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4 소이비도 제1권 악惡과 원怨





악(惡)과 원(怨)



지난 며칠 동안 내리 퍼붓던 눈으로 지상엔 햇빛 한 줄기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우연히 거세게 퍼붓던 눈이 멈추고 태양이 찬란하게 빛났다.

온 대지에 햇빛이 비치고 있었지만 초류빈이 있는 방에는 한 가닥도 스며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어둠만이 존재하는, 낮과 밤을 통 구분할 수 없는 굴 속에 그는 갇혀 있었다. 그러나 초류빈은 실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초류빈은 이 세상의 많은 곳이 평생 동안 햇빛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이 실망이라는 것에 대해 오래 전부터 습관이 되어 버렸던 것이었다. 또한 그는 전칠과 조정의가 자기를 어떻게 대해 왔는지에 대해서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무튼 그들이 어떻게 자기를 대하든, 그리고 어떻게 생각을 하든 생각조차도 하기 싫었다.

지금 전칠 그들은 초류빈을 음침한 방 속에다 감금시켜 놓고 소림사의 중들을 데리고 진효의 부자를 만나러 가면서 호천강을 시켜 그를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초류빈은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호천강을 나무라지 않았다. 호천강에게는 그 나름대로 고초가 있었고 또 초류빈에게는 그를 어떻게 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지금 초류빈이 의식하고 있는 것이라면 낭천이 영원히 자기를 구하러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낭천의 검법이 비록 빠르기는 해도 무공에는 그나름대로의 허다한 약점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낭천은 대전의 경험이 적어 만약 전칠이나 심미 대사와 같은 강적과 마주친다면 일검에 득수는커녕 어쩌면 영원히 승리를 할 수 없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약 이삼 년만 지나면 낭천은 자신의 무공에 대해 약점을 전부 터득할 것이니까 그때는 아마 온 천하에 그를 이길 수 있는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초류빈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이삼 년을 더 살아야 했다.

땅바닥이 어찌나 차가웠던지 싸늘한 한기가 뼛속 깊이 파고들어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차가운 한기에 의해 초류빈은 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타오르도록, 그리고 벌겋게 붓도록 나오는 기침은 초류빈으로 하여금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이런 고통쯤은 참을 수 있었으나 온몸을 덥힐 수 있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욕망이 되어 버렸다.

만약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이런 운명적인 고통을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류빈은 웃었다. 그는 세상 일이 변하는 것에 이상한 재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원래 그의 소유였고 모든 것이 그의 지휘 아래 행사되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타인에 의해 도적으로 몰려 개처럼 이 어두운 방구석에 갇히게 되었으니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런 결과는 그 누가 또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한가닥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렇다면 조정의가 일각도 기다리지 못하고 곧 자신을 죽이려고 한단 말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초류빈은 나타난 사람이 조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초류빈이 막 코끝을 자극시키는 한 줄기의 술냄새를 맡은 것과 동시에 술을 든 한 손이 문틈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들어온 손은 매우 작았고 붉은 옷소매가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초류빈은 침을 꿀꺽 삼키며 나직하게 소리쳤다.

"천강, 바로 너였구나!"

그러자 그 작은 손은 다시 뒤로 물러나더니 두 손으로 술잔을 받쳐든 채 걸어들어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난 지금 아저씨가 틀림없이 술을 마시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가져왔어요. 그렇지요?"

"내가 술을 마시고 싶다는 것을 알고 술을 가져온 것이라고?"

호천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초류빈에게 내밀었다.

초류빈이 막 입을 벌리려고 할 때 호천강은 갑자기 술잔을 거둬들이고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만약 이 술이 무엇인지 알아맞춘다면 드리겠습니다."

초류빈은 지그시 눈을 감고는 코를 벌름거리며 술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이것은 바로 진년(陳年)의 죽엽청이 아니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지. 만약 내가 이 술냄새를 진작 맡아 보지 못했다면 이미 죽었어야 했다."

호천강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이 아저씨더러 술과 여자에 대해선 아주 귀신이라고 하더니 정말이군요. 그러나 이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내게 한마디 대답을 해주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흐르던 호천강의 미소가 음침하게 변했다.

"당신은 나의 아버님과 대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호천강은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몹시 두려운 듯 내뱉었다.

"제 어머니가 혹시 당신을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갑자기 초류빈은 안색이 싹 변해 눈살을 찌푸렸다.

"오냐, 이것도 마땅히 네가 물어봐야 할 질문이냐?"

호천강은 분개한 어투로 급급히 소리쳤다.

"내가 어째서 물어보지 못합니까? 자기 어머니에 대한 일은 아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초류빈은 매우 화가 난 어조로 소리쳤다.

"너는 너의 어머니가 온 심혈을 기울여 널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말이냐? 그런데 어째서 너는 그런 어머니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냐?"

"흥, 나를 속일 생각은 말라구요.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든 날 속이지는 못할 겁니다!"

호천강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이를 악물었다.

"어머님께선 당신의 얘기만 꺼내면 방문을 닫고 혼자서 웁니다. 전날 제가 죽을 뻔했던 적에도 그처럼 상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호천강의 울부짖음이 계속되는 동안 초류빈의 마음은 진흙 덩어리로 변해 남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것 같았다.

초류빈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떼었다.

"천강, 내 너에게 한 가지 일러둘 것이 있다. 너는 이 세상 천지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의심해도 되지만 네 어머니만은 절대 의심해선 안 된다. 너의 어머니는 남에게 추호도 의심받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다."

초류빈은 눈길을 내리깔며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니 어서 이 술을 가지고 나가거라."

호천강은 벌떡 일어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 술은 당신에게 주려고 가지고 온 것인데 도로 가지고 가라고요?"

그는 갑자기 손을 내뻗어 그 술을 몽땅 초류빈의 얼굴에다 쏟아 버렸다.

그러나 초류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너는 아직도 어린애라서 이해를 못한다. 그러니 내 결코 널 책망하지 않겠다."

"내가 만약 어린애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날 어떻게 할 작정이었습니까?"

호천강은 소리치며 갑자기 허리춤에서 칼을 뽑더니 그것을 초류빈의 얼굴에다 대고 마구 휘둘렀다.

"잘 보셨습니까? 이것은 바로 당신의 비도입니다. 어머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길 내가 당신의 칼을 지니고 있으면 바로 호신부나 마찬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날 보호할 수가 없습니다."

초류빈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맞았다. 칼이란 본래부터가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지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순간 호천강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당신이 날 폐인으로 만들었으니 지금 나도 당신을 나와 똑같은 죄를 받게 하겠어요. 당신을....."

순간, 문 밖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천강아, 너 그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이 음성은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몹시 부드러웠다. 그러나 초류빈과 호천강은 이 음성을 듣는 순간 그만 안색이 크게 변했다.

호천강은 급급히 칼을 거두고 얼른 어린애와 같은 순진한 미소를 떠올렸다.

"어머님, 저 이 안에 있어요. 저는 초아저씨가 술을 마시고 싶어하시길래 가져왔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부르시는 바람에 술을 몽땅 초아저씨께 쏟고 말았어요."

호천강이 이 말을 끝냈을 때 설벽운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설벽운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 눈 속에는 비통과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 그러나 호천강이 달려간 순간 그녀의 눈동자는 이내 부드럽게 변했다.

"초아저씨는 지금 술을 마시고 싶지 않으시단다. 그리고 너도 잠을 잘 시간이니 어서 가자."

"어머님, 초아저씬 분명히 남에게 누명을 쓴 것일 텐데 어째서 우린 그를 구하지 않는 겁니까?"

설벽운이 가볍게 꾸짖었다

"어린아이들은 함부로 참견하는 것이 아니다. 자, 어서 가서 자거라."

호천강은 몸을 돌려 초류빈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아저씨,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일 또 술을 가져올게요."

초류빈은 너무나 상반된 호천강의 이 웃음에 절로 손발에 식은땀을 흘렸다.

설벽운이 유유히 탄식을 내뿜으며 입을 떼었다.

"저는 본래 이 아이가 당신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 이 애의 태도를 보니...이제야 저는 마음을 놓겠어요. 이 애는 비록 엉뚱한 짓을 곧잘 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지만 나쁜 아이는 아니에요."

초류빈은 단지 쓰디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설벽운의 이 모성애가 가득찬 음성을 듣고 또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또 초류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랑이라는 것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그 중에서도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더욱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벽운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말을 토해내었다.

"당신은 원래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인데 지금은 어째서 그런가요?"

초류빈은 그저 목구멍이 꽉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벽운이 다시 매몰찬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당신은 내게 절대로 소하의 집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셨죠? 그런데 그들은 바로 당신을 소하의 집에서 찾아내었어요."

초류빈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웃을 수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웃고 있었다.

초류빈은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이 집은 십여 년 전에 건립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소?"

설벽운은 엉뚱한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 집은 이미 오래되어 지붕도 창문도 모두 썩었소. 과연...십여 년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은 것이오. 십여 년 동안 이 집은 모두 폐허가 되었는데 하물며 사람이란 또 어떻게 되었겠소?"

설벽운은 의식적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초류빈이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때는 바로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초류빈은 아직도 비록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초류빈은 눈물이 왈칵 치밀었다. 흐르는 눈물을 참기 위해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어느 틈엔가 설벽운이 되돌아 와서 자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초류빈은 더듬거리며 입을 떼었다.

"당신...당신은 어째서 가지 않았소?"

설벽운은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자세히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은 도대체 진짜 매화도예요, 아니에요?"

초류빈은 갑자기 입을 벌려 크게 웃어댔다.

"으하하하...내가 매화도인가 아닌가 하고...당신은 지금 내게 매화도냐고 물었소?"

설벽운은 약간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난 비록 당신을 매화도로 알고 있지는 않지만 당신이 직접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서예요."

"당신이 기왕 믿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묻는 거요? 난 이미 거짓말에 도통한 사람이라 다시 물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이오? 내가 당신을 한 번 속일 수 있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속일 수 있는 거요."

설벽운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려가더니 나중엔 몸까지도 부르르 떨었다. 한참 동안 경련을 일으키며 초류빈을 쏘아보고 있던 설벽운은 이윽고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을 놓아주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이번에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마세요. 알겠어요?"

초류빈은 안색이 변해 급급히 소리쳤다.

"안 되오! 당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내가 당신더러 나를 구하러 오라고 한 것인지 아시오? 당신은 도대체 나라는 인간을 어떻게 보았소?"

그러나 설벽운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의 몸을 돌려 혈도를 풀어주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싸늘한 외침이 두 사람의 뒤에서 터져나왔다.

"벽운, 지금 뭘 하려는 거요?"

이것은 바로 그녀의 남편 호유성의 목소리였다.

설벽운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한마디 또렷하게 내뱉었다.

"제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당신은 모르신다는 말씀인가요?"

"그...그러나....."

호유성이 말끝을 흐리자 설벽운은 싸늘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뭐죠? 이것은 바로 당신이 했어야 하는 일이에요. 당신은 그가 우리에게 베풀어 준 은혜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당신은 옛날의 그 일을 잊었다는 말이에요? 그가 죽는 것을 보고만 있겠다는 거예요?"

설벽운은 부르르 몸을 떨더니 더욱 싸늘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당신이 기왕 하지 못할 일이라면 내가 하겠어요. 그래도 당신은 날 막을 작정이세요?"

호유성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자기의 가슴을 마구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렇소! 난 겁이 나서 못하겠소. 난 담력이 없소. 난 사내대장부가 아니오.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이 일을 하고 난 후를 생각해 보았소? 만약 그가 달아나면 그들이 우리를 가만둘 것 같소?"

"아...아....."

설벽운은 갑자기 몸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더니 눈앞의 호유성이 마치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눈삐ㅊ이 새로워지는 것이었다.

"당신은 변했군요...옛날의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렇소! 난 어쩌면 변했을지도 모르오. 왜냐하면 난 지금 처자가 있는 몸이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먼저 그들이 나 때문에....."

호유성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설벽운이 갑자기 목을 놓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는 자식보다 그 어떤 것이라도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없다.

이때 호유성이 갑자기 초류빈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현제, 정말 미안하네. 다만 날 용서해 주길 바랄 뿐일세."

초류빈은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형님을 용서해 달라고요? 난 지금 형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형님에게 말을 했지만 이 일은 형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입니다. 내가 만약 이곳을 나가고 싶어한다면 내게도 방법이 있으므로 구태여 당신들이 날 구해 주지 않아도 됩니다."

초류빈의 시선은 아직도 자기의 발끝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그들을 바라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흐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제, 자네의 고초는 내 이미 알고 있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보증할 수 있는 게 있네. 그들은 절대 자네를 죽이지 않을 걸세. 자네가 심호 대사만 만날 수 있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걸세."

초류빈은 호유성의 말에 눈살을 짙게 찌푸렸다.

"심호 대사? 그렇다면 그들이 날 소림사로 보낸다는 말입니까?"

호유성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진중은 비록 심호 대사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심호 대사는 누명을 쓴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않을 것일세. 그리고 백요생 선배님도 지금 소림사에 계시니 그들은 분명히 자네를 위해 공도를 지켜주실 걸세."

초류빈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전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전칠은 한참 동안이나 그를 바라보며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전칠이 나타나자 설벽운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에 천천히 걸어나갔다.

밖에서 밤바람이 싸늘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설벽운은 몇 걸음 걸어나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엄중한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강아, 이리 나오너라."

호천강은 때마침 집 뒤에 숨어 있다가 그 말을 듣자 얼른 달려나오며 웃었다.

"어머님, 소자는 잠이 오지 않아서...설벽운은 갑자기 싸늘한 음성으로 다그쳤다.

"그래서 넌 그들을 전부 이곳으로 데리고 왔구나, 그렇지?"

호천강은 활짝 웃으며 달려나오다가 갑자기 어머니 얼굴이 음침하게 변한 것을 보고는 금방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설벽운은 조용히 호천강을 바라보았다. 눈빛의 이 아이는 그녀의 고통과 함께 태어난 아이이자 그녀의 생명이며 혈육인 것이다. 어느 새 설벽운의 창백한 얼굴에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설벽운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원한이란 은혜보다 잊기가 어려운 것일까....."

사실 남이 베풀어 준 은혜를 잊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지만 원한을 잊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은 어디까지나 잊을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철전갑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사당 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사당 한가운데는 마지막 불길인 듯 희미한 불씨가 재와 함께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장작개비를 넣는 사람이 없었다.

낭천 역시 그림처럼 조용히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철전갑이 한스러운 듯 말을 토해내었다.

"내 이미 생각을 해 보았지만 당신이 벌써 그 매화도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절대 승인하지 않을 것이오. 몇 날 며칠을 굶은 이리 떼가 고깃덩어리를 보고 어떻게 남에게 양보를 해 줄 수 있다는 말이오?"

낭천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아무리 권고를 해도 나는 기필코 가고야 말 것이오."

"다행히 당신이 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던들 그 사람들은 매화도의 진면목을 영원히 파악하지 못했을 거요."

말을 끝내고 철전갑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낭천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정말로 우리집 도련님을 보지 못했소?"

"그렇소."

철전갑은 커져가는 불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일까....."

"그는 아마도 영원히 남들이 자기를 걱정해 주길 원치 않을 것이오."

철전갑은 그 말에 수긍이 가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그 사람들은 비록 그를 눈에 가시로 여기고 있지만 그의 몸에 있는 털끝 하나라도 손을 대지 못할 거요."

철전갑은 다시 두어 바퀴 배회를 하고 사당 문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날이 밝았으니 이제 난 떠나야겠소."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철전갑은 돌아서려다가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만약 우리 도련님을 보시면 이 철전갑이 은혜와 원수를 밝혀내는 즉시 꼭 다시 돌아와 그를 찾겠다고 전해주시오."

"알겠소."

철전갑은 낭천의 야윈 얼굴을 세심히 바라보며 포권을 올렸다.

"그렇다면 난 이만 떠나겠소."

철전갑의 두 눈에는 비록 떠나길 꺼려하는 깊은 정이 서려 있었으나 막상 몸을 돌렸을 때에는 두번 다시 되돌아 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낭천 역시 움직이지 않고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맑은 눈에는 뿌연 안개가 서려 있었다. 우정을 원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낭천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는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으나 두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은 끝이 없이 흘러내려 얼핏 보아서는 화강석에 얼어붙은 한가닥 고드름 같았다.

낭천이 철전갑에게 초류빈에 대한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지 않았던 것은 철전갑이 초류빈 때문에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 보기 싫어서였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낭천 자신이 초류빈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친구를 위한 일인데 어찌 이 한 목숨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사당 안에는 한기가 점점 몰려들고 있었다. 불도 이미 꺼진 지 오래였고 석반에도 하얗게 찬서리가 끼었다. 그러나 낭천은 굳은 듯 그 석반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이 추위를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얇디얇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멸의 불!

바로 어떤 사람들의 마음에 이런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까닭에 세상은 아직도 암흑 속에 빠지지 않는 것이었고 뜨거운 피가 들끓는 사내대장부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새벽의 햇빛이 한 개의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낭천은 눈을 뜨지 않고 대신 소리내어 물었다.

"당신이었구려. 무슨 소식이라도 있소?"

그는 야수들보다 더욱 민감한 촉각을 갖고 있었다.

문 밖에 나타난 사람은 과연 그가 기다리고 있던 설소하였다.

설소하의 얼굴은 어떤 흥분으로 인해 붉게 물들여져 있었고 거칠게 숨을 내뿜고 있었다.

"좋은 소식이에요."

"좋은 소식이라고?"

낭천은 이 세상에 아직도 좋은 소식이 있다는 소리를 거의 믿을 수 없었다.

설소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비록 잠시 동안은 탈출할 수 없어도 최소한의 위험은 멀어졌어요."

"음....."

낭천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뿜자 설소하는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전칠, 그들은 이미 심미 대사의 뜻에 따라 그를 소림사로 보내기로 했답니다. 소림의 장문인인 심호 대사는 사람됨이 몹시 강직하답니다. 소문을 듣자니 백요생도 그곳에 있다는군요. 그러나 이 두 대사가 그의 누명을 벗겨주지 못한다면 그는 결국 끝장이에요."

낭천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급급히 다그쳤다.

"백요생? 백요생이 누구요?"

"그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운 자래요. 모르는 것이 없고 또 깨닫지 못한 것이 없대요. 그리고 소문을 듣자니 오직 그 한 사람만이 매화도의 진가를 구별해 낼 수 있다는군요."

낭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 설소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 싫은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설소하는 망설임없이 대꾸했다.

"혹 조정의와 같은 위선자가 아니에요?"

낭천은 얼굴에 한가닥 경멸의 웃음을 날렸다.

"위선자는 비록 악랄하지만 만사형통이라는 것이 제일 보기 싫은 것이오."

"만사형통? 당신은 혹 백요생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요?"

"그렇소.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총명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한마디가 남의 운명을 판가름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당신은 알고 있소?"

"하지만 다른 사람이 모두 말하길....."

낭천은 대뜸 싸늘하게 냉소를 날렸다.

"바로 남들이 그에게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이 결국은 그로 하여금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해야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이오. 그래서 여태까지 모르는 것이 없다고 우기게 된 거요."

설소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더듬거렸다.

"당신은...그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난 오직 아무것도 모르는 한 사람만 믿을 수 있소."

설소하는 그제서야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당신은 무척 재미있게 말을 하는군요. 만약 당신과 계속 대화를 나눈다면 나는 분명히 총명해질 거예요."

만약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려면 바로 그 상대로 하여금 자기가 그를 매우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줘야 하는 법이다. 바로 이 방법을 설소하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성공하지 못했다.

낭천은 마치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멀리 밖에 쌓인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더니 음침한 어조로 물어왔다.

"그들은 언제쯤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소?"

"내일 아침이에요."

"어째서 내일까지 기다린다는 거요?"

"오늘밤 그들은 심미 대사의 피로연을 개최하기 때문이에요."

낭천은 갑자기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그것 외에 또 다른 원인은 없소?"

"어째서 또 다른 원인이 있어야 하나요?"

낭천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심미 대사는 절대로 한 끼의 밥을 먹기 위해 지체하진 않을 거요."

"그래요. 그는 비록 한 끼의 밥을 먹기 위해 남는 것은 아니지만 꼭 남아 있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오늘밤엔 특별한 또 한 명의 손님이 있기 때문이에요."

낭천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누구요?"

"바로 철적 선생이에요."

낭천은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 듯 급급히 다그쳤다.

"철적 선생이라고? 도대체 그가 누구요?"

"아니 당신은 여태껏 그가 누군지도 모르나요?"

낭천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렇다면 난 또 어째서 그를 꼭 알아야만 하오?"

설소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분은 비록 오늘날 강호에서 제일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것과 맞먹기 때문이에요."

"음....."

낭천은 신음 비슷한 나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의 무공은 칠대문파의 장문인과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이 무림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고수라면 나도 적지 않게 만나보았소."

설소하는 급급히 주장을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달라요. 그는 비단 무공만 절묘할 뿐 아니라 철적 속에는 열세 개의 섭혼정(攝魂訂)이 숨겨져 있어요. 그리고 아주 전문적으로 사람의 혈도만 찍어요. 그래서 오늘날엔 이 사람을 무림에서 제일 유명한 점혈가로 부르고 있어요."

