금 말한 여봉선은 바로 그 병기보에 다섯 번째로 열거돼 있는 온후은극(溫侯銀戟)이냐?"

"네, 맞아요. 그가 찾고 있는 대상은 초류빈 한 사람에게 국한돼 있지 않죠."

"그럼 다른 사람의 목숨도 노리고 있단 말이냐?"

"그 자는 근래에 와서 몇 가지 독특한 무공을 터득했기 때문에, 병기보에 그의 앞쪽에 이름이 열거돼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겨루어 볼 생각을 갖고 있죠."

"그...형...형....."

"형무명 말이에요."

"그렇다. 그 형무명은 또한 어떤 인물이냐?"

"그도 역시 검을 사용하는 사람이에요. 그의 수법은 낭천과 같이 악랄하고 정확하며 빠르죠. 그 외에 또 한 가지 무서운 점이 있어요."

손꼽추는 정신을 집중시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손소홍은 숨을 한 번 크게 쉬더니 청산유수처럼 말끝을 끌어나갔다.

"그는 웬만해선 출수를 하지 않죠. 하지만 일단 손에 검이 쥐어지면 우선 자신의 생명을 도외시해 버리죠. 죽음을 각오하고 초식을 전개하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형무명이라고 하는 것 같아요."

이번에 손꼽추는 더욱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의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그 어르신네와 저는 성 밖에서 만나기로 약속돼 있어요."

하고 말한 그녀는 생긋이 웃으며 다시 초류빈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할아버님은 제가 초류빈을 데려올 능력이 있을 것이라 믿고 계시죠."

심각한 신색을 하고 있던 손꼽추는 그녀의 퉁명스러운 말을 듣자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요 깜찍한 계집애, 이제는 정말 불여우가 되었구나."

손소홍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곱게 흘겼다.

"제 나이도 이제는 스물에 가까운데 숙부님은 그래도 저를 계집애라고 부를 거예요?"

손꼽추는 감회가 깊은 듯 길게 숨을 들이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군. 너도 이제는 다 컸구나. 전에 내가 너를 보았을 때는 대여섯 살 먹은 어린애였는데 어느 새 어른이 되어 버리다니...세월은 덧없이 흘러가 버렸군....."

그는 고개를 숙여 자기가 들고 있는 걸레를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다시 천천히 상을 훔치기 시작했다.

손소홍 역시 고개를 숙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숙부님이 집을 떠난 지가 아마 십사 년은 되었죠?"

손꼽추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며칠만 지나면 꼭 십사 년이 된다."

손소홍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숙부님은 왜 그동안 한 번도 집에 돌아오시지 않았죠?"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꼽추는 홀연 상을 내리치며 호통을 치듯 외쳤다.

"내가 이곳에서 십오 년을 지키겠다고 남과 약속한 이상 한 시라도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대장부의 약속이 어떠한 것인지 너는 모른단 말이냐?"

손소홍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잘 알고 있어요."

한참 시간이 경과되자 손꼽추의 눈길은 다시 손에 쥐어져 있는 걸레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가 다시 상을 훔치기 시작하자 예리하던 눈빛은 점점 색채를 잃어갔다. 전에 무슨 일을 했던 인물이든 십사 년이란 세월을 걸레질하는 데에만 전념을 했다면 역시 손꼽추같이 변할 것이다. 걸레질은 비단 상에 묻어 있는 기름때를 훔쳐 버릴 뿐 아니라 자신의 광채마저 닦아 버리는 것이다.

손꼽추는 한숨을 삼키며 서서히 물었다.

"그동안 집안 식구는 모두 무고하더냐?"

손소홍은 그제서야 얼굴을 쳐들고 활짝 웃었다.

"네, 모두 잘 있어요. 단지 숙부님이 하루 속히 돌아오시길 바라고 있을 뿐이에요."

손꼽추는 억지로 미소를 보였다.

"내년 설날엔 돌아가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너는 어서 초류빈을 데리고 떠나도록 해라."

그는 여기까지 말하더니 초류빈을 힐끗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렇게 무거운 사람을 어떻게 네가 데리고 갈 작정이냐?"

손소홍은 생긋이 웃었다.

"취한 산돼지라 생각하고 어깨에 짊어지고 가면 되죠."

그녀가 말을 하면서 막 몸을 일으키자 홀연 한 사람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임의로 떠날 수 있지만 저 취한 산돼지는 남겨 두고 가거라."

느닷없이 들려온 음성은 나직한 신음 같기도 하고 남자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매력이 곁들여 있기도 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여인의 음성임이 분명했다.

손꼽추와 손소홍은 모두 문 쪽을 향해 서 있었는데 그 음성은 뒤뜰로 통하는 작은 길 쪽에서 들려왔다. 여인이 언제 집안으로 들어왔는지 손소홍과 손꼽추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손꼽추는 대뜸 안색이 변하며 손에 쥐고 있는 걸레를 냅다 던졌다.

그는 십사 년 간 상을 닦아왔다. 매일 만약 스무 번을 닦았다면, 일 년이면 칠천삼백 번, 십사 년이면 십만 하고도 이천이백 번을 닦았을 것이다.

상을 닦을 때 그의 손은 항상 걸레를 꼭 쥐었다. 어느 누구라 해도 십사 년 간 상을 닦아왔다면 손 힘이 다른 사람보다는 클 것이다. 더군다나 손타자의 대응조력(大應爪力)은 원래부터 강호에 이름이 나 있던 터였다.

지금 그가 걸레를 냅다 던지자 그 위력은 천하의 어느 암기만 못지 않았다.

펑!

굉음이 울리는 가운데 흙먼지가 일며 벽 돌담이 걸레에 맞아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문 옆에 서 있는 여인은 어떻게 몸을 피했는지 제자리에 여전히 서 있었다.

그녀는 전혀 몸을 움직인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서 있는 위치로 보아 걸레는 그녀의 가슴에 구멍을 내야지만 이치가 성립된다. 그런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걸레는 그녀의 몸을 지나 담벽에 격중된 것이다.

아마 그녀의 허리가 유난히 가늘기 때문에 몸을 비틀기에 편리했던 모양이다. 허리가 가는 여인은 외관상 몸매가 늘씬하고 성적인 매력마저 느끼게 한다.

이 여인의 매력적인 부분은 비단 허리뿐만이 아니었다. 쭉 뻗은 다리, 풍만한 젖가슴, 갸름해야 할 데는 절대 굵지 않고 풍만해야 할 부분은 절대로 빈약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자석이 달려 있는 것 같았고 입은 비교적 컸다. 그리고 입술도 두터운 편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비록 희지만 매끈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머리칼은 숱이 많고 윤기가 흘렀다.

엄격히 말해 아리따운 여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들로 하여금 죄를 저지르게 할 마력을 지녔다고 하면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대다수의 남자가 그녀를 본다면 자연히 가슴 밑바닥에서 일종의 묘한 충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녀 자신도 그 묘한 충동으로 인해 갈구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남자에게 실망을 준 적이 극히 드물었다. 그녀는 몸에 꼭 달라붙는 남색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곡선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손꼽추는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도 역시 손꼽추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손꼽추를 이 세상에서 가장 영준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남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손소홍에게 옮겨졌을 때 눈빛은 즉시 얼음장같이 차갑게 변했다. 그녀는 어떠한 남자라 해도 다소간 흥미를 갖고 있었다. 반면 어떠한 여인에 대해서도 그녀는 적의를 품고 있었다.

손꼽추는 헛기침을 두 번 하더니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네가 바로 남갈자냐?"

남갈자는 대답을 하기에 앞서 만면에 웃음을 떠올렸다.

그녀가 웃자 긴 눈은 더욱 가늘어지며 한 줄기 선(線)을 형성했다. 그것은 남자의 마음을 낚아챌 수 있는 선이었다. 그녀는 눈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보는 눈이 정확하군요. 저는 그런 남자를 좋아해요."

손꼽추는 험악한 표정을 하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남갈자가 말을 계속했다.

"나도 역시 보는 눈이 정확하죠. 당신네들의 신분을 알고 있으니까요."

손꼽추는 그제서야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우리들의 신분을 알면서도 감히 이곳에 나타났단 말이냐?"

남갈자는 눈고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당신네들과 적대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초류빈만은 데려가야 해요."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아마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남자는 그다지 많지 않아요. 천신만고 끝에 한 사람을 찾아냈는데 초류빈 때문에 목숨을 잃었어요."

손소홍은 참다 못해 한 마디를 내던졌다.

"이곡은 그의 손에 살해당한 게 아니에요!"

남갈자의 말투는 강경했다.

"비록 그가 친히 손을 쓰진 않았지만 그로 인해 이곡이 살해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손소홍의 태도도 역시 강경했다.

"어찌 되었든 절대 그를 데려가게 할 순 없어요."

남갈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여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당신네들이 쉽사리 그를 내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당신네들과 싸움을 벌일 생각도 없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현명하죠?"

그녀는 여기까지 말하더니 홀연 등 뒤를 향해 손짓을 하며 나직이 외쳤다.

"이리 가까이 오세요."

손꼽추는 그제서야 뒤뜰에 있는 한 줄기의 인영을 발견했다. 그자의 허우대는 우람했다. 남갈자가 손짓을 하자 사나이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왔다. 나타난 사나이는 일신에 호화스러운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허리엔 한 자루의 구환도(九環刀)를 차고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것은 턱밑에 기른 윤기가 흐르는 긴 수염이었다.

남갈자는 그 사나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당신네들은 이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손꼽추는 고개를 돌려 흔들었으나 손소홍이 앞을 다투어 대꾸했다.

"나는 알고 있어요. 그의 이름은 초상우(初相羽)라 하며 별호로는 활패왕(活覇王), 경성 홍운표국의 총표두죠."

남갈자는 활패왕을 요염하게 흘겨보며 말했다.

"저렇게 젊고 예쁜 낭자도 당신을 알고 있으니 정말 명성이 혁혁한 모양이군요."

활패왕은 가슴을 펴며 득의양양해 했다.

손소홍의 경멸하는 말투가 뒤이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강호에서 다소 명성이 있는 자라면 거의 알고 있죠. 한데 저 초총표두가 어떻게 해서 당신과 함께 어울리게 되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남갈자는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라 어제 길가에서 나를 낚았기 때문에 알게 되었죠."

그녀는 활패왕의 긴 수염을 어루만지며 요염하게 웃었다.

"나도 역시 이분의 수염이 마음에 들어 순순히 그를 따라간 거예요."

손소홍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가 당신을 낚았는지, 아니면 당신이 그를 낚았는지 모르겠군요."

남갈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활패왕과 손소홍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물론 그가 나를 낚은 거죠. 당신네들은 단지 활패왕의 명성과 무공이 높다는 사실만 알 뿐 미인을 낚는 그의 고명한 솜씨에 대해선 모르는 모양이군요."

손꼽추는 벌써부터 노기충천해 있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우악스럽게 외쳤다.

"그 자를 데려온 목적이 무엇이냐?"

남갈자는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도리어 반문했다.

"총표두란 직책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히 무공도 고강하겠죠?"

손꼽추는 냉소를 날릴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남갈자는 자기의 권력과 관계 있는 일을 얘기하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 초총표두의 도법(刀法)은 남이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일가견을 지니고 있죠. 일단 만승연환도법(萬勝連環刀法)을 전개하면 웬만한 사람 십여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감히 그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어요."

손꼽추는 다시 냉소를 터뜨렸다.

남갈자는 다정한 눈빛으로 활패왕을 바라보며 엉뚱한 방향으로 말을 돌렸다.

"이렇게 무공이 고강한 활패왕을 내가 만약 단 일격에 죽여 버릴 수 있다면 당신네들은 믿겠어요?"

줄곧 득의에 찬 미소를 띠고 그 자리에 서 있던 활패왕은 이때 마치 독사에게 갑자기 물린 듯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뭐라고 했소?"

남갈자의 음성은 부드럽기만 했다.

"대수로운 것은 아니에요. 단지 당신의 목숨을 요구했을 뿐이에요."

활패왕은 더 이상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으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홀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농담도 잘하는군."

그로서는 남갈자가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남갈자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아 올린다는 말이 있으니 설마 내가 당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겠죠?"

활패왕은 멋쩍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당신의 농담은 다소 지나친 것 같소."

남갈자는 안색 하나 변하지도 않고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갈자(蝎子)라는 독벌레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요?"

활패왕은 그녀가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지 영문을 몰라 약간 멍해졌으나 역시 대답을 했다.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북부지방에 그런 독벌레가 가장 많지 않소!"

"그렇다면 암갈자에게 한 가지 괴상한 버릇이 있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겠네요?"

"무슨 버릇인지....."

"모른다면 내가 가르쳐 드리겠어요. 암갈자는 수갈자와 교배한 후 꼭 수갈자를 잡아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약한 버릇을 지니고 있어요."

활패왕의 안색이 약간 변했으나 입가엔 여전히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갈자가 아니잖소?"

남갈자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요염하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오산이에요. 내가 바로 남들이 말하는 남갈자예요. 이젠 알았겠죠?"

그 말을 들은 활패왕은 즉시 몸을 번뜩여 뒤로 일곱 자 가량이나 물러났다. 그리고는 마치 무덤에서 방금 나온 귀신을 만난 듯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허리에서 구환도를 뽑아 가슴 앞으로 비스듬히 들어올렸다.

남갈자를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엔 공포의 기색이 역력히 보였다. 그는 강호 물을 다년간 마셔온 위인으로서 물론 남갈자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송사리보다 더욱 낚기 쉬웠던 여인이 바로 남갈자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남갈자의 음성은 유난히 부드러웠다.