설소하는 말을 하면서 낭천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주시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낭천은 그녀를 실망시켰다.

낭천은 조금도 경황스러운 빛을 띠지 않고 웃었다.

"이제보니 그들이 철적 선생을 초빙한 것은 바로 나를 대적하기 위해서였군....."

설소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미 대사는 일을 매우 조심스럽게 처리하시기 때문에 그는 아마도....."

낭천은 얼른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는 내가 가서 초류빈을 구할까 봐 철적 선생을 초빙해 호위를 하려는 것이오?"

"하지만 그들이 찾지 않고 초빙하지 않아도 철적 선생은 꼭 올 거예요."

"그건 어째서요?"

"철적 선생의 사랑하는 처 여의(如意)가 매화도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에요."

낭천은 그 말을 듣자 두 눈을 크게 뜨며 허리에 찬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언제 도착할 예정이오?"

"그는 저녁에 식사를 하러 올 거래요."

"그렇다면 그들은 어쩌면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즉시 움직일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하지만 그들은 어쩌면 영원히 행동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오."

설소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영원히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요? 그건 무엇 때문이죠?"

"만약 내 처자가 어느 사람의 손에 죽었다면 난 절대로 그의 목숨을 붙여 놓고 소림으로 보내지 않을 것이오."

설소하는 경악에 찬 음성으로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철적 선생이 오자마자 초류빈에게 독수를 내릴까 봐 그러는 거군요?"

"그렇소....."

설소하는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틀림없어요. 그것도 가능성이 있는 말이에요. 만약 그가 정말로 출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심미 대사는 그를 막아내지 못할 거예요."

낭천은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자 당신의 말이 끝났으면 어서 가 보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철적 선생이 달려오기 전에 초탐화를 구해 주겠다는 건가요?"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무엇을 하든 당신과는 상관없으니 그만 가 보란 말이오."

설소하는 주춤거리며 선뜻 가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당신 한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그를 구해내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그가 무어라고 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이었다.

"난 당신의 무공이 무척 고강하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러나 전칠과 조정의도 결코 약하지는 않아요. 더욱 심미 대사도 오늘날 소림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고수인 까닭에....."

그러나 낭천은 냉랭하게 그녀를 쏘아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그의 그런 태도에 기가 꺾여 절로 말을 끊고는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흥운장에는 지금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은데 당신이 밝은 대낮에 그를 구하러 간다면 그것은 정말로....."

낭천은 퉁명스럽게 뒤이어 소리쳤다

"정말로 미친 짓이지."

설소하는 더욱 기가 꺾여 고개를 푹 숙이고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낭천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에겐 누구나 우연이 한 번씩 내비치는 적이 있소. 그건 절대 나쁜 일이 아니오."

"됐어요. 저는 당신의 뜻을 알겠어요. 그들은 감히 당신이 구하러 올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방비를 허술하게 할 것이고 그리고 어젯밤에 그들은 모두 밤을 지새웠기 때문에 모두 곯아떨어졌을 것이라는 거죠....."

낭천은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소리쳤다.

"당신은 정말 말이 많군."

설소하는 주춤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좋아요. 전 이만 입을 다물겠어요. 그러나 당신은 기필코 조심을 해야 해요.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나면 이 흥운장에 다른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겨울의 낮은 매우 짧다. 정오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늘은 점차 짙은 회색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을 밝히기엔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이 시각이 가장 조용한 시간이었다.

낭천은 이미 흥운장 건너편의 지붕 위에서 한 시진 가량을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마치 살갗을 에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미 추위에는 숙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열 살 때 여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모진 눈보라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두 시진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만약 그 여우를 잡지 못하면 굶어죽을 판이었다. 어떤 사람이건 간에 자기의 고통을 덜기 위해 고생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고통을 참는 것 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보통 사람이라면 이 일을 해내지 못할 것이다.

흥운장의 커다란 대문은 전날과 다름없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문 입구는 매우 조용한 것이 비단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 외에도 왕래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

낭천은 아직도 그 황야에서의 생활이 몸에 배여 있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그를 한 마리의 야수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그는 어느 한가지의 일이라도 오랫동안 기다렸고 또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오래 보면 볼수록 또 오래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착오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작은 착오라 할지라도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눈보라가 점점 거세어지는 속으로 한 명의 대한이 과감하게 흥운장 안에서 걸어나왔다. 비록 그와의 거리는 무척 멀었지만 낭천은 그 사람이 곰보라는 것을 상세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낭천은 이 곰보가 바로 설소하의 아버지라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하고 단지 이 곰보가 흥운장에서 이름이 난 장사꾼 같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 이유는 보통 장사꾼이라면 절대 이처럼 거만스럽게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 장사꾼 설륭 총관은 찻집을 찾아 그동안 쌓였던 이야기를 털어 놓으려고 총총히 거리로 나갔다. 그런데 막 담모퉁이를 돌아 들었을 때 갑자기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이 목을 겨누고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아니....."

낭천은 이런 사람들에겐 정말 검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검으로 하는 것이 말로 하는 편보다 효과가 있기 때문에 자행한 것이다.

"자, 내 말에 분명히 대답해라. 만약 대답을 못한다면 난 널 죽일 것이고 거짓으로 대답했다 해도 죽이고 말 것이다. 알겠느냐?"

설륭 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으나 검에 목이 베일까 봐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식은땀만 흘렸다.

낭천의 싸늘한 질문이 떨어졌다.

"초류빈은 아직도 흥운장 안에 있느냐?"

설륭 총관은 입술을 한참이나 놀리더니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네....."

"어디에 있느냐?"

"광...광 속에 갇혀 있습니다."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라."

설륭 총관은 이 말을 듣자 크게 질겁을 하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내가 어떻게 당신을 데리고 그곳으로 갈 수가 있단 말이오? 나...나는 죽어도 못하오."

"아니다, 너는 꼭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어."

낭천은 홀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살 속으로 찔러 넣었다. 그의 눈동자는 맹수의 굶주린 눈동자처럼 설륭총관의 피부를 뚫으며 냉랭히 입을 열었다.

"너는 꼭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 맞았지?"

설륭 총관은 겁에 질려 혼비백산한 채 다급히 시인했다.

"맞았소...맞았소....."

"좋다. 그렇다면 돌아서서 걸어라. 그리고 내가 바로 뒤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설륭 총관은 돌아서서 몇 발자국 걷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낡은 옷을 입으시오."

사실, 낭천이 입은 옷은 염소가죽으로 만든 것이라 사람의 눈을 끌기에 충분했다. 때문에 설륭 총관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확실히 좋은 묘안이었다.

두 사람은 흥운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설륭 총관이 처음으로 손님을 데려온 것이 아닌 까닭에 모든 살마들은 그들을 주의하지 않았다. 광은 주방과는 그리 멀지 않았으나 안방과 매우 사이가 떨어져 있었다.

설륭 총관이 작은 길로 해서 광까지 가는 동안 별다른 사람들은 만나지 않았다. 아니 만났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가 주방에 술을 가지러 가는 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이 일이 이처럼 성공하기 쉬울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이윽고 쓸쓸한 작은 마당에 건물과 좀 떨어진 한 칸의 집이 눈앞에 나타났다. 낡은 외짝 대문은 튼튼한 자물쇠로 굳게 채워져 있었다.

설륭 총관은 걸음을 멈추고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초...초대협께서는 바로 이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낭천은 싸늘하게 그를 윽박질렀다.

"날 속이지는 않았겠지?"

설륭 총관의 안색이 싹 질렸다.

"제가 어찌 감히 목숨을 가지고 농담을 하겠습니까?"

"좋다!"

이 말을 뱉어 놓기 무섭게 낭천은 설륭 총관을 기절시켜 버리고 앞으로 달려갔다.

13 소이비도 제1권 숙명





숙명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초류빈은 일부러 헛기침을 한 차례 토해내고 나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하여튼 모든 비겁한 일들을 나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다 해치웠소. 그러나 나는 여전히 협의의 인사라고 자칭하고 있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작스레 찰싹! 하는 소리가 나며 조정의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순간 호유성이 두 눈을 부릅뜬 채 괴성을 지르며 저지했다.

"안 되오. 호걸은 결코 죽여서는 안 되오. 또한 모욕을 주어서도 절대 안 되오."

"괜찮소. 그가 나의 따귀를 때렸다는 것을 나는 다만 미친 개에게 물렸다고밖에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초류빈은 여전히 비웃음을 안면 가득히 띤 채 담담하게 말했다.

조정의는 미간을 찌푸리며 괴성을 질렀다.

"설사 내가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고 해도 나는 너를 살지도 못하고 또한 죽지도 못하게 할 수가 있다."

"만약 나 초모인이 당신네들 같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위선자들을 무서워하고 있다면 난 벌써 목숨을 끊고 말았을 것이오."

초류빈은 의연한 모습으로 단호하게 말하며 차가운 코웃음을 터뜨렸다.

"흥! 당신네들에게 무슨 수단이 있는지 어디 한번 마음대로 써 보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정의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조정의는 살기어린 음성을 내뱉으며 손을 쓰려는 듯 장삼을 벗어던졌다.

호유성은 의자에 앉은 채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현제, 용서하게....."

초류빈은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형님, 이러지 마시오. 만약 나에게도 처자식이 있다면 아마 형님과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오."

순간, 조정의의 철장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미소만은 잃지 않았다.

대청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초류빈의 이런 당당한 모습을 보고 절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강호의 사람들이 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뼈대라고 말할 수가 있다.

초류빈 역시 그에게는 단단한 뼈대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대청 밖에서 누군가가 성급히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낭자, 지금 어디에서 돌아오는 길이오? 그리고 이분은?"

설소하가 헝클어진 머리와 의상 또한 매우 난잡한 모습을 한 채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한 명의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이 엄동설한의 계절인데도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름의 얇은 장삼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일에는 결코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듯이 허리를 편 채 몹시 여유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안색은 마치 화강암처럼 강인하면서도 냉막하여 다른 사람이 감히 항거를 할 수 없는 그런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어깨 뒤로 한 구의 시체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낭천을 보자 초류빈은 심히 격동되어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초류빈은 겉으로 애써 태연스러운 척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자신의 몰골을 낭천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낭천이 자기를 위하여 모험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때 낭천은 초류빈의 모습을 뚫어져라 하고 계속 쳐다보다가 냉막했던 얼굴에 격동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순간 초류빈에게 쏜살같이 달려갔다.

조정의는 저지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정의 역시 그의 쾌검 맛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손마운은 그러한 것도 모르고 대뜸 길을 막으며 호통을 쳤다.

"너는 누구냐? 대체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낭천은 두 눈을 치켜올리며 같이 큰소리로 외쳤다.

"너는 누구냐?"

이러한 뜻밖의 호통을 받은 공손마운은 분노를 금치 못하여 사지를 부르르 떨며 냉랭하게 말했다.

"너를 혼내주겠다!"

그는 싸늘한 대갈성과 함께 번개같이 낭천을 향해 출수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이를 말릴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조정의는 처음부터 그들이 싸우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칠 역시 남의 손을 빌려서 이 청년의 무공내력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소하는 초류빈의 몰골을 보자 깜짝 놀라 공손마운의 출수를 볼 수 있을 만큼 여유를 얻지 못했다. 호유성 역시 남의 일에 더 이상 참견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낭천이 피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순간, 펑! 하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공손마운의 정권이 낭천의 가슴팍에 정통으로 격중되고 말았다. 그러나 낭천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공손마운은 두 주먹을 꼭 쥔 채 허리가 구부러졌다.

낭천은 여전히 격동된 표정으로 초류빈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더니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는 당신의 친구요?"

초류빈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에게 저런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때 공손마운이 낭천의 등을 향하여 또다시 일장을 격출해 갔다.

순간 낭천은 잽싸게 몸을 돌렸다.

잇따라 펑! 하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공손마운의 몸이 여지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 군웅들은 일순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강호를 진동시킨 공손마운이 한 청년 앞에서 허수아비처럼 일격도 받아내지 못하다니.....

그러나 전칠은 껄껄 대소를 터뜨리며 말을 꺼냈다.

"아주 빠른 출수였소. 나는 전칠이라고 하오. 귀하의 존성대명은 무엇이며 나 전칠과 친구로 사귀지 않겠소?"

"나에게는 이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신과 같은 친구를 사귀고 싶지 않소."

낭천은 일언지하에 그의 청을 거절했다. 순간 다른 사람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칠만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젊은이는 역시 젊은이다운 패기가 있구려. 그러나 젊은이는 친구를 잘못 사귀었소."

낭천은 가늘게 신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전칠은 초류빈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그는 친구의 친구되는 분이오?"

"그렇소."

"친구는 그가 누구인지 아오?"

"물론."

그러자 전칠은 가벼운 미소를 흘리고 난 후 차분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꺼냈다.

"친구, 그가 매화도라는 것을 알고 있소?"

이러한 소리에 낭천은 다소 격동한 듯이 두 눈을 치켜올리며 다시 한번 큰소리로 외쳤다.

"매화도?"

전칠은 마른침을 한차례 삼키고 난 후 즉시 입을 열었다.

"이 일을 얘기하면 아마 믿기가 어려울 것이오. 그러나 사실이 눈앞에 있으니 어느 누구도 함부로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낭천은 초류빈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이렇게 노려보는 예리한 눈초리는 금방이라도 그의 심장을 도려낼 것만 같았다.

전칠은 차가운 시선을 급히 감추고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만약 귀하가 믿지 못하겠다면 그에게 직접 물어보시오."

낭천은 고개를 돌리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어볼 필요도 없소. 그는 절대로 매화도가 아니오."

"어째서?"

전칠이 급히 다그쳤다.

낭천은 어깨에 메고 있던 시체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으며 침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진짜 매화도는 여기에 있소."

이러한 소리를 듣자 군중들은 전부가 다 대경실색하여 두 눈을 크게 뜨고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시체는 언뜻 보아 매우 말라 보이는 듯한 사람이었다. 원래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신에 흑의를 걸치고 있었으며 입은 굳게 다문 상태로 축 늘어져 있었다. 또 시체의 목에 하나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전칠은 한참 동안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을 더듬더니 황망히 입을 열었다.

"이 자가 바로 매화도요?"

낭천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전철은 다시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떠올리며 여유있게 말했다.

"친구는 역시 나이가 젊구려. 어디 한번 생각을 해보시오. 만약 우리 모두가 시체를 하나 끌고 와서 그를 보고 매화도라고 한다면 누가 그 말을 믿겠소?"

예리한 시선으로 그들의 안색을 살피던 낭천이 안면을 실룩거리며 단호한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나는 결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오."

전칠은 안색을 굳히며 냉랭한 눈빛으로 낭천을 주시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으로 이 시체가 바로 분명히 매화도라는 것을 증명해 줄 수가 있소?"

"그의 입을 보시오."

전칠은 헛기침을 토해내며 비웃었다.

"내가 왜 그를 보아야 하오? 죽은 자가 무슨 수로 말을 한다고 그러시오."

순간 다른 사람들은 모두 대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다만 전칠의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설소하가 황급히 말을 꺼냈다.

"그의 말이 맞아요. 이 시체는 확실히 매화도예요."

전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꺼냈다.

"음, 그렇다면 시체가 낭자에게 알려준 것이란 말이오?"

"그래요."

설소하는 재빨리 대답을 한 후 말을 계속하였다.

"진중이 죽은 이유는 악독한 암기에 맞았기 때문이에요. 그의 공력으로 암기를 피해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그러나 오문천 같은 고인이 암기를 피할 수가 없었다는 것은 이상하잖아요?"

그러자 전칠은 설소하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며 의아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낭자께선 벌써 그가 누구인지 깨달았다는 말이오?"

설소하는 아름다운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래요. 매화도의 비밀은 바로 그의 입 속에 있어요."

그녀는 지체없이 품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어 시체의 입을 벌렸다. 시체의 입 속에는 한 자루의 시커먼 강관이 물려져 있었다.

설소하가 즉시 입을 열었다.

"그는 남과 이야기를 할 때 갑작스레 입으로 암기를 발하기 때문에 상대는 절대로 방비를 하지 못하지요."

"그의 입 속에 강관이 물려져 있는데 어떻게 남과 얘기를 할 수가 있소?"

전칠의 질문에 설소하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담고 대답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비밀 중의 비밀이에요. 그는 입으로는 살인을 하고 배로 말을 해요."

이 한마디는 어느 사람이라도 얼핏 듣기에 아주 우스꽝스러운 말이다.

그러나 전칠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확실히 뱃속으로 말을 하는 복화술(腹話術)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술법은 천축에서 전해 온 것이라고 한다.

설소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전칠에게 야릇한 눈빛으로 물었다.

"전칠야께서는 남과 겨룰 때 상대방의 어디를 노려보는가요?"

"물론 상대방의 신상이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소하는 즉시 다그쳤다.

"신상 어디인가요?"

전칠은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얘기했다.

"어깨와 손, 그리고 눈....."

설소하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됐어요. 고수가 대결을 하는데 있어서 상대방의 입을 노려보는 사람은 절대로 없을 것이에요."

설소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그리고 입을 노려보고 싸우는 것은 배밖에 없지요. 그 이유는 개는 입으로 상대방을 물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람은 절대로 입으로 상대방을 물지는 않지요."

이러한 말에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웃었다. 설소하 같은 미인의 입에서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다니.....

그러나 설소하의 안색은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때문에 매화도는 남들의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암산?하지요. 그리고 상대방이 고수이면 고수일수록 더욱더 그의 암산에 쉽게 걸려들지요. 그 이유는 고수일수록 상대방의 어깨 밑을 노려보기 때문이에요."

"낭자께서는 어떻게 이 비밀을 알아냈소?"

전칠은 일부러 헛기침을 한 차례 토해내고 나더니 엄중하게 물었다.

설소하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도 역시 그가 암기를 발출한 후에 알았어요."

"그렇다면....."

전칠은 문득 비릿한 조소가 번지는 얼굴로 낭천을 응시했다.

"그렇다면 이 청년은 개처럼 시종 그의 입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피할 수가 있었단 말이오?"

"전칠야께선 아직까지 그가 금사갑을 입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군요."

그녀의 말에 전칠은 두 눈을 번쩍 뜨며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서 마운대협께서 조금 전에 때렸다가 오히려 자신의 손이 더 아팠군."

설소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원래 냉향소축으로 가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밤이 가까워지자 문득 한 가지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제가 냉향소축으로 돌아가자마자 매화도가 즉시 나타났던 것이에요."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설소하는 다소 두려운 표정을 떠올리더니 다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 당시에 저는 그를 보지 못했어요. 제가 이상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몸을 돌렸을 때 그는 벌써 저의 혈도를 찍고 말았던 거예요."

전칠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 자의 경공술 또한 보통이 아니군....."

설소하는 길게 탄식을 터뜨리며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가 지니고 있는 신법은 유령처럼 빨라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는 벌써 저를 납치하여 밖으로 달아나고 있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깜짝 놀라서 대체 왜 이러느냐고 큰소리로 호통을 쳤지요."

"그가 무어라고 했소?"

설소하는 순간 이를 부드득 갈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는 아무런 소리도 않고 다만 음산하게 웃었을 뿐이에요."

전칠은 길게 숨을 몰아쉬고 나더니 이윽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제보니 그는 낭자에게 그가 바로 매화도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구려."

"그가 저에게 얘기해 주지 않아도 저는 직감적으로 그가 바로 매화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당시 저에게는 힘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삶조차 완전히 포기해 버린 상태였었지요."

여기에서 설소하는 잠시 숨을 돌리느라 말을 멈추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 갑자기 한 줄기의 인영이 저의 앞에 나타났지요."

전칠은 말이 끊어지는 틈을 타 즉시 입을 벌렸다.

"그 한 줄기의 인영이 바로 이 청년이었군요."

"그래요. 바로 그래요."

설소하는 낭천을 향해 뚫어지듯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이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너무나 빨리 왔어요. 매화도 역시 깜짝 놀란 듯이 저를 바닥에 그대로 팽개쳤지요...그리고 이분께서 '당신이 바로 매화도요?' 하고 물으니까 매화도가 말하기를 '매화도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 어쨌든 너는 죽을 놈인데...'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 속에서 갑자기 한 덩어리의 시커먼 물체가 격사되어 나왔지요."

설소하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지요. 시커먼 흑점들이 전부 다 공자님의 몸에 격중된 것을 보고 저분께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아깝게도 목숨을 잃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어요."

설소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저분께서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뿐만 아니라 저는 검광만 번쩍하는 것을 보았는데 매화도는 벌써 쓰러졌어요. 그 일검의 출수는 어찌나 빠른지 그의 눈앞에 가까이 있던 저도 자세하게 보지를 못할 정도였어요."

설소하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장내의 사람들 눈길은 삽시간에 낭천의 허리께에 있는 장검 쪽으로 몰려갔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장검이 매화도를 죽일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것이다.

전칠도 역시 검을 노려보았다. 일순 그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귀하, 혹시 벌써부터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오?"

낭천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그러자 전칠은 또다시 입가에 미소를 떠올라며 엄중하게 입을 열었다.

"귀하는 그를 보자마자 즉시 나서서 그가 매화도인가를 자세하게 물어보았소?"

"그렇소."

"그렇다면 귀하는 야행인을 보기만 하면 즉서 달려가서 매화도가 맞는가를 물어본단 말이오?"

낭천은 침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소."

전칠은 다시금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만약 한가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 우연히도 야행인을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무어라고 묻겠소?"

"내가 왜 묻소. 누가 누구이든 간에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소."

낭천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대꾸했다.

전칠은 갑자기 손을 탁 치면서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됐소. 귀하가 설사 묻는다고 해도 다만 그가 누구인가를 물었을 것이오...가령 예를 들면 귀하가 조금 전에 공손마운에게 물었을 때에도 다만 너는 누구냐고 했지요."

"나는 그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또 묻소?"

낭천의 말에 전칠은 정색을 하면서 시체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렇다면 귀하는 왜 그렇게 물었소? 그럼 귀하는 벌써부터 그 자 매화도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단 말이오?"

전칠은 길게 숨을 몰아쉬고 난 후에 다시 물었다.

"귀하는 벌써부터 그가 매화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또 물었소?"

"그 이유는 누군가가 나에게 며칠 안으로 매화도가 반드시 이 부근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오."

그러자 전칠은 초류빈을 날카롭게 노려보면서 즉시 다그쳤다.

"누가 당신에게 알려주었소? 매화도 자신이오? 아니면 매화도의 친구요?"

군중들은 이러한 소리를 듣자 일제히 초류빈을 주시했다. 그 이유는 그들 전부가 다 낭천과 초류빈이 미리 짜고서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칠은 군중들 앞으로 썩 나가더니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혹시 네가 바로 매화도가 아니냐?"

그러자 그 자는 당황하여 더듬거렸다.

"전...전....."

순간, 전칠은 재빠르게 그의 혈도를 찍어 버렸다.

"틀림없군. 네놈이 바로 매화도였군."

전칠은 교활한 눈빛을 빛내면서 군중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매화도는 누구나가 다 이렇게 쉽게 잡을 수가 있는 것이오."

군중들은 즉시 대소를 터뜨리며 서로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들은 전칠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두 눈을 부릅뜨며 고함쳤다.

"혹시 네가 바로 매화도가 아니냐!"

"너야말로 바로 매화도지?"

"무슨 매화도가 이렇게 많으냐!"

"매화도가 이렇게 쉽게 잡히다니...우리도 잡으러 가자."

순간 낭천은 안색이 새파래지면서 손을 검자루에 슬며시 대었다.

초류빈이 갑작스레 탄식을 터뜨리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그만 가 보게."

"가라고?"

낭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초류빈을 빤히 직시했다.

초류빈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꺼냈다.

"전칠야, 조대야 같은 대협께서 여기에 계시는데 어찌 매화도 같은 사람을 신출내기인 형제에게 빼앗기겠는가."

"나도 더 이상 저런 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지도 않소. 그런데 나의 검이....."

낭천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냉랭하게 말했다.

초류빈은 일부러 헛기침을 한 차례 토했다.

"흠, 설사 그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형제가 매화도를 살해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일세. 알겠나....."

"그렇구려! 그렇구려."

"유명해지려면 일찍 이 도리를 먼저 알고 있어야만 하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나처럼 매화도로 불리게 될 걸세."

낭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즉시 말을 받았다.

"당신의 말뜻은 내가 유명해지고 싶다면 반드시 먼저 말을 잘 들어야만 한다는 것이오?"

초류빈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자네가 자칭 대협이라고 하는 분들에게 양보를 해 주기만 하면 그분들은 자네를 가상한 젊은이라고 할 것이네."

여기까지 말하고 난 초류빈은 잠시 그를 주시하다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후에 또다시 긴 세월이 지나면 대협들은 모두가 세상을 하직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땐 자네가 유명해질 차례가 될 것일세."

그러자 낭천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나더니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웃어젖히는 낭천의 웃음은 여전히 매력적이면서 다소 적막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낭천은 이윽고 웃음을 멈추고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유명해질 수가 없겠구려."

초류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역시 좋은 일이기는 하지....."

낭천의 얼굴에도 은근히 미소가 떠올려지자 초류빈은 더욱더 활짝 얼굴을 폈다. 그들은 마치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얘기를 서로가 나누고 있는 듯 매우 유쾌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들 두 사람이 마치 무슨 정신병자라도 되는 것처럼.....

낭천은 초류빈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유명하든 말든 우리 이렇게 만났으니 오늘 술이나 한 잔 나누도록 합시다."

"술? 좋지. 그런데 오늘만큼은....."

초류빈은 반색을 하다 말고 고개를 내저었다.

전칠은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즉시 말끝을 이었다.

"오늘만큼은 결코 어울릴 수가 없지."

순간 낭천은 안색을 굳히고 검을 치켜올렸다.

"그건 대체 누가 한 소리요?"

이때 전칠이 손짓을 하자 대청 밖에서 즉시 두 명의 대한이 달려들어왔다. 그들의 수중에는 대도(大刀)가 들려져 있었다.

그 대도가 낭천을 향해 겨냥되고 있었다.

"전칠야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들은 싸늘한 얼굴로 낭천을 포위했다.

"전칠야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오직 죽음밖에 없을 것이다."

돌연, 날카로운 호통과 동시에 두 사람은 낭천의 좌우를 향하여 일제히 강맹하게 휩쓸어 왔다.

낭천은 냉랭한 표정으로 그들의 출수를 지켜보았다. 마치 움직이지 않는 석고상과도 같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순간 한광이 번쩍 하는가 싶더니 두 마디의 경악성이 들렸다. 동시에 두 자루의 대도가 허공으로 뜨며 눈 깜짝할 사이에 대청 위의 대들보에 그대로 꽂히고 말았다.

두 명의 대한은 제각기 오른손목을 꼭 쥐고 있었다. 한가닥의 선혈이 손가락 사이로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다. 한데 낭천의 검은 그대로 허리께에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가 언제 검을 뽑았는지 보지 못했다.

또한 어느 누구도 그의 검끝에 한 덩어리의 피가 응결되어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주 빠르고 정확한 검법이었다. 또한 전칠의 가벼운 웃음도 이 검끝의 선혈에 따라 응질되었다.

낭천은 당당하게 말을 꺼냈다.

"전칠야의 말은 비록 명령이었지만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의 검은 어느 누구의 명령도 듣지를 않소....."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계속했다.

"나의 검은 다만 피를 부를 줄밖에 모르오."

그의 말에 두 대한은 진저리를 치며 전율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의 오른팔에는 제각기 한 줄기의 시뻘건 혈흔이 남아 있었다.

만약 낭천의 출검이 옆으로 조금만 비켜졌다면 두 사람의 힘줄이 당장에 끊어져 버리고 말았으리라.....

낭천의 출검은 빠를 뿐만 아니라 또한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정확했다.

두 명의 대한들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더니 갑작스레 몸을 틀면서 대청 밖으로 황급히 달아났다. 예리한 검은 비록 말은 할 줄 모르나 세상의 어떠한 명령보다도 더 큰 효과가 있는 것이다.

낭천은 흡족한 눈길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또다시 초류빈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갑시다. 세상에서 우리를 저지할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니 술이나 마시러 갑시다."

초류빈이 채 대꾸도 하기 전에 호유성이 문득 말을 꺼냈다.

"당신이 그를 데리고 가겠다면 왜 먼저 그의 혈도를 풀어 주지 않소?"

순간, 낭천의 안면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문득 그날의 일이 생각났다. 그날 낭천이 그를 대신하여 홍한민을 잡아 손육의 주방에다 감금시키면서 새끼줄로 홍한민을 묶었었다.

그때 초류빈은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낭천이 왜 홍한민의 혈도를 찍어 버리지 않고 새끼줄로 묶었는가? 이제보니 낭천은 검법상의 빠른 속도를 지니고 있었을 뿐 점혈은 할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초류빈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을 않고 宣笭?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오늘은 내가 자네에게 술을 살 만큼 충분한 여유가 있지 않다네."

낭천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 한참 동안 신음을 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당신에게 사 주겠소."

"자네가 사온 술이 아니라면 나는 절대로 마시지 않겠네."

낭천은 한참 동안 그를 응시하였다. 냉막한 눈망울 속에 알 수 없는 한가닥의 고통스러움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역시 초류빈이 모험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초류빈을 업고 가야만 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초류빈을 업으면 마음대로 출수를 하지 못해 쉽사리 밖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된다.

전칠은 눈빛을 번뜩이면서 그들의 얼굴을 한참 동안 쓸어보다가 갑자기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초류빈은 이 늙은 여우가 벌써 낭천의 약점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의식하자 즉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당신, 그렇게 좋아할 필요는 없소. 그는 절대로 당신에게 속아넘어가지는 않을 것이오. 하물며 설사 그가 나를 등에 업고 있다 해도 당신네들 역시 그의 적수는 못 될 것이오. 또 나 초모인이 절대로 그를 따라가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여기까지 말을 한 초류빈은 일부러 헛기침을 한 차례 토해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이유는 내가 만약 따라가면 당신네들 역시 내가 매화도라고 단정을 내릴 테니까."

초류빈이 이렇게 말한 몇 마디는 물론 낭천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낭천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들이 당신보고 매화도라고 하면 당신이 곧 매화도가 된다는 것이오?"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든 개소리나 다름이 없지....."

"기왕 개소리라고 한다면 상관할 필요가 뭐 있겠소?"

낭천은 이미 결심을 했는지 잽싸게 허리를 굽혀 초류빈을 어깨에다 업었다.

바로 이 때였다. 전칠이 뒷짐을 지는 척하며 적시에 살수를 뻗어내었다.

순간 연곤이 수십 줄기의 한풍과 함께 낭천의 앞가슴 열한 군데의 혈도를 향해 날카롭게 기습해 갔던 것이다. 전칠의 연곤이 낭천의 몸에 정통으로 격출되기만 하면 낭천은 금시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낭천은 쉽사리 출검을 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벌써 살인을 할 자신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조정의는 순간 안색이 새파래져 고함치듯 입을 열었다.

"매화도를 납치하는 데 있어서는 강호의 신의를 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여러분, 속히 출수를 하시오!"

그러나 군중들은 낭천의 분투를 여전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전칠의 연곤혈수법은 강호의 일절이라고 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결코 낭천을 어쩌지는 못했다.

"매화도를 잡을 수가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영광이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왜 이러한 기회를 놓치려고 하는 것이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조정의가 우렁찬 대갈을 터뜨리며 재빨리 손을 뻗쳤다. 순간, 일곱 자루의 병기가 일제히 낭천의 등에 업혀져 있는 초류빈을 향해 날카롭게 찔러갔다.

설소하는 재빨리 호유성의 옆으로 달려가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다급한 음성을 토했다.

"왜, 그들을 저지하지 않아요?"

"나 역시 점혈수법에 당해 있소."

호유성은 길게 탄식을 터뜨리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이때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비명과 함께 세 사람이 비틀거렸다.

낭천의 검이 결국은 뽑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검은 비록 전칠을 꼭 죽이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선혈이 뿜어지는 곳에 따라 초류빈의 가죽옷에 어느 새 혈화가 튀었다. 순간 모든 병기들은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전칠의 연곤이 여전히 날카로운 독사처럼 낭천의 전신 요혈을 향해 기습해 오고 있는 것이었다. 전칠의 연곤은 장검보다 훨씬 더 길었다.

낭천은 등 뒤에 있는 초류빈을 마음으로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더 이상 전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초류빈 때문에 전진을 할 수가 없게 되자 반격은커녕 연신 수비에만 급급하는 길밖에 없었다.

설소하가 장탄식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역시 조대야께서는 협의무쌍하시군요."

조정의가 말을 받았다.

"노부가 벌써 얘기를 했다시피 매화도 같은 놈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강호의 도의를 찾을 필요는 절대 없소."

하면서 대청의 한쪽 구석으로 달려가더니 병기대 위에 걸려 있는 창을 집어 대뜸 커다란 창화를 그리며 초류빈의 등을 찔러갔다.

철면무사 조정의가 무림에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장창을 쓰는 데는 확실히 남달리 뛰어난 데가 있었다. 하물며 창은 모든 병기의 시조이고 곤은 모든 병기의 왕이니만큼 낭천의 짧은 검으로 긴 창과 연곤을 상대하기는 역시 부족했다. 그런데 또 하나 그 뒤에 초류빈이 업혀져 있으니.....

전칠은 자신의 특기로 남의 결점을 노렸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마지막 일격에 가서는 항상 빗나가 버리고 상대방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수십 초 후에야 그는 낭천의 보법(步法)이 굉장히 기이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자기의 마지막 일격에 분명히 격중되었는가 싶을 땐 반드시 빗나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전칠은 누구보다도 경험이 풍부한 사람에 속했다. 그러나 여전히 낭천의 보법 내력을 알아내지 못하자 마음속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이 청년의 내력이 보통이 아닌 것 같으니 내 꼭 원수를 갚을 필요는 없지....."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나자 그는 즉시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친구, 이제 그를 내려놓으시오. 그러지 않으면 그가 친구에게 누를 끼치기도 전에 친구가 먼저 그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이오."

설소하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어서 그를 내려놓으세요. 제가 보증을 하겠어요. 전칠야께서는 당신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에게 해를 가하고 싶은 마음도 없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말투는 부드러우면서도 관심이 깃든 음성이었다.

낭천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을 꺼냈다.

"당신들은 나보고 그를 내려놓으라고 하면서 왜 출수를 하시오?"

그러자 전칠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뒤로 칠 장 가량 물러났다. 조정의는 장창을 그대로 밀어내려다 말고 제대로 거두지 못한 채 창을 바닥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창! 하는 예리한 소리와 함께 창은 그대로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낭천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묵묵히 침묵을 지킨 채 초류빈을 의자에 앉히었다.

초류빈은 얼굴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그제서야 기침을 터뜨렸다. 초류빈은 낭천의 출수에 조금이라도 지장이 있을까 봐 계속 나오던 기침을 억지로 참았던 것이다.

낭천은 뜨거운 열혈이 용솟음치는 것을 억제하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잘못했소. 나는 자신만을 의식하고 여지껏 당신을 잊고 있었소."

"자네가 잘했든 잘못했든 간에 나는 자네에게 감격하고 있네."

초류빈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또다시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낭천은 그를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갑작스레 조정의를 노려보더니 이어 침중하게 말했다.

"지난날 당신을 죽이지 않았던 자신이 심히 원망스럽소."

하는 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벌써 일검이 나가고 말았다. 이 일검은 전광석화와 같이 빠르기 때문에 조정의는 미처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위기일발의 순간, 대청 밖에서 갑작스레 염불하는 소리와 함께 한덩어리의 흑영이 낭천의 등 뒤를 향해 날카롭게 격사되어 왔다.

낭천은 재빨리 몸을 돌려 수중에 있는 장검으로 잽싸게 찔렀다.

순간 챙 하는 소리와 함께 흑영이 검끝에 정통으로 격중되고 말았다. 원래 날아오던 그 흑영은 염주들이었다. 염주가 낭천의 검끝에 걸려 둔탁한 소리를 내는 동시에 낭천의 장검은 윙윙 하는 진동소리를 냈다. 검은 끊이지 않고 계속 진동을 울려댔다. 그러나 낭천의 몸은 마치 석상과 같이 그 자리에서 굳어진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날이 환하게 밝아 왔다. 희미한 섬광 아래에 다섯 명의 회포 승인이 대청 밖에서부터 서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맨 앞에 선 자는 눈썹이 눈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안색은 마치 어린애와 같이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그가 합장을 한 번 하자 낭천의 검끝에 걸려 있던 염주가 스르르 그의 수중으로 되돌아 갔다.

백미승인이 합장을 할 때 두 개의 손바닥은 마치 철판처럼 두껍고 단단하게 변했다.

조정의는 백미승인을 발견하자 즉시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말을 꺼냈다.

"대사께서 왕림하시는 것을 제대로 마중하지 못하여 정말 죄송하오!"

백미승인은 가벼운 미소로써 답례를 하고 낭천을 응시했다.

"이분 시주의 출검은 아주 빠르군요."

낭천은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고 난 후에 천천히 말을 꺼냈다.

"만약 본인의 검이 빠르지 못했다면 대사의 염주 아래 벌써 목숨을 잃어버렸을 것이오."

백미승인은 일부러 헛기침을 토해내었다.

"흠, 빈승은 시주가 쓸데없는 살생을 저지를까 봐 출수를 하였던 것이오."

백미승인은 갑자기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 말하기 시작했다.

"시주, 이 점만은 명심하여 두시오. 시주의 검은 비록 빠르나 불여래 법안만큼 빠르지는 못하오."

낭천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즉시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대사의 염주는 불여래 법안보다 더 빠르다는 말이오? 만약 내가 대사의 염주 아래 목숨을 잃었다면 또 한 가지의 살생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겠소."

조정의는 불쾌한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방자하오. 소림호법대사의 면전에서 어찌 그렇게 무례할 수가 있단 말이오?"

백미승인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며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괜찮소. 청년의 말솜씨는 원래부터가 예리한 도검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빈승은 아직까지 그대로 전달만 하오."

설소하가 갑작스레 끼여들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

"심미 대사께서 기왕 이해를 해 주셨으니 당신은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빨리 가 보세요."

조정의가 즉시 입을 열었다.

"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이 나의 갈길을 막기라도 하겠단 말이오?"

낭천은 가소롭다는 얼굴로 비웃음을 머금은 채 큰 걸음으로 밖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순간 조정의의 안색이 다시금 변하고 말았다.

"대사!"

전칠이 미간을 치켜올리며 즉시 입을 열었다.

"심미 대사께서는 항상 자비심이 돈독하신데 어찌 청년을 이런 곤경에 빠뜨리겠소.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둡시다."

조정의는 길게 탄식을 터뜨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가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용이한 일이오. 그러나 만약 그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 문제는 아마 달라지게 될 것이오."

심미 대사가 말했다.

"보고에 의하면 본문의 속가제자 진중이 중상을 입었다고 하던데 지금 어디에 있소?"

조정의는 초류빈을 노려보더니 곧이어 침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타깝게 대사께선 한 발 늦으셨소."

날은 또다시 밝았다. 길가에는 적지 않은 행인들이 무엇인가 서두르고 있는 듯 바쁘게들 다니고 있었다.

낭천은 어젯밤 자신이 걸었던 길을 다시 걸었다. 그의 걷는 걸음은 언뜻 보아 매우 경쾌한 인상을 풍겨 주었으나 심중은 심히 침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태였다.

이때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잠깐만....."

목소리는 마치 꾀꼬리와 같이 부드러웠다. 낭천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구인지 대뜸 알 수 있었다. 순간 가쁜 숨결과 담담한 향기가 그의 코끝에 은은하게 스며들어왔다. 갑작스레 설소하가 나타난 것이다.

설소하의 양 볼은 잘 익은 사과처럼 투명체로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길을 가던 행인들은 모두가 입을 벌리고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어떠한 자는 수중에 들고 가던 계란까지도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떨구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낭천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장과도 같았다.

설소하는 가까이 다가와 숨을 몰아쉬며 나직이 말했다.

"저...저는 당신에게 사과하러 왔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낭천은 그녀를 쏘아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당신이 나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소."

설소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낭천을 힐끗 보고 나더니 즉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너무나 파렴치하고 무례한 사람들이에요."

낭천은 설소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것은 당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오."

"그러나 당신이 저를 구해주셨으니 제가 어찌....."

"나는 당신을 구했고 그들은 결코 구해 주지 않았소. 그리고 내가 당신을 구해 준 이유는 당신보고 그들을 대신하여 나에게 사과를 하라고 한 것은 아니오."

그러자 설소하의 얼굴은 더욱더 빨개졌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도 못하고 결국은 무안만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낭천은 퉁명스레 다그쳐 물었다.

"당신은 내게 또 무슨 할 말이 있소?"

순간 설소하는 무어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굳어져 버린 채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추고 말았다.

"그럼...나중에....."

낭천이 다시 몸을 돌리려고 하자 설소하가 다급한 음성으로 저지했다.

"잠깐만, 할 말이 있어요."

그러나 낭천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묵묵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설소하는 냉랭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저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어디로 가야지만 당신을 찾을 수 있지요?"

낭천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를 찾을 필요는 없소."

순간 설소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야릇한 눈빛을 발했다.

"그렇다면 초탐화에게 무슨 불길한 사고가 생겼다고 해도 당신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요?"

낭천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며 대답해 주었다.

"당신은 서문 밖에 있는 심가사당을 알고 계시오?"

설소하는 비로소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모든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군요. 저는 이 성 안에서 오륙 년 동안을 살았어요."

"나는 바로 그 사당 안에서 살고 있소.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는 난 절대로 거기를 떠나지 않소."

"해가 진 후에는?"

낭천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하늘을 응시했다.

"당신, 잊지 마시오. 초류빈은 나의 친구요. 나에게는 결코 친구가 많지 않소. 그리고 그와 같은 친구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오. 그러니까 만약 그가 죽으면 이 세상은 아마 흥미가 없어질 거요."

"저는 벌써부터 오늘밤 당신이 돌아와서 반드시 그를 구하리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알아두세요."

설소하는 숨을 한껏 들이마신 후 말을 계속했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고 해도 역시 자기의 목숨만큼은 중요하지 못해요."