"한마디 충고를 해 주겠는데 저승에 가서라도 길에서 여인을 낚으려면 우선 상대방의 정체부터 정확히 간파할 줄 알아야 해요 ....."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활패왕에게 다가갔다.

"내 말을 명심하면 저승에서는 좀더 오래 살 수 있을 거예요."

활패왕은 그녀가 한걸음씩 다가오는 것을 보자 찢어지는 듯한 소h리로 외쳤다.

"멈춰라! 한걸음만 더 내딛는다면 우선 네년을 없애 버리겠다!"

남갈자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코맹맹이 음성으로 말했다.

"좋아요. 소원이라면 어서 나를 죽이세요. 당신 손에 죽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군요."

활패왕은 대갈일성과 함께 구환도를 후려쳐냈다. 주위는 이내 광풍노도와 같은 도풍(刀風)에 휩싸였다. 대단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 일격밖에 전개하지 못했다.

한 줄기 시퍼런 광채가 하늘을 수놓는 순간 활패왕은 이미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땅에 쓰러졌다. 비명소리는 지극히 짧았다. 그의 몸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단지 목줄기 부분에 두 개의 붉은 점이 나타나 있을 뿐이었다.

28 소이비도 제2권 비도는 부러지고







비도는 부러지고



담 밖의 가을빛은 담 안보다 완연하여 더욱더 농후했다.

곽숭양은 두 손을 소매 안에 쑤셔 넣은 채 서서히 걸음을 옮겨 앞장서고 초류빈은 갑자기 말을 잃은 사람처럼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길은 매우 길고 좁은 것이 마치 뱀 같았으며 기복도 심했다.

가을 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오고 길가의 초목들은 누렇게 단풍이 들어 있었다.

곽숭양의 걸음은 매우 느렸지만 일보의 간격은 매우 컸다.

초류빈은 그의 발걸음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마치 귀신에게 홀린 사람처럼 넋을 잃은 채 뒤따라갈 뿐이었다. 길 위의 흙은 매우 부드러웠다.

곽숭양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거기에는 발자국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발자국의 깊이는 기계로 찍은 듯이 한 치도 틀리지 않고 발자국 사이의 간격도 역시 똑같아 마치 자로 재는 대로 걸어가는 듯했다.

겉으로 보기엔 아주 가벼운 심정으로 걷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암암리 진력을 주입시키고 있어 그의 몸과 마음은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발에 가해진 힘이나 걸음 사이의 간격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 것이다.

곽숭양의 발길이 멈추는 곳, 그곳이 바로 그들의 생사를 건 결전장이 되는 곳이다. 결전지에 도착하게 되면 그들 두 사람 중 한 명은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초류빈이 이것을 모를 리가 없다. 곽숭양은 명실공히 당금 무림에서 가장 으뜸가는 제일 무서운 고수 중의 하나이다.

공력을 연마한 사람은 만약 자신이 연마한 공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을 땐 십중팔구 모두 고독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그 때가 되면 진정한 적수를 찾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자들은 자신의 패배를 불사하면서까지 진정한 적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기도 한다. 설사 패한다 해도 그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이 후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류빈의 지금 심정은 조금도 유쾌하지 못했다. 그의 지금 심정은 더욱더 어지러워져 있었다. 이러한 심정으로 곽숭양과 상대한다는 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것이라는 것을 초류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패배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이 길은 막다른 골목이었으며 생명의 종착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길은 바로 초류빈의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는 결코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가 어찌 편안히 죽을 수가 있을까.

시야는 점점 더 넓어졌으며 멀리 새빨갛게 단풍이 든 숲이 보였다. 붉은 단풍은 마치 선혈과도 같았다.

곽숭양의 걸음걸이는 갈수록 커졌고 땅바닥에 찍힌 발자국은 갈수록 희미해졌다.

이것은 그의 체내외의 모든 것이 점점 최고조를 향해 치닫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의 모든 것이 최고조에 달한다면 그의 정신력이나 내력, 그리고 육체는 그의 검과 하나로 융화될 것이며 그때 그의 검은 무감각의 쇠붙이가 아니라 영성(靈性)을 띤 무서운 신기(神器)가 되는 것이다.

초류빈은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곽숭양은 그가 정지한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정신은 이미 무아지경에 이르러 있어 천지간의 모든 변화는 그의 이목을 속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바로 이곳에서 할 생각이오?"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오늘...나는 당신과 겨룰 수 없소!"

곽숭양은 서서히 몸을 돌려 칼날같이 예리한 눈빛으로 초류빈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소?"

초류빈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 그의 가슴은 칼날에 찔린 듯이 아팠다. 그는 이번 싸움을 거절한다면 그것은 상대가 두려워 기피하는 것이 되며 공력을 연마한 사람으로선 죽는 한이 있어도 하기 싫어하는 한마디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입장으로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곽숭양은 서릿발 같은 기색으로 반문했다.

"당신은 나와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오?"

초류빈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곽숭양은 의아해 하며 다그쳐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초류빈은 장탄식을 하며

"나는 패배를 시인하겠소!"

하는 말에 곽숭양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세상에 태어난 후로 이런 사람은 처음 보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곽숭양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초류빈! 당신은 과연 당세의 영웅으로서 손색이 없소!"

초류빈은 실소를 지었다.

"영웅? 나 같은 사람을 어찌 영웅이라 할 수가 있겠소?"

곽숭양은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탄식을 터뜨렸다.

"당금 무림에선 당신만이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오!"

초류빈은 고개를 떨구었다.

곽숭양이 다시 말했다.

"당신이 패배를 시인할 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나는 알고 있소. 나는 어쩌면 죽는 한이 있어도 패배를 자인할 용기를 갖지 못할 것이오!"

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죽는다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오. 다른 사람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며 남아 대장부인 것이오."

초류빈은 뜻밖의 말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초류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내심 몹시 격동해 입을 열어 무엇인가 말하려고 했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곽숭양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소. 당신이 나와 싸우지 않겠다고 한 것은 당신이 지금으로선 아직 죽을 수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오. 당신은 누군가가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기 때문이오."

초류빈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 보기 드물게 눈물이 고여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가장 절친한 친구가 때로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될 수도 있다.

반면 가장 무서운 적도 때로는 자신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만이 자신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초류빈의 지금 심정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해져 있었다. 괴로움인지 기쁨인지 아니면 감격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벅찬 감정의 혼란 때문에 그는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곽숭양은 다시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당신과 꼭 고하를 가려야겠소."

초류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와 꼭 싸워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소?"

곽숭양은 소리없이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당금 무림 천하에 초류빈이 몇 명이나 되오? 오늘 만약 당신과 승부를 가리지 않는다면 다시는 당신과 같은 상대를 만날 수 없을 것이오. 영원히....."

"이곳의 일이 끝난 후에는 언제든지 나를 불러 주시오. 그땐 천하 없어도 기꺼이 응해 드리겠소!"

하지만 곽숭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가 되면 아마 나는 당신과 겨를 수가 없을 것이오."

초류빈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곽숭양은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똑똑하게 말했다.

"그 때가 되면 당신과 나는 친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초류빈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암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당신은 나와 적대시할 망정 친구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단 말이오?"

"곽숭양은 한평생을 모두 무도에 바쳤는데 또 무슨 친구를 사귈 여력이 있겠소? 하물며....."

여기까지 말하는 동안 그의 표정은 점점 온화해졌다.

"친구란 얻기 쉬우나 간담상조의 진정한 적수는 찾기가 힘든 것이오....."

간담상조란 네 글자는 원래 친구를 형용하는데 쓰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간담상조를 적으로 형용한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비단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초류빈은 그의 말뜻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곽숭양은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금 천하에서 나와 생사를 겨룰 수 있는 사람은 물론 당신 한 사람뿐만은 아니오. 그러나 나보다 몇십 배 강한 사람이라 해도 나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소. 만약 내가 그들의 손에 죽는다면 난 결코 편안하게 눈을 감지 못할 것이오!"

초류빈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소. 당신이 존경할 수 있는 친구를 찾는다는 것은 그리 곤란하지 않소. 하지만 당신이 존경할 수 있는 적을 찾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오."

곽숭양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더욱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바로 그것이오. 그래서 오늘 우리 두 사람의 일전도 불가피한 것이오. 나 곽숭양이 오늘 설사 당신 손에 죽는다 해도 한이 없을 것이오!"

초류빈은 곤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곽숭양은 그의 말을 가로채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의 뜻은 잘 알고 있소. 오늘 만약 당신이 불행하게도 나의 손에 죽게 된다면 당신이 이루지 못한 소원은 내가 대신해서 완수해 주겠소. 당신이 보호해야 할 사람에 대해서는 내 있는 힘을 다해 보호할 것이오."

초류빈은 상대가 이렇게 나오자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해 공수의 예를 취했다.

"귀하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이 초류빈이 설사 죽는다고 해도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오...감사하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감사하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자기와 생사를 건 결투를 하게 될 상대에게는 더욱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감사의 말은 그의 폐부에서 우러나온 절실한 것이었다.

곽숭양도 공손히 답례를 하면서 숙연하게 말했다.

"나의 뜻에 따라 주시겠다니 정말 고맙소. 자! 시작합시다."

초류빈은 한결 홀가분한 기분으로 쾌히 받아들였다.

"자!"

친구간에 상호 존중한다는 것은 매우 고귀한 것이다. 하지만 적대시하는 사람끼리도 서로 존중한다는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일이며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장면을 다른 사람으로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쩌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장면이 더 진귀한지도 모르는 것이다.

가을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붉게 물든 단풍잎을 비오듯이 떨어지게 하였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 흘렀지만 가을이 더욱 깊어진 것 같았다.

싸늘한 검기가 발해지자 주위의 공기는 엄동설한보다 더욱더 냉막하고 살벌하게 돌변했다. 곽숭양은 철검을 뽑아 가슴 높이로 들어올린 채 두 눈이 시종일관 초류빈의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곽숭양은 그의 손이 무서운 손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류빈은 이때 이미 딴 사람으로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더할 수 없이 어지럽게 헝클어졌고 옷도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이미 취해 보이지도, 또 병자 같지도 않았다.

그의 초췌한 얼굴에서 찬란한 광채가 발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이미 한 자루의 칼이 들려져 있었다.

비도탈명!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는 비도탈명인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한번 칼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어 닥쳐와 이 지구상의 모든 물건을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씽! 씽!

엄청난 바람이 광풍폭우와 같이 불어닥쳐 고막을 찌를 듯이 아우성쳤다. 이에 따라 붉게 물든 단풍잎이 사납게 휘날리며 허공으로 올라갔다.

이때, 곽숭양의 철검이 한 줄기 광막처럼 휘둘러졌다. 검의 한광이 초류빈의 목줄기를 노리고 폭사되어 오자 검이 그의 목에 이르기도 전에 예리한 검기가 바람을 가르며 엄습해 왔다.

초류빈은 신속하게 일곱 자나 뒤로 물러서며 등을 한 그루의 나무 뒤에 바싹 붙였다. 그러나 곽숭양이 검은 그림자처럼 달라붙으며 계속 목줄기를 찔러왔다.

초류빈은 뒤에 퇴로가 없다는 것을 알자 나무에 기댄 채 번개같이 돌기 시작했다.

곽숭양은 벽력 같은 고함을 지르며 신형을 공중으로 날리는 한편 예리한 철검을 신랄무비하게 휘둘렀다.

그의 육체와 검은 이미 하나로 융화되어 있었다. 뼈를 깎는 듯한 싸늘한 검기가 발출되자 가지 위에 달려 있던 단풍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시뻘건 피가 뿌려지는 것 같았다. 이러한 광경은 처절한 한편 일대 장관이기도 했다.

초류빈은 두 팔을 독수리 날개처럼 벌려 곽숭양의 일검을 피해 낸 후 낙엽과 함께 다시 지상으로 내려섰다.

곽숭양은 자신의 공격이 번번이 빗나가자 울화가 치밀어 오른 듯 공중에서 한 바퀴 선회하며 벌떼와 같은 한성을 격출시켜 초류빈의 전신을 향해 엄습해 왔다.

이 일검의 위력은 말로써 이루 형용할 수 없었고 다만 사람의 혼백을 앗아 버리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초류빈의 주위 삼 장 안은 삼엄한 검기로 물샐틈없이 포위되어 어떠한 방향으로도 도저히 피할 여지가 없었다.

창!

우렁찬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꽃이 마치 번갯불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초류빈의 수중에 있던 비도가 정확하게 곽숭양의 검끝에 부딪힌 것이다.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시야를 가리며 어지럽게 휘날리던 단풍잎이 떨어져 내린 후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은 처음 싸움을 하기 전의 위치에 서 있었다.

곽숭양은 검을 가슴 높이로 들어올린 채 있었고 제자리에서 전혀 이동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초류빈의 수중에는 비도가 들려 있었으나 예리한 칼끝이 철검에 의해 부러져 있었다.

초류빈은 똑바로 선 채 곽숭양을 주시했으며 곽숭양 역시 초류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초류빈의 비도가 다시는 전개될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비도탈명은 번개보다 더 빠른 것이다. 그러나 칼날이 부러진 상태에서는 그 속도에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설사 손에서 격출된다 해도 곽숭양을 이기기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초류빈은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겐 오직 패배가 있을 뿐 승산이 없다고 내심 단정했다.

초류빈은 서서히 손을 내렸다. 숲 속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으며 이 세상의 만물이 모두 숨을 죽인 것처럼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곽숭양은 별안간 장탄식을 터뜨리며 서서히 철검을 거두었다. 그런 그의 얼굴엔 비록 아무 표정도 없었으나 두 눈에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초류빈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패했소!"

초류빈은 의아해하면서 다그쳐 물었다.

"어째서 당신이 패했다는 것이오?"