낭천은 무섭게 두 눈을 부릅뜨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이후부터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기를 바라고 싶소. 이번만은 내 못 들었던 것으로 해 두겠소."

12 소이비도 제1권 흘러간 세월





흘러간 세월



주위는 또다시 앞서의 정숙함을 되찾았다. 유룡생은 떠났다.

초류빈은 창 밖의 야색(夜色)을 한참 바라보다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젊은이, 나를 원망하지 말게. 사실 나는 자네를 구해 주고 있는 것이네. 만약 자네가 설소하와 함께 어울리면 자네의 일생은 완전히 끝나 버리고 마네."

그는 문득 설소하와 만나기로 했던 일이 생각나자 곧장 밖으로 나왔다. 그는 걷는 도중 유룡생이 떠나면서 하던 말을 생각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설소하를 좋아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오. 그녀는 벌써 오래 전부터 나와...나와...당신은 무엇 때문에 낡은 신발을 신으려 하오?'

그러나 초류빈은 이렇게 대꾸했었다.

'자고로 옛부터 헌 신발은 새 신발보다 신기가 편하다고 하네 .....'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초류빈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설소하를 정말로 그런 여자를 좋아할 필요가 있는가? 초류빈은 생각하면 할수록 웃음이 나왔다. 그가 대문 밖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앞길의 숲 속에서 벌써 두 명의 청의시녀가 두 개의 초롱불을 들고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초류빈은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설낭자께서 낭자들보고 마중하라고 한 것이오?"

"부인께서 우리들에게 상공님을 청하랍시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왼쪽의 청의소녀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초류빈은 뜻밖인 듯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부인?"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다그쳤다.

"어느 부인이오?"

왼쪽의 청의시녀가 재차 상냥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 장주에게는 한 분의 부인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오른쪽의 청의시녀가 뒤를 이었다.

"부인께선 상공께서 세속적인 예의를 싫어하시는 줄을 잘 알고 있어서 특별히 내당에다 몇 가지 안주를 마련했으니 어서 저희들을 따라오세요."

초류빈은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서 과거를 회상해 보았다.

그의 눈앞에 불현듯 설벽운의 영상이 떠올랐다.

십 년 전.

그 작은 누각은 그가 가끔 가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누각 안의 대리석으로 만든 식탁 위에는 항상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음식들이 아직까지도 그의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것들은 바로 벌꿀로 만든 운퇴(雲腿:요리의 일종)와 통닭을 튀긴 것 등이었다. 운퇴는 푸른 접시에 담겨져 있고 통닭은 녹색 접시에 담겨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문을 지나면 곧 그녀의 규방이 나타난다. 그녀가 규방에서 나타날 때는 항상 은은한 매화 향기를 풍겨 주곤 했었다.

지난 십 년 동안 그는 한 번도 그곳을 생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유는 만약 그렇지 않으면 호유성에게나 그녀에게나 전부 다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초류빈은 벌써 누각 앞에까지 당도한 자신을 발견했다.

누각의 창문을 통해 스며나오는 불빛이 매우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누각은 십여 년 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창살까지도 옛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십 년이란 세월은 결국 흘러갔다. 세월은 한번 흘러가면 다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초류빈은 주저했다. 그는 더 이상 이 누각으로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어제 있었던 일 이후 그녀가 대체 무엇 때문에 자기를 불렀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지금 그는 확실히 그녀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올라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를 찾든 간에 초류빈에게는 절대적으로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대리석으로 된 매끄럽고 반질반질한 식탁 위에는 벌써 그가 좋아하는 운퇴와 통닭이 놓여 있었다.

초류빈은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움찔 놀랐다.

지나간 십여 년 동안의 이별이 이 짤막한 순간에 또다시 십 년 전으로 되돌아 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규방쪽을 응시하였다. 돌연 초류빈의 심장이 방망이질을 하는 것처럼 펄떡펄떡 뛰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더 이상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아 즉시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설벽운의 나긋나긋한 소리가 들려왔다.

"앉으세요!"

음성, 그것은 십 년 전처럼 다정했다. 그러나 또 아주 생소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주렴으로 된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순간 초류빈은 호흡이 딱 멈춰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때 나타난 사람은 붉은 옷을 입고 창백한 얼굴을 한 호천강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규방 안에 있는 채 호천강에게 분부했다.

"어미가 한 말을 잊지 않았겠지? 속히 아저씨에게 술을 따라 드려라."

"예."

호천강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술을 따르면서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아저씨, 모든 것은 전부 소질의 잘못이옵니다. 아저씨, 이 소질의 실례된 점을 용서해 주십시오."

순간 초류빈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벽운, 벽운...당신이 나를 불러 온 이유가 바로 나에게 이런 쓰라린 고통을 주기 위함이오?"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어금니를 짓깨물었다.

호천강은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다시 또렷또렷하게 말을 꺼냈다.

"소질은 이후부터 더 이상 무공을 연마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사내대장부란 평생 동안 부모님의 슬하에서만 자랄 수는 없지 않아요? 아저씨는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소질에게 몇 가지 호신무술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호....."

초류빈은 암암리에 장탄식을 하면서 호천강에게 손을 뻗었다. 순간 한 자루의 작은 칼이 그의 식지와 중지 사이에서 나타났다. 설벽운은 규방 안에서 재빨리 명령했다.

"아저씨는 그 비도(飛刀)가 바로 호신부나 다름이 없으니 너는 속히 감사의 인사를 드려라!"

호천강은 즉시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초류빈은 호천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정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구나. 그런데 자식이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은.....'

침중한 분위기와 답답한 분위기. 침중하기는 고통스러울 정도였고 답답하기는 질식을 할 정도였다.

청의소녀는 호천강을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규방 안의 설벽운은 여전히 초류빈을 놓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초류빈을 여기에다 묶어 두려고 하는 걸까?

초류빈은 원래 예의에 구애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유독 여기에 들어오기만 하면 항상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

사랑이란 기묘한 것이라 때로는 총명하게 만들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둔하게 만들기도 한다.

밤은 서서히 깊어갔다. 설소하가 아직도 초류빈을 기다리고 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벽운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무슨 다른 볼일이 있나요?"

초류빈은 엉겁결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어...없소."

설벽운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소하를 만나본 적이 있지요?"

"그렇소. 두...두 번 만났소."

설벽운의 청량한 목소리가 초류빈의 고막을 간지럽혔다.

"소하는 아주 가련한 아이에요. 그 애는 신세가 처량할 뿐만 아니라 또 만약 당신이 그의 부친을 보았다면 아마 곧 그녀의 불행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초류빈은 신음 비슷한 소리를 이빨 사이로 흘려냈다.

"으음....."

그러자 설벽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느 해 제가 사신애(捨身崖)로 가서 소원을 빌고 있을 때 마침 그녀가 사신애 밑으로 뛰어내리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제가 간신히 그녀를 구해 주었어요. 한데 당신은 그녀가 왜 투신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알고 있나요?"

"모르겠소."

설벽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는 부친의 병 때문에 그랬어요."

설벽운은 잠시 멈추었다가 역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그런 딸을 낳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에요. 저는 그녀를 동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탄복을 하고 있어요."

초류빈은 할 말이 없어 신음소리만 연발할 뿐이었다.

설벽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녀는 용모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매우 총명해요. 그녀는 자?신의 출신이 너무 미천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전부 다 남들이 흉본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초류빈은 강경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마 누구도 그녀를 얕보지 못할 것이오."

설벽운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것도 그녀가 노력을 했던 것의 한 결실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또 마음도 약하여 저는 그녀가 남에게 사기를 당할까 봐 걱정을 하고 있어요."

순간, 초류빈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남들이 그녀에게 사기를 당하지 않는 것을 조물주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설벽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저는 그녀에게 행복한 가정이 있기를 바래요. 그녀가 강호를 계속 방황하다가는 남에게 희롱을 당할 우려가 있으니까요."

초류빈은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그런 말을 나에게 하시는 거요?"

설벽운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좀 격앙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가 왜 당신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지 당신은 정말 모르시는가요?"

초류빈은 잠시 규방쪽을 응시하다가 돌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소. 하하하...이제 난 알겠소."

그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원래 설벽운이 그를 여기에다 붙잡아놓은 이유는 바로 그와 설소하가 만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들이 밀회한다는 사실은 유룡생이 그녀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설벽운의 달콤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찌 되었든 우린 다년간의 친구예요.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하고 싶어요."

초류빈의 속은 쓰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뜻은 나에게 설소하를 찾아가지 말라는 것이오?"

설벽운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맞았어요."

초류빈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넌지시 물었다.

"당신은 내가 그녀에게 반했다고 생각하오?"

설벽운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당신의 뜻이야 어쨌든 다만 당신이 저의 부탁을 들어주기만 원해요."

초류빈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시고 나서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구제할 길 없는 건달이오. 만약 내가 그녀에게 찾아가면 해를 가하는 결과가 될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승낙을 한 것이지요?"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를 악물고 말을 꺼냈다.

"당신은 내가 항상 남에게 해를 끼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모르시오?"

이때 돌연 그녀의 섬섬옥수가 주렴에 뻗쳐졌다. 이 섬섬옥수는 부드럽고 또한 매우 예술적인 면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꼭 쥐었기 때문에 백옥 같은 손등 위에 파란 힘줄이 약간씩 솟아 나오기도 했다.

순간 주렴이 그대로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구슬이 바닥에 주르르 떨어져 흩어지고 말았다. 마치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음향과도 같이 말이다.

초류빈은 그 손을 한참 동안이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이젠 그만 물러가겠소."

설벽운의 손등에는 처음보다 힘줄이 더욱 세차게 솟아나왔다. 그녀는 몹시 격분된 상태인 듯했다. 그녀는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초류빈을 힐책했다.

"당신은 기왕에 떠나갔으면 그만인데 왜 다시 돌아왔어요?"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설벽운은 떨리는 목소리를 억제하느라고 잠시 말을 중단시켰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당신은 왜 이제 다시금 돌아와서 남의 가정에 불행하게도 파탄을 가지고 오는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초류빈의 굳게 다물었던 입술에 파르르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자 설벽운이 갑자기 주렴 뒤에서 튀어나오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의 아들에게 매를 가한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또 그녀에게 해를 가하려는 것인가요?"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갑작스레 변하는 그녀의 안색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격동함과 고통스러운 빛이 잔뜩 서려져 있는 듯했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침착하지 못한 표정을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오직 설소하가 그녀의 전부이기 때문이란 말인가?

초류빈은 고개조차 돌리지를 않았다. 돌리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돌릴 용기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을 향해 발을 옮기면서 마음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사실 당신은 나에게 부탁을 할 필요도 없소. 나는 원래부터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설벽운은 아래층을 향하여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초류빈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응시하고 있다가 갑자기 맥이 빠진 사람모양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연못에는 살얼음이 약간씩 얼었다.

붉은 난간이 살얼음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아마도 지금이 무더운 여름 날씨라고 하면 여기에는 은은한 연꽃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는 사람의 뼈를 에이는 듯한 한풍밖에 없었던 것이다.

초류빈은 멍청한 눈빛을 하고 계단 위에 걸터앉아 연못 가장자리의 살얼음을 응시하면서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 기왕에 떠났으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또다시 돌아왔나 ....."

초류빈이 자책하고 있을 때 먼 곳에서부터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여기에서 그는 냉향소축의 희미한 등불만을 계속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돌계단 위에 쌓여져 있는 적설은 그의 마음까지도 싸늘하게 해주X 었다. 초류빈은 또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연 냉향소축 쪽에서 인영이 번쩍하고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초류빈은 이러한 것을 보자 일초도 주저하지 않고 즉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어둠 속으로 날아간 인영을 향하여 황급히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렇게 급하게 쫓아가고 있는 초류빈의 신법은 마치 전광석화와 같이 빨랐다.

그러나 그가 냉향소축까지 쫓아갔을 때에 상대방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초류빈은 이러한 광경을 보자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초류빈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이러한 생각을 더듬고 있을 때였다. 그는 문득 두 눈을 치켜올렸다.

백설이 반사되는 곳에 초류빈은 지붕 위에 하나의 발자국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자국은 한쪽뿐이었으며 발 앞부분밖에 나지 않았다.

초류빈은 눈 위에 나 있는 이 발자국을 한참 동안 응시하며 무엇인가 생각을 더듬었다. 그러더니 지붕 밑으로 뛰어내렸다.

실내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초류빈은 주위를 이리저리 쓸어보고 난 후에 즉시 창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초류빈은 주위를 주저하지 않고 창문을 살짝 두들겼다.

"설낭자!"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초류빈은 아무런 기척도 없자 또다시 창문을 두들겼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초류빈은 이런 상황에 처해지자 다소 불안을 느낀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거침없이 실내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둥그런 식탁이 하나 놓여져 있었으며 그 위에 자기가 좋아하는 갈비와 통닭이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설소하 자신은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초류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주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그의 시선이 한 군데로 멈추어져 움직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다섯 개의 술잔이 식탁 위에 박혀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섯 개의 술잔이 나란히 박혀 있는 모습은 언뜻 보아서는 마치 한송이의 아름다운 매화와도 같았다.

이것은 바로 매화도의 독특한 표시였다.

그렇다면 설소하는 벌써 매화도의 수중에 잡히고 말았단 말인가? 이러한 생각이 미치자 초류빈은 식탁 위의 한쪽을 향하여 힘을 주어 눌렀다.

순간 다섯 개의 술잔들이 모두 튀어나왔다. 그러자 상 위에 그대로 나 있는 구멍은 매우 예리하게 보였다. 다섯 개의 술잔은 추호의 손상도 없었다.

이 식탁은 비록 돌로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다섯 개의 술잔을 추호의 손상도 없이 상 위에 그대로 박아 버린다는 것은 초류빈 자신까지도 해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매화도의 무공은 무서울 정도로 고강했다.

초류빈은 수중에 술잔을 들고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갑작스레 칙! 소리와 함께 식탁 위의 등불이 꺼지더니 잇따라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수십 줄기의 한광이 초류빈을 향해 격사되어 나왔다.

그러나 당금 무림에서 초류빈의 암기수법이 최고라고 하는데 어찌 이러한 암기들이 감히 당해낼 수가 있겠는가.....

초류빈은 신속하게 몸을 빙그르르 돌리는 순간 벌써 열 개에 달하는 암기를 받았다. 그리고 나머지 쉽사리 받아낼 수가 없었던 암기는 모두 옆으로 옮겨졌다. 이때 밖에서부터 길게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매화도, 도망을 가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말아라.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죽음을 받을 준비나 해라! 설사 네놈이 승천을 하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오늘밤만은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말소리가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다시 들려왔다.

"매화도, 솔직하게 알려 주겠다. 낙양부의 전칠께서도 달려 오셨다. 그리고 마운수, 공손대협, 그 뿐만 아니라 초대협, 호유성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조용히 해라!"

이렇게 짧은 한 마디밖에 안했지만 초류빈은 목소리로 보아 이 자가 바로 전칠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초류빈이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시 전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 기왕에 여기까지 오셨는데 왜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기만 하오?"

초류빈은 일부러 한 차례의 헛기침을 토해내면서 느긋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기왕 여러분께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소?"

그러자 밖에서 또다시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놈은 우리들을 실내까지 유인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오."

"매화도는 원래 도둑놈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모습을 드러낼 수가 있겠소."

"그렇소. 매화도는 확실히 도둑놈에 지나지 않소.

이러한 말로 저마다 웅성대고 있었다. 초류빈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채 이러한 소리를 듣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그렇소. 매화도는 확실히 도둑놈에 지나지 않소. 그런데 그러한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초류빈의 말소리가 끝나자 앞서의 우렁찬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렇다면 당신은 매화도가 아니란 말이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공손 대협, 그렇게 많이 물을 필요가 뭐 있겠소. 저 자가 바로 매화도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오."

조정의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하하하...조정의, 내 벌써부터 당신이 부린 수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소."

초류빈은 가소롭다는 듯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신속하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순간 밖에 있던 많은 군웅들은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모두들 덤벼들려고 했다.

호유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잠깐만 멈추시오! 이분은 내 형제로서 이름은 초류빈이라고 하오."

이때 벌써 초류빈은 조정의 앞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조대야의 이목은 정말 고명하오...만약 초모인의 행동이 민첩하지가 못했다면 아마 매화도를 대신하여 벌써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오."

순간 조정의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이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야밤의 삼경쯤에 귀하가 혼자서 도둑고양이처럼 이곳에 몰래 숨어 있는데 조모인이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소."

조정의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귀하의 병이 갑자기 나을 줄 내 어찌 알 수가 있었겠소 ....."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나 초모인은 도둑고양이처럼 여기에 올 필요는 없소. 나 초모인은 광명정대하게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가 있소. 하물며 조대야께서 어찌 여기의 주인이 나와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언할 수가 있겠소."

조정의는 차가운 냉소를 치며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귀하가 설낭자와 교분이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그러나 여기에 있는 분들은 모두가 설낭자께서 오늘밤은 여기에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초류빈은 가늘게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정의는 초류빈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냉랭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설낭자께서는 매화도를 피하기 위해 하오쯤에 벌씨 냉향소축에서 떠나가 버렸소."

"그렇다면 귀하가 먼저 자세하게 물어보고 난 후에 다시 출수를 해도 결코 늦지는 않았을 것이오."

조정의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을 더듬더니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매화도 같은 사람에게는 먼저 선수를 치는 길밖에 없소. 만약 그에게 잠시라도 여유를 주면 시간이 너무 늦게 될 것이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초류빈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먼저 선수를 치는 길밖에 없다...그렇다면 오늘 나 초모인이 귀하의 독수 아래에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결코 귀하를 원망할 필요는 없겠구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호유성이 헛기침을 한 차례 하고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어둠 속에서 잘못 보이는 것은 누구나가 가끔씩 있는 일이오. 그런데 하물며....."

조정의가 갑작스레 말을 가로챘다.

"하물며 나 조모인이 잘못 보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러자 초류빈이 두 눈을 치켜올리며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다그쳤다.

"잘못 보지는 않았다고? 그렇다면 조대야께서는 나 초모인이 바로 매화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오?"

"그것은 아직까지 단언을 할 수가 없소. 우리들이 알기로는 매화도는 경공술이 뛰어나고 또한 출수도 아주 빠르며 악랄하오. 그러나 그의 성이 장가인지 이가인지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소."

초류빈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렇소. 나 초모인 역시 지니고 있는 경공술이 매우 뛰어나고 출수 또한 늦지는 않은 편이오. 그리고 매화도가 다시 강호에 출현할 때에 나 초모인 역시 동시에 입관을 하였던 것이오."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초류빈은 잠시 말을 멈추다가 다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만약 나 초모인이 매화도가 아니라고 하면 그것이야 말로 이상한 일이 되고 말 것이오."

초류빈은 비웃음이 가득한 눈으로 조정의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조대야께서는 초모인이 매화도라고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왜 아직까지 출수를 하지 않는 것이오?"

조정의는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고 즉시 입을 열었다.

"일찍 출수를 하나 늦게 출수를 하나 전칠과 마운수 형께서 여기에 계시니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호유성은 그제서야 사건이 커진 것을 알고 안색이 변하여 황급히 끼여들었다.

"여러분, 이러지 마시오. 나 호유성이 자신의 목숨으로 분명히 보장을 하겠는데 초류빈은 절대로 매화도가 아닐 것이오."

순간 조정의는 안색을 굳히며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와 벌써 십 년씩이나 만나지를 못했는데 어찌 그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소?"

호유성은 일순 당황하는 듯했으나 이내 자신있게 대답했다.

"나는 그의 사람됨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또 믿고 있는 바이오....."

"자고로 옛날부터 사람은 겉모습을 보아서는 잘 모른다는 말이 있소."

이렇게 말을 한 자는 언뜻 보기에는 비록 환자처럼 보이고 안색 또한 매우 창백하게 보였지만 그러나 목소리는 심히 맑았다.

이 사람은 바로 온 천하에 명성을 떨쳤던 공손마운이었던 것이다.

공손마운의 등 뒤에 원의 차림을 한 자가 있었다.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받았다.

"그렇소. 나 전칠 역시 초탐화와 수십 년 전에 교분이 있었소. 그런데 지금 이러한 일이 발생했으니 나 전모인도 할 수 없이 우선 교분을 한 쪽에다 내버려 두어야만 하겠소."

"나에게도 적지 않은 친구가 있소. 그러나 전칠야와 같은 신분을 지닌 친구는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전칠야께선 나와 관계를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초류빈은 입가에 엷은 비웃음을 피어올리며 전칠을 응시했다.

순간 전칠야의 안색이 갑자기 굳어지는 듯하더니 두 눈에서 대뜸 살기가 번뜩이고 이었다.

강호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전칠야의 성격이 악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칠이 얼굴에 미소를 띠지 않고 있을 때가 바로 살인을 하려고 하는 순간이다.

때문에 모두가 다 그가 출수를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는 출수를 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말조차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잠시 후, 공손마운, 조정의, 전칠 세 사람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초류빈을 가운데에 두고 철저히 포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초류빈의 수중에 있는 비도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 어느 누구도 먼저 출수를 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여전히 여유있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나 초모인은 세 분께서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소!"

초류빈은 잠시 세 사람의 모습을 쓸어보고 난 후에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목적은 물론 나 매화도를 죽이고 난 뒤에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속셈이겠지요."

조정의는 이러한 말을 듣자 대뜸 안색을 굳히면서 말했다.

"부귀영화는 우리 강호인의 안중에 들지도 않소. 우리가 당신을 죽이려 하는 것은 다만 강호를 위해서 해를 제거하려는 것이오."

"하하...역시 철면무사답게 광명정대하면서도 협의무쌍 하시구려."

초류빈은 경멸의 빛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수중에 있는 비도를 매만졌다.

"그런데 귀하는 아직까지 출수를 않는 것이오?"

그러나 조정의는 이러한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길을 초류 빈의 비도가 움직이는 곳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초류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았소. 전칠야의 한 자루의 봉이 온 천하를 누르고 세 알의 칠담이 온 무림을 진동시키고 있으니 조대야께서는 전칠야가 출수를 한 후에 다시금 출수를 하려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전칠야께서도 물론 거절을 하지는 않겠지요. 그렇지 않소?"

그러나 전칠야는 못 들었다는 듯이 태연자약하게 뒷짐만을 지고 있었다.

초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전칠야께서도 공손 선생이 먼저 출수를 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이오?"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초류빈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더듬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그렇겠군...공손 선생의 마운십사식은 온 천하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이니 공손 선생께서 먼저 출수를 해야겠지요."

그러나 공손마운은 귀가 먹었는지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공손마운의 태도를 보자 비웃었다.

"정말 이상하구려. 세 분 전부 다 나를 죽이려고 벼르고 있으면서도 출수를 하지 않으니 혹시 세 분께서 서로가 겸손을 차리시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공손마운 등 세 사람은 인내심을 극도로 발휘하여 초류빈이 아무리 입을 놀려도 시종 못 들은 척하고만 있었다.

사실상 세 사람은 초류빈의 수중에 있는 비도에 겁을 먹고 여태까지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초류빈의 비도가 수중을 떠났을 때는 이미 상대방은 염라부에 기록된다는 것을.....

또한 지금까지 그 비도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다는 것도. 때문에 그들은 섣불리 손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세 사람마저 꼼짝도 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은 더욱더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호유성이 빙그레 웃음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더 이상 다투지 말고 어서 술이나 마시러 가세."

? 호유성은 안도의 표정으로 초류빈의 곁으로 다가와 어깨에다 손을 올려놓았다.

순간, 초류빈은 안색이 급변하면서 그의 손을 재빨리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눈깜짝할 사이에 전칠야의 손이 벌써 그의 등 뒤로 뻗어왔던 것이다. 잇따라 한 자루의 금사가 마치 독사처럼 초류빈의 다리를 쓸어왔다.

초류빈은 비도를 쥐고 있었지만 호유성이 어리둥절해 아직도 그의 팔을 잡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비도를 날릴 수가 없었다.

초류빈은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무릎을 꿇었다.

공손마운이 적시에 그의 등 뒤에 있는 혈도를 찌르자 조정의 역시 발길로 그를 차버렸다.

일순 호유성이 사납게 두 눈을 치켜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들 왜 이러시오? 속히 그를 놓아 주시오!"

호유성은 분기충천한 얼굴로 노갈을 터뜨리며 초류빈의 몸을 부축하려고 했다.

조정의가 위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제지했다.

"호랑이를 쫓기는 쉬워도 잡기는 어려운 법이오."

이때 전칠이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미안하오."

공손마운은 벌써 호유성의 앞길을 잽싸게 막아 버렸다.

순간,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호유성도 그대로 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조정의는 그가 채 일어나기도 전에 벌써 혈도를 찌르고 말았던 것이다.

호유성은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 왜 이러시는 것이오!"

조정의는 안색을 굳히며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비록 의형제 사이지만 그러나 강호의 도의는 형제의 정보다 더 엄중한 것입니다만 미안할 뿐이오."

"그는 절대로 매화도가 아니오. 절대로....."

호유성은 여전히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정의는 불쾌한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시끄럽소. 당신은 그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증명해 줄 수 있겠소?"

전칠은 입가에 징그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심지어는 그 자신까지도 시인을 했는데 호대협께서 그를 위하여 변명을 해줄 필요가 뭐 있겠소."

공손마운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호대협 역시 처자식과 명성과 지위가 있는 사람이오. 그러니 이러한 자 때문에 해를 입는다는 것은 너무 값어치가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러자 호유성은 울부짖는 듯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당신네들이 그를 석방해 주기만 하면 나 호유성이 자신의 목숨으로 모든 죄를 대신 갚아줄 것이오."

조정의는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며 위엄있는 말투로 지껄였다.

"그러면 당신은 처자식이 그에게 해를 입기를 원하고 있소?"

호유성은 이러한 소리를 듣자 온몸을 부르르 떨며 한동안 할 말을 잃고 있었다.

한편 초류빈은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 채 마치 새우가 구부러져 있는 자세로 연신 기침만을 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중의 비도만은 여전히 굳게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비도는 지금의 상태로는 발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초류빈, 온 강호에 명성을 떨쳤던 대영웅이 이렇게 종말을 눈앞에 두게 되다니...호유성은 눈시울이 빨개지며 울부짖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현제, 미안하네. 모든 것은 전부 다 나의 잘못이네....."

대청 밖의 계단 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인가 서로 의논을 하는 듯 소곤소곤대고 있었다.

"전칠야, 역시 듣던 바와 마찬가지로 대단하군. 그의 출수가 제아무리 빨라도 그리고 호대협께서 거기에 없었다고 해도 초류빈은 여전히 피해낼 수가 없었을 것이네."

"하물며 옆에 공손대협과 조대협이 있었는데."

"그렇지. 조대협의 두 다리는 백만 냥 짜리로서 그 얼마나 멋진 발길질이었던가."

"소문에 남전북뢰라고 하고 있으니 우리 북쪽의 수법은 원래부터 고강했었지."

"그러나 공손대협의 장법은 또 어떠했는가. 만약 그가 적시에 출수를 하지 않았다면 초류빈이 한 대를 맞았다고 해도 곧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지....."

"전칠야, 조대협, 거기에다 공손대협까지 합쳐졌으니 초류빈도 아주 재수가 나쁘군."

"말이 비록 그렇지만 그러나 만약 말이지, 호대협이 없었다면 ....."

"호유성이 초류빈에게 얼마나 의리가 있었는가."

"그렇지. 초류빈이 호유성과 같은 친구를 사귈 수가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영광이라고 할 수가 있지."

호유성은 대청 안의 태사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이러한 대화를 들었을 때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초류빈이 제압당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실수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그의 어깨에 손만 얹지 않았다면 그들은 초류빈을 이런 지경으로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초류빈은 바닥에 그대로 엎드린 채 연신 기침을 하고 있었다.

호유성은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현제, 미안하네. 모든 것은 전부가 다 나의 잘못이었네. 현제, 나 같은 친구를 두었다는 것은 정말 불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네."

"형님, 만약 나 초류빈이 죽지 않고 다시금 살아날 수가 있다면 여전히 형님과 같은 친구를 사귀려고 했을 것이오."

초류빈은 호유성을 원망하는 기색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순간 호유성은 뜨거운 열혈이 용솟음치는 것을 억제하지 못하여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출수를 막지 않았다면....."

"나는 형님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전부가 다 내가 좋게 되기 위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다만 감격스러운 마음밖에 없소."

호유성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며 궁금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그들에게 왜 자신이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는가? 무엇 때문에....."

초류빈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느긋한 표정으로 호유성을 주시했다.

"나 초류빈도 이제는 살 만큼 살았으니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 필요가 뭐 있겠소. 하물며 소인배들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것은 내 적성에 결코 맞지가 않소."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전칠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리더니 문득 말을 꺼냈다.

"하하...잘했군, 잘했어....."

공손마운은 냉소를 쳤다.

"그렇지. 그는 자신이 무어라고 변명을 하든 간에 우리가 절대로 그를 놓아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욕을 했던 것이지."

초류빈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고 침중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렇소. 일이 벌써 이 지경이 됐으니 나 초모인도 이젠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여러분, 나 초모인의 수중에 이젠 비도가 없으니 속히 출수를 하시오."

순간, 공손마운의 누르스름한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조정의도 안색이 새파래진 채 즉시 입을 열었다.

"만약 우리가 당신을 죽인다면 강호인들이 우리를 비웃을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광명정대하게 천하의 군웅 앞에서 죽여 줄 것이오."

"내 당신에게는 정말 두 손 들었소. 당신의 마음속에는 열 마리의 구렁이가 들어 있지만 항상 광명정대하다는 말을 잊지 않는구려."

초류빈은 궁지에 몰려 있으면서도 조금도 굴하는 기색이 없었다.

전칠은 두 눈에 가득 살기를 떠올리며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비도탈명이라 담량도 아주 대단하군. 좋소. 만약 당신이 빨리 죽고 싶다면 나에게도 좋은 방법이 있소."

"나는 원래 당신에게 욕을 몇 마디 더 해 주려고 하였소. 그러나 나의 입이 더러워질까 봐 그만두겠소."

그러나 전칠은 못 들은 척하며 여전히 입가에 가벼운 미소만을 떠올린 채 초류빈을 주시했다.

"당신이 모든 죄악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백을 하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통쾌한 죽음을 하사하겠소."

"좋소, 그럼 내 고백하겠소."

초류빈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호유성이 급히 저지를 했다.

"안 되네."

그러나 초류빈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진 죄악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소. 나는 위선자로서 이간질을 하고 또 남이 방비를 못하는 틈을 타서 암산을 하였소."

11 소이비도 제1권 영웅은 말이 없다





영웅은 말이 없다



음성은 나직하고 담담했으나 마치 천만 근의 무게를 지닌 듯했다.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예리한 비수처럼 날카롭고도 차가웠다. 방안에 들어와 그는 이제서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바로 영민한 고양이처럼 걸을 때에 발자국소리조차 내지 않았던 세 번째 사람이었다.

그러나 철전갑은 그의 목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눈을 번쩍 떴다. 너무도 귀에 익은 목소리였기에 눈을 뜬 철전갑의 시야에 일순 조정의와 청삼노인 사이에 앉아 있는 청년이 들어왔다.

낭천! 그 고독하면서도 냉막한 청년 낭천이었던 것이다.

'천도령,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철전갑은 흥분을 금치 못하고 격동에 가득찬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소리를 내지 않고 입속으로만 뇌까렸을 따름이었다.

조정의는 안색이 싹 변해 눈을 부릅뜨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친구는 이런 자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지 않는단 말이오?"

낭천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휘둘러보며 대답했다.

"만약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아마 당신네들은 일제히 나를 죽이려고 덤벼들 것이오. 그렇지요?"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라 공손우의 입에서 폭갈이 터져나왔다.

"이놈! 개소리 말아라!"

그러나 낭천은 야박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응수했다.

"내 입으로 하는 말이 개소리라면 나와 말을 하고 있는 당신 역시 개가 아니겠소?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떠들고 야단이오?"

이거야말로 치욕적인 반격이었다.

"이...이놈이....."

공손우는 상대방의 날카로운 대꾸에 아연실색하여 한동안 뭐라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때 장님인 역명호가 급히 흥분하는 좌중을 만류하며 크게 소리쳤다.

"우리가 친구를 청해 온 이유가 바로 친구더러 공도를 주지하라는 것이었소. 용서해 줄 데가 있다고 변호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즉시 이 자를 놓아 주겠소."

조정의는 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강경하게 맞섰다.

"내가 보기에 저 자는 쓸데없는 시비를 일으키려는 것 같소. 여러분께서는 그의 말에 신경을 쓸 필요가 추호도 없소."

낭천은 길길이 날뛰는 조정의를 한참 노려보다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귀하께서 그렇게 자신있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그날 옹가장에 가서 살인을 한 사람들 중에 귀하도 역시 있었던 것 같구려."

순간, 중원팔의는 일제히 경악의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

낭천은 그들을 향해 점잖게 입을 열었다.

"그가 철전갑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다만 그의 입을 영원히 봉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소."

"이놈! 개....."

조정의는 이 소리에 다급함을 금치 못하고 노갈을 터뜨리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공손우가 개소리라고 했다가 개망신을 당한 것이 생각난 때문이다.

보아하니 이 젊은 청년은 입이 매워 자기가 그 소리를 했다가는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하물며 대협의 신분으로 욕설을 퍼붓는다는 것은 신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그는 할 수 없이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침착을 되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으하하하하...귀하는 그처럼 젊은 나이에도 입심이 아주 좋구려. 그러나 귀하의 일방적인 말을 누가 믿어줄 것 같소?"

"일방적인 말? 그렇다면 당신네들이 하는 말은 일방적인 억지가 아니란 말이오?"

낭천은 경멸의 빛이 물결치는 눈으로 빈정거렸다.

조정의는 터지려는 분통을 억누르고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귀하는 철전갑 자신이 시인하는 말을 못 들었소?"

"물론 듣기는 들었소!"

말이 막 끝나는 순간, 느닷없이 낭천의 허리에 차고 있던 쇠붙이 같은 장검이 갑자기 조정의의 목에까지 기습적으로 뻗쳐갔다. 실로 귀신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경쾌한 쾌검이었다.

"엇!"

조정의는 강호에서 굴러먹은 백전노장이었다. 그는 싸늘한 검기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피하려 했다.

그러나 낭천의 쾌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목에 썰렁한 쇠붙이의 감촉을 느끼며 조정의는 말을 더듬거렸다.

"치...친구...이게 무슨 짓이오?"

낭천은 싸늘한 얼굴로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내 다시 묻겠소. 그날 옹가장에 살인을 하러 간 사람 중에 역시 귀하도 한몫 끼여 있었음이 틀림없지요?"

조정의는 분노에 찬 부르짖음을 토했다.

"당...당신은 미쳤소?"

"당신이 시인을 하지 않으면 내 당장 당신을 죽이겠소!"

낭천의 이 한 마디는 무게가 있고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조정의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나...나는....."

그가 말을 더듬거리자 낭천은 냉랭한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똑똑하게 말하시오. 한 마디라도 잘못 하는 날에는 목이 꿰뚤릴 줄 아시오!"

낭천의 쇠붙이 같은 장검은 여전히 조정의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중원팔의는 조정의를 구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낭천의 쾌검, 그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빠르지 않던가. 제아무리 그런 마음이 있어도 그들은 간담이 졸아들어 감히 함부로 출수를 못하는 것이었다.

사실이 그렇다. 이토록 빠른 쾌검 아래 누가 감히 사람을 구출해 낼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들도 역시 조정의가 기를 쓰고 철전갑을 죽이려는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지 않은가.

낭천의 냉혹한 목소리가 조용한 실내를 나지막하게 울렸다.

"내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물어보겠다. 옹천검은 네가 죽인 것이지?"

조정의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가까스로 입을 열고 있었다.

"맞소. 내...내가 죽인....."

"뭣?"

말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중원팔의는 똑같이 안색이 싹 핏기를 잃었다.

공손우가 펄쩍 뛰며 악귀같이 부르짖었다.

"너 이 개구멍으로 나온 놈!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서도 감히 여기에 와서 공증인노릇을 하려 하다니....."

그러자 낭천의 두 눈에 이채를 가득 담은 채 갑자기 소리없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여러분, 화내지 마시오. 옹천검의 죽음은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소."

중원팔의는 다시 한번 멍청해졌다.

공손우가 눈알을 희번득이며 분에 치받혀 숨을 씨근거렸다.

"하지만...하지만...그놈 자신이....."

그러나 낭천의 음성은 고요한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다만 사람이 협박을 받을 때 하는 얘기는 절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조정의의 안색은 점점 시뻘겋게 변해갔다.

이와는 반대로 중원팔의의 안색은 점차적으로 창백해졌다. 뒤이어 그들은 분분히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언제 그를 핍박하였소?"

"우리는 그를 협박한 적이 없소!"

"만약 그에게 억울함이 있다면 왜 얘기를 안하겠소?"

그러나 여럿이 한꺼번에 얘기를 하니 뭐가 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런 소갈 속에서 역명호가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철전갑! 만약 너에게 무슨 억울한 데가 있다면 지금 속히 우리 형님들에게 해명을 해 보아라!"

역명호의 목소리는 느릿느릿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한마디 한甕떫?천근 같은 무게가 있었다.

즉시 공손우가 철전갑의 앞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렇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면 마음놓고 해 보아라. 너의 입을 막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철전갑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통스러운 듯 아랫입술만 지그시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변명을 한다는 것, 그것은 본의는 아니었지만 옹천검에게 지은 죄를 더욱 가증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웅대랑도 왼눈을 번뜩이며 추궁했다.

"철전갑, 네가 얘기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네가 시인을 했다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우린 절대로 칼로 너를 위협하지 않겠다!"

철전갑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낭천을 향하여 빙긋이 웃어 보였다.

"천도련님, 저는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도련님의 호의만은 정말 고맙습니다."

공손우는 낭천을 향해 번쩍 고개를 돌리며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당신 들었소? 그 자신이 할 말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나 낭천의 표정은 지극히 냉담했다.

"그가 말을 하든 안하든 나는 그가 친구를 팔아 버린 소인배라고는 절대 보지 않소."

공손우는 마치 야수의 부르짖음 같은 괴성을 질렀다.

"사실이 다 여기 있으니 당신은 믿기지 않아도 꼭 믿어야만 하오!"

옹대랑이 코웃음을 치며 끼여들었다.

"저 사람이 믿지 못한다면 그만두라지. 뭐 우리가 꼭 그더러 믿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약장수 금풍백도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맞았습니다. 그는 원래부터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니까요."

낭천의 싸늘한 목소리가 좌중에 울렸다.

"나는 기왕 이곳에 왔으니 이 일은 나와 관계가 있는 셈이 되었소."

성질이 제일 급한 공손우는 두 눈을 부릅뜨며 격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라구요? 당신과 무슨 말라빠진 관계가 있다고 그러시오?"

낭천의 목소리는 신념에 가득차 있었다.

"만약 내가 믿지 않는다면 당신네들은 절대 그를 다치게 할 수 없소."

옹대랑은 드디어 분통이 터져 앙칼지게 소리쳤다.

"네놈이 뭔데 감히 우리 일에 참견을 하겠다는 거냐?"

"노부는 기어코 저 놈을 죽이고야 말겠다. 어디 네놈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보자!"

나무꾼 역벽화산의 입에서 싸늘한 노갈이 터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그의 수중에 들려져 있던 도끼가 벌써 철전갑의 머리 위를 향해 무섭게 내리쳤다.

역벽화산!

이름 그대로 그의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가 도끼를 휘둘렀을 때 그의 곁에 서 있던 역명호의 수염까지 도끼의 바람에 휘날릴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철전갑에게 제아무리 철포삼(鐵袍衫) 같은 내공이 있다 해도 역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원래 철포삼의 내공은 막강한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보통 창칼만 막을 수 있을 뿐이지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내리치는 도끼의 힘은 절대 막아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철포삼의 공력은 상대방의 보통 창칼도 어디로 찔러오는지 위치를 미리 알아야만 효과를 볼 수가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내공만으로 매화도를 생포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또 금사갑을 찾으려 했겠는가.

절대절명의 순간, 갑자기 한 줄기의 검광이 번쩍이면서 팍! 하는 경쾌한 음향이 터져나왔다. 뒤이어 거대한 도끼는 갑자기 두 토막으로 잘리워져 바로 철전갑의 무릎 앞에 떨어졌다.

쿵!

묵중한 도끼날은 철전갑의 앞에서 땅바닥 깊이 박혀버렸다.

원래 낭천의 일검은 도끼 자루를 내리친 것으로 역벽화산이 도끼를 휘둘렀을 때는 이미 끝부분이 잘려져 나가 있었다.

"엇!"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그는 자기가 휘두른 힘에 견디지 못하고 손목, 팔꿈치, 어깨 등의 관절이 일제히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몸은 그대로 낭천의 검끝으로 부딪쳐갔다.

이 광경을 본 중원팔의는 일제히 대경실색하여 소리를 질렀다.

"앗! 저....."

그러나 그 경악의 외침이 채 다 터져나오기도 전에 낭천은 벌써 수중의 검을 거꾸로 돌리고 나무 손잡이로 역벽화산의 턱을 올려치고 있었다.

퍽!

둔탁한 소리가 역벽화산의 몸에서 터져나오는 순간 그는 뒤로 벌렁 나자빠져 기절을 하고 말았다.

중원팔의는 일순 너무도 놀란 듯 망연자실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조금 전 낭천이 조정의를 빠르게 제압했을 때, 그들은 그저 우연한 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진짜 실력이었던 것이다.

실내에는 순식간에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중원팔의는 낭천의 이렇게 빠른 검법에 전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정녕 생각지도 못했다. 세상에 이토록 빠른 검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낭천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철전갑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갑시다. 가서 술이나 마십시다."

철전갑은 그의 이끌림에 못이긴 척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자 공손우와 금풍백, 변호 세 사람이 동시에 그들의 갈길을 막았다.

금풍백이 괴상한 목소리로 외쳤다.

"친구, 이대로 떠나가려고 하오?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에 있소?"

낭천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금풍백을 주시했다.

"그렇다면 내가 꼭 당신을 죽여야만 갈 수가 있단 말이오?"