곽숭양은 한숨을 내쉬며 처량하게 말했다.

"나는 패배를 시인하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원래 죽는 한이 있어도 이 말만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일단 얘기하게 되자 마음속이 후련하고 통쾌하오....."

그러더니 갑자기 광소를 터뜨리며 서서히 몸을 돌려 숲 밖으로 걸어나갔다.

초류빈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다가 돌연 허리를 구부리고 기침을 심하게 했다.

바로 이 때였다. 느닷없이 한 사람이 나타나 손뼉을 치면서 소리쳤다. 그 음성이 어찌나 맑은지 마치 한 마리의 꾀꼬리가 우는 것 같았다.

초류빈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보니 댕기를 길게 들인 처녀 한 명이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이 처녀는 바로 주막에서 보았던 그 노인의 손녀였다.

댕기 처녀는 흑백이 뚜렷한 두 눈을 깜박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두 분이 겨루는 것을 본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예요."

초류빈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그저 담담하게 웃자 댕기 처녀는 다시 말했다.

"과거제왕곡주 소왕손과 남대선생이 태산 절정에서 싸운 적이 있었지요. 남대선생은 백 근이나 되는 큰 철괴를 가지고 있었고 소왕손은 긴 옷고름을 사용했었습니다. 그는 그 옷고름 하나로 백 근이나 나가는 철괴를 지닌 남대선생과 장장 하루 열두 시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싸움을 벌였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들의 싸움으로 인해 천지가 변했으며 해와 달도 그 빛을 잃었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방그레 웃으며 다시 말했다.

"당신은 그 일전이 멋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초류빈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낭자의 말이 어찌나 생동적인지 나 자신이 마치 태산에서 본 것 같군. 제왕곡주와 남대선생의 결투를 보았다는 것은 정말 멋있는 일일 것이오."

댕기 처녀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다시 방그레 웃었다.

"당신의 입이 당신의 비도보다 더 무섭고 날카로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초류빈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댕기 처녀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호호호...당신의 비도는 단 한 번에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만, 또한 당신의 말 한 마디로 여자들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치려 들 것이 분명하니까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뭇남성들의 혼을 빼앗을 듯한 눈초리로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초류빈은 내심 그녀의 눈초리를 받기가 매우 두려웠고 또 세상에서 이렇게 무서운 처녀가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댕기 처녀는 초류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계속해서 말했다.

"과거에는 수모 음희가 천하제일의 고수라는 호칭을 들었지요. 그러나 협도 초유향의 담량은 그보다 더욱 컸어요. 초유향은 신궁으로 쳐들어가 음희와 일대 혈투를 벌였었지요. 지상에서 물 속으로 물 속에서 공중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결과 공력이 고강한 수모 음희는 끝내 초유향에 의해 패배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반문하였다.

"당신은 이 일전이 멋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초류빈은 더 이상 섣불리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멋있었을 것이오!"

댕기 처녀는 약간 눈을 흘긴 다음 말을 이었다.

"이 모든 싸움이 비록 세상을 놀라게 하고 또 천추에 이름을 떨쳤지만 방금 두 분이 벌인 일전에 비하면 많은 차이가 있을 거예요."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었다.

"나는 겸손해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나의 일은 내가 알고 있을 정도의 자명성(自明性)은 있소. 그러니 낭자께선 너무 과찬을 하지 마시오."

"저는 진정에서 하는 말이에요. 당신은 세 번씩이나 곽숭양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손을 쓰지 않았어요. 그러니 당신은 살기가 사라져 비도가 부러진 거예요. 그때 곽숭양도 어쩌면 당신을 죽일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패배를 시인한 것이에요."

그녀는 가볍게 탄식을 터뜨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진정한 남아대장부며 진정한 영웅들이에요. 만약 당신이 그를 죽였거나 그가 당신을 죽였다면 당신들의 공력이 제아무리 절륜하다고 해도 저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을 거예요!"

초류빈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장탄식을 했다.

"곽숭양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의 자질을 지닌 사람이오!"

댕기 처녀는 눈을 영롱하게 빛내며 다그쳐 물었다.

"당신은?"

초류빈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 말이오?...내가 그 무엇이 될 수 있겠소?"

댕기 처녀는 호수처럼 맑은 눈을 한번 굴리더니 말을 꺼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묻겠어요. 곽숭양이 제일 처음에 전개한 초식이 무슨 초식이지요?"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며 시원하게 얘기했다.

"풍권유운(風捲流雲)."

댕기 처녀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재차 물었다.

"제 이초는 무엇이지요?"

초류빈은 아무 생각없이 대답하였다.

"유성추월(流星追月)."

"그가 제 일초인 풍권유운에서 제 이초인 유성추월로 변초할 때 그 변화가 너무나 신속해 빈틈이 생겼었어요. 당신이 만약 그 순간에 그를 죽이려고 했다면 충분하고도 남았을 거예요."

초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댕기 처녀는 정색을 하며 다시 말했다.

"이것은 당신이 그를 죽일 수 있었던 첫 번째 기회였어요. 제가 두 번째 기회도 얘기해 드릴까요?"

초류빈은 고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하시오."

그녀는 갑자기 냉랭하게 웃으며 조롱조로 말했다.

"남들은 초류빈이 진정한 남아대장부라고 하던데 이렇게 여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군요."

초류빈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숱한 욕을 먹어왔다. 하지만 여성적인 기질을 지녔다고 한 말은 생전 처음이었다.

댕기 처녀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할 말이 없다면 어째서 헛기침도 하지 않지요?"

초류빈은 탄식을 하면서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낭자께선 눈빛이 형형하신 것으로 보아 고인임에 틀림없으신 것 같은데 미처 몰라보고 실례를 범한 것 같소."

"그만하세요! 저는 당신보다도 키가 작은데 어찌 고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초류빈은 별안간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댕기 처녀는 안쓰러운 듯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당신이 생전 자화자찬을 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 칭찬하기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그것이 당신의 좋은 점이면서도 또한 나쁜 버릇이지요. 하지만 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자신을 너무 도외시해도 안 되는 것이에요."

초류빈은 허탈하게 웃었다.

"낭자....."

그가 채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가로챘다.

"저의 이름은 낭자가 아니에요. 그런데 어째서 시종 낭자라고만 하는 것이지요?"

초류빈은 그녀의 말을 듣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는 갑자기 이 처녀가 매우 재미있다고 느껴진 것이다.

댕기 처녀는 앙칼진 표정으로 말했다.

"저의 성은 손(孫)이며 이름은 소홍(小紅)이에요. 붉을 홍이지만 상관금홍의 홍은 아니에요!"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생은 초....."

손소홍은 대뜸 그의 말을 가로채며 손을 흔들었다.

"당신의 이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당신과 한번 겨루어 보고 싶었고요."

초류빈은 그녀의 뜻밖의 말에 얼떨떨해 하면서 다그쳐 물었다.

"무엇을 겨루겠다는 것이오?"

손소홍은 허리가 끊어질 듯이 호들갑스럽게 웃고 나서 말을 받았다.

"저는 물론 당신과 공력으로는 겨룰 수 없어요. 제가 앞으로 백 년을 더 연마한다고 해도 역시 당신을 능가할 수는 없어요. 제가 당신과 겨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술이에요. 이 세상에서 저보다 주량이 더 강한 사람이 있다는 소리만 들어도 저는 배가 아파 견디지 못해요."

초류빈은 어이가 없어 선뜻 대답을 못하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술 먹는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그러한 버릇이 있지만 손낭자에게도 그러한 버릇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손소홍은 앵두같이 붉은 입술을 삐죽이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시합하면 당신이 불리해요."

초류빈은 어리둥절하여 다그치듯 반문했다.

"그것은 또 무엇 때문이오?"

그녀는 정색을 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은 방금 싸우고 났기 때문에 체력에 큰 소모가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자연히 주량에도 차질이 생기게 돼요. 술 마시는 것도 공력을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시간과 장소 그리고 기분까지 그 어느 하나라도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요."

초류빈은 그녀에게 바싹 흥미가 당겨 빙그레 웃었다.

"손낭자는 과연 술에 대한 고수로서 손색이 없구려. 낭자와 같은 고수와 술을 겨룬다는 것은 기쁜 일이오."

손소홍의 두 눈에선 기쁨의 빛이 번쩍였다. 그러나 일부러 차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장소는 당신이 정하세요!"

초류빈은 웃음을 금치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시오!"

손소홍은 희색이 만면하여 천진스럽게 웃었다.

"그럼 앞장서세요."

황혼 전이면 모든 장사는 대부분 한가한 시간이다.

손꼽추는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햇빛을 쬐고 있었다. 바로 이때 초류빈이 손소홍과 함께 들어왔다.

손꼽추는 두 사람이 함께 어울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듯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 두 사람이 친구가 되다니, 이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초류빈은 일부러 손꼽추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나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자신조차도 이 처녀와 친구가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손소홍이 일단 말문을 열면 마치 장강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땐 그녀의 말을 도저히 제지할 재간이 없었다.

초류빈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골치 아픈 일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는 식사를 하는데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이 모두 술을 마시지 못할 때, 그리고 말이 많은 여자를 만났을 때였다.

그 중에서 말 많은 여자를 대할 때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대할 때보다 더욱더 골치가 아팠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하게도 골치가 아프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분이 상쾌하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주량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술내기를 좋아하며 누구든지 자신과 주량을 겨룰 사람이 있다면 만사를 제쳐 놓고 시합을 한다. 거기에다 상대가 아리따운 미녀일 때는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여인이 만약 총명하면서 아름답고 또 술까지 마실 줄 안다면 설사 말이 많다고 해도 남자들은 같이 어울리기를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자를 제외하고는 말이 많은 여자는 그리 흔하지가 않다.

이곳 손꼽추의 주막까지 오는 동안 초류빈은 손소홍의 할아버지가 이름은 손백발이며 그녀의 친할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부모는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왔다고 한다.

여기까지 얘기를 들은 초류빈은 궁금증을 참지 못해 그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와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서 어찌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오?"

손소홍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성 밖으로 사람을 마중하러 가셨어요."

초류빈은 마중할 사람이 누구이며 어째서 같이 가지 않았는지를 물으려고 했으나 자신이 그녀에게 말 많은 남자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실 손소홍과 같이 있으면 그에겐 좀처럼 말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간단하게 대답하고 난 그녀는 초류빈이 입을 여는 것을 막기라도 할 듯이 급히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비도탈명을 쓰는 방법을 어떻게 연마하셨지요?"

"듣자 하니 당신에겐 낭천이라고 하는 절친한 친구가 있으며 그의 솜씨도 당신과 비슷하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그런데 그가 갑자기 실종되었다면서요? 당신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당신도 이 년 동안 실종되었고 강호 사람들은 당신이 모두 죽었거나 은퇴했다고 생각해 왔는데 어째서 이곳 주막에 숨어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 당신의 행적이 탄로난 이상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찾으러올 것인데 그래도 당신은 계속 이곳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요?"

"만약 이곳에 있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실 생각이지요?"

"매화도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요?"

"그는 이미 이 년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는데 누군한테 살해된 것이 아닐까요?"

"만약 제거됐다면 누구에게 살해됐는지 당신은 알고 있나요?"

손소홍이 마치 저수지의 수문이 터진 것처럼 단숨에 여기까지 물었으니 초류빈이 어찌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떠한 물음에 대해선 대답하기를 원치 않았지만 또 어떤 물음에 대해선 자신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초류빈은 설소하가 바로 매화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낭천이 절대로 설소하에게 살수를 쓰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날 그는 낭천이 떠나게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낭천이란 청년이 비록 겉으로는 냉혹하지만 내심은 불같이 뜨겁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낭천이 설소하를 데리고 갔음이 분명하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으나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나 그 이유는 전혀 몰랐다.

설소하는 지금쯤 개과천선해서 새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설소하가 진정 낭천에게 사랑을 느낄 수가 있을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선 초류빈도 알 수가 없어 그저 탄식만 할 뿐이었다. 이후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초류빈은 손꼽추의 주막에 와 자리에 앉고서야 이런 번뇌스러운 일에 대해서 잠시 뒤로 제쳐 놓았다. 그것은 그의 앞에 이미 술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손소홍의 시선은 초류빈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몰랐으며 그 시선엔 웃음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녀는 마치 초류빈에게 굉장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으며 또 어떻게 보면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초류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무겁게 뛰기 시작했다.

손소홍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자, 이제 술을 마셔 보기로 할까요?"

초류빈은 소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녀는 영롱한 두 눈을 깜박이며 나직이 물었다.

"어떻게 마셨으면 좋겠어요?"

초류빈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해 보이며 반문했다.

"주량을 겨루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단 말이오?"

손소홍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그것도 모르고 계셨나요?"

"나는 한 가지 방법밖에 모르고 있소. 그것은 술을 마시다가 먼저 취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술 마시는 학문이 부족하군요."

"그게 무슨 말이오? 술을 겨루는 데도 학문이 있단 말이오?"

그녀는 정색을 하며 확실한 어조로 대답했다.

"주량을 겨루는 데도 문(文)과 무(武), 두 가지가 있어요."

"문은 어떻게 겨루는 것이며 무는 어떻게 겨루는 것이오?"

손소홍은 어머니가 아이들을 가르치듯 자상하게 말했다.

"당신이 방금 말한 것은 무적으로 겨루는 것이며 그것은 소가 술을 마시는 격이에요."

초류빈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직이 얼버무렸다.

"소가 술을 마시는 격이라?"

손소홍은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목을 쭉 뻗고 입 속으로 술을 처넣는 짓이 소가 물을 마시는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그럼 술을 입에다 넣지 않으면 귓속에 붓는단 말이오?"