억양도 없이 잔잔한 목소리. 그러나 금풍백은 어찌된 일인지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금풍백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동안 수많은 위험을 겪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이렇게 등골이 오싹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낭천의 검이 그렇게도 두려웠던 것이다.

역명호가 갑자기 장탄식을 하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를 보냅시다."

이 말을 들은 옹대랑이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그건 안 된다! 우리의 피맺힌 원한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아 냉막한 역명호의 목소리가 옹대랑의 말을 삼켜 버렸다.

"없었던 걸로 합시다."

이렇게 말한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낭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귀하는 어서 가 보시오. 강호란 원래가 이런 것이오. 검이 빠른 자는 항상 우선권을 차지할 수가 있소."

낭천은 가볍게 웃으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고맙소. 귀하의 그 한 마디를 소생은 영원히 기억해 두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철전갑을 부축하여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중원팔의의 표정은 갖가지로 변했다. 발을 동동 구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이를 가는 자가 있고 또 목을 놓아 대성통곡을 하는 자도 있었다.

옹대랑은 대성통곡을 하다가 역명호를 향해 저주스러운 듯이 외쳤다.

"그를 놓아 주면 어떻게 합니까? 도대체 어찔려고 놓아 준 거예요?"

"형수님은 정말로 그가 우리를 다 죽여야 시원하시겠소?"

역명호의 말에 변호가 옹호하고 나섰다.

"둘째 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숨이 붙어 있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복수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옹대랑은 갑자기 변호의 멱살을 붙잡고 늘어졌다.

"이놈! 네가 무슨 염치가 있어 그런 말을 하느냐? 이번에도 역시 네놈이 데리고 온 친구가....."

옹대랑은 남편의 원수가 눈앞에서 유유히 사라지자 눈알이 홱 뒤집혔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변호를 박살낼 기세였다.

변호는 참혹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이번에도 제가 데려온 친구가 일을 망쳤소. 내 형수님에게 반드시 그 죄를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옹대랑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웅대랑은 자기가 너무 심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음인지 다급하게 소리쳤다.

"셋째, 돌아와요. 돌아와!"

그러나 그녀가 밖으로 달려나갔을 때 변호는 이미 종적도 보이지 않았다.

"내버려 두시오. 그가 그의 옛 친구를 찾아낼 수 있기를 비는 도리밖에 없소."

역명호의 말에 두 눈에서 번쩍 신광을 뿜어냈다.

"둘째 형의 말씀은 혹시....."

역명호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네가 기왕 알고 있다면 왜 또 구차스럽게 묻느냐?"

"만약 셋째 형이 정말 그 사람을 찾아올 수 있다면 그놈의 검이 제아무리 빠르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거다....."

금풍백은 초점 잃은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때 조정의가 멋적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사실 변대협께선 다른 사람을 찾으러 갈 필요조차 없었소."

금풍백은 어리둥절한 빛으로 조정의를 주시했다.

"그건 어째서요?"

조정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자기가 낭천에게 했던 말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자신있게 말했다.

"내일과 모레, 이틀 동안에 세 분의 고인이 이곳으로 달려오기로 되어 있소. 그러니 그놈에게 설사 하늘로 올라가는 재주가 있다 해도 그 세 분의 고인 앞에선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오."

금풍백의 얼굴에 의문의 빛이 짙게 떠올랐다.

"세 분의 고인이란?"

조정의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에 꼬리를 달았다.

"아마 여러분께서 그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깜짝 놀라게 될 것이오."

정오 무렵이었다. 그러나 날씨가 음침하기 짝이 없어 마치 황혼녘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낭천은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철전갑이 처음 그를 보았을 때처럼 그렇게 고독하고 피곤한 기색을 띤 걸음이었다.

하지만 철전갑은 그제서야 그가 일단 강적을 만나기만 하면 성난 독수리처럼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철전갑은 그의 뒤에 서서 걸음을 옮겨갔다. 철전갑은 하고 싶은 말이 태산같이 많았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무슨 얘기를 먼저 꺼내야 좋을지 갈피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초류빈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다. 철전갑은 초류빈과 십여 년이나 생활을 같이하면서 그 역시 침묵으로 말을 대신하는 법을 배웠다.

처음 그는 '쎄쎄'라는 한 마디 단어밖에는 말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감사하다는 듯이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그것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그 낭천에게는 목숨을 구해 받고도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낭천 역시 초류빈처럼 말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길가에는 자그마한 육각정(六角亭)이 하나 있었다. 육각정은 봄이 되면 행인들의 발길이 멈추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행인 대신 흰눈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때 낭천은 갑자기 철전갑에게 다가서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왜 마음속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소?"

철전갑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탄식조로 대답했다.

"사람에게는 해서 되는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지요."

낭천은 걸음을 멈추고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당신은 좋은 친구요. 그러나 당신은 한 가지 잘못 알고 있는 일이 있소."

철전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이 냉막한 청년의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그게 뭡니까?"

낭천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당신은 목숨이 자기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게 잘못된 생각입니까?"

"물론이오. 잘못 되어도 이만저만 잘못된 것이 아니오."

이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갑자기 눈을 딱 부릅뜨며 철전갑을 쏘아보았다.

"사람은 죽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오."

철전갑은 납득이 안 간다는 듯이 털투성이 얼굴을 갸우뚱했다.

"하지만 사람이 꼭 죽어야 할 때는....."

"설사 꼭 죽어야 할 때가 되었다 해도 발버둥이라도 한번 쳐 봐야 하오."

낭천은 음침하게 어두운 창공을 응시하며 부드럽게 말을 계속했다.

"조물주께서는 갈증을 느끼는 사람에게 물을 내려주시고 허기진 사람에게는 식량을 내려주셨소. 그리고 추워하는 사람에게는 옷을 하사하시었소....."

그는 다시 철전갑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다그쳤다.

"조물주께서는 당신에게 이렇게 많은 은총을 내리셨소. 그런데 당신은 조물주를 위해 무엇을 해 드렸소?"

철전갑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해 드린 것이 없습니다."

낭천의 말이 다시 철전갑의 귀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을 키우기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여 왔소. 그런데 당신은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해 드렸소?"

철전갑은 굵은 목에 달린 머리가 더 한층 수그러졌다.

낭천은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해서는 안 된다는 말만 알고 있지 어떻게 부모님의 은혜와 조물주의 은총에 보답해야 하는지는 모르고 있구려?"

철전갑의 꽉 쥐어진 주먹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낭천의 말은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깊고도 심오한 철학이 포함되어 있었다.

낭천의 목소리는 한마디 한마디 못박는 것처럼 들려왔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이유는 바르게 살기 위함이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함부로 좌우할 수가 없소."

철전갑은 고개를 푹 숙이며 힘없이 대답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잘....."

갑자기 말을 중단한 그는 큰 결심을 내린 듯 단호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그 곡절을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은 이유는 다만...다만 ....."

그러나 낭천은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나는 당신을 믿소. 당신이 나에게 해명할 필요는 없소."

철전갑의 두 눈이 절로 휘둥그래졌다.

"천도련님은 무엇에다 근거를 두고 저를 믿는단 말입니까?"

낭천은 소리없이 미소를 지었다.

"나의 이 두 눈은 아직 멀지도 어둡지도 않소."

그리고는 자신이 넘치는 말투로 단정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건, 아마 내가 산중에서 자랐기 때문일 거요. 산중에서 자란 사람은 전부 다 야수처럼 본능적으로 사람의 선악을 판별할 수가 있소."

초류빈의 생각 속에 만약 술을 먹지 않는 것보다 세상에 더 큰 괴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술을 마시는 것이리라.

초류빈은 흥운장(興雲莊) 안의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두들 구역질이 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유룡생(游龍生)이 가장 좋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는 최소한 아첨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구역질이 나는 사람이 거기다가 아첨까지 떤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모골이 송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류빈은 하는 수 없이 병을 가장했다. 호유성은 그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억지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초류빈은 혼자 침상 위에 누워 조용히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 초류빈은 오늘밤 반드시 재미있는 일이 많이 발생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대나무 잎사귀에 바람이 불어와 우수수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초류빈이 누운 방의 천장에 거미가 매달려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다. 거미뿐만 아니라 사람도 역시 거미줄처럼 제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사방에다 거미줄을 치는 것이다.

초류빈에게도 그 나름대로의 거미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평생 동안 그 거미줄 안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말아야만 했다. 그것은 그 거미줄이 원래부터 자신을 위하여 친 것이기 때문이다.

어젯밤 설소하와의 약속이 생각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의 빛을 떠올렸다. 그러나 철전갑의 생각이 떠올랐을 때는 반대로 눈빛이 암담해졌다.

시간이 말없이 지나가는 가운데 결국 어둠이 대지를 덮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갑자기 눈 위를 걷는 미미한 발자국소리가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초류빈은 누가 왔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상대방 역시 들어오지 않고 창 밖에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초류빈은 즉각 온 자가 호유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호유성이라면 절대로 창 밖에 서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온 자는 누구란 말인가?

'벽운인가?'

이렇게 생각해 본 그는 단전의 혈기가 거꾸로 역류해 용솟음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밖에서 갑자기 헛기침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형, 잠이 드셨소?"

이것은 다름아닌 장검산장 유소장주의 음성이었다. 초류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유쾌한 한숨인지 아니면 실망의 한숨인지 그 자신도 몰랐다.

초류빈은 침상에서 일어나 신을 신고 걸어가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유룡생은 천천히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초류빈은 화섭자를 찾아 불을 켰다. 그는 유룡생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심 의아했다. 자고로 안색이 하얗게 질린 사람치고 좋은 일을 만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초류빈은 모르는 척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차를 마시겠소? 아니면 술을 마시겠소?"

"술!"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며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방에는 원래부터 차를 마시겠다는 손님은 없소."

유룡생은 따라 주는 술을 연속 석 잔이나 마시고 나서 갑자기 정색을 하고 질문을 던졌다.

"초형은 내가 왜 술을 마시려고 하는지 알고 있소?"

초류빈은 다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술이란 조시구(釣詩鉤)라 하기도 하고 소수추(掃愁湫)라고도 하오. 즉 '시를 낚는 낚시'이며 '온갖 시름을 씻어버리는 비'라는 뜻이오."

여기까지 말한 초류빈은 슬쩍 유룡생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한데 귀하께서는 쓸어야 할 걱정도 없거니와 또 떠오르는 시도 없소. 그렇다면 술을 마시려는 이유는 혹시 담량을 돋우기 위해서가 아니오?"

유룡생은 두 눈을 부릅뜨다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잇따라 그는 번개같이 허리에 찼던 장검을 뽑았다.

스르릉!

해맑은 금속성 소리와 함께 불빛에 비친 검신에서 검광이 번쩍 빛났다.

유룡생은 갑자기 광소를 뚝 그치더니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초류빈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이 검을 아시오?"

초류빈은 그의 긴 손가락으로 유룡생의 장검을 매만져 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좋은 검이오! 정말 좋은 검이오."

그러다가 그는 싸늘한 검기에 못견디는 것처럼 연신 기침을 하는 것이었다.

유룡생은 두 눈을 번뜩이며 싸늘하게 말했다.

"초형께선 검을 식별할 줄 아는 사람이라 물론 이 검이 천고의 신병(神兵)인 어장검(魚藏劍)보다는 예리하지 못하지만 무림에서 떨치는 명성이 절대 어장검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초류빈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천천히 말했다.

"전저(專儲)의 어장검. 무자(武子)의 탈정검(奪情劍)...사람은 검 때문에 명성을 날리고 검은 사람으로 인해 그 대를 이어 내려왔소."

유룡생은 하얗게 변한 얼굴에 한가닥 조소를 띠었다.

"그렇소. 이것이 바로 삼백 년 전 일대의 검호인 적무자(狄武子)가 사용했던 탈정검이오. 그러나 이 검에 대한 내력을 초형께서는 아마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오."

초류빈은 흥미로운 듯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어디 말씀해 보시오."

유룡생은 예리한 검날을 응시하면서 차분히 얘기를 꺼냈다.

적무자!

그는 어렸을 때부터 검을 사랑하여 일생을 검의 반려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사람이다.

하지만 인지상정이라 그도 중년에 들어서서 한 명의 여협(女俠)을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얼마 후 서로 혼인을 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것은 두 사람이 혼인하기 전날 밤 여협이 적무자의 친구인 신도(神刀) 팽경(彭瓊)과 암암리에 밀회를 즐기는 것을 적무자가 본 것이다.

천둥같이 화가 난 적무자는 탈정검으로 단칼에 두 사람을 살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후로 적무자는 다시는 혼인 얘기를 꺼내지 않고 일평생을 오직 검에다가 바쳤소."

이렇게 말하던 그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초류빈을 응시하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초형께선 아마 이 얘기의 내용이 매우 단조로워 아무 재미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오. 그러나 이건 절대적인 사실로 추호의 거짓도 없소."

"하하하...난 그분 적무자께서 검법은 비록 고강하나 사람됨이 좀 너무 옹졸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그건 어째서요?"

초류빈은 어깨를 으쓱 추스리며 여유있게 대답했다.

"귀하도 한번 생각해 보시오. 아무리 상대방이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라 해도 어찌 한 명의 여자 때문에 친구와 의리를 끊을 수가 있겠소?"

유룡생은 차갑게 냉소를 쳤다.

"그러나 나는 적무자는 대영웅이며 대호걸이라 생각하오."

"그건 또 어째서요?"

초류빈의 물음에 유룡생은 당연한 것처럼 대답했다.

"이유는 간단하오. 그런 영웅호걸만이 그 어려운 일을 단호하게 끝장낼 수 있기 때문이오."

초류빈은 소리없이 미소를 보냈다.

"그럼 귀하도 역시 오늘밤 삼백 년 전의 적무자 흉내를 내려는 것이오?"

유룡생의 얼굴에 아련히 살기가 떠올랐다.

"만약 초형께서 오늘밤 삼백 년 전의 신도 팽경 흉내를 낸다면야....."

초류빈은 탄식을 하며 유유히 대꾸했다.

"보름날 밤, 계수나무 아래에서 절세의 가인과 밀회를 즐긴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오? 귀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풍활戀?말씀만 하시는 거요?"

"귀하는 오늘밤 반드시 가야 한다는 뜻이구려?"

초류빈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만약 설낭자 같은 분에게 바람을 맞힌다면 너무 죄가 되는 것이 아니겠소?"

유룡생의 창백한 얼굴이 갑자기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잇따라 이마에 지렁이 같은 굵은 힘줄이 불끈 치솟는가 싶자, 휘익! 하는 파공음과 함께 탈정검은 빠르게 초류빈의 목을 노리고 짓찔러 들어왔다.

그러나 초류빈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살짝 몸을 흔들어 피하고는 아깝다는 듯이 말했다.

"귀하의 이 같은 검법으로는 적무자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할 것 같구려."

유룡생은 일격이 실패하자 이를 부드득 갈았다.

"하지만 이런 검법으로도 당신을 죽이기는 충분하오!"

싸늘한 고함과 함께 그는 연속적으로 십여 검을 찔러갔다.

휙! 휘익!

잇따라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살기가 사방에 회오리쳤다.

탁!

경쾌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식탁 위에 있던 토기 주전자가 깨어지며 그 주전자 속의 술이 방바닥에 주르르 쏟아졌다. 유룡생이 펼치는 검법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고 빨랐다.

그러나 초류빈은 제자리에 서서 별로 몸을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는데 유룡생의 검을 전부 다 빗나가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놈!"

유룡생은 부드득 이를 갈더니 더욱 신속하게 출수하기 시작했다. 사실 유룡생은 초류빈의 수중에 칼이 들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마음놓고 악랄한 출수를 한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초류빈은 칼을 뽑지 않고도 시종 여유만만하게 그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미소까지 지으면서 조롱을 하는 것이었다.

"젊은 나이에 이런 쾌검을 연마한다는 것은 확실히 대단한 일이오. 그러나 당신 집안과 사문의 명성으로 따지고 볼 때 만약 이런 검법으로 강호에 나선다면 아마 일 년도 못가서 영존과 영사의 명성은 떨어지고 말 것이오."

초류빈은 무지막지하게 기습해 오는 칼날 속에서도 여전히 입을 열 여유가 있다. 그러니 유룡생의 분노가 어느 정도이겠는가.

초조와 분노가 뒤엉켜 그의 표정은 악귀처럼 변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옷깃 하나 스칠 수가 없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원래 그가 제일검으로 초류빈의 목을 찌르려고 할 때 초류빈은 살짝 왼쪽으로 몸을 피하는 동작을 취했었다. 그래서 그의 검도 즉시 왼쪽으로 따라갔다.

하지만 예상 외로 초류빈의 돌아가려던 몸이 딱 멈춰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의 출검(出劍)도 자연히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형태로 그의 연속적인 십 검이 전부 빗나가 버린 것이다.

유룡생은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는 초류빈의 가슴팍을 향해 전력을 다한 일격을 찔러갔다. 동시에 그는 마음속으로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네가 아무리 수작을 부려도 절대로 속지 않는다.'

과연 초류빈은 왼쪽 어깨를 들썩하며 오른쪽으로 피하려 했다. 그러나 유룡생은 앞서 계속 속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따라가지 않고 곧장 찔러갔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번에 초류빈은 정말 오른쪽으로 피하고 말았다. 유룡생의 일검은 다시 어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아차! 또 속았구나.....'

그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고 있을 때 초류빈의 손가락이 벌써 그의 검신을 튕기고 있었다.

땅!

맑은 음향과 함께 유룡생은 오른쪽 손목이 마비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어찌 그뿐이랴. 심지어는 수중의 장검까지도 그의 손을 벗어나 창 밖으로 그냥 날아가 버린 것이다.

초류빈은 여전히 원래의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전혀 움직여 본 적도 없다는 것처럼.

그러나 유룡생은 마치 수천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순간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멍청히 넋을 잃고 있는 그의 어깨를 초류빈은 가볍게 두들겼다.

"탈정검은 보통 병기가 아니니 속히 주우러 가시오."

"으으....."

유룡생은 이를 악물고 이빨 사이로 저주에 찬 신음소리를 토했다. 그는 밖으로 달려가다 말고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몸을 홱 돌(렸다.

"너...너도 남자라면 더도 말고 일 년만 기다려라. 내 일 년 후에는 기필코 너를 다시 찾으러 오겠다!"

"일 년? 일 년 가지고는 모자랄 걸?"

초류빈은 여유자적한 모습으로 팔짱을 낀 채 입가에 조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정색을 하며 진지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자질은 별로 나쁜 편이 아니오. 그리고 검법도 약하지는 않소. 그러나 대적을 할 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가 없기 때문에 비록 출검은 빠르나 영악하지 못하오. 당신이 침착함을 찾지 못한다면 아마 평생을 가도 나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오."

초류빈의 지적에 유룡생은 수치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약점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침착하다는 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렵소. 그리고 만약 당신이 나를 이기려면 반드시 칠 년 간의 내공을 연마해야만 하오."

유룡생의 안색은 하얀 것에서 파랗게 변했다.

초류빈은 악의없는 미소를 보냈다.

"그럼 이젠 그만 가 보시오. 칠 년이란 세월은 긴 것이 아니오. 만약 내가 칠 년을 더 살아갈 수 있다면 내 반드시 당신의 복수를 받아 주겠소. 하물며 옛부터 군자가 복수를 하는데 있어서는 십 년도 늦지 않다는 속담이 있지 않소?"

10 소이비도 제1권 인육을 파는 여인





인육을 파는 여인



매림을 지나 가산을 끼고 돌연 세 칸의 아담한 누각이 시야에 들어온다. 누각 앞 넓은 공지에서 두 사람이 악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텁석부리 사나이와 철담진팔방 진효의였다.

두 사람은 모두 권풍이 강맹하여 주위에 쌓인 눈이 분분히 허공으로 휘날렸다.

텁석부리 사나이의 성난 고함소리가 주위를 진동시켰다.

"진가야, 너 자신은 협의지사라 자처하고 있지만 사실은 개똥만치도 값어치 없는 인간이다. 네 아들이 불치의 중상을 입은 게 다른 사람과 대관절 무슨 상관이 있다고 매이선생에게 독수를 전개했느냐?"

"너는 어디서 굴러온 녀석이기에 건방지게 노부의 일에 간섭하느냐? 강호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네놈을 없애 버려야겠다!"

진효의는 노기충천한 얼굴로 부르짖었다.

한편 호유성은 한 쪽에서 발을 굴러가며 만류하고 있고 유룡생은 뒷짐을 진 채 방관만 하고 있었다.

초류빈이 물찬 제비처럼 달려오자 호유성은 즉시 그를 맞이하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현제, 자네가 어서 저들을 만류해 주게. 매화도가 아직 나타나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이다니...이게 대관절 무슨 꼴인가?"

초류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왼쪽에 서 있던 유룡생이 냉소를 치며 호유성의 말을 받았다.

"이것은 강장 수하에 약병이 없다는 좋은 본보기요. 초탐화의 시중을 드는 졸개마저 이런 훌륭한 솜씨를 지니고 있다니...정말 무서운 일이오."

"내 수하는 비록 흉맹한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 그를 건드리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남을 건드리지 않을 걸세."