"만약 당신이 정말로 귀에다 술을 넣어서 마실 수 있다면 저는 패배를 시인하겠어요."

"귀로 술을 마시는 것은 너무 느려서 재미가 없소."

"나 같은 어린 계집아이가 어찌 당신과 무적으로 겨룰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무적으로 겨루는 것도 여러 가지니까 당신이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세요."

"어떠한 방법들이 있소?"

"가위, 바위, 보 형식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결같이 저속한 것들이에요. 우리는 물론 저속한 방법으로 술을 마실 수는 없어 요."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겨루는 것이 좋겠소?"

"저속한 방법 외에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초류빈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아무 말없이 웃기만 하자 그녀는 계속해서 방법을 제시했다.

"비록 한 가지 방법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 방법은 신기할 뿐만 아니라 매우 재미가 있어요. 만약 만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해도 당신은 꼭 이 방법을 택할 것이에요."

초류빈은 들을수록 흥미가 생겨 재촉하듯 말했다.

"술은 이미 상 위에 차려졌으니 어떤 방법이든지 빨리 마셨으면 좋겠소."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제 말을 들으세요. 이 방법은 매우 간단한 것이에요."

그녀는 일부러 말을 중단하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제가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보아서 당신이 대답할 수 있다면 제가 진 것으로 하고 술을 한 잔 마시는 것이에요."

초류빈은 눈을 반짝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만약 내가 대답하지 못한다면 내가 지는 것이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재빨리 말을 받았다.

"당신이 대답하지 못했다고 진 것으로 할 수는 없어요. 내가 낸 문제를 내가 대답해야 당신이 지는 것이에요."

초류빈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지면 내가 문제를 내는 것이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야릇하게 웃었다.

"틀렸어요. 이긴 사람이 질 때까지 계속 묻는 것이에요."

초류빈은 내심 그녀가 재미있다고 느끼며 빙그레 웃었다.

"낭자가 만약 낭자의 사적인 일에 대해서 물어온다면 나는 한 번도 이길 기회가 없지 않소?"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다부지게 대꾸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만약 제가 당신에게 저의 어머니가 누구이며 형제가 몇 사람이냐는 등의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물론 알 수가 없어요."

초류빈은 호기심이 가득찬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그럼 어떤 것을 물을 생각이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곧 알게 될 것이에요."

초류빈은 소리없이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나는 질 것을 준비하고 있소."

손소홍도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좋아요. 그러면 지금부터 제가 묻겠어요."

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초류빈을 정면으로 주시한 채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 편지를 누가 썼는지 알고 있나요?"

그녀의 물음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라 초류빈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급히 물었다.

"모르겠소! 낭자는 알고 있소?"

그녀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모른다면 어찌 당신에게 물을 수 있겠어요. 그 편지를 쓴 사람은 바로....."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일부러 한동안 뜸을 들이더니 서서히

"바로 설소하예요."

그녀의 대답은 더욱더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초류빈은 매우 침착한 성격이었으나 이 때만은 그렇지 못했다.

"낭자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아연실색하여 묻는 초류빈에게 그녀는 신비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내가 대답했으니 당신이 진 것이에요. 그러니 당신은 물론 자격이 없어요. 자! 우선 약속대로 한 잔 드세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초류빈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녀는 그가 술을 다 마신 것을 보자 다시 물었다.

"당신은 지금 낭천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시나요?"

초류빈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손소홍은 야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비록 설소하와 같이 있기는 하지만 설소하가 한 일에 대해 모두 덮어주고 있어요."

초류빈은 냉정을 잃다시피 황급하게 물었다.

"지금 그는 어디에 있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방그레 웃었다.

"당신은 뭐가 그리 급하세요? 제가 진 다음에 물으면 될 게 아니에요?"

초류빈은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잔을 비웠다. 그가 가지고 있는 술잔은 보통 그릇보다 훨씬 컸으나 술을 마시는 속도는 평상시보다 더욱 빨랐다. 그것은 세 번째 문제를 일각이라도 빨리 듣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술잔을 어루만지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설소하가 무엇 때문에 그 편지를 썼는지 알고 있나요?"

초류빈은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오!"

그는 비록 설소하의 목적에 대해 대략은 짐작했지만 확실한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모른다고 대답한 것이다.

손소홍은 뜻모를 미소를 띠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호부인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므로 당신이 꼭 나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녀는 당신으로 하여금 모습을 나타내게 하는 한편 남들로 하여금 당신을 상대하게 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녀는 당신을 가장 무서운 상대라고 생각했으며 아울러 당신을 가장 증오하고 있어요. 만약 당신이 죽지 않는다면 그녀는 영원히 강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에요."

초류빈은 장탄식을 하며 세 번째 잔을 단숨에 비웠다.

손소홍은 보이지 않는 미소를 띠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을 제일 먼저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초류빈은 씁쓸히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내가 어떻게 그걸 알겠소?"

"하지만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두서너 명밖에 없어요.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상관금홍이에요!"

이 대답이 초류빈의 상상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네 번째 잔을 비우고 나서 급히 다그쳐 물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27 소이비도 제2권 흑의 검객





흑의 검객



문은 잠기지 않은 채 닫혀 있었다.

술주정뱅이는 문 앞에 잠시 서 있더니 가볍게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자 지독한 술냄새가 풍겨 나왔다.

방 안은 말할 수 없이 더럽고 지저분했으며 상 옆에 한 사람이 엎드려 있었고 그의 손엔 술병이 들려 있었다. 여기에도 또 한 명의 술주정뱅이가 있었다.

술주정뱅이는 씁쓸히 웃더니 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똑똑똑!

상 위에 엎드려 있던 사람이 드디어 깨어나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 사람은 얼굴이 온통 곰보였다.

곰보진 얼굴엔 술에 의한 기미와 주름살이 가득차 있었고 머리카락도 수염도 하얗다. 이 사람이 바로 천하제일의 미인인 설소하의 생부(生父)일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라도 하겠는가.

그 사람은 눈을 비비면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른 새벽부터 문을 두들기는 사람이 있다니 귀신이라도 찾아온 것인가!"

이렇게 말을 하고 난 그는 그제야 문 앞에 한 중년인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절로 미간을 찌푸리면서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오?"

그의 태도는 이 장원의 관리인인 듯했다.

중년인은 가볍게 웃었다.

"우린 이 년 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나를 못 알아보시겠소?"

설륭은 이 남루한 옷차림의 중년인을 자세히 보더니 그제야 안색이 급변했다. 중년인은 바로 초류빈이었던 것이다.

설륭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하려고 하였다.

"초....."

초류빈은 그가 엎드려 절을 하기 전에 급히 만류하더니 그의 입을 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나를 알아보면 되었소. 우리 앉아서 얘기나 합시다."

설륭은 급히 의자를 가져다 초류빈을 앉혔다.

"소인이 어찌 어르신네를 모르겠습니까? 전번엔 소인이 몰라뵙고 그랬지만 이젠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어르신네께선 이 년 사이에 매우 늙으셨군요."

초류빈은 가볍게 탄식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당신도 많이 늙었구려. 우린 모두 늙었나 보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소?"

설륭은 고개를 저으면서 탄식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의 앞에선 거짓말을 할지 모르겠지만 어르신네의 앞에서....."

이렇게 말한 그는 씁쓸히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어르신네께는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는 제 자신도 모르겠군요. 그저 오늘은 이것을 팔고 내일은 저것을 팔면서 지내왔습니다....."

초류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그동안 생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단 말이오?"

설륭은 고개를 숙였다.

초류빈이 다시 물었다.

"허...허...나리께서 떠날 때 집안에서 쓸 생활비를 하나도 남겨 두지 않았단 말이오?"

설륭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두 눈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초류빈의 안색은 일순 더욱 창백해져 다시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설륭은 눈물 섞인 음성으로 차근차근 말했다.

"부인께선 자신의 장식품을 지니고 계셨지요. 하지만 부인께선 그것을 모두 하인들의 생계를 위해서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머뭇거린 후 다시 말을 계속했다.

"부인께선 자신이 고통을 받을 망정 남에게는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가볍게 탄식을 터뜨렸다.

"하지만 당신은 떠나지 않았으니 과연 충신이구려."

설륭은 고개를 숙여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소인은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초류빈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너무 겸손해 하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소. 어떤 사람들은 성미는 비록 좋지 않지만 마음씨는 매우 좋소....."

이렇게 말한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계속 이었다.

"다만 그러한 사람들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매우 드물 따름이오."

설륭의 두 눈은 다시 붉어졌지만 애써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이 술이 비록 많지는 않지만 어르신네께선 사양치 마시고 한 잔 드십시오."

그리고 술을 따르려고 했으나 술병은 이미 비어 있었다.

초류빈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는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소. 다만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을 뿐이오...당신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내가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해서 말이오?"

설륭 역시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소인이 곧 차를 끓여다가 대령하겠습니다."

초류빈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누구를 만나든 간에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마시오."

곰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소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더니 급히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 닫는 것을 잊지 않았다.

초류빈은 표정이 다시 암담하게 변해 혼자 중얼거렸다.

"벽운! 벽운, 당신이 이러한 고생을 하다니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오. 내가 당신을 이렇게 되도록 한 것이오."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러므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당신을 보호해야 하며 그 누구도 당신을 해치지 못하게 할 것이오."

태양은 어느덧 높이 떠올라 창문을 통해 방 안을 환히 비추어 주었다.

차맛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차라는 것은 씁쓸하기는 하나 마시기는 힘들지 않았다. 이것은 여자와 같다고 비유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자가 젊었을 때, 비록 빼어나게 아름답지는 못하다 해도 싫어하는 남자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초류빈은 입에 별로 맞지 않는 차를 음미하면서 서서히 마셨다. 차를 다 마시고 난 초류빈은 소리없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에게 매우 총명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이런 재미있는 말을 한 적이 있소."

설륭이 웃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나리께서 하시는 말씀이 더욱 재미있습니다."

초류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마셔서 취하지 않는 술은 없으며 보기 흉한 여자는 또 없다고 말했소. 그리고 그 자신은 바로 그 두 가지 때문에 살아간다고 하였소."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빙그레 웃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 술이란 오래 저장할수록 그 맛이 좋고 향기로운 것이며 여자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세련되고 재미있는 것이오."

설륭은 초류빈의 이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초류빈에게 차를 따라 주면서 말했다.

"나리께선 이번에 무슨 일이 있으셔서 돌아온 것입니까?"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한참 후에야 서서히 말했다.

"소문을 듣자하니 이곳에 무슨 중요한 보물이 있다고 하더군....."

설륭은 실소를 하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보물이 있다구요? 이곳에 보물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그는 초류빈을 슬쩍 떠보았다.

"만약 이곳에 진짜 보물이 있다면 나리께서 아시고 계실 것이 아닙니까?"

초류빈은 탄식을 터뜨렸다.

"나와 당신은 이곳에 보물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진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소."

이 말에 설륭은 되물었다.

"유언비어를 퍼뜨린 사람이 누구일까요? 무엇 때문에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까?"

초류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할 수 있소. 그 중 첫째는 많은 사람을 이곳으로 끌어들여서 쟁탈전을 벌여 피차지간에 살생을 범하게 한 후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것이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륭이 급급히 물었다.

"또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초류빈은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이미 이 년 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소. 그리고 많은 무림인들이 나의 행적에 대해 조사하고 있소."

여기까지 말한 초류빈은 한 차례 기침을 토한 후 말을 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나를 끌어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 기회에 그들에게 나리의 솜씨를 한번 보여 주십시오."

"이번에 이곳에 온 사람 중엔 나의 실력으로도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몇 명 있소."

"이 세상에 나리께서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이때 문 밖에서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밝고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바로 호사야의 장원입니까? 소생, 특별히 뵙고자 이렇게 방문을 했습니다."

설륭은 안색이 가볍게 변하면서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이곳엔 이 년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를 않았는데 갑자기 웬 손님일까?"

설륭은 즉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약 반 시진이 지난 뒤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되돌아 와 말했다.

"이제 보니 오늘이 바로 부인의 생신이시군요. 저도 잊고 있었는데 그래도 기억하고 있다가 이렇게 축하해 주러 오는 사람이 다 있다니 정말 기쁘군요."

초류빈은 깊은 생각에 잠겨 무겁게 입을 열었다.

"누가 찾아왔소?"

"모두 다섯 명입니다. 한 분은 매우 위엄이 있어 보이는 어르신네이고 또 한 분은 매우 준수하게 생긴 청년입니다."

그는 갑자기 긴장한 표정을 계속 지으며 얘기했다.

"또 한 사랍은 외눈이고 가장 무서운 사람은 얼굴이 녹색인 사람입니다."

초류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그 중에 다리가 하나 없는 절름발이도 있소?"

설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나리께서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나리께선 그들을 알고 계십니까?"

일순 초류빈의 두 눈에서 칼날과 같이 예리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그리고 또 가볍게 기침을 토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콜록!"

설륭은 그의 눈빛이 변한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이 다섯 사람이 비록 매우 괴상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가지고 온 예물은 대단하더군요."

이렇게 말한 그는 신이 난 듯이 계속해서 지껄였다.

"호사야께서 이곳에 계실 때도 그만한 예물을 가지고 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초류빈은 담담하게 물었다.

"어떠한 선물을 가지고 왔소?"

"그들이 가지고 온 갖가지 예물 중엔 순금으로 된 큰 돈이 있었습니다. 최소한 대여섯 근은 되지요.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큰 돈은 처음 보았습니다."

초류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다시 물었다.

"부인께선 그들이 가지고 온 예물을 받았소?"

설륭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부인께선 본시 사양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객청에 앉아서 부인을 만나기 전엔 떠나지 않을 것이며 또 호사야의 절친한 친구라고 하자 부인께선 어쩔 수 없이 도련님으로 하여금 모시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도련님께선 비록 어리시지만 사람을 대하는 솜씨는 어른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 손님들은 이구동성으로 도련님의 총명함을 칭찬하였습니다."

초류빈은 그의 말을 듣고 찻잔 속의 차를 멍하니 내려다보면서 혼잣말인 양 중얼거렸다.

"이 다섯 사람이 왔으니 누가 또 이곳에 올 수 있겠는가."

제갈강, 고행공, 연쌍비, 당독, 그리고 상관비는 붉은색 옷을 입은 한 소년과 대청에 마주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강호의 제일가는 고수들이지만 이 어린 소년에 대해 예의로서 대했고 말투도 높였다. 다만 상관비만이 한쪽에 조용히 앉아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갈강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소장주께선 문무를 겸비하고 계시며 모든 것이 월등하여 훗날 무한한 영예를 성취하실 것이라고 믿소."

이렇게 말한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때가 되면 소장수께선 이 늙은 것들을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럼 저희들은 평생을 두고 감격할 것입니다."

어린 소년은 웃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만약 후배의 장래가 지금 노선배님들의 반만 된다 해도 저는 만족할 것입니다. 그것도 여러 선배님들의 많으신 보살핌과 가르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갈강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소장주께선 말씀도 잘하시는군요. 호....."

제갈강은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대청 밖을 바라보았다.

@ 이때 설륭이 한 손님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자는 일신에 검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검까지도 까만 흑의인이었다. 그의 몸집은 매우 커서 설륭보다 배나 더 컸다. 하지만 균형잡힌 체격은 매우 날렵해 보였다.

한데 안색이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회색과 같은 이상한 빛을 띠고 있었고 두 눈은 마치 날아가기라도 할 듯이 위로 치켜져 있었다. 그리고 가지런히 난 턱수염이 바람에 날려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갈강 등은 이 흑의인을 보자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가 비범한 솜씨를 지닌 강호 고수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흑의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의아해 하였다.

어린 소년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중나가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후배 호천강이라고 합니다. 어르신네께서 왕림하신 것을 미처 마중나가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흑의인은 호천강을 위아래로 유심히 살펴보더니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냉막한 어조로 물었다.

"자네가 호유성의 아들인가?"

호천강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선배님께선 가부(家父)의 옛 친구분이신 것 같은데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십니까?"

흑의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이름을 말한다고 해도 자네는 모를 것일세."

그러더니 큰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객청 내로 걸어 들어왔다.

제갈강 등은 흑의인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중을 했다.

제갈강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포권의 예를 올리면서 말했다.

"소생....."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흑의인이 그의 말을 가로채면서 냉랭하게 외쳤다.

"나는 당신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니 나의 내력에 대해 알려고 할 필요가 없소."

제갈강이 급급히 그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또 제갈강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흑의인은 그의 말을 가로채면서 차갑게 내뱉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당신들과는 다르오. 나는 다만 한번 와 본 것뿐이오."

제갈강이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잘 되었소. 이곳의 일이 끝난 후 소생 등은 귀하에게 감사를 드릴 것이오."

"나는 당신들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니 당신들도 나를 상관하지 마시오. 그리고 서로 왕래도 없었으니 감사해 할 것도 없소."

그러더니 의자를 하나 끌어다가 앉고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흑의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제갈강 등 다섯 명은 서로 마주 쳐다만 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고행공이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곳은 강호에서 제일가는 명원(名園)이라고 들어왔는데 소장주께선 소생들에게 구경시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호천강은 탄식을 터뜨리면서 대답했다.

"후배가 무능하여 가문이 중도에서 몰락하여 정원은 이미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고행공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산이란 높다고 해서 명산이 아니며 물은 깊다고 해서 모두 명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십 년 내에 명협과 미인고사들을 배출해 낸 이곳이 아무리 폐허가 되었다 하더라도 구경할 가치는 클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호천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러분들께서 원하신다면 어쩔 수가 없군요. 자, 후배를 따라 오십시오."

그러자 일행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호천강의 뒤를 따랐다. 이어 맨 앞에서 호천강이 길을 안내했고 맨 뒤에는 흑의인이 따르고 있었다. 이 흑의인은 눈이 반쯤 감겨져 있는 데다가 두 손은 또 소매 안에 들어가 있어서 매우 음험하게 여겨졌다.

호천강은 멀리 보이는 매화나무 숲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쪽이 바로 냉향소축입니다."

연쌍비의 두 눈에서 순간 강한 광채가 번뜩였다.

"듣자하니 초탐화가 이곳에서 기거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호천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연쌍비는 장삼 속에 감추어져 있는 표창을 만지면서 냉랭하게 웃었다.

"그는 비도이지만 나에겐 비창이 있소. 언젠가 그와 한번 대결해 보았으면 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때 맨 뒤에 서 있던 흑의인이 차갑게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이 만약 진짜 초탐화와 비교할 수가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정말 대단한 일이오."

연쌍비는 급히 몸을 돌리고 노기띤 눈초리로 흑의인을 노려보았다.

호천강은 연쌍비가 노한 것을 보자 급히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비도는 한낱 쇠붙이에 불과하며 무슨 선병신기(仙兵神器)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강호인들이 마치 그를 전설 속의 검선(劍仙)처럼 여기고 있으니 제가 들어도 어느 땐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흑의인이 담담하게 물었다.

"듣자하니 자네는 그에 의해서 공력이 제거됐다고 하던데 그 때문에 자네는 그를 증오하고 있는가?"

호천강은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초아저씨는 원래 저의 장배 어르신네입니다. 장배가 후배를 다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늘 후배가 어찌 감히 원망을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공력이 없다고 해서 큰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선배님?"

그의 웃음은 천진스러워 사악함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흑의인은 이 어린 소년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는 듯이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제갈강이 웃으면서 말했다.

"소장주께선 과연 패기가 있소. 그 한 마디만 들어도 호사야의 공자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소."

호천강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선배님께선 과찬하셨습니다."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던 상관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소문에 의하면 설소하도 이곳에서 기거하고 있었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이오?"

호천강은 그가 입을 연 것이 뜻밖인 듯 두 눈을 깜박거리더니 만 면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상관비는 조급한 기색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소?"

호천강은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이모님께선 이 년 전 어느 날 밤 갑자기 실종되었습니다. 자신의 옷가지도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아비에 의해 실종되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미 아비의 손에 죽었다고도 합니다."

상관비는 몹시 실망하여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들은 곧 다리를 건너 작은 누각 앞에 도착했다.

제갈강은 이 누각에 대해 몹시 흥미가 있는 듯 누각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고행공이 호천강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누가 기거하고 있는 곳이오?"

호천강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곳은 어머님께서 기거하시는 곳입니다."

고행공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다가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소생 등은 본시 영당대인의 생신을 축하해 드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소장주께선 영당대인을 좀 만나도록 허락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호천강은 난색을 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머님께선 손님을 통 만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후배에게 여쭤볼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고행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물론입니다. 어서 올라가 보시오."

호천강은 서서히 걸음을 옮겨 누각 위로 올라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매우 안정되어 있어 어린 소년의 활발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고행공은 그가 누각 위로 올라가자 냉랭하게 웃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아이는 정말 영특하군. 이 다음에 성장하면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오."

당독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저런 아이가 오래 살 수 있을는지 그게 의문이오."

누각의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던 제갈강이 또한 엄숙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이곳이 틀림없소!"

고행공은 주위를 힐끗 둘러보더니 더욱 음성을 낮추었다.

"내 어젯밤에 본 편지에 대해 누차에 걸쳐 연구해 보았는데 초가의 보물은 이 누각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오. 듣자하니 누대에 걸쳐 고관을 지내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물을 지니고 있다고 하오."

이렇게 말한 그는 의식적으로 흑의인을 훔쳐보았다. 이때 흑의인은 멀리 떨어진 채 어지럽게 자라고 있는 풀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두 마리의 귀뚜라미가 싸우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이들이 무슨 짓을 하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갈강의 두 눈에선 탐욕에 이글거리는 광채가 폭사되었다.

"보물은 별것이 아니오. 오직 초탐화 부자의 골동품과 공력비급을 방주께서 꼭 얻고자 하는 것이므로 오늘은 절대 빈손으로 돌아가선 안 되오."

고행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려고 하는데 호천강이 누각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제갈강은 시치미를 뚝 떼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영당대인께선 승낙하셨습니까?"

호천강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님께선 안 계십니다."

제갈강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물었다.

"어딜 가셨소?"

호천강은 고개를 흔들며 걱정스럽게 대꾸했다.

"후배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머님께선 누각에서 내려오신 적이 매우 드물었는데...."

제갈강은 내심 몹시 초조해 했으나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곧 돌아오실 것 같으니 우리 누각 위에 올라가서 기다리기로 합시다."

그러자 세 명의 황삼인이 급히 달려와서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속하들이 먼저 올라가 대략 청소해 놓겠습니다."

세 명의 황삼인은 본래 흑의인보다 멀리 서 있었다.

호천강은 세 명의 황삼인을 가로막으려고 했으나 제갈강의 수하라 섣불리 제지하지 못하고 불쾌한 기색을 띠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 명의 황삼인이 급히 몸을 날려 누각 위로 향했다.

바로 이 때였다.

누각 위에서부터 별안간 한 인영이 뛰쳐나오더니 기다란 채찍을 휘둘렀다.

휙!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파공음이 들리는가 싶자 석 장 길이의 채찍이 세 개의 커다란 원을 그렸을 때 이미 세 황삼인의 목은 채찍에 휘감겨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채찍은 다시 거두어졌다.

순간, 첫 번째 황삼인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머리가 잘려져 나간 채 일 장 밖으로 날아갔다. 이와 동시에 시뻘건 선혈이 잘라진 목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첫 번째 황삼인의 몸뚱어리가 채 쓰러지기도 전에 두 번째 황삼인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발랑 나자빠졌다.

그리고 혀가 쑥 빠져나오며 두 눈은 밖으로 툭 튀어나온 채 잠시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으며, 세 번째 황삼인도 두 손으로 목을 감싼 채 서너 걸음이나 뛰어가서야 픽 쓰러졌다.

그 고통이 얼마나 격심한지 사나이의 몸은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심하게 떨렸다. 그는 다행히 죽지 않았으나 그 고통은 죽음보다 수십 배나 더 큰 것이었다.

벼락같이 뛰쳐나와 세 명을 눈깜짝할 사이에 염라대왕 앞으로 보낸 사람은 바로 얼굴에 손바닥만한 푸른 점을 지닌 편신 서문유였다. 그의 귀신 같은 편법에 제갈강조차도 안색이 급변했다.

이때 흑의인이 냉막하게 코웃음을 치고 나서 담담하게 말했다.

"편신의 사편도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군!"

그러더니 몹시 실망했다는 듯이 고개를 높이 들고는 장탄식을 터뜨렸다.

제갈강이 음산하게 웃으며 살기띤 어조로 말했다.

"서문유! 어제는 용케도 도망쳤지만 오늘은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서문유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일언반구도 없이 다시 수중의 채찍을 휘둘렀다. 그가 처음 채찍을 휘둘렀을 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으나, 채찍이 완전히 퍼졌을 때는 강한 과공음이 들려왔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쾌속한 채찍 수법이 섬전보다도 더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이때 제갈강이 느닷없이 신형을 날리며 쇠지팡이로 응수해 갔다. 서문유의 채찍은 영활한 독사같이 상대의 쇠지팡이를 두르륵 휘감기 시작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제갈강의 쇠지팡이는 바닥에 깊숙이 꽂히고 말았다.

제갈강은 외다리를 높이 쳐든 채 쇠지팡이 위에 물구나무를 서서풍차와 같이 맹렬하게 돌기 시작했고 쇠지팡이도 같이 따라 돌았다.

그러자 쇠지팡이에 감긴 채찍은 점점 바싹 감겨져 시간이 갈수록 서문유는 어쩔 수 없이 가까이 끌려가야만 했다.

석 장 길이의 긴 채찍은 이미 반 이상이나 쇠지팡이에 감겼다.

서문유는 한 손으로 채찍을 움켜잡았지만 제갈강은 전신의 힘을 쇠지팡이 위에 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 힘은 물론 제갈강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유는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가 잠시 후에는 검붉은 색으로 변했고 비오는 듯한 땀방울이 코 양쪽의 선을 따라 흘러 내려왔다.

제갈강은 별안간 벽력 같은 폭갈을 터뜨리더니 쇠지팡이 위에 거꾸로 서 있던 몸을 비호처럼 옆으로 쓰러뜨렸다. 그는 자신의 몸을 쇠지팡이 대신으로 하여 횡소천군 초식을 전개한 것이다.

쇠지팡이는 생명이 없는 물체이지만 사람은 살아 있지 않은가. 그의 이런 변칙적인 공격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정말 오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약 서문유가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선다면 상대의 공격을 능히 피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편신이란 외호를 가진 그가 채찍을 버리고 피했다는 것이 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그는 다시 무슨 면목으로 강호인을 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손을 잡지 않는다면 왼손으로 제갈강의 다리를 정면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서문유의 손은 박살이 날 것이 뻔한 일이다.

사실 내공이나 적을 대하는 임기응변의 수법을 논한다면 서문유는 결코 제갈강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제갈강의 이 일초는 서문유를 상대하기 위해 이를 갈며 연마한 것이라 서문유에게는 극히 불리한 것이었다.

서문유는 비록 최악의 위기를 맞았으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갑자기 몸을 날려 쇠지팡이와 같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쇠지팡이에 감긴 채찍을 풀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갈강은 그가 이렇게 나올 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자신의 다리를 될 수 있는 한 길게 뻗어 서문유의 가슴에서 한 치 정도 떨어진 곳까지 접근시킨 채 시종 떨어질 줄 몰랐다.