초류빈은 담담하게 말한 후 유룡생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호유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호유성은 대꾸를 하기 앞서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진중의 상세가 워낙 위독하여 결국 숨을 거두자 진형님께선....."

초류빈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어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그래서 그는 그 죄를 매이선생에게 전가시켰단 말입니까?"

호유성은 멋쩍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 부자는 워낙 정이 두터워 진형님은 아들을 잃자 너무나 비통한 나머지 그만 매이선생에게 출수를 한 걸세. 하지만 상세가 그다지 심하지는 않네."

초류빈은 코웃음을 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유성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그들을 좀 만류해 주게. 자네 이외에는 아무의 말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네."

초류빈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리고 그의 음성은 더욱 차가웠다.

"내가 왜 그를 만류합니까? 그가 만약 출수를 하지 않았다면 내가 출수를 할 것입니다."

호유성은 그의 강경한 말투로 인해 어리둥절해지며 더 이상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랐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계속 진효의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초식은 비록 절묘한 데는 없지만 자신의 안전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맹공을 퍼붓기 때문에 일초 일식은 모두 농후한 살기가 곁들여 있었다. 흡사 꼬리에 불이 붙은 한 마리의 들소와도 같았다.

진효의는 상식에서 벗어난 맹공을 받게 되자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질식감을 느꼈다.

유룡생은 문득 의아한 눈빛을 발했다.

"귀하의 시종이 전개하는 초식은 실로 강호에서 보기 드문 것이군요."

"....."

"그는 일초를 전개할 때마다 마치 먼저 상대방의 일격을 맞을 각오가 되어 있는 것 같군요. 무림에서 저런 권법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니 보통 상식으로선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의 말에 초류빈이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것은 아주 이해하기 쉬운 원리라네. 다른 사람은 그의 주먹을 맞으면 견딜 수 없지만 그는 다른 사람의 주먹을 맞아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유룡생은 그의 말에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안색이 약간 변하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저쪽에서 들려오는 큰소리가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저런 발칙한 놈. 밑바닥에서 굴러먹는 놈이 감히 윗사람에게 덤벼들다니! 노부가 네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

호통소리와 함께 달려온 사람은 조정의였다.

그는 달려오자마자 텁석부리 사나이를 향해 덮쳐가려 했으나 그보다 앞서 초류빈의 서릿발같이 차가운 음성이 주위를 진동시쳤다.

"만약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의 비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은 염라대왕의 최후 통첩과 같은 것이었다.

즉시 신형을 멈추며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외쳤다.

"당신이 데려온 노재(奴才)가 윗사람에게 무엄한 짓을 하는 데도 당신은 비단 혼을 내주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그의 기염을 돋워 주다니 강호의 공도(公道)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소?"

초류빈은 그와 대조적으로 안색이 차분하게 변했다.

"강호의 공도가 도대체 무엇이오? 두 사람이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게 공도란 말이오?"

조정의는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억제하기 힘드는지 전신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분명히 말하겠지만 이것은 쌍방이 무예를 겨루는 게 아니라 서로 마음을 합쳐 발칙한 녀석을 혼내 주는 것이 그 목적이오!"

초류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허허...조대협이 정녕 그를 혼내 주고 싶으면 진대협과 교대를 해서 직접 그와 겨루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조정의는 발끈 화를 냈다.

"저 따위 잡것도 나와 겨룰 자격이 있단 말이오?"

"그는 잡것이 아니라 엄연한 사람이오."

초류빈은 싸늘한 음성을 내뱉으며 경멸의 빛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조정의를 쏘아보았다.

"조대협도 그와 다른 곳이 없는데 혹시 잡것이 아니오?"

조정의는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며 울화통이 터져 코가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발전되자 호유성은 계속 침묵만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가 막 입을 열려는데 갑자기 펑! 하는 굉음이 들리며 싸움을 전개하고 있던 두 사람은 정면으로 일 장을 교환했다.

우렁찬 굉음과 함께 진효의는 진동의 힘에 의해 뒤로 비실비실 일곱 자 가량 물러나 폭싹 땅에 주저앉았다. 그것을 본 조정의와 호유성은 깜짝 놀라 일제히 앞으로 달려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한편 텁석부리 사나이는 제자리에 우뚝 선 채로 싸늘하게 외쳤다.

"또 나를 혼내 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어디 나와 봐라!"

유룡생은 뒷짐을 지고 밤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진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보아하니 오늘은 어르신네들이 쌍것을 혼내 주는 게 아니라 쌍것이 어르신네들을 혼내 주는 결과가 되었군."

이때 진효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조정의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소곤거렸다.

잠시 후, 조정의는 대뜸 횃불같이 형형한 눈빛으로 텁석부리 사나이를 노려보았다.

"네가 강호에서 보기 드문 절학을 터득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진대협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너에게 암산을 당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가소로운 듯 싸늘히 웃었다.

"너희들은 패하면 남의 암산을 당했다 하는군. 만약 내가 패했다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 하겠지. 흥! 가소롭기 짝이 없다!"

조정의의 눈에선 한 가닥 악독한 광채가 번뜩였다.

"철(鐵)가야, 노부는 그래도 너의 목숨만은 살려 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구나!"

텁석부리 사나이는 상대방이 자기의 성(姓)을 입 밖에 내뱉자 안색이 급변했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에 불과할 뿐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외쳤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사는 것에 대해 이미 싫증을 느꼈다. 비장한 수단이 있다면 지금 당장 전개하라!"

조정의는 독기가 서린 눈빛으로 그를 한동안 노려보더니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흐...내가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네놈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더니 그는 진효의를 부축하고 곧 몸을 돌렸다.

그러자 호유성은 황급히 그의 앞으로 달려가 어쩔 줄 모르는 웃음을 지었다.

"형님들, 화만 내실 게 아니라 자초지종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효의는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우리 부자 두 사람이 모두 보기좋게 당했는데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호유성은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어 손등으로 연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훔쳤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진효의와 조정의는 이미 멀리 벗어나 있었다.

초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제가 돌아오자마자 말썽을 부려 미안합니다. 진작 이럴 줄 알았다면....."

울적해 있던 호유성은 돌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현제, 그런 말 말게. 우리 형제가 언제 말썽을 두려워한 적이 있는가?"

"하지만 형님의 입장이 난처....."

초류빈은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호유성은 그가 말을 맺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현제, 내 염려는 말게. 자네가 무슨 일을 하든 나는 늘 자네 편에 서 있네."

초류빈은 뜨거운 피가 가슴 밑바닥에서 용솟음쳐 올라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호유성은 텁석부리 사나이를 힐끗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 눈치였으나 고개를 한 번 내두르더니 화제를 돌렸다.

"날이 곧 밝아올 것이니 오늘밤은 매화도가 나타나지 않을 모양이군. 자네들도 긴 여로에 몹시 지쳐 있을 테니 일찍 가서 쉬도록 하게."

그는 이미 울적한 심사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는 이미 사람을 시켜 청죽헌을 말끔히 청소해 놓았네. 하지만 자네가 만약 냉향소축에서 기거하길 원한다면 설낭자를 당분간 벽운과 함께 있게 하겠네."

초류빈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럴 필요없습니다. 청죽헌이면 되겠습니다."

호유성은 다시 텁석부리 사나이에게 시선을 돌렸으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무슨 근심스러운 일이 있는지 안색이 몹시 울적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잎은 출렁이는 파도와도 같다. 서걱서걱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를 듣노라면 제아무리 낙천적인 사람도 다소 처량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십 년 만에 돌아온 초류빈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콩알만한 등잔 불빛 아래서 보니 그의 눈가를 수놓은 주름살은 더욱 깊게 보인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 침묵이 길수록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텁석부리 사나이는 큰 결심을 내린 듯 입술을 깨물며 한마디 내뱉었다.

"도련님, 저는 어쩔 수 없이 떠나야겠습니다."

초류빈의 눈가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떠나겠다고? 자네도 떠나겠단 말인가?"

텁석부리 사나이의 안색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직전의 하늘빛과 같았다.

"저는 도련님 부자의 대은을 받아 원래는 남은 생애를 도련님께 바칠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그는 처연한 눈길을 허공에 힐끗 던지며 괴로운 심정을 억눌렀다.

"조정의, 그들은 저의 내력을 알아차린 게 분명합니다. 지금 쯤 그들은 이미 저의 원수들에게 모든 사실을 통지했을 겁니다. 저는 생사를 심중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초류빈이 그의 말을 이었다.

"자네는 나에게 화를 끼칠까 봐 떠나려는 게 아닌가? 어서 말해 보게."

텁석부리 사나이는 육중한 허우대를 들먹거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은 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위인이라는 것을 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십여 년 전의 그 사건은 저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도련님도 저와 함께 남의 손가락질을 받게 할 수 있겠습니가?"

"무엇인가? 그를 괴롭히고 있는 십여 년 전의 사건은 그것은 조정의가 말했던 것과 관계있는 것이 분명한데."

초류빈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장탄식을 했다.

"그것은 자네가 무의식중에 저지른 실수가 아닌가? 그동안 자네가 겪은 고통으로써 충분히 죄값을 치렀다고 생각하네."

텁석부리 사나이는 다시 씁쓰레하게 웃었다.

"도련님께선 비록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지만 다른 사람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호의 혈채(血債)는 피로써 씻어야만 해결되는 것이다.

그는 초류빈이 입을 열기 전에 다시 말했다.

"더군다나 저는 그 매이선생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그는 부상을 입은 채 떠났으니 아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는 도련님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저도 그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초류빈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한동안 후였다.

"그럼 자네는 어디로 갈 작정인가?"

"글쎄요. 지금으로선 저도 일정한 목적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말한 그는 돌연 히죽 웃었다. 사실, 그는 갑자기 떠나기로 작정했기에 미리 갈 곳을 정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는 절대 멀리 떠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달이 밝은 밤이면 술단지를 안고 도련님을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자네의 말을 믿어도 되겠나?"

"사나이로서 어찌 일구이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텁석부리 사나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모두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개를 돌렸다. 영웅들의 이별은 때로는 여인의 이별보다도 더욱 단장의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들이 이별의 슬픔을 내색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초류빈은 이별의 아쉬움을 감추려는 듯 눈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떠나겠다니 나도 말리지 않겠네. 하지만 자네를 밖에까지 전송해 주고 싶네."

길게 뻗친 길, 그 길에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첫닭이 우는 소리에 대지는 깨어났다.

하지만 하늘색은 여전히 어둡다. 보아하니 오늘도 햇빛이 보일 것 같지 않다.

이 길은 어젯밤과 같이 여전히 조용하다. 비록 간혹 멀리서 들려오는 닭울음 소리와 초류빈의 기침소리가 정적을 깨지만 질식할 것 같은 고요의 문을 열게 할 수는 없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홀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헤어지지 않는 연회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도련님...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초류빈은 등 뒤로 그의 말을 들으며 계속 앞으로 몇 걸음 더 걸어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길 끝쪽에 외로이 서 있는 고목을 한동안 넋빠진 사람처럼 응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돌아가겠네. 자네...부디 몸조심하게."

담담한 음성이었으나 그 안에는 사나이의 뜨거운 정이 물결치고 있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거렸다.

"도련님도 몸조심하십시오."

그는 더 이상 초류빈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없어 고개를 숙인 채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십여 걸음 걸어가더니 그는 걸음을 멈추며 다시 몸을 돌렸다.

"도련님, 다른 일이 없으시다면 계속 이곳에 머물러 계십시오. 어찌 되었든 호어르신네는 나무랄 데 없는 사내대장부이며 도련님의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초류빈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호유성 같은 친구가 있는 한 내가 바랄 게 뭐 있겠는가?"

텁석부리 사나이는 감정을 억제하려는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도련님이 이곳에 남아 계시겠다고 결정하셨다면 저는 빠른 시일 내에 도련님을 뵈러올 것입니다."

초류빈은 씁쓸히 웃었다.

"나는 갈 곳도 없어 이곳에 오래 머물게 될 걸세."

그는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울음보다도 처량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휙 몸을 돌려 이를 악물고 앞을 향해 달려갔다.

날은 밝았지만 공기는 더욱 차가웠다.

죽은 듯한 회색 하늘이 무거운 중량에 억눌려 금방 무너질 것만 같다. 그러나 텁석부리 사나이의 심정은 하늘색보다 더욱 흐리고 무거웠다. 그가 무슨 이유로 인해 도망을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는 다시 끝없는 도망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이미 초류빈과 함께 십 년이란 세월을 도망다녔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도망생활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일장의 무시무시한 악몽이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그러나 지나온 십 년 동안 그는 최소한 초류빈과 함께 있었기에 다소 마음의 의지가 되었다. 한데, 지금은 완전히 홀로 떨어져 있다. 그가 만약 겁 많은 졸부였다면 도리어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어떠한 일도 이런 고독한 도망생활의 고통과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몸소 체험한 그이기에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죽음보다 더한 것이다. 그런 절망적인 고독은 사람을 속박해 미치도록 만든다.

그는 죽을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는 도망가지 않을 수가 없다. 초류빈이 새로운 안정을 되찾은 이 마당에 그는 어떠한 고통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초류빈에게까지 폐를 끼칠 수가 없었다.

지금 그는 앞으로의 거취를 조용히 생각해야 원칙이거늘 자신에게 조용한 시간을 줄 용기가 없었다. 때문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을 찾는 것이 시급했다.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함께 어울려 호흡한다는 것은 종종 두려움이나 고독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 목적지도 없이 계속 앞으로 달렸다.

얼마 동안 달렸을까. 그는 시장바닥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는 여지껏 살아 오면서 많은 곳을 다녀보았다.

사람의 코가 얼어 떨어질 정도로 추운 흑룡강(黑龍江)도 가 보았으며 가장 더운 지방으로 알려진 토노번(吐魯蕃)에는 칼자국을 남겼다.

그는 태산(泰山) 절정에 올라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인적이 없는 바닷가에서 해가 떨어지는 광경도 본 적이 있다.

그는 심지어 황산유곡(黃山幽谷)에서 미개한 야만인같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육(生肉)을 뜯어먹기도 했다.

그러나 시장바닥에 온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겨울날 아침, 아마 시장바닥보다 사람이 붐비는 곳은 드물 것이다. 어느 누구라 해도 이런 곳에 오면 고독하다는 느낌이 사라질 것이다.

이곳에는 어린애를 업은 아낙네, 지렁이를 쥔 할머니, 온몸이 기름으로 뒤범벅 된 요리사, 머리기름 냄새를 물씬 풍기며 미꾸라지처럼 쏘다니는 계집애 등이 대집단을 이루고 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모두 장바구니를 들고 몸과 몸을 비벼대며 지나간다. 반찬거리를 사러 나온 촌부(村婦)가 고기를 파는 도부(屠夫)와 한 푼을 깎기 위해 얼굴이 붉어져 있는 광경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공기 속엔 생선의 비린내, 싱싱한 야채의 흙냄새 그리고 닭과 오리 몸에서 나는 그 특유의 악취로 충만되어 있다. 시장바닥에 와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많은 냄새가 종합되어 풍기는 의미를 음미하지 못할 것이다.

텁석부리 사나이의 마음은 다소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냄새, 이 왁자지껄한 소리는 모두 선명한 생동이며 생명의 활력으로 가득차 있다.

세상에는 어쩌면 삶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자, 목을 매 다는 자, 쥐약을 삼키는 자...그러나 절대 시장바닥에서 자살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텁석부리 사나이는 잠시 모든 것을 잊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만두가 먹고 싶어졌다.

그가 만두가게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앞쪽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우렁찬 음성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신선한 고기가 있습니다. 신선한 고기를 사십시오."

그것은 고기장수가 호객하는 소리였다. 한데 무슨 까닭인지 사람들은 겁에 질린 모습으로 분분히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어른들의 안색은 잿빛으로 변해 있고 어린애들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뒤쪽에 있는 사람이 화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오? 무슨 일이기에 그다지도 놀란 표정들이오?"

앞쪽에서 달려온 사람은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대꾸했다.

"누가 고기를 팔고 있소."

그 말을 들은 뒤쪽에 있는 자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 시장바닥에서 고기를 파는 사람이 수십 명이 넘는데 뭐가 대수롭다고 겁에 질려 있소?"

앞쪽에서 달려온 사람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그 자가 파는 고기는 짐승 고기가 아니라 사람 고기요."

시장바닥에서 사람고기를 팔다니.

텁석부리 사나이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위엔 사람들이 더욱 많이 몰려들었다. 두려움을 느끼기엔 호기심이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텁석부리 사나이도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다가갔다. 돌연 그는 무엇을 보았는지 안색이 변했다. 주위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는 더욱 놀란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꽂혀 있는 곳에는 몸집이 크고 뚱뚱한 외눈박이 부인이 손에 육중한 칼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근육 투성이이며 한 줄기의 칼자국이 검은 안대를 낀 오른쪽 눈가에서부터 입언저리까지 역력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칼자국으로 인해 언제나 징그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여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염라대왕이 보내온 악귀라 하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그녀 앞에 놓인 커다란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황소나 양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이다.

그 자의 옷은 홀랑 벗겨져 가련할이만큼 창백한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줄기줄기 뚜렷이 셀 수 있는 갈비뼈는 쉴새없이 경련이 일고 앙상한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도마 위에 웅크리고 있는 자는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남자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에서 뼈를 뺀다면 살가죽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외눈박이 부인은 왼손으로 닭잡듯이 그의 목을 움켜쥐고 오른손은 칼을 높이 들어올린 자세였다. 그녀의 외눈에는 원한의 빛이 가득차 있고 또한 살기로 충만되어 있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그녀를 보자 마치 무덤에서 나온 귀신을 만난 듯 즉시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며 일순간에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외눈박이 부인도 그를 보자 얼굴에 그려진 칼자국이 홀연 핏빛으로 변하더니 입가에 징그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나리, 고기를 사러 왔소?"

그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싶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너무 놀란 탓인지 아무 대답이 없다.

외눈박이 부인은 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호호호... 물건을 식별할 줄 아는 사람에게 물건을 판다는 말이 있듯이 나리를 제외하고는 이 고기를 살 사람이 없을 것이오. 그래서 내 미리 나리가 오기를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소."

텁석부리 사나이는 그제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형수님....."

형수님이란 세 글자가 입 밖에 나오자 외눈박이 부인은 느닷없이 가래침을 뱉어 정확하게 텁석부리 사나이의 얼굴에 가 떨어졌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물론 피할 수도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까닭을 생각지도 않고 도리어 고개를 떨구었다.

외눈박이 부인의 성난 호통소리가 뒤따랐다.

"무엇이? 형수님이라고? 내가 어째서 친구를 팔아 먹은 짐승만도 못한 놈의 형수냐! 다시 한번 형수라고 부른다면 우선 너의 혀를 도려내겠다!"

텁석부리 사나이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감히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외눈박이 부인은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옹천검(翁天劍)을 배신한 대가로 그동안 필시 많은 재산을 모았을 것이니 고기를 몇 근 살 용의는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잡아올리며 다시 징그럽게 웃었다.

"만약 네가 사지 않겠다면 나는 하는 수 없이 이 녀석을 개한테 먹이겠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그제서야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재차 질겁을 하며 외쳤다.

"앗! 매이선생...당신이....."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자는 바로 초류빈의 생명을 구해 준 바 있는 매이선생이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매이선생의 몰골을 보자 콧등이 시큰해지며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매이선생, 어떻게 해서....."

외눈박이 부인의 노갈이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잔소리는 집어치워라! 이 고기를 살 테냐? 사지 않을 테냐? 그것만 대답해라!"

텁석부리 사나이는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길게 숨을 들이켰다.

"어떤 방법으로 팔 생각이오?"

외눈박이 부인의 대답은 야멸찼다.

"네가 요구하는 대로 팔겠다. 한 근을 요구하면 한 근의 값을 치러야 되고 열 근을 원한다면 열 근 값을 지불해라!"

그녀는 말을 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식칼을 콱!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식칼은 도마 속으로 깊이 박혔다. 약 반 치만 간격이 빗나갔어도 매이선생의 목은 여지없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외눈박이 부인은 눈을 부라린 채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네가 치러야 할 대가는 바로 너 자신의 피와 살이다."

텁석부리 사나이의 얼굴엔 경련이 일었다.

"내가 만약 그의 전체를 원한다면 어떻게 하겠소?"

외눈박이 부인의 음성은 그녀가 들고 있는 칼날보다도 더 날카로웠다.

"그의 전체를 사겠다면 지금 당장 나를 따라와라!"

텁석부리 사나이는 무슨 결심을 한 듯이 이를 악물었다.

"좋소. 당신을 따라가겠소."

외눈박이 부인의 입가엔 다시 징그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네가 현명하다면 나를 순순히 따라가는 게 좋을 것이다. 십여 년 동안 이 잡듯이 방방곡곡을 뒤져 겨우 너를 찾아냈는데 쉽사리 도망갈 것이라 생각하면 그건 크나큰 오산이다."

외눈박이 부인의 음성에는 심장을 찢어발기는 듯한 원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당신에게 발각된 이상 절대로 도망가지 않겠소."

산기슭을 끼고 일기의 황량한 묘지가 보인다.

주위에 보이는 것은 군데군데 솟아 있는 크고 작은 무덤뿐.