두 사람의 싸움은 정말 신출귀몰하여 우열을 가리기가 몹시 힘들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용호상박에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오직 한 사람 흑의인만이 탄식을 터뜨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금강철괴도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구나!"

이때 당독이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죽음을 눈앞에 둔 놈이 멋모르고 날뛰다니 가소롭구나. 내가 네놈의 최후를 장식해 주마."

말을 마친 그는 자신의 독문병기인 당랑도를 뽑아 들어 서문유의 등을 노리고 빠르게 찔러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막 뛰쳐나가던 당독은 마치 무형의 주먹에 의해 격타당한 듯 뒤로 발랑 나자빠지는 게 아닌가.

그는 찍소리 한번 못하고 저승길로 줄달음질쳤다.

그의 목에는 어느 틈엔가 한 자루 비수가 꽂혀 있었다. 그것은 보통 비수와 별로 다른 데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제갈강은 그 비수를 보자 대경실색하여 소리쳤다.

"비도탈명!"

경악의 외침을 터뜨린 그는 심신이 어지럽고 진력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그러자 그의 몸이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이때를 노려 서문유는 급히 채찍을 잡아당겨 쇠지팡이에 감긴 것을 끌어냈다. 제갈강은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며 이 장 밖으로 사뿐히 내려섰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공포의 빛을 띤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때, 누각 위에서 한 중년인이 서서히 걸어나왔다.

그 사람의 옷은 매우 남루했으며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처럼 헝클어져 더할 수 없이 초라하였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신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제갈강은 자신도 모르게 쇠지팡이를 바싹 움켜쥐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납덩이처럼 하얗게 변했다.

"초탐화!"

중년인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송구스럽소이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골목 안 객점에서 일 년 동안이나 숨었던 술주정뱅이 초류빈이었다.

제갈강은 엉겁결에 뒤로 주춤 물러나면서 소리쳤다.

"우리는 당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거늘 어째서 우리를 적대시하는 것이오?"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평생을 지내오면서 남과 적대시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오. ?그리고 또한 남이 나를 적대시하는 것은 더욱 싫어하는 성미요."

초류빈은 수중의 칼을 매만지면서 계속 말했다.

"이곳에는 여러분의 마음을 자극하는 보물이 없으니 속히 떠나시오! 그리고 매우 미안한 말씀이지만 돌아가실 땐 가지고 왔던 예물들을 다시 찾아 가지고 가시오."

제갈강, 상관비, 고행공 등은 그의 수중에 들려 있는 예리한 칼을 바라보면서 마치 목에 무엇이 걸린 듯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연쌍비가 버럭 소리질렀다.

"우리가 가지 않겠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초류빈은 시종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귀하에게 정중히 권하겠지만 이대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연쌍비는 대노하여 대갈일성하였다.

"초류빈, 너무 기고만장하지 마라! 나는 벌써부터 너와 고하를 가려 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너를 두려워할지 몰라도 나 연쌍비는 너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 그는 장삼을 벗어 두 줄의 가죽띠를 나타내 보였다. 가죽띠에는 빙 둘러 가며 붉은 색의 표창이 가지런히 꽂혀져 있었으며 반짝거리는 예리한 날은 마치 맹수의 이빨과도 같았다.

하나 초류빈의 입가에는 담담한 미소만 흐르고 있을 뿐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번개같이 손을 휘둘러 연쌍비는 느닷없이 폭갈을 터뜨리며 아홉 개의 표창을 격출시켰다.

쌍! 쌍!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아홉 개의 표창은 초류빈의 전신을 꿰뚫을 듯이 격사해 갔으나 보이지 않는 강철 벽에 부딪힌 것처럼 갑자기 우루루 땅에 모두 떨어졌다.

그리고 연쌍비는 목에 반짝이는 칼이 꽂힌 채 쓰러져 있었다.

비도탈명!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다.

그의 비도가 언제 연쌍비의 목에 꽂혔는지 분명하게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결과로 보아 연쌍비가 두 손을 휘두르는 순간에 맞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쌍비가 미처 표창을 다 날리기도 전에 초류빈의 비도는 이미 그의 목을 여지없이 관통시켰으며 그로 인해 연쌍비의 표창은 초류빈의 몸에 채 닿기도 전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연쌍비의 두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의 빛을 띤 채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불거져 나왔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이 세상에서 자신의 표창보다 더 빠른 비도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죽는 이 시간에도 역시 자신보다 더 빠른 자가 있었던 것에 대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흑의인은 고개를 숙여 연쌍비의 시체를 보더니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아까 뭐라고 했소. 이제야 내 말을 믿겠소?"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초류빈을 바라보며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비도탈명,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구려!"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며 흑의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귀하께선....."

흑의인은 그의 말을 가로채면서 서서히 말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초탐화라는 이름을 듣고 존경해 왔었소. 오늘 이렇게 만났으니 보잘것 없지만 한 가지 선물을 드리겠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장검은 검신까지 검은 빛을 띠고 있었으며 아무런 특징도 발견할 수 없었으나 검이 검집에서 뽑혀지는 순간 싸늘한 검기가 주위에 퍼졌다.

고행공이 섬뜩해 하는 찰나 흑의인의 검은 이미 소리없이 엄습해와 그의 눈을 정확하게 찔렀다. 그는 막 눈을 감는 순간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제갈강이 이 광경을 발견했을 때 고행공의 눈에선 선혈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고행공은 손을 써서 막아 내지도 못했으며 또한 피하지도 못했다. 제갈강은 고행공의 공력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행공이 이 흑의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고행공이 어째서 방어는커녕 피하지도 않았는지에 대해선 도저히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뼈를 깎는 듯한 한기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고 외마디 고함을 발한 것과 동시에 철괴를 휘둘렀다.

그는 횡소천군이라는 별호를 지니고 있으며 횡소천군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이 일초는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휭!

광풍노도와 같은 거센 바람이 일면서 철괴는 흑의인의 머리를 박살낼 듯이 강타해 갔다.

흑의인은 장검을 휘둘러 응수했다.

창!

청아한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예순세 근이나 되는 금강 철괴는 이미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제갈강은 안면에 한기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자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털끝만큼의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서문유가 별안간 장탄식을 하면서 혼자 중얼거렷다.

"보아하니 당금 강호에서 이 서문유가 발디딜 곳은 없나 보군....."

그리고는 즉시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몸을 날리자 상관비도 몸을 날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싸늘한 검기가 엄습해 갔다. 상관비는 외마디 기합을 지르며 수중의 자모용봉환을 격출했다.

창! 창!

청아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는 동시에 두 개의 용봉환이 흑의인의 장검 가운데 달라붙었다.

흑의인은 가볍게 소리쳤다.

"대단하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장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순간 용봉환이 여지없이 두 조각이 나고 장검은 이미 상관비의 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상관비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두 눈을 서서히 감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너무도 차가워 두려움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흑의인은 그러한 상관비를 무섭게 쏘아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네가 상관금홍의 아들이냐."

상관비는 냉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흑의인은 약간 안색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나의 이 검에서 살아난 자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너 같은 젊은 나이에 나의 일검을 막아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목을 겨냥하고 있던 검으로 상관비의 어깨를 가볍게 치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오늘은 너를 놓아 주마!"

상관비는 천천히 두 눈을 뜨면서 제자리에 선 채 냉혹하게 말했다.

"비록 당신이 나를 살려 주었지만 내 당신에게 분명히 말할 게 있소."

흑의인은 소리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든지 해 봐라!"

상관비는 시종 차가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당신이 나를 놓아 주었지만 훗날 반드시 당신에게 복수할 것이오. 그때 가서 내가 당신의 사정을 보아 주지는 않을 것이오."

흑의인은 느닷없이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좋다! 과연 상관금홍의 아들답구나."

말을 마친 그는 웃음을 뚝 멈추더니 예리한 눈초리로 상관비를 노려보면서 다시 말했다.

"훗날 네가 나를 죽일 수만 있다면 내 비단 너를 원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랑으로 여길 것이다. 내가 필경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상관비의 안색은 털끝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생 이만 물러가겠소."

흑의인은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대꾸했다.

"잘해 보아라. 언제든지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상관비는 형식적으로 공수의 예를 취한 후 몸을 돌렸다.

이때 흑의인이 별안간 소리쳤다.

"잠깐만!"

상관비는 걸음을 멈추었으나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또 무슨 할 말이 남았소?"

흑의인은 싸늘한 표정으로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너는 이것을 똑똑히 기억해 둬라! 오늘 내가 너를 놓아 주는 것은 네가 상관금홍의 자식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너 자신을 생각해서 놓아 준 것이다."

상관비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서서히 걸음을 옮겨 떠났다.

흑의인은 상관비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초류빈과 마주 섰다. 그리고는 장검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구의 시체를 가리키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이것은 초탐화를 만난 선물 대신해서 나의 조그마한 성의를 표시하는 바이오!"

초류빈은 흑의인의 수중에 있는 검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均錚?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숭양철검(崇陽鐵劍)?"

흑의인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바로 곽숭양(郭崇陽)이오!"

초류빈은 장탄식을 터뜨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과연 숭양철검도 소문대로군!"

곽숭양은 자기의 수중에 있는 철검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이 숭양철검이 당신의 비도탈명과 비교해서 어느 것이 나을지 모르겠구려!"

초류빈은 흥미가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것을 별로 알고 싶지 않소!"

곽숭양은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무엇 때문이오?"

초류빈은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당신이나 나나 이 궁금증을 풀려고 한다면 모두 후회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오!"

곽숭양은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한 해답을 들어야 할 것이오! 안 그렇 소?"

초류빈은 땅이 꺼져라 탄식을 터뜨리면서 말을 받았다.

"나는 될 수 있으면 그 시기가 늦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바이오....."

곽숭양은 흥분한 기색으로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나는 그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하오!"

이에 초류빈은 곽숭양을 지그시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무엇이오?"

곽숭양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우리가 고하를 가리지 않으면 나는 한시도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오!"

초류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것이 언제였으면 좋겠소?"

곽숭양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말을 받았다.

"바로 지금이오!"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마치 남의 일같이 말했다.

"이곳에서?"

곽숭양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냉랭하게 웃었다.

"이곳은 바로 당신의 옛 집이오. 내가 당신과 이곳에서 싸운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지리적인 이점을 안겨다 주는 것이 될 것이오!"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소! 귀하는 과연 절정의 고수라 할 수 있소."

곽숭양은 미미하게 웃으며 조급한 기색으로 말했다.

"시간은 내가 정했으니 장소는 당신이 지정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오."

초류빈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잘라 말했다.

"그렇지 않소!"

초류빈이 거절하자 곽숭양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시오."

초류빈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좋소! 앞장서시오."

초류빈은 이렇게 대답한 후 몇 걸음 걸어가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누각 위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호천강이 원한이 가득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곽숭양의 철검이 제아무리 절묘하고 제갈강의 죽음이 더할 수 없이 비참해도 이 어린 소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초류빈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즉시 웃음을 띠면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초아저씨! 그동안 어르신네께선 안녕하셨습니까?"

초류빈은 내심 우울했으나 내색을 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너도 잘 있었느냐?"

호천강은 약간 멈칫하더니 이내 분명하게 말했다.

"가모께선 한시도 어르신네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어르신네께선 가끔 오셨어야 했습니다."

초류빈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어린 소년의 말은 때때로 초류빈을 매우 곤란하게 할 때가 있었다.

호천강은 눈알을 한 번 굴리더니 별안간 초류빈의 옷자락을 잡아 끌면서 나직하고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저 사람은 흉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저씨께선 제발 따라가지 마십시오!"

초류빈은 고소를 지으면서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네가 성장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은 자기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상황에 따라선 꼭 해야 할 일들이 많은 법이다."

호천강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하지만...하지만 만약 아저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누가 우리 모자를 보호해 준단 말입니까?"

초류빈은 그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 틈엔가 설벽운이 누각 위에 서서 초류빈과 자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엔 말로 다할 수 없는 원망과 고뇌의 빛이 가득차 있었으나 한편으론 위안의 빛도 어려 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이 초류빈과 화해를 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친밀한 것을 보자 내심 더할 수 없이 기뻤던 것이다.

일순, 초류빈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급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자 호천강이 설벽운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어머니!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세요. 초아저씨께선 오시자마자 다시 떠나려고 하십니다."

설벽운은 매우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얘야! 그분께선 하시는 일이 많으므로 꼭 가셔야 하느니라."

호천강은 애석하다는 듯이 발을 구르며 말했다.

"어머님! 어머님께선 아저씨께 드릴 말씀이 겨우 그것밖에 없단 말입니까?"

설벽운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음성이 떨리기까지 했다.

"무슨 말이든 그분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 말씀드려도 늦지는 않다."

호천강은 두 눈을 깜박이며 힘없이 말했다.

"제가 보기엔...아저씨께서 이번에 가시면 다시는 돌아오시지 못하실 것입니다."

설벽운은 금방 쓰러질 듯이 몸을 휘청하더니 나무라는 어조로 소리쳤다.

"닥쳐라! 어서 올라오너라. 아저씨께선 속히 떠나셔야 한다."

호천강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초류빈의 옷자락을 서서히 놓아 주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저씨께선 어서 가 보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저희 모자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모자는 이제 습관이 되어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더니 눈물을 닦는 것인지 아니면 눈에 티가 들어갔는지 손으로 눈을 비볐다. 이때 곽숭양은 이미 다리 위로 올라가서 팔짱을 ` 끼고 이쪽을 냉혹한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초류빈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천 근이나 되는 듯 무거운 발길을 서서히 옮겼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없이 천 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 시간에 그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그는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며 감히 설벽운을 쳐다볼 생각도 못했다.

초류빈이 점점 멀어져 가자 호천강이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멀건히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엔 원한의 빛이 이글거리고 입가에는 악독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당신의 심정이 견디기 어렵도록 고통스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나는 바로 당신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이러는 것이오. 지금과 같은 심정으로 곽숭양과 같은 고수와 대결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오.'

26 소이비도 제2권 생명을 빼앗은 동전





생명을 빼앗은 동전



하지만 그 누구의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않고 모든 동전을 다 떨어뜨린 것이었다. 이 사십여 명의 사람은 모두가 강호에서 유명한 인물들로서 상당한 견식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상상도 못할 만큼 긴 채찍을 신의 경지에 가깝도록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보지를 못했다.

청면 사나이의 손에 들려 있는 채찍은 마치 살아 있는 뱀과 같을 뿐만 아니라 눈까지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사십여 명의 무림인들은 이 순간 서로 마주 쳐다보더니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몸을 날려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디서 그러한 힘이 생겨났는지 머리의 동전이 떨어지는 순간 쏜살같이 달아나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황삼노인의 안색이 확 변했다.

"당신이 그들의 탈명동전(奪命銅錢)을 떨어뜨린 것은 그들을 대신해서 죽어 주겠다는 것이오?"

외다리 괴인이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편신(鞭神) 서문유(西門柔)의 목숨 하나만 있으면 그들 사십여 명의 생명보다도 더 가치가 있지."

이렇게 소리친 외다리 괴인은 철장을 뽑아들더니 마치 태산과 같이 안정되고 위맹한 모습으로 청면 사나이의 앞에 우뚝 섰다. 황삼노인이 두 손을 움츠렸다가 벌리자 그의 소매 안으로부터 한 쌍의 판관필이 나왔다.

얼굴이 녹색인 황삼노인의 손에도 기형(奇形)인 외문(外門) 병기가 들려져 있었다. 이 기형의 외문병기는 칼 같기도 하고 톱 같기도 한 것이 역시 녹색 광채를 띠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병기에 독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황삼노인은 시종일관 입을 열지 않았고, 두 손은 소매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 서서히 빼냈는데 그의 두 손엔 한 자의 자모강환(子母鋼環)이 들려져 있었다. 병기를 사용하는 데에는 한 치가 길면 한 치만큼 더 강하고 한 치가 짧으면 그 만큼 위험이 따른다는 철칙이 있다.

이 자모강환은 위험한 것 중에서도 위험한 병기 중의 하나다. 일단 손을 쓰게 되면 필시 선제공격에서 상대를 제압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림에서 감히 이러한 병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공력은 절대로 약하지 않았다.

네 명의 황삼인은 청면 사나이 서문유를 완전히 포위했다.

다만 외눈의 황의인만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옷고름을 풀어 헤쳤다. 그의 가슴에는 가죽 칼집이 칠(七)자 모양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마흔아홉 개의 표창이 꽂혀 있었다. 표창 중엔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었으며 긴 것은 한 자 석 치 정도이고 짧은 것은 여섯 치 정도로서 창끝이 선혈과 같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다섯 사람의 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서문유의 수중에 있는 채찍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그들도 이 눈이 달려 있는 듯한 긴 채찍에 상당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외다리 황삼인은 음험하게 웃었다.

"우리 이 네 친구의 내력에 대해서 귀하는 잘 알고 있을 것이 오."

서문유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내 벌써 알고 있었소."

외다리 황삼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치대로 말한다면 우리 다섯 사람의 신분으로서 당신 한 사람을 상대하기란 부당한 일일 것이오, 하지만 오늘밤의 상황은 다르오."

서문유는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강호 중에서 많은 인원으로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당신들 다섯 사람뿐만은 아니오."

"나는 본시 당신의 생명을 빼앗을 생각은 없었소. 하지만 당신이 우리의 규칙을 어겼으니 우리가 어찌 당신을 놓아 줄 수 있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규칙이 파괴되면 위신도 떨어진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서문유는 낭랑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만약 내가 꼭 가야겠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외다리 황삼인이 짧게 잘라 말했다.

"당신은 갈 수가 없소!"

서문유는 벼락같이 고함을 터뜨렸다.

"만약 내가 진짜 갈 생각이 있다면 당신들의 실력으로선 결코 나를 막지 못할 것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 일순 채찍을 휘둘렀다. 순간 긴 채찍은 여덟 개의 원을 그리면서 서문유의 몸을 완전히 에워싼 채 용수철과 같이 쉴새없이 돌았다.

이에 황삼인도 외마디 고함을 터뜨리며 철장을 휘둘렀다.

"이야압!"

그의 이 일격은 매우 평범한 횡소천군의 초식이었지만 그 힘의 강도와 기세는 비할 데가 없었다. 강호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초식을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하고 있지만 그의 이러한 일격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횡소천군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한데 서문유의 입에서는 쉬지 않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채찍이 더욱 급하게 돌고 있는 가운데 그의 몸이 갑자기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이때 외눈의 황삼인이 두 손을 내휘둘러 단숨에 열 자루의 표창을 발해냈다.

예리한 파공음이 발해지면서 열세 개의 붉은 빛이 서문유의 전신 각 대혈을 향해 폭사되어 갔다. 쏘아지기는 큰 표창이 먼저 쏘아졌지만 도착하기는 짧은 표창이 빨랐다.

그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창! 창!

쇠와 쇠가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리면서 길고 짧은 열세 자루의 표창이 모두 급하게 돌고 있는 채찍에 의해 부러져 사면 팔방으로 날아갔다. 어떤 것은 담 속으로 날아갔고 어떤 것은 담 위에 꽂히면서 소낙비와 같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그리고 서문유의 몸은 더욱 급하게 돌아 돌면 돌수록 몸이 높이 올라갔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안개가 싸여 보이지 않게 될 것이었다.

외다리 황삼인이 노기띤 음성으로 소리쳤다.

"쫓아라!"

이렇게 소리친 그는 철장으로 땅을 힘껏 내리치며 몸을 공중으로 날렸다. 그는 비록 다리가 하나였지만 오히려 두 다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보다 더욱 경쾌하여 눈깜짝할 사이에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머지 황삼인들도 공중에서 들려오는 파공음을 듣고 방향을 식별해 뒤쫓아 갔다.

이렇게 되자 골목 안은 다시 평온함을 되찾았고 두 구의 시체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만약 이 두 시체만 없었다면 손꼽추는 무서운 악몽에서 깨어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때 남삼 노인은 술이 깬 듯, 두 눈에 술기운이 전혀 없었다. 그는 황삼인들이 떠난 것을 보고서야 탄식을 터뜨렸다.

"서문유의 채찍이 천마수보의 위에 나열되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 그가 보인 채찍술은 편신이란 칭호를 받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지. 백요생의 안력은 과연 대단하군."

댕기 처녀가 끼여들면서 입을 열었다.

"무림인들 중 채찍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그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나요?"

남삼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채찍을 이러한 경지까지 이르게 한 사람은 삼십 년래에 한 명도 없었다."

댕기 처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괴물은 누군가요?"

"그 사람은 제갈강(諸葛剛)이라고 하며 강호 사람들은 그를 횡소천군이라고 칭한다."

이렇게 말한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철장의 무게는 육십삼 근이나 나가며 당금 무림에서 그보다 더 무거운 병기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 줄로 알고 있다."

댕기 처녀가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문유와 제갈강 두 사람은 하늘이 내려 주신 상대인 것 같군요."

남삼노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서문유의 공격은 유순하나 반면 그의 사람됨은 매우 강직하지. 그 반면에 제갈강은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음험하고 교활한 사람이다."

여기까지 말한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직이 계속해서 말했다.

"두 사람의 공격은 서로 상극될 뿐만 아니라 성미 또한 다르다. 다만 유순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가 없어 공력으로 논한다면 제갈강이 한 수 앞선다. 하지만 심계(心計)를 겨룬다면 손해볼 것은 뻔한 것이다."

댕기 처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의 말을 받았다.

"제가 보기엔 흰 수염이 달린 노인이 제갈강보다 더욱 음침한 것 같아요."

남삼노인은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설명했다.

"그 사람은 고행공(高行空)이라고 하며 혈도 찍는 데는 명수이다. 그리고 외눈의 황삼인은 연쌍비(燕雙飛)라고도 하며 두 손으로 단숨에 마혼아홉 개의 표창을 발해낼 수가 있지."

이렇게 말한 그는 숨을 돌린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의 병기는 백발백중으로써 이 두 사람은 백요생의 병기보에 서른일곱 번째와 마흔여섯 번째로 나열되어 있는 강호 중의 일류 고수들이다."

댕기 처녀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물었다.

"마흔여섯 번째 위에 나열되어 있는 데도 고수라고 할 수가 있나요?"

남삼노인은 그녀의 말을 듣자 끌끌 혀를 찼다.

"쯧즛! 이 세상에서 공력을 연마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 병기보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지 아느냐?"

댕기 처녀는 의혹에 찬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다가 또다시 물었다.

"얼굴이 파란 사람이 쓰는 병기는 무엇이죠? 그것도 병기보에 올라 있나요?"

"그 사람은 독당랑 당독(唐獨)이라고 한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병기는 당랑도라고 하며 독이 칠해져 있지....."

여기까지 말한 그는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계속했다.

"누구든지 그것에 의해 조금이라도 긁히기만 하면 한 시간 내에 죽게 된다."

그의 말을 들은 댕기 처녀는 갑자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이제야 생각났어요. 그 사람은 오독(五毒) 만을 전문적으로 먹기 때문에 온몸의 색깔이 녹색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더욱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잡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의 처가 그에게 녹색 모자를 선물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호호....."

남삼노인은 담뱃대에다 불을 붙여 한 모금 빨고 나서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그들 몇 명이 비록 강호상의 일류 고수이기는 하지만 무게가 있기로는 그 젊은 녀석을 따를 자가 없지."

댕기 처녀는 그의 말이 맞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받았다.

"그래요. 저도 그 사람에게 무게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지요.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가장 침착하고, 그가 쓰는 병기도 사용하기가 매우 힘든 것이에요. 그런데 그의 정체는 무엇이죠?"

남삼노인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반문을 했다.

"너는 혹 용봉환(龍鳳環) 상관금홍(上官金虹)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느냐?"

댕기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들어보았지요. 그 사람 손에 있는 한 쌍의 자모용봉환(子母龍鳳環)은 병기보에 두 번째로 나열되어 있으며, 초탐화의 비도탈명보다도 상위에 있지요.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강호에 어디 있겠어요?"

남삼노인은 그녀가 궁금해서 물었던 것에 대해 그제야 이야기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상관비(上官飛)로서 바로 상관금홍의 외동아들이다. 제갈강, 당독, 고행공, 연쌍비는 모두가 상관금홍의 속하들이다."

댕기 처녀는 혀를 내밀어 보였다.

"그들이 행패를 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요. 뒤에 상당한 막후 인물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뭐 있겠어요."

"상관금홍은 다년간 침묵을 지키더니 이 년 전에 갑자기 다시 일어나 병기보에 수록된 열일곱 명의 고수들을 망라해서 금전방(金錢幇)을 조직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지난 이 년 사이에 그는 가는 곳마다 승리를 했고 날로 기세가 상승해 갔다. 그리고 성세(聖勢)도 개방을 능가하고 있는 형편이다."

댕기 처녀가 웃음을 굴렸다.

"개방은 무림 중에 제일 큰 방파인데 그들과 같은 사문 방파와 어찌 비교할 수가 있겠어요?"

"근 이 년 사이엔 인재가 부족해 정파는 소침되고 사파가 날로 번창해 가고 있다. 만약 의기소침한 영웅과 협사들이 분발해 일어나지 않는다면 금전방의 행패는 그칠 날이 없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말한 그들은 의식적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인지 술주정뱅이를 향해 흘깃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술주정뱅이는 완전히 술에 곯아 떨어졌는지 상 위에 엎드린 채 인사불성이었다.

"그렇다면 금전방이 끼여든 이상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구경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하지만 이때 남삼노인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럼 상관금홍의 공력보다 더 고명한 신인이라도 나왔단 말인가요?"

"용봉환은 비록 병기보에 이 위로 나열되어 있지만 삼 위에 나열되어 있는 비도탈명 초류빈이나 사 위에 나열되어 있는 숭양철검(崇陽鐵劍)의 공력도 상관금홍에 비해서 뒤떨어지지 않는단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빙긋 웃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하물며 용봉환 위에는 변화무쌍하고 오묘하기 이를 데 없는 여의봉(如意棒)이 있지 않느냐?"

댕기 처녀의 두 눈에서 일순 강한 광채가 번뜩였다.

"그 여의봉이 얼마나 오묘하길래 병기보에 일 위로 기록된 것인가요?"

"여의봉은 일명 천기봉(天機棒)이라고도 한다. 그 비밀에 대해서는 천기노인(天機老人)을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

"금전방이 설사 대단하다고 해도 방파의 이름은 그다지 고명하지가 못하고 그야말로 속되고 가소롭군요."

"돈이라면 귀신도 부릴 수가 있고 신과 교통한다고 하지 않느냐. 천하 만물 중에서 돈보다 더 큰 마력을 지닌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렇게 말한 그는 마른침을 한차례 꿀꺽 삼키고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네가 내 나이쯤 되어 보면 이 이름이 조금도 가소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댕기 처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돈에 현혹되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 사람은 매우 드물 뿐만 아니라 갈수록 그 수가 작아지는구나....."

댕기 처녀는 또 입을 삐죽거리더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남삼노인은 담뱃대를 상 옆에다 톡톡 털고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내 말을 알아듣겠느냐?"