이곳엔 한 채의 쓰러져 가는 목옥(木屋)이 있었다. 원래는 무덤을 지키는 자가 기거하는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같은 엄동설한, 심지어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귀신들?마저도 추위를 두려워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는 판인데 무덤을 지키는 사람은 자연히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을 것이다.

목옥 처마에는 줄기줄기 고드름이 영글어 매달려 있었다. 뼈를 깎는 듯한 찬바람이 나무 틈새로 불어닥쳐 칼날보다 더 심한 한기를 느끼게 한다.

이런 날씨에 이 목옥에서 반 시간만 머문다 해도 아마 얼어 죽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한 사람이 머물고 있었다. 그것도 오래 전부터.....

목옥 안에는 낡은 나무로 만든 탁상이 놓여져 있다. 탁상 위에 놓인 물건은 시커먼 항아리였다.

그 사람은 석고상처럼 탁상 앞에 무릎을 꿇고 넋빠진 사람처럼 시커먼 항아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은 누더기가 되어 버린 솜옷, 털모자를 쓰고 허리엔 한 자루의 도끼가 걸려 있었다.

부엌 안쪽 구석에 땔감이 쌓여져 있지만 불을 피우진 않았다.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나이, 그의 차림새는 영락없는 나무꾼이다. 하지만 까무잡잡한 얼굴이며 높이 솟은 광대뼈. 짙은 눈썹 넓은 이마, 하마를 연상케 하는 코, 입, 더욱이 예리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조금도 나무꾼 같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엔 비분과 원한의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탁상 위에 올려져 있는 항아리만 주시할 뿐, 뼈가 녹아내리는 듯한 강추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시 후 목옥 밖에서 사그락사그락 눈을 밟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나무꾼 차림을 한 사나이는 즉시 도끼자루에 손을 대며 무겁게 외쳤다.

"누구냐?"

목옥 밖에서 외눈박이 부인의 흥분되어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나예요."

나무꾼은 신색이 금세 긴장되더니 다그치듯 물었다.

"그 녀석은 성 안에 있습디까?"

외눈박이 부인의 음성은 찬바람과 함께 목옥 안으로 전해왔다.

"이번에 들은 소식은 정확했어요. 내가 지금 그를 데려왔으니 어서 문을 여세요."

나무꾼은 벌떡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외눈박이 부인과 텁석부리 사나이가 전후로 해서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의 몸엔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밖에는 다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무꾼은 텁석부리 사나이를 보고 순간 눈에서 불꽃이 튕겼다. 그 불꽃은 이내 시퍼런 비수가 되어 텁석부리 사나이의 얼굴에 꽂혔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무꾼은 돌연 몸을 돌리더니 다시 폭싹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엔 어느 새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돌연, 문 밖에서 다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외눈박이 부인이 날카롭게 물었다.

"누구냐?"

"일곱째와 접니다."

마치 꽹과리를 치는 듯한 뾰족한 음성과 함께 두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한 사람은 곰보로서 등에 커다란 바래 광주리를 짊어지고 있으며 한 사람은 대나무처럼 깡마른 자로서 두부 장수임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은 야채시장에서 줄곧 텁석부리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텁석부리 자신은 번잡한 생각이 가슴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유의하지 못했었다.

두 사람은 방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텁석부리 사나이를 노려보았다.

배추를 파는 곰보가 대뜸 그의 멱살을 잡고 싸늘하게 외쳤다.

"철가야,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

"그를 놓아 주세요. 모든 사람이 당도한 후에 일을 해결하도록 해요."

외눈박이 부인의 말에 곰보는 입술을 깨물더니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탁상 위에 놓여 있는 검은 항아리를 향해 공손히 큰절을 세 번 올렸다. 그의 눈에도 역시 뜨거운 이슬이 번졌다.

항아리!

대체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길래 이들이 신주 모시듯 하는 것인가?

그로부터 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줄을 이어 세 사람이 더 나타났다. 약상자를 등에 짊어진 자, 술과 간단한 안주 따위를 담은 상자곽을 메고 온 자, 그리고 한 사람은 사주관상을 보는 장님이었다.

이 세 사람도 텁석부리 사나이를 보자 이를 부득부득 갈며 분노로 인해 표정이 일그러졌으나 공손히 검은 항아리를 향해 큰절을 올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깥은 설광(雪光)으로 인해 그런대로 밝았지만 목옥 안은 어둠침침하여 심지어 음산한 귀기마저 감돌았다.

일곱 사람은 한결같이 푸르뎅뎅한 안색으로 탁상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으스러지도록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지옥에서 복수를 하기 위해 뛰쳐나온 악귀와도 같았다. 철전갑도 만면에 비통한 신색을 담고 고개를 숙인 채 침묵만 지쳤다.

침묵이 흐를수록 음산한 분위기는 더욱 짙어갔다.

외눈박이 부인이 돌연 침묵을 깼다.

"시간이 많이 경과되었는데 셋째는 왜 아직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까요?"

배추를 파는 곰보 사나이가 대답을 했다.

"그에게도 소식을 보냈으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달려올 것입니다."

외눈박이 부인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아직....."

이번에는 사주관상을 보는 장님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우리는 이미 십여 년 간 이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외눈박이 부인도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십여 년...십여 년....."

그녀가 거듭해서 중얼거리는 음성은 점점 비통하게 변해갔다.

"그동안 나는 철가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애석하게도....."

그는 창백한 얼굴에 일진의 경련을 일으키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는 지금 어떻게 변해 있는지 넷째, 자네가 상세하게 얘기해 주겠나?"

약상자를 메고 온 사나이가 이를 갈면서 설명해 주었다.

"보기엔 십여 년 전과 별로 달라진 데가 없습니다. 단지 수염이 더 길어졌고 살이 약간 쪘을 뿐입니다."

장님은 천장을 우러러 몸소리를 치게 하는 웃음을 지었다.

"좋아, 좋아... 철가야, 그동안 나는 매일 하늘을 향해 네가 별고 없기를 기원해 왔다. 보아하니 하늘은 과연 나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 모양이구나."

외눈박이 부인은 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내 남편 옹천검을 배신한 대가로 필시 한 밑천 잡았을 것이지만 우리가 그동안에 겪은 피나는 고통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야....."

중얼거리듯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옆에 서 있는 술장수를 가리켰다.

"예전에 안락공자(安樂公子)로 알려진 다섯째는 술장수로 변모했고 둘째는 앞 못 보는 장님이 되었으니...이 모든 일을 너는 아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무꾼이 냉랭하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덕분인데 그가 어찌 생각을 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철전갑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아니, 눈을 감히 뜰 수 없기 때문에 감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눈을 뜬다면 불타고 있는 가슴과 같이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이다.

그가 십여 년 동안 겪은 고통은 또한 누구에게 하소연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때, 밖에서 한 사람의 흥분에 들뜬 외침이 들려왔다.

"형수님, 형수님...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누군가가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은 외눈박이 부인은 즉시 밖을 향해 고함쳤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시끄러워요?"

"난 조금 전에 철면무사 조정의를 보았소. 그가 말하기를 그 철가란 작자는 바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흥분된 얼굴로 한 인물이 헐레벌떡 달려들어 왔다. 그는 여덟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무림인의 형색을 하고 ?있었는데 등 뒤에는 이화대장을 메고 있었으며 키가 다른 사람보다 절반이나 더 큰 자였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중간에서 말을 뚝 멈추고 말았다. 자기가 찾으려 하는 사람인 철전갑이 바로 방안에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외눈박이 부인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물었다.

"미처 생각지 못했겠지요?"

"조정의가 말하기를 그는 호유성의 집에 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그가 여기에....."

경장대한은 너무도 뜻밖이라는 듯 망연자실하다가 갑자기 외눈박이 부인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다그쳐 물었다.

"형수님, 형수님께선 어떻게 해서 그를 찾아내셨습니까?"

"그건 용신묘(龍神廟)의 노오구가 말하기를 그가 벌써 초류빈과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시종 그의 뒤를 미행하다가 마침 그가 초류빈과 헤어지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손을 써 버렸지요."

외눈박이 부인은 득의한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장님이 음침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 뒤에 덧붙였다.

"이것이 바로 조물주께서 그에게 내린 벌이다."

"그놈이 결국은 우리 중원팔의(中原八義)의 수중에 걸려들었군.아아...이제야 옹대가의 원한을 갚게 되었구나."

이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갑자기 그 검은 항아리 앞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일곱 사람도 일제히 무릎을 꿇으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항아리, 그 안에는 옹천검이라는 자의 유골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한참 후, 경장대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철전갑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철전갑, 너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느냐?"

"당신도 잘 있었소?"

철전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경장대한은 울분이 터절 듯한 모습으로 차갑게 말했다.

"난 물론 잘 있었다. 나 변호(邊鎬)는 평생 나쁜 일이라고는 한번도 한 적이 없는데 왜 너처럼 자라새끼 모양 고개를 움츠리고 살겠느냐?"

그러자 곰보장한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소리쳤다.

"셋째 형, 그놈과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일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속히 그놈의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서 하늘에 계신 큰형님의 영혼에게 제사나 지내도록 합시다."

"일곱째, 자네는 그 말을 잘못했네. 우리 형제들은 무슨 일이건 항상 광명정대하게 처리해야 하네. 그리고 설사 그를 죽인다 해도 그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도록 해 주어야 하네."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장님이 냉큼 말을 받았다.

"맞았어. 우리 기왕 십여 년이나 기다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몇 시진 더 기다린다고 뭐가 그리 어려운가?"

장님의 이 한마디가 나오자 나머지 사람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외눈박이 부인이 다그치듯 물었다.

"그럼 셋째의 뜻은 어떻게 하면 좋다는 거예요?"

변호는 정색을 하더니 차근차근하게 대답했다.

"우린 이 일에 대해 분명한 사실을 알아내야 할 뿐만 아니라 또 몇 명의 중인을 데려와 그들의 의견도 한번 물어봐야 하오. 만약 그들도 철가놈이 백번 죽어 마땅하다고 판결을 내리면 그때 가서 그를 죽여도 때는 늦지 않소."

이 말을 들은 곰보장한이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묻기는 뭘 묻는다는 거냐? 그의 죄는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는데....."

이번에도 장님이 변호의 두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기왕 그의 죄가 명백하게 드러났다면 한번 물어보는 것이 또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곰보장한은 빨리 죽이지 못하는 것이 원통한 듯 이를 부드득 갈며 물었다.

"한데...누구를 증인으로 찾아오려는 것이오?"

변호가 얼른 대답했다.

"우리가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공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 우리 중원팔의나 철전갑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어야 하오."

그러자 외눈박이 부인이 미간을 찡그리며 재촉했다.

"찾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빨리 얘기해 봐요."

변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나왔다.

"첫째는 바로 철면무사 조정의요.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철전갑이 차갑게 웃으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너희들은 번거롭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없이 아예 속시원히 나를 죽여라. 나는 확실히 과거에 옹천검에게 잘못한 것이 많아 지금 죽어도 억울할 것은 없다."

외눈박이 부인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의 말투를 들어보니 아직 조정의에게 불만이 있는 것 같군."

"조정의가 기왕 셋째에게 그의 행적을 보고했다면 반드시 그와 무슨 갈등이 있었을 것이오. 그런 그가 어찌 공정한 공도(公道)를 할 수 있겠소?"

변호는 조금도 반박하지 않고 장님의 말을 받았다.

"기왕 그렇다면 조정의 말고 또 다른 두 사람을 찾읍시다."

변호는 아무도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대관루(大觀樓)에서 철판쾌서(鐵板快書)를 논하는 노선생으로 이런 일에 대해서는 일대의 명가(名家)요, 그러면서도 강호인과는 아무 관련도 없소. 그리고 또 하나는 처음 강호에 나선 청년인데....."

여기까지 들은 외눈박이 부인이 금세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가로챘다.

"처음 강호에 나선 애송이가 뭘 안다고 그러세요?"

"그 청년이 비록 처음 강호에 나서기는 했으나 성격이 강인하여 절대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지 않소. 그리고 내 그와 사귄 지가 불과 이틀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의 행동은 극히 광명정대하였소."

변호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외눈박이 부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흥! 사귄 지가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남을 그렇게 믿다니, 알고 보니 셋째 아주버니의 친구 사귀기 좋아하는 버릇은 여전하군요."

이렇게 말하던 외눈박이 부인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만약 셋째 아주버니가 이 철가놈을 좋은 친구라 믿지 않고 또 데려오지 않았다면 옹천검이 어찌 그의 손 아래 목숨을 잃었겠어요?"

변호는 그녀의 호통을 듣자 더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푹 숙여 버리고 말았다.

장님은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얼른 입을 열었다.

"일이야 어찌 되었든 몇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오겠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의견이 아니오. 그리고 우리 중원팔의는 절대 함부로 살인을 해서는 안 되오. 하물며 셋째는 이미 남을 청해 왔으니 우리는 절대로 남이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오."

외눈박이 부인은 뜻밖이라는 듯이 한쪽만 남은 눈을 더 크게 떴다.

"벌써 사람을 청해 왔다고?"

변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난 원래 그들을 전부 다 호유성이 있는 쪽으로 청해 가려 하였소. 그런데 뜻밖에도 형수님이 벌써 철가놈을 잡아 놓았으니....."

외눈박이 부인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문 밖을 향해 소리쳤다.

"세 분께선 기왕 오셨으니 어서 들어오시오."

한편 철전갑은 더 이상 눈을 뜨지 않기로 내심 맹세를 하였다. 죽으면 죽었지 더 이상 그는 철면무사 조정의의 꼬락서니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두 눈을 꽉 감은 채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첫 번째 사람의 발걸음은 무게가 있었다.

그리고 하체가 날렵한 것을 보니 철면무사 조정의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조정의는 북쪽 지방의 호걸이라 특기가 두 다리를 잘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람의 발자국소리는 약간 크게 들렸다. 하지만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여 매우 둔한 느낌이 들었다. 보아하니 이 자에게 설사 무공이 있다 해도 역시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닐 것이다.

철전갑은, 세 번째 사람의 발걸음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들어온 자는 두 명밖에 안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세 번째 들어오는 사람은 걸음을 옮길 때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는 것인가.

철전갑은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결국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때 장님이 일어나며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분이 우리들의 이름을 몰라서는 안 된다."

변호가 즉시 말을 받아 세 번째 사나이를 향해 자기들을 소개했다.

"우리는 모두 여덟 형제로 강호 친구들은 오두 우리를 중원팔의라고 부르오."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장님이 불쑥 말을 꺼냈다.

"나는 둘째로서 이름은 역명호(易明湖)라 부르며 과거에는 신목여전(神木如電)이란 별호를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참담한 얼굴로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은 내 별호가 유안무주(有眼無珠)로 변하고 말았소."

뒤이어 변호가 자기를 소개했다.

"나는 셋째 보마신창(寶馬神槍) 변호라 하오."

약장사 차림을 한 자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넷째 금풍백(金風白)이오."

이때 노선생이 갑자기 말틈에 끼여들었다.

"귀하의 말투를 들어 보니 남양부(南陽府) 사람 같구려."

금풍백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노선생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아는 체를 했다.

"남양부 일첩당(一帖堂)의 금가약포(金家藥鋪)의 구충산(驅蟲散)0 은 아주 유명하오. 그런데 귀하는....."

금풍백은 고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만성원의 공자님께서도 오리발을 팔고 있는데 그까짓 일첩당쯤이야 뭐가 그리 대단하겠소?"

"그렇소."

노선생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주위를 휘둘러 보며 궁금한 듯이 물었다.

"실례지만 어느 분이시오?"

그러자 술장사 하는 자가 손가락으로 자기의 코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나요."

노선생은 이 뜻밖의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술장사는 빙긋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장승훈(張承勳)이라 하오. 그리고 나무를 캐는 나무꾼은 내 여섯째 동생으로 그의 도끼는 지금 비록 나무밖에 자를 수가 없지만 옛날에는 확실히 역벽화산(力劈華山)을 할 수가 있었소."

장승운의 말이 끝나자 곰보장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곱째로 얼굴이 이렇게 얽었다고 해서 이름도 공손우(公孫雨)라 하오."

이번에는 두부 장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여덟째로 궤탕답화(軌湯踏火) 서문열(西門烈)이라 하오. 그러나 지금은 아주 형편없이 몰락해 버렸소."

중원팔의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 노선생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런데 첫째는 어디로 갔소?"

"첫째 의박운천(義薄雲天) 옹천검은 남에 의해 피살을 당했소. 그리고 이분은 우리들의 형수님으로서....."

공손우의 눈길을 받은 외눈박이 부인이 얼른 입을 열었다.

"나는 이름이 과히 좋지 않아 여도호(女屠戶) 옹대랑(翁大琅)이라 하오. 당신은 잘 기억해 두었나요?"

노선생은 미소를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노부는 비록 나이는 먹었지만 기억력 하나는 아직 늙지 않았소."

옹대랑은 정색을 하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우리가 당신더러 우리의 이름을 잘 기억해 두라는 이유는 당신의 입을 빌려서 명성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당신의 입을 통해 만천하의 군웅들에게 우리의 피맺힌 원한을 발표해 달라는 것이오."

노선생이 놀란 목소리로 다그쳐 물었다.

"피맺힌 원한? 그렇다면 옹천검 옹대협을 살해한 자는 바로....."

공손우가 얼른 철전갑을 손가락질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바로 이 철갑금강 철전갑이오. 이놈이 우리 형님을 죽인 원흉이오."

그러자 금풍백이 안색을 굳히고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게 된 것이오. 우리 중원팔의는 친형제처럼 친하여 비록 나름대로 일이 있기는 하지만 해마다 중추절만 되면 꼭 큰형님의 산장에 모여 몇 개월씩 어울리곤 했었소."

장승훈이 말을 가로챘다.

"우리 여덟 형제는 항상 어울렸지만 화기애애하고 재미가 있었소. 그래서 다른 친구를 얻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소. 그런데 그 해 셋째 형님께서 한 사람을 데려와 아주 좋은 친구라고 우리에게 소개했소."

이 말을 받아 공손우가 저주스러운 듯이 소리쳤다.

"그 자가 바로 배은망덕하게도 친구를 배신해 혼자만의 부귀영화를 노린 철전갑이오."

금풍백이 뒤를 이었다.

"우리 큰형님은 원래 친구를 자기 생명처럼 여기는 분이었소. 그래서 철전갑의 사내다운 외모만 보고 곧 그를 형제처럼 대했소이다. 그런데...그는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의 짐승이었소!"

장승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철전갑을 노려보았다.

"설이 지난 후 우리는 모두 흩어졌소. 그런데 큰형님은 철전갑이 일정한 거처가 없어 몇 달 더 머물라고 권했소이다. 한데 뜻밖에도 저놈은 암암리에 큰형님의 원수와 서로 내통하여 야밤중에 습격을 감행, 우리 형님을 살해하고 옹가장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 것이오. 우리 큰형수님은 요행 목숨은 잃지 않았으나 역시 중상을 입고 말았소."

말이 끝나자 옹대랑은 비통에 가득찬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내 얼굴의 이 험악한 칼자국을 보았겠죠? 나는 칼날에 하마터면 머리가 두 조각이 날 뻔했어요. 그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나 역시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공손우가 이를 부드득 갈며 외친다.

"당시 옹가장의 사람은 전부 살해되었는 데도 흉수가 누구인지 몰랐소. 그러니 그 수법이 얼마나 악랄했겠소?"

금풍백이 눈물을 글썽이며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우리 형제들은 그 사건을 안 후 즉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맹세코 큰형님의 원수를 갚자고 하였소. 십여 년이 흐른 지금 결국 하늘도 무심치 않아....."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것을 본 옹대랑이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물어왔다.

"이제 우리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얘기했어요. 그러니 세 분은 철전갑을 죽여야 할지 아니면 살려 줘야 할지 명확한 판단을 내려 주세요!"

조정의가 먼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힘주어 말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철전갑을 천 토막으로 내도 극히 당연한 일이오."

조정의의 말에 공손우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소리쳤다.

"당신은 우리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오? 믿지 못하겠거든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보시오!"

철천갑은 조정의가 직접 묻는 것이 싫은 듯 이를 악물고 부르짖었다.

"내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옹대가에게 분명히 죄를 지었으니 아무 원망없이 죽겠다!"

공손우는 악에 받쳐서 길길이 날뛰며 눈을 희번득거렸다.

"자! 모두들 들었죠? 그의 입으로 말하는 것을 말이오!"

그러자 조정의가 엄숙한 목소리로 최후의 판결을 내렸다.

"그 자신이 시인한 이상 우리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노선생도 장탄식을 하며 저주스러운 듯이 맞장구를 쳤다.

"이 늙은이는 별별 얘기를 다 들어보았지만 이렇게 악랄하고 정의를 모르는 사람의 얘기는 난생 처음이오."

옹대랑이 안면 근육을 파르르 떨며 확인하듯 물었다.

"그렇다면 세 분께서는 다 철천갑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신다는 말이군요?"

노선생이 먼저 기분좋게 대답했다.

"그렇소!"

조정의도 치를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땅히 난도질을 하고 강호에 공표를 해야 합니다."

바로 이때였다. 돌연 한 사람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귀하는 시종 강호, 강호 하는데 귀하 혼자만으로 전체 강호를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