댕기처녀는 큰 눈을 돌려 상 위에 엎드려 있는 술주정뱅이를 한번 쳐다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어째서 못 알아듣겠어요."

남삼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다짐을 받았다.

"너는 그 사람들의 정체에 대해서 모두 알았겠지?"

"모두 알았어요."

"그럼 됐다. 이젠 그들을 만나게 되면 각별히 조심하여야 한다....."

이렇게 말한 그는 서서히 일어나더니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이곳의 술이 비록 좋기는 하지만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술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지. 가야 할 때는 가야 하는 것이다...주인장.....안 그렇소?"

손꼽추는 이들 두 조손이 얘기를 주고받고 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얘기가 다 끝나자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께선 강호의 일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아시고 계시는군요. 보아하니 대단하신 노영웅 같으신데 술값은 그만두십시오."

남삼노인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나는 무림 영웅이 아니오. 한낱 술꾼에 불과하지...하지만 영웅이나 술꾼을 막론하고 나에게 빚을 지게 되면 언젠가는 갚아야 하며 빚을 지고 있는 동안은 마음이 편하지 못하오."

이렇게 말한 남삼노인은 은자를 꺼내 상 위에 올려 놓더니 손녀의 어깨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손꼽추는 그들 조손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술주정뱅이는 어느 새 깨어 있었다. 그리고 편신 서문유가 앉아 있던 상 앞으로 가 제갈강이 꺼내 놓은 편지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손꼽추는 씁쓸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술에 취하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오. 그 바람에 많은 구경거리를 놓치고 말았지 않았소."

술주정뱅이 역시 가볍게 웃더니 이내 탄식을 터뜨렸다.

"진짜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아직 뒤에 남아 있소. 아마 나는 보지 않으려고 해도 안 될 것이오."

손꼽추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오늘 만난 사람들마다 그 말투가 이상하고 신비스럽다고 느껴졌다. 술주정뱅이는 편지를 들어 읽기 시작했다. 일순 그의 창백한 얼굴에 이상한 홍조가 떠오르더니 허리를 숙인 채 계속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손꼽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소?"

술주정뱅이는 머뭇거리며 얼버무렸다.

"아...아무것도 아니오."

손꼽추는 두 눈을 깜박거리더니 입을 떼었다.

"듣자하니 그 사람들은 모두 이 편지 때문에 온 것이라고 하던데....."

술주정뱅이는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손꼽추는 궁금한 듯 말을 계속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잠꼬대 같은 말입니까?"

이렇게 말한 그는 가볍게 웃더니 다른 방향으로 말을 돌렸다.

"술을 더 마시지 않겠소? 오늘은 내가 한턱 내겠소."

그러나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들어 보자 술주정뱅이는 그 자리에서 넋을 잃은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는 취기가 서려 있기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처량한 빛이 내포되어 있었다. 손꼽추가 그의 눈길을 따라가 보니 높은 담장 너머에 있는 작은 누각 위에서 희미한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

그도 술주정뱅이와 같이, 등잔불이 비치고 있는 곳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자욱한 안개에 싸인 등불은 마치 망망대해에서 보는 등대의 불빛과도 같았다.

손꼽추가 뒤뜰로 돌아왔을 땐 삼경이 벌써 지나 있었다. 뒤뜰은 언제나 조용했다. 술주정뱅이의 방은 아직도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방문도 반쯤 열려져 있었다.

손꼽추는 지난번 비오던 날 밤의 일이 생각나 급히 다가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자고 있소? 어째서 문을 닫지 않았소?"

그러나 방 안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손꼽추가 반쯤 열린 방문을 통해 안을 바라보니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침상은 매우 잘 정돈되어 있었고 사람이 잔 흔적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술주정뱅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밤이 이렇게 깊었는데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손꼽추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방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침상을 제외하고는 매우 어지러웠다. 침상 머리 맡에 이십 개의 목각이 있었고 상 위엔 먹다 남은 술도 있었다. 하지만 목각을 깎던 칼은 보이지 않았다.

손꼽추의 시선이 순간 한 곳에 집중되었다. 술잔 옆에 한 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제갈강이 놓고 갔던 그 편지였다. 그는 호기심이 절로 생겨 그쪽으로 다가가 편지를 꺼내 보았다. 편지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구월 십오일, 흥운장에 보물이 나타날 것이니 귀하께선 꼭 와 주시기 바라오.>

편지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보낸 자의 이름은 물론 받는 자의 이름도 없었다. 편지를 쓴 사람은 상대의 심리를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손꼽추는 절로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에 괴이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는 흥운장이 바로 맞은편에 있는 거대한 장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술주정뱅이가 흥운장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안개는 더욱 짙어만 갔다.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이 남았고 연못 안은 낙엽으로 가득차 있었다. 과거의 푸른 나무와 아름다운 꽃들, 그리고 온갖 새들의 노랫소리로 가득찼던 정원은 더할 수 없이 황량하게 변해 있었다.

작은 구름다리 건너편에 서너 개의 정자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냉향소축이다. 이곳은 강호 제일의 명협이 기거했고 또 강호 제일의 영인(靈人)이 살았던 곳으로 찬란한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과거의 찬란했던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누각 위의 불은 희미한 빛을 발하면서 계속 타고 있었다. 새벽을 알리는 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가운데 짙은 안개를 헤치며 한 인영이 나타났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아니 지옥에서 온 죽음의 사자가 아닐까? 인영의 머리카락은 온통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고 옷도 제대로 정돈되지 못했다. 겉보기에는 매우 초췌하고 나태해 보였지만 그의 기풍은 매우 당당했고 두 눈빛은 마치 가을밤의 별과 같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인영은 매우 안정된 걸음으로 구름다리를 건너갔다.

앙상하게 말라 있는 매화나무를 본 그는 깊은 장탄식을 터뜨렸다. 이 매화는 과거 그와 매우 절친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같이 매우 초췌해 보이는 것이다.

인영은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갑자기 물찬 제비와 같이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누각 위의 창문은 닫혀 있었으며 누렇게 변해 있는 창호지에는 섬세한 인영이 반영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적막하고 쓸쓸해 보였다. 창문 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니 한 고독한 사람이 등잔불 앞에 다소곳이 앉아서 옷을 꿰매고 있었다.

이 누각 내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여자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고 초췌했으며 과거의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녀는 마치 인간의 환희와 모든 고난, 그리고 번뇌를 망각한 지 오래된 듯한 사람 같았다. 그녀는 모든, 아니 남은 청춘을 바늘 끝에다 실은 채 옷을 꿰매면서 보내고 있었다. 옷이 뜯어지거나 찢어지면 바늘과 실로 꿰맬 수가 있겠지만 마음에 난 그 구멍은 어느 누가 꿰맬 수 있겠는가.

그녀의 맞은편에 열서너 살쯤 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이 소년은 매우 청수(淸秀)하게 생겼고, 크고 흑백이 분명한 두 눈은 그를 한층 더 총명하게 보이게 하였다. 하지만 안색은 매우 창백했다. 소년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채 글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가 비록 어리기는 했지만 이미 고독을 참을 수 있는 인내심을 키우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은 인영은 창가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의 빛나는 두 눈엔 어느새 이슬과 같은 눈물이 고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린 소년이 갑자기 책을 내려놓더니 고개를 들어 멍하니 등잔불을 바라보았다. 부인도 이때 바느질을 멈추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따스한 빛이 새어 나왔다.

"천강! 너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어린 소년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언제쯤 돌아오실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순간 여인의 손이 떨려 바늘에 손가락을 찔렸다. 하지만 여인은 조금도 아픈 기색이 없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아픔은 가슴에 있었던 것이다.

어린 소년이 다시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께선 왜 갑자기 떠나신 것이지요? 그리고 일 년이 지나도록 어째서 아무 소식도 없는 것이지요?"

여인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가볍게 탄식을 터뜨렸다.

"너의 아버님께서 떠나실 땐 이 에미도 몰랐단다."

어린 소년의 두 눈에서 일순 강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하지만 저는 아버님께서 무엇 때문에 갑자기 떠난 것인지 알고 있어요."

여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볍게 소리쳤다.

"아직 어린 네가 무엇을 안다는 것이냐!"

어린 소년은 씁쓸하면서도 낭랑하게 말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선 초류빈이 복수할까 봐 두려워 떠나신 것이에요."

이렇게 말한 소년은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아버님께선 초류빈이라는 이름을 들으실 때마다 안색이 변하셨지요."

여인은 무엇인가 말하려 했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탄식을 터뜨렸다. 이 여인은 어린 자식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어쩌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린 소년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초류빈은 시종 오지 않았는데, 어째서 어머님을 한번 만나러 오지도 않는 것인가요?"

여인의 얼굴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이 어머니를 만나러 오겠느냐?"

어린 소년은 씁쓸히 웃었다.

"저는 그 사람이 어머님과 절친했던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안 그렇습니까?"

그러자 여인의 하얗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녀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날이 곧 밝을 것 같은데 어서 가서 자지 않고 무얼 하느냐?"

어린 소년은 두 눈을 깜박거리면서 말했다.

"제가 잠을 자지 않는 것은 어머님과 같이 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머님께선 요 이 년 사이에 한시도 주무신 적이 없으신데 소자의 마음까지도....."

여인은 서서히 두 눈을 감았다. 감긴 눈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린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가서 자겠어요. 내일은 어머님 생신이신데 일찍 일어나야지요."

그러더니 여인에게 다가가 뺨에다 대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어머님께서도 그만 주무세요. 안녕히 주무십시오."

이렇게 인사를 한 어린 소년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방 밖으로 걸어나왔다. 방문 밖으로 나온 소년의 얼굴에서 일순간 웃음이 사라지고 대신 두 눈에서 원한의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초류빈,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두려워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결코 당신이 두렵지 않소. 언젠가 당신은 반드시 나의 손에 죽게 될 것이오."

이렇게 중얼거린 소년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편 방 안에 있는 여인은 아들이 나가자 두 눈에 고통의 빛을 담았다.

그녀에게 자식이란 이 아이 하나뿐이다. 어린 소년은 그녀의 생명과도 같은 존재로서 그 아이가 어떠한 짓이나 어떠한 말을 한다고 해도 그녀는 역시 마찬가지로 사랑해 줄 것이다. 어머니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무상한 것이며 아무런 조건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아 등잔불을 더욱 밝게 해 놓았다. 그녀는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매번 밤만 되면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 절로 두려움이 생긴다.

바로 이때

"콜록!"

창 밖에서 가벼운 기침소리가 난 것을 그녀는 들었다. 그녀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런 여인의 두 눈에선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분간할 수 없는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열었다.

"누구시지요?"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손이 떨리듯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창 밖의 자욱한 안개로 인해 문자 그대로 오리무중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인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처량한 어조로 나직이 말했다.

"저는 당신이 온 것을 알고 있어요. 기왕 왔으면 어째서 저를 만나지 않고 피하는 것이지요?"

밖에선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여인은 장탄식을 터뜨리더니 다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와 만나지 않으신다고 해도 당신을 탓하진 않겠어요. 우리는 당신에게 미안해 하고 있으니까요. 진심이에요, 정말로."

그녀의 음성은 점점 낮아졌다. 또 얼마쯤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방 안의 불을 끄자 사방은 온통 어둠에 싸이고 말았다. 여명이 밝아을 때의 어둠은 어느 때보다도 더 어둡다. 그러나 어둠이 걷히고 여명이 밝아오는 천연적인 원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어둠과 함께 찾아왔던 안개도 서서히 걷히기 시작할 때 누각 앞에 있는 오동나무 뒤에서 한 인영이 서서히 그 모습을 나타냈다. 인영은 마치 석상과 같이 오동나무 뒤에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머리와 옷은 안개에 의해 축축히 젖어 있었으며, 멍청하게 서서 누각 위의 창문을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피로에 지쳐 넋을 잃고 있었고 또 더할 수 없이 초췌해 보였다. 그는 바로 어젯밤에 유령과 같이 안개를 뚫고 나타났던 사람이었으며 바로 손꼽추의 주점에서 기거해 왔던 그 술주정뱅이였다. 그는 비록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터져나오는 슬픔을 짓씹고 있었다.

'벽운! 벽운, 당신은 나에게 미안해 할 것이 하나도 없소.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소.....'

이렇게 속으로 외치는 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내 비록 당신을 만날 수가 없지만 지난 이 년 동안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당신 부근에서 당신을 보호하고 있었소.'

이때 동녘 하늘에서 크고 붉은 태양이 떠올라 날이 완전히 밝아졌다. 술주정뱅이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계속 기침을 했다.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큰 장원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과거 웅장했던 대청도 지금은 먼지와 거미줄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한편 여인은 창문을 닫은 채 기척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초조함으로 긴장이 되어 있었다. 얼마를 기다려도 밖에서 기척이 없자 그녀는 뜬눈으로 또 밤을 지새웠다. 장원의 창문은 비바람에 의해 변색이 되고 창호지도 다 찢겨 있었다.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힘없이 서서히 계단을 내려와 앞뜰로 갔다. 앞뜰은 뒤뜰보다 더욱 황량하고 어지러웠다. 유독 대문 옆에 있는 행랑만이 문과 창틀이 퇴색된 채 그대로 옛 모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 전성기의 휘황찬란했던 이 궁궐과 같은 장원이 단 이 년 사이에 이렇게 폐허가 되어 버릴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인들 했겠는가.

술주정뱅이는 다시 허리를 구부려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이때, 햇빛이 그의 전신을 감싸듯 비추어 주었다.

본래 검었던 그의 머리카락이 하룻밤 사이에 하얗게 변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기침이 멎자 서서히 행랑방을